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하여 1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김홍전 목사님의 교회에 관한 강설들이 모두 4권의 책으로 묶여 나올 것인데, 그 첫째권이 출간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사역자를 통해 1979-80년에 내려준 말씀이 다음 세대의 교인들을 위해 새로운 형식으로 우리 앞에 놓였다. 20년 전 교회에 대한 의식이나 각성이 희박할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빈곤한 실정에서 내려 주신 말씀이지만,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결핍은 오히려 증폭되고 이전 세대에 뿌려진 잘못된 열매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강단을 통해 해명된 진리를 좀더 심각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교회 현실과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을 해명된 말씀으로 철저하게 비추어 본다는 의미에서 심각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교회의 표지(1-4강)
1) 본질의 교회
교회에는 신자들이 모인다. 그러나 신자들이 모였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교회는 아니다. 신자들이 모여서 종교 단체를 이루어서 찬송도 하고 기도회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정도의 사귐을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조직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는 소명을 받은 직분자를 통해 사도적인 토대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여 교회를 부르신다. 그러한 부르심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몸의 특성을 드러내는 독립된 실체가 이 역사상에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이 세상에 있지만, 본질의 교회, 참된 교회를 형식과 내용에서 갖추고 있을 때 그것을 교회라고 한다.
이러한 실체가 없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모인 종교 단체가 저절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종교 단체로 시작하다가 교회로 ‘진화’하는 법은 없고,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내놓으셔야 이 땅에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부르시고 교회를 내놓으면 그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리면서 지체로서의 자기의 본분을 다한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그 지체들이 명확한 형식을 취하도록 하실 때 교회가 서는 것이다.
2) 교회의 세 가지 표징
교회가 역사 위에서 진행하면서 교회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세 가지 표징을 제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말씀, 성례, 권징이다. 사도적인 복음이 바르게 전파되고, 그것이 보이는 형식인 성례로 집행되며, 또한 말씀의 통치를 받지 않는 자에게는 권징을 행하는 것으로써 교회의 외적 기준을 삼았다.
개혁 교회에서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세 가지로 구분을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한 가지이다. 사도적인 전통에 서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그 말씀은 보이는 형태로도 제시되고, 그것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권징으로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 두 가지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으로 언급된 권징이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하기 어렵다. “교회를 교회 아닌 것과 구별할 때 이 권징이라는 것이 거기 중요한 사실로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말씀
세 가지 표징이 권징에서 명료하게 나타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전파되는가라는 한 가지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선포된다는 의미에서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유교적인 영향으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더 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 임하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 말씀 그대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곳은 강단이지 신학교의 교단(敎壇)이 아”니다. 그렇기에 개혁 교회에서는 로마 교회의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강단을 두었다.
또한 요즈음에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라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복리나 종교적인 안위를 스스로 찾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훈련시키신 말씀의 사역자를 불러서 그의 양 무리를 먹이게 하셨다. 교회는 사도적 가르침을 전승하고 전수하는 ‘기관’이지 개인적인 종교 단체가 아닌 것이다.
이미 김 목사님의 다른 책에서도 충분히 해명된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정당한 사용은 성신께서 그 말씀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에 있다. 성신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면 첫째, 죄로부터 구원하신 사실이 드러나고, 둘째, 거룩한 삶으로 인도된다. 성신께서는 말씀의 뜻을 가르쳐주신다는 의미에서 인도하실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킬 힘을 주시고 붙드신다는 점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기의 생활 전체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새 옷감으로 헌 옷을 기우는 것처럼 자신의 길의 일부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생각은 버리고 온전히 성신을 의지하면서 나간다. 이처럼 성신의 철저하고 전적인 인도를 받고 나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품성을 가지고 또한 말씀이 권위를 행사하는 참 교회의 자태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의 이러한 사역에 대해서 막고 저항한다면 타락의 길에서 행하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 구원의 사실을 부인하는 종교적 연설이 강설을 대치하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이제 “성경에서 추출해 내서 만든 기독교가 배교의 교회의 큰 틀을 이룰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5-7강)
1) 교회에 대한 표상들
성경에서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르칠 때 몇 마디 선언으로 끝내지 않고 여러 가지 표상을 써서 교회라는 거룩한 실체를 알게 하셨다. 여러 표상들이 있지만, 개혁 교회에서는 네 가지의 표상으로 나누어서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전, 하늘의 예루살렘, 진리의 기둥과 터와 같은 표상으로 가르쳤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표상을 정당하게 해석하여서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경영은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마침내 이 우주의 영광의 충만을 가져온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해서 개인주의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거룩한 실체로서 바르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첫째,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속죄의 은혜를 입히시고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결 관계에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합력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은 아니고 오직 새롭게 하시는 성신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생명이 연결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 옛사람의 종교열을 부추겨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라는 외적인 표들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둘째, 많은 사람이 각각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성경에서 지체라는 표현을 한 곳들을 살펴보면 몸의 어떤 부분이든지 지체라고 하지 않았고, 어떤 특색이 있는 기능을 발휘하는 몸의 부분을 지체라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자기의 은사를 잘 발휘하고 전체에서의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여기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지체를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남의 사정에 간섭하는 것은 지체라는 말로 표현하려는 바를 바르게 잡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3.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8-14강)
1) 머리의 두 가지 의미
성경에서 머리라는 말은 두 가지 용례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신체의 일부로서의 머리이고, 둘째는 몸의 대표로서의 머리이다. 신체의 일부로서의 머리는 몸과 연합되어서 생명을 공급하고, 몸의 대표로서의 머리는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각각 표현한다. 그의 몸인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잘 받고 그의 통치를 현실에서 잘 드러내면서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은 무형 교회뿐 아니고 유형 교회에서도 그러하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엄격히 분리하여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머리이고 보이는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나 국왕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개혁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보이는 교회에서 드러내려고 힘써 노력하였다.
2) 주님을 따르는 교회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교인들이 각각 자기의 임무를 깨닫고 자기의 본분을 행하는 데서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성신의 전적이고 철저한 인도를 받아 나갈 때 우리는 아상(我相)이 없는 가운데서 주님을 따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땅에 계실 때 주님을 좇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누가복음 9:57-62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의 예가 기록되었다. 첫째는 서기관으로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 서기관은 진실하게 주님을 따르겠다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전통적인 메시야관을 다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머리 둘 곳도 없는 인자를 따르지 못하였다. 그것이 아무리 진정한 것이라고 하여도 세상적인 헌신으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둘째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하였는데, 그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장사(葬事)하고 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죽음은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장사의 일을 맡기고 그 사람은 주께서 부르신 신성한 부름에 응하라고 부르셨다.
셋째는 주께서 “손에 쟁기를 쥐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미 손에 쟁기를 쥐고 하나님 나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가서 가족에게 작별을 하겠다고 예수님께 청하였다. 여기에서 주님은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요구를 이루는 데에 있지 가정에 돌아가서 인간적인 정을 발휘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셨다. 주님의 뒤를 따르려면 자기의 가족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해야 한다(눅 14:26).
3) 교회아(敎會我)의 의식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땅에 계시면서 말씀하신 것과 형식은 다를 수 있으나 세상에서 나와서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나간다는 근본적인 점에서는 같다. 신자는 죽음에서 나와서 그리스도와 생명이 연결된 자인데, 자기 혼자만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된 일이라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면 많은 사람이 함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존재의 의미는 그리스도와 생명이 연결된 자, 즉 교회의 한 지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도 나를 교회의 지체로서 보시고 살았다고 인정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곧 나’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고 생활에서 힘써 준행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이 역사 위에 증시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몇 가지 생각할 점들: 개인적인 신앙의 덕목, 성도의 교제, 보편 교회, 참된 교회
1) 개인적인 신앙의 덕목
『교회에 대하여 I』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강설의 형식으로 가르치는 책이다. 교회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말씀과 구원의 문제,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른다는 의미, 성신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더 깊이 배운다. 구원과 자기 부인과 성신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보통은 신자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였는데, 이 강설을 통해 신자는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신자의 신앙도 곧 교회의 신앙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음을 배운다. 구원과 자기 부인과 성신의 인도 등을 교회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그 깊이를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배울 수 있다.
교회론이라고 하면서 파편화된 신학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경영을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점에서 이 강설들은 신학의 체계나 방법론에 대해서도 함축하는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다. 교회에 대한 강설은 또한 교회론에 대해서도 생각할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강설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좀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하는 신사적인 태도가 될 것이다(행 17:11).
2) 성도의 교제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ecclesia docens)를 이야기하였다면, 복음주의 교회들은 그 반대로 성도의 교제를 중심으로 교회를 이야기한다. 물론 성도의 교제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성도의 교제의 핵심을 무엇으로 이해하는가에 있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교제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적인 복음 전파에 의해서 형성된다. 따라서 순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의해 교회의 거룩성이 먼저 나타나고 “성도의 교통이란 그 후에 오는 것”이다. 교회의 외적인 표지에 대해서 모르고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를 이야기한다면 종교 단체에서 교회를 이야기하는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3) 보편 교회에 대하여
요즈음은 보편 교회를 이야기하면서 지역 교회를 경시하는 그릇된 경향이 강하다.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를 놓고서 보편 교회를 강조하는 것은 본질의 세계가 현상의 세계보다 더 참되다는 그리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서 교회를 설명하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복음주의권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주장을 편다.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보편 교회에 속했다고 주장하는 매우 그릇된 생각이 만연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회를 근본적으로 해치는 그릇된 사상이다. 이교적인 철학을 토대로 교회를 이야기하면 교회는 자연히 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김홍전 목사님은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시고서 곳곳에서, “보편의 교회는 구체적으로 항상 보이는 교회로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보이는 교회가 그렇게 지중(至重)한 것”이다고 가르치신다(7강). 『목자와 양 I』에서도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받겠다고 할 때 전제적으로 늘 주의해야 할 것은, 주님의 인도는 보편의 교회를 이 땅 위에서 인도해 나가시는 데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편의 교회는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볼 수 있는 보편의 교회의 자태가 땅 위에 인도를 받아 나갈 때에 나도 그 속에서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주님의 인도라는 것을 우리가 무엇으로 아느냐 하면, 땅 위에 있는 거룩한 교회를 인도해 나가는 데에서 아는 것입니다.……주께서 이 세상에 참된 교회를 두시고 그것을 역사 위에서 늘 인도하고 나가셨던 것입니다”고 가르치셨다(초판, 157-158).
보편적 교회에 대한 사변적인 생각에 대한 반발로 회중교회적으로 흐를 수 있지만, 김 목사님의 가르침에서는 주님 안에서 보편적인 교회를 이야기하고, 또한 이 역사 위에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직분자의 선포를 통해 불러 모으시는 곳이기 때문에 말씀 선포가 없는 보편 교회라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3절에서는 “이 보편적이고 가시적인 교회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금생에서 성도를 모으고 온전케 하기 위하여 직분과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주셨으며”라고 고백하여서 지역 교회가 곧 보편 교회임을 명확히 밝혔다. 어떤 개혁 신학자는 교회론에서의 사변을 제거하기 위해서 ‘지역 보편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4) 참된 교회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I』에서는 한국 교회에서 별로 들어보지 못한 말, 즉 참 교회 혹은 참된 교회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화란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29조에서는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표지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다. 교회의 세 가지 외적 표지에 대한 것도 바로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길게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 있는 모든 분파들이 스스로 교회라고 자처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참된 교회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함을 믿는다. …
참된 교회는 다음의 표지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 교회는 복음을 순수하게 전한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한다. 죄를 교정하고 벌하기 위하여 교회의 권징을 행한다. 요컨대 교회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따라 스스로를 다스리며 거기에 거스르는 것을 모두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머리로 인정한다. 이러한 표지로써 참된 교회는 분명하게 알려지며 아무도 거기에서 분리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
거짓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교회 자체와 교회의 규례들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에 자신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에서 명하신 대로 성례를 집행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좋게 생각하는 대로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에 근거를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사는, 그리고 거짓 교회에 대하여 그 죄와 탐욕과 우상 숭배를 책망하는 자들을 핍박한다. 이 두 교회는 쉽게 식별되며 서로 구별된다.”
이 고백서에 따르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이며, 거짓 교회는 자기들의 규례를 중요하게 여겨서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덧붙이기도 하고 빼기도 하면서 자기들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사람들의 단체이다. 개혁 교회에서는 개인의 신앙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어느 교회가 참된 교회이고 거짓 교회인가에 대해서는 매우 주의를 기울이면서 살펴보았다. 1561년에 작성된 화란 신앙고백서는 로마 가톨릭의 배교의 현실에서 이러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훨씬 더 교묘한 형태의 배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서 살펴야 할 것이다.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자연히 배교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심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5. 우리의 현실을 심각하게 돌아봄: 배교 - 대환난 - 적그리스도
배교는 그리스도를 믿었던 교회가 그 믿음에서 떨어져가는 것인데, 그것은 포괄적으로 나타난다. 배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성경이 은혜의 방도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도 희미해지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서도 희박해지며, 더 나아가 교회가 사회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식으로까지 발전한다.
배교는 신학적인 문제이지만, 그러나 신학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세적인 복을 누리려고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있었던 아합의 시기는 배교의 시기였다. 자신의 탐욕 때문에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만족시킬 거짓 스승을 찾는 것이 배교의 자양분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탐욕을 종교적으로 만족시키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을 배반하는 일이 보편화되면 분별력이 없어져서 적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아는 일이 발생할 것이고, 신자는 대환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시부터 배교의 현상이 있었고 또한 환난이 있었고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였지만, 주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배교와 대환난과 적그리스도라는 것이 시대의 성격을 특징 지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조망할 때 어떻게 주님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가 우리에게 근본적인 것으로 제기된다. 교회아로서의 분명한 의식이 없이 세상에 취해서 산다면, 이것 자체가 곧 배교인 것이다. 『교회에 대하여 I』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이 안일한 가운데 아무 감각 없이 사는 것 같은 생활 태도를 취한다든지 그냥 세상에만 취해서 마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일과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산다면 그것은 심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느슨한 생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뒤로 물러가지 않으려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가만히 있으면 결국은 타락한 역사 현실을 만들어낸다. 신절을 지킨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전부를 드려야만 우리는 이 시대를 헤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부족과 연약함을 깨닫고 우리는 저자를 따라서 이러한 기도를 드린다. “저희들도 너무 듣기만 해서 면역성이 생기고 시먹어서 아무 것에도 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다양한 교훈과 가르침이 결국은 기독교의 다양성을 표시하는 현상으로 생각하는 정도라면, 그렇게 종교에 대해서 면역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심히 우려할 만한 큰일임을 다시 생각하옵나이다. 현재 저희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살피시사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9강의 기도문)
교회에 대하여 2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선물로 보내 주신 절기를 맞이하여 삼위 하나님을 경하하는 이 절기에 우리의 책상 위에는 또 다른 선물이 놓여 있다. 『교회에 대하여』 제2권이 바로 그것이다. 성탄을 의미 있게 지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꺼내서 읽을 필요가 있는데,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여섯 장들에서는 성탄의 의미로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계절에 교회에 대한 말씀을 읽는 것은 성탄을 매우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
『교회에 대하여』 제1권에서 우리는 교회의 표지에 대하여 배우고(1-4강), 교회의 첫 번째 표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5-7강)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8-14강)을 구체적으로 배웠다. 『교회에 대하여』 제2권에서는 교회에 대한 표상을 계속 배우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집이다, 새 예루살렘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는 상징의 의미를 살핀다.
교회가 무엇인가는 외적인 표지에서만 알 수 없고,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몇 가지의 표상으로써 교회가 무엇인가를 가르친다. 따라서 표상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주의해서 살피고 그 표상으로써 가르치는 바를 바르게 알 때 우리는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첫째 표상으로 말씀하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결 가운데 있고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사실을 현저하게 표현한다.
표상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익숙한 일은 아니지만 표상에 대해서 바르게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권선징악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표상에 대한 강해를 주의해서 따라가는 것이다.
1. 교회는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집 (15-19강)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구약의 성전 제도에 기초하고 있다. 이 말은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성전과 같은 ‘건물’이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성전이 성전이 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거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 곳에나 계신 하나님께서 그곳에도 계신다는 편재(遍在)의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으로 그곳에 거하시면서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성전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교회가 성신의 전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성신이 거하시는” 것에 있다.
하나님께서 신약의 성전을 지을 때 머릿돌로 삼으신 것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께서 그 기초로 쓰신 자들은 사도와 선지자이다.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교회에 대한 바른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교회는 유행하는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인 전통의 복음을 견지하고 그러한 표준 아래에서 나갈 것이며, 종교적인 감정에 휩싸여서는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교회가 완성에 이르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완전에 이르게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여서 염세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면 안 되고,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시간 동안에 영광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 완전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일에 가담하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성전으로 쌓아 나가실 때에는 부패와 타락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새로 지으신 새사람으로 나와야 하며, 성전의 한 부분으로 삼으신 뜻에 따라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할 것이다. 불에 타는 풀이나 짚이 아니라 타지 않는 금이나 은으로 지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신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개혁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교회의 신성성을 무시하고 속된 것을 교회에다가 집어넣되, 기독교 문화라 해서 문화를 넣고 또 우상을 끌어다 넣고, 그래도 괜찮은 줄” 아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신사 참배 때에는 무력으로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하였지만, 이제는 더 교묘하게 사람의 정신을 부패케 하는 이상한 것으로써 교회에 샤먼적인 종교 형태가 가득하게 할 수 있다. 자기의 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거나 종교적인 감정만을 자극하는 것은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일이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심을 밝히고 신자도 산 돌로서 교회로 쌓아지는 사실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돌로서 세상의 세력을 파쇄하고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우리도 산 돌로서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지고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말씀의 가르침이 희미하여지고 종교열이 강조되는 시대에서는 더욱 이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표상은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상으로 보충된다. 성경에서 ‘집’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는 ‘건물’ 혹은 ‘예배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식구’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고 돌보시는 가정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의 권위에 대한 정당한 순종이 있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을 받고 전진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교훈은 이러한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2. 교회는 새 예루살렘 (21-23강)
교회를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데,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혹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 혹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른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때에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이야기하였는데, 예루살렘이라는 표상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거주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만 ‘통치의 보좌’를 두고 다스리신다는 더 확대된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통치의 보좌를 두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사모하였으며, 시편 137편의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차라리 생명을 유지해 주는 오른손을 잊어버리겠다고 고백하였고, 다른 여러 시인들이 구한 것도 예루살렘의 복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통치하시지만, 그 만물에 대한 통치를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예루살렘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은혜를 입히시고 언약을 친히 이루어 가시는 교회를 가리킨다. 마치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거하시지만 모든 곳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고 거하시는 곳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통치를 새 예루살렘으로 가르친다.
“새 예루살렘”이라는 말로 종말에 완성될 교회를 표시하기도 하였는데(계 3:12; 21:2), 또한 현재의 교회를 표시하기도 한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구약의 예루살렘, 혹은 시온 산과 대비하여 신약의 교회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이야기하고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예배드리는 신약의 백성들이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가르친다.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얻은 자녀는 육체를 따라 얻은 것이지만 자유자(自由者)인 사라를 통해서는 약속의 자녀를 얻은 것처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교회는 육신의 힘으로 율법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능력으로 율법을 행하면서 사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이 성신의 힘으로 나타난다.
한국 사람들은 인정이 많다고들 하는데, 그 인정이라는 것이 대체로 가족이나 친척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우 불친절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항상 자기와 자기의 식구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미미하고 비천한 데서 우리의 생각을 높이 들어올려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한다.
3.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 (24강)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땅 위에 좌대(座臺)를 만들고 그 위에 동상이나 비석을 세웠는데, ‘기둥’은 좌대 위에 있는 동상이나 비석이나 기둥을 가리키고 ‘터’는 그 아래에 있는 좌대를 표시하는 말이다.
그리스 건축에서 기둥과 터는, 첫째, 어떤 인물을 표시하고, 둘째, 빛을 드러내며, 셋째, 어떤 말을 전한다. 따라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사실은, 첫째,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둘째, 산 위에 있는 것처럼 빛을 드러내고, 셋째, 말씀을 선포해 나간다.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에서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나고 빛으로 드러나며 그의 말씀만이 높이 선양되어야 한다.
4. 교회의 표상적 지칭들의 종합 (25-28강)
교회에 대한 네 가지 표상들 -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전, 새 예루살렘, 진리의 기둥과 터 - 을 하나씩 살펴본 다음에는 네 가지를 종합해서 검토한다. 이 네 가지 표상은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라는 전체 안에 있는 성격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상적인 용법에서 일종의 통일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 관계를 가리키며 또한 신자 사이의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신비한 생명의 연결 가운데 있으면,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거기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 전제된 사실을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말이 교회가 ‘하나님의 전’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면서 구원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고,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본질적인 실재 세계가 이 땅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도록 하신다. 따라서 신자들이 자신의 종교열을 앞세워서 무엇을 만들어 나가려고 할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개인으로서 순종할 뿐 아니라 교회로서의 순종을 드리면서 나가야 한다. 특히 예배를 드리거나 찬송을 드리거나 헌상을 할 때에 교회아(敎會我)로서의 각성을 가지고 행해야 할 것이다.
‘새 예루살렘’으로 교회를 표시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거하면서 통치하시는 사실을 더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도 신정(神政)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냈는데, 신약에서는 제2위이신 성자께서 신인(神人)이 되심으로써 구원의 경륜을 더 밝히 드러내시면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세대주의에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더 넓은 범위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영광의 나타남을 위해서 있는 준비적인 단계이고 그리로 도달하게 하는 방도로 준비하신 기관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말을 중세기 교회에서는 오해하여서 교회가 일반적인 진리도 다 전유하는 것처럼 생각하였고, 요즈음에는 과학적인 지식으로 성경을 재단(裁斷)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성경 전체를 영감(靈感)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무오(無誤)한 진리이며, 교회는 그 말씀에 담긴 거룩한 진리를 선양하는 기관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복음, 신령한 생활, 은혜의 방도들(말씀, 기도),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에 심각한 부족이 있기 때문에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사역을 바르게 깨닫고 차서 있게 가르치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5.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20강)
교회의 표상에 대한 강설 가운데 작은 ‘파격’이 있다. 그것은 부활절을 당하여 말씀하신 에베소 교회에 대한 강설이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라는 제목의 이 강설은 교회에 대한 강설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책 소개의 결론으로도 적합할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환난에 대해서 오래 참았을 뿐 아니라 열심이 있었고 자칭 사도라고 하지만 아닌 자를 시험해서 알아낼 정도의 성숙성을 갖춘 교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는 심한 책망을 받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사랑을 가지고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임을 배운다. 처음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애틋한 감정만은 아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대에 교회로 서서 가려는 교회로서는 20강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각오도 없고 정신도 없고 기민하게 활동하는 것이 없이 무엇이 와서 저절로 해 주기를 바라는 태도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뿐 아니라 가령 몇몇 교회가 바로 나아가야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바로 나아가겠다는 감정뿐이지 그 일을 위해서 자기가 무슨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용의는 없고 그냥 누가 와서 떠먹여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이런 불쌍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한 발이라도 앞선 사람이 먼저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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