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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서순 - 황영철 목사

Bavinck Byeon 2015. 3. 22. 22:39

구원의 서순(ordo salutis)

 

황영철 목사

 


구원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어떤 순서와 방법을 사용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한 크고 기이한 일이며, 사람은 거기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거나 간섭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일을 일으키시는지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므로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먼저 이 말은,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전달될 때에, 그가 자기에게 전달된 그 복음에 대해 믿는다는 반응을 보이면, 그는 구원을 얻는다.’라는 해석을 내릴 수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연결해서 공부하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대개 이와 같은 이해를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며, 신자들도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므로 이것이 잘못된 표현은 아니지만, 그 표현이 의미하는 정확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이와 같이 해석할 때에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 첫째는, 우리가 앞장에서 배운 것처럼, ‘믿음 그 자체가 구원의 믿음이 아닌 종교적인 반응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것보다 더 큰 문제로서, ‘사람의 믿음이 구원의 공로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믿으면, 그 결과로 구원이 주어지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님께서 죄인의 구주이시다.’는 것을 사람에게 설명한 후에 이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성경의 방법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한 후에 그 말을 사용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말을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사람이 비록 타락해 죄에 빠지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비록 사람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에 분명히 위배된다.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서 310, 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서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라고 한다. 그러므로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전파됐을 때에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울 사도께서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다.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여기서 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 때문이며 그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복음에 대해 믿음이라는 반응을 보이기 앞서서 먼저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이 복음을 거부할 때에 그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면, 복음에 대해 무기능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 그에게 복음이 전달될지라도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없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고 말한다. , 그는 구원의 길과 복음의 소리에 대해 그것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기능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해도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는데, 사도행전에 그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그 이야기의 배경은 바울 사도의 2차 전도여행 때에 바울 사도께서 빌립보에 있는 자주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장면이다.

 

사도행전 1613~15,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해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루디아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 일어나는 표준적인 경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먼저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면 그가 믿고, 다음에는 믿음의 행동을 눈으로 보이게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행동은 전도자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수발을 드는 것이다.

 

누가는 여기서 루디아의 행동을 강권했다.”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즉 그는 구원을 받자마자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자기도 힘을 보태기 위해 전도자를 강권해 자기 집으로 모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디아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발생한 사실을 본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킨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 능력이 발휘됐을 때에 발생한 사건은, 죄와 허물로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지하던 사람의 눈이 뜨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고 나아오게 하는 이 일을 가리켜서 우리는 중생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중요한 중생의 가르침을 일찍이 니고데모에게 내리신 일이 있다.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약하면, 복음이 전파돼서 그 부르심을 들은(외소, external calling, 일반 부르심)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복음에 대해 구원의 응답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내소, internal calling, 유효한 부르심), 그는 복음을 받고 믿으며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순서를 이른바 구원의 순서(서정)”라고 하며,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이 구원의 순서를 잘 가르침으로써 사람이 헛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살게 했으며, 늘 자신의 믿음을 비춰보고 반성하게 했던 것이다.

 

이 순서에서 밝혀지듯이, 믿음과 함께 드러나는 또 하나의 결과는 회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믿음과 회개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서순에 비춰볼 때, 우리는 복음 전파를 결코 게을리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외소, 즉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소란 외소를 통한 구원의 초대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적용하시는 것이므로, 먼저 전파하는 일이 없으면 사람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의 서순에서 우리들이 배우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이 신앙은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내용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기독교 구원의 서순은 그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바로 이 중생, 즉 하나님께서 사람 마음속에 발휘하신 능력의 결과로 그가 하나님과 복음을 믿는 믿음이 구원의 믿음(신앙)인 것이다. 그런데 헛된 믿음이란 중생의 결과로서 사람이 발휘하는 믿음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보편의 종교성이나 어떤 심리적 열정의 발휘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결코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데, 그 헛된 믿음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도덕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믿음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서순을 대강 살펴봤다. 물론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피며, 거기에 연루된 신학적인 논쟁들과 성경의 가르침을 조사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공부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 일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므로, 이와 같은 개괄적인 조사를 배경으로 해 우리의 주제인 윤리적 변화의 문제로 초점을 맞춰보기로 하겠다.



* 황영철 {구원과 윤리} (서울: 도서출판 대장간, 1991) 37~40.

* 김홍전, 최낙재 목사님 제자이신 황영철 목사님께서 독립개신교회 성약교회 일반신도 시절에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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