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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성경에 대한 검토 보고서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Bavinck Byeon 2015. 5. 12. 01:31

바른성경에 대한 검토 보고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서 론

 

한국성경공회는 2009년에 하나님의 말씀 <바른성경>을 출판하였다. 1999년부터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기 시작하여 약 9년간의 노력 끝에 또 하나의 성경이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다. <바른성경>은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온 기존의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에 비해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 우선 <바른성경>은 그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가지고 번역하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첫째, <바른성경>은 바른 신학을 가지고 번역하였다고 한다. 바른 신학이란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전제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학을 말한다. <바른성경>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번역하였다고 한다.

 

둘째, <바른성경>의 번역위원들은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을 가진 학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복음주의적인 신학대학교의 교수들 35명과 국어국문학자 5명 총 40여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셋째, <바른성경>은 바른 번역 이론과 원칙에 의하여 번역하였다고 한다. <바른성경>은 현대의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취하는 의미일치론을 반대하고 성경 원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원문의 언어적, 문법적, 구문적, 구조적 특성을 최대한 고려한 형식일치론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성경 저자의 의도를 살리면서 성경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넷째, <바른성경>은 현대 한국 사람이 사용하는 바른 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바른성경>은 현대 초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바른말과 표준말로 문어체와 구어체를 혼용하여 문장 흐름의 유연성을 증대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였다고 한다. 한국성경공회 웹사이트(www.ksbible.com)에 보면 <바른성경>은 “현대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사용하는 표준어”를 주로 사용하였지만, “문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구어체”를 혼용하였다고 한다.

 

이상의 번역 원칙들은, 일단 마지막 원칙을 논외로 하면, 대체로 올바른 원칙이라고 생각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전제하고서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고 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실제로 성경 번역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지켜졌는가 하는 것은 번역된 결과를 가지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성경 원어를 바르게 이해하고 적합한 우리말로 번역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바른 신학에 서 있다고 해서 성경 원어를 자동적으로 바로 이해하고 바로 번역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역시 번역된 결과를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원문을 얼마나 합당한 우리말로 번역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과연 <바른성경>이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었는지도 역시 결과를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른성경>에 한글 문체가 과연 성경이 위엄 있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곧 경전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충실하게 드러내었는지 하는 것도 역시 나타난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성경>의 번역 자체를 살펴보면서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4판)과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더 원문에 충실한지, 어느 것이 더 합당하게 번역되었는지 검토할 것이다. 시간과 지면 관계상 모든 구절들을 다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주요한 구절들을 임의로 뽑아서 검토한 후에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다.

 

 

본 론

 

I. 개선된 것들

 

A. 구약에서

 

1. 시적인 행 배열

 

바른성경은 우선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시로 지어진 각 절을 행 별로 배열하여 시라는 장르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 1편은 가장 모범적이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계획을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한다.

......

 

시적 배열은 선지서들을 읽을 때 매우 유용하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나 선지자의 예언은 주로 시로 기록되었는데, 기존의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는 그것이 산문체 본문과 구분되지 않았지만 바른성경에서는 행적으로 배열되어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출 15장, 삿 5장 등, 산문체 기사 가운데 등장하는 시들도 행적으로 잘 배열하여 이 본문들이 시로 기록되었음을 구분해 주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맛소라 히브리어 본문의 행적인 구조를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지 않아서 자의적(恣意的)이라는 인상을 준다.

 

2. 창세기 4:25

 

[개역한글]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개역개정]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

[바른성경] “아담이 자기 아내와 다시 동침하니 아내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불렀는데 ...”

 

창 4:25의 첫 문장 “아담이 자기 아내와 다시 동침하니”의 주어는 아담이지만, 그 다음 두 문장의 주어는 하와이다. 특히 “와티크라 엣-세모 셋”(tve Amv.-ta, ar"q.Tiw:)에서 ‘와티크라’(ar"q.Tiw:) 동사를 분해하면, 칼 와우 계속법 3인칭 여성 단수이며 원형은 ‘카라’(ar"q')이다. 이것이 지시하는 것은 ‘그의 아내’이다. 그렇기 때문에 셋의 이름을 지어 부른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이기 때문에 바른성경의 번역이 옳다.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그가’는 전통적인 한글 문법에서 가능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아담을 지시하는지 아니면 하와를 지시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의 번역이 더 적절하다. 하지만 바른성경은 ‘3인칭 여성 단수’를 ‘그녀가’로 번역하지 않고, 이것이 지시하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명사 ‘아내’를 임의로 첨가하였다.

 

3. 창세기 6:2

 

[개역한글] “...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개역개정] “...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바른성경] “... 각자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창 6:2은 두 문장으로 되어 있다. “엘로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본즉 그녀들이 좋았더라.”와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자로부터 자신을 위해 아내로 취했더라.”이다.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이 ‘자기들의 좋아하는’의 히브리어 본문은 ‘아셀 바하루’이며, ‘바하르’의 뜻은 ‘선택하다’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선택했겠지만, 히브리어 원문 ‘바하르’의 뜻은 ‘선택하다’이기 때문에 바른성경의 번역이 더 적절하다

 

4. 창세기 15:13

 

[개역한글] “...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

[개역개정] “...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

[바른성경] “... 네 후손이 그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며, ...”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이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문장은 “게르 이예 잘아카 베에레츠 로 라헴”(~h,l' al{ #r<a,B. ^[]r>z: hy<h.yI rgE)이며,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처럼 번역해도 심각한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 ‘로 라헴’은 ‘그들의 소유가 아닌’이란 뜻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소유로 준다고 아브라함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과정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성경의 번역을 따르는 것이 본문의 전체적인 배경에 더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5. 창세기 21:18

 

[개역한글] “...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개역개정] “...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바른성경] “...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 것이다. ...”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이 각각 “그로 ... 이루게 하리라”와 “그가 ... 이루게 하리라”로 번역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표현은 동사 ‘심’(~yfi)의 미완료 1인칭 공성 단수이다. 그 뜻은 ‘그로’나 ‘그가’가 아니라 1인칭 ‘내가’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큰 민족 되게 하겠다는 의미를 약하게 만든 번역이며, 바른성경의 번역이 올바른 번역이다.

 

6. 창세기 22:5

 

[개역한글] “...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개역개정] “...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바른성경] “...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

 

개역한글판에서는 예배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아브라함 혼자인지 아니면 이삭과 함께인지 명확하지 않다. 개역개정판은 돌아오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인데 반해 예배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 부분을 ‘베니스타하베’(hw<x]T;v.nIw>)와 ‘베나수바’(hb'Wvn"w>)로 표현하고 있다. 두 동사는 각각 ‘하바’(hwx)와 ‘수브’(bwv)의 미완료 1인칭 공성 복수이다. 1인칭 공성 복수는 예배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성경의 ‘우리가’를 넣은 번역이 더 분명한 번역이다.

 

7. 창세기 38:11

 

[개역한글] “...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

[개역개정] “...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

[바른성경] “...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지내라. ...”

 

유다가 자기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면서 한 말의 히브리어 표현은 “쉐비 알마나 베이트-아비카”(%ybia'-tybe hn"m'l.a; ybiv.)이며,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이 번역하고 있는 ‘수절’이란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에 없다. 개역개정판과 개역한글판은 ‘알마나’(hn"m'l.a;)를 ‘수절’로 번역하였는데, ‘알마나’는 ‘수절’로 번역하기 보다는 ‘과부’로 번역해야 한다. 유다는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서 과부로 지내라고 말했다. 따라서 바른성경의 번역이 직역이며 바른 번역이다.

 

8. 창세기 43:32

 

[개역한글] “...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개역개정] “...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바른성경] “... 이는 이집트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았으니, 그렇게 먹는 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창 43:32의 히브리어 표현(yIr"c.mil. awhi hb'[eAt-yKi ~x,l, ~yrIb.[ih'-ta, lkoa/l, ~yrIc.Mih; !Wlk.Wy al{yKi)은 먼저 이집트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이어서 함께 먹는 것을 그들이 혐오하였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은 이 문장의 전반부를 대충 번역한 반면에 바른성경은 히브리어 문장을 훼손하지 않고 직역하였다.

 

9. 시편 1:3

 

[개역한글]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개역개정]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바른성경] “그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 제때에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않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다.”

 

개역개정판 ‘나무’가 비유의 초점임을 살리지 못한 반면에, 바른성경은 히브리어의 의미를 잘 살려 번역하였다.

 

10. 이사야 1:4

 

[개역한글]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개역개정]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바른성경] “슬프다, 죄지은 민족, 죄악을 짊어진 백성, 악한 자들의 후손, 부패한 자식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멸시하며 뒤로 돌아섰다.”

 

개역개정판의 ‘허물진 백성’의 원어 ‘케베드 아본’(@wO[; db,K,)은 직역하면 ‘죄악이 무거운’이다. 개역개정판의 ‘허물진 백성’보다는 바른성경의 ‘죄악을 짊어진 백성’이 의미를 더 잘 살렸다. 개역개정판의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에서 ‘만홀히’는 어려운 한자어이다. 바른성경의 ‘멸시하며’가 훨씬 뜻이 잘 전달된다. 개역개정판의 ‘물러갔도다’보다 바른 성경의‘뒤로 돌아섰다’가 원문의 의미를 더 잘 전달하고 있다.

 

11. 이사야 6:2

 

[개역한글]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개역개정]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바른성경] “위쪽에서 그분을 모시고 서 있는 스랍들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갖고 있었으니,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그 발을 가리고, 또 둘로는 날며”

 

히브리어 본문은 ‘밋마알’(l['M'mi, 위쪽에서부터) 있어서 바른성경의 ‘위쪽에서’가 첨가되어 좀 더 정확한 번역이다.

 

12. 이사야 6:4

 

[개역한글]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개역개정]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바른성경] “그 부르짖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며, 그 성전이 연기로 가득 찼다.”

 

히브리어 본문은 그냥 ‘부르짖는 자의 소리’이다.

 

13. 이사야 7:1

 

[개역한글]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개역개정]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바른성경] “... 베가가 예루살렘과 전쟁하려고 올라왔으니, 그곳으로 공격을 개시하지 못했다.”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문자적으로 “그곳을 향하여 전쟁하지 못하였다.”이다.

 

14. 이사야 7:22

 

[개역한글] “그 내는 젖이 많으므로 뻐터를 먹을 것이라 무릇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개역개정]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바른성경] “그것들이 젖을 많이 내어 그가 버터를 먹을 것이니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땅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이 버터와 꿀을 먹으리라.”

 

남아 있는 자 앞에 ‘콜’(lKo, 모든)이 있어서 바른성경이 옳은 번역이다. 개역개정판의 ‘엉긴젖’보다는 바른성경의 ‘버터’가 이해하기 쉽다.

 

15. 이사야 7:25

 

[개역한글] “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

[개역개정]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

[바른성경] “괭이로 경작하던 모든 산에도 너는 찔레와 가시덤불이 무서워 그리로 가지 않을 것이며 ...”

 

개역개정의 ‘보습’이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이다. 바른성경의 ‘괭이’가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원문에서 주동사의 인칭이 2인칭 남성 단수이다. 바른성경은 ‘너는’을 넣어서 문자적으로 잘 번역하고 있지만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16. 이사야 8:3

 

[개역한글]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개역개정]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바른성경] “그 뒤에 내가 그 여선지자에게 갔고,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때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불러라.”

 

개역개정판에 ‘내 아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한느비야’(ha;ybiN]h')는 바른성경과 같이 ‘그 여 신지자’이다. 바른성경이 원어대로 잘 번역하였다.

 

17. 이사야 8:7

 

[개역한글]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개역개정]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바른성경] “주님께서 세차고 많은 강물, 곧 아시리아 왕과 그의 모든 영광이 그들을 대항하도록 데려올 것이니, 그것이 모든 수로를 덮고 그 모든 강둑 위로 넘칠 것이며”

 

개역개정판의 ‘흉용하고 창일한’보다는 바른성경의 ‘세차고 많은’이 원어에 더 가깝고 쉽게 번역되었다. ‘그의 모든 위력’으로 번역된 ‘엣-콜-케보도’(/d/bK]AlK;Ata,)는 바른성경의 ‘그의 모든 영광’이 원어를 더 잘 반영하여 번역하였다. 개역개정판의 ‘골짜기’와 ‘언덕’으로 번역한 ‘아피카우’(wyq;ypia})와 ‘그도타우’(wyt;/dG])는 바른성경의 ‘수로’와 ‘강둑’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18. 이사야 11:6

 

[개역한글]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개역개정]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바른성경]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끌 것이다.

 

히브리어 ‘케피르’(rypiK])는 ‘어린 사자’가 아닌 ‘젊은 사자’이다. ‘어린 사자’라고 하면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힘 있는 젊은 사자가 원문의 의미를 훨씬 잘 살리고 있다.

 

19. 이사야 11:10

 

[개역한글]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개역개정]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바른성경]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들의 깃발로 설 것이고 열방들이 그를 찾을 것이며 그의 안식처가 영화로울 것이다.”

 

개역개정판에서 ‘돌아오리니’로 번역한 ‘이드로슈’(Wvrod]yI)는 바른성경의 “그들이 찾을 것이며 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 개역개정판이 ‘그가 거한 곳’으로 번역한 ‘므누하토’(/tj;nUm])는 바른성경에서처럼 ‘그의 안식처’로 번역해야 한다.

 

B. 신약에서

 

1. 마태복음 1:1

 

[개역한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개역개정]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바른성경]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개역한글판의 ‘세계’(世系)란 말은 ‘족보, 계보’란 뜻인데 오늘날 거의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계’(世界, world)와 혼동되기 쉬운 말이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에서는 ‘계보’로 고쳤다. 바른성경에서도 ‘계보’로 번역한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는 똑같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문에 의하면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아들(자손)”임을 말하고 있다. 이 두 칭호는 각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것이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바른성경에서는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고 해서 이 두 칭호를 분명히 살려서 번역하였다. 따라서 이 점에서는 바른성경이 더 낳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른성경에서는 원문에서 한 문장인 것을 두 문장으로 나누었을 뿐 아니라 작은 글씨로 ‘이러하다’와 ‘그분은’을 덧붙였으며 전체적으로 원문의 간결성이 많이 훼손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은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

 

2. 마태복음 3:4

 

[개역한글] “...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개역개정] “...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바른성경] “...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야생 꿀이었다.”

 

여기서 ‘석청’(石淸)이란 말은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옛말이다. 따라서 바른성경이 ‘야생 꿀’로 번역한 것은 적절하다고 하겠다.

 

3. 마태복음 6:2,5,16 등

 

[개역한글] 외식하는 자

[개역개정] 외식하는 자

[바른성경] 위선자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외식(外飾)하는 자’는 ‘겉으로 꾸미는 자’란 뜻이다. 원어는 ‘휘포크리테스’(uJpokrivth" 로 가장하는 자 겉으로 ) ‘ , 그런 체 하는 자’란 뜻이다. 이것은 속(마음)과 겉(행동)이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 곧 바리새인들처럼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깨끗한 척, 의로운 척 행동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외식하는 자’란 번역이 맞기는 하지만, 오늘날 한자를 모르는 시대에서는 ‘외식’이라고 하면 ‘밖에 나가서 사먹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외식(外飾)하는 자’란 말의 원뜻이 바로 이해되기가 어렵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바른성경의 ‘위선자’란 번역은 괜찮은 번역으로 생각된다.

 

4. 마태복음 6:34

 

[개역한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개역개정]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바른성경]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하다.”

 

본절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란 문장은 많이 오해되어 왔다. 마치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염려하자는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원문의 뜻은 직역하면 “내일이 스스로를 염려할 것이다.”가 된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는 것인데, 곧 내용상으로는 “하나님이 내일을 염려하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개역한글판의 오역을 개역개정판과 바른성경이 바로잡았다.

 

5. 마태복음 7:1

 

[개역한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개역개정]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바른성경]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않도록 남을 판단하지 마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 ‘비판하다’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크리노’(krivnw)로서 ‘판단하다’(judge)가 가장 기본적인 뜻이다. 물론 ‘심판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고 ‘비판하다’로 번역할수도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판단하다’가 원뜻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바른성경의 ‘판단하다’는 번역이 여기서는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의 원문은 목적절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직역하면 ‘판단을 받지 않기 위해서”가 된다. 바른성경에서는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않도록”이라고 해서 목적절임을 살렸다. 그러나 우리말의 입장에서 본다면 “... 받지 않도록”은 어색하다. 차라리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받지 아니하려거든”이 훨씬 부드럽고 우리말답다.

 

그리고 2절의 ‘헤아리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메트레오’(metrevw)는 ‘재다, 측정하다’(measure)의 뜻이다. 그런데 바른성경의 ‘저울질하다’는 ‘측정하다’의 한 종류이긴 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좀 어색하다. 차라리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헤아리다’가 더 좋아 보인다.

 

6. 마태복음 15:2 등

 

[개역한글]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개역개정]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바른성경]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개역한글판의 ‘유전’(遺傳, paravdosi")이란 말은 ‘전해 내려온 것’이란 뜻인데, 요즈음은 주로 생물학적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개역개정판과 바른성경의 ‘전통’이란 번역은 분명하고 요즈음 시대에 잘 이해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된다.

 

7. 마태복음 23:25

 

[개역한글] “...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개역개정] “...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바른성경] “... 그 속은 착취와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탐욕’ 또는 ‘착취’로 번역된 원어는 ‘하르파게’(aJrpaghv)로서 ‘강제로 빼앗음, 강탈’의의미이다. 그런 점에서는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의 ‘탐욕’보다는 바른성경의 ‘착취’가 원어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한 번역은 ‘강탈’이라고 할 수 있겠다.

 

8. 마태복음 26:41

 

[개역한글] “...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개역개정] “...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바른성경] “...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여기서 ‘마음’에 해당되는 원어는 ‘프뉴마’(pneu'ma)로서 ‘영’이란 뜻이다. 이 점에서 바른성경의 번역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신’과 대비되는 것을 말할 때 우리말로는 보통 ‘마음’이라고 하기 때문에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9. 고린도전서 12:3

 

[개역한글]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

[개역개정]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

[바른성경]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아무도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

 

바른성경은 인용이나 구호에 해당하는 말을 친절하게 따옴표 처리하여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좋은 시도이다. 이 구절의 “아나테마 예수스”(VAna,qema VIhsou/j) 문구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신자에게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예수를’ 저주하는 것인지, ‘예수께서’ 저주를 내리시기 바라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바른성경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이다.”로 옮기고, 각주에서 또는 “예수님은 저주를 받아라.”로 할 수도 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것은 동일한 카테고리에 속한다. 곧 예수를 저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인 신자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곧 예수가 저주의 주체가 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각주를 붙이려면 차라리 “예수가 저주를!”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10. 고린도전서 12:31

 

[개역한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개역개정]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바른성경] “너희는 더욱 큰 은사들을 사모하여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

 

바른성경은 은사들과 관련하여 흔히 오해가 일어나는 이 구절을 ‘더욱 큰 은사들을’(ta.cari,smata ta. mei,zona)이라고 복수 형태를 살려서 잘 번역하였다. 또한 “이제 내가 ...” 부분의 문장을 끊어서 읽은 점에서 진보를 보이고 있다.

 

11. 고린도후서 4:4

 

[개역한글]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개역개정]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바른성경] “그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서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 ‘혼미하게 하여’로 번역한 원어는 ‘에튀플로센’(ejtuvflwsen)으로 ‘어둡게 하였다’(blinded)는 뜻이다. 이 점에서는 바른성경이 바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는 그 이하 부분을 “... 비취지/비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여 ‘... 광채가’를 주어로, ‘아우가조’(aujgavzw) 동사를 자동사로 번역하였으나, 바른성경에서처럼 광채를 보지 못하게 “... ”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바른성경은 “... 보지 못하게 하였다.”로 결과적으로 번역하였으나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처럼 “... 못하게 함이니”로 목적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어의 구조에 더 맞다.

 

12. 갈라디아서 1:14

 

[개역한글]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개역개정]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른성경] “나는 내 동족 가운데서 많은 동년배보다 유대교에서 뛰어났고, 내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훨씬 더 열심 있는 자였으나,”

 

이 구절에서는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이 중대한 오역을 하고 있다. 곧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란 번역은 마치 바울이 광신도(狂信徒)였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원문이 말하는 것은 바울은 “유대교에 있어서 뛰어났다”(proevkopton ejn tw'/ !Ioudai>smw'/)는 것이다. 이는 곧 바울은 유대교에 있어서 탁월했다, 우수학생이었다, 모범생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은 마치 바울이 지나치게 믿어서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잘못 번역하고 있다. 바른성경은 이것을 바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연갑자’(年甲者)란 말보다도 ‘동년배’란 말이 현대 국어에 더 맞다.

 

13. 디모데후서 1:12 (1:14 참조)

 

[개역한글] “...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4절 “...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개역개정] “...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4절 “...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바른성경] “... 내게 맡겨진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능히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14절 “... 너에게 맡겨진 선한 것을 지켜라.”

 

딤후 1:12의 ‘텐 파라테켄 무’(th.n paraqh,khn mou)는 ‘내가 하나님께 의탁한 것’을 말하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의탁한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의탁한 것’을 말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14절에서 ‘텐 칼렌 파라테켄’(th.n kalh.n paraqh,khn)은 디모데에게 의탁된 것이 확실하다. 바른성경은 12절을 14절과 연관시켜 “내게 맡겨진 것”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잘한 것 같다.

 

14절의 경우, 수식어(아름다운/선한)의 위치 때문에 강조점이 ‘맡겨진 것’(파라테케)보다는 ‘아름다운 것’ 또는 ‘선한 것’으로 잘못 옮겨진다는 인상을 받는다. 차라리 ‘맡겨진 것’을 살려서 “너에게 맡겨진 것 곧 그 선한 것을 지켜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목회서신의 핵심 단어 가운데 하나인 ‘파라테케’가 딤전 6:20에도 나타나는데, “너에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바른성경)에서 ‘부탁한 것’ 대신 ‘맡겨진 것’으로(아니면 그 역으로) 통일을 기했으면 좋겠다.

 

14. 계시록 6:9

 

[개역한글] “...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개역개정] “...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바른성경] “...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행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이들의 영혼을 보았는데,”

 

여기서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란 번역은 맞지 않다. 우선 원문에는 ‘타스 프쉬카스 톤 에스파그메논’(ta;" yuca;" tw'n ejsfagmevnwn)이라고 하여 문법적으로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해야 맞다. 뿐만 아니라 육체는 죽임 당해도 영혼은 죽임 당하지 않는다. 육체가 죽임 당한 후에도 남는 실체가 영혼이다(마 10:28, 계 20:4). 따라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란 표현은 맞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른성경은 ‘죽임을 당한 이들의 영혼’으로 바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영혼들’로 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바른성경의 ‘증언’이란 번역은 헬라어 ‘마르튀리아’(marturiva)의 번역으로서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증거’보다 더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마르튀리아’는 꼭 말로써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써도 증거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른성경의 ‘그들이 행한 증언’보다도 개역개정판의 ‘그들이 가진 증거’가 원문을 좀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II. 잘못되거나 본문을 훼손한 것들

 

A. 구약에서

 

1. 창세기 4:8

 

[개역한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개역개정]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바른성경]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들로 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대적하여 일어나 그를 쳐 죽였다.”

 

바른성경의 “우리가 들로 가자”는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에는 없는 것인데 첨가되었다. 물론 다수의 히브리어 사본들이 여기에 빈칸을 가지고 있고 사마리아 오경과 70인역이 이 부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쿰란 사본(4Q Gen)과 탈굼이 맛소라 본문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cf. E. Ulrich, The Biblical Qumran Scrolls: Transcriptions and Textual Variants, 2010, p.7), 여기서 다른 번역을 시도할 때에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바른성경이 머리말에서 구약성경의 대본으로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마소라 본문을 사용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날 , 때에는 합당한 이유를 밝혔어야 했을 것이다.

 

2. 창세기 35:10

 

[개역한글]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개역개정]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

[바른성경]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이름은 야곱이다 그러나 네 이름을 더 이상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

 

원문에는 주어 ‘하나님’(엘로힘)이 있다. 그런데 개역한글판과 바른성경은 ‘하나님’을 생략하였다.

 

3. 창세기 35:29

 

[개역한글]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

[개역개정]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바른성경] “이삭이 늙어 장수하다가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에게 합류하니 ...”

 

바른성경의 “자기 백성에게 합류하니”가 직역이다. 그러나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이 “나이가 많고 늙어”와 바른성경의 “늙어 장수하다가”가 원문에는 첫 문장에 위치해 있지 않고 셋째 문장 뒤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이를 고려하여 번역한다면 적절한 번역은 “이삭이 숨을 거두고 죽으니 그가 늙고 장수하다가 그의 백성에게 합류하니라.”가 된다.

 

4. 창세기 39:20

 

[개역한글]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

[개역개정]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

[바른성경] “요셉을 붙잡아 감옥에 넣었는데 ...”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직역이며, 바른성경은 ‘요셉의 주인이’를 생략하였다.

 

5. 창세기 41:12

 

[개역한글] “...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개역개정] “...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바른성경] “... 그가 그 꿈대로 각자에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바른성경은 “우리의 꿈을 풀되” 부분을 번역하지 않고 빠뜨렸다.

 

6. 창세기 43:30

 

[개역한글]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

[개역개정]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

[바른성경] “그때 요셉이 동생 때문에 마음이 북받쳐 ...”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직역이며, 바른성경은 ‘라하밈’(~ymix]r;, loving feeling)을 생략하였다.

 

7. 창세기 48:5

 

[개역한글]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개역개정]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바른성경] “내가 이집트에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이집트 땅에서 네게 태어난 너의 두 아들은 내 것이니,”

 

바른성경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를 삭제하였다. 70인역과 탈굼도 이 부분을 가지고 있고, 본문 비평상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볼 때 바른성경의 심각한 오류이다.

 

8. 시편 14편과 53편, 108편

 

시편 14편과 53편은 거의 같은 시편이며, 108편은 57편과 60편 일부를 합친 것인데도 불구하고, 히브리어로 동일한 시편 구절을 다르게 번역할 뿐만 아니라 행적인 배열도 다르게 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검토를 거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개역개정판도 마찬가지다.

 

[바른성경] 시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들을 살피시며,

명철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보시니”

시 53:2 “하나님께서 지각 있는 사람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보려고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니”

 

9. 이사야 11:9

 

[개역한글]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개역개정]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바른성경]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치거나 파괴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데아 엣-야웨’(hw:hy]Ata, h[;De)는 목적격 ‘엣’(ta,)가 있기 때문에 개역개정판처럼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여호와의 지식’이라고 하면 ‘여호와가 아는 지식’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0. 이사야 49:3

 

[개역한글]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개역개정]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바른성경]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내가 너를 통해 영광을 받을 것이다.” 하셨다.”

 

바른성경에는 ‘이스라엘’을 호격으로 번역하였고, ‘너’와 ‘이스라엘’을 동격으로 보았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이스라엘’은 호격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며 또 ‘이스라엘’이 주어가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보어로 사용되었으며, 개역개정판처럼 관계대명사가 이끄는 절을 받는 선행사이다. 따라서 개역개정판처럼 번역하여야 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바른성경처럼 번역하면 이스라엘이 바로 여호와의 종이 된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 중의 한 사람이요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되는 단수의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개역개정판처럼 번역해야 한다.

 

B. 신약에서

 

1. 마태복음 2:3

 

[개역한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개역개정]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바른성경]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온 예루살렘도 그와 함께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기서 동사 ‘에타랔테’(ejtaravcqh)는 ‘소동하였다, 혼란하였다, 놀랐다’(was stirred up, disturbed, frightened)는 뜻이다. 따라서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소동한지라’는 바른 번역이다. 그런데 바른성경의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당황하다’와 ‘소동하다, 소란하다’는 것은 조금 다른 개념이다. 다만 원문에는 ‘온 예루살렘’ 다음에 ‘그와 함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을 살려서 번역하면 “헤롯 왕이 듣고 소동하였으며, 그와 함께 온 예루살렘이 그리하였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2. 마태복음 26:69

 

[개역한글] “...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개역개정] “...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바른성경] “... 한 여종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기를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하니,”

 

여기서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한 말을 바른성경은 왜 의문문으로 번역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NA판과 UBS판 모두 다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어서 서술문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KJV, NKJV, RSV, NRSV, NIV, Luth 등 모든 번역이 다 서술문으로 가지고 있는데 바른성경만 엉뚱하게 의문문으로 번역하였다. 내용상으로도 서술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

 

3. 로마서 3:25

 

[개역한글] “이 예수를 하나님의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

[개역개정]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바른성경]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속죄 제물로 세우셨으니 ...”

 

원문의 ‘엔 토 아우투 하이마티’(ejn tw'/ aujtou' ai[mati)는 ‘그의 피로써’(with his blood)로 번역함이 옳다. 여기서 전치사 ‘엔’(ejn)은 수단적(instrumental) 의미이다(Zerwick, Biblical Greek, §119). 그런데 바른성경은 이것을 ‘믿음’에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잘못 연결시킨 것이다. ‘그의 피로써’는 부사구로서 ‘세웠다’에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화목제물’ 또는 ‘속죄제물’로 번역된 원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속죄소’(히 9:5) 또는 더 정확하게는 ‘속죄단’으로 번역해야 옳다. ‘속죄제물’ 또는 ‘화목제물’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힐라스모스’로 따로 있다(요일 2:2). ‘힐라스테리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캎포레트’(kapporeth)인데, 그 어원적 의미는 ‘덮개’(a covering)란 뜻이며 언약궤의 윗부분에 덮는 단(壇)을 가리킨다(레 16:13,14).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수송아지와 수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바로 이 속죄단 위와 앞에 그 피를 뿌려 자기와 백성의 죄를 속죄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예수님이 바로 이 ‘속죄단’이 되셔서 율법(언약궤 안에 십계명 돌비가 들어 있음)의 정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도록 가리어 주셨다는 것이다.

 

4. 로마서 3:27

 

개역한글 그런즉 [ ] “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개역개정]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바른성경]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다. 어떤 율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이다.”

 

헬라어 ‘노모스’(novmo")는 ‘법, 율법, 원리, 세력’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 이 구절에서는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행위들의 [노모스]’냐? ‘믿음의 노모스’냐?고 묻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 ‘노모스’는 ‘원리, 이치’를 말함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믿음의 율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앞 구절들(21-2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 이치를 설명한 후에 이것이 무슨 ‘원리’로 말미암은 것이냐? ‘행위(들)의 원리’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원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도 이 구절 주석에서 여기서 ‘노모스’가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노모스’ 앞에 관사가 사용되지 않은 것도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충적으로 증거해 준다.

 

그런데도 바른성경은 “어떤 율법으로냐?”고 번역함으로써 전혀 말이 통하지 않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 뒤에 나오는 ‘믿음의 노모스’는 ‘믿음의 법’으로 바로 번역함으로써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을 바로 번역하면 “무슨 법으로냐? 행위들의 법으로냐?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니라.”로 할 수 있다. 세 번역 다 “행위로냐”로 번역하고 있는데, 원문의 구조상 ‘톤 에르곤’(tw'n e[rgwn) 앞에 ‘디아 노무’(dia; novmou)가 생략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이 생략된 부분을 넣어서 “행위(들)의 법으로냐?”로 해줘야 옳다.

 

5. 로마서 3:29

 

[개역한글]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개역개정]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바른성경]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정으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여기서 바른성경은 원문의 ‘모논’(movnon, 뿐)을 이유 없이 빠뜨렸다. 그래서 말이 되지 않는다. 바르게 번역하면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가 될 것이다.

 

6. 갈라디아서 1:22

 

[개역한글]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개역개정]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바른성경]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에게 내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원문에는 이 구절 앞부분에 접속사 ‘데’(dev)가 있다. ‘데’는 전환 또는 (약한)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앞 문장의 내용과 반대되거나 달라지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말로는 ‘그런데’ 또는 ‘그러나’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번역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른성경의 ‘그러므로’란 번역은 잘못이다. 앞절과 본절 사이의 관계는 순접이나 결론 관계가 아니라 전환 또는 역접이다. 따라서 ‘그런데’ 또는 ‘그러나’로 번역해야 옳다.

 

7. 갈라디아서 2:19

 

[개역한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

[개역개정]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

[바른성경]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으니 ...”

 

여기서 ‘죽었나니’에 해당되는 원어는 ‘아페타논’(ajpevqanon)으로 ‘아포트네스코’(ajpoqnhv/skw)의 아오리스트(aorist)로서 ‘죽었다’의 의미이다.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 바로 되어 있는 것을 왜 바른성경이 왜 ‘현재형’으로 잘못 번역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자기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곧 전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죽었다’는 것이다(cf. 롬 6:2,6).

 

8. 에베소서 2:3

 

[개역한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개역개정]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른성경] “그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 속하여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하여 우리 육체의 정욕 가운데서 살았고, 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여기서 ‘욕심’ 또는 ‘정욕’으로 번역된 원어는 ‘에피튀미아이’(ejpiqumivai)로서 ‘에피튀미아’의 복수이다. 이 단어는 어떤 것을 향한 ‘욕구’(desire), ‘갈망’(longing)을 뜻한다(Bauer). 신약의 용례를 보면 대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원하는 모든 욕구를 나타낼 때 많이 사용되고 있다. (롬 1:24, 7:7f., 약 1:14f., 벧후 1:4, 골 3:5 등). 물론 ‘에피튀미아’가 선한 의미로 사용될 때도 간혹 있다(빌 1:23, 눅 22:15, 살전 2:17). 이 경우엔 ‘소원’으로 번역할 수 있다. 대체로 ‘욕구’ 또는 ‘욕심’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의 ‘정욕’(情慾)은 ‘이성의 육체에 대하여 느끼는 성적 욕망’(표준국어대사전)으로서 성적인 방면의 욕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에피튀미아’는 그런 성적 욕구를 포함해서 인간의 마음이 원하는 모든 욕구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바른성경의 ‘정욕’은 합당치 않은 번역이다. ‘정욕’으로 번역하기에 합당한 헬라어 단어로는 ‘파토스’(pavqo")가 있다. ‘파토스’는 ‘고난 의 의미뿐만 ’(suffering) 아니라 ‘격정’(pass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cf. Bauer). 첫 번째 의미는 신약에 나타나지 않으며 두 번째 의미만 나타나는데, 주로 성적인 죄를 의미하는 ‘정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롬 1:26, 살전 4:5). 그런데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 그리고 바른성경 다 롬 1:26에서 ‘파토스’를 ‘욕심’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그냥 ‘욕심’으로 번역해야 할 ‘에피튀미아’는 롬 1:24에서 세 번역 다 ‘정욕’으로 뒤바꾸어서 번역하고 있다(롬 1:24).

 

9. 빌립보서 1:18

 

[개역한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개역개정]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른성경] “그러면 무엇이냐? 가식으로 하든 참으로 하든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있으니, 내가 이것 때문에 기뻐한다. ○또 기뻐할 것이니,”

 

마지막 문장을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는 한 문장으로 번역했는데, 바른성경에서는 두 문장으로 나눌 뿐만 아니라 아예 문단을 나누어서 “또 기뻐할 것이니”로 새 문단을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NA 26판, 27판을 따른 것으로서(UBS 3판에서는 ejn touvtw/ caivrw 다음에 세미콜론에 해당하는 구두점을, UBS 4판에서는 마침표를 찍었다), 이것은 사본들에 원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원어 성경 편집자들이 그렇게 구두점을 찍고 문장을 나눈것이다.

 

이렇게 두 문장으로 나눈 주된 이유는 현대 주석가들의 견해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 있는 ‘알라 카이’(ajlla; kaiv)는 강한 대비를 나타낸다고 본다. 그러면서 앞 문장은 현재의 기쁨을 나타내고, 뒷 문장은 미래의 기쁨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헬라어에 대한 오해이다. 여기서 ‘알라 카이’는 대비가 아니라 강한 긍정을 나타낸다. 이것은 저명한 헬라어 문법학자들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이다(cf. Blass-Debrunner-Rehkopf, Griechische Grammatik, 16. Aufl., §448.6; Moulton-Turner,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III, 330). 신약 성경에서 ‘알라 카이’가 이런 의미로 사용된 곳으로는 눅 12:7, 16:21, 24:22, 고후 7:11, 11:1이 있다.

 

따라서 본절의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caivrw ajlla; kai; carhvsomai)는 것은 관용적 표현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기뻐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낸다(cf. 고후 11:9,12). 그런데도 이 관용적 표현을 두 문장으로 나누고, 심지어 두 문단으로 나눈 것은 헬라어 문법을 무시하고 현대 신학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라간 결과이다.

 

III.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것들

 

A. 구약에서

 

1. 이사야 52:14

 

[개역한글]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개역개정]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바른성경] “그의 모양은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용모는 사람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랐으나,”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이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와 같이 그의 용모는 망가져 사람이라 할 수 없었고 ...” 개역개정판과 바른성경의 마지막 분절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첫 번째 분절로 되어 있다. 또 이 분절의 목적격 인칭접미요소는 ‘너’(*yl,[,)이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너’와 ‘그’가 비교되고 있는데, 개역개정판과 바른성경은 둘 다 이 비교를 놓치고 있다.

 

2. 이사야 52:15

 

[개역한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

[개역개정]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

[바른성경] “이제 그가 많은 민족을 놀라게 할 것이니, 왕들이 그로 말미암아 놀라 입을 다물고, ...”

 

개역개정판과 바른성경에 ‘놀라게’로 번역된 히브리어 ‘얏제’(hZ<y", 원형은 hz:n:)는 ‘그가 뿌리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하여 그가 열방에 뿌릴 것이며 ...”로 번역해야 옳다.

 

3. 이사야 53:1

 

[개역한글]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

[개역개정]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

[바른성경]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

 

여기에 ‘전한 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무아’(h[;Wmv]; [m'v;의 수동태형 명사)는 ‘들은 것’이란 의미이다.

 

4. 이사야 53:8

 

[개역한글]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개역개정]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바른성경] “그가 잡혀가 감금당하고 재판받았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죄악 때문이다’ 하였겠느냐?”

 

세 번역 다 “그 세대 중에”를 내용상 주어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목적격 접두요소를 가지고 있다(/r/DAta,). 따라서 “누가 그의 후손을 생각했으리요? 왜냐하면 그는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기 때문이다.”로 번역해야 한다.

 

5. 이사야 53:12

 

[개역한글]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바른성경] “...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들로 취급되었으나 실상은 그가 많은 자들의 죄를 지고, 범죄자를 위해 중보하였다.”

 

이 절의 맨 마지막 분절을 모두 다 과거형(완료형)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위의 세 분절은 완료형이지만 맨 마지막 분절은 미완료형이다. 따라서 마지막 분절은 “그는 범죄자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로 번역해야 한다. 위의 세 분절들의 내용은 여호와의 종의 한 번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마지막 분절의 내용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B. 신약에서

 

1. 마태복음 16:22

 

[개역한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

[개역개정]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

[바른성경]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의하며 말하기를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

 

여기서 ‘간(諫)하다’, ‘항변하다’ 또는 ‘항의하다’로 번역된 원어는 ‘에피티마오’(ejpitimavw) 동사이다. 이것은 ‘꾸짖다, 책망하다’(rebuke, reprove)는 뜻이다(Bauer).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가 격분하여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한 것이다. 그런데 개역한글 판에서는, 아마도 어찌 제자가 스승을 꾸짖을 수 있는 가 생각하여서 그랬는지, 아주 부드럽게 ‘간하다’로 번역하였고, 개역개정판과 바른성경에서도 부드럽게 ‘항변하다’ 또는 ‘항의하다’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번역해야지 자기의 생각으로 부드럽게 바꾸면 안 된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꾸짖었다, 책망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바른성경도 원문의 뜻을 바로 드러내지 못하였다.

 

2. 마태복음 21:5

 

[개역한글]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개역개정]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바른성경]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께서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이다.”


본 구절은 나귀를 타신 에수님에 대해 모두 다 ‘겸손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원어 ‘프라위스’(prauv>")는 ‘겸손하다’보다는 ‘온유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겸손하다, 겸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타페이노스’(tapeinov")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바른성경)라고 말하는데, 앞의 ‘온유하다’에 해당되는 원어는 ‘프라위스’이고 뒤의 ‘겸손하다’에 해당되는 말은 ‘타페이노스’이다. 마태복음 11:29에서는 세 번역 모두 다 ‘프라위스’를 ‘온유하다’로 번역하였는데, 마태복음 21:5에서는 똑같이 다 ‘겸손하다’로 번역한 것은 너무나 이상하다.

 

그리고 본 구절은 스가랴 9:9의 인용인데 거기서 세 번역 다 똑같이 ‘겸손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원어는 ‘아니-’로서 ‘겸손하다’의 의미라기보다는 ‘고난받는, 비참한, 가난한’(afflicted,wretched, poor), 그리고 ‘온유한, 부드러운’(meek, mild)의 뜻이다(Gesenius).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신 것은 세상의 군왕들처럼 인간적 권세와 강포함으로 다스리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온유함으로 다스리는 영적 메시야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권세를 가지고 임의로 주관하는 강포한 메시야에 대비되는 영적 메시야의 개념에 가장 합당한 것은 ‘온유함’인 것이다.


3. 마태복음 25:34

 

[개역한글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개역개정]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바른성경]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아, 나와서 세상의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상속하여라.”

 

여기서 세 성경에 모두 ‘복 받을 자들’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호이 율로게메노이’(oiJ eujloghmevnoi)로서 완료 시상이다. 곧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복 받은 자들이며(엡 1:4), 그 결과 복 받은 자들로서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서 있다. 따라서 미래형으로 ‘복 받을 자들’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한편, 같은 장 41절에서는 같은 완료 분사 ‘호이 카테라메노이’(oiJ kathramevnoi)를 세 성경 모두 다 ‘저주를 받은 자들’로 바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세 성경 모두 동일한 완료 시상에 대해 한 곳에서는 ‘미래형’으로, 다른 곳에서는 ‘과거형’으로 번역함으로써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4. 누가복음 11:7

 

[개역한글]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개역개정]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바른성경] “그가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이 이미 닫혔고 내 아이들과 내가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자네에게 줄 수 없네.’라고 말하겠느냐?”

 

위 세 번역은 모두 다 의문문으로 끝난다. 그래서 “줄 수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원문에 의하면 그런 의미가 아니다. 원문에서는 ‘레고’(levgw)의 가정법 ‘에이페-’(ei[ph/)가 사용되어 있다. 이것은 추측, 가능성을 나타내는 가정법이다. 즉,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KJV는 “... shall answer and say”(평서문)로, NIV는 “... answers”(평서문)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RSV와 ESV는 “... will answer ...?”(의문문)로 번역하여 우리말 번역과 같다.

 

그러나 위 본문은 평서문으로 이해함이 옳다. 곧 “그가 안에서 대답하기를 ... 줄 수가 없노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는 것과 내용이 통하는 것이다. 비록 친구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밤중에 찾아와서 성가시게 하면 주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문을 두들기고 괴롭게 하면(염치 불구하고 성가시게 하면) 귀찮아서 일어나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가 이렇게 무례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끈질기게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구하는 것(‘강청함’ 또는 ‘간청함’에 해당되는 원어는 직역하면 ‘부끄러움을 모름 몰염치 이다 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 ‘ ’ ) 것이다. 따라서 위 우리말 번역은 세 개 다 잘못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동번역이 평서문으로 바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 줄 수가 없네라고 거절할 것이다.”라고 너무 강하게 번역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가정법’ 동사로서 “...라고 말할 것이다”, “... 말할 수도 있다”, “... 말할지도 모른다” 또는 “... 말하리라”정도의 가능성 내지는 추측을 나타낸다.

 

5. 로마서 5:8

 

[개역한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개역개정]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른성경]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세 번역 다 약간의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똑같다. 특히 마지막 동사를 ‘확증하셨느니라’ 또는 ‘나타내셨다’로 ‘과거 시제’로 번역한 점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원어는 ‘쉬니스테신’(sunivsthsin)으로서 현재로 되어 있다. 그 뜻은 ‘증거하신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지금도, 날마다 ‘증거하고 계신다’. 헬라어의 현재 시상은 지속적, 반복적 동작을 나타낸다. 따라서 과거에 한번만 증거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증거하고 계신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으셨다’(ajpevqanen)는 것은 헬라어로 아오리스트(aorist)가 사용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에 단번에 죽으신 사건을 가리킨다. 곧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십자가상의 단번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날마다, 계속해서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변의 환경이나 우리의 컨디션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잘 풀리고 안 풀리고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확고부동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며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변함없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날마다 확신하면서 우리에게 닥치는 역경과 환란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나라 성경 번역들은 모두 다 이 사실을 놓쳐 버렸다. 그러나 영어 번역들과 다른 외국어 번역들은 거의 다 ‘현재형’으로 바로 번역하고 있다(중국어 성경은 ‘완료’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6. 로마서 14:12

 

[개역한글]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개역개정]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바른성경]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의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릴 것이다.”

 

위 세 번역은 다 문제가 있다. 마지막 단어 ‘직고하리라’ 또는 ‘사실대로 말씀드릴 것이다’는 헬라어 표현 ‘로곤 도세이’(lovgon dwvsei)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여기서 ‘로곤(로고스)’는 ‘말’이 아니라 일 계산 의 뜻이며 ‘ , ’ , ‘로곤 디도미’는 숙어로서 ‘계산하다, 회계하다’(give account)는 뜻이다. 그런데 위 세 번역은 이런 기본적인 헬라어 숙어를 무시하고 ‘말을 하다’는 의미로 오해하였다. 영어 번역들(KJV, RSV, NIV, ESV 등)에는 모두 바로 되어 있다.

 

7. 고린도전서 15:15

 

[개역한글] “...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

[개역개정] “...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

[바른성경] “...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

 

세 번역 모두가 “우리가 증언하였다”까지만 취하고 원문(evmarturh,samen kata. tou/ qeou/o[ti)에 나타나는 ‘카타 투 테우’(kata. tou/ qeou/) 부분을 공통적으로 생략하고 있다. 표준새번역의 경우만 이를 “하나님에 대하여”로 옮기고 있다. 어떻게 번역하든 간에 이 중요한 문구를 누락시키는 일은 바로 잡아야 한다.

 

8. 고린도전서 15:22

 

[개역한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개역개정]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바른성경] “아담 안에서 모든 이가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살게 될 것이다.”

 

세 번역 다 “죽은 것 같이”라고 과거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현재형 (ajpoqnh/vskousin)으로 되어 있다. 현재 시상으로 된 것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원리, 진리를 나타낸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할 때 내용상으로는 과거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번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여기서는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된다”는 원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원문의 의도이다. 영어 번역들에는 이것을 살려서 바로 번역하고 있다.

 

9. 갈라디아서 3:8

 

[개역한글] “...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개역개정] “...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바른성경] “...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너를 인하여’ 또는 ‘너로 말미암아’로 번역된 말은 원어로 ‘엔 소이’(ejn soiv)로서 직역하면 ‘네 안에서’가 된다. 물론 헬라어 전치사 ‘엔’(ejn)은 인과적으로 사용될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안에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방인이 복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다 또는 하나님 ‘ ’ . ‘ ’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복의시작’이지 ‘복의 근원’은 아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창 12:2의 ‘복의 근원’은 ‘복의 시작’으로 번역해야 옳다). 여기서 ‘엔’(ejn)을 ‘안에서’로 이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구절에서 ‘복을 받으리라’의 헬라어 동사(ejneuloghqhvsontai)의 앞에 전치사 ‘엔’(ejn)이 덧붙어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창 12:3에 처음으로 말해졌고, 창 18:18에도 다시 “천하 만민은 그 안에서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고 반복되었다(개역한글판은 여기서도 ‘그를 인하여’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창 22:18에서는 “네 씨 안에서(브자르아카)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로 말해졌다(여기서도 개역한글판은 ‘네 씨로 말미암아’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 안에서’는 곧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임을 알수 있다. 이것을 베드로는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 안에서(엔 토 스페르마티 수) 복을 받으리라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행 3:25). 따라서 천하만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얻을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브라함에게 전하신 것이다. 이 세상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복을 얻는 것이다(갈 3:14, 고후 5:17). 그런데 이런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 위 한글 번역들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영어 번역들(KJV, RSV, ESV 등)과 독일어 번역(루터역), 화란어 번역(SV, NBG)에는 “in”으로 번역되어 있다.

 

10. 갈라디아서 3:24

 

[개역한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개역개정]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바른성경] “그리하여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가정교사가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

 

여기서 ‘몽학선생’으로 번역된 원어 ‘파이다고고스’(paidagwgov")는 원래 ‘어린아이’를 ‘인도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대개 종으로서 어린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을 했으며 아이의 행동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선생’이 아니었으며 대개 ‘종’이었다(cf.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s.v.).

 

그런데 위 우리말 번역은 세 곳 다 ‘선생’ 또는 ‘교사’로 번역함으로 문제가 있다. 우선 개역한글판의 ‘몽학선생’(蒙學先生)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쓰지 않는 말이다. ‘몽학’은 어린아이의 공부를 뜻하는데 아마도 어린아이의 공부를 지도하는 선생이라는 의미로 ‘몽학선생’을 쓴 것 같다. 개역개정판의 ‘초등교사’도 원어의 뜻과 맞지 않으며, 바른성경의 ‘가정교사’도 맞지 않다. 원어를 직역하면 ‘어린아이 인도자’인데 우리말로는 마땅히 번역하기 어렵다. 적합한 우리말을 찾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11. 디도서 1:16

 

[개역한글]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개역개정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 ] “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바른성경]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니, 역겨운 자들이고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며 모든 선한 일을 배척하는 자들이다.”

 

세 번역 모두가 ‘저희’(거짓 교사들)가 선한 일을 포기하는 자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원문(pro.j pa/n e;rgon avgaqo.n avdo,kimoi)은 그들 자신이 모든 선한 일에 관한 한 ‘실패자들’(같은 단어가 바른성경 딤후 3:8에는 ‘낙오된 자들’로 되어 있다)임을 나타낸다. 일관성을 지켜서 “모든 선한 일에 관하여 낙오자들이다”라고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12. 히브리서 2:10 (또한 12:2 참조)

 

[개역한글] “... 저희 구원의 주를 ...” [12:2 ‘믿음의 주’]

[개역개정] “...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 [12:2 ‘믿음의 주’]

[바른성경] “... 그들의 구원의 주님을 ...” [12:2 ‘믿음의 창시자’]

 

히브리서의 중요한 기독론적 용어 가운데 하나인 ‘아르케고스’(avrchgo,j)를 일관되지 못하게 번역한 경우이다. 개역개정판은 2:10에서는 ‘창시자’로 좋게 번역했으면서 12:2에는 ‘주’로 그대로 두었고, 반면 바른성경은 12:2에는 ‘창시자’로 번역했으면서도 2:10에는 ‘주님’으로 그대로 두었다. 물론 ‘아르케고스’(avrchgo,j)를 통일된 한 단어로 번역하는 것은 어렵지만, 최소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며 또한 일반적인 용어인 ‘주’와 구분하는 것도 필요하다. 바른성경이 2:10의 경우에도 “그들의 구원의 용사” 등으로 번역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13. 야고보서 2:18

 

[개역한글]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개역개정]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바른성경] “어떤 이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러면 나도 나의 행함으로 믿음을 네게 보이겠다.”라고 할 것이다.”

 

이 구절은 끊어 읽기 및 구두점 사용과 관련하여 악명 높은 구절이다. 바른성경이 어떤 반대자의 말을 따옴표 처리하여 야고보 자신의 말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좋은 시도이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이하 부분은 야고보의 말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반대자의 말을 이 부분까지 다 포함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이처럼 논란이 많은 구절에 바른성경은 친절하게 따옴표나 구두점을 붙여 놓았으니,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 버리고 말았다. 기존의 번역에 구두점 처리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르게 끊어 읽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참고로 NIV 경우 “But someone will say, "You have faith; I have deeds." Show me your faith without deeds, and I will show you my faith라고 번역하고 있다. 구두점 by what I do.” 사용과 관련하여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14. 야고보서 3:18

 

[개역한글]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개역개정]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바른성경] “의의 열매는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씨를 뿌려 거두는 것이다.”

 

바른성경은 원문(karpo.j de. dikaiosu,nhj evn eivrh,nh| spei,retai toi/j poiou/sin eivrh,nhn)을 잘 살려 번역하였다. 문자적으로 “의의 열매는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의해 평화 가운데서 계속 씨 뿌려진다.”는 뜻의 원문의 수동태를 능동태로 전환하여 좀 더 깔끔하게 다듬었다. 하지만 “거두는 것이다”에 집착하다 보니 거둔다는 결과보다 계속 씨 뿌려지는(또는 씨뿌리는) 과정에 대한 강조가 상대적으로 약화되도록 만든 것이 아쉽다.

 

15. 계시록 11:17

 

[개역한글] “...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시도다”

[개역개정] “...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바른성경] “...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분, 곧 전능하신 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가지시고 다스리십니다.”

 

여기서 ‘왕노릇하시도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에바실류사스’(ejbasivleusa")로 아오리스트로 되어 있다. 따라서 ‘왕노릇하셨도다’로 번역해야 옳다. 이것은 세상 역사가 끝난 뒤에 지나간 세상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찬양이다. 곧 지나간 세상 역사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잡으셨으며’(완료) ‘왕노릇하셨다’(아오리스트)는 것을 감사 찬송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말 번역 모두가 다 현재형으로 번역한 것은 헬라어의 시상을 무시한 오역이다. 혹자는 여기의 ‘아오리스트’를 ‘진입적 아오리스트’(ingressive aorist)로 이해하여 ‘다스리기 시작하셨다’(began to reign)로 번역하지만, 여기서 이 동사를 ‘진입적 아오리스트’로 볼 이유가 없다. 세상 역사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글로벌 아오리스트’(globalaorist)로 보는 것이 옳다. 계 20:4의 “천년 동안 왕노릇하였다”에서 ‘왕노릇하였다’(ejbasivleusan)는 동사는 ‘진입적 아오리스트’가 될 수 없고 ‘글로벌 아오리스트’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 11:17의 ‘에바실류사스’(ejbasivleusa")도 ‘글로벌 아오리스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앞의 “큰 권능을 잡으셨다”에서 ‘잡으셨다’(ei[lhfa")가 완료 시상으로 되어 있어서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권능을 잡으셨으며 그 결과가 현재에도 남아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왕노릇하셨다’는 것도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이미 왕노릇하신 것을 말하며 현재 왕노릇하시는 것을 가리킴이 아니다.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 전체 곧 교회시대에 하나님(과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계 17:14, 19:16) 왕노릇하심을 나타낸 것이다.

 

16. 계시록 19:6

 

[개역한글] “...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개역개정] “...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바른성경] “...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계 11:17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에바실류센’(ejbasivleusen)은 아오리스트인데 세 번역 모두 다 현재형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이 구절도 세상 역사가 끝나고 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할렐루야” 다음에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o{ti)가 있어서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곧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셨기 때문이다.” 곧 지나간 세상 역사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왕노릇(통치)하셨기 때문에 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되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역 모두 다 현재형으로 번역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마치 예수님의 재림 후에 소위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듯한 오해를 하기 쉽게 만들어 놓았다.

 

17. 계시록 19:12

 

[개역한글]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

[개역개정]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

[바른성경]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들이 있으며 ...”

 

여기 ‘면류관’으로 번역된 원어는 ‘디아데마타’(diadhvmata)로 복수로서 ‘왕관들’(crowns)을 의미한다.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스테파노스’(stevfano")가 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의 ‘관들’이란 번역은 이상하다. 그것이 ‘왕관’인지 ‘면류관’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 ‘관’이라 하면 제일 먼저 장례식 때 사용하는 ‘관’이 떠오를 것이다. 따라서 ‘관’이란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은 계 12:3에서 ‘디아데마타’를 ‘왕관’으로 바로 번역하였다. 바로 앞의 1절의 ‘스테파노스’는 ‘면류관’이 아니라 ‘관’으로 번역하고 있다. 계 2:10의 서머나 교회에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개역개정판은 ‘생명의 관’으로 번역하고 있다. 계 4:10의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에서 ‘면류관’(stefavnou")을 개역개정판은 ‘관’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개역개정판은 ‘면류관’이란 번역을 극도로 꺼리고 있으며 ‘관’이란 번역을 좋아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계 6:2의 ‘스테파노스’는 ‘면류관’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딤후 4:8의 ‘의의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으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개역개정판은 ‘스테파노스’ 번역과 관련하여서 일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스테파노스’와 구별되는 ‘디아데마’에 있어서도 어떤 때는 ‘왕관’으로, 어떤 때는 ‘관’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에 반해 바른성경은 바로 번역하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계 12:1에서는 ‘열두 별의 면류관’으로 바로 번역하였고, 3절에서는 ‘일곱 왕관’으로 바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19:12에서는 ‘왕관’으로 번역해야 할 것을 ‘면류관’으로 번역함으로써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10, 4:10, 6:2 등에서는 개역한글판과 마찬가지로 ‘면류관’으로 바로 번역하고 있다.

 

IV. 그 외 이상한 것들

 

1. 마태복음 5:41 (천 걸음, 이천 걸음)

 

[개역한글]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개역개정]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바른성경] “또 누가 네게 강제로 천 걸음을 가자고 하거든, 그와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여기서 ‘오리’와 ‘십리’로 번역된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1 밀리온’과 ‘2 [밀리온]’이 된다.‘밀리온’(mivlion)은 로마의 거리 단위이다(a Roman mile). 문자적 의미는 ‘1,000 걸음’인데 확정된 거리 단위로서 1,478.5 m이다. 따라서 ‘1 마일’은 약 1.5 km, ‘2 마일’은 약 3 km가 된다. 우리나라 옛 척도로는 약 ‘3.8 리’와 ‘7.6 리’가 되겠지만,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는 대략적이고 일상적인 표현으로 ‘오리’와 ‘십리’로 번역했다.

 

한편, 바른성경에서는 어원적 의미를 살려서 ‘천 걸음’과 ‘이천 걸음’으로 번역했는데 좀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1 밀리온’, ‘2 밀리온’이라고 말할 때 어원적 의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헬라어 ‘밀리온’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되어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정확한 거리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성가시게 무엇을 부탁하면 그것을 기꺼이 들어 주라는 것이다. ‘1 밀리온’을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는데 ‘2 밀리온’을 같이 가 준다는 것은 가기 싫은데 마지못해서 가주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가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확한 수치에 매이기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표현인 ‘오리’와 ‘십리’가 좋다고 생각된다.

 

2. 누가복음 19:4 (시카모어나무)

 

[개역한글]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

[개역개정]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

[바른성경]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앞쪽으로 미리 달려가서 시카모어나무 위에 올라갔으니 ...”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의 이름이 세 번역에 각기 다르다. 헬라어 원어는 ‘쉬코모레아’(sukomoreva)인데, 바우어 사전에 의하면 “fig-mulberry tree, sycamore fig”라고 되어 있다. 우리말로는 ‘무화과-뽕 나무, 시커모어 무화과’로 번역할 수 있겠다. 학명은 “ficus sycomorus”이며 이집트가 원산지이다. 후에 팔레스타인에 이식되었으며 넓게 퍼지는 많은 가지들을 가지고 있으며 키가 아주 크지는 않다(최고 16 미터). 그 열매의 모양은 무화과를 닮았으나 맛은 뽕나무의 오디와 비슷하다. 그래서 화란국역(SV)에서는 ‘야생(돌) 무화과나무’ 또는 ‘뽕나무’로 번역되기도 한다(cf. Bijbelse Encyclopedie, II, p.347).

 

KJV, RSV, ESV에서는 “a sycamore tree”로, NIV에서는 “a sycamore-fig tree”로 번역했다. 루터역에서는 “ein Maulbeerbaum”(뽕나무)으로 번역했으며, 화란국역과 NBG 역에서는 “een wilde vijgeboom”(야생 무화과나무)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무화과나무와 뽕나무의 중간쯤 되는 나무인데, 무화과나무에 좀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야생 무화과나무’ 또는 ‘돌무화과나무’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이 점에서는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제일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바른성경의 ‘시카모어나무’는 영어를 그대로 음역한 것으로서 전혀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시카모어’는 외래어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으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극소수의 학자들만을 위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정확성으로만 따진다면 ‘돌무화과나무’도 좋지만,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다. 이 나무의 생김새와 열매 맛이 뽕나무와 비슷하기 때문에 한국의 성도들과 독자들을 생각한다면 ‘뽕나무’로 번역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한국의 성도들이 오랫동안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바꿀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단, 각주에 설명을 달아주면 좋을 것이다.

 

3. ‘세례 요한’과 ‘세례자 요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을 바른성경은 ‘세례자 요한’으로 번역하고 있다(마 3:1, 11:11,12, 14:2,8, 16:14, 17:13 등). 물론 ‘세례 요한’에 대한 헬라어 표현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요안네스 호 밥티스테스’(!Iwavnnh" oJ baptisthv")이고(마 3:1, 11:11,12, 14:2,8,16:14, 마 17:13, 막 6:25, 8:28, 눅 7:20,33, 9:19), 다른 하나는 ‘요안네스 호 밥티존’(!Iwavnnh" oJ baptivzwn)이다(막 6:14,24). 첫 번째 것은 직역하면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으로, 두 번째 것은 ‘세례 주는 자 요한’(John who is baptizing)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바른성경의 ‘세례자 요한’이란 번역이 더 정확해 보인다. 문제는 우리가 ‘세례 요한’이란 표현에 너무나 익숙해 있으며 이제는 불신자들도 다 아는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란 표현은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성경에는 추상명사로서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 예를 들면 ‘할례당’이 대표적인 것이다. 롬 4:9에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란 말이 나온다. 원문에는 각각 ‘헤 페리토메’(hJ peritomhv)와 ‘헤 아크로뷔스티아’(hJ ajkrobustiva)가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다 추상명사로서 원래는 ‘할례’(the circum-cision)와 ‘무할례’(the uncircumcision)란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할례 받은 사람들’(the circumcised)과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the uncircumcised)을 가리킨다. 롬 4:12의 ‘할례의 조상’(patevra peritomh'")도 ‘할례자들의 조상’이란 뜻이다. 빌 3:3의 ‘헤 페리토메’(hJperitomhv)도 ‘할례당’이란 뜻이다. 이처럼 추상명사가 구체적인 사람들 대신에 사용된 용례들이 있다. 이런 것을 문법 용어로는 ‘구체적인 것을 대신한 추상명사’(abstractum pro concreto)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세례자 요한’을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경우에 ‘세례’는 추상명사로서 구체적인 사람 ‘세례 주는 자’를 대신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보다는 ‘세례 요한’이 간결하고 부르기 쉬우며, 또한 교회 안팎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미 굳어진 표현이라는 점에서 바른성경에서처럼 굳이 바꿀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V. 인칭 대명사/접미사, 지시 대명사 번역 문제

 

1. 2인칭 대명사 번역 문제

 

2인칭 대명사 사용 문제도 번역상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한국어에서는 아직 ‘당신’이란 말이 어색하고, 확정된 2인칭 대명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른성경에서는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에서 ‘당신’이 들어간 자리에 그 사람의 직책을 넣거나 ‘주’로 바꾸어 번역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창 40:13,14,19에서는 ‘당신’ 대신에 ‘시종장’이라고 번역하였다. 창 47:15, 48:1에서는 ‘당신’ 대신에 ‘총리님’이라고 번역하였고, 창 42:10에서는 ‘당신’ 대신에‘주’로 번역하였다.

 

이런 것들은 ‘당신’이란 말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인 것은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상하게 되어 버린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창 40:13에서 바른성경은 “앞으로 사흘 있으면, 바로가 시종장의 머리를 들어 당신의 직무를 회복시킬 것이니, 시종장께서는 예전에 하던 대로 ...”로 번역했는데, 여기서 ‘시종장’은 원문에서는 2인칭이다(개역한글판 및 개역개정판에서는 ‘당신’). 그런데 바른성경에서 이것을 ‘시종장’이라고 번역하니 자칫하면 대화의 당사자(2인칭)가 아니라 또 다른 제3자를 가리켜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른성경도 같은 절에서 ‘당신의 직무’라고 하여 ‘당신’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바른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으며 ‘당신’을 피하려다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의미 전달만 불분명하게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신약 부분에서도 2인칭 대명사 번역과 관련하여 고심한 흔적이 발견된다. 바른성경은 ‘당신’을 ‘선생님’으로 번역한 곳이 더러 있다(마 3:14, 12:47 등). 마 3:14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나온다. 이 부분을 바른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은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로 되어 있다. 바른성경은 여기의 2인칭 대명사(헬라어 suv)를 ‘선생님’으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당신’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기 때문에 그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마 12:2에서는 바른성경도 “당신의 제자들이 ...”라고 하여 예수님에 대해서도 ‘당신’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말에 있어서 2인칭 대명사는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너’라는 말이 있지만 예사말 또는 낮춤말로 인식되기 때문에 높은 사람에 대해서나 예의를 갖출 때는 쓸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3인칭으로 사용될 때는 높임말이 되나 2인칭으로 사용될 때에는 부부 사이에서는 높임말이 되나 대개는 낮춤말이 된다(표준국어대사전 참조).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특히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2인칭으로 ‘당신’을 사용하는 것을 몹시 귀에 거슬려 하는 경우가 있다. 바른성경은 이러한 현상을 고려하여 예수님에 대해 ‘당신’이란 말 대신에 ‘선생님’을 사용했는데, 이것도 이상하다. 요 1:38에 보면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고 한다(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그런데 마 3:14에는 ‘랍비’나 ‘선생’(디다스칼로스)에 해당하는 말이 없고 2인칭 ‘쉬’(suv)가 있을 따름이다. ‘선생(先生)’이란 말은 물론 대만에서는 영어의 Mr.에 해당하는 호칭으로 많이 쓰고, 일본에서는 목사에 대한 호칭으로 많이 쓴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2인칭으로서 ‘선생님’은 어색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와 혼동된다.

 

2. 3인칭 대명사 번역 문제

 

3인칭 대명사도 마찬가지로 성경 번역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이다. 아직 3인칭 대명사 ‘그’와 그녀 사용은 정착되어 있지 않으며 특히 ‘ ’ , 여성형인 ‘그녀’는 어색하여서 많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번역을 하다 보면 어순이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3인칭 대명사가 앞의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할 때도 많다. 그래서 바른성경에서는 이런 경우에 인칭대 명사 대신에 사람 이름을 직접 넣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창 35:13에서 첫 번째 나오는 ‘그’ 자리에 ‘야곱’을 넣었으며, 창 37:5에서는 ‘그를’ 자리에 ‘요셉을’이라고 이름을 갖다 넣었다. 이처럼 인칭대명사 자리에 사람 이름을 갖다 넣은 것은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명백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서 원문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경우는 번역상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원문을 따라 ‘그’라고 해도 될 것을 바른성경은 불필요하게 고유명사로 바꾼 경우도 많다(예를 들면 창 37:5; 창 35:13에서도 ‘그’로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창 39:23하에서 ‘그’ 대신에 ‘요셉’이라고 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그’라고 하면 ‘요셉’을 가리키는 ‘전옥(간수장)’을 가리키는지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구절에서는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도 다 ‘요셉’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바른성경은 뒤에 나오는 ‘여호와’를 생략하였는데, 아마도 앞에 ‘여호와’가 이미 주어로 나왔다는 이유로 생략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큰 손실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히브리 원문에 분명히 ‘여호와’가 두 번 들어 있고,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무시하고 빼버린 것은 성경 원문에 충실하려는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여성 3인칭 대명사 또는 여성 지시대명사 ‘그녀’의 사용 문제는 번역상 어려운 문제이다. 바른성경은 이 경우에 대개 고유명사로 대체하였는데 대부분의 경우 공감할 수 있다(예를 들면, 창 29:9, 35:17,18). 왜냐하면 ‘그녀’라고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른성경에서도 여성 3인칭에 대해 ‘그’를 사용하고 있는 곳도 있다(창 29:9). 하지만 창 35:17,18에서는 ‘라헬’로 바꾸지 않고 ‘그’로 해도 뜻이 분명한데 불필요하게 바꾸었다.

 

VI. 지나친 존칭 사용의 문제

 

바른성경의 특징 중 하나는 지나친 존대어 사용이다. 그 중에서 특히 ‘님’ 자를 많이 붙이고 있다. 물론 마땅히 존경해야 할 분에 대해 존대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나 지나친 사용은 도리어 어색하게 만들고 만다. 그 일례로 바른성경은 ‘예수’에 대해 대개 ‘예수님’으로 번역하고 있는데(고전 1:1,2,30 등 많은 곳), 이 단어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면 예의바른 경어체로서 좋다고 느껴질지 모르나 문장 속에서 보면 어색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고전 1:1)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이란 번역은 이상하다. 왜 ‘그리스도’ 다음에는 ‘님’을 붙이지 않았는가? 그리고‘사도’ 다음에는 왜 ‘님’을 붙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바울’은 왜 ‘님’ 자 없이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인가? ‘소스데네’는 그냥 이름을 불러도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지적들은 ‘님’ 자를 붙이자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 대신에 ‘예수님’으로 번역했을 때 여러 문제들에 부딪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 다음에 올 때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되지만(롬 1:1, 8:1 등), 이 순서가 바뀔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롬 1:8, 고전 1:2,3 등). 왜 ‘그리스도 예수님’은 되고 ‘예수님 그리스도’는 안 되는가? 어느 것이 먼저 오느냐에 따라 ‘예수’가 되기도 하고 ‘예수님’이 되기도 하니, 매우 어색한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처럼 ‘예수’에 대해서는 ‘님’ 자를 붙이기도 하고 붙이지 않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붙이지 않고 있다 성령 . ‘ ’에 대해서도 ‘님’ 자를 붙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님’자를 붙이는 데 있어서 일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주’라고 하고, 어떤 때는 ‘주님’이라고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붙을 때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지만(롬 1:4, 7,고전 1:2,3,8,10, 엡 1:2,3,15,17 등), 순서가 바뀔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표기하고 있다(고전 1:9).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는 대개 ‘주님’으로 번역하고 있다(눅 2:23, 행1:24, 2:36, 엡 5:8, 빌 2:11 등). 그리고 같은 경우라 할지라도 일관성이 없는 것도 있다. 대개는 ‘주님 안에서’라고 번역하고 있지만(엡 3:11, 6:1,10, 빌 2:29 등), 예외적으로 ‘주 안에서’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다(엡 4:1). 이것이 실수인지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똑같은 표현에 대해 일관성 없는 번역을 보게 된다.

 

지나친 ‘님’ 자의 사용은 도리어 문장을 어색하게 하고 일관성 없게 만들며,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참된 경건은 ‘님’ 자를 붙인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경외해야 하고 삶과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말의 ‘님’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님’의 뜻도 모르고 많이 쓰고 있지만, ‘님’의 정확한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조선 중종 27년(1527년)에 편찬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보면 “님 쥬(主)”라고 되어 있다(서정범, 「國語語源辭典」, 2003, p.159). 따라서 ‘님’의 원래 뜻은 ‘주(主)’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이란 말은 ‘주’란 뜻의 단어가 중첩된 것이 된다. 물론 오늘날 한국어에서 ‘님’이 더 이상 ‘주’란 의미가 없이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접미사로 많이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성경 번역에서 지나친‘님’ 자 사용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VII. 경전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문체

 

무엇보다도 바른성경의 제일 큰 문제점은 성경의 경전적(經典的)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서 그저 의미 전달만을 고려한 서술체 문장에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16을 보면, 바른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분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내용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고 의미 전달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문장의 간결성과 시적 운율에 있다. 개역한글판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와 비교해 볼 때, 내용상 차이는 없으나 암송할 때에는 차이가 난다.

 

바른성경의 문장은 너무 딱딱하고 교과서적 서술체라서 암송할 맛이 나지 않는다. 이러한 만연체적 문장은 마태복음 1:1에서 잘 드러난다. 바른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는 번역은 원래 원문에서 한 문장인 것을 두 문장으로 늘인 것이다.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원문에 없는 ‘이러하다’와 ‘그분은’을 첨가하면서까지 두 문장으로만들어서 원문의 간결성과 하나됨을 상실하고 말았다.

 

성경은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교과서나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무이한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만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반복해서 읽고 묵상해야 하는 경전(經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다 지켜 행하라”(수 1:8 개역개정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개역한글판)고 하였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씀을 암송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의 문장은 가능한 한 간결하고 시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이러한 문체상의 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른성경은 이러한 문체의 문제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바른성경은 “현대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사용하는 표준어를 사용한 문어체이지만 문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구어체를 혼용하였다”고 말하지만 (www.ksbible.com/3/02.php), 성경은 날마다 읽고 암송해야 하는 경전(經典)임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현대인들의 ‘쉬운 이해’에만 초점을 두고, 주야로 묵상하고 암송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출판된 바른성경의 책제목이 「하나님의 말씀 바른성경」이지만, 이것은 오직 ‘번역 내용’에만 관한 것이고 ‘번역 문체’와 관련하여서는 세상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체를 따르고 말았다. 물론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교과서체를 따른 것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식 전달을 위주로 하는 일반 교과서체는 성경의 경전적 성격을 살리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비록 개역한글판이 번역한 지 오래되어서 어렵고 고어체이기는 하지만, 그 문장이 위엄 있고 권위가 있으며 시적 간결성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암송하기에 적합하다고 하겠다. 개역개정판도 이러한 경전적 문체의 전통을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이런 점이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은 비록 번역의 정확성에 있어서 미흡한 점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에서 사랑받고 있는 중요한 이유라고 하겠다.

 

 

결 론

 

<바른성경>은 한국의 복음주의 계통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번역진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을 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주된 번역이론인 ‘의미일치론’을 배격하고 ‘형식 일치의 번역 이론’을 따른 점에 있어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원문의 언어적, 문법적, 구문적, 구조적 특성을 최대한 고려한 형식 일치의 번역은 비단 <바른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이 채택하여 따르고 있는 전통적인 번역 이론이지만, 오늘날 번역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바른성경>은 이러한 형식 일치 번역 원칙에 따라 성경 원어를 최대한 존중하고 원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바른성경>은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에 비해 원문에 충실하게 개선된 곳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른성경>은 현대어로서 읽기 쉬우며, 가능한 한 성경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시가서나 지혜서 등에서는 시가체를 살려서 행 배열을 하고 있어서 이해하기도 쉽고 시적인 맛도 살렸다.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어 맞춤법에 따라 쉼표와 마침표, 따옴표 등의 구두점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가독성(可讀性)을 높이고 이해를 쉽게 하였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바른성경>은 개역개정판보다 나은 점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된 오역이나 미흡한 번역들이 많이 있음이 발견된다. 오히려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보다 못한 부분도 더러 있으며,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의 오역을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들도 많이 있다. 원어의 시상(시제)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잘못 번역한 것도 있으며, 일관성이 없는 번역도 많이 있다. 한 부분을 이유 없이 통째로 빠뜨린 것도 있다(창 48:5).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원어에 충실하려고 하다 보니 한국 독자들에게 매우 생소하고 이상한 번역을 하기도 하였다. 누가복음 19:4에서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를 ‘시카모어나무’라고 번역한 것도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학자들만을 위한 번역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현대 한국어의 구어체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 이상한 번역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의 ‘당신’에 해당하는 2인칭 인칭대명사를 ‘선생님’이라고 번역한 것(마 3:14, 12:47 등)은 매우 어색하다고 생각된다. 비록 구어체에서 ‘당신’을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분명히 2인칭 인칭대명사로 되어 있는 것을 ‘선생님’이라고 바꾸어서 번역하면, ‘선생’ 또는 ‘교사’를 나타내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의 번역과 혼동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는 원칙에도 맞지 않다.

 

또한 지나친 경어의 사용도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바른성경>은 ‘예수’로 번역할 때도 있고 ‘예수님’으로 번역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성령’에는 아예 ‘님’을 붙이지 않았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순서가 바뀌면 ‘그리스도 예수님’이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순서가 바뀌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된다. 그리고 ‘주 안에서’와 ‘주님 안에서’가 일관성이 없이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것은 <바른성경> 번역자들이 지나치게 현대 구어체에 맞추려고 집착하다 보니 생긴 현상으로 생각된다. 구어체와 경어체를 살리는 것은 나름대로 장점도 있으나 기록된 성경은 어차피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리’로 전달되는 구어체와 ‘글자’로 전달되는 문어체는 100% 일치할 수 없으며 각각 고유한 기능이 있다. 지나친 구어체와 경어체 사용은 오히려 의미 전달을 방해하고 문장을 어색하게 만드는

역작용이 있음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바른성경>의 제일 큰 문제점은 성경의 경전적(經典的)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의미 전달만을 고려한 서술체 문장에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시가서와 지혜서, 선지서 등에서 시적 행 배열을 한 것은 큰 장점으로 생각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바른성경>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교과서체를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바른성경>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체를 채택하다 보니 내용 전달은 좀 쉬워진 반면에 하나님 말씀의 위엄과 권위, 그 문체의 간결성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바른성경>의 이러한 원칙은 성경은 단지 한 번만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반복해서 읽고 날마다 묵상하고 암송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깊이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온 결과이다. 날마다 묵상하고 암송하기 위해서는 문체의 간결성과 시적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성경에서 위엄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느끼기 위해서는, 의미 전달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는 약간의 고어체 사용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날마다 방송되는 우리나라의 역사 드라마에서 약간의 고어체 사용은 의미 전달에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 옛 시대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번역에 있어서 이러한 요소를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른성경>은 이러한 문체의 문제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바른성경>은 현대인들의 ‘쉬운 이해’에만 주된 초점을 두고, 주야로 묵상하고 암송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본다면, <바른성경>이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에 비해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또 현대 한국인이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번역하려고 노력한 것은 충분히 높이 평가할 수 있으며 , 따라서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보다 잘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체에 있어서 성경의 경전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중고등학교 교과서체 중심으로 나아간 것은 큰 단점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의 위엄과 간결성, 시적 아름다움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서 내용 전달에만 치우친 감이 많이든다. 그래서 <바른성경>은 전체적으로 너무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지나친 경어체와 일관성 없는 ‘님’ 자의 사용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보더라도 <바른성경>에는 여전히 잘못되거나 개선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다. 원문에 맞지 않거나 잘못된 번역들이 많이 있으며,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의 잘못이 시정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들도 많이 있다. 또한 원문에 있는 것을 임의로 삭제하거나 원문에 없는 것을 첨가한 것도 더러 있다.따라서 <바른성경>도 앞으로 많은 부분에서 개역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 있어서 성경의 말씀은 권위 있게, 위엄 있게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성경은 단지 한번 읽고 이해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바른성경>은 매우 큰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원어에 충실한 올바른 번역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의 경전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한, 간결하고 아름답고 암송하기 좋으며, 위엄 있고 권위 있는 문체를 가진 번역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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