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소개 (I)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소개 전체 목차
I.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유일한 위로의 복음
1.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
2.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
3. 팔쯔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서문
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출판과 상반된 반응
6.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들
II. 독립개신교회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 교회의 진행과 신앙고백서의 출판
2. 사도신경의 번역
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번역 원칙
4. 독립개신교회의 신앙고백
5. 새로운 출발점
III. 요리문답 교육과 요리문답 설교
1. 종교개혁과 요리문답 교육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교육
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설교
4. 살아 있는 고백서: 오래된 새것
성약출판사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출간한다. “역사적인 개혁 신앙과 그 신학을 오늘날 이어받고 전파하며 전수하는 일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위하여 서적을 출판”하는 것을 사시(社是)로 삼고 있는 성약출판사가 독립개신교회에서 번역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출간하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혁 신앙고백서들을 출간하는 것은 개혁 신앙에 입각한 강설집의 출판과 좋은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출간을 계기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과 번역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시의적절한 일일 것이다.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6세기에 독일의 팔쯔(Pfalz) 영방(領邦)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작성된 신앙고백서이며, 이 요리문답의 이름도 팔쯔의 수도 하이델베르크에서 나왔다.
하이델베르크는 라인 강의 지류인 네카르 강변에 자리하고 있고, 그림과 같은 고성(古城)과 1386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대학으로 유명하다. 인구 14만의 도시에 학생이 약 2만 명이고, 연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그들은 괴테와 칸트, 헤겔과 하이데거가 산책했다고 하는 ‘철학자의 길’을 걷기도 하고, 전쟁으로 반쯤 파괴된 고성에 올라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성의 건축미를 감상하기도 하며, 전망대에서 현대식 시가지와 네카르 강, 그리고 그 건너편의 라인 평원을 보기도 한다. 그들의 마음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주제가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진면목은 눈에 보이는 거기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그곳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에 주목한다. 물론 하이델베르크에는 우리의 요리문답과 관련된 사적(史蹟)들도 있다. 알프스 산맥의 이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풍의 건물이라는 오토 하인리히 궁은 하이델베르크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오토 하인리히가 지은 것이고, 그 옆에 있는 프리드리히 궁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을 쓴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이 지은 것인데, 그는 아버지가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증언할 때 함께 따라갔던 신실한 신자였다. 도시의 중앙에 있는 ‘성신 교회’는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곳이고 또한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가 주일 오후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설교했던 곳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신학부도 두 사람이 교수로 봉직하며 가르쳤던 곳이다. 많은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만, 하이델베르크에는 종교개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흔적을 생생하게 붙잡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을 꼼꼼히 살펴야 할 것이다.
1)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1)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루터는 1518년 4월에 하이델베르크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와서 “하이델베르크 명제”를 발표했다. 그는 이 명제에서 사람의 선행과 이성, 혹은 교회의 조직과 부를 의지하는 것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대신 ‘십자가의 신학’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루터가 활동하던 동안 하이델베르크는 여전히 로마 교회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야 비로소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들어왔다. 팔쯔의 새로운 통치자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544-1555)는 1545년 성탄절에 하이델베르크 성의 채플에서 미사 대신 개신교 방식으로 성찬을 시행했고, 다음해 1월 3일에는 하이델베르크의 시가지에 있는 ‘성신 교회’에서 성찬을 거행했다. 성찬을 개혁하면서 하이델베르크는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에 가담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지속적인 종교개혁을 위해서 팔쯔 출신의 개혁자로 루터의 동역자이자 후계자인 멜란히톤(Melanchton)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초빙했다(1546년). 그러나 그는 비텐베르크에서의 사역 때문에 거절했다. 게다가 1548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제국에 미사를 강요했고 하이델베르크에도 미사가 재도입되었다. 종교개혁은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개혁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카를 5세는 1555년에 쉬말칼텐 동맹에 속한 신교도 제후들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를 맺어 제국 안에서 루터교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하이델베르크에서도 다시 미사 대신 성경의 교훈에 따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뒤를 이어 오토 하인리히(Otto Heinrich, 1556-59)가 팔쯔의 선제후가 되었다. 1529년부터 루터교를 받아들이고 쉬말칼텐 동맹에 속하여 활동했던 그는 교회의 개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선제후가 된 그는 목사 세 명을 감독관으로 파견하여 7주 동안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그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청소년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고 성찬이 바르게 시행되지 않으며 백성들의 도덕적인 수준도 매우 낮았다. 그는 도덕적인 문제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뷔르템베르크 요리문답을 사용하도록 했다. 뷔르템베르크 요리문답은 26문답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도 주로 성찬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말씀에 대한 무지를 효과적으로 씻어낼 수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같은 좀 더 포괄적인 요리문답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하인리히는 목사의 교육을 위해서 ‘지혜의 대학’(collegium sapientiae)을 세우려 했고, 이 일을 비롯한 다른 문제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멜란히톤을 초청했다(1557년). 멜란히톤은 그가 아끼는 제자 우르시누스와 함께 하이델베르크를 찾았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출신일 뿐 아니라 자문과 방문으로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을 도왔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의 개혁자’로 불린다. 선제후는 멜란히톤의 충고를 받아들여 대학을 개편하고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교수로 청빙했다. 멜란히톤의 가르침을 따르는 스톨(Heinlich Stoll)과 딜러(Michael Diller)뿐 아니라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의 후계자로 일했던 보퀴누스(Petrus Boquinus, 혹은 Bocquin)를 청했고, 또한 멜란히톤의 추천으로 헤슈시우스(Tilemann Heshusius, 혹은 Hesshus)를 신학 교수로 임명했다. 헤슈시우스는 엄격한 루터주의자였고, 성찬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성격상의 부족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 논쟁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의 또 다른 계기도 된다.
2)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세 사람이 있다. 그들은 모두 하이델베르크 출신이 아니고 ‘하이델베르크에 온 사람들’이다. 그들을 영어 첫 글자로 재미있게 요약하자면 3P라고 할 수 있다. 3P, 곧 군주(Prince)와 설교자(Preacher)와 교수(Professor)가 하이델베르크에 왔다.2)
‘군주’로 지칭된 첫 번째 사람은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559-76)이다. 그는 상속자 없이 세상을 떠난 오토 하인리히의 뒤를 이어서 1559년 2월에 팔쯔의 선제후가 되었다. 열 명의 동생 가운데 남동생 둘은 신부가 되고 누이 다섯은 수녀가 될 정도로 그의 집안은 철저히 로마 교회적이었다. 그도 로마 교회적인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로마 교회의 부패도 가까이에서 목도하였고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 그는 개신교 집안이었던 브란덴부르크 제후의 딸 마리아와 혼인하면서 종교개혁의 전통에 접촉했고, 스스로 성경과 루터의 글을 읽으면서 개신교로 전향했다. 그 이유로 그는 아버지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했다. 그 기간을 믿음으로 인내했던 그는 아버지의 사후에 그 뒤를 이어 지머른(Simmern) 성주(城主)가 되었고, 3년 후에는 삼촌의 뒤를 이어 팔쯔의 선제후가 되었다. 선제후(選帝侯)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일곱 제후로 귀족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고 팔쯔는 독일에서 가장 큰 선제후령(選帝侯領)이었으므로 프리드리히 3세는 가난한 귀족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된 셈이었다.
그렇지만, ‘경건 제후’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자신의 부귀와 영화 대신 오토 하인리히의 뒤를 이어서 종교개혁을 진행시키는 데 마음을 썼다. 그가 당면한 첫째 문제는 성찬을 둘러싼, 엄격한 루터파와 온건한 루터파 사이의 대립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헤슈시우스는 엄격한 루터파일 뿐 아니라 성격상의 결핍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찬의 문제를 놓고, 집사였다가 목사로 임직된 클레비쯔(Klebitz)와 예배당 안에서 심한 논쟁과 다툼을 벌였다. 프리드리히는 두 사람이 성찬 집례 도중에 다툼을 벌인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을 해임하고, 멜란히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멜란히톤은 복잡한 논쟁 대신에 성경적인 단순함을 권고하는 대답을 보냈고, 그는 성찬에 대해서는 멜란히톤의 입장으로 정리했다. 성찬에 대한 멜란히톤의 견해는 칼빈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도 반영되어 있다.
새로운 선제후 프리드리히도 전임자 오토 하인리히처럼 교회의 형편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성찬에 대한 낮은 이해, 그리고 도덕적인 해이 등이 동일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처럼 성찬에 대한 신학자들 사이의 불일치뿐 아니라 말씀에 대한 교중의 무지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작성의 계기가 되었다. 교인들의 무지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깊은 관심은 뒤에서 살펴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설교자’로 표현된 두 번째 인물은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이다. 그는 14살 되던 해부터 7년 동안 프랑스 여러 대학에서 고전어와 법학을 공부하면서 위그노와 접촉했고, 개혁 교인으로 전향했다. 그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 제네바와 취리히에 가서 칼빈과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불링거(H. Bullinger)의 지도 아래 신학을 연구했다. 신학 수업 후에 그는 칼빈과 파렐(W. Farel)의 권유로 고향 트레베스(Treves, 혹은 Trier)에 돌아가서 라틴어 선생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점차 그의 복음적인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따르기 시작했는데, 그곳의 선제후이자 로마 교회의 대주교 요한은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는 기병을 모집하여 성을 공격하고 올레비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 3세가 보석금을 내고 그를 석방시켰다. 이것은 올레비아누스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과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고 또한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을 위해서는 올레비아누스가 적임자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개혁의 동지로 여겨 하이델베르크의 대학의 교수로 초청했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올레비아누스는 궁정 목사로 자리를 옮겼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위원회에서 일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발표된 직후, 『팔쯔의 교회법』을 작성하는 일도 하였고, 『확실한 기초』라는 요리문답 해설서도 썼으며 그후 계속하여 언약 신학에 대한 책도 썼다.3)
‘교수’로 언급된 세 번째 인물은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고향 브레슬라우(Breslau) 시의회의 후원으로 1550-57년까지 비텐베르크에서 멜란히톤의 지도 아래 공부했으며, 1557년에 멜란히톤과 동행하여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했다. 그후 그는 취리히를 방문하여 불링거와 교류했고, 제네바에서는 칼빈, 베자와 사귀었다. 그는 제네바 체류 기간 동안 성찬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받아들였고, 칼빈으로부터 그의 책들을 기념으로 받기도 했다. 멜란히톤의 지도 아래 온건한 루터교도로 시작한 우르시누스의 신학 수업이 개혁 신앙과 신학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그는 1559년에 고향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으나 루터파 시의회에 의해 개혁파로 몰려서 1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취리히로 가서 베르미글리(Petrus Martyr Vermigli, 1500-1562) 밑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베르미글리의 추천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왔다. 이때 그는 칼빈, 라스코, 멜란히톤, 불링거 등을 참조하여 라틴어로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작성했다. 이렇게 준비가 된 그에게 새로운 일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새로운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요리문답이 출간된 다음에는 요리문답의 주석서를 쓰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4)
3) 팔쯔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의 계기는, 첫째, 성찬에 대한 이해로 교회가 내적으로 분열된 것과 둘째, 성경에 대한 교인들의 무지와 낮은 도덕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프리드리히 3세는 신학교 교수단과 교회의 감독들과 직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회에서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는 우르시누스가 교리적으로 틀을 놓고 올레비아누스가 문장과 문체를 다듬었다고 하지만,5) 두 사람의 정확한 역할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또한 하이델베르크에는 두 명의 젊은 신학자 이외에도 다른 훌륭한 신학자들도 있었는데(Boquinus, Erastus 등), 그들 중에 누가 위원회에 속했는가도 확실하지 않다.
위원회가 1562년 12월에 요리문답을 완결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이것의 심의를 위한 특별 총회를 개최했고(1563년 1월 11-17일), 목사와 신학 교수와 감독관들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자 프리드리히 3세는 그들을 불러서 그들의 결정에 대해서 재차 확인하고 1월 19일에 서문을 써서 출판사에 넘겼다. 그 서문에서는 저자에 대해서 “이곳의 신학부 교수회와 모든 감독관들 그리고 고명(高明)한 목사님들의 충고와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의 요약 혹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요리문답을 작성했다”고 밝힌다. 우리는 두 사람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위원회 공동의 작업으로 발표된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팔쯔 총회의 결정으로 확정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지는 “선제후령 팔쯔의 교회와 모든 학교에서 가르치는 요리문답 혹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그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고백하는 일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요리문답(catechism)은 묻고 답하는 ‘교육 방식’에 대한 말이고, 묻고 답하는 내용은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단순히 청소년 교육용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이해해야 하고, 저작권의 문제도 교회의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
프리드리히 3세가 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다.6)
하나님의 은혜로 라인 강변의 팔쯔 백작, 신성로마제국 선제후, 바이에른 공작 등의 지위에 오른 프리드리히는 짐(朕)의 선제후령과 라인 강변의 팔쯔 백작령에 사는 감독관, 목사, 설교자, 교회와 학교의 직원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며, 이에 다음의 사실을 알리노라.
하나님의 말씀이 깨우치는 것에 따라서……짐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분과 지위와 통치권을, 단지 신민(臣民)들의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 그리고 도덕적이고 성실하고 정결한 기풍과 행실을 세우고 확립하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의 말씀을 모든 도덕과 순종의 유일한 기초로 정당하게 깨닫고 경외함에 더욱더 이르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데에 부단히 사용할 의무를 느끼노라. 그들이 영원한 복과 현세적인 복에 들어가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한마음으로 힘쓰며, 짐의 힘이 미치는 한에는 돕기를 원하노라.
……짐은 방년(芳年)의 젊은이들이 짐의 선제후령의 학교와 교회에서 모두 기독교적 교훈에 대해서 도무지 관심이 없고,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속적이고 확실하고 일치된 요리문답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선생들은 자기의 계획이나 생각에 따라서 지도하고 가르치는 중대한 결핍이 있음을 보노라. 따라서 갖가지 큰 악들이 나오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함과 말씀을 아는 데에서 장성함이 없고 통일된 교육을 받지 못하며, 잡다하고 불필요한 질문들과 가끔은 (성경에) 적대적인 교훈으로 (학생들이) 짐 지워진 것을 목도하노라.
……짐은 젊은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무엇보다도 거룩한 복음의 순수하고 통일된 교리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 가운데서 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노라.
따라서 짐은 이에 상응하는 주의를 기울여, 그릇된 것과 균일하지 못한 것을 철폐하고 긴요한 개혁을 꾀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짐의 정부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하노라.
따라서 이곳의 신학부 교수회와 모든 감독관들 그리고 고명(高明)한 목사님들의 충고와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의 요약 혹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요리문답을 독일어와 라틴어로 작성하여 출판에 부치노라. 앞으로는 교회와 학교에서 젊은이들이 이러한 교리로 경건하고 통일되게 교육받기를 원하며, 설교자와 교사 자신들도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 확실하고 항구적인 문답서와 수단을 사용할 것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매일 새롭게 시도하거나 (성경에) 적대적인 교훈을 도입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대들 모두와 각자에게 온유하고 간곡하게 권하고 명하노니, 그대들이 하나님과 신민(臣民)의 영예를 위해 또한 그대들의 영혼의 필요와 복을 위해 요리문답 혹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관심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노라. 학교와 교회에서도 젊은이들이 바른 깨달음에 이르도록 가르치며, 강단(講壇)에서도 평민들에게 부지런하고 온전히 교훈하며, 이것에 따라 가르치고 행하고 살기를 원하노라. 이로써 젊은이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고 훈육을 받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삶의 개혁을 허락하시고 현세적인 복과 영원한 복을 내려 주시고 허락하시리로다.……이 모든 것이 마침내 그대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노라.
서문에 프리드리히의 경건함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이해했을 뿐 아니라 그 권력을 신민(臣民)의 물질적인 안녕과 복지보다도 영적인 안녕과 복을 추구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수준이 낮은 것을 우려하면서 그 원인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데서 찾았다. 도덕적 타락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그는 더 깊은 데에 문제가 있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선생들이 성경의 교훈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가르치는 것이 근본적인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그 해결책으로 요리문답을 작성했고, 이 요리문답에 따라서 가르칠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적이고 사적인 도덕의 개혁을 허락하시고 현세적인 복과 영원한 복을 허락하실 것”을 소망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때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의해서 사회도 밝아질 것으로 이해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올레비아누스에게 제네바의 본을 따라서 『팔쯔의 교회법』도 작성하도록 했고, 11월 15일에 그것을 간행할 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52주로 구분하여 함께 출판함으로써 교회와 학교에서 매 주일 요리문답을 가르치도록 했다.
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출판과 상반된 반응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기대 이상의 반향을 일으켰다. 일 년 사이에 3판이 간행되었고, 같은 해에 라틴어와 화란어로 번역되었다. 라틴어로 번역된 요리문답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사용되었으며, 또한 화란어(1563), 프랑스어(1570), 영어(1572), 그리스어(1597), 헝가리어, 포르투갈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평민들에게도 가르쳐졌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대한 환영이 강했던 만큼 반대도 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다른 선제후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고 1566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폐기하지 않으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 밖에 놓일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 1555년에 작성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로마 교회와 루터 교회를 인정하고 칼빈의 가르침은 인정하지 않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사용하면 칼빈의 교훈을 전파하는 것이므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정신을 어기는 것이며, 또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밖에 놓인다는 것은 선제후의 직위를 빼앗긴다는 뜻이었다. 황제의 경고에 대해서 프리드리히 3세는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함을 이야기하고 자신은 칼빈의 저작을 읽은 적이 없으며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랐음을 밝혔다. 요리문답이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는 비난에 대해서 그는 “나의 요리문답은 자구(字句)가 성경에서 나왔고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요리문답의 여백에 기록된 성구가 보여 줍니다” 하고 진술했다. 그는 누구든지 성경으로 그에게 설명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듣겠다고 하면서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에만 소망을 둔다는 요지로 발언했다. 그의 확신에 찬 발언으로 대적들은 잠잠해졌고, 그 자리에서 “당신은 우리 모두보다 더 경건하다”는 지지를 얻기도 했다.
이러한 반대도 있었지만, 격려도 있었다. 불링거는 올레비아누스가 보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받고 4월에 즉시 답장을 보내면서 “이 책의 구성은 분명하며 순수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내용은 모두 쉽게 이해되며 경건하고, 또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풍성히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출간된 요리문답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시기를 원하며, 이 문서에 그의 복으로 관(冠)을 씌워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썼다.
칼빈 역시 1563년 7월 23일에 발행한 『예레미야 주석』을 프리드리히 3세에게 헌정(獻呈)했다. 헌정사에서 칼빈은 특히 성찬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프리드리히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성찬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상론(詳論)하고, 참된 신앙 때문에 프랑스나 네덜란드에서 쫓겨난 망명자들을 받아 준 데 대해서 감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전하의 대학을 빛내는 학자들 중에는 그들의 뛰어난 명성으로 널리 알려진 외국인들이 몇 명 있는데, 그들의 이름을 열거할 필요는 없겠습니다”고 덧붙였는데,7) 우리도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들
우리가 하이델베르크를 친밀하게 생각하는 것은 고색창연한 고성(古城) 때문도 아니고 독일 최고(最古)의 대학 때문도 아니며 괴테나 칸트와 같은 사람 때문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부름에 따라 각기 고향을 등지고 하이델베르크에 온 그 나그네들 때문이다. 그들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이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고후 6:9-10).
그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 무명의 성도들도 역시 유명한 자이고 산 자이고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가 삼위 하나님 안에 있음을 고백하였다(요리문답 1문).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한 그 나그네들 때문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道)”를 받은 우리도 동일한 고백을 하면서 동일한 길을 걷는다(유 3). “역사적인 개혁 신앙과 그 신학을 오늘날 이어받고 전파하며 전수하는 일”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 무명한 일이지만, 사실은 유명한 자가 하는 일이고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일인 것이다. (계속)
각 주
1).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과 요리문답의 작성에 대한 역사를 위해서는, 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I (Baker Book House, 1983), 523-535; J. W. N., "Introduction: Ursinus," in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Eerdmans, 1954), vii-xxiii; J. Visscher, I Belong: A Course of Stud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Premier, 1988), pp. 129-140; H. Hanko, "Ursinus and Olevianus," in his Portraits of Faithful Saints; 또한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Traugott Bautz, 1990, 93, 97); 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3판 (J.C.B. Mohr, 1959); Cyclopa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 (Harper & Brother, 1877) 등의 사전에서 관련 항목을 참조했다.
2). 3P에 대한 아이디어는 Arthur van Delen, only By Faith, I (Pro Ecclesia, 1998), pp. 5-7에서 얻었다. 세 사람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로는 Thea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Baker Book House, 1992)가 유익하다.
3) 영어 번역으로는, A Firm Foundation: An Aid to Interpreting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lated and edited by L. Birma (Baker, 1995).
4) 원저는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축약된 영어 번역으로는,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lated by G. Williard (Eerdmans, 1954).
5)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우르시누스의 『소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유사성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9문 가운데서 91개가 108문으로 구성된 우르시누스의 『소요리문답』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유사성을 넘어서서 더 이상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저작권에 대한 다양한 추측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J. Visscher, I Belong, The Teacher"s Lesson Book (Premier, 1988), pp. 137-138; L. Birma, "General Introduction," in A Firm Foundation: An Aid to Interpreting the Heidelberg Catechism (Baker, 1995), xxv-xxviii.
6) J.N. Bakhuizen van den Brink, De Nederlandse Belijdenisgeschiriften (Uitgeverij Ton Bolland, 1976), pp. 150-51. 일부 영어 번역은, T.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Baker, 1991), pp. 50-51.
7) J. Calvin, Commentaries on the Book of the Prophet Jeremiah and the Lamentation, I (Eerdmans, 1950), xvi-xxiv. 헌정사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로 마친다. “비록 졸인(卒人)의 찬사나 본서의 헌정이 전하의 위대한 성품에 조금도 덧보탤 것이 없겠지만 스스로의 의무라고 생각한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고명한 제후여 안녕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신령한 지혜를 더욱 넘치게 주옵시고, 오래토록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전하의 영예로운 자리가 전하와 전하의 후손들에게 길이 융성하게 이어지게 하여 주시기를 비나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소개 (II)
- 독립개신교회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2004년 부활절에 출간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표지부터 인상적이다. 앞표지는 하이델베르크의 성신교회(Heiliggeistkirche)와 그 배경에 있는 고성(古城), 그리고 종탑에 가려진 아침 해를 현대적으로 처리했는데, 하나하나가 상징성이 높다. 성신교회의 건물에는 요리문답 1문의 첫 문장이 독일어로 인쇄되어 있는데 마치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그 교회에서 가르친 것이 밖으로도 울려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프리드리히 3세가 살았던 옛 성은 요리문답을 작성하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든든한 후원자처럼 보이고, 종탑 뒤의 아침 해는 이 세상의 어둠을 복음의 빛으로 물리치며 새 시대를 여는 여명(黎明)과 같다. 초판이 한 달 만에 매진되어 재판을 찍었는데, 재판의 뒷 표지에는 성신교회 건물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이 한국어로 인쇄되어 있다. 성신교회에서 선포된 유일한 위로의 말씀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한국에서도 울려 퍼지고 무지의 어둠이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재판이 나와서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번역 과정과 원칙을 소개하는 것이 출간된 요리문답을 좀 더 친숙하게 만들어 주리라 생각한다.
1. 교회의 진행과 신앙고백서의 출판
독립개신교회의 고백서로 출간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독립개신교회는 1964년 설립 초기부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도르트 신조와 더불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고백했고, 그 기초 위에서 가르치며 전진해 왔다. 그러나 한국의 척박한 토양에서 개혁 교회를 세울 때에는 다소 무거운 신앙고백서를 교인들에게 부과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신앙고백의 요점을 가르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신령한 생활이란 무엇인가,’ ‘은혜의 방도는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등이 고(故) 김홍전 목사가 중요하게 가르친 다섯 가지 요점이었다.1)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책별로 공부했을 뿐 아니라 다섯 가지 핵심을 통해 개혁 신앙과 신학을 배웠다. 이러한 현실적인 지혜와 목회 활동에 주님께서 복을 주시어 한국에서도 개혁 교회가 설 수 있었고, 이제는 교회의 고백서들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독립개신교회에 속한 강변교회의 최낙재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번역해서 이십여 년 동안 계속 가르쳤고, 그 주해서들이 출간되어 이웃 교회들에도 큰 유익을 끼치고 있다.2) 교회의 진행과 함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번역할 필요가 있어서 독립개신교회의 목사들은 1998년 초부터 번역을 시작했고 십수 회의 독회(讀會)를 거쳐 1999년 5월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 후 독립개신교회의 각 교회들이 초고를 사용하여 공부했고, 5년의 수정을 거쳐 2004년 부활절에 출판했다.
2. 사도신경의 번역
1) 개신교의 사도신경 번역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번역할 때 제일 먼저 만난 문제는 사도신경 번역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의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번역으로는 요리문답의 해설을 바르게 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음부(陰府)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구절이 개신교 번역에서는 빠졌기 때문에 만약 기존의 번역을 사용한다면 그 구절에 대한 44문은 괄호 안에 묶거나 삭제해야 된다. 사도신경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개신교 사도신경의 번역자가 불분명하다는 점이었다. 많이 지적된 어학적인 문제점 이외에도,3) 첫째, 원문을 번역하지 않은 경우, 둘째, 개역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표현, 셋째, 당시 신학 사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번역, 넷째, 중요한 개념이 불분명한 경우 등이 있었다.
첫째, 개신교 번역에는 원문에서 빠진 부분이 두 군데 있다. 첫째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구절인데, 이것은 장로교에서 출간한 찬송가에서는 “디옥에리샤”(1894년), “음부에리셧더니”(1905년)라고 되어 있으나 감리교에서 발행한 1897, 1902, 1905년 찬송가에는 한결같이 빠져 있다. 장감(長監) 연합공의회가 1905년에 찬송가를 통합할 것을 결의하고 1908년에 『합동찬송가』를 간행했는데, 이때 장로교 선교사들은 감리교 선교사에게 양보하여 이 구절을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4) 이후 장로교가 독자적으로 찬송가를 간행할 때에도 삭제했던 이 구절을 다시 넣지 않았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에서도 ‘아버지’ 혹은 ‘성부’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1894, 1897, 1905년 사도신경에는 “아버지”가 나오지만, 1908년부터는 빠졌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은 설명하기 어려워서 뺐다고 치더라도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우편’이라는 말에서 ‘성부’라는 말이 생략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둘째, 성경의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들이 있다. “천지를 만드신”으로 고백을 시작하는데,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천지를 창조하신’ 혹은 ‘천지의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이 타당하다. 만드는 것(to make)은 사람도 할 수 있는 활동이어서 성부의 창조 사역(to create)의 독특성을 바르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자에 대해서 고백할 때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개역 성경의 번역은 ‘독생자’이다. 독생자(μονογενής)는 단순한 외아들이 아니라 ‘성부와 독특한 관계에 있는 분’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외아들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도 담고 있으므로 개역 성경의 ‘독생자’라는 표현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표현도 아쉽다. 원문을 번역하면 “거룩한 보편적 교회”인데 ‘보편적 교회’라는 성경적 표현이 ‘공회’(公會)라는 어려운 말로 바뀌었다. 성경에 친숙한 사람은 ‘공회’가 예수님을 정죄한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도 시정되어야 할 번역어였다
물론 성경의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 이러한 번역어는 사도신경이 개역 성경보다 먼저 출판되었다는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역 성경이 출간되었으면 신앙고백서는 번역된 성경의 용어에 따라서 재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고백이 신앙의 요약으로서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前千年說)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번역도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에서 ‘앉아 계시다가’라는 표현은 과도기적 뉘앙스를 풍긴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곧 심판하러 오실 것이고, 그 중간에는 단지 ‘앉아 계실 뿐’이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세 가지 시제를 살리지 못한 번역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은 현재형이고, 그 이전에는 과거 시제로, 그리고 그 이후에는 미래 시제로 되어 있다. 물론 우리말은 시제에 예민하지 않기 때문에 시제의 문제만을 크게 다룰 수는 없지만, 기존의 번역으로는 승천하신 예수께서 전능하신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서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성경의 교훈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에 둔감한 번역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영향, 즉 그리스도의 현재의 왕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종말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기본적인 개념이 잘 살아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라는 첫 구절은 ‘전능’을 천지의 창조와 관련시킨다. 그러나 원문에 따르면 ‘전능’은 ‘창조’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연결된다.5) 따라서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전능하신”이라는 말은 사도신경 중간에서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에 한 번 더 나온다. 두 군데에서 ‘전능하신’은 모두 성부 하나님에게 붙어 있다. 따라서 사도신경 첫 줄에서 ‘전능하신’이라는 말을 창조에 연결시킨 것은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창조와 관련시킨 번역이 재고되어야 할 더 중요한 이유는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이 언약의 성취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 99세 때에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는데 이것은 자녀에 대한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창 17:1). 6)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 때에는 그 백성과 언약하신 것을 변함없이 끝까지 이루어 주시는 분임을 보”이는 것이고, “무소불능이라든지 하나님의 본질적인 대능(大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7) ‘전능하신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는 성호와 함께 나온다(1:8; 4:8; 11:17).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서 언약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그분은 지금 통치하시고(계 11:17; 19:6) 앞으로 심판하실 분이다(계 16:7; 19:15).
사도신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잘 요약했다. 짧은 신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 번 고백했다. 첫 구절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사도신경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하고, 중간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현재 통치하시고 앞으로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따라서 사도신경에서 “전능하다는 것은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채워진 개념이다.” 8)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기존의 번역에서는 이처럼 중요한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처음 나오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조와 막연히 연결되고, 두 번째 나오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재림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맥락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2) 새로운 번역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는 어느 한 교회의 것이 아니므로 독립개신교회에서는 기존의 개신교 번역을 그대로 받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 새로 번역하기로 했다.9) 기존 번역의 부족함을 이야기한 데서 새로운 번역의 방향을 이미 말한 셈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구체적인 개역(改譯) 내용을 다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도신경의 ‘삼위일체적 구조’에 대한 것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사도신경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에 대한 것과 관련된다.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12사도가 다른 나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흩어져도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표’로 신조를 작성했고, 성신의 감동으로 서로 한 구절씩 말한 것이 지금의 사도신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사오며” 하니까 안드레가 그 다음 구절을 말하고, 다른 사도가 다음 구절을 읊었다는 식이다. 상당히 재미있지만, 아쉽게도 사도신경의 기원은 사도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도신경이 ‘사도’신경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것이 사도들의 교훈을 잘 요약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의 기원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데에 있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성부․성자․성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쳤고 세례식에서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전능하신 분이고 천지의 창조주로 믿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나는 믿습니다’(credo)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성자 하나님과 성신 하나님에 대해서 각각 질문하고, 역시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자가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에 기원을 둔 사도신경은 그 구조가 삼위일체적이다.10) 기존의 개신교 번역에서는 두 문단으로 되어 삼위일체적 구조가 무시되었지만, 새로운 번역에서는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로마 숫자로 구분하여 표현했다.
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번역 원칙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번역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고, 번역과 개정이 진행되면서 원칙들을 수정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면서 번역을 완성했다. 몇 가지 예를 들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서문에서 밝힌 다섯 가지 번역 원칙을 설명하겠다.
1)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교훈을 요약하여 반복하는 것이므로 성경의 교훈에 주의를 기울여 번역하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 개역 성경의 표현을 존중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신앙고백서’를 ‘성경’과 강하게 대립시켜서 이해하는데, 이러한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마치 지도가 있으면 원하는 목적지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적인 신앙고백서를 통해 성경의 핵심을 바르게 알 수 있다. 지도의 지명과 실제 지명이 동일해야 되는 것처럼, 신앙고백서의 표현은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에 가까워야 한다. 사도신경을 새롭게 번역하면서 ‘창조,’ ‘독생자,’ ‘교회’ 등을 성경의 표현으로 바꾼 것처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번역할 때에도 성경의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고, 증거 성구를 일일이 다 읽은 다음에 거기에서 알맞은 번역어를 찾아냈다.
매우 드물지만, 어느 경우에는 성경의 표현을 요리문답의 본문에 첨가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가르치는 49문은 “둘째, 우리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라고 번역했다. 공인 본문들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이 없지만, 증거 성구인 에베소서 2:6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되어 있고 네덜란드개혁교회(해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첨가한 예를 따라서 이 구절을 넣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빼면 우리 몸이 하늘에 있다는 표현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증거 성구의 표현을 문답에 넣은 것이다.11)
판본들 사이에 충돌이 있는 경우에도 성경적 표현을 취했다. 예를 들어, 18문에서 독일어판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구원과 의”라 했고 라틴어판은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라 했다. 이 경우에는 증거 성구인 고린도전서 1:30의 표현을 따라서 후자를 택했다.
때로는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곳에서는 헬라어 성경에 따라서 요리문답을 번역했다. 81문은 성찬에 참여할 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고린도전서 11:29를 인용한다. 개역 성경에는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자기의 죄’라고 번역된 말은 ‘자기가 받을 심판’이라는 헬라어를 옮긴 것이다.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자초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개역 성경에서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헬라어 성경을 따라서 ‘심판’으로 옮겼다.
2) “요리문답은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그동안 역대의 교회들에서 사용한 증거 성구를 철저히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는 우리 교회에서 새로운 증거 성구를 첨가하여 요리문답의 의미를 더 밝힌다.”
증거 성구는 요리문답을 작성하던 시기부터 존중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 카를(Karl) 5세에게 소환되어 루터교의 가르침을 벗어났다고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요리문답의 난외에 있는 성구들을 가리키면서 이 요리문답이 “인간적 자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단어 하나하나가 신적(神的) 자료에서 나온 것”이라고 답변했다. 요리문답은 성경의 교훈의 요약이며 안내자이기 때문에 번역할 때 특히 요리문답 본문과 증거 성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역대의 교회들에서 사용된 증거 성구들을 검토하여 865개로 확정하고 책을 출간하면서 성경 본문을 함께 실은 것도 이러한 관심의 표현일 것이다.12)
우리는 증거 성구를 확정할 때 ‘비슷한 단어가 나오는 성구 모음집’이 되는 것을 피했다. 어떤 주제가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점진적으로 계시되었는가에 주의하면서 증거 성구를 확정했다. 예를 들어 120문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으며”라는 부분에 대해서, 여호와를 아버지라고 부른 이사야 63:16,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요한복음 20:17, 그리고 성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갈라디아서 4:6을 우리는 새로운 증거 성구로 추가했다. 구속 역사의 발전과 삼위일체의 진리를 고려하면서 증거 성구를 확장했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얻은 증거 구절들은 결코 ‘무시간적인 주제별 성구 목록’이 아닐 것이다.
1563년에 요리문답이 출간되었을 때 문답의 여백에는 성경의 장만 기록되고 몇 절을 인용한 것인가는 쓰여 있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장절을 확정하는 것은 교회에 따라서 다르다. 우리도 지면 관계상 대표적인 구절만을 인용하고 전후 문맥을 살피는 것은 교우들의 신앙의 자발성에 맡겼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증거 성구인 로마서 14:8에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는 구절을 1문의 다른 증거 구절들과 함께 읽으면 그것으로도 큰 유익이 되겠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14:9를 읽으면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배우고, 로마서 14장의 앞뒤 문맥을 더 살피면,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이 먹는 일에서 믿음이 약한 자를 돌보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함을 배운다. 이러한 방식으로 대표적인 구절을 안내자로 삼아 성경 본문의 문맥을 검토하면 성경의 진리를 더 풍성히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요리문답의 증거 성구에는 그 구절에 대한 교회의 해명의 역사가 녹아 있다. 매주일 요리문답 설교를 했기 때문에 어떤 구절이 해명되고 그것이 다른 교회들에게서 수용되면 새로운 증거 성구로 올라오기도 했다. 설교 본문이 다 올라올 수는 없고 대표적인 구절이 올라왔다. 우리는 그 구절을 통해서 교회들에서 해명된 진리를 더 풍성하게 접할 수 있다.13
또한 신앙의 선배들의 어깨에 선 후대의 교회로서는 그 내용을 숙지할 뿐 아니라 새로운 증거 구절을 첨가하여 요리문답의 의미를 더 밝히고 가르칠 사명이 있다. 120문 등에서 삼위일체와 구속 역사의 발전을 고려하면서 증거 성구를 첨가한 것도 이러한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3)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대 구어체로 품위 있게 번역하여 내용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달한다.”
요리문답은 원래 신앙 교육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나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는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려운 말은 피하려고 했다. 물론 쉽게 번역한다고 해서 품위 없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요리문답의 내용 자체가 품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개역 성경의 어려운 한자어나 옛날 말은 현대어 표현으로 바꾸었다. 증거 성구에서는 옛 표현이 그대로 인용되었지만 본문에서는 살짝 바뀐 예들을 애독자들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참예”(고전 10:16) → “참여”(79문), “탐람하는 자”(고전 6:10) → “탐욕을 부리는 자”(87문) 등.]
현대 구어체로 품위 있게 번역한다고 했지만 한자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르치는 것이 유익하겠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어려운 한자어도 그대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127문에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함께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이 말이 본문의 뜻을 잘 살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어려운 한자어로 번역했다.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값을 치르고 구원한다’는 뜻인데 이것을 더 이상 풀어서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했다.
4) “독일어판과 라틴어판은 모두 공인 본문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표현이 더러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위의 원칙들에 따라 결정하되 초판본인 독일어판을 존중하고, 요리문답이 사용된 역사(歷史)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번역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본문 확정’이었다. 공인 본문으로 인정되는 독일어판과 라틴어판은 거의 같지만,14) 자세히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고 후대의 번역들 사이에도 조그만 차이점들이 있다. 대체로 라틴어 번역은 좀 더 신학적인 용어로 번역했고 독일어는 좀 더 생생한 표현을 사용했다. 라틴어 번역은 정리된 신학 용어를 쓰기 때문에 간결하면서도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것이 약점도 된다. 왜냐하면 요리문답이 가진 소박성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될 수 있는 대로 독일어를 존중하되, 교회들이 사용한 역사도 고려하면서 번역했다.15)
예를 들면, 5주일에서 ‘죗값을 치른다’는 말이 나오는데, 라틴어로는 ‘속죄’로 번역되었다.16) ‘속죄’라는 신학 용어를 그냥 사용하기보다는 문맥을 검토하여서 ‘죗값을 치른다’는 말이 더 낫다고 판단되면 독일어 표현을 택했다. 그러나 신학적 고려를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면 라틴어판을 택했다. 40문이 독일어판에서는 “그리스도는 왜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까?”라고 되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는 왜 죽기까지 낮아져야 했습니까?”라는 라틴어판을 택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7) 어느 경우는 두 가지를 모두 택한 경우도 있다. 27문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할 때 독일어에서는 “현재적 능력”으로 표현한 반면, 라틴어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있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독일어에서는 ‘시간’으로 표시했고 라틴어에서는 ‘장소’로 번역한 셈이다. 섭리는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장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겠지만, 사람에게는 시간과 장소가 늘 붙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라고 번역했다.
‘요리문답이 사용된 역사(歷史)도 존중한다’는 원칙 아래 다른 교회들의 본문을 비교하며 검토할 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번역과 관련하여 이웃 교회들에서 논의한 자료들도 구해서 읽었다. 신앙고백서의 번역은 원본을 충실히 번역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에서 실제로 사용된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3문에서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라고 질문하는데, 공인본들에서는 ‘당신의 비참함’으로 되어 있고 ‘당신의 죄’라는 표현은 없다. 그런데 캐나다개혁교회에서 개정을 위한 논의를 할 때 2문의 표현을 따라 ‘당신의 죄’라는 말을 삽입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영어의 비참함(misery)은 개인적이고 감정적으로 오해될 수 있는 말이므로 비참함의 원인인 ‘죄’를 지적하는 것이 더 낫다고 제안한 것인데 채택되었다. 한글의 ‘비참함’도 동일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서 우리의 번역에서도 ‘죄’를 적시(摘示)했다.
5) “교회에서 함께 낭독하거나 암송하는 실제적인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의미 단위로 줄을 바꾸어 편집한다.”
다섯 번째 원칙은 초역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교회에서 사용하면서 회중이 함께 낭독하거나 암송할 때 좀 더 통일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나중에 만든 원칙이다.18) 줄이 바뀌는 데서 한 번씩 호흡을 고르면, 한 목소리로 읽거나 암송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 단위로 줄을 바꾸어 편집한 데 따른 몇 가지 부수적인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문단은 내어쓰기로 시작하고, 병렬되거나 대조되는 것은 같은 위치에 두니까 보기에 좋았고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또한 한국어 문장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줄을 바꿈으로써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여지도 생겼다. 6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목적을 가르치는데, 우리의 번역은 다음과 같이 행갈이를 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리하여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함께 살기 위함이고,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것이 원문의 뜻이다. 목적절 안에 목적 구문이 있는 셈인데 이것을 한국어 번역에서는 부드럽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목적 중의 목적’을 내어쓰기로 처리해서 우리말 번역에서 표현하지 못한 것을 다소나마 살릴 수 있었다.
18문에서 고린도전서 1:30을 인용하는데,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의 네 단어가 나온다. 이 경우에 두 단어씩으로 나누지 않고 ‘지혜’와 나머지 세 단어로 구분했다. 왜냐하면 뒤의 세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의 내용을 설명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행갈이가 설명적 역할을 한 셈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신 분입니다.”
1문은 요리문답의 대표적인 문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답은 네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다. 질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인데 대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라고 해야 되겠지만, 답의 내용을 보면 질문자에게 대답하면서 동시에 삼위 하나님을 향해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1문의 답은 질문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삼위 하나님께 대한 송영(頌詠)의 성격이 있는 것이다.19) 따라서 “~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질문에 대해 딱 떨어지게 말하기보다는 삼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독립적인 진술문으로 번역했고, 이어지는 세 문단의 첫 줄에 각각 “그리스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그의 성신”을 두어서 삼위 하나님의 사역 안에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있음을 표현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송영을 문단의 구분으로 표현한 셈이다.
그러나 줄 바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아야 한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4. 독립개신교회의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번역하거나 수정하면서 이미 나와 있는 10여개의 한글 번역도 검토했다. 번역자를 알 수 없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것 이외에도, 석호인(1956), 정일웅(1987), 신헌재(1989), 이형기(1991), 권오성(1995), 이길호(1995), 박일민(1998), 김영재(2002), 이승구(2001- ) 등의 번역이 있었다. 어느 경우에는 그들의 번역에서 도움을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번역들은 교회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작업의 결과였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번역 자체에도 적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고, 기본적으로 번역 판본에 대한 검토 부족, 증거 성구와 번역어의 불일치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개인적 작업들이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독립개신교회가 택하고 있는 고백서이고 교회에서 실제로 가르쳤기 때문에 목사들이 번역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십여 회 숙박을 같이하면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자세히 검토했다. 여름밤에 가재를 잡으려고 관솔에 불붙여 냇가의 돌을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럽게 들추는 심정이었다. 아이의 손이 닿지 않은 돌이 없었던 것처럼, 요리문답에서 논의되지 않고 지나친 단어나 문장은 없었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회중과 요리문답반의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이 틀리거나 더듬거리며 암송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 번역이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러한 구절은 다음 모임에서 수정하였다. 더듬거리거나 틀리게 암송한 사람도 이번 번역에 중요한 기여를 한 셈이다. 목사뿐 아니라 글을 배우는 어린아이도 함께 요리문답 번역에 참여했다. 신앙고백이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교회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번 요리문답의 번역에서도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5. 새로운 출발점
요리문답을 번역하면서 좋은 언어학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예를 들면, ‘죄와 비참’으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죄와 비참함’으로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오갔다(2-3문). ‘비참’이라고 하면 간결미가 있지만 요리문답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낙원에서 쫓겨난 상태’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용사의 명사형인 ‘비참함’을 택했다. 이 작은 단어에는 다소 긴 역사가 있다. ‘비참함’이라는 말은 독일어로 Elend인데, 이것은 el(alius, 다른)과 lend(land, 나라)의 합성어로 16세기에는 ‘다른 나라,’ ‘추방,’ ‘타향살이’ ‘낯선 것’ 등의 뜻으로 사용됐다.20) 즉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의 근원적인 불안과 비참함을 표시하는 말이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프리드리히 3세, 올레비아누스, 우르시누스)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말도 된다. 이 단어에는 신앙 때문에 고향에서 뿌리가 뽑혀 새로운 곳으로 옮겨진 사람들의 불안함이 배어 있다.21) 그러나 그 세 사람은 ‘비참함’이라는 작은 말로 자신들의 심정을 토로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낙원에서 쫓겨난 인류의 비참함을 표현했다. 작은 단어이지만 거기에는 개인적인 역사와 인류의 역사가 농축되어 있다.
이러한 단어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일에는 신학자뿐 아니라 뛰어난 언어학자가 필요하다. 어떤 단어가 그 시대에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가를 알 뿐 아니라 인도 유럽어들의 언어 구조와 한국어의 언어 구조를 두루 알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좋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쉽게 느껴졌다.
지금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 고백서가 사용되면서 더 좋은 번역어와 문장이 나오기를 바라고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말에 조예가 깊은 교우들도 나오기를 소망한다. 초판 2쇄가 나왔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 요리문답이 교회들의 사랑을 받아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 데에 쓰임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음 세대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더 아름답고 분명한 말로 고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각 주
1) 『신앙의 도리』에서 다섯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초판은 백합출판사에서 1980년에 출간되었고, 이후로는 성약출판사에서 4판에 걸쳐 총 10쇄를 거듭했다.
2) 최낙재, 『소요리문답 강해』, I, II,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 교육부, 두란노서원, 198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강해』, I, II,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2000.
3) 어학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사용되지 않는 고어(古語) 표현(“저리로서”), 수동태를 능동태로 번역한 것(“성령으로 잉태하사,” “장사한 지” 등), 명사를 동사형으로 번역한 것(“죄를 사하여 주는 것,” “몸이 다시 사는 것” 등), 지시대명사가 불분명한 것(“그 외아들”), 명사의 복수형이 표현되지 않은 것(“산 자와 죽은 자”) 등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한국어가 바뀌고 문법적으로도 정비된 점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번역에서는 이러한 것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도신경의 번역에 대한 국어학적인 비판으로는, 나채운, “사도신경의 우리말 번역에 대한 비판,”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 장로교신학대학출판부, 1988, 191-225쪽 참조.
4) 김용준, “사도신경과 개역의 필요성 (2),” 『기독교사상』, 1963년 12월, 61-65쪽. 김용준은 삭제 이유로 감리교의 영향, 로마 교회와의 차별성, 미국 남장로교회의 영향 등을 든다. 이정석과 노종문은 장로교가 감리교 선교사에게 양보한 사실만을 강조한다. 두 사람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죤 웨슬리가 1784에 영국 성공회의 39개조를 발췌해서 만든 25개조에서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설(陰府降下說)을 제외시켰고 미국 감리교에서도 제외되었는데, 한국 감리교회도 이 전통에 따라서 삭제했음을 지적한다. 이정석, “그리스도는 음부에 내려갔는가,” 「미주 크리스챤 신문」, 2002년 10월 5일; 노종문,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왜 음부행(行) 구절이 빠져 있을까,” 『기독교사상』, 2003년 9월, 214-235쪽.
5) 공인본 사도신경의 원형인 로마교회 신경에는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전능한 성부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으로 되어 있고, 공인본에는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torem coeli et terrae”(전능한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습니다)로 되어 있다. 원문은 J.N.D. Kelly, Early Christian Creeds, (3판, Longman, 1985), pp. 102, 369와 P. Schaff, The Creeds of Christiandom, II, (reprint, Baker Book House, 1983), pp. 45, 47. “전능한 성부 하나님”과 “천지의 창조주” 사이를 Kelly는 콤마(,)로 구분했고 Schaff는 세미콜론(;)으로 나누었다. 어느 경우든 ‘전능한’은 ‘창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6)창세기 17장의 ‘전능하신 하나님’과 언약의 성취에 대한 좋은 해설로는 최낙재, <소요리문답 강해>, 2권, 66-67쪽.
7) 김홍전, 『하나님의 백성 1 - 아브라함』, 성약출판사, 1998, 448쪽.
8)로호만, <사도신경해설>, 대한기독교서회, 1984, 57쪽.
9) 앞에서 언급한 김용준, 나채운, 이정석 등은 새로운 번역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네덜란드개혁교회(해방)의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했던 고재수(N.H. Gootjes) 교수는 10개 항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번역을 제안했고, 유해무 교수도 20여 군데를 수정하면서 새 번역을 제안했다. 고재수,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재판, 고려신학대학원출판부, 2001, 385-406쪽; 유해무, 『개혁교의학』,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87-98쪽.
통합측은 2002년 87회 총회에서 새로운 사도신경 번역을 위한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번역을 2003년 총회에 상정했으나 다른 교단과의 협력을 고려해서 보류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나 한국찬송가공회 등을 통해 다른 교단과 협력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10) 세례식 문답과 관련하여 사도신경의 초기 형태가 나타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50-180년 경이다. J.N.D. Kelly, 앞의 책, 127, 130.
11) 성경의 표현에 따라서 본문의 일부를 삭제한 경우도 있다. 공인 본문들에서 4문은 율법의 정신이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4문의 본문에서 언급된 마태복음 22:37에서는 “힘을 다하여”라는 구절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성경 구절을 정확히 인용하기 위해서 그 부분을 삭제했다.
12) 865개는 두 절 이상이라도 한 곳에 인용된 것은 하나로 간주해서 얻은 숫자이다. 두 번 이상 인용된 구절들을 따로 세면 성구가 1,016번 인용되었다.
13) 증거 성구에는 시대적인 특성도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6주일의 기독론에 대한 성구는 80개인데, 이것은 기독론에 대한 논쟁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기독교개혁교회(the Christian Reformed Church)는 그 숫자를 26개로 줄였지만 우리는 생략하지 않고 다 실었다. 기독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4) 요리문답 번역에 사용한 공인 본문들은 다음의 책을 기준으로 했다. J.N. Bakhuizen van den Brink, De Nederlandse Belijdenisgeschriften (2판. Amsterdam: Uitgeverij ton Rolland, 1976). 이 책은 초판들에 대한 본문 비평까지 되어 있다.
15) 독일어는 원본뿐 아니라 복음적 개혁교회(die Evangelisch-reformierte Kirche)의 400주년 기념판의 현대어 판과 오스트리아 복음적 개혁교회의 판본도 참조했고, 화란어도 공인본뿐 아니라 네덜란드개혁교회(해방)에서 개정한 것을 중요한 대본으로 삼았다. 영어는 1771년 미국 공인역(the Received American Version)과 기독교개혁교회의 개정판(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1988), 캐나다개혁교회의 개정판(the Canadian Reformed Churches, 1984), 미국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 미국의 독일개혁교회(the German Reformed Church in the US)의 300주년 기념판, 연합교회출판사(the United Church Press)의 400주년 기념판 등을 참조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8쪽), 네덜란드개혁교회(해방)와 캐나다개혁교회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16) 라틴어는 satisfacere이다. 한국어로는 ‘속죄하다,’ ‘만족시키다,’ 혹은 ‘보속(補贖)하다’ 등으로 번역된다.
17) 독일어판과 라틴어판이 다른 경우에는 항상 다른 교회들이 어떠한 판본을 택했는가를 살펴보았다. 40문의 경우에는, 미국 기독교개혁교회와 미국개혁교회, 연합교회출판사 400주년 기념판은 독일어판을 따랐고, 1771년 미국 공인본과 네덜란드 개혁교회, 캐나다개혁교회 등은 라틴어판을 따랐다.
18) 줄을 바꾸는 것에서는 미국의 기독교개혁교회(CRC)의 개정판과 독일의 복음적 개혁교회의 400주년 기념판을 참조했다. 그러나 언어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경우들도 있었다.
19) C. Bijl, Houvast en troost, Vuurbaak, 1998, p. 13.
20) Matthias Lexer, Mittelhochdeutsches Taschenwoerterbuch, 37판, Stuttgart, 1986, 37쪽 참조. Elend의 고어(古語)인 ellende에는 ‘비참함’이라는 뜻이 강하지 않다. 타향살이의 비참함과 도움이 없음을 표시했는데, 후대에서는 ‘타향살이’의 뜻은 사라지고 ‘비참함’의 뜻으로만 굳어진 듯하다.
21) F. H. Klooster, Our only Comfort, I, CRC Publications, 2001, pp. 62-68.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소개 (III)
- 요리문답 교육과 요리문답 설교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요즈음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들은 극의 주제나 구성보다는 영상(映像)과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전보다 많이 줄었기 때문에 한국의 인기 드라마가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쉽게 “한류(韓流) 열풍”을 일으키는 듯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 시대에 있는 교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영성’(靈性) 혹은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이미 교회들 안에 들어와 한자리를 차지하고서, 전파되는 말씀의 내용보다는 조명과 음향 그리고 감성적인 음악으로 사람에게 호소하고 있다. 말씀만 전하는 교회는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 아니라 ‘닫힌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간주되는 실정이다. ‘요리(要理)’보다는 ‘요리(料理)’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이 시대에 요리문답 교육과 요리문답 설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기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중요한 추동력은 요리문답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주제를 심각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미각(味覺)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 종교개혁과 요리문답 교육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자의 말씀은 항상 진리이다(전 1:9). 조명과 음향으로 청중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일은 이미 중세에도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고딕 성당은 은은한 빛으로 가득 차 있고, 이층에서 부르는 성가대의 노래는 천장에서 반향(反響)되어 아래로 울려 퍼졌다. 로마 교회는 조명과 음향으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종교심을 부추겨서 어떤 사업들을 했지만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딕 성당의 은은한 빛은 진리를 가리는 어둠이 되어 버렸다.
종교심은 잘 발달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이러한 교회에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었고, 이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개혁자들은 중세 동안 가려졌던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확신 가운데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밖으로는 제국의 황제와 군주들 그리고 로마 교회를 향해 고백했고, 안으로는 요리문답의 형식으로 자녀들을 가르쳤다.
중세에는 미사를 중심으로 예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녀 교육이 경시되었으나 종교개혁과 함께 언약의 자녀를 가르치는 일이 바르게 강조되었다. 개혁자들은 새롭게 발견한 옛 신앙을 요리문답으로 표현하여 언약의 자녀를 가르쳤다. 루터는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교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것을 보고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대한 자신의 설교를 개정하여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작성했다(1529).
칼빈도 『제네바 요리문답』을 만들어 교인들과 그들의 자녀를 가르쳤다(1537, 1541/42).1) 칼빈은 제네바 교회가 신앙고백적인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 강요』 초판(1534)을 중심으로 제1요리문답을 작성했다(1537). 그는 제네바 시의회의 반대에 봉착하여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했는데(1539-41) 제네바 시의회가 다시 그를 청빙했을 때 그는 권징권이 교회에 있음을 인정해 줄 것과 요리문답을 가르치도록 허용하는 것을 청빙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는 제네바에 돌아온 후에 곧 바로 제2요리문답을 작성했다(1541-42). 따라서 우리는 요리문답 교육이 복음의 강설과 함께 개혁의 추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 교회는 요리문답의 힘을 빨리 간파했다. 개혁에 반대하기 위해서 열린 로마 교회의 트렌트 종교 회의(1545-63)는 그 내용을 요리문답으로 정리했다. 1564년에 간행된 『트렌트 요리문답』(the Catechism of Trent)의 서문에서는 “권위 있는 가톨릭 요리문답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단자들이 [개혁자들이, 필자] 이단적인 사상과 불경건함을 쉽고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 다른 전략을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보기에는 개혁자들이 “수많은 작은 책자들을 만들어 경건함을 흉내 내면서 자신들의 오류를 감추고 단순한 사람들의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놀라울 정도로 쉽게 속인다.” 2) 따라서 그들도 권위 있는 가톨릭 요리문답인 『트렌트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또한 신자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했는데, 예수회(Jesuit)가 그 일에 앞장섰다.3)
개신교의 요리문답이 금서 목록에 들기도 했으며 유럽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친(親) 로마적인 권력자가 팔쯔에 등장하면 그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찾아 불사르기도 했으며 자진 신고 기간이 지나서도 그 책을 소지하고 있는 자에게는 한 권당 10플로린(florin)의 벌금을 징수했다.4) 개혁의 반대자들이 요리문답을 이렇게 강하게 탄압한 것은 요리문답이 개혁의 추동력이었음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당시에 약 60여 개의 요리문답이 작성되었다. 그중에 『취리히 요리문답』(1534)과 『엠덴 요리문답』(1554)도 중요한 문서로 언급할 수 있는데, 역사를 통해 검증된 대표적인 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다.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처음 작성되었을 때부터 주일 오후 예배에서 청소년들에게 ‘요리문답 교육’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부모들도 함께 참석했는데, 처음에는 암송을 점검했고, 이어서 문답의 뜻을 가르치다 보면 ‘요리문답 교육’은 ‘요리문답 설교’로 끝났다. 1618년의 도르트 대회에서는 요리문답 설교로 청소년을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청소년의 ‘요리문답 교육’과 주일 오후의 ‘요리문답 설교’로 나누었다.6)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교육
1) 요리문답 교육
요리문답(catechism)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카테케오’(κατηχεω)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는 ‘완전히 울리다’, ‘메아리치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부터 기본적인 것을 복창(復唱)하는 것, 묻고 답하면서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는 ‘문답식 교육 방법’ 혹은 ‘가르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나 그리스 철학자들도 ‘문답식 교육 방법’을 사용했다. ‘카테케오’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도 나오는데,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를 특별히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행 18:25; 21:21, 24; 고전 14:19; 갈 6:6).7)
교회에서 문답식 교육 방법을 택한 것은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배우는 사람의 형편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공적(公的)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이해력이 높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의 형편에 맞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것을 가르쳤다. 간단한 질문과 대답의 방식으로 신앙의 체계를 체득하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으로 하여금 성경을 찾아보고 그 문제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답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요리문답의 답은 단순히 암기해서 대답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대답하는 사람의 신앙고백이 된다.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가르치면서 학생으로 하여금 신앙을 고백하도록 이끄는 데에 요리문답 교육의 묘미가 있다.
그 묘미를 맛볼 수 있는 좋은 예가 예수님의 문답식 교육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신 후에 그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묻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셨다. 이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고백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마 16:16).
따라서 요리문답은 그것을 다 외우면 마칠 수 있는 어떤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요리문답은 문답식 교육 방법의 재료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 신앙고백이 없이 외우는 것은 앵무새가 흉내 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을 작성한 목사들은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방식으로 배우고 앵무새처럼 대답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을 염려했다.8) 요리문답은 신앙고백을 위한 디딤돌(stepping stone)인데 잘못하면 걸림돌(stumbling stone)이 될 수 있다. 요리문답을 작성한 분들은 질문과 대답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참다운 고백에 이르게 하려 했고, 기계적인 암기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교육 - 세례반(盤)에서 성찬의 상(床)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것으로 작성되었다. 이것은 책의 표지에서부터 분명히 표시되었다. 표지는 “팔쯔(Pfalz)와 그 선제후령(選帝侯領)의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친 요리문답 혹은 기독교적 교훈”이라고 되어 있다. 프리드리히 3세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서문”에서도 청소년 교육이 요리문답 작성의 중요한 동기였음을 표명했는데9) 1563년 11월에 간행된 팔쯔의 『교회법』에서는 “요리문답”에 대해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요리문답은 기독교 교훈의 중요한 부분을 간단하고 단순하게 말로 가르치는 것이다. 청소년들과 초신자들은 그들이 배운 바를 이 문답으로 묻고 대답할 것이다. 기독교 교회가 세워진 직후부터 경건한 부모들은 자녀들을 집과 학교와 교회에서 주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기를 힘썼다. 우리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요리문답 교육을 속히 도입해야 할 것이다.……이스라엘 사람의 자녀들이 할례를 받은 후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거룩한 표의 신비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그들이 받은 세례에 대해서와 참된 기독교적 믿음과 회심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함을 허락 받기 전에 모든 기독교 회중 앞에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기 위함이다.10)
『교회법』에서 밝힌 것처럼 요리문답 교육의 목적은 성찬에 참여할 정도의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팔쯔의 『교회법』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세례 예식문과 성찬 예식문 사이에 인쇄되었는데, 이것은 요리문답 교육이 ‘세례반(盤)에서 성찬의 상(床)’으로 향한 과정에 있음을 나타낸다.
요리문답 공부를 하고 회중 앞에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자녀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게 나타내는 일이다. 유아세례 서약을 한 부모는 언약의 자녀에게 세례의 내용을 가르쳐서 불신자의 자녀와 구별됨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부모는 요리문답을 통해 신앙의 기본적인 것을 가르쳐서 자녀가 삼위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도록 해야 했고, 그 일을 위해서 교회의 지도를 받고 학교와 협력해야 했다.11)
1618년에 열린 도르트 종교 회의는 요리문답을 청소년에게 가르치는 일을 교회와 학교와 가정에서 각각 담당하도록 결정했다. 언약의 자녀를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세 기관이 함께 협력하는 일종의 ‘삼각형 모델’인 셈이다. 부모가 책임을 지지만 학교와 교회도 이 일에 함께 참여하여 언약의 자녀를 삼중적으로 가르치게 했다.
이러한 전통에 서 있는 대륙의 개혁교회에서는 지금도 12세에서 18세까지의 청소년들이 평일에 목사에게서 요리문답을 반복해서 배운다. 요리문답과 더불어 교회가 택하는 다른 신앙고백서를 배우고 교회의 역사도 배운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있는 언약의 자녀들이 공적 예배와 요리문답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교회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인생과 세상을 보는 눈을 형성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교회 안에서 찾는다. 수 년 동안 요리문답을 목사에게서 배우면서 목사와 요리문답 학생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것도 교회의 진행에서 큰 재산이다.12)
요리문답을 공부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고 교회에 가입하려는 사람이나 다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에 가입하려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요리문답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것을 배운 사람이 교회의 강설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13) 마틴 루터 선생은 『소요리문답』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요리문답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 없고, 성찬의 상에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이것은 마치 장인(匠人)이 그의 직업의 법과 규칙을 모르면 쫓겨나고 무능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과 같다.”14)
성찬의 상에 참여하는 것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예표하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고백한 자만이 참여해야 한다. 교회에 가입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혼인의 언약 전에 상대를 알아 가는 것처럼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교회의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를 알고 고백하는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물론 요리문답반을 마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교인이 된다고 생각하면 교조주의에 빠지는 것이고, 요리문답을 통해 신앙을 고백한다는 정신에서도 멀리 떠난 것이다. 요리문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배운 것을 고백하면서 교회에 들어와야 한다. 요리문답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15)
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설교
1) 요리문답 설교의 전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또한 요리문답 설교로도 정착되었다. 요리문답 교육이 교회가 믿는 도리의 기본적인 것을 가르쳐서 공적 신앙고백을 하고 성찬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면, 요리문답 설교는 문답과 증거 성구를 안내로 삼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차서(次序) 있게 배우고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며 예배하는 데에 강조점이 있다.
개혁 교회에서는 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리는데 오전에는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를 하고 오후에는 요리문답을 도움 삼아 주제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고백한다. 말씀을 배울 뿐 아니라 요리문답으로 신앙을 고백한다는 점에 요리문답 설교의 장점이 있다.16) 따라서 요리문답 설교는 단순한 교리 교육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교제로 이끌면서 신앙의 풍요함을 깨우치는 것이다. 요리문답은 그 주제에 대한 교회적인 해명과 고백이 되기 때문에 그 본문을 읽지만, 요리문답 본문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해명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 프리드리히 3세가 신성 로마 황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리문답에 요약된 성경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사람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전통에서 요리문답의 증거 성구들이 늘어났고 설교의 방향을 교회적으로 제시한다. 요리문답은 교회의 신앙고백이고, 이 고백을 통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다.
요리문답 설교는 고대 교회의 십계명과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에서부터 그 전통을 찾을 수 있다. 350년 경에 예루살렘의 키릴(Cyril of Jerusalem)이 사도신경을 설교했다는 기록이 있고, 어거스틴도 사도신경과 주기도문과 십계명에 대한 책을 썼다.17) 개혁의 시기에는 루터나 칼빈도 자신들이 작성한 요리문답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그런데 요리문답을 52주로 나누어 주일 오후 예배에서 설교하도록 한 것은 팔쯔에서 시작된 새로운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요리문답이 출간되었을 때부터 설교의 본문으로 사용하다가 몇 달 후에 간행된 팔쯔의 『교회법』에서는 요리문답을 52주로 나누어 인쇄하고 그 순서를 따라서 설교하도록 확정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설교는 다른 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화란에서는 1566년 암스테르담의 목사 피터르 하브리엘(Pieter Gabriel)이 주일 오후 예배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1568년, 1571년, 1574년, 1586년 총회들에서 요리문답 설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몇 차례 결정을 내렸다. 이 연장선상에서 1618년의 도르트 대회는 목사가 주일 아침에는 본문에 대한 강해 설교를 하고 오후 예배에서 요리문답 설교를 하는 것을 『교회법』의 한 조문으로 확정했다.
2) 요리문답 설교의 유익
요리문답 설교를 교회에서 확정한 것은, 첫째, 요리문답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임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강해 설교가 좋은 것이지만 본문을 택할 때 목사의 관심사나 한계, 그리고 회중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한된 주제의 성경 본문만을 가르칠 위험이 있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거짓 증거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고 지나기 쉽다. 요즈음처럼 성(性)이 상품화된 시대에 간음에 대한 설교를 몇 년이 지나도 듣지 않고 지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을 요약한 요리문답을 설교하면 목사 개인의 한계와 성향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부분을 고루 전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요리문답 설교는 바울 사도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모든 도(道)’를 전하는 좋은 방법이다(행 20:27). 말씀의 사역자는 주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책무가 있는데(마 28:19) 요리문답은 이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18)
둘째, 요리문답 설교는 신자의 생활에 큰 유익을 끼친다. 요리문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치우치지 않게 배운 사람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특히 죄를 무서워하고 피하며 신령한 싸움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배운 것은 장성한 후에도 그의 길을 지도한다(잠 22:6).19)
셋째, 교회는 진리 안에서 통일되기 때문에 요리문답에 요약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에 기여한다.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자들은 교인들을 무지한 상태에 버려둔 로마 교회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발로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개인적인 해석과 체험을 강조하는 신령주의자나 방종주의자와도 논쟁을 벌였다. 이때 교회적인 해석과 체험의 산물인 요리문답은 성경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이나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참된 통일을 이루는 데에 사용되었다.20)
요리문답을 매년 반복하여 설교하지만, 해가 지나면서 요리문답에 함축되어 있는 신앙의 도리를 가능한 한 더 깊고 풍부하게 가르쳤고, 묻고 답하는 것을 통해서 기본적인 신앙을 한 목소리로 고백하고 나왔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서 교회는 통일되며 시대의 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빛을 비추며 전진해 왔다.
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도르트 종교 회의 (1618-19)
요리문답 교육과 설교에 대한 반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반대의 골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사람이 작성한 고백서를, 즉 인간의 말을 설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은 요리문답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다. 요리문답을 성경에 대한 교리를 ‘사람이 조직’한 것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서 제시한 방식대로 ‘교훈을 요약’한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진다. 요리문답은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따라서 어떤 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에 대해서 해명한 것이므로, 우리는 요리문답을 사람의 말이라고 격하시키기보다는 성경적 교훈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고 공정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된 지 40-50년이 지나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오직 성경’을 주장하며 요리문답 설교를 비판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신조를 가르친다는 것이 반대의 요지였다. 그러나 반대의 실제 이유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를 피할 수 없게 가르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르미니우스의 지도를 받아 가면서 45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하우다(Gouda) 요리문답을 작성했다(1607). 성경의 교훈을 요약하기보다는 좀 더 직접적으로 성경을 인용하면서 작성한 요리문답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직접 인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은혜에 대한 교훈은 살며시 제외시켰다. 하우다 요리문답은 1610년의 항명서(Remonstrance)의 기초가 됐다.21) 요리문답 설교에 대한 그들의 반대는 자신들의 비성경적인 주장을 감추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도르트 대회(1618-19)에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오류를 성경적으로 반박했을 뿐 아니라 요리문답 설교의 타당성도 확정했다. 도르트 회의에는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영국의 대표들도 조언자(adviser)로서 참석했는데, 그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성경과 완전히 일치하고 다른 신앙고백서와 조화를 이룬다고 말하면서 이 요리문답을 다음 세대의 젊은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가르칠 것을 조언했다.22)
(그림 설명) 도르트 종교 회의 (1618-19)
이 조언을 받아들여 작성된 도르트 교회법 68조에서는 이렇게 규정했다. “목사는 어느 곳에서든지 통상적으로는 오후 예배에서 매 주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요약되어 있는 기독교적 교리의 핵심을 설교할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나눈 요리문답의 구분을 따라서 일 년에 한 번씩 마치도록 설교할 것이다.” 23) 1618년의 결의는 1568년 이후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들의 결의 사항을 유럽의 다른 개혁교회들과 함께 재확정한 것이다. 개혁의 반대자들은 개혁 신앙이 보존되고 전파되는 핵심에 요리문답이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비판했으나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요리문답 설교의 중요성이 국제적으로 확인되었다.
4) 요리문답 설교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신학자들의 반대
요리문답 설교에 대한 비판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뿐 아니라 복음주의적 신학자에게서도 나왔다. 널리 읽히고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요리문답서의 기능이란 궁극적으로 설교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리문답은 설교의 정확함을 보호하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성경 해석의 올바른 진로를 표시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바로 그것이 신조와 요리문답서의 주요 기능이므로 여러분 앞에 늘 열려진 성경 자체로부터 말씀을 직접 증거하지 않고 거듭해서 매년 요리문답서에 의존하여 설교하는 것은 분명히 그릇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성경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보다도 성경에 향해야 합니다.24)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도날드 맥클라우드(D. Macleod) 목사는 요리문답의 중요성과 유용성에 대해서는 잘 밝혔지만,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인다.
비록 신조들 자체에도 오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신조의 구성과 균형과 주제 선정은 성경의 것과 같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들은 문맥 - 성경의 상황 - 에서 추출한 교리를 제시하며, 따라서 그 실질적 적실성을 모호하게 하거나 그것을 아예 적용하지 않도록 유혹한다.25)
요리문답 설교에 대해서 복음주의적인 신학자로부터 부정적인 평가가 나왔으므로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반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좀 더 원칙적인 것으로서 요리문답이나 신앙고백은 성경과 다르고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이며 성경에서 추출한 교리이므로 성경 자체를 설교해야 하며 요리문답 설교를 하는 것은 그릇되었다. 둘째는 현실적인 것으로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이 오류를 방지하고 성경으로 안내하는 역할은 하지만, 하나의 틀을 제시하며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적용하는 것이 약하다. 특히 매년 반복해서 설교하기 때문에 생동감이 떨어진다.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논의한 것으로도 대답이 되겠지만, 요리문답 설교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설교는 성경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요리문답 본문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할 때부터 프리드리히 3세가 이 사실을 강조했다. 요리문답에 많은 성구들이 인용된 것도 설교를 위한 것이었다. 요리문답 본문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설교한다는 명제에는 동의하지만26)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성경 구절을 읽고 설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경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가 성경을 읽고 나서 자신의 평소 생각을 이야기한다면 그가 성경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성경적인 설교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엄밀히 생각하면, 목사의 강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명’이고 교회의 신앙고백인 요리문답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적인 ‘해명’이다. 비록 목사의 강설과 요리문답의 내용에 더 채워질 것이 있지만, 성신께서 이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진리를 가르치신다. 따라서 요리문답은 성경에 대한 인간적인 해명이고 목사의 강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은 다소 단순한 이분법일 것이다. 신앙고백은 성경의 교훈을 ‘요약’한 것이고 지도와 같이 ‘안내’하는 것이므로 대립되지 않는 것인데 두 가지를 대립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27) 신앙고백과 성경을 ‘구분’할 필요는 있으나 두 가지를 ‘분리’하여 신앙고백을 인간의 이해로만 이야기하고 ‘오직 성경’을 주장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오직 성경’을 주장하며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마틴 루터는 요리문답을 “요약된 말씀”(verbum abbrevintum)이라고 불렀다.28)
성경을 강조하고 성경 본문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찬동하지만, 성경과 신조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순할 뿐 아니라 교회의 문을 다른 방향으로 열어 둘 소지가 있다. 즉 ‘비신앙고백적’ 교회로 나아갈 수 있는 큰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교회적인 신앙고백을 옆으로 치웠기 때문에 사사로운 해석이나 경험이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많다. 교회적인 틀을 버리고 개인적인 틀을 제시하기 때문에 성경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더 큰 혼란에 떨어질 수 있다.29)
둘째, 신앙고백이 이단적인 주장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효용성을 바르게 인정했으나 주지주의로 갈 수 있음을 지적한 것에 부분적인 타당성이 있다. 매년 같은 주제로 설교하면 자칫 판에 박힌 ‘지루한 설교’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반복하는 것이 반드시 지루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찬을 매년 여러 차례 시행하지만, 우리는 ‘지루한 성찬’이라고 하지 않고 그때마다 구속의 은혜를 깊게 배운다. 사도 바울도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반복하여 쓰면서(빌 2:18, 28; 4:4)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말했다(빌 3:1). 사도는 같은 진리를 여러 번 말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빌 3:18).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혜를 바르게 깨달은 자에게는 매년 여러 번 시행하는 성찬이 지루하지 않지만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한 번의 성찬도 지루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을 바르게 배우지 않은 사람은 요리문답 설교가 지루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한다. 그러나 요리문답을 차분히 배운 사람은 요리문답의 포괄적인 내용뿐 아니라 목회적인 면과 경험적인 면에 놀란다. 요리문답은 성경의 진리의 실제적인 면을 교회적인 경험의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고, 신자는 그 안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르게 확인할 수 있다.
요리문답이 지루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개혁자 루터의 모범에서 배울 것이 있다. 그는 자신이 작성한 소요리문답 서문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나에 대해서 말하면, 나도 박사이고 설교자이다. 나도 [요리문답을 다 안다고, 필자의 첨언] 자부심과 확신을 갖고 있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배웠고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요리문답을 배우는 아이처럼 행하여 아침마다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읽는다.……나는 매일 요리문답을 읽고 공부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아직 시원하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요리문답의 아이와 학생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30)
그는 계속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창조부터 종말까지 계속 가르치기를 원하시는데, 요리문답을 한 시간 만에 다 읽고 그것을 다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학생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엄격히 단속했다.
우리는 요리문답 설교가 실제적인 적용에서는 약하다고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는 ‘이론과 실천’에 대한 그리스적 이분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진리는 이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실제적이다. 교회에 들어오는 입문인 세례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이 선언된다. 따라서 교리를 다룬다고 해서 실제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역으로 1문에서 고백하는 ‘나의 위로’는 경험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그 위로는 삼위 하나님 안에 놓여 있다. 이론과 실천의 손쉬운 구분은 성경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고(마 28:19),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도를 다 전하는 것을 자기의 목표로 삼았다(행 20:27).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성경 전체’(tota scriptura)이다. 성경의 모든 교훈을 빠짐이 없이 전파하는 데에는 요리문답 설교가 매우 효과적인 방법임이 교회의 역사에서 입증되었다. 요리문답의 순서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반복해서 가르치면 교인들이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자랄 수 있다.
4. 살아 있는 고백서: 오래된 새것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563년에 작성되었다. 혹시는 400년, 혹은 사도신경처럼 1,500년도 더 되는 과거의 문서가 오늘날에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리문답의 원천이 되는 성경은 수천 년 된 문서이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고 있다. 해 아래 새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할 뿐 아니라 항상 새롭고 그의 백성을 진리로 인도한다.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을 공부해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발견하며 또한 오래된 그 문서들이 매우 현대적임을 알려 준다. 말하자면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은 ‘오래된 새것’이다.31)
항상 공부하지만 항상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그 문서 자체에 어떤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문서가 고백하는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분이시고, 항상 자신을 계시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가리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고, 그 말씀의 대의를 요약한 요리문답도 공부한다. 이 신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16세기에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오래된 옛 것’에 불과할 것이다.
교회에 대한 평가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으로 내릴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신앙고백서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교인들이 그것을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고, 또한 그렇다고 하여서 좋은 신앙고백서를 갖지 않은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좋은 고백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을 ‘오래된 새것’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진리’를 복창하면서 나아가는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좋은 교회이다.
교회의 역사는 요리문답이 교인들로 하여금 그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음을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다. 개혁의 선배들은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고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이 발견한 복음 신앙을 물려주었다. 요리문답 교육 체계가 유지된 곳에서는 개혁의 좋은 열매가 보존되고 전파되었으나 그렇지 못한 교회는 매우 피상적이고 종교심만이 강조됨을 우리는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존 머레이 교수가 갈파한 대로, “현대 기독교를 그렇게 특징짓는 교리적 무지와 혼란과 불안정함은 대부분 이 관행을 [요리문답 교육과 설교를, 필자] 중단한 데에 기인한다.” 32)
요즈음은 많은 교회들이 신앙고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신앙고백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말하자면 책장에 모셔 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앙고백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렇지만 신앙고백은 언약의 맥락에서 교회가 항상 고백해야 하는 내용이고, 바른 고백을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미지 시대에 살고 있고 교회도 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요리문답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바르게 파악하고 고백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이 시대의 사조(思潮)에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빛을 비추며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엡 4:13-14; 딤전 3:15).
‘역사를 통해 흐르는 주류(主流)의 신앙과 신학을 이어받고 전파하며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요약한 요리문답의 학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루터처럼 “요리문답의 아이와 학생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고 고백할 때 우리 교회는 그 사명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끝)
각 주
1) 칼빈의 두 요리문답의 한글 번역으로는, 『칼뱅의 요리문답』, 한인수 역 (도서출판 경건, 1995). 제1요리문답에 대한 주해서로는, J.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Hesselink의 책에는 1537년의 제1요리문답을 1538년에 라틴어로 번역한 서문이 실려 있다. 그 서문에 요리문답의 중요한 특징 두 가지가 나타난다. 첫째는 로마 교회를 향한 신앙고백이다. 개혁자들이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낸다고 로마 교회에서 비난하는데, 그들이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 제네바 요리문답을 라틴어로 번역해서 출간한다고 밝혔다(p. 2). 둘째는 교회적 통일을 위한 신앙고백이다. 개혁자들에 대한 비방과 험담이 많이 유포되고 있었지만 칼빈은 거기에 대해서 맞대응하기보다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했다. “연합과 평화를 위한 열망이 있다면 문자에 매인 종교 의식을 까다롭게 주장하기보다는 교리와 마음의 통일을 추구하자”(p. 6). 제네바 요리문답은 자녀 교육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로마를 향한 신앙고백이었고 교회 사이의 참된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고백이었다.
2)트렌트 요리문답의 내용은 다음을 참조. http://www.cin.org/users/james/ebooks/master/trent/tintro.htm. 트렌트 요리문답은 평신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구 신부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문답식이 아니라 서술식이라는 점에서 개신교의 일반적인 요리문답과 차이가 있다. 물론 개신교에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처럼 직분자를 위한 것도 있고, 제1제네바 요리문답처럼 서술식도 있다.
3) D. van Dyken, Rediscovering Catechism (P&R Publishing, 2000), pp. 31, 33.
4) O. Thelemann, An Aid to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 by M. Peters (Douma Publicaions, 1959), pp. 475-80.
5) 화란 1571년 총회에서는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택해서 가르치도록 했는데, 그 후 교회사를 보면 대부분의 교회가 후자를 사용했다
6) G. van Rongen & K. Deddens, Decently and in Good Order, The Church Order of the Canadian and American Reformed Chruches (Premier Publishing, 1986), pp. 81-82.
7) Ursinus,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reprint. Eerdmans, 1954), pp. 10-11. 요리문답은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 형식은 대체로 문답식이지만 서술형도 있다. 칼빈의 첫 번째 요리문답은 서술형이고, 둘째 것은 문답형이다. 후에는 서술형의 고백보다도 문답식이 많기 때문에 ‘기독교적 가르침’보다는 ‘요리문답’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한다.
8) J. Murray, “Catechizing - A Forgotten Practice,” Banner of Truth, vol. 27. http://www.lineofpromise.com/articles.html#1
9) 요리문답 서문은 첫 번째 글에서 길게 인용되었다. 김헌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소개 (1)”, 「성약출판 소식」 43호, 2004년 2월 16일.
10) J. N. Bakhuizen van den Brink, De Nederlandse Belijdenisgeschriften (2판. Amsterdam: Uitgeverij ton Rolland, 1976), p. 153.
11) A. Hoekema, “The Importance of Catechism Instruction,” New Horizons, 24:3 (2003). 이 글은 1952년에 했던 강의를 50여 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실은 것이다. 후크마는 이 글에서 전도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언약의 자녀와 아닌 자를 구별하지 않는 ‘주일학교’와 언약의 자녀에게 성찬을 준비하게 하는 ‘요리문답반’을 구별하고, 1850년 이후 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주일학교가 요리문답반을 대신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1812년부터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A. Alexander(1772-1851)도 주일학교의 영향으로 요리문답반이 사라지는 현실을 비판하고, 가정과 교회에서 요리문답 교육에 힘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Catechetical Instruction,” http://www.naphtali.com/catechetical_instruction.htm.
12) 참조. 허순길, 『개혁교회의 생활과 목회』 (총회출판국, 1994), 44-46쪽.
13) 1684년에 간행된 Lippe의 “예배 모범”에서는 요리문답 교육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있고 교회에서 견실하게 실행하여 확정된 요리문답은 오랜 교회의 경험이 증거하듯이 말씀 봉사자의 직분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없이는 강단의 설교로부터 매우 미미한 열매만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배우지 않거나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설교를 들어도 지극히 미미한 부분만 이해하며 여전히 큰 무지와 불신앙 가운데 거하기 때문이다.” O. Thelemann, An Aid to the Heidelberg Catechism (Douma Publications, 1959), p. 507.
14) Dr. Martin Luthers kleiner Katechismus (Hannover, 24판. n.d.), 7쪽.
15) 요리문답을 공부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사에서 배울 수 있는 좋은 전통임을 이야기했지만, 한국의 상황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요리문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요리문답을 잘 알지 못하면서 새로 가입하는 사람에게만 요리문답을 가르친다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매우 크다. 요리문답은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먼저 교인들이 배워서 친숙히 알고 난 다음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 요리문답 공부를 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6) Van Dooren, "Catechism Preaching," Clarion, 25:11-13 (1976). http://www.spindleworks.com/library/vandor/cateshism_p.htm. p. 5.
17) 키릴에 대한 언급은, N. H. Gootjes, “Catechism Preaching,” Proceedings - ICRC 1993 (Inheritance Publications, 1993), p. 144. 어거스틴의 책은 『신앙핸드북』으로 번역되었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18) G. H. Visscher, “Why Catechism Preaching in a Second Worship Service?” Clarion, 49:24 (2000), pp. 540-42; R. Knodel, Jr., “Catechetical Preaching,” Ordained Servant, 7:1 (1998), pp. 16-19.
19) T. Watson, “Why Catechize?” New Horizons, 22:1 (2001). http://opc.org/new_horizons/NH01/0001d.html.
20) B. Thompson, et al., Essay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United Church Press, 1963), p. 51; D. Van Dyken, Rediscovering Catechism (P&R Publishing, 2000), pp. 19-20.
21) Peter Y. De Jong, “Preaching and the Synod of Dort,” in Crisis in the Reformed Churches, ed., P. Y. De Jong (Reformed Fellowship, 1968), pp. 118, 124.
22) N. H. Gootjes, “Catechism Preaching,” Proceedings - ICRC 1993 (Inheritance Publications, 1993), pp. 149-52.
23) 원문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는 표현 대신에 “네덜란드 교회들이 현재 받고 있는 요리문답”으로 되어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후대의 교회법에 나오는 용어로 번역했다. 도르트 교회법의 원문은 C. Bouwman, Spiritual Order for the Church (Premier Publishing, 2000), p. 207에서 인용.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도르트 교회법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설교할 것을 엄격히 규정했지만 그 후의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요리문답을 한 번 가르치는 데 대체로 일 년 반이 걸린다. 이러한 현실에 따라서 캐나다 개혁교회는 “매 주일 통상적으로 한 번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요약된 대로 가르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52조)라고 규정하여 “일 년에 한 번”이라는 말을 삭제했다. Book of Praise (Premier Publishing, 1998), p. 670.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는 요리문답 설교에 대한 규정이 없다. 이것은 예배 모범이 작성된 시점(1645)에서 아직 대소요리문답(1647)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이 요리문답이 사도신경을 기초로 작성되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서 더 연구할 주제이다. R. D. Anderson, “An Examination of the Liturg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rdained Minister, 3:2 (1994), pp. 30, 32; C. Van Dixhoorn, “Is the Larger Catechism Worthwhile?” New Horizon, vol. 21 (2000, Nov).
24) 로이드 존스, 『목사와 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1982), 207쪽. 인용문은 원문과 비교해서 다소 수정했음. Preaching and Preacher (Zondervan, 1977), pp. 187-88.
25) 새뮤엘 로건 편, 『설교자 지침서』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304쪽.
26) 개혁교회 안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설교의 방법에 대한 토론이 있다. ‘성경 본문 방법’과 ‘요리문답 본문 방법’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전자는 성경의 한 본문을 택해 해석하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본문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리문답이 성경이 아니므로 성경 본문을 설교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후자는 요리문답 본문이 ‘성경의 교훈의 요약’이라고 전제하고 요리문답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면서 여러 성경 구절들을 들어서 해설한다. 두 방법을 놓고 논의하지만 어느 경우는 두 가지 방법을 절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해당 문답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성경을 인용한 문답의 경우에는 좀 더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가르칠 수 있지만, 교육적인 효과를 위해서 체계적으로 가르친 문답의 경우에는 요리문답 본문을 해설하는 데에 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참조. C. Stam, Living in the Joy of Faith (Inheritance Publications, 1991), pp. 10-11.
27) ‘요약’과 ‘지도’라는 말로 설명했지만, 성신의 감동으로 작성된 성경과 요리문답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악의는 없지만, 둘을 ‘동일시’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성경처럼 영감(靈感)된 책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에 대한 예는 G. I. Williamson, “Some Thought on Preaching,” Ordained Servant, 3:2 (1994), pp. 42-43. 성경과 신앙고백/요리문답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5년에 「성약출판 소식」에 기고할 “성경과 신앙고백”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28) B. Thompson, et al., Essay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United Church Press, 1963), p. 33.
29) J. Daane, “Catechism Preaching?,” Kerux, 32:11 (1998), pp. 1-3; M. Kamps, “Heidelberg Catechism Preaching: Our Reformed Heritage,” http://www.prca.org/pamphlets/pamphlet_34.html, p. 2.
30) Dr. Martin Luthers kleiner Katechismus (Hannover, 24판. n.d.), 8-9쪽.
31) 지난 세기의 중반에 네덜란드에서 간행된 어떤 주석서의 이름은 『하이델베르크의 영원한 젊음』이다. G. Oorthuys, De eeuwige jeugd van Heidelberg, Uitgevers-Maatschappij, 1939.
32)J. Murray, “Catechizing - A Forgotten Practice,” Banner of Truth, vol. 27 (1967). http://www.lineofpromise.com/articles.htm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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