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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역사 5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7:18

성신의 역사 5

 

김홍전 목사

 

제5강 사도행전 10장 1-8절

 

우리는 그동안 주일 날 아침에, 우리의 신앙의 실천 생활상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 나가는데 특별히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건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금 생각해 가는 중이올시다.

이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 또 그 인도하신다는 그 사실, 이것이 우리 생활에서 현실적인 중요한 문제로, 진실히 주를 의지하고 살려하는 사람들이 누구든지 깊이 생각지 아니할 수 없는 문제올시다. 특별히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그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여러가지 것들을 보존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려고 그리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 증거하시고 우리에게 찬송과 감사와 그 여러가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심정을 일으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성신님의 특별한 은혜요. 또 이 시대 혹은 새로운 하나님의 경륜의 시기, 소위 그 오이코노미아(οικον ομια)라는 것, 이런 시기에 있어서 우리의 가지는 한 큰 특권인데 이러한 특권이 우리에게 바로 늘 행사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을 그릇되게 생각해 가지고 함부로 이루다가는 어느 때는 하나님 앞에 더 큰 책망과 또 괴로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올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성신님의 가르치심 혹은 인도, 이 둘을 서로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같이 놓고 생각해 나가는데 먼저는 가르치신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 주의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이 오묘한 도리인 까닭에 그 한가지 한가지 조목의 조건들을 들어서 설명을 해 갈 때에 나중에 전체를 종합해서 생각하기가 어려우므로 제 일착으로 우리가 비교적 기억하기 쉽고 알기 쉬운 방법으로 종합적으로 일일이 고증을 하고 설명을 안하더라도 큰 제약이 없겠습니다.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사 가르치신 이 사실을 바로 먼저 이해해야 해요. 무릇 성신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은 직접이오 간접인 여러 현상이 있는데 주로 성신님의 역사가 유기적인 역사라, 이것이 특색있는 그리고 보편적인 역사올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신님은 따로 계시고 나는 따로 있어서 내 의지는 반드시 성신의 의지와 같지 않게 움직여 나가는데, 성신님이 의지를 보이시고 네가 이렇게 따라 가겠느냐 반대하겠느냐? 네가 네 마음대로 가겠느냐? 나를 좇아 오겠느냐? 이렇게 항상 하는 상태에서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수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성신님의 인도를 받는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성신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 결정, 의지의 발동, 행보 전체를 내가 스스로 한 것과 같을지라도 사실은 성신께서 가르쳐 주시고 힘주시고 인도하신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유기적이라는 것이오.

올게닉(organic)하게, 말하자면 따로 따로 두 개의 인격이 움직인다는 것보다도 인격자이신 그 성신님의 거룩하신 인격적인 발휘가, 즉 생각하시고 또한 마음에 느낌을 가지시고 또한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는 이런 모든 인격적인 활동 그 자체가 내 것이 되어 가지고 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고 내 자신이 활동하는 것이고 내 자신이 그런 심정을 품는 것이고 이런 것이 유기적인 활동의 상태올시다. 그러므로 성신 받는다 해가지고 자기가 갑자기 홀연히 어떤 입신 상태에 들어가서 자기의 의식을 상당히 제한하고 별다른 인격의 의식이 나의 위에 군림해 가지고 나를 끌고 나간다든지 나에게 명령한다든지 이런 상태가 유기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늘 주의하세요.

왕왕이 성신님의 활동의 역사(役事)의 상태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륜의 정책이라고 할지 방침이라고 할지 그 하나님 크신 사역의 계획이라는 것이 그것이 어느 시대를 통해서든지 꼭 한가지 양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계약을 하시사 그 계약 아래에서 사람에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상태나 또한 그 진리의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따라서 즉 계시와 판례에 따라서 그들에게 어떻게 일을 하시는 것인데, 이런 하나님의 계약과 계약에 의한 거룩하신 은혜의 여러가지 방도, 방법이라는 것을 오해해 가지고 극단적으로 세분을 해서 이 세대에는 이런 조건 하에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저세대에는 저런 조건하에서 구원받고 한다는 이런 설, 이런 배제(配制), 혹은 행정이라 하는말, 디스팬세이션(dispensation) 이런 주의(主義-세대주의), 오이코노미아(οικονομια)라는 일종의 주의인데 그것이 19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부터 팽배하게 일어나 가지고 미국으로 와서 마침 한국에 선교사들이 최초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선교를 하려고 들어올 때에는 그러한 식, 새로운 주의가 마치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개혁교회의 금과 같이 빛나는 교리인 것같이 잘못 가지고-그 시대는 그것이 또 한창 창궐하던 시대니까-들어와서 그래서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전파되었어요. 우리 한국교회의 초대의 훌륭하다는 목사님들에게도 그것이 참 강렬하게 나타나서 사경(査經)한 것, 가르친 것들을 볼 때에 그런 것들이 많이 있고 모든 한국에 있는 성경학교라는 성경학교의 공부지를 보면 그때 그런 식으로 일색으로 썼어요. 그런 역사적인 원인 하에서 오늘날 여러가지 그릇된 것이 빚어진 걸 우리는 항상 통탄할 수 밖에 없는거요.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오해해서는 안돼요.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의 크신 계약 하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다루시는 어떤 방법이라는 것이 반드시 일양(一樣)이 아니다 하는 말과 가령 에덴의 무죄시대라든지 그 다음 양심세대라든지 그 다음은 인간 전국세대라든지 혹은 아브라함의 허락세대라든지 모세의 율법시대라든지 그 다음에는 은혜의 세대요 앞으로는 천년왕국 세대요, 이렇게 배제를 제 마음대로 해가지고 떠드는 것과는 전연 딴 이야기 올시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과의, 인류와의 어떤 언약하에서, 당신이 사실상 언약을 하셔야 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그렇게 가장 이지적으로, 가장 이성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에 거기에 사람에게 사람다웁게 살기 위해서 조건을 내시고 하나님도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이렇게 하면 거기에 상당한 보응이라는 것, 상당한 나의 태도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계약이 되었는데, 하나님 당신이 계약을 하실 필요가 없는 주권자시지마는 당신 스스로 당신을 낮추시사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있어서 너 이렇게 하라 그럼 나 이렇게 하마 마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헌법을 세우시는 것과 마찬가지요. 이렇게 해서 한세대의 큰 계약은, 그걸 가리켜 옛날의 계약-왜냐하면 그 계약이 경신이 되어 가지고 새로운 많은 은혜의 조건이 거기에 이제는 구체적으로 계시의 발전에 따라서 나타나는 까닭에 새로운 이 계약하에서 볼 때에는 그 전 것을 가리켜 옛날의 계약이라, 이래서 우리는 옛날의 계약을 주로 다룬 책이 옛날의 계약, 구약이오, 옛날 계약... 그러고 새로운 계약을 주로 다루어서 이야기한 것이 신약이라 그 말이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에 구약전서라든지 신약전서라 이런 말을 쓰지만...

그러면 성신님의 역사의 양상을 볼 때에 구배제에, 옛날의 오이코노미아 하에서의 하나님이 성신님께서 역사하시는 양식이라는 것이 꼭 신약에 와서 역사하시는 양식과 같지를 않다 말이오. 왜 그러느냐 하며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와 계시면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너희는 이 땅을 떠나지 말고 여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기다리고 있으라” 하시면서 승천하셨죠! 그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냐 할 때에 오순절에 베드로가 연설하면서 그것이 이 약속이다 하고서 성신의 특별하신 충만한 역사, 특별한 양식의 역사요, 이건... 특별한 스타일(style)의 역사 그걸 가르친거요.

그러며는, 그래서 오순절날 그 성신의 충만한 역사가 임한 것을 사람들이 새술에 취했다든지 이것이 무슨 일이냐고 의혹하고 알아 보기를 원할 때에, 내가 이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일러주마고 새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고 지난 번 우리가 이 강해를 했어요. 그러며는 이러한 점으로 볼 때에 성신님께서 그 세대에 어떤 양식으로 일을 하셨느냐는 것은 이게 역사적 사실을 다 들어서 설명을 하려며는 장황한 이야기가 되고 지금 우리의 문제는 현실 생활상 지금 필요한 것들을 배우는 것이오. 그러니까 그 배제에 있어서 성신님은 어떻게 역사했느냐? 그 성신의 역사의 여러가지 양식이 있어서 구약의 그 성신의 역사로 말미암은 특별한 일은 어느 때에는 삼손과 같이 아주 비상한 대력을, 물리력을 터득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있는 삼손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 이스라엘의 혼자 군대노릇을 했다 말이오. 필요할 때에 그렇게도 성신님은 역사하지마는 그것이 꼭 오늘 꼭같이 일양으로 같은 법칙하에서 언제든지 똑같이 아무 구별없이 그냥 역사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오. 가령 사울에게도 사울왕 말이오. 성신이 갑자기 임하시니까 혼자서 갑자기 예언을 하고 떠들고 그랬다 하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가 왕되기 전에... 그러한 어떤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과 오늘날 신약의 시대에 들어와서 성신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이 일양이 아닌 까닭에 성신님의 충만한 역사, 내주와 가르침과 인도하심의 역사를 마치 구약에서 보는 그 인상 그걸 갖다가 그걸 적용하고 그렇다고 그걸 가지고 함부로-자세히 연구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성신 받아야 한다, 구약의 삼손이 성신 받음으로 어떻게 되고 누가 성신 받으므로 어떻게 되고 하는 식으로 자꾸 이야기하는 것,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해요.

이래서 강조하는 것은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시라는 것이오. 그렇게 딴 인격으로 와서 제한을 하고 입신한 상태에서 나를 운전하듯이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나가는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바르게 하고 내 마음 먹는 것을 바르게 하고 내 심정을 바르게 하고 내 행보를 바르게 잡아 주시는 것이오. 그리고 그런 점은 성경을 기록한 성경기자들이 가장 풍부한 영감과 성신님의 특별하신 감동과 주장하에서 기록했던 성경을 기록할 때의 양식도 그런 것이지 모두 다 입신상태에서 자기 모르는데 딕테이트(dictate) 말하자면 서취(書取)를 시킨 것이 아니다 그 말이오. 성경에 어떤 부분이 신비하게 적접 임하는 부분이 없는 것 아니오. 모세가 가령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손가락으로 쓰셨다는 말로 표현한 계명을 받을 때에는 모세 자신의 두뇌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에서 내려오신 온전히 모세를 떠나서도 발생한 사실이라는 것이오.

그렇지마는 모세의 많은 글들은 그 모세의 생활이라든지 환경이라든지 자기 자신의 노력이라든지 궁구하고 살핀 것이라든지 연구한 것이라든지 그것이 산물인 것이오. 이사야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다니엘도 다 그래요. 그걸 떠나서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불러내 가지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무불통지(無不通知)한 상태로 쑥 들어가서 갑자기 무엇을 알고 그렇게 성신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오. 더군다나 성경을 쓸 때는 만일 그것을 성신의 영감으로 썼다는 사실을 잠깐 고사하고 두어두고 그걸 냉정하게 관찰하면 그 사람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문제가 있고, 사도 바울 선생이 많은 그런 그때의 교회들의 문제들을 가지고 듣고서 들은 다음에는 마음 가운데 이건 이렇게 해야겠다고 판단한 그걸 가르치는거요.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예의(豫議)조사가 있고 성실한 파악이 있은 다음에는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해주려고 그런거요. 이것이 개인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어디까지든지 그 사람의 작품인 것이오.

따라서 일기가성(一氣呵成), 즉흥적으로 쓱 써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오. 시간이 없고 긴박할 때에는 불가부득이 빨리 썼겠죠. 하지만 바울 선생이 가령 로마서를 썼을 것 같으면 숨을 그냥 쉬는 동안에 척척 써 가지고 딱 끝났다고 얼른 그렇게 해 가지고 카피(copy)를 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서 생각을 하고 생각한 다음에 말이 되도록 자꾸 했고 문장도 구사할 때 생각을 하는거요. 단어조차 생각한 거요. 단어를 생각한 흔적이 얼마든지 있어요. 무슨 말을 써야 정확하게 이 말이 전달될까? 오해하지 않을까? 비슷한 말이 많을 때에는 아주 말 가운데는 주의깊게 선택하는 흔적들이 다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신뢰하고 그 말에 대해서 조금만 다르면 반드시 비슷한 말하고 비추어 가지고서 비슷한 말이라고 덤팽이 공사로 얼른 넘겨 짚고 이야기하지 않는게고 이건 말이 이만큼 다르니까 그만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하는 거요. 그리고 바울 선생은 말을 참 주의시켜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그 말을 너희가 굳게 믿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으리라”고 그랬어요. 내가 전한 그 말을 믿는다. 언어라는 것이 심히 중요했다 그 말이오.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그런 것이오.

우리는 가령 예술적인 영감이란 문제를 논할 때에도 사람이 어떤 신비한 상태, 사람이 일반적인 심리학에서 얼른 해석하기 어려운 그런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오. 음악가가 음악적인 영감을 얻어야 위대한 작품을 쓰는 것이고 문필가가 훌륭한 영감을 얻어야 아름다운 글을 쓰는거요. 거기 쓸 때에 그 문필가에게 물어 보세요. 말을 선택하는가 안하는가? 오히려 리얼리즘(realism)의 스타일에 있어서는 언어가 백 가지가 있더라도 그 중에 가장 효과있는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을 그 다음에 써 넣어야 한다고. 그 유명한 플로벨(Flaubert)이 그의 제자 기드 모파상(Guyde Maupassant)을 가르칠 때에 “너는 백가지 표현에서 한 가지만 뽑아라” 그게 리얼리즘이라고... 그러니까 모세(?)나 북구라파의 사가(Saga)를 버금해서 오늘 날 현대에 와서 가장 리얼리즘의 가장 극치를 이룬작품이라는 것은 모파상의 작품이 아니오? 왜 그러느냐 하면 언어를 선택할 줄 아는 까닭에 그래요. 예술가의 예술적 영감에 있어서도 이러한 지적인 노력, 이런 판단의 작용이라는 것이 강렬하게 비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란 그때의 중요한 여러가지 것을 그 사람들은 그때에 당면한 문제 앞에서는 중요한 여러가지 것들을 그 앞에 놓고 있던거요.

그 사람들이 회천(回天)의 대업을 지금 한다고 혹은 영세불망의 진리를 내가 쓴다고 이렇게 자부해 썼다는 것은 아니오. 다만 필요한 것, 중요한 것, 꼭 있어야 할 것들을 이제는 기록해야겠다고 했다 그 말이오. 이런 것을 할 때에 그 사람들은 취사선택을 하고 퇴고를 하고, 다른 말로 말하면 지울 것 지우고 넣을 것 다시 넣고 그렇게 하고 가령 오늘 날도 무슨 글을 쓸 것 같으면 원고지에다 올리면서 교정을 하는데 교정을 한다고 할 때에는 교정을 할 때에 다시 새로운 사항이 나서 어떠한 단어를 고치기도 하고 어떠한 문장을 조금 바꾸어서 쓰기도 하고 ‘아니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아니치 못한다’ 그렇게 뒤집어 놓는다든지 해서 그 말이 여운이라는 것이 이번에는 어떤 강조를 더 이룰 수 있게 그렇게 만드는 것이오. 글 쓰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는 것이오. 음악을 짓는 사람들도 다 하는 것이고 어떤 창작을 하든지 할 때에 일기가성으로 즉흥적으로 하는 일이 없어요.

그러면 하물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쓰는 사람들은 그때의 당면의 문제의 중요성으로 봐서라도 심히 신중한 문제 앞에 섰는데,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 당면의 문제들을 때때로 검토해 보면 역사의 방향을 전환하는 문제도 거기 있는거요. 그런데 그런 것을 그렇게 그 사람들이 역사의 방향에 대한 의식을 충분히 했든지 안했든지 그런 것을 소홀하게 아니했단 말이오. 그러면 이만큼 성신의 유기적 역사라는 것을 강조했어요.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란 거요. 성신의 비상한 초범한 역사란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러나 그게 상궤(常軌)가 아니니깐 언제든지 성신의 거룩한 조명과 인도와 가르치심을 받으려고 하거든 어떤 비상한 상태, 비상한 종교적인 상태에 들어가기를 기대하지 말라 그것이오. 그런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것뿐이고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그리고 신약에 있는 모든 사실들을 우리가 자세히 살펴서 검토할 때에 거기는 유기적인 역사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따라서 성경의 영감을 말할 때에도--축자 영감이나 목적 영감이니 이상한 말까지 다 만들어 붙이고 그러지마는--그게 동력적인 영감이라든지 기계적인 영감이라든지 아마 이게 신학적인 용어일텐데 그렇게 말을 하지 아니하고 기계적인 영감 같은것 주장 아니해요. 개혀교회가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유기적인 영감이다. 성경은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동력적으로 성경을 쓴 사람은 어떤 그런 이상한 신통력이 그에게 항상 비치되어 있어서 거기에 의해서 썼다는 그런 것도 없고 기계적으로 서기가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쓰듯이 마치 오늘날 dictaphone에 의해서 써 내려가듯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말이오.

유기적인 영감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의 지식이나 그 사람의 경험이나 그 사람의 의욕이나 그 사람의 심상이라는 걸 전부 지배하는거요. 지배한다는 것은 그것 없애버리고 딴 걸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는 그것을 가지고 쓰시는 거예요. 그 사람이 모르는 이야기는 안쓰는 거요. 그 사람이 자기의 지식의 한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지식의 사실을 가서 저촉해 가지고 언급하는 일이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만큼 미리 미리 그 사람들을 준비하신 건 사실이오. 그러기에 각각 가지고 있는 은사라는 특색이라는 것을 다 선용하시는 것이오. 바울선생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한 지식과 논리력을 써서 그의 신학적인 체계를 사상적인 체계를 이루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적격자이니까 그렇게 썼다 그말이오. 요한이 가지고 있는 시적이오. 그러고 항상 멀리의 사실을 바라보는 그런 성격과 그런 은사는 결국은 요한의 서신이라든지 묵시록 같은 것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말이오. 이렇게 각각 그 사람이 충만해 가지고 있는 은사를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릇 안에 성신이 충만해 가지고 역사한 것이오. 암만 충만하더라도 그릇이 적으면 적은 대로 밖에는 더 안되는 것이오. 충만하다고 해서 갑자기 모르던 것이 다 알아지는 것이 없는 것이오.

그러면 이렇게 성신님이 유기적으로 성경을 쓰는데 있어서 영감으로 써서 그것을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 이렇게 말하듯이 성신님의 우리 안에서의 역사도 오게닉 오퍼레이션(organic operation), 유기적인 역사라 하는 것이오. 그러면 이런 유기적인 역사에서 우리는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또한 기대하고 또 그것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고 원하는 것이오. 그 다음에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할 문제는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이 그것이 꼭 무슨 소리로 내게 금방 들리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게닉 오퍼레이션이라 할 때에는 유기적인 역사라 할 때에는 그걸 기대할 수 없는 것이오. 내가 생각이 떠오르기를 바랄지언정 나에게 무엇이 나 이외에서 내 청각을 통해서 무엇이 들려 오기를 바란다든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결국에 내가 A라는 것을 생각했다가 엔티-A를 생각하더라도 내가 생각을 하는거요. 나는 내 스스로 소위 디베이트(debate)하는 거요. A를 해야 할건가 엔티-A를 해야 할건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이렇게 하면서 아니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 그럴 때 다 면밀하게 판단하고 면밀하게 항상 재보고 하는 것이지 그런 것 없이 그냥 마치 내가 모르겠으니까 빗 떨어지는 대로, 돈 떨어지는 대로 혹은 외면의 어떤 이상한 현상이 나에게 보여 주는 대로 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닌거요. 끝까지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이 분명한 의식의 작용하에서 문제를 얻어 내려고, 해결을 얻어 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것이 심히 중요한 일들인데 이와같은 것을 우리가 볼 때에 성신께서 일반적인 역사, 제너널 오퍼레이션(general operation)이라는 사역을 통해서 이 세상 피조물들 위에 하나님께서 그걸 보존하시고 그걸 다스려 나가시는 거룩한 도리 이것을 가르쳐 하나님의 프로비던스(providence) 즉 섭리라 그러는데 하나님의 그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당신이 친히 다스리고 보존하시고 또 그뿐만 아니라 협조라는 말 혹은 어떤 일이 꼭 동시에 발생해야겠다는 것이오. 오늘 읽은 이것을 볼지라도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간 일을 볼지라도 베드로에게 어떤 이상으로서의 깨달음을 주시고 그리고 동시에 복음을 받아야 할 고넬료에게도 주시고 이것은 동일한 성신께서 동시에 서로 서로 협조해서 일이 될 수 있도록 문제를 일으킨 거란 말이오.

컨커런스(concurence)라는 이런 사실들 이게 다 섭리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섭리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인데, 이런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 사실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존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까닭에 이러한 성신님의 역사, 즉 은혜를 적용하시는 역사 이것을 소위 common grace, 보통 은혜, 일반 은혜라 할 때 일반의 은혜를 보존하시고 또 그것을 내려 주시고 거기서 열매를 거두게 역사하시는 일반적인 역사가 불신자에게든지 신자에게든지 다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보이신 그 거룩한 계시가 일반계시의 사실로서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과 또 그 위에 하나님의 성신의 일반은혜와 일반적인 역사라는 것은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서 늘 같이 역사함으로써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하는게고 경험 가운데 이치를 깨닫는 거요.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이렇게 해서 어떤 경험에서 쓴 경험을 한 사람은 내가 쓴 경험에 비추어서 그전에는 모르고 술덤벙 물덤벙 했고 모르고 뛰어들듯이 뛰어 들어봤지마는 다시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하고 거기서 배운 교훈이라는 것 이것을 살려서 쓰는 거요. 그럼 그것이 무슨 교육이 아니냐 하면 그것도 교육인 것이오. 그것이 가르침이 아니냐 하면 그런 것도 배우는 것이고 그 가르치는 것을 불신자들은 어떻게 해서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마는 다만 제 경험이다. 세상의 사리가, 돌아가는 것이 어떻다 하는데 불신자들이 그걸 하는 것을 보면 거기 기본적으로 일반 이치라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일반적인 진리, 특별하신 진리가 아니라 일반적인 진리의 터 위에서 일반 이법(理法) 위에서 그 사람들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요. 그건 대단히 논리적인 것이오.

이렇게 해서 자기의 경험도 그 사람의 예리하고 정당한 논리에 의해서 다시 이런 것을 반복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되는거요. 이런 것도 배운 결과요. 안 배운게 아니오. 생활을 통해서 배운 것이오. 그러면 신자에게는 그것이 없느냐 하면 신자에게도 그런게 있는게요. 왜냐하면 신자도 이 세상에서 인류의 식구 가운데 하나인 것이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일반적으로 내리신 일반은혜 가운데 신자들도 매일 호흡하고 사는 것이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그런 일반 이법이란 것을 항상 토대로 하고 특별한 이법의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지 그걸 무시하고 특별한 이법(理法) 하나만이 전부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대단히 그릇된 것이오. 왜냐할 것 같으면 많은 성경의 교훈이 이미 내려 준 공리라는 것 엑시엄(axiom)을 기초로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성경의 모든 도리라는 것은 공중에 떠올라서 이 세상에는 이미 비치되어 있는 어떤 이법, 어떤 질서도 다 무시해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해요.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하신 사실 그 위에서 피조물 가운데 구원을 하시는 것인 까닭에 그가 피조물인 것은 사실이고 피조물이 받는 바 일반 이법하에 그 카테고리(category)하에서 은혜도 받고 규제도 받고 하는 건 다 사실인 거요. 믿는 사람은 공중 열길 높은 데서 떨어지면 안 죽는다든지 안 상한다든지 그런 법 없는 것이라 말이오. 그리고 인력에 의해서 당하는 일은 마찬가지오. 그러기 까닭에 과학적인 이치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생활이란 것을 반성하고 반성하는 데서 얻는 바 어떤 결론은 새로운 지식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그런 것은 누가 가르칠 것이냐 할 때에 크게 말할 때에 일반은혜나 일반의 역사라는 성신의 역사에서 얻는 까닭에 그런 개괄적 의미에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은 또한 그런 것이다 그거예요. 그러나 본론에서 성신의 가르침이라 하는 말은 그것을 의미하지는 않는거요. 요걸 전제로 하고 거기까지 따져서 일일이 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본문에서 성신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런 새로운 오이코노미아로 들어와서 성신께서 어떤 신자든지 중생한 사람의 속에 보혜사로서 내주하고 계신 그 사실의 터 위에서 가르치시고 나가는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볼 때에는 거기에 몇가지 중요한 것들을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가르친다고 할 때에 가르치시는 그 사실은 어떤 일정한 목적이 있는 것이오. 일정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과 물론 목적을 생각하면 까닭이 있는 것인데 그것은 실지로 나타나기를 그 사람에게 그 가르침이라는 것이 무엇을 이루느냐 하며는 그 사람의 장성에 필요한 양식이 되어서 그 사람이 정상적으로 자꾸 장성해 가도록 만드시는데 첫째의 까닭이 있는 것이오. 이것이 큰 목적 안에 있는 작은 목적들인 것이오. 그 까닭이 있어요. 즉 그 사람을 정상적으로 장성을 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거요. 이런 의미에 있어서 교육적인 의미를 늘 가지고 있는 것이오. 나에게 어떤 사실로써 새로운 어떤 이법, 이치를 깨닫게 하셨으면 그 이치는 내 안에서 그냥 살아 있어야 하고 나는 그걸 망실하지 않아야 해요. 잃어버리지 아니해야 한다 말이예요. 그걸 또 잊어 버려서도 안돼요.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그 다음에 올 문제에 있어서는 판단할 때에 중요한 재료, 크라이테리어의 한가지가 되어 가지고 움직일 것인 까닭에 그것을 잘 쥐고 있어야 하는거요. 또 그 다음에 나는 생활 경험 가운데서 성신님의 인도하시는 속에서 부딪힌 문제 앞에서 그것에 대한 의미, 이치를 깨닫게 되면, 행득을 하게 되면 거기서 또 하나의 지식을 얻은 것이오.

이런 것들이 축적을 하고 또 단순히 그런 생활 경험 뿐만 아니라 훌륭한 서책이나 훌륭한 선생이나 또한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의 가르침이라든지 또 전해주는 것에 의해서 이걸 한 마디로 말할 때에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거룩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전수해 주는 것들을 내가 받을 때에 거기서 필연적으로 나는 하나의 사상적인 축적을 하게 되는거요. 이렇게 해서 하루 아침에 아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세계관이나 사관이나 또한 그 여타의 우리가 반드시 알고 가지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상적인 기저(基底)라는 것은 가령 사회라는 것은 뭐다, 가정이라는 것은 뭐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는 어떠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뭐다, 미움이란 것은 뭐다 하는 이런 거룩한 사상들이 내 안에 자꾸 쌓이고 쌓여 축적되어 나가는 데서 나는 그 다음의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좀 더 풍부한 크라이테리어를 가지고 사는 것이오. 이와같이 인도해 나가시고 이와같이 알려 주시고 나아가는 것이 성신님의 역사의 한 가지요.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 하며는 가만히 앉았는데 이렇다, 이리 가거라, 저리 가거라 얼른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먼저 이러한 큰 내 인생의 생활의 길에서 내가 하나님에게 은혜로 받은 것들의 의미를 더 깨닫고 알게 해 주시는 이런 것들이 성신님의 가르침인데 이 성신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 사람이 잘 배우고 깊은 것을 배우려고 할 것 같으면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한 것이오.

①첫째의 조건은 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런고로 내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 하면서 오직 일생을 주님의 뜻대로만 살고저 할 때 주님의 뜻을 나에게 가르쳐서 점점 더 거룩한 사상의 내용으로 축적시켜 나가는 것, 모든 진리 가운데로 나를 자꾸 이끌고 나가시는 것, 요한 복음16장 13절의 말씀이 그렇죠. “보혜사 그분이 오시면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하나의 진리에서 그 다음의 새로운 사실로, 또 하나의 진리로 이렇게 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를 이끌고 가실 것이다” 요게 기다, 요게 아니고 안내해 주실 것이다고, 호데게오(όδηγέω)라는 말을 썼다고 했지요. 이렇게 인도해 나가시는 것이다. 이게 성신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양식이오. 그 말을 우리 성경이나 영어 성경이 다같이 인도한다는 말로 번역했어요. 호데게오.

그렇지마는 그건 그 전에도 말씀드렸지마는 붙들고 간다는 말보다는 안내한다, 일본문자로 안내한다. 그렇지 않으면 옛날 우리식 말로는 지도(指導)한다, 인도한다 그 말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 인도란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인도란 것은 지도한다 말이오. 길을 비추어 주는 것, 이리 가야겠다 이리 가자, 이것은 우리가 성신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는 갈라디아 5장 18절 말씀의 그 인도라는 말과는 다른 말이오. 또 로마인서 8장 14절 말씀의 그 인도라는 말과도 다른 말이오. 다 같이 인도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어도... 요컨데 이렇게 보여 주셔서 나로 하여금 그게 맞구나 이게 바르구나 하고서는 자꾸 따라가게 하시는 것인데, 이와 같은 것이 성신의 인도의 한 중요한 방식인데 이런 것 하려면 바라가지고 요구하고 원해야지 제가 제 마음대로 제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내가 덜거덕해 가지고 손해가 될런지 이익이 될런지 모르겠다는 자기의 공리적인 타산하에서 하나님이여 뜻을 보여 주십시오 한다며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갈리가 없는 거요.

전에 우리는 야고보 1장 5절-8절을 강해할 때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두 마음을 품어 가지고 의심하고 믿었다 안믿었다 이렇게 바다 물결이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자같이 이런 두마음을 품은 자는 아무것도 하나님께 얻을 것을 생각하지 말아라.” 이런 말을 하셨어요. 즉 자기 자신이 버렸다 혹은 자기 이익으로 되돌아갔다. 은근히 최종의 노리는 것은 자기의 정신적이었든지 물질적이었든지 어떤 행복을 자꾸 노리고 있는 이런 심정을 가지고 안되는 것이오. 한 마디로 말해서 옛사람이라는 것이 그냥 살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옛사람의 이상인지 야심인지 하는 것을 이루어 보려고 그 방법으로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적용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에게 그런 에누리를 하고 그렇게 제 멋대로 자기 인생을 쥐고 앉아서 제 일생을 제가 쥐고 앉아서 경영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성신님께서 이리 가거라 저리 가거라 그런 가르침은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말이오. 그런 사람 속에 성신님은 오직 그의 가지고 있는 완고와 옛사람 때문에 성신님은 근심하시는 것 뿐이오. “하나님의 성신님을 근심시키지 말라” 그랬지요. 근심하시는 거요. 그런 사람은 자기의 목적과 합하지 않으면 비합목적적이라는 그런 단순한 자기의 이익하에서 참된 감화라는 것도 알아 보지도 못하고 소멸시키는 거요. “성신님을 근심시키지 말라” 하셨지만 소멸하는 거요.

항상 성신을 거스린다고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을 할 때 쓴 말이 있는데 성신을 다 거스려 나가는 것이오. 그러면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겠다면 어림없는 이야기요. 그런고로 귀기본(歸基本)해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아상(我相)이 없어야 하는 것이오. 아상이라는 것이... 나라는 것이. 옛사람이 살아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규율이든지 자기의 인생 철학이라든지 자기의 살고 있는 어떤 스타일이라든지 그런 것을 앞에다 딱 내어 놓고 그 안에서 성신이 뭘 해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물썽하게 성신님의 인도를,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오. 그런고로 오직 성신의 가르침을 무엇이 되었든지 가르쳐 주시면 그대로 나는 살겠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라고는 없다고 자기의 죄있는 것과 부족한 것과 멍청한 것을 알고 성신께서 가르쳐 주시기만 바라고 맡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요.

②둘째는 기도하는 거요. 성신님께 대한 이 기도라는 것은 이건 참으로 중요한 것이오. 왜냐하면 이 기도에 있어서 비로소 우리는 그 문제를 내가 간절히 원하고 그것으로 마음을 집중하고 온 그것을 알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것을 비로소 유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오. 그러한 기도라는 것은 어떤 형식을 취했든지 그러나 마음 가운데서 우러나는 것이오. 주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주님의 뜻을 보이시면 보이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혜가 없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 모르는 걸 알기 원하는 걸 구하라고 그랬지 가만히 앉아서도 저절로 안다고 생각지 말아라 그것이오. 또 야고보 4장 2절에도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오” 구하지 않는 까닭에 너희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3절에 “네 쾌락을 네 복리와 네 즐거움을 위해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벌써 구하는 심상의 위치가 틀렸다 그거요. 그러기 까닭에 진정으로 오직 그 뜻만을 이루려고 구한다는 것이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올시다. 이것 하나 하나가 나중에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해 가겠지만 우리가 기억하기 편하기 위해서 그냥 하나씩 하나씩 제목만을 이야기 합니다.

③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실되이 사랑하고 찾는거요. 그건 그때의 의미에서 어디로 봐야 이 일을 알까 하고 목전에 어떤 목표, 알고자 하는 이것을 알려고 갑자기 성경을 사전 찾듯이 찾는 그런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을 평소부터 사랑하고 거룩한 도리를 언제든지 근실하게 배워서 내가 문제있을 때에 그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더 높아지도록 평소부터 이것을 공부하고 사모하고 사랑하고 있으라는 말이지 영어 단어 모르니까 사전 찾아 가지고 단어 찾듯이 찾는 것은 아니다 그거요. 이것이 또한 심히 중요한 것이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할 때에 어떻게 찾느냐 했더니, 성경을 자기가 늘 읽어 가는 데를 읽어 가며는 그때 가야 할 것인지 와야 할 것인지 문제에 대해서 가라고 하는 말이 자꾸 나온다는 거요. 그러면 가라는 말에서 “아! 그러면 가야겠다”고... 그리고 결정한다 말이오. 세상에 그렇게 이상하게 기계적으로... 그게 정당하게 쓰는 법이 아니오. 절대로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오. 성경에서 원래 성경이 주고자 하는 거룩한 사상과 도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좋아하시는 것, 경영하시는 것, 나한테 하고자 하시는 것, 이런 것들을 자꾸 자꾸 터득해서 깨닫고 알아가라 그것이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오.

④그 다음에 중요한 한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거룩한 교회가 그것을 역사적으로 테스트(test)해서 우리에게 물려준 바 신령한 훌륭한 유산들을 아주 존중히 여겨라 그말이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할 때에 성경을 보고서 거기서 무엇을 깨닫겠다 할 때에 자기가 아무런 규범이 없다면 규제가 없고 힌트도 없고 한다면 그걸 보아 가지고 척 그 도리를 잘 깨달을 사람이 많은 게 아니오. 이게 무엇인지 몰라서 어떤 사람이 가장 그럴 듯하게 얘기하면 그렇겠다 하고 그냥 따라가서 오도(誤導)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이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아까 말한 그 배제(配制)주의(세대주의)적인 그런 사상이란 거요. 그게 원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렇게 그릇된 것이, 악화가 들어오면 양화는 자꾸 몰려나가는 거요. 가장 그럴 듯하고 가장 쌈박한 까닭에 자꾸 받아 들이는 것이오. 이러기 까닭에 그것이 건실한 역사적인 test를 겪어서 우리에게 물려준 바 금과 같은 유산들이냐 그러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들이 한 때에 일어나 가지고 떠드는 이야기냐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해요.

이렇게 해서 거룩한 교회가 규제하는 것과 유산으로 물려준 것을 잘 받으려고 할 때에는 거기에 어떤 책을 가지고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보아 가지고 사상적인 함축을 좀 더 쌓는 것이고 훌륭한 스승에게 배우기도 하는 것이고 이런 훌륭한 스승에게 배운다는 것은 교회가 마련한 바 참 귀중한 방법인 것이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하게 여기는 것은 이 강설하는 시간이오. 강설(講說)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그 은폐되었던 것을 가급적 해명해 주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훌륭한 스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해명해 간다는것,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던 것을 기이하게도 자꾸 터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오. 그런데 그것이 명확하게 바른 교리와 또 거룩한 유산 위에서 발전해서 깊이 판 이것들이어야지 사람들이 (워치만 니 계통의 지방교회 처럼)제 멋대로 그것이 그렇다하고 그럴듯한 말로 얘기하는 것은 안된다 그것이오. 이렇게 해서 강설이라는 것도 어떤 거룩한 위대한 유산, 이 헤리티쥐(herityge)라는 것, 위대한 유산의 테두리라는 것과 그 금과 같이 빛나는 거룩한 도리를 발판으로 해서 전진해 나가는 그것이 중요하다 그거요.

우리가 개혁교회라고 할 때에는 개혁교회의 유산이 위대하고 거룩한 까닭에 개혁교회란 말을 붙이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그것을 바르게 전승한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서책도 거기서 나와야겠고 스승들도 그 거룩한 도리 안에서 그런 거룩한 집안에 들어 있어서 비로소 그 시대의 새로운 사실을 해석하고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것을 자꾸 찾아 나아가는 거요.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들이라” 그랬어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세워놓은 그 거룩한 도리의 유산을 계승해서 받은 자란 그말이오. 이런 것들이 지금 먼저 중요한 것들이오.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우리는 해명해 가야 할텐데...

오늘은 이미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말씀을 드리려고 하던 것을 여기서 중단할 수 밖에 없어요. 오늘 우리는 고넬료의 집을 처음 방문한 사도 베드로에 관한 사실을 처음에 조금 읽었지마는 다음 시간에 여러분이 오실 때에 사도행전 10장을 좀 다 읽어가지고 오세요. 왜냐하면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하나의 유례(類例)를 아주 적절하고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지마는 적어도 베드로의 어떤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이 그 때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인데, 베드로의 역사적으로 큰 의미있는 하나의 산을 넘는 이 행동은 성신님의 가르침과 인도없이 저 혼자 한 것이 아니오. 여기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의 자취를 찾는 것이오. 그걸 찾아 보고자 특별히 이 장을 전부 강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또 고낼료에게 임하신바 그 거룩한 환상의 은혜는 어떻겠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씩 보고 지나가자는 것이오.

왜냐하면 성신님의 특별하신 새로운 배제 하에서의 역사의 양식은 구약의 어떤 부분보다 신약의 부분에서 비로소 우리가 명료하게 그리고 착오없이 알 수가 있어요. 그런고로 구약을 text로 취하지 않고 신약에 성신님께서 처음에 교회를 세우실 때 그 거룩하신 역사를 위한 사도든지 특별히 바울이든지 혹은 이방인으로 처음으로 거룩한 복음이 들어간 백부장 코넬리우스든지 이런 사람들, 고넬료, 이러한 사람들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들을 보는 것이오. 지난 번 이야기했지요.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봐야 할 여러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그런데 첫째 중요한 것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큰 초석을 어떻게 놓고 어떻게 발전시키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해서 주의를 해야 하지마는 성신께서 어떻게 가르치시고 어떻게 인도하시며 사람들은 성신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나? 특별히 베드로의 경우를 우리가 주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거룩하신 주님이시여! 그 거룩하신 신으로서 저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거룩한 도리를 저희가 배울 뿐 아니라 확신하는 터 위에서 생명의 양식으로 이를 저희 안에 간직하고 소화하고 또한 주께서 보이시는 거룩한 길을 행진할 수 있게 모든 은혜를 준비하신 것을 감사하오며 이 거룩한 도리를 저희가 잘 깨닫고 저희 매일 매일 생활에서 성신님을 멀리하고 자기 스스로 그냥 생활을 유지한다거나 성신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귀족계급에 한한 일인 것과 같이 그릇되이 생각하는 일이 없이 각각 나에게 주신 큰 은혜로 알고 이리하여 성신님을 의지하고 그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서 생활이 낭비가 없고 보람이 있고 신령한 생활의 성격을 확실히 띠어서 거룩한 교회의 바른 자태를 여기 드러내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2.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