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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역사 8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7:25

성신의 역사 8

 

김홍전 목사

 

제8강 사도행전 22장12-21절

 

오늘 아침에 우리가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에 관한 성경 말씀의 도리를 계속해서 생각했는데 아침에 시작한 강설이 완결을 못보고 그대로 있으므로 오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있는 6절로부터 15절까지에 있는 말씀을 아침에 읽고 거기에 의하여서 바울 선생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 사람이 나타난 환상을 보고 그의 청하는 말을 듣고 이에 마게도니아로 가고저 힘썼는데 그 힘쓴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줄로 인정한 까닭에 그랬다고 했어요. 그 환상 자체를 인정하든지 해석하는건 환상을 본 사람의 일이 올시다. 환상을 보았을 때 그것을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지난 번에 배운대로 베드로는 네 귀를 맨 보자기가 내려와서 그 안에 여러 짐승이 있는걸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보고도 무엇인지를 잘 몰랐고 뜻을 알려고 궁리를 하고 있었지요? 나중에 고넬료의 집에 간 후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 바울 선생은 이때에 환상의 의미가 드로아에서 이러고 주저하고 있을게 아니라 마게도니아 땅으로 향하여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하는 것으로 해석한 까닭에 이에 일행이 거기서 마게도니아를 향해서 갔어요.

그러면 이와같이 어떤 환상이었든지 어떤 감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준 것이든지 뭐 꼭 환상이 아니드래도 우리가 어떤 본 것, 들은 것 또 우리 스스로 생각한 것 이런 것들이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서 나가는 사람에게 그 사람에게 자격과 장성의 분량을 따라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오. 그러고 또 하나는 그러한 독특한 현상에 대해 들은 것이라든지 본 것이라든지 깨달은 것이라든지 생각한 것이든지 심지어 꿈이라도 그런 독특한 현상에 대한 해석과 태도라는 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결정인데, 신앙이 옅은 사람이 덮어놓고 바울 선생같이 믿음이 높고 풍부한 크라이테리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의 해석같은 것을 마치 자기도 할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해서 함부로 묵시하기를 원하고 꿈보기를 원해서 한다면 오도(誤導)되기가 대단히 쉬운 것이올시다.

이제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어째서 그는 그 환상을 자기를 마게도니아로 부르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는가 라는 점이올시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니아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줄로 인정함일러라.” 이것이 사도행전 16장 10절 말씀인데 환상을 본 다음에 바울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결론을 내렸다 하는 이야기올시다.

그러면 이 환상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하십시다. 어째서 바울은 이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는 것이라고, 마게도니아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을까 할 때, 첫째 바울이 전도 여행한 생활기록을 보면 바울은 세번 전도여행을 했어요. 제 일차, 이차, 삼차. 일차는 바울 선생이 예수를 믿고 선 이래로 한 15년쯤 되어서요. 그런고로 주후 45년부터 48년까지 사이로 제 이차는 50년으로부터 53년까지의 사이, 비교적인 연대올시다만 대체로 어떤 일정한 시간이라는 걸, 시기라는 걸 우리가 상상해 가면서 하는 것이 늘 생각하기 편이합니다. 1년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게 큰 문제가 되는게 아니오. 제 3차는 54년으로 57년까지고 58년 이른 봄, 이른 봄이 아니라 겨울이겠지요. 정월에 나서서 돌아오기 시작해 가지고 4월에는 빌립보까지 육로로 왔어요. 그래서 무교절 지난 다음에는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와가지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할려고 애를써서 예루살렘으로 왔다가 붙들린 것이... 그 다음에 로마로 가게된 시초 올시다. 그래서 61년 60년, 그 겨울에 걸쳐서 그는 로마로 항해를 했는데 이와같이 세번의 전도 여행이든지 로마행이든지 다 바울이 평소부터 간절히 소원하던 바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예요. 전도 여행을 할 때도 그는 서쪽을 향해서 자꾸 전진을 했고 로마 가는걸 원래부터 마음에 소원을 한 바요. 이와같이 바울 선생은 복음을 가지고 동쪽으로 가지않고 북쪽으로 가지않고 혹은 남쪽으로 해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쪽으로 마게도니아, 헬라 그 다음에 로마를 향해서 갔던 것이오.

그런데 이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은 바울이 아시아에만 국한되었던 발걸음을, 그러고 아시아안에서 빙빙 돌려고 하던 것을 성신께서 막으시고 예수님의 신 곧 성신께서 그걸 못하게 하시고 그 대신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여서 서진을 하게 만드신 것이오. 이 환상은 그런고로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전체의 생애와 역사를 놓고 볼 때에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그 후의 발전의 역사를 놓고 볼 때는 지극히 중요한 발걸음, 역사적인 거보를 내디디는 일에 지침이 되어가지고 있었던 거요. 환상 자체에 대한 해석이 그렇다 말이오. 그러면 환상이 없었더면 해석이 없었을 터이니까 이 환상이 그에게 이렇게 임하게 하고 그것을 바로 해석해서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아시아 사람들의 세계에서만 왔다 갔다 하던 그가 이제 헬라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로마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자꾸 전진하게 된 거보를 내디디는 것이오.

이런 획시기적인, 아주 역사를 긋는 큰 걸음을 하는 바울의 자태야 말로 당당한 개선장군과 같이 움직인건 아니오. 만일 로마 어떤 장군이 군대를 끌고가서 어떤 지방을 정복했으면 그 지방의 이름으로 그에게 봉작(封嚼)을 하고 그를 로마시에서 화려하고 찬란하게 큰 개선식을 해주고 그때에 연도에 수많은 사람이 환호를 해주고 병거를 몰고서 빛나고, 빛내게들 갔을거요. 그렇지마는 그런 모든 것 다 합친 것보다도 위대했던 큰 발걸음은 이제 복음이 주로 유대 사람들과 아시아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대로 갇혀 있던 데서 일단 터져 나가 가지고 에게해를 넘어서 저쪽 마게도니아와 아카이야 즉 헬라 땅, 다시 아드리안 바다를 너머서 로마로 나가는 최초의 큰 발걸음 이었어요.

그는 자기와 실라, 디모데, 누가, 이렇게 아마 성경책은 큰 두루마리니까 짊어지고 말을 타고 갔었는지, 걸어갔는지 아마 배타고 가서 다시 거기서 말을 구입하기가 어려웠더면 바로 육지에 내려서 빌립보까지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을 것이오. 누가 보든지 길가는 나그네 한 너덧 사람이 그리고 터벅터벅하고 들어오는 걸로 보았지 그게 전 세계에 군림할 위대한 큰 세력과 능력과 영광의 전진의 자태라고 아무도 몰랐을거요. 그러나 그건 사실상 역사로서는 너무나 큰 거보의 자태올시다.

그는 그이의 당대의 세계를 시찰을 할 때 관찰을 하고 있을 때 어떻게 보았는가? 먼저 바울 선생이 본 세계관이란걸, 또 관찰이라는걸 따져 보아요. 둘째는 그는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 두 가지를 항상 중요히 가지고서 자기의 지금 현재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렇게 그 사실을 거기서 정해요. 이렇게 해서 이 세 가지의 조건 하에서 주께서 지금 자기를 쓰셔서 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러고 그 다음에 그 동안에 제 일차 전도 여행, 제 이차 여행은 지금 이제 시작한 터예요. 겨우 수리아 안디옥에서 북행했다가 서쪽길로 소아시아로 들어와서 길리기아를 지나서 길리기아로 왔다가 지금 왔다 갔다 하다가 무시아 앞에서 결국 드로아로 왔던 것 뿐이라 말이오. 그러면 일차 여행과 금번 지금까지 온 (이차)여행 가운데서 그는 주님의 뜻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서 주님은 무엇을 재가(裁可)하시고 무엇을 재척(除斥)하셨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만한 재료를 놓치지 않고 가지고 있었을 것이오.

그러면 무엇을 재가하셨냐 할 때 일차 여행의 사실 몇 가지를 중요하게 보십시다. 일차 여행은 45년부터 48년까지 사이에 한 것인데 주로 이 소아시아 땅에서 했어요. 먼저 수리아 안디옥에서 바로 서쪽으로 나와서 수리아 안디옥의 해항이 되는 입구의 항구가 되어있는 실루기아로 왔어요.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그냥 바로 건너서 구브로 섬, 살라미로 갔어요. 구브로섬의 동쪽에 있는 항구요. 살라마에서부터 섬을 통과해 가지고 섬서쪽에 있는 섬 수부 바보에 이르렀어요.

바보에 이르기 까지는 그렇다 할만한 특이할만한 것이 없었지마는 일단 이 구브로의 수부인 바보에 이르러서 로마의 원로원이 보낸 총독 써기우스 폴루스(Sergius Paulus),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이 구브로섬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또 진리를 간곡하게 알아 보고자 하는데, 그 사람 측근에 엘루마라고 하는 박수가 붙어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하는 것이 훌륭하고 자기야 말로 하나님의 사자라고 자기를 과시하고 있다가 바울의 일행이 --그때는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 요한이 같이 갔는데-- 바울의 일행이 거기에 이르러서 도를 전하니까 그게 무엇인가 하고 서기오 바울, 이 총독이 알아 보고자 하는 것을 자꾸 방해하고 모르게 하니까 바울 선생이 마침내 그걸 보다 못해서 그를 붙들어 놓고 엄책을 했어요. 공의의 원수, 엄책을 했어요. 이 엄한 책망을 들은 엘루마에게 마지막에 무엇을 바울 선생에게 증거를 주었느냐 하면 네가 이제 잠깐 해를 보지 못할것이다 했더니 과연 갑자기 눈이 멀어 가지고서 나갈 곳을 두루 사람의 도움을 청하면서 찾았다 그말이오. 무서움에 질려가지고...

이걸 물론 총독도 보았고 바울 선생 자신도 그걸 보고 주께서 우리의 전하는 일과 전진해 나가는 일에 권위로 보증하신다는 걸 믿었을 것이라 말이오. 그건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오. 깊이 주님을 권위로써 우리의 일을 보증하시고 함께 하신다 하는 걸 믿었어요. 이 코스(course)를 정한 것은 자기네였고 기도하고 맘 가운데 이렇게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그러고, 바나바로 말하면 원래 구브로로 한번 가는 것이 자기에게도 여러가지로 편이하겠다 생각하고 아마 갔겠지마는 그러나 이 방향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열납이 되어서 앞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발전의 형태를 지리적으로 어디로 취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말이오.

매사 이런 일이 오다가다 닥치는 데로 가는게 아니오. 어떤 치밀한 생각 가운데 또 치밀한 관찰 가운데, 또 얻은 바 경험이라는 것을 소중히 여겨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늘 찾는 것이 신자, 성신의 가르침을 늘 받기를 원하는 사람의 생활 태도인 것이오. 이것이 이 엘루마가, 박수가, 그냥 판수가 되어가지고 혹은 청맹과니가 되었는지도 몰라요. 갑자기 안보이고서 그냥 두루 나갈 곳을 찾으니 이것이 13장 8절로 12절에 있는 말씀이오.

그 다음에 바보에서 배를 타고 북행을 해서 소아시아 땅 밤빌리아 버가에 도착해 가지고서 거기서 바로 북쪽으로 쑥 비시디아 부근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비시디아 안디옥이라지만 비시디아 땅에 있는 건 아닙니다. 바로 그 주변에 있어서 안디옥하면 수리아에 안디옥이 있으니까 이 비시디아 안디옥이란 말을 붙였는데... 거기에 가서 두 안식을을 지내게 되었어요. 첫 안식일에 이야기하니까 다음 안식일에 다시 와서 이야기를 하라고, 그래 가지고 그 다음 안식일에 그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이 핍박을 하므로 떠나서 이고니온으로 간 것이 그 다음 기록입니다. 이고니온에 이르러서는 오래 유하고 있었다고 14장 3절에 이야기해요. 거기서는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다시 거룩하신 신령한 능력으로 초 비상한 그 섭리로, 특별한 섭리요. 그들과 같이 하시사 보증하신다는 걸 의미하는 거라 말이오.

그들은 기사와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이 양분이 되어서 바울과 바나바를 좇는 그룹이 있고 그걸 방해하고 있는 유대 사람들을 좇는 그룹이 있어요. 유대 사람들이 화가 나니까 나중에 폭도를 일으켜 가지고 돌로 치고자 하니까 그만 두 사도가 그것을 알고 거기서 도망해 나갔다 그 말이오. 그래서 이고니온서 도망해 나갔어요. 가서는 어디로 갔느냐 하면 이번에는 루스드라로 내려 왔어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차례차례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루스드라지요. 이 루스드라로 오니까 나면서부터 좌객(座客)인 사람이 있어요. 발을 못쓰는 사람, 이 사람을 나수운 것이 빌미가 되어 가지고 루스드라 사람들, 루스드라 사람들은 특별히 감정이 잘 격한 사람들이오. 오늘날 프랑스 사람들하고... 그런데 그런 고올(Gaul)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그만 열광적으로 환영을 하고서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임했다 해서 바나바는 키도 큼직하고 풍신이 잘생겼으니까 주신 제우스라고 그러고 바울은 말을 잘한다고 해가지고 헬 메스, 머큐리(Mercurius), 이렇게 해서 막 화관을 가져오고 제사를 드릴려고 소를 끌어오고 제물을 바치려고 신 앞에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니까 두 사람이 옷을 찢고 나가서는 “형제들아, 이런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이제 나와서 이 도를 가르치는 데 무슨 짓이냐고 겨우 뜯어 말렸어요.

뜯어 말려서 좀 그래서 그냥 두고 말았는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아래로 쭉 내려온 유대인들이 저자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하는가 보자, 보니까 사람들이 막 환호를 하고 야단을 내고 제사를 드릴려고 하니까 시기도 나고 둘째는 저것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꾸 문제가 커지겠다 하고 거기서 당을 짜 가지고 사람들은 초인해서 그만 바울을 돌로 쳤다 말씀이오. 그래 돌로 쳐가지고 바울이 그냥 맞아서 거기서 죽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죽은 줄 알고 그놈을 질질질 송장을 끌어서 성 밖에다 내치고 가버렸다 그말이오. 그랬더니 밤이 되어서 제자들이 죽어있는 바울곁에 둘러 있으니까 바울이 벌떡 일어나 가지고 즉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풀어서 그렇게 돌로 맞아서 죽었으리라고 인정할 만큼 맞았는데 그냥 벌떡 일어나서 다시 성내로 들어가 가지고 잠깐 거기서 수습을 한다음에 거기서 떠나가지고서 이고니온 안디옥, 그래 가지고 안디옥에서 남쪽으로 쑥 바닷가로 가까이 내려오면 버가, 밤빌리아 버가요. 그래서 앗달리아라는 거기가 항구인데 그 앗달리아에 가서 배를 타고 돌아 왔어요.

이것이 제 일차 여행 때 기록인데 바울로서는 굉장히 큰 경험을 한 시기요. 하나님이 그 초자연적인 특별한 섭리 즉 기적이라는, 기사라는 큰 섭리의 보호와 보증을 가지고 그에게 응락해주셨다는 경험을 생생하게 했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절처(絶處)에 이르렀을 때도 하나님이 크신 손으로, 기이한 손으로 보호하셔서 그를 살리사 앞으로 두고 쓰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말이오. 이렇게 해서 바울 선생에게 있어서는 제 일차 여행의 사실을 그가 가지고 있는 사명에 대한 중요한 보증이 되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그 사명감이란걸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얻기 시작했느냐 하면 다메섹 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시간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면서 그가 다메섹의 사람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 가지고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데 오늘 읽은 말씀과 같이 율법의 의로 말할 때는 경건하여 모른 유대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그의 눈에 안수를 함으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소경이 되었던 바울이 보게 되고 그러고 아나니아가 이야기 한 것이 있어요. 이런 바울 선생의 개심, 혹은 회개의 기록은 사도행전에 3번 나오는걸 여러분 아시지요. 하나는 그 기록 그대로를 누가가 쓴 것은 사도행전 9장 1절로 19절에 있고, 또 하나는 바울 선생이 58년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루살렘에서 폭도에게 붙들려 가지고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니까 천부장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를 빼가지고 갔다가 영문 안에다 가둔 다음에 그를 나중에 심문을 한 일도 있는데 그 때 자기가 로마 시민인걸 이야기해서 나중에 가이사랴로 보낸 것을 여러분 아시겠지요.

그때 그는 폭도들이 야단내는 것을 천부장이 빼돌려 가지고서 하도 사람들이 막 소란을 하고 들어와 가지고 에워싸니까 할 수 없이 막 군인들이 바울 선생 몸둥이를 위로 쳐 들고 그러고 겨우 폭도들 사이를 빠져서 천부장 영문으로 들어 왔어요. 그러니까 천부장보고 내가 이 사람들 한테 말을 좀 하게 허락을 해달라고 해서 그래서는 결국 아, 네가 헬라말을 아는구나 하고서는 네가 옛날에 자객을 데리고 나갔던 그 사람 아니냐고 그것이 좀 얼마전에 있었던 반란 사건을 생각해 가지고 물어본 일도 있지요? 어쨌든지 그는 층계에 서서 자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유대 사람이지 그런 이방 사람이 아니다는 것과 길리기아 다소 사람이니까 작은 고을 사람이 아니다고, 이런 것이 22장 1절로 21절 가운데 있어요.

거기도 오늘 우리가 읽은데가 그 연설의 중간 부분부터예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왔던 부분부터를 오늘 여기서 낭독을 했는데 거기도 볼 것 같으며는 그 후에 두번인데 첫째는 제 일차 방문 때가 35년경 바울 선생이 다메섹에 갔다가 아라비아로 왔다가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때가 35년경이오. 그땐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에서 교사 노릇을 하고 있으면서, 구제품을 걷어가지고서 예루살렘 교회로 다시 왔던때,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던 그 때, 그러니까 주후 한 44년경인데 그 때의 일인지 우리가 확실히 정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지 그는 아마 생각건데 35년인 것 같아요. 예루살렘에서 묵시 가운데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리고 이 폭도들 한테 자기의 사명에 대한걸 이야기할 때 하는 말이 “주께서 나더러 이르시기를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에게로 보내리라.” 이렇게 멀리 이방 사람에게로 보내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는걸 이야기해서 자기 사명의 내용은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걸 여기서 이야기했어요. 그러고서 마지막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의 회개의 상태를 좀 이야기 한 것이 26장 9절로 18절 가운데 있습니다. 그건 어쨌든지 우리가 이제 바울을 놓고 보십시다.

바울이란 사람은 원래 길리기아 다소 출생이올시다. 길리기아 다소라는데는, 길리기아는 여러분 소아시아 땅에 길리기아도가 있지요. 그 길리기아도의 다소라고 하면 당시의 로마제국 내에서 헬레니즘 문화와 학문의 부로서 가장 뛰어난 도시의 하나였어요. 가장 훌륭한 헬레니즘과 학문의 부가 어디냐면 애굽의 알렉산드리아고, 또 하나 위대한 철학과 학문의 부가 어디냐 하면 저 아카이야의 아덴이고 또 하나가 길리기아의 다소였어요. 그래서 오늘날로 볼 때면 훌륭한 고등학문, 즉 대학이라는 것이 거기 있어서 준총(俊寵)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오. 생각컨데 바울도 거기서 공부를 했던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고로 그의 성부(성富)한 지식과 또 잘 연마된 지적인 활동이 여기 있었던 거요.

그리고 그러한 굉장한 데서 유대 사람의 지식으로 나서 그는 바리새인이오, 동시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그 천부장이 공회 앞에다 세웠을 때 거기에 공회원들 보고 자기가 자기의 신분을 이야기 할 때 말한 것이 23장 6절에 있어요. 그러면 자기도 바리새인이고 자기 아버지도 바리새인이다 그거요. 사람으로는... 그의 법으로는 나면서 부터의 로마시민이오. 그런고로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모양이지요. 이렇게 해서 인물로서 히브리 사람이고, 또 그는 위대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오. 가말리엘이라고 할 것 같으면 당대에 히브리 헤브레이즘의 최대의 선생의 하나예요. 아마 가말리엘 당대에는 그가 가장 높았던 인물이오. 그래서 교법사 가말리엘이 공회에 일어나서 말을 할 것 같으면 그 말이 비중이 커서 늘 근청(謹聽)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때에 예수님 당시나 바로 전에 그때 유대 사람들의 사회에 학문의 사회를 들여다 볼 것 같으면 가장 위대한 교사가 힐렐(Hillel)이라는 교사가 있었고 그래서 그 이를 높이 사모를 해서 그의 위대성을 모세 이래로 최대의 선생이라고 높일만큼 위대했던 인물이오. 그의 교훈이란 항상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오. 그리고 번문욕례적이 아니라 그말이오. 거기 비교해선 예문이 또 우리 한국식으로 보면 예문의 의식을 가장 강하게 잘 가르치는 샤마이(Shammai)라는 선생이 있어요. 이 두 할파가 죽 내려오지만 힐렐의 학파가 압도적으로 큰 세력과 영향력을 미쳤는데 이 가말리엘은 힐렐학파의 후계자로 또 일설에 힐렐의 손자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한 이한테 히브리학의 정통을 공부하고 또 히브리적인 정신을 가장 정신적이고 심오한 철학적인 것을 체득하려고 한 사람이오. 그것이 계율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그 큰 사상을 전해 주는 것이오.

예를 들면 힐렐이 가르친 도리 가운데는 누가 가장 부요로운 사람인가? 세상에 부자라 하는 사람이 많지만 누가 가장 부요로운 사람이냐? 자기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요로운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가르침이 있어요. 이러한 식 교육, 말하자면 실질적이고 심오한 내용을 가진 정신적인 교육을, 헤브레이즘의 진수를 가말리엘에게 받은 사람이오.

그러나 그는 나면서부터 가말리엘에게 가기까지 가말리엘에 가서 예루살렘에서 공부하기까지는 다소의 헬레니즘의 그 가장 난숙(爛熟)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오. 이렇게해서 헬레니스트요, 가장 강렬한 헬레니즘을 또한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감수성이 예민하고 또한 풍부한 지력을 갖고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던 그는 그걸 잘 흡수한 사람이오. 거기에 헤브레이즘의 정통과 정신을 또한 흡수한 사람이오. 그런고로 그이는 자기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 생이란 그것도 22장 3절에 말하고 또 그이가 가말리엘의 문하였다는 것도 그 자리에서 이야기 했어요.

그는 그런고로 헬라의 세계 헬레니즘의 세계라는 걸 아주 숙지하고 있었고 헤브레이즘이 가지고 있었던 약점과 강점을 잘알고 있었던 사람이오. 그가 자기 스스로를 말할 때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다. 내 족속을 말하면 베냐민족이다. 베냐민족하면 최초의 이스라엘의 임금을 낸 족인 까닭에 항상 고귀한 족이라고 존경을 받았던 족이오. 나는 베냐민족이다,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다, 내 열심으로 말한다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게 기독교가 처음에 나올 때는 조상의 유전에 위반이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난 반대하고 사람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한 사람이다. 그만큼 앉아서 잔소리만 한 사람이 아니고 또 적극성을 띠고 불의에 대해서는 직접 전선에서 싸운 사람이라 그거요.

그것이 그 사람이 지금 어떠한 인물인가? 인물을 아는 데에 몇가지의 생각할 조건이고 그가 처해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면 줄리어스 씨저, 율리어스 케자르가 로마제국의 기초를 닦아놓고 그의 후계자인 오거스터스가 비로소 황제로서 임페레토(Imperator)라고 해가지고 존엄자 오거스터스, 존엄자, 명령자로 떡 서서 거기서부터 엠퍼러(empero), 황제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명령자로 서서 그래서 아주 엄위가 있고 존엄하고 권위가 있는 로마제국을 제국다운 제국을 건설했더라 말이오. 이 로마제국 건설당시에 그 초대 황제인 오거스터스(Augustus) 실질상 로마제국의 제 일대는 그의 선배인 줄리어스 씨저요. 그는 황제라고 자기가 존칭은 아니 했을지라도 실질상 황제의 모든 기초를 닦고 권위를 다 쥐었던 것이오.

그러니까 보통 로마제국을 말할 때 율리우스 게사르, 씨이저부터 시작을 하지만은 좌우간 우리 주님은 이 오거스터스 때, 가이사 아우그스라고 하는 오거스터스때 났던 것인데 바울도 그때에 났던 사람이라 그말이오. 아무리 연령을 더 많이 해보아도 적게 해보아도 오거스터스때 난 사람인 것이오. 오거스터스는 주전 31년으로부터 주후 14년까지 산 사람이니까 그안에 바울이 났던 것이오. 오거스터스 지나서는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37)라는 황제가 무난하게 그 제국 창업한 제국을 잘 지키고 나갔어요. 그 다음에 나온 갈리굴라(Caias, AD 37-41)가 있고 그 다음에 클라우디어스(Claudius, AD 41-54)가 있고, 그리고 네로(Nero, AD 54-68)가 있는데, 이런 황제들이 있는 동안에 그는 살았어요. 즉 다섯 황제의 기간동안 그는 로마제국의 판도 안에서 살았던 것이오.

그러면 로마제국을 지금 건설해서 창업의 그 찬란한 영화와 위대한 능력, 창업을 했으니까 위대한 능력을 가진 시간이오. 그리고 그것이 또한 가지고 있는 세계 정책에 의해서 헬레니즘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해 들어가는 것, 즉 배척하지 않고 그걸 짜부러뜨리지 않고 그걸 풍부하게 받아드려서 자기네 것으로 삼으려고 오고 거기에 라틴족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 질서와 군대와 법률이라는 걸로 그리고 정치라는 걸로 찬란한 제국을 건설하고 그것을 지금 앞으로 더욱더욱 융성시키려 전진해 나가던 그런 시대에 바울 선생은 태어나서 호흡을 하고 보고 있었다 말이오. 퇴폐와 타락의 시기가 아니오. 융성과 창업의 시기였어요. 그러기에 여기서 기독교도 시작을 했어요. 그 생애를 통해서 창업의 로마의 제국의 화려한 것, 그것을 보아가면서 지냈던 것이오. 그런고로 이 로마의 문화란 헬라의 헬레니즘의 문화와 로마의 이 질서와 군대와 법과 정치와 그 번영을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바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 해가지고 일단 점령한 자리를 능력있게 통치를 하므로 로마제국 판도 사방에서 어디서든지 분란이 나서 괴로운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단속하고 철과같은 손으로써 누르고 있었다 말이오. 당시의 문화와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의 총 중심지는 말할 것도 없이 로마시예요. 메트로 폴리스(Metro Police)라는 로마시라 그말이오.

그러면 바울 선생은 이방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큰 사명을 느끼면서부터 내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려면 이방 어디를 향해야 하겠는가? 동서남북 어디를 가든지 다 이방이오. 유대사람들이 아니면 히브리 사람들 아니면 이방이오. 그런데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할 때에 그는 어디를 향했는냐 하면 서쪽을 향했더란 말이오. 그는 복음의 선전에 가장 중요한 기지로서 또한 복음이 나타내고 있는 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비교적 잘 갖추어 있는 자리로서는 헬레니즘의 찬란한 문화와 로마의 위대한 정치, 경제, 군대와 법률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어떠한 건강한 사회가 필요했더라 말이오. 그래서 그는 그런 건강한 사회에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오. 그러면 그것이 무슨 까닭이냐 하는거요.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 바울 선생이 전한 복음, 그것을 바울 선생은 잘 이해를 했고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성격, 또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그 인류에게 관계되어 있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어요. 대인속죄로 말미암은 구원과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이 큰 진리의 사실이 그 속에 들어가서 나타낼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거룩한 보편의 교회를 또한,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사회적인 결속과 활동을 통해서 나타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말이오. 정신적이고 심오한 진리의 내용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면에서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 이 복음에 있는 그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뭐냐하면 그 첫째의 한가지는 보편성이라는 거요. 복음이 가지고 있는 유니버셜리즘(universalism)이라는 것이오. 인종과 국경이라는걸 무시하고 방언을 무시하고 문화의 정도를 무시하고 어디까지든지 사람이 사는 곳에는 구원의 복음은 전달되어야 한다는 이 사실이오. 또 그래서 조성된 거룩한 교회라는 것은 실질상 바울 선생이 쓴 글에 의하면 하늘에 있고 땅에 있어서 이 보편이라는 것은 보통 다만 이 지구상에서 널리 퍼져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거요.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이 교회라는 것은 땅 위에서 인종이라든지 언어라든지 문화 형태라든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국가라든지를 넘어서 늘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국경을 넘어가는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은 만일 국경을 봉쇄하고 넘어오지 못하게 할 때는 그 봉쇄한 것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더 큰 세력이 필요한 거요. 쇄국했던 나라에 복음이 들어 갈려고 할 때는 쇄국을 부수고 개항시키고 개화시킨 그 국권이 움직일 때 함께 복음이 들어갔던 것을 여러분 아실 것이오. 이것이 중국에 복음들어 올 때의 현상이었고 한국에 복음들어 올 때 현상이오. 한국이 1884년에 엘렌 의사가 와서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때 이조 정부의 말기 때인데 그걸 허락지 아니 했어요. 그러니까 광해원을 만들어 놓고 앓는 사람을 낫게 하다가 갑신정변을 당해가지고 민중전이 그 사랑하는 조카 민영익이가 칼에 맞아 죽게 되어 있으니까 다른 것으로, 아무리 한의로 해보아도 안되니까 데려다가서 수술도 하고 약을 발라서 잘 낫게 해주니까 그것 때문에 왕비가 고맙게 여겨서 상을 내려야 하겠다고 하니까 다른 상은 필요없고 내 소원을 들어 주시라고, 소원이 뭔가 했더니 서양에서 선교사를 불러 들여와서 전도를 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 서양 선교사 들어오는걸 그 때 용인을 했다는 그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때의 전체의 정치 정세가 움직이는 까닭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다 되어 있지만 이렇게 해서 그 이듬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1885년에 처음에 한국에 들어와서 전도하기 시작하고 이렇게 해서 밀려들어오는 외세라는 것 때문에 개화할 수 밖에, 문호를 개방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일본은 어떠 했습니까? 양이(攘夷)를 할 것인가, 오랑케를 쫓아 낼 것인가 개항을 할 것인가 페리가 군함을 가지고 막 들어와서, 우라가에 들어와서 개항을 해라 하고 덕천막부(德川幕俯, Takigawa)때 마지막 장군에게 교섭을 하니까 최후 단안을 내려서 개항을 하고 그러고 들어왔기에 한국보다 빨리 서양 서구라파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기독교도 우리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왔어요.

그러면 이와같이 세계 국경을 넘어 서는 것이 복음이라고 하지만 복음을 든 사람이 국경을 넘을려는 것은 용이한 것이 아닌 것이예요. 여기 필요한 것은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국가적인 권위의 배경과 실지 세력이 뒤에 필요하다 그 말이오. 바울 선생은 그의 영민한 추리력이라든지 상상력으로써 현실 문제라는 것과 복음이 요구하는 이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 사람이오. 그런 위대한 지도자였고 인물이었던 것이오. 이렇게 해서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이라는 것은 땅 위에서라도 거룩한 복음은 널리 퍼져야 하겠고 퍼지기 위해서는 퍼질 수 있는 중요한 추진력의 본부가 있어야겠다, 중심 세력이 항상 있어야겠다는 걸 생각했다 그 말이오. 그는 그 중심세력이라는 것이 기독교인들 끼리 모여 앉아서 많이 모아 앉아서 세력을 만들자는 그런 의미가 아닌거요. 무엇이 복음을 실어서 보낼 수레가 되려는가 보았다 그말이오. 이걸 볼 때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이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세력을, 거기다 복음만 실어 놓으면 이건 퍼져서 저 북족으로 브리테니커와 저쪽 브리톤으로도 나가고 고올(Gaul)로도 나가고 어디로든지 퍼져 나갈 수 있다 생각했다 그말이오.

그런데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보다 더 긴박한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기독교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도의 문화성을 가지고 있다는걸 바울은 자기 자신이 신학을 엮으면서 말한거요. 고도의 문화성. 진리는 깊고 오묘해서 간단한 A, B, C로 모두 알아 듣는 것이 아니고 쉬운 말 몇마디로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연구를 요하는 것이다. 야만의 사회에서는 찬란한 꽃을 피기는 어려운 것이다는 말씀이오. 기독교가 야만의 사회에 들어가면 그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로 들어 갔을 때 그 사람들을 점점 개화는 했을지언정 그 사람들의 그 상태, 문화의 옅은 비천한 정도 그것 그대로해서 꽃을 피우지는 않는다 그말이오. 비천한 사회는 비천한 종교가 있는거요. 사람들이 미신에 젖었고 그러고 잡된 사신 우상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사신 우상이 와서 난무를 하는거요. 무당이 와서 난무하듯이... 고도의 사회, 이지적이고 고학적이고 문화적인 사회에 당하느냐면 당치 않는 이야기요.

그러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고도의 문화성이란 것, 비류없이 높은 문화성이라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문화적인 사회를 요구하는 거요. 문화적인 사회로 들어 갈수록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는 찬란하게 나타나 뵈는거요. 그 천리(天理)의 깊은 것을 진리의 깊은 것을 더 흡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야 하겠고 또 거기에 의해서 인생의 여러가지 문제를 심오하게 파고 이야기하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사회 현상을 가진 데라야 하겠고 인생의 가능성, 뭐든지 잘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집성해 있는 곳 이런 것은 고도의 문화 사회라는 것이오. 오늘날 세계의 대도시를 보세요. 뉴욕을 쳐다봐요. 런던을 쳐다봐요. 거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과학적인 정예(精銳)가 거기에 모여 있고 동시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인간 악의 극치라는 것은 저런 것이다 라는 것을 뵐 수 있는 것들이 모여 있는거요. 이런데에서 복음의 대답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제출되는 문제 앞에 대답이라는 것도 나오는거요. 저런 현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는 무엇으로써 대답하는가를 보여주는거요. 이런 사회 문제 하나를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그런 현실 앞에 서서 어떻게 서가는 것인가를 실증해야 할 것이란 말이오. 그러며는 필연적으로 이렇게 고도의 문화성을 가진 기독교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깊고 높은 진리와 비류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그런 복음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첫째, 그 우주관에 있어서는 절대 주권자의 주권 행사 아래 만물이 일사불란하게 질서를 유지하고 그걸 질서 안에서 우주의 만상은 운행되고 있는 것이올시다. 그 다음에 그 역사성을 볼 때에는 높고 높은 법칙하에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늘 창조되고 진행되게 되는 것이며 또 그것은 아무 목적없이 맹목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빛나고 높은 목적을 향하여 만유를 통어(統御)하고 사역해 나가시는 것이고 거기에 있는 높은 도덕성은 순결하고 고상해서 그 높은 사상, 높은 예술성 그런 것들 모두다 기독교 자체가 나타나 뵈는 것이오. 여러분, 기독교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가장 고귀한 예술이라는 것을 볼 수 있고 고귀한 도덕의 표준들을 찾을 수 있고 인류에게 있어 위대한 목적이 무엇이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을 보았고 그 역사는 어떤 고귀한 법칙 하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고 우주라는 것은 일사불란히 최고의 권위자 아래서 시장의 권위자 지극히 높으신 권위자, 엘 엘리욘(ןוילא לא) 앞에서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배운다 말이오. 얼마나 고도의 문화성을 가진 사상의 내용인가요? 이것이 야만의 사회에서 그 정화를 나타낼 것이 못되고 가장 높은 문화와 교양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에서 비로소 금과 같이 빛날 수 있는 내용이올시다.

그러기 까닭에 여러분,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내용이라는 것이 찬연히 빛날려면 사람들이 무지한 가운데 그냥 주저 앉아서 안되는거요. 사람들은 훨씬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고도한 위치로 자꾸 올라 가야 하는거요. 훌륭한 교회가 될려도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개인 개인이 고상한 인격자들로 구성이 되어야 하는거요. 적어도 그게 코어(core) 멤버가 되어가지고 움직여야 되는거요. 항상 비천한, 아주미말적인 말단적인 도덕 문제 가지고서는 이러고 저러고 논할 그런 타개할 만한 위치에서 저회(低回)를 하고 있어가지고 고도의 교회가 되지 못하는거요. 이러한 고도의 문화성을 볼 때에 복음의 참된 빛은 세계의 인종들 가운데에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데에서 비로소 그 바른 자세를 나타내게 될 것이 자명한 이치올시다.

바울 선생에게는 그런 사회는 어디냐 할 때 빅토리아나 엘람도에 있는 것이나 이란이나 애굽의 도시가 아니고 헬라의 로마의 세계로 봤다 그말이오. 헬레니즘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문화성을 봤어요. 깊은 철학을 보았어요. 로마가 가지고 있는 잘 통제되어 있는 질서를 보았고 그리고 건설할 수 있는 박력을 보았다 말이오. 그리고 그게 재패한 나라요. 패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요. 그러면 거기다가 복음을 실어 놔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 말이오. 그래서 세계의 신약의 복음이라는 것은 최초의 선포지인 예루살렘에서 마치 못자리에서 모를 옮겨다가 심듯이 합리적으로 옮겨심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 그러냐? 예루살렘은 어느덧 바울 선생이 활동하던 그 시기에 문제가 있는 도시가 되었어요. 그 문제라는 것은 유대주의의 철벽으로 둘러쌓는 도시가 되었다 말이오. 이것 없이 이방 사람에세 자유롭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구상과 진리의 내용을 구애없이 퍼쳐나갈 도시를 향해서 그런 세계를 향해서 가야겠다. 바울 선생은 그것을 원한거요.

이 복음의 모라는 것이 어린 싹들이 이식될 곳은 지금 강렬한 팽창력과 발전력을 가지고 있느 헬레니즘의 세계요. 로마의 세계이었던 것이올시다. 그것은 바벨론이나 프러시아의 동방의 세계가 아니고 또한 일찌기 문화의 모태 노릇을 해주던 메소포타미아도 아니고 또한 애굽의 삼각주도 아니었다 말이오.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그 다음에는 로마요. 그리고 과연 그는 거기로 갔어요. 복음은 서진하여서 서쫏으로 전진해서 헬라와 로마의 세계에서 활짝 피어나야 할 것을 그 비젼(vision) 속에서 그는 보고 있었고 그러한 바울은 그러기 위해서 전도자로 뽑힌 자기가 당연히 복음을 들고 교회를 세우면서 서쪽으로 로마와 헬라의 세계를 향해서, 그 심장부를 향해서 전진해야 할 것이었단 말이오.

복음의 고도의 문화성에 대한 그의 정당한 이해와 복음이 가진 높고 큰 세계를 이 세계로 택하신 백성들을 듣게 하여 거기서 인류 사상이 찬연히 빛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출현케 할려고 하는 바울 선생의 이 정당한 세계관, 사관은 그의 사명의 수행지로서 헬라 로마의 세계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올시다. 바울 선생의 이런 지식과 통찰력과 열정이 자기에게서 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그에게 그걸 열어서 깨닫고 그 사상이 점점 성숙해서 확고하게 되게 하신 것이올시다. 그는 오래전부터 성신의 가르치시는 큰 은혜 속에서 그의 고도의 사상과 관찰들이 형성되었던 것이올시다. 실로 성신님이 가르치신다는 일은 그 누구에게 있어든지 일조에 몇가지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생명의 양식으로 그 말씀을 먹으면서 자라나는 사람들은 그 동안에 벌써 성신님께서 당신이 그릇으로 쓰시기 위하여 적절하게 그들을 가르쳐서 함축있는 사상의 터 위에 확립하도록 해 주시는 것이란 말이오. 이와같이 성신의 가르치심은 가르침이라는 것이 단편적이고 일조의 문제고 잠시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길게 그를 양육하고 교육하고 그에게 거룩한 사상으로서 점점 축성하게 축적하게 하시는 것이올시다.

바울 선생은 그러한 거룩한 정신 하에서 서쪽으로 갈려고 했고 그 일을 위해서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제3차 여행을 끝내고 올 때 배를 타고 마지막에 이 팔레스틴으로와서 드로에 내렸을 때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큰 환란이 거기서 기다린다고 말을 했지만 바울 선생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예루살렘으로 갔던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 가이사랴에 왔을 때는 일곱 집사의 하나인 빌립의 집에 들어갔더니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와가지고 바울 선생의 띠를 가지고서 자기 손은 묶고 장차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띠 임자를 이렇게 묶을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그러니까 그 일행이 다같이 거기 있는 사람들 앞해서 예루살렘으로 부디 올라가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러지 말라고, 왜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는가? 내가 거기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죽는 한이 있더래도, 죽을지라도 나는 거기 간다. 그런 간곡한, 공고한 결심을 하고 들어 갔어요.

그러나 그는 거기에 가서 폭도에게 잡혀 가지고 이제 목숨이 어떻게 될려는지 천부장은 어떻게 할려는지 해서 천부장은 그를 심문해 봐도 모르겠으니까 공회에다 내놨었는데 공회에서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는 그 밤에 그날 밤에요. 사도행전 23장 11절 보면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이름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해야 하리라.” 이것이 주후 58년 6월의 일인데 로마로 가기 전 한 2년이나 전일인데... 그렇게 로마로 갈 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때 이래로 바울은 항상 마음이 로마를 향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로마로 가야겠다. 끝까지 로마로 가서 일을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면 그가 그러한 정신과 또 그러한 사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 큰 구상을 잘 이해하고 깨닫고 전한 그런 사상, 그런 사상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서쪽을 향해서 가야 한다는 정신 하에서는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았을 때 서진을 지금 해야 할 것인가? 자기 환경을 돌아 볼 때는 마게도니아에 가서부터는 지금까지는 무슨 말을 썼던지 유대 사람을 만나면 히브리 방언 즉 아람 방언을 썼겠고 일반 사람들을 만나며는 헬라어를 썼겠지마는 이제 저쪽으로 가면 거기는 아마 주로 헬라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오. 그러면 헬라어는 마게도니아 사람이 와서 청할 때도 헬라어로 이야기했을거요.

바울 선생은 자신이 나면서부터 자기 어학이 헬라어요. 말하자면 양 방언이란 말이오. 아람 방언하고 헬라어하고 또 성경을 많이 공부했으니까 히브리어하고 이렇게 하고 있었고 또 그는 로마에 가서 썼으면 아마 라틴말로 썼을거요. 이렇게해서 어학으로도 섬부(贍富)한 인물이오. 자기와 같이 가던 실라라는 사람도 -실바누스- 헬라어를 잘 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누가는 원래 아마 빌립보 사람일 거요. 헬라 사람이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 사람이오. 이렇게 해서 다 그 사람들은 어학으로도 무장 되어 있는 사람들이오. 그러기 까닭에 그때 드로아에서부터 바로 마게도니아 땅에 가서 전도를 시작하는데 어학에 지장이 없었다 그거요. 그것이 큰 지장이 될뻔 했는데 어학에 지장이 없이 자유롭게 가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마게도니아 사람이 오라고 하는데 그것은 덮어 놓고 아니다 하고 그래야 할 것인가? 준순(逡巡) 방황할 것인가? 지금까지 여기도 못가게 하고 저기도 못가게 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나가서 해야 할 곳은 어딘가? 결국 이 아시아(도)가 아니고 이 아시아 이외의 다른 어디로 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둘 중의 하나요. 일단 돌아가서 다시 출발을 않으면 여기서 그냥 전진을 하든지 그러나 자기네가 원래 나올 때의 예산대로는 그렇게만 하고 돌아 가려고 한 것은 아니오. 즉 못했으니까 이러고 주저앉고 있는 것이지 그런고로 자기네의 원래 소원대로도 상당한 여유를 두어두고 앞으로 많은 시일 동안 전도를 해야겠다고 나섰던 거요.

그러면 그들의 결론은 결국 마게도니아로 가자. 마게도니아로 가자. 이 환상가운데 마게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는데 그게 하나의 자극이 되어서 우리가 마게도니아에 가서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이것이 바울 선생이 생각했던 것이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다같이 그럼 마게도니아로 가도록 해 보자고 의논을 해서... 왜 그러느나 하면 이 환상 가운데서 마게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청한 것을 보며는 주께서 우리를 마게도니아로 보내사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하실려고 하신 뜻이 있는 것 같다. 이미 그런 것 같다는 정도에서 끝내지 않고 그것이 분명하리라고 생각했을 거요.

그것이 분명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다른 외증은 없어요. 그런 문제는 다른 외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대체로 성신께서 나를 지금 이렇게 가라고 하시는가를 확정 할려면 반드시 그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해요. 기도하고 이것이 주님의 뜻이면 너희 속에 큰 확신으로 주셔 더 준순 방황하지 말고 나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이것이 보통으로 있는 일이오. 이렇게 해서 기도하는 가운데에서는 자기가 따지면 말이오. 아주 이지적인 사람이 잘 따지는 것이오. 만일 안 간다면 무엇인가? 안 간다면... 그러면 그 대신 어떤 효과 있는 일을 내가 하느냐 그걸 따지는 거요. 내가 만일 안 간다면 그건 결국 내가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에 대한 것을 의심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걸 따지는 거요. 따진 결과 결국은 내가 믿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려고 하고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기도해 오고 저 서쪽, 저 세계를 향해서 갈려고 했으면 더 기다리고 자꾸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나가자 하고 나갔어요.

그러니 바울 선생으로서는 그때에 50이 넘은 나이오. 이제는 적극적이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할 터인데 복음을 그쪽으로 이식하겠다는 큰 일을 이제 언제까지든지 유예하고 있을 것인가? 이제는 밀고 나가자. 아마 그러한 마음의 확신이 생겼을 거요. 그러기 까닭에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이 우리를 부른 그것은 하나의 자극이 되지만 요컨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가도록 정신을 한번 쇄신케 하시고 깨우치시고 또 생각하게 하신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현실에만 몰두해 있었다. 이 아시아에서 뱅뱅 도는 것으로 몰두해 있었고 항상 거기만 할려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오. 일단 대륙을 바꾸자. 이제는 유럽 대륙으로 들어가자. 여기서 유럽대륙으로 들어 갈려고 새로운 생각을 한 거요. 자기네 생각하고 보던 시야를 돌렸어요. 넓은 세계로, 헬레니즘의 세계로 돌렸단 말이오.

이런 큰 비약을 하려고 할 때 물론 그에게 있어서는 생각할 여지가 있어야 하고 그런 생각을 여념이 없이 그냥 현실에 붙들려 매달렸던 것을 현실을 막아 놓으신 다음에는 좀 생각해라. 봐라. 너는 지금까지 무엇을 기도하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네가 준비가 다 되어 있고 나도 지금까지 너를 뒤에서 붙들어 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일을 준순하고 기다려야 하느냐? 아마 그랬을런지 몰라요. 그때 그 마음 가운데는 “아니다. 이제는 더 주저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헬레니즘의 새로운 대륙을 향해서 가자” 하고 떠났던 거예요. 그것이 결국은 주님께서 보증하시는 일이 계속해서 자꾸 일어나는 거요. 주님께서 보증해 나가는 일이...

그러면 이런 성신님의 인도하시는 그 인도의 방법일지, 혹은 인도하시는 모양, 양상이라는 것은 그게 단편적인 한 두 가지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그런 것으로 알아 듣지 아니한다는 것이오. 그건 나를 길러서 내가 충분히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동시에 성신께서 감화하셔서 어떤 문제 앞에 내가 방황하고 문제를 포촉을 하지 않고 있을 때 같으면 그것이 무엇이 됐든지, 환상이 됐든지, 꿈이 됐든지 혹은 현실이 됐든지 나에게 어떤 자극을 주어가지고 좀 생각좀 해라. 오라! 너는 잊어버리고 있느냐 하고 할 때 “아, 내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그 동안 잠시 현실의 여러가지에 너무 몰두해서 공연히 바쁘다가 잊어버렸구나. 이제는 더 중요한 것, 내 생애 가운데 더 중요하고 하나님 나라 전진에는 더 중요한 이 문제를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거요. 마게도니아의 환상은 적어도 그에게 생각을 돌려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전진이 어떻게 되야 하겠는가? 너는 평소에 어떻게 생각해 왔던가? 그런데 지금 너는 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고 그걸 힐란 하듯이 물었을 거요. 사실상 바울 선생으로서 가지고 있던 사상으로 봐서, 서진의 사상으로 봐서 선진을 했어야 해요. 진작 서진을 했었더라도 상관이 없었을 일이오. 아시아에서 자꾸 뱅뱅 돌 이유가 없는 것이오. 그리고 이 서진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출발점이오.

그러면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뜻을 행한다 하면서 항상 너무 자기 현실이라든지 당면한 일이 자기를 압축해서 좀 더 중요하고 좀 더 크고 아니 그 보다 본질적인 일, 근본적인 일, 제일 강령이 되는 일은 뭐냐 하는걸 잃어버리기가 쉬운 거요. 그런데 너는 왜 그것이 가장 네 생애에 가장 강령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네 자신의 일은 열심으로 하기는 한다마는 네 전체의 주장이나 신념에 비출 때 모순되는 일을 하느냐? 주저 하고 저회되는 일은 하느냐 묻는거요. 마게도니아의 환상은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의 주의해서 생각지 아니했던 큰 문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역사적인 발전의 큰 단계에 대해서 다시 정신을 들여서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 “가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서쪽으로 보내셨다.” 그러고 떠났어요.

이것이 성신님의 인도하실 때의 양상인 거요. 이런 것은 대체로 하나의 퍠턴이오. 여러분들도 만일 성신님의 인도를 받아서 자기 생애의 길을 갈려고 할 때는 그런 문제, 어떤 중요한 문제 앞에 이를 거요. 그런데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 문제와 자기가 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서로 맞지 아니할 때가 있는 거요. 그런때 기도하고 당연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전진하도록 하시는 거요. 이런 것을 우리는 우리 생애 가운데서 경험하기도 할 것이오. 중요한 것은 항상 성신님의 인도는 먼저 할 것은 먼저 시킬려고 그러고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아주 큰 문제를 지역 말단의 문제보다도 먼저 앞세우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거룩하신 주님이시여. 주께서 저희를 부르사 주님의 크신 계획 안에 두시고 일을 이루실려고 하실 때 저희들은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관견하고 동굴속에서 제것만 생각하기 쉽사오나 때를 따라서 자극하시고 눈을 여셔서 새로운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을 믿사옵니다. 이리하여 저희들이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 가장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고 생각하게 해 주시고 시기 놓치지 않고 적시에 생각할 수 있게 하시고 이리하여 주저없이 이 크고 주님의 거룩하신 뜻에 합당한 길을 향해서 용기있게 전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들의 가는 길을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항상 목전에 구애되어 가지고 있으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지 못하는 데가 많이 있습니다. 원하시는 그 일을 향해서 용기를 가지고 주를 의지하고 발을 내 디딜수 있는 용기도 믿음도 확실하게 가지게 하시고 그러나 오판하게 아니하고 확실한 바를 판단하여서 움직여 나가게 합소서. 이러한 길의 작용에는 성신께서 힘 주시고 함께 하시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러지 않고는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사옵나이다. 저희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생각이 주님의 거룩하신 큰 뜻과 그 나라의 거룩한 경영과 계획에 비추어서 항상 바른가 혹은 인간적인 것인가 내 자신의 것에 불과한 것인가를 바로 판단하고 바로 서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2.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