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신앙고백 - 고백하는 행위의 중요성 1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요즈음에는 과학 기술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발달하는지 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이다. 과학 기술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뿐 아니라 대중도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다.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말미암아 사회가 전반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역사(歷史)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교양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컴퓨터를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된다. 역사가 거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역사적 신앙고백’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역사적인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공부하는 것은 고집불통의 보수적인 사람들의 일로 간주된다. 그래서 ‘사랑은 교회를 연합시키나 신앙고백은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식의 말이 회자(膾炙)되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사랑이고, 신앙고백과 신조는 머리만 크게 만들고 가슴을 차갑게 만들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따뜻한 마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은 대체로 신앙고백을 소극적으로 평가한다.
이에 반하여,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어떤 기독교인은 신앙고백을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하여서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신앙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것을 온몸으로 ‘고백’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신앙고백을 머리와 관련지은 사람은 신앙고백을 이미 ‘쓰인 것’ 곧 신앙고백‘서(書)’로 이해하는 반면에, 행위와 관련지은 사람은 온몸으로 ‘쓰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앙고백의 행위’와 ‘신앙고백의 내용’은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고백의 행위는 반드시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정리되며, 그 내용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도 동일한 고백의 행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와 관련해서 생각하고, 고백하는 행위에서부터 정리되는 ‘신앙고백의 내용’과 그 내용을 받은 사람이 동일한 고백의 행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다루겠다.
1. ‘신앙고백’에 대한 성경의 용례들
신앙고백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호모로기아’(ὁμολογία, confession)인데 어원적으로 ‘함께’(ὁμο)와 ‘말’(λογία)이 합쳐진 단어이다. 동사형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는 특히 법정에서 두 사람이 ‘동일한 것에 대해서 함께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부터 ‘동의하다,’ ‘공언하다,’ ‘드러내고 말하다,’ ‘서약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 성경에서도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 예들이 있다.2)
‘호모로게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함께 말하다’는 뜻 이외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다’(히 13:15),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다’(요일 1:9) 등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호모로게오’가 ‘찬양’과 ‘자백’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일상적인 용례와 상당히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을 동일한 말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찬송’이고, 말씀의 기준을 따라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 ‘회개’이다. ‘호모로게오’가 이러한 뜻으로 발전한 것은 예배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3)
1)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고백함
신앙고백이 어원적으로는 ‘함께 말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누구와’ 함께 말하는 것인가? 물론 나의 양심과 함께 말하고 다른 교인들과 함께 말하는 것도 포함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시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과 함께 말하는 것’이 신앙고백이다.4) 달리 표현하면, 신앙고백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하나님을 향해 ‘복창’(復唱)하는 것이다.
이것은 ‘호모로게오’라는 단어의 어원을 놓고 생각한 것인데 신약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을 가지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베드로 사도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전범적(典範的)인 신앙고백을 하였다(마 16:16. 참조. 막 8:29; 눅 9:20).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시면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 ‘혈육’(血肉)으로 지칭되는 연약한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없다(참조. 요 6:63; 고전 2:14).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교훈도 배우고 이적도 보았지만, 이것은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님께서 혈육으로 알려 주신 것이 아니었고, 단지 사람일 뿐인 베드로가 다른 사람보다 명민해서 스스로 깨우친 것도 아니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교훈과 이적을 사용해서 베드로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마음이 겸손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우치셨다(마 11:25-26).5)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마음이 높은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못했고 겸손한 제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서 바른 고백을 하였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복창한 것이었다.
요한복음에는 베드로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고백한 것이 나온다(요 6:69).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고백한 것이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내용적으로 같다.6)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그분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가르치셨으나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고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떠났다(요 6:60-62). 그때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대답했다(요 6:68-69).
요한복음에서도 베드로가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서 바른 고백을 한 사실을 지적한다.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갈 때 주님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요 6:65).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예수님께로 이끌지 않으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없다(요 6:44-45).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사실을 가르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사람이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고백했다.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요 14:24)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배울 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는 들었지만 거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신앙을 고백할 수 없었고 결국 예수님을 떠나갔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하다(요 6:63). “육신만으로는, 비록 그것이 인자(人子)의 육신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 즉 세상에 생명을 주는 목적을 성취할 수 없었다.”7) 단지 육신일 뿐인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이 진리를 알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오직 성신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해서 바르게 고백할 수 있었다.8)
요약하면, 신앙고백은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통해서 배운 말씀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계시의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우고 배운 대로 하나님을 향해 복창한다.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2) 찬송
‘찬송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הꕇꖷ)는 ‘호모로게오’ 혹은 ‘엑소모로게오’(ἐξομολογέω, ‘같은 말을 내놓다’)라는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행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원의 사실과 의미를 하나님께 아뢰었는데, 그것이 곧 찬송이고 고백이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새 노래’이다(시 33:3; 40:3; 98:1).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엑소모로게오. 찬송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면서 찬송을 드렸다(마 11:25-26; 눅 10:21).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을 때 그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고백이고 찬송이다.
히브리서 13:15에서도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호모로게오) 입술의 열매니라”고 가르친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처럼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제사를 드린다. 이러한 찬미의 제사가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즉 ‘찬송’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찬송, 곧 신앙고백이다.9)
3) 회개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는 일이지만(참조. 계 6:16),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달은 자는 자기의 죄를 고백한다(호모로게오, 요일 1:9). 우상을 섬긴 죄를 자백하면서 나아오고(행 19:18) 죄 때문에 병이 생긴 경우에는 죄를 회개하면서 병이 낫기를 위해서 기도한다(약 5:16). 하나님께서 죄라고 지적하시는 것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2. 신앙고백과 언약
1) 신앙고백의 세 가지 효용
‘호모로게오’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하나님과 함께 말하는 것임을 성경의 용례들을 들어서 살펴보았는데, 이제 그 영역을 좀 더 넓혀서 생각하겠다. ‘하나님께 말한다’는 점에서 ‘호모로게오’는 ‘찬송한다,’ ‘기도한다,’ ‘가르친다,’ ‘증언한다’ 등의 다른 단어들과 의미론적으로 같은 영역에 속하고 교차적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호모로게오’의 의미가 확장된다. 물론 다른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복창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의미론적으로 같은 영역에 속하는 단어들을 하나씩 살피기보다는 말을 하는 대상을 따라서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다.
첫째,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은 ‘찬양’과 ‘기도’를 가리키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고백은 ‘찬양’과 ‘기도’가 된다.
신자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호모로게오, 찬송하는) 입술의 열매”이다(히 13: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여 주신 사실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며 고백(증거)하는 것은 입술로 드리는 찬미의 제사이다. 로마서 15:9에서는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엑소모로게오)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고 가르친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찬송인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아뢰는 것인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주님께서 들어주시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상숭배처럼 가증한 죄를 짓는 것이 된다(잠 28:9). 이방인의 기도의 특징은 중언부언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다(마 6:7). 우리는 성신께서 말하게 하시는 것을 담아서 기도한다(참조. 행 2:4).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며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참여”한다.10)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자기의 현실을 해석하면서 주님께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신앙고백이 된다. 기도는 무엇을 따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을 명제적으로 표시하자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이다.”11) 삼위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나누면서 기도하는 것의 절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다.12)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마지막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송영(頌詠)으로 끝난다.
둘째, 교회 안으로 향하는 고백은 언약의 자녀에 대한 교육, 즉 ‘요리문답 교육’이 된다. ‘요리문답’(카테케오)라는 말은 ‘메아리치다’는 뜻인데,13) 배운 말씀을 하나님께 메아리치게 말하는 요리문답이 바로 신앙고백(호모로게오)이다. 교회에서 가르칠 내용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시면서 유월절 성례를 제정하셨고, 그때 자녀들에게 유월절 예식의 뜻을 가르치도록 하셨다. 자녀들이 유월절의 뜻을 물으면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고 가르쳐야 했다(출 12:25-27). 가나안 땅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유월절의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출애굽의 구원에 참여하였던 것이다.14) 신약의 부모들도 자녀를 하나님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쳐야 한다(엡 6:4. 참조. 신 6:7).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신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신자와 신자의 자녀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약속의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행 2:38-39). 주님의 죽으심을 성찬으로 기념하면서 신자는 십자가의 구원에 참여한다.
셋째, 교회의 고백이 세상을 향하면 이것은 ‘증거’ 혹은 ‘전도’가 된다.15)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시인(고백)하면 이것이 세상에 대한 증거가 된다(마 10:31-32).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그의 정치적인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한 증거”(호모로기아)를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대해서 선한 증거를 하고 살아야 한다(딤전 6:12-13).
말씀에서 배운 대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세상에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신앙의 요목(要目)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된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2-33). 여기에서 ‘시인한다’(호모로게오)는 말은 ‘고백한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고백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이 대비되어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여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여 그리스도를 ‘고백’하라고 하셨다(마 10:28).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데 신자는 그것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이 세상에 대한 증거이다.
2) 신앙고백과 언약: 한 가지의 세 측면
신앙고백을 세 가지 관계에서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세 실체가 아니라 한 가지의 세 측면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고 성신께서 깨우치시는 진리를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찬송이고 요리문답의 내용이고 전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호모로게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10-11).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복창하는 것이 신앙고백이고, 이것이 곧 찬송이고 자녀에게 가르치고 세상을 향해서 전파할 내용이다.
신앙을 바르게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회는 언약의 자녀를 가르친다. 요리문답 교육은 아이들을 온실에서 순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상을 향해서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어린아이들이 요리문답을 외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 물론 그 아이들이 자신들의 고백의 의미를 통투히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원수를 잠잠케 하는 능력이 있다(시 8:2; 마 21:16).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는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사 40:3).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는 교회는 이처럼 여러 관계에서 그 풍성함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사람의 입으로 반복될 때 이러한 효과를 낸다.
찬송/기도, 요리문답, 전도가 한 가지 실체의 세 면이라고 했는데, ‘한 가지 실체’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언약’이다. 신앙고백이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언약’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의 백성에게 가까이 오시어 교제를 창설하시고 그분과 교제하는 데로 초청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그의 백성에게 나아오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주시고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누리도록 이끄신다.
복음을 받은 자는 분기점에 서서 세상에 속한 자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지를 고백해야 할 때가 온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세상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 자기는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한다. 이러한 신앙고백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 언약의 교제는 더 깊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반대 가운데서도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언약의 백성을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언약의 관계는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시는 데서, 즉 ‘공적으로 고백’하시는 데서 정점에 이를 것이다(계 3:5). 주님께서 주님께 속한 자라고 시인하신 자들은 주님과 함께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복을 누릴 것이다(계 19:9).
3. 신앙고백과 교회, 그리고 구원
1)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
언약의 교제로서의 신앙고백은 ‘교회’와 연결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른 고백을 했을 때 주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陰府)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셨다. 베드로의 고백 이전에는 예수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지만, 베드로가 고백하자 기뻐하시면서 ‘내 교회,’ 즉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약 교회를 대체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뜻을 보이셨다.16)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당한 고백의 기초 위에 서는 것이고, 고백이 없이는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낸다. “교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 한가운데서의 송영이다.”17)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송영은 바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표현된다. 교회에 속한 사람 하나하나가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고, 교회 전체가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살아 있는 신앙고백으로써 자신을 나타낸다.
2) 신앙고백이 없는 신자?
신앙고백의 내용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고, 언약의 핵심이며, 또한 그 고백의 기초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그럴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시인한다’는 말은 ‘호모로게오,’ 곧 ‘고백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음으로 믿은 사람은 반드시 입으로도 고백할 것이다. 고백이 없으면 언약의 교제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고, 언약의 교제가 성립되지 않으면 구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 사람 앞에서 고백하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도 그 사람을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고백하시지 않을 것이다(마 10:33). 따라서 바른 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18)
신앙고백은 요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거룩한 언약의 교제로 들어가는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혈루병 앓던 여인을 고쳐 주셨지만,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으셔서 그 여인을 사람들 앞에 불러 세우셨다. 그 여인은 처음에는 두려워하였지만, 그러나 자기의 입으로 고백한 후에는 주님으로부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들었다(마 9:20-22; 막 5:25-34; 눅 8:43-48).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는데,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지금도 모든 신자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물으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대답을 피할 수 없다. 대답을 하지 않고 미루는 것 자체가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셈이다. 주님께서 정하신 이 길을 버리고 자기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몰래 들어온 자이고 주님께서 정하신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다(요 10:7-10). 그러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
3) 고백의 행위와 내용
신앙고백은 ‘찬송/기도’와 ‘교육’과 ‘증거’의 기능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백하는 행위’가 매우 중요함을 깨닫는다. ‘고백하는 행위’에 이미 ‘고백의 내용’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하는 행위에는 이미 ‘예수는 주님이다’는 고백의 내용이 담겨 있다.다음번에는 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내용은 무엇이고,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은 무엇이고, 세상에 대해서 증언할 내용은 무엇인가? 성경 안에 그 내용이 규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교회나 신학자가 정하는 것인가? (계속)
각 주
1) D. Först, "Confess," NIDNTT, I (Paternoster Press, 1986), pp. 344-48; O. Hofius, "homologeo, homologia," EDNT, II (Eerdmans, 1991), pp. 514-17.
2) 공개적으로 ‘확언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예로는 마 7:23; 10:32; 행 23:8; 24:14; 딛 1:16; 히 11:13 등을 들 수 있고, 언약의 관계에서 ‘공언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예로는 마 14:7; 눅 22:6; 행 7:17; 히 10:23 등을 들 수 있고, 법정에서 ‘증언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예로는 딤전 6:13을 들 수 있다.
3) Michel, "homologeo," TDNT, IV, pp. 199-220. 예배와 관련해서는 특히 pp. 202, 205, 213-14 등을 참조.
4) C. G. Bos, Believe and Confess, I (Inter-League Publication Board, 2002), p. 2.
5) J. Calvin, A Harmony of the Gospels, II (Eerdmans, 1972), p. 185; D. Hagner, Matthew 14-28 (WBC; Word, 1995), p. 469.
6) F. F. Bruce, The Gospel and Epistles of John (Eerdmans, 1994), p. 165.
7) G. R. Beasley-Murray, John (2판, WBC; Thomas Nelson, 1999), p. 96.
8)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Apollos/Eerdmans, 1991), pp. 290-93, 301-4.
9) W. L. Lane, Hebrew 9-13 (WBC; Word, 1991), pp. 550-52.
10) 페일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보복』(개혁 신앙 강좌 2; 성약출판사, 2003), 36쪽.
11) 김홍전, 『중생자의 생활』(2판; 성약출판사, 1999), 102쪽.
12) 유해무, “기도: 은혜의 방편?” 『개혁신학과 교회』, 9호 (고려신학대학원, 1999), 219-20.
13) 김헌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소개 (III),” 「성약출판소식」, 46호, 2004년 10월 18일, 4쪽.
14) P. Enns, Exodus (NIVAC; Zondervan, 2000), pp, 249, 259-65; N. Sarna, Exodus (JPS Torah Commentary;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91), p. 60; 테렌스 프레다임, 『출애굽기』(강성열 역;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226-27쪽.
15) M. Osterhaven, Our Confession of Faith (Baker Book House, 1964), p. 17.
16) 최낙재, 『하나님의 나라』(성서유니온, 1986), 70쪽.
17) 유해무, 『개혁 교의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647쪽.
18) 물론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신비한 점이 있어서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세례를 받고 교회에 가입하려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정당하게 고백하는가를 살필 의무가 있다.
성경과 신앙고백 - 고백하는 내용의 중요성 2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현대인들은 신앙고백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신앙’을 ‘사람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할 때,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무신론이라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다. 하나님을 고백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 깊은 데서부터 실존적으로 내린 종교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도 자신의 세속적인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자기의 감정과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감정주의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셈이다.
모든 사람이 나름의 신앙고백을 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신앙고백의 ‘내용’이다. 그 고백의 내용은 현재의 삶뿐 아니라 영원의 문제까지 결정하기 때문에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난번 글에서는 ‘고백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신앙고백이 ‘찬송/기도’와 ‘교육’과 ‘증거’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행위에는 이미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는 고백의 내용이 담겨 있고 행위와 내용은 나눌 수 없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신앙고백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겠다. 먼저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대표적인 신앙고백을 살펴보면서 그 고백이 신자의 삶에서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보겠다.
1. 여호와를 고백함
구약에서 대표적인 고백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여호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시니”(신 6:4)라는 말씀이다.1) ‘쉐마(들으라)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할 때 암송하는 고백이다. 죽음의 순간에 이 구절을 암송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 사람이 말을 할 수 없으면 임종하는 다른 사람이 이 구절을 고백하였다.2) 이 구절은 언제 어디에서나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고(신 6:7-9), 헛된 우상이 가득한 세상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고백이었다.
1) 나는 여호와로라 - 출애굽의 구원과 여호와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과 저녁으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름을 주시지 않았으면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면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주셨다(출 6:3).
이름을 주시는 과정은 좀 더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가기를 꺼리는 모세에게 ‘에흐예’(I AM. 한글 개역에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로 번역함)라고 말씀하셨는데(출 3:12) 모세는 보내신 분의 이름을 물었다(출 3:1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대답하셨다(3:14).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는 말은 ‘나는 내가 되리라고 한 그가 될 것이다’는 뜻이다.3) 3:15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은 3:14의 일인칭 ‘에흐예’(I AM)를 삼인칭 ‘이흐예’(HE IS)로 바꾸어서 주신 이름이다.4)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가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票號)”라고 하셨다(출 3:15).
모세가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고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출 5:2). 바로가 마음을 강퍅케 하면서 끝까지 저항하였을 때 여호와께서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출 6:7). ‘여호와인 줄 안다’는 말은 곧 바로를 심판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인 줄을 알게 하신다는 의미이다(출 8:10, 22; 9:14, 16, 29; 14:4, 18 등).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노래 중에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는 말이 나온다(신 32:39). 여기에서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HE IS)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이고, 우상과 달리 생살여탈권을 쥐고 계신 분으로 선언하신 말씀이다. 여호와께서는 구원의 일을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2)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여호와
여호와라는 말에는 ‘함께한다’(HE IS)는 뜻이 강하게 있는데(참조. 출 3:12), 그분이 함께하심은 조상과 맺은 언약대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내가 되리라 한 그가 될 것이다’는 이름의 의미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뿐 아니라 자기의 백성과 함께하시면서 통치하실 때에 더 풍성하게 나타난다. ‘함께한다’는 뜻을 가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5-46).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서 성막의 제도를 주셨다. 따라서 출애굽의 구원만을 강조하고 성막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것은 여호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니었다.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과 언약의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거룩하시다”(레 19:2)고 하시고,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로라”(레 22:32) 하신다.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지만, 여기에서 죄의 문제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언약의 말씀으로 받았지만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그 짧은 기간도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때 모세가 중보자로서 기도를 드렸고, 여호와의 함께하심과 영광을 구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고 선언하셨다(출 34:6).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여호와는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 곧 참된 자비하심이 있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없으면 그렇게 거룩하신 분이 죄인과 한 시간도 함께 계실 수 없을 것이다.
3) 여호와에 대한 고백의 실제적인 의미와 약속
여호와의 거룩하심과 인자하심을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시다”고 고백하였다. 가나안 땅에 많은 우상들이 있지만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고 한 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고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갈멜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백한 것도 바로 그 내용이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책망하였다(왕상 18:21). 엘리야는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드렸고(왕상 18:36), 여호와께서 불을 내려서 응답하시자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고 고백하였다(왕상 18:39).5)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신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은 섬기지 않고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돌보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출애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는 장차 바벨론에서 구원할 뜻을 보이시면서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를 더욱 가르쳐 주셨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실 때에도 “나는 여호와로라”고 선언하셨다.6) 여호와의 이름의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인 여호와의 종에 의해서 더 밝히 드러날 것이었다.
4) 여호와와 주 - 번역의 문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3계명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여호와[야웨]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대신 ‘아도나이’[주], ‘하쉠’[그 이름], ‘하샤마임’[하늘]이라는 말로 대신하였다(참조. 눅 15:18). 이러한 유대적 전통에 따라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는 여호와를 ‘퀴리오스’[주]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신약에서 인용한 70인 경과 구약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시편 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는 말씀을 신약에서는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행 2:35)로 인용하였다. 여기에서 여호와가 ‘주’로 바뀌었다. 요엘 2:32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을 로마서 10:13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 인용하였다.
여기에서 왜 ‘주’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성경의 기본적인 사상이고, 이것이 ‘주’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계약할 필요가 없는 대주재께서 당신을 낮춰서 계약을 했”고 “이렇게 계약의 위치로 내려오시기 전에는 즉 낮추시지 않으면 아니 될 그런 거대한 주재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이 야웨라는 말에 담겨 있는 중요한 계시”이다.7)
2.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함
신약의 대표적인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10:9).8)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한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분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심으로써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기’ 때문이다(행 2:36). 이 점에서 신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는 고백에 대한 주석이다.9)
1) 예수님의 생애와 주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시면서 계시하신 언약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성호는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님에게 직접 적용되었다. 예수를 ‘주’ 곧 ‘여호와’라고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10)
예수님께서 ‘주’라는 사실은 부활 후에 현저하게 드러나지만, 땅에 계실 때에도 여호와이심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다. 유대인과 논쟁하실 때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셨다(요 8:24. 참고 8:28). 여기에서 ‘내가 그인 줄’(I AM)이라는 말은 분명히 출애굽기 3:14이나 이사야 41:4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치 여호와를 믿지 않으면 출애굽의 구원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여호와로 믿지 않으면 죄에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 8:58에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고 하시지 않고 ‘내가 있느니라’(I AM)고 말씀하셔서 성자 하나님이 곧 여호와이시라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조금 나타내셨다.
예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계시하신 곳은 겟세마네 동산이다. 가룟 유다가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가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내로라”고 대답하셨다. ‘내로라’(I AM)는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신 것이고, 그 이름을 계시하시자 무장한 군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 그 장면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세 번 나온다(요 18:5-8). 마치 출애굽의 구원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된 것처럼,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진정한 출애굽을 이루는 그 시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여호와로, 주(主)로 계시하셨다.
부활 후에는 ‘예수께서 주이시다. 즉 여호와이시다’는 사실이 널리 선포되었다. 의심하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보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하였다(요 20:2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들어 시편 110:1의 말씀이 예수에게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낮아지시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다음에 하나님에 의해 ‘주’로 높임을 받았다(빌 2:5-11). 부활하신 그분은 이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다(롬 14:9). 옛적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었는데, 이제는 부활하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욜 2:32; 롬 10:13).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호와이시다.
2)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주님과 우리의 소망
구약의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면서 다스리신 것처럼, 여호와이신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신다. 여호와께서 성막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던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임마누엘로서 그의 교회에 함께 거하시면서 교회를 위해서 만물을 다스리신다(마 28:18-20). 이러한 약속에 근거하여서 사도들은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였다(행 10:36. 참고 계 17:14; 19:16).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의 복음 전파에 함께하실 때에는 두 가지 효과가 나온다.
첫째, 성신으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믿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한다. “성신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는 말씀대로, 성신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믿게 하신다. 마음으로 부활의 사실을 믿고 입으로 예수께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롬 10:9).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은 성부와 성자가 구원의 일을 행하신 것을 고백하는 것인데, 이것을 깨우쳐서 고백하게 하시는 분은 성신이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본다. 삼위의 사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시는 데에서 행하신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11)
둘째, 예수님을 ‘우리 주’로 고백한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우리 주’라고 고백한다. 교회는 그분을 ‘우리 주’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모든 계명을 배우고 순종하면서 살아간다. 서신서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사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롬 1:4; 고전 1:3; 고후 1:3 등).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편지를 보냈다(고전 1:2). ‘그리스도’에 대해서 고백하면 동시에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고백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사람으로서 고백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이고 ‘우리의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주님과 언약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간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과 많은 주들이 있으나 기독교인에게는 한 하나님과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고전 8:6). 따라서 우상을 섬기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과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
한 분 하나님과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여호와이시고 주가 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로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예수의 주 되심과 예수를 위하여 사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된 사실을 전파하였다(고후 4:5). 예수께서 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그의 백성들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신학적인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낮아지시고 높아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먼저 낮아지고 높아질 것이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낮아지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영광이다.
부활하신 예수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어 만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9-11). 신자들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소망을 갖고 오늘도 그분에게 순종하면서 산다(계 22:20; 고전 16:22).12)
물론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마음으로 깨닫고 입술로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이 곧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마지막 날에 주님의 얼굴빛으로 만족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서 우리의 고백이 완성된다. 부활의 몸을 입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는 그 영광에 참여한다.
3) 구주(Saviour)와 주님(Lord)을 나누는 것
우리 주위에서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과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구분하여 가르치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선교를 목표로 하는 단체에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렇게 가르치는데,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주님이라는 말은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고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롬 10:13).13)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구주와 주님을 구분하여 가르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구원의 문턱을 낮추어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다른 편으로는 그 단체에서 배운 사람들이 주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는 “제자”가 되어서 선교 사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은 사람을 새로 창조하는 놀라운 일이다. 기본적인 것만 겨우 믿게 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낮게 생각하는 이러한 사람은 자기들의 헌신과 노력을 높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높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법이 교회 안에서도 암암리에 들어와서 주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목사나 직분자들에게나 요구되는 것이고, 일반 신도는 구주를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초보적인 구원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장성한 자로 성장하는 것 사이에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단계론적인 경험을 토대로 나눌 수 없는 것, 즉 그리스도의 인격을 구주와 주로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주로 선언되지 않았으면 그분은 우리의 구주도 되실 수 없을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것을 사람의 경험을 토대로 나눈다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이다. 구약에서도 여호와[주]로 선언하는 것과 구원을 나누지 않았으며, 신약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언하는 것과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분리하지 않는다.
3. ‘내용’의 문제
1)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고백하는 것의 의미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고백을 살펴보았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에 대한 고백이 핵심에 있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는 고백이 그 정점에 있었다. 여호와와 주님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고백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 구원을 받은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다.
우리는 여호와와 주님의 이름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시는 것은 이름과 함께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고백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회복된 우리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자기 자신의 의미를 자기가 이룬 것에서 찾지 않고 삼위 하나님의 구원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얻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1문)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2) 바울 사도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
바울 서신을 읽을 때 어느 경우는 바울 사도가 매우 마음이 넓은 사람처럼 보이고 어느 경우는 양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빌립보 옥에 갇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시기심으로 복음을 전해도 용인하는 것을 보면 과연 큰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도는 개인적인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빌 1:18). 그러나 갈라디아서를 읽으면 다른 인상을 받는다.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할례만 더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천사라도 그러한 것을 가르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고(갈 1:8) 할례를 하려거든 오히려 그의 생식기를 잘라 버리라고 말한다(갈 5:12). 옥에서 쓴 빌립보서의 저자는 관대한 것처럼 보이고 갈라디아서의 저자는 고집이 센 사람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저자인가? 물론 아니다. 여기에 일관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전파되는 내용이다. 빌립보의 경우에서는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명예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라디아의 경우에서는 다른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에 사도는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교훈의 내용이 교회의 삶에서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14)
사도들의 교훈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이천 년 역사는 동일한 투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개인적인 것에는 관대하지만 교훈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것은 교회의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기회가 되는 대로, 우리는 “교회사와 신앙고백”에 대해서도 살펴보려고 한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은 성경에 나오는 신앙고백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신앙고백이나 신조는 어떤 배경에서 형성되었고,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생활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각 주
1) 개역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로 번역하였다. 히브리어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한 분’의 네 낱말로 이루어져 있고, ‘여호와’를 강조해서 말한다. 이 글에서는 원문의 강조를 살려서 번역하였다.
2) A. Edersheim, The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I (Eerdmans, 1953), p. 268; D. Williams, “The Jewish Shema,” http://www.geocities.com/Athens/Forum/5951/com505d.html
3)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는 말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에흐예’는 영어로 ‘I AM’ 이라는 뜻이고 ‘아쉐르’는 ‘that’과 같은 관계대명사이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로 번역했고, 한글 개역도 이것을 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자존자(自存者)이지만, 이 번역은 이 문맥에 잘 맞지 않는다. 이 문맥에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는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말이다. 3:12에서 ‘함께하겠다’(I AM) 하고 말씀하셨으나 모세가 순종하지 않고 이름을 묻자 I AM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정말로 내가 함께하고 내가 이루겠다’고 책망하시는 뜻이 담겨 있다. P. Enns, Exodus (Zondervan, 2000), pp. 101-103. 좀 더 나은 번역은, ‘에흐예’를 ‘I will be’로 옮겨서 ‘나는 내가 되리라 한 그가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ill be)로 이해하는 것이다. 김홍전, 『신앙의 자태』 1권 (성약출판사, 1986), 120-122쪽.
4) 유대인들은 הוהי로 구성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대신 ‘그 이름’, ‘하늘’, ‘아도나이’로 대신 읽어서 네 문자의 발음을 잃어버렸다. 후에 ‘아도나이’(주)의 모음을 붙여서 ‘여호와’라고 부르지만, 좀 더 정확한 재구성은 ‘야웨’이다.
5) 이 부분에 대한 좋은 강설집으로는 M.B. Van"t Veer, My God is Yahweh (Paidea Press, 1980), 특히 9-11장을 참조하시오.
6) W. Zimmerli, I Am Yahweh (John Knox Press, 1982), pp. 2-22.
7) 김홍전, 『하나님에 대한 묵상』(성약출판사, 1998), 177-178쪽.
8) 이 말은 예수님의 다른 명칭들, 곧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등이 덜 중요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른 칭호도 각각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지면의 제약 때문에 여기에서는 ‘주’라는 칭호에 국한하여 살펴볼 것이다.
9) 유해무, 『개혁 교의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72쪽.
10) 그리스와 로마의 배경에서 ‘주’라는 말은 왕이나 선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역사 비평학자들 가운데서는 ‘주’라는 용어의 그리스적 배경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께서 주님이시다’는 고백은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워드 마샬, 『신약성서 기독론의 기원』(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6), 133쪽. 그리스적 배경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부세(W. Bousset)이고 그의 책에 대한 비판은 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 계시』(엠마오, 1986), 151-157쪽 참조.
11) G.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Eerdmans, 1994), p. 376.
12) ‘마라나타’(고전 16:22)라는 말은 아람어로 ‘주님’을 뜻하는 ‘마르’와 ‘오다’의 뜻인 ‘(아)타’의 합성어이다.
13) 미국의 복음주의적 기독교인 사이에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Free grace salvation)는 신자와 ‘주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해야 구원을 얻는다’(Lordship salvation)는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해도 다른 의미로 쓰기 때문에 논쟁은 말꼬리를 잡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에 대한 간략한 정리는 C. Temple, “Lordship Salvation: Is it Biblical? A Study of the Lordship Salvation Controversy”와 거기에 언급된 문헌들을 참조하시오. www.dtl.org/salvation/article/guest/lordship-1.htm
14) G.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Eerdmans, 1923), pp.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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