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본 경제학
김상융 박사(북미주독립장로교회 교인, 경제학박사)
믿는 사람들을 향한 사탄의 공격 무기는 속임수이다. 속임수란 참이 아닌 것을 참이라고 속여 꾀는 것을 말하는데, 사탄은 그 속임수의 소재를 항상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찾아낸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이용하여 거짓 복음을 전파하고 거짓 선지자를 만들어 낸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이들에게 속아 참람한 배교(背敎)의 길을 가고 있다. 사탄은 또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순진한 신자들을 속이고 그들의 이성과 지성을 오염시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삼라만상의 일반 원리와 법칙을 찾고 배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가정(假定)과 이론을 마치 절대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고 속임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 사람들의 사상과 사고방식에 그대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이고 학문은 학문이다’하는 위험한 생각도 갖게 만들고, 또 성경과 학문적 이론이 상충되는 경우 해답을 못 찾고 방황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 성경을 회의하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 객관성을 표방하면서 비편파적이고 공정한 진리 탐구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우 세상 학문이 매우 주관적이고 편파적이고 공정하지 못하며, 따라서 진리 탐구가 아닌 오히려 진리 은폐를 위한 노력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현상 - 인간 사회를 포함해서 - 에 대한 해석의 유일한 단서인 말씀을 무시한 ‘객관성’이 절대로 객관적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부패한 인간의 이성에만 근거하여 만든 이론과 가정에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전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공정성’은 절대로 공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에서는 이 같은 세상 학문의 편파성의 일례로서 경제학의 방법론을 들어, 그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원칙과 얼마나 상치되는 것인가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쉽게 말해서 경제학은, 소비는 왜 그리고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가, 생산은 왜 그리고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가, 상품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가격이 떨어지면 왜 소비가 늘어나는가, 또 얼마나 늘어나는가, 생산이 늘면 고용이 왜 그리고 얼마나 느는가 등 경제 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 현상의 기본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 한편 경제 행위 또는 그 경제 행위 주체의 근본 동기에 초점을 맞춰 다음과 같이 다소 추상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다. 즉 경제학은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 사용함으로써 최대의 만족 또는 효용을 얻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어떤 학문이고 간에 그 근저에는 그 학문의 기본 전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공리와도 같아서 이것이 무너지면 그 학문 체계 전체가 무너지는 절대 불가결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경제학에도 이와 같이 없어서는 안되는 몇 가지 기본 전제(fundamental presuppositions)가 있다.
경제학의 초석이 되는 이 기본 전제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이들은 과연 얼마나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경제학의 첫 번째 기본 전제는 모든 자원은 희소하다는 것이다(scarcity). 땅, 자본, 원료, 상품 등 가치를 가진 세상의 모든 자원의 양은 제한되어 있으며, 그래서 희소한 것이라는 전제이다. 이렇게 자원이 희소하니까 자연히 적은 자원을 들여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는 능률의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된다.
얼핏 들을 때 아무 문제가 없는 너무나 당연한 전제인 듯하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매우 거리가 먼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희소성은 상대적 개념으로서,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여서 세상에 주어진 것으로는 도저히 그 욕망을 충족할 수 없다는 가정 하에서 성립한 개념이다.
자원은 희소한 것이라는 전제는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모든 것을 알맞게 분량대로 주셨고 또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과 상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옵소서”(잠 30:8)라고 가르치고 있다.
두 번째 기본 전제는 개인이 모든 경제 행위의 주체이자 근본이며 따라서 경제 현상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요소라는 것이다(individuality). 경제 행위의 주체인 개인들은 경제 행위를 위한 결정을 할 때 사회, 종교, 가족 제도와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 한다는 전제이다. 따라서 경제학에서 다루는 인간은 국적도 가족도 없으며 사회, 문화, 단체와는 전혀 무관한, 경제 행위밖에 모르는 무색투명한 동물과 다름이 없다.
구태여 성경을 말하지 않아도 이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전제인가를 누구나 잘 알 수 있다. 신자는 물론이거니와 세상 사람들도 반드시 자신만을 위해서 경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에서 이 전제가 고수되는 것은 이것이 골치 아프고 다루기 힘든 가치의 문제, 도덕적 문제를 회피할 수 있게 해주며 동시에 소위 ‘객관적’인 학문 체계를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까닭이다.
이 두 번째 전제는,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 개개인의 존재는 교회의 일원으로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또 그에 따르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데에 참의의가 있는 것이므로, 경제 행위도 자기 개인이 아닌 교회의 일원으로서, 또 하나님의 충실한 청지기로서의 행위라는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상이다.
세 번째 전제는 개인의 경제 행위의 근본 동기는 효용의 극대화라는 것이다(maximization of utility). 이 효용이란 말은 만족, 욕망, 공리 등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데 심리적, 육체적인 만족, 행복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개인이 경제 행위를 통하여 가장 많은 효용을 얻는 것이 목표인데, 이 효용은 희소한 자원, 물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효용의 극대화 노력은 다시 말해서 희소한 자원을 되도록 더 많이 소유하려는 노력이다. 소비자의 소비 행위, 기업가의 영업 행위, 근로자의 근로등 모든 경제 행위의 궁극적 목표는 이 물질에서 얻어지는 효용이다.
이 세 번째 전제는 기독교인으로서 제일 크게 문제 삼아야 할 전제이다. 이렇게 인간의 행복과 만족이 물질적 풍요에 있다는 철저한 물질주의적 사상이 경제학의 근저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이 효용 극대화의 전제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관련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공리주의 사상에 의하면, 행위 동기의 선하고 악함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그 행위의 결과가 얼마나 유용한가에 따라 그 행위의 선과 악이 가려진다. 경제 행위의 뒤에 있는 동기의 옳고 그름은 문제가 되지 않고, 대신 그 경제 행위가 얼마나 유용한 결과를 (또는 얼마나 많은 효용을) 가져왔는가 - 즉 능률의 문제 - 에 따라 경제 행위가 평가되는 오늘날 경제학 방법의 출발점이 공리주의 윤리관임을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경제학은 이렇게 함으로써 윤리 도덕을 배제한 학문을 만들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하여 소위 ‘중립적’인 학문의 터를 닦았다.
물질에서 얻어지는 효용의 극대화가 경제 행위의 동기이자 목표라는 전제가 성경과 크게 어긋남은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경제 행위의 기준, 즉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정당한 판단 기준(criterion)은 충성된 청지기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다(stewardship).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것도, 돈을 사용하고 물건을 사는 것도, 기업가로서 기업을 운영하고 이윤을 내는 것도, 투자를 하는 것도 모두 다 청지기로서의 맡은바 책임을 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만족과 효용 대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이 경제 행위의 목표이자 동기라는 사실을 경제학에서는 무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효용 극대화의 전제에 대한 하나의 대체 전제(alternative presuppositions)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도 거부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개인 효용의 극대화 추구가 경제 현상의 초석이라는 전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기본 성향을 그대로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 현상이 이 세상 사회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타당한 전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타락된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경제학의 기본 전제로 삼고 또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성, 죄악성을 배제함으로써 경제학을 개인, 사회, 국가의 물질주의 숭배와 그에 따른 부패와 타락을 정당화해 주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효용 극대화의 전제는 또 경제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다 많은 부(국민소득)를 창조하여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최상의 정책이라는 성장 제일주의 경제 정책을 조장시킨다. 오늘날 소득 분배 문제, 노사 문제, 오염 문제 등이 심각한 경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성장 추구 정책에만 집착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이다.
네 번째 전제는 모든 자원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means) 또는 도구(instrument)로서만 가치 있다는 것이다(instrumentality). 땅, 자본, 기계, 원료, 상품, 천연 자원 등 모든 것이 인간의 목적 달성을 위한 경제 행위 - 예컨대 소비 생산의 도구이며 심지어 노동자까지도 생산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서만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전제가 가지는 중요성은 자원이 수단으로만 정의됨으로 해서 그 자원의 사용에 따르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자연히 배제된다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오직 자원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근로자의 후생, 건강, 사기, 성취감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그들이 시간당 몇 개를 생산하는가만 문제가 될 뿐이다. 강물이 시커먼 시궁창이 되어도 어떻게 하면 공장을 잘 돌려서 이윤을 남기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단. 다음 세대에 오는 후손이야 어떻게 되든 지금 가지고 있는 천연 자원을 다 써서라도 어떻게 하면 생산을 더 늘리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가 참으로 인간의 만족과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주신 모든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그것을 맡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의 의무는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써버리는 대신 보존하고 아끼고 가꾸어 하나님께서 그것을 세상에 내신 본의를 이루시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써버리는 것은 절도 행위다. 모든 자원을 인간의 욕망 달성을 위한 수단, 도구로 정의함으로써, 경제 행위에서 도덕성, 윤리성을 배제한다는 전제는 마치 절도 행위에서 도덕성, 윤리성을 배제한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다.
이상 경제학의 기본 전제 중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골라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평가를 해 보았다. 위의 전제들에 대해서 모든 경제학자들이 다 찬성하는 것은 아니고 또 전제 자체에 대한 논란도 사실상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위 전제들을 옳고 그름, 도덕성 또는 윤리성 등의 관점에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들 전제 위에 세워진 경제 이론이 실제 경제 현상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에 따라 평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가치 판단의 문제를 회피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전제들은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 즉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목적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왜곡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현대 인류 고고학과 지질학의 움직일 수 없는 초석이 된 다윈(Darwin)의 진화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지금은 기본 전제의 위치에서 승격하여 마치 우주 중력의 법칙과 같이 완전히 실증적으로 증명된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둔갑하였다. 따라서 거의 모든 고고학자와 지질학자들은 진화론이 생물과 지구의 역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최초의 인간이 몇십억 년 전에 나타났다든가, 공룡의 연대가 몇백억 년 전이라든가 하는 계산의 근거로 이 진화론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또 우주와 생물의 생성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씀의 계시를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대신 진화론만이 과학적으로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은 진화론 자체도 하나의 가정 또는 전제에 불과한 것이며, 창조론을 최소한 대등한 대체 전제로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학문적 태도 또한 객관적이 아닌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진화론의 이러한 편파적인 학문적 태도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성경에 회의를 품게 만들고, 또 교묘하게 성경의 진리를 진화론과 접목시켜 말씀의 권위를 훼손시키고 있음을 본다.
진화론에 근거한 지질학과 같이, 경제학도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학문의 객관성을 유기함으로써 중립을 지킨다고 하나 위에서 보았듯이 경제학의 전제들은 중립적인 위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학문에 있어서의 중립 또는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보고 해석하는 관점은 두 가지이며, 제 3의 - 소위 중립의 위치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두 가지의 관점뿐이다.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 행위에 관한 기본 전제를 비성경적이고 무신론적인 것에 둠으로서, 죄인 된 인간이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백성이 청지기로서 하나님을 충실히 섬기는 데에 있어 경제 행위(경제생활)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할 것을 거부하였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객관성은 비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경제학의 전제로 삼는 근본적인 교정 또는 방향 재설정(reorientation)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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