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의 역사 7
김홍전 목사
제7강 사도행전 16장 6-15절
오늘도 지난 주일에 이어서 하나님의 성신께서 우리 각 사람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는 도리를 또한 별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가겠습니다. 이 도리가 심오하고 혹은 어려운 데가 있는 까닭에 도리를 교리와 같이 엮어서만 이야기하면 얼른 다 알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해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그런 중요한 실례도 보는 것이 좋은 까닭에 그런 방식으로 이걸 생각해 나겠습니다. 이것은 심히 중요한 문제인걸 여러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어떤 것이 덜 중요한 것 없지만 매일매일 생활에 있어서 이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주의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에 개괄적으로 먼저 큰 것 몇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첫째는 이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든지, 인도라는 이 역사는 우리 안에서 유기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의식의, 우리의 영혼의 기능의 어떤 부분이든지 제한을 한다든지 탈취한다든지 하시는 일이 없이 오히려 그것을 가장 충실하게 잘 쓰셔서 하시는 거라고 하는 거예요. 둘째는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데는 그냥 하는 게 아니고 항상 어떤 큰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에 향하여 가도록 하는 것이고 이건 기본적으로 사람이 중생한 다음에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말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냥 아무 일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종교로 쥐고 인생을 제가 결정해서 가는게 아니고 성신께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리로 끌고 가시기 위해서 그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는 거요.
이 목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원대한 한 가지만 가지고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어느 때는 원대한 것에 붙여서 당면의 목표라는 것도 또 거기에 그걸 수반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이와같이 해 나갈 때 거기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성신이 거룩되이 각 사람을 역사해 주시는데 따라서 조화있게 일이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그거요.
지난 주일 오후에 우리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던 이야기를, 그 역사를 우리가 공부를 했는데 성신님 사역 가운데에는 베드로에게도 어떤 환상으로 계시를 하셨고, 고넬료에게도 환상으로 계시하셔서 결국 이런 것이 서로 합쳐서 그 큰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보았어요. 동시에 발생 혹은 협조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을 여기서 보았어요.
그 다음에 우리는 이야기하기를 성신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으려면 자기 욕심을 가지고 자기 목적을 가지고 성신님께서 좀 유리하게 인도해 달라고 그런 짓 해 가지고 하는게 아니다 그거요. 그러면 자기 목적이나 자기의 욕심이라는 것이 없어야겠다면 얼마만한 정도로 없어야겠느냐 할 때 결국 한마디로 ‘나’라는 것, 옛사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이 생생한 현실로 자기에게 있을 때 성신님의 명확한 가르침과 인도를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언제든지 아상(我相)이라는 것이 없어야 할 뿐더러 성신님이 지시하는 데로 절대로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고 마음 가운데에 그 사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그와 같이 원하시는 때에 적시에 나를 가장 은혜롭게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기를 기다리는 대망의 신앙이라는 것이 늘 필요하다는 것이 올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진 마음 상태를 가지고 구하는 거요.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 그랬어요.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오”그랬어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너희 쾌락으로, 헤이도네(ήδονή), 쾌락으로 쓸려고 잘못 구함이라” 그랬어요. 야고보 4장 2절, 3절... 그러며는 우리는 구하라는 거요. ‘성신님이 나를 이 일에 있어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주소서. 저는 오직 순종할 것 뿐이로소이다’ 그것이오.
성신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또 그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서는 성신께서 나에게 단계적으로 감화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이끄는 사실을 어떤 도중에 그만두고 저지하고 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그거요. 이것이 “성신을 소멸치 말라” 하는 뜻이 올시다. 우리가 기도해서 구했으면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는 그 다음에 하라고 하는 일, 당장에 목전에 알지 못하는 것이 딱 당해서 이것 주시오, 저것 주시오 이러지 말고 성신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순서에 의해서 차례차례 터득해 가거라 하는 거요. 나는 당장에 이것이 몰라서 답답해서 물었지만 성신님 말씀이 너는 그걸 알려면 그 이전에 벌써 알았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이전에 네가 깨닫고 알고 있어야 할 것들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이걸 내가 일러준들 너는 깨닫지 못한다. 네 그릇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선 이것부터 해야겠다 하고 우리에게 그 먼저의 단계, 먼저 주어야 할 것을 먼저 주시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주님도 우리에게 구한 다음에는 찾아보라고 했고 찾아본 다음에는 문을 두드리라. 이렇게 해서 구하고 찾아 보고 문을 두드리는 순서를 가르쳤어요. 구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요.
이와같이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만일 구했으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찾는 단계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말이오. 자기 현재의 마음 상태를 잘 살피고 자기 분수를 알고서 크고 기이한 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목전에 가장 정당한 일을 하고저 하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오. 이상을 품고 주를 위해서 내가 이걸 하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떠들지 말고 그것이 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인 이상에는 주께서 받지 아니 하시는 것인줄 알고 항상 분수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도 명확한 인생의 사명이라는 것이 없다면, 자기 일생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없다면 지금 그의 단계는 자기가 정당히 더욱 장성하기 위하여 주력해야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사명을 받을 만한 그릇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일 사명이 있다 할 것 같으면 충성으로 이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바른길을 늘 찾아서 나갈려고 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올시다. 자기 현재의, 다음에 자기 현재의 환경의 조건들을 늘 주의해서 찾아보는 것이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내 현재의 환경이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걸 해석해서 자기가 이 자리에서 믿는 사람답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답게 가야 할 길을 가야한다 그거요.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이오. 하나님께 맡기고 비록 앞 길이 막막할지라도 보이시는 한 길을 전진해 나가는 이것이 정당한 생활로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받아가는 사람의 자태올시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성경에 보이신 원칙들에 의해서 원래 사상에 함축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오. 성경의 원칙들은 사사로이 풀 것이 없는 까닭에 일(?) 하나님의 성신이 역사를 통해서 가르쳐주셔서 역사의 고귀한 유산으로서 받아오게 한 것을 항상 터 삼아 가지고, 중요한 근거지 삼아서 그런 튼튼하고 건전한 교리의 터 위에서 문제를 해석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그러한 걸 잘 가르치는 책이든지 좋은 친구든지 훌륭한 스승이든지가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을 물어서, 해명해서 가르치는 것에 근실하게 늘 참석하고 배워서 자기가 건전한 사상을 함축해 가지도록 해야 할 것이오.
마지막에 하나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이라 하고 토라(torah)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이 생명을 얻게 하는 길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않고, 정죄하는 기능을 우리에게는 가지지 아니하고, 선행을 강요하는 강요자로서 존재하지 않지마는, 생명의 성신의 법에 의해서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 까닭에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그것이 우리의 인식에는 생활의 기준을 보여 주는 것인 까닭에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인생의 생활에서 이렇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까닭에, 우리 생활의 기준으로서, 규칙으로 도덕적인 것 즉 선악의 도덕적인 판단의 기준으로서 율법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고 둘째는 어떠한 나라를 구상하시고 이 법을 옛날 히브리 사람들에게 내리셨던가를 종합적으로 대국적으로 잘 관찰하고 배우며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거룩한 나라의 자태를 우리가 찾는거요. 이러한 것들을 배워서 이 법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기능을 살리는 거요.
이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다같이 존중히 여기는 것이고 그뿐아니라 법이라 할 때는 하나님이 하라든지 하지 말라시는 모든 말씀을 포함해서 광범위의 법이라는 말로 써요. 꼭 모세의 율법 613조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오. 그러면 복음을 믿어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이오. 안믿으면 멸망한다 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인 것이오. 그런고로 이 법에 의하여서 우리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복음을 믿고 하지 말아라 하는 것에 의해서 불신의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 말이오. 그런 까닭에 덮어놓고 법을 무시한다는 생활의 태도라는 것은 무법자요. 무정부적인, 정신적 무정부적인 인물이란 말이오. 스피리츄얼 애너키즘(spiritual anarchism)이란 것은 무서운 타락인거요.
또 법이라는 성격상 필연이 거기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하세요. 통치 대권의 발휘라는 것이 거기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할거요. 왜냐하면 법은 권위를 의미하는 거니까. 따라서 비통치자가 거기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거요. 그 관계가 무엇인가를 법은 보여 주는 것이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정당한 것을 인식하려면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또 거기 통치권이 행사되는 사회, 그 영역이라는 것이 어떤 레벨(level)의 양상을 띄고 있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오. 그러면 법과 성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의 심상과 행위도 다만 도덕의 완성을 위한 것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바른 자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 나라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말이오. 이와같이 법은 중요한 것이오. 법에 대한 그릇된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은혜시대에 속하고 율법시대에 속하지 안했다는 이상한 구분을 해 놓은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의 내신 법이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중요한 효용이라는 것을 때때로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걸 우리가 심히 중요히 생각 하십시다.
이제 오늘은 너무 이 교리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딱딱한 이야기인 까닭에 그 여타의 다른 실례를 들어서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겠습니다.
첫째 지난번 말씀대로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라고 그랬어요. 그 사람의 모든 의식 활동, 다른 말로 말하면 영혼의 기능들을 충분히 구사 활동시켜서 성신님의 가르치시는 도리대로 그가 나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가르쳐 주신다 말이오. 그의 인격과 그의 영혼의 기능들을 충분히 활용하시는 것이다 그거요. 이 경우에 그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의 영혼의 기능 활동에 기본적으로 중요한건 감정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건 덮어놓고 나가겠다는 의지의 활동이 아니고 제일 먼저 바르게 인식한다는 사실인 것이오. 무얼 바로 알아야 그 바로 안 것 때문에 정당한 정서도 작용하고 지적인 감정이나 정당한 정서도 생기는 거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줄 알았을 때는 호감을 가지는게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을 때는 그의 일에서 증오감을 가질 수 있는거요. 이 일이 가치있는 일로 바로 알았으면 좋은 정서가 움직이는 것이고 무가치하고 타기할만한 일로 알았으면 타기하고 마는 것이오. 기본적으로 바른 인식을 가진다는 건 가장 중요한 거요. 따라서 바른 인식 하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인식이 왔을 때는 비로소 자기 의지라는 것이 그리 향해서 움직이는 것이오. 이렇게 그 사람의 인식, 이것이 여타의 정서나 의지의 활동에 앞서서 있는 것이므로 그 사람의 인식 내용이 정당해야만 할 것이다 하는거요.
그런데 우리가 중생할 때에 성신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을 뿐아니라 이 새로운 생명이 한 인격을 형성해서 인간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으로 가지고 있던 영혼의 기능이라는 것을 수선을 하시되 극단적으로 변화를 시켜서 과거에 알지 못하고 생각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던 것을 알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적어도 그런 기능을 주셨어요. 성신님이 그걸 비취셔야 “아, 이것이 그것이구나” 하고 아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그걸 알 수 있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기능 활동은 있어야겠다 그말이오. 이렇게 해서 성신님이 “아,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나셨다” 할 때는 과거에는 한사코 반대하던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고 완전히 무시해 버리던 사람이 과연 진리올시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오.
이것이 그 영혼의 기능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켜서 과거에는 깨달을 수 없던 인간적인, 푸슈키코스(ψυχικός)의 영역에서, 자연인인 영역에서부터 끄집어 올려서 하나님의 성신의 조명을 받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신 것이란 말이오. 이 영혼의 기능의 극단적인 변화라는 것이 새로운 진리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따라서 하고자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말이오. 성신님의 이 유기적인 가르치심, 유기적인 인도를 받기 위하여서는 그의 인식 내용을 성신님께서 먼저 바로 잡아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란 말이오. 여러분, 성신님의 가르치심은 오늘 어떤 문제 앞에서 “요건 저렇고 저건 저렇다” 하고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만 기대하지 말라 그것이오.
원래 그 쌓아진 것이 부족하고 그릇되어 있으면 그것부터 고쳐져야 하는 것이오. 그의 사상이나 그의 생각이나 그것이 편협하고 동굴 속에 갇힌 것같이 많은 사람이 하니까 저도 따라가는 종족의 우상같이 그렇게 되었으면 그것부터 두드려 고쳐 주셔야만 바로 생각할 수 있을 거요. 그래야 유기적으로 바른 생각과 바른 관념 바른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이 먼저 고쳐져야 하는 것이오. 덮어놓고 고쳐지지 아니하고 아주 이렇게 편협하고 편견이 있고 잘못된 정신 속에 성신님이 가르쳐 주시면 무엇이든지 안다고 그렇게 생각지 말라는 거요. 그건 유기적인 활동이 아니오. 가지고 있는 그 사람 논리의 그 시발점, 말하자면 여러가지 프레미스(premise), 전제들 이런 것을 그냥 놓아두고 성신님이 가르쳐 주면 된다는건 말도 안되는 것이오.
유기적일려면 그 사람 사상 자체가 자연스럽게 그걸 구유(具有)하고 조화되어야 할터인데 성신님의 가르침과 조화되어야 할터인데 그 사람의 사상이나 논리가 자연스럽게 조화될려면 그 사람이 서있는 비뚜러진 전제나 비뚜러진 논거가 수정되어야 한다 말이오. 이러기 위해서 원래 중생한 사람에게 성신께서 가르쳐 주심으로 깨닫게 하사 과거에 가지고 있던 누습(陋習)의 사상과 누습의 주관이라는 것, 편견이라는 걸 자꾸 털어버리게 하시는 것이오. 사회관도 그렇고 인생관도 그렇고 혹은 도덕관도, 혹은 그 여타의 여러가지 사상적인 여러 내용에 대해서 자꾸 고쳐져야 한다 그말이오. 즉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서 말씀에 의해서 과거에 가지고 있던 전통적이고 고질적이고 완고했던 생각을 뒤집어 고쳐 놓아야 하는 것이오.
어떤 사람이 이 사회에 나가서 사람들을 위하여서 봉사를 하겠다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도리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인류애가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인류애가 있을려면 인류는 무엇이다 하는 인생에 대한 바른 가치 판단이 있어야 하는 게고 이런 바른 가치 판단이란 것은 그 인생관이 성경에서 나온 바른 것으로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 여타의 인간적인 생각은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인생관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같은 동일한 관점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오. 이렇게 해서 그의 사상은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의 정신은 다 씻음을 받아야 하고 그대신 신령하고 건전한 정신으로 충족한 것으로 다시 건설되고 채워져야 하는 것이오. 이것이 심히 중요한 것이올시다.
그렇지 않고 앉아서 때묻고 완고하고 누습에 젖고 편견이 있는 데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원합니다 해서 어디다 무엇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가르쳐 줄 때 너 이것도 아니라, 저것도 아니라고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오. 그것 안 가르치시는 게 아니오. 성경을 보면서 아닌 것을 깨닫는 것이오. 이게 성신이 가르치는 것이오. 너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 사상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인간관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가정관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회관도 다 고쳐라. 자꾸 고치라고 하는 것이오. 그러고 그것을 교회는 교회대로 또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해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오.
성신님의 이러한 거룩한 가르침의 실례로서는 우리가 무엇이 있느냐 할 것같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유용한 일을 할려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특히 자기의 그 봉사의 면에 대하여 정당한 인식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오. “내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서 그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성신님 가르쳐 주십시오” 한다면 “네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고 네가 일 하려는 그 방면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내용이 무언가를 알아야 할 것 아니냐, 그걸 먼저 알아야겠다” 보이는 것이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아서 바로 하려고 할 것 같으면 교회에 대해 그 활동, 교회 활동이나 교회의 존재등에 관해서 정당한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이것 없이 교회를 위해 일을 한다고 하면 자기 딴엔 자기 나름대로 교회관을 가지고 떠드는 것이 되지 하나님의 교회에 진정으로 보탬이 될른지, 손해가 될른지 그 측량을 할 수 없는 일이오. 인류사회에 무슨 봉사를 하고자 하더라도 먼저 그 인간관이 바로 서 있어야 하고 바른 봉사를 위하여는 그 인간관이 항상 정당한 데서 흘러와야 해요. 사람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또한 그 대상의 진가와 그 인격을 바로 인식하는데 있는 까닭에 인식치 못하고는 바른 사랑을 못가지는 것이오. 우리가 주님께 대한 바른 사랑을 가지고 다 살지라도 주께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한 것이오.
그런고로 성신께서 한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서 유용히 가치있게 쓰시고저 하실 때에는 성신님의 이 유기적인 역사로서 그 사람이 자기 할 일과 일터를 바로 알고 바로 보도록 하시되 그러한 주관, 그런 판단과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그의 인식 내용에 먼저 바르고 넉넉하게 되어 있도록 하실 것이다 말이오. 인식 내용이 바르고 넉넉하게 된다는 건 논리가 정연하고 풍요한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오. 그 사람이 좋은 그릇으로 쓰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그 사람이 정상히 장성해 가지고 그가 자기의 맡은 일에 확신과 불굴의 뜻으로서 전진할 수 있도록 그의 인식이 깊고 체계가 있는 한 큰 사상으로 바르고 볼품이 있게 육성되어야 한다 말이오. 이것을 무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상도 성경이 가르친바 여러가지 바른 사상도 무시하고, 단편적인 편언척구(片言隻句)의 하나님 말씀만 되어가지고 뭐한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닌 것이오.
그런고로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근실하게 배워서 거룩한 사상이 그 인물을 이루어 가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러한 확신의 터 위에 서도록 또 그 사람 안에 충일하도록 하는 것이 소망스러운 일이고 있어야 할 일이 올시다. 먼저 성신께서 나를 이끄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게 하시고 조명하심을 감사하면서 좋은 말씀을 바르게 해명받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고 낭비하지 말고 근면하게 배워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관찰이라든지 사상을 고귀하게, 논리 정연하게, 풍요하게 가지도록 목표를 세우고 나가는 것이 옳다 그것이오. 그러고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더욱 받겠다고 하라 그거요. 이런 경우에 좋은 예가 하나 있어요. 그 예는 사도 바울의 생애올시다. 그 일례로서 바울이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나타낸 중요한 태도 하나를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고 나갔는가? 이 구절은 여러번 읽어서 여러분 잘 아시는 것이오. 바울 선생이 제 둘째번 여행 때의 노정이올시다. 그러면 제목을 삼아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에 대한걸 배울려고 하는데, 제목을 붙이자면은 ‘성신께서 바울을 어떻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는가?’에 첫째는 그의 세계관과 거기에 의한 그의 복음의 행진은 어쨌는가? 바울 선생이 복음을 듣고 일차, 이차, 삼차 여행을 하고 마지막엔 로마로 항해를 했어요. 여러분 다 잘 아시는 것이오.
바울 선생은 아마 주후 31년경에나 회개를 하고, 30년이나 31년이라고 하더라도, 45년에 제1차 여행을 떠나서 대체로 48년까지, 그러고 50년에서 53년까지 제2차 여행을 했고, 그 다음에는 54년에서 57년까지 제3차 여행을 했고, 그 다음에는 58년에는 고린도에서 돌아와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잡혀가지고 붙들려서 가이사랴에 2년이나(옥살이를 하고) 있다가 60년, 61년 그 겨울에 로마로 항해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상고를 해서 상고심에서 결국 바울은 석방이 되었고, 후에는 다시 옛날 교회를 찾아보러 마게도냐 지경으로 왔다가 혹은 마게도냐 그렇지 아니하면 아시아에 와서 드로아 근방에서 잡혔어요. 그건 벌써 네로의 박해, 64년부터 시작된 박해가 사방으로 로마제국 사방에 미친 때이니까 잡혀서 로마로 가서 마침내 66년이나 7년경에 로마에서 순교를 하신 것이오. 바울 선생의 나이도 대게 그만한 정도예요. 큰 차이가 없어요. 돌아가시던 그 해 주후 67년이라면 예순일곱쯤 되었을 때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해도 대차가 없어요.
이와같은 그 생애의 움직임을 볼 때에 바울선생이 주님을 만나서 회개를 한 이래부터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자태라는 것은 역력해요. 역력한데 그의 가지고 있는 사상과 성신님이 그걸 쓰셔서 인도하시는 내용과는 아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움직이고 있어요.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유기적인 역사라 하는 어떤 현실 어떤 사실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오. 그에게는 직접적인 환상이나 계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상 그것 자체를 계시로서 받아들이지 아니 했어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을 볼지라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서 곧 마게도냐 가기로 힘썼지만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일러라.” 하나님이 이렇게 부르신다고 그 내용은 그렇게 인정한 것이지 환상 그것 자체가 곧 계시다고는 생각지 아니했어요.
그건 우리가 이 다음에 다시 생각할 문제지만은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바울 선생은 복음을 들고 복음을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나가는데 지리적으로 볼 때 항상 시작을 수리아 안디옥에서 했지만 항상 서쪽으로 갔어요. 사도 베드로와 같이 동쪽 바벨론을 향해 간 일이 없어요. 북쪽 빅트리아나 엘람도나 이란쪽으로 올라간 일이 없어요. 알르메니아로 간 일도 없고 소아시아로 들어가 가지고 소아시아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갈려고 한 일이 한번 있지만 비두니아로 갈려고 오늘 기록에서 한번 있지만 예수의 영이 딱 막고 못가게 하니까 다시 서진(西進)해서 드로아까지 가서 드로아는 에게해에 있는 해안이죠? 아시아에 있는 항구요. 고대에 그 트로이 있는 유적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이름이 그 이름대로 트로이, 이에 호머의 시 가운데 나오는 트로이란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드로아라고..... 거기서부터 성신님의 거룩하신 인도를 받고 비로서 마게도냐 헬라로 갔고 그러고 자기 원하는 대로 결국은 로마로 가게 된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들고 바울 선생은 서쪽으로 나갔다는것... 서쪽으로 나가되 지중해 서쪽으로 자꾸 나가되, 지중해 연안으로 아프리카론 가지 않고 항상 이쪽 헬라 즉 마게도니아와 아카이야 그 다음에는 에게해를 넘어서 저쪽 아드리아 앞 바다를 넘어서 로마로 갔어요. 바울의 당면의 목표는 로마였어요. 왜 바울 선생은 이랬나? 바울은 거기 대해서 자기 자신은 아무런 상념이 없는데 성신께서 그리로 가거라 하고 밀어대서 그랬는가 하면 그게 아니오. 성신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까닭에 바울 선생에게는 그런 사상이 움직였고 이 사상의 움직임 하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이렇게 나가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당위다 하고 그러고 나갔던 거요.
성신님의 인도를 받을 때에 이와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사상을 품은 사람은 그 사상 자체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사실들이 생기는 것이오. 가령 사람이 인간관을, 고귀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것을 인정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학대한다든지 인간을 천시한다든지 무시하는 일은 반대하고 나설거요. 그런 일이 자기에게 닥칠 때는 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필연적인 거요. 왜? 그 사상이 그런 인간관을 가진 까닭에 그렇다 말이오. 가정관이 조선(祖先)을, 선조를 말이오, 신화하는 가정관을 다 불식시켜 버리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대일로 서 있다는걸 안사람은 자녀들의 인격에 대해서 자기 소유물과 같이 생각하던 누습을 버릴거요. 그러고 자기의 행복이나 자식의 행복을 전제로 하고 나가던 유디모니즘(eudaemonism) 사상에서 벗어난 사람이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 때문에 자식들을 기르고 사상을 부여해 줄 것이오.
이와같이 그 사상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행동이 나오는 게고 그 언어가 나오는 것이오. 따라서 그것은 정당한 사상과 성신께서 그에게 함축해주신 거룩한 도리가 그 속에 있으면 거기 의해서 움직일 때 성신께서 힘을 보태어 주셔서 그 일이 이루어 나가도록 해주시는 거란 말이오. 그러한 거룩한 사상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 앞에 장애가 있을 때에는 장애를 물리치고 가는 것이지 장애에 타협하고 넘어지고 되돌아서는 법이 없는 것이오. 이와같이 기계적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가장 영혼의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는 인간답게 나가는 이 사람에게 정당하게 인도함을 받는 생활이 나타날 것이오.
사도 바울 선생에게 내리신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는 그의 사상과 그 세계관, 그 사관, 그런 것들과는 밀접한 관계를 늘 가지고 있었다 하는 것이오. 성신님의 은연(隱然)한 주관 하에서,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그는 그 사상이 육성되어 왔던 것이 올시다. 이것이 하루 이틀에 금방 된 건 아니오. 다만 그는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과거에 가지고 있던 헤브라이즘에 일대 수정을 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오. 헤브라이즘도 계시에 터를 두고서 구성되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편협성과 편견과 잘못된 것들을 일단 다 한번 불식해 버렸다 그말이오. 이 바울 선생의 가치의 전도(顚倒)라고 할지 사상자체의 정리라는 것이 그의 입신 이후에 있었다는걸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어요... 또한 사명받은 후에 그의 사명수행의 길은 그의 사상의 터 위에서 그의 진로를 정해 주었고 거기에 의해서 전진하게 한 것이 올시다.
성신께서 바울 선생을 들어서 이방의 사도로 쓰실 때에 하나님의 그 만세전의 경영을 따라서 이미 준비해 놓으신 바울이라고 하는 그릇, 그러한 사상가를 만들어 주신 후에 쓰신 것이오. 그냥 갑자기 쓰신 것은 아니다 그거요. 기독교의 신학을 가령 바울 선생의 일을 보십시다. 기독교의 신학을 체계 있게 세워서 후대에 가장 정연하게 전수하도록 바울 선생을 들어 쓰셨음을 우리는 보는데 이런 바울이 가지고 있는 그런 논리적인 은사가 움직인 것만 아니라 그의 가지고 있던 교육과 그의 사색과 또한 그의 사상가로서의 함축을 다같이 써서 그렇게 만든 것이오.
그 일단 예를 우리가 오늘 읽은 사도행전16:6-15절에서 보는 것이 올시다. 이거 6절로 15절까지 여기 이야기는 제 둘째번의 여행... 이 둘째번 여행 기록은 사도행전 16장부터 18장까지 있는 기록이올시다. 장소는 마게도냐, 헬라 이것이 중요한 여행지였어요. 주후 50년으로부터 53년까지 해수 한 4년간 한 것인데, 간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서로 다투고 나누어서 바나바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자기 고향 땅 구브로로 가서 거기서 전도를 하고 바울 선생은 실바누스라는 사람 실라라고 하는 사람을 택해서 데리고 먼저는 수리아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도보로, 육로로 북쪽으로 가서 소아시아로 가는 그 타오르스 산쪽을 향해서 가 가지고 길리기아 문이라는 길리시언 게이트(cilician gate)라는 산을, 허리를 짤라가지고 통하는 길을 만들었어요. 거기를 통해 지내 가지고 소아시아 땅으로 들어가서 주로 갈라디아 땅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갔다가 루스드라에 가서 더베, 루스드라로 갔지만 루스드라 땅에서는 일찍이 제 일차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죽을뻔 했지요? 돌로 맞아서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유대사람들이 끌어다가 성밖에다 내친일이 있어요. 그렇지마는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기적으로 그는 회생해서 일어나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그 다음에 이고니온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루스드라에서 제자를 하나 만났는데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사람인 디모데올시다. 그래서 디모데를 할례해가지고 데리고 갔으니까 바울, 실라, 디모데, 그 다음에 드로아에서 볼 것 같으면 아까 읽은 말씀, 바울이 이 마게도냐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며” 우리라는 말을 썼어요. 이걸 기록한 사람은 누가인데 여기서부터 누가가 가담한 것을 표시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드로아에서부터 우리라고 말할 때 자기를 포함한 일행 누가, 빌립보 사람인 듯한 사람인데 마게도냐에 빌립보 사람 헬라 사람이오. 그도 거기 가담을 해서 일행이 바울과 실라-바울이나 실라는 다같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오. 그 다음에는 디모데 그러고 누가 이 사람들이 올시다.
이 사람들이 한 여행인데 누가는 드로아에서부터 출발해요. 바울과 실라는 육로로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가지고서 타우르스 산과 길리기아 문을 지나가지고 들어왔다 그랬어요. 그래 가지고 성신이 그들을 인도해서 나가는데 이 바울이 갈라디아 땅에서 어디로 갈려고 했느냐면 서쪽에 있는 로마의 도(道), 프라빈스(province), 아시안 프라빈스(Asian province)라고 여기에 아시아(도)라는 말은 로마의 도의 이름이 올시다. 이쪽으로 갈라디아가 있고 하는데, 여러 도의 이름이 있는데 가장 서쪽으로 붙어서 에게해에 접해 있는 도, 그 수부가 에베소인데, 그것이 아시아도인데, 이 아시아도 생각건대 에베소를 향하여 갈려고 했던 것 같은데 성신이 아시아(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막으셨다 그랬어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막으셨는가를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으나 어찌하든지 나중에 바울 선생은 누가하고 이야기를 할 때 성신께서 가기를 막으셨다, 성신께서 막으신 일이 아니라면 그후에 발생한 여러가지 일에 일치성이 없지 않으냐, 그후에 발생한 여러가지 일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우리가 관찰할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은 까닭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막으신 것이다 해서 막은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 막았다는 것을 확언(確言)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일거요. 왜냐하면 자기가 아시아에 가서 어떻게 하려고 했는가를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자기의 아는 대로 되지 아니한 것이오. “아, 내 안 대로 그 때 아시아에 가서 이렇게 이렇게 했더면 빌립보의 일과 이 마게도냐 일과 아가야 일과 나중에는 이 헬라 전체에 일어난 일, 이런 일들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 다른 때 해서도 꼭 되리라고 장담 못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는 아무 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오.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때에 나가서 그 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믿었어요.
복음은 내가 전하면 되는 것은 아니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적시(適時)에 쓰시고 적시에 건져서 원하시는 그 시간에 거기 거룩한 교회를 형성하고 그 나라를 세워 나가시는 거요. 이러한 것을 확연히 믿는 그 신학을 가진 바울로서는 자기가 아시아에서 지체하고 방황하는 일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이렇게 이런 양식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에 과연 그것을 막아주셨고, 막아 주셨기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런 큰 일을 하게 되었다고 이른 거요. 이런 까닭에 아시아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때의 형편 때문에 못들어 갔다고 하더라도 훗날 회고할 때는 그 형편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부터 성신님의 역사라 하는 것을 믿었던거요.
혹 사가(史家)들은 생각하기를 바울이 가지고 있는 큰 병이 있어요. 바울에게는 안질도 있었고 또한 고질(痼疾)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그는 고린도에서 자주 말하기를 사탄의 사자라고, 자기는 자기의 몸을 찌르는 가시를 육체에 가졌다. 그래서 육체상 단단한 고통이 하나 있던 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그것이 뭔지 잘 모르나 바울은 분명히 눈병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눈이 잘 안보여 가지고서 편지할 때도 디모데에게 거의 다 대필(代筆)하고 자기가 인사는 큰 글자로 써서 인사를 하고 그랬지요. 그러나 뭣이 되었던지 바울에게 혹시 그 때 어떤, 그냥 전체에 몸에 병, 질병이 생겨서 전도할 수 없는 처지가 있어가지고 산간 고지대인 갈라디아 땅에서 그냥 쉴 수 없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오. 그래서 아시아를 가서 일을 할려고 하던 것을 못하고...
그러면 병이 나으면 아시아로 들어 갈려고 했을 터인데 병상에서 그는 묵상하고 생각하는 도중에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안(案)를 좀 고쳐보자 생각하고 그 둘째 안이라는 것이 그대로 아시아의 북쪽을 그냥 통과를 해가지고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흑해 연안에 있는 비두니아 쪽으로 올라 갈려고 했어요. 비두니아로 자꾸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갑니까? 아마 알메니아로 올라 가겠지요. 그런데 비두니아로 올라 갈려고 하는 것을 예수의 신이 또한 허락지 아니 하셨다, 막았단 말씀이오. 그때 또 무슨 사건이 생겼는지 모르나 막았어요. 바울에게는 또 직접적인 계시가 있던 까닭에 혹은 바울 선생에게 밤에라도 낮에라도 어느 시간에 주의 성신이 나타나서 그리로 가지마라, 이것이 내 뜻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었고 선생은 그것을 혼동 없이, 착오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 까닭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도리로 확신하고 그걸 통해서 드로아로 갔을런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은 재료가 없는 이상 만들어 낼 필요가 없는 거요. 그가 형편이 그렇게 됐든지 혹은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서 던지 좌우간 아시아도와 비두니아로 가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이것은 후에 수료(?)할 때 “하나님의 성신이 혹은 예수님의 영이 막아서 우리는 못갔다, 가지 말라고 했다. 즉 예수님의 신이 그리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는 것으로 확실히 인정하는 말이오.
그래서 여기 드로아에 왔는데 여기 드로아에 와 가지고 누가가 여행에 가담을 했습니다. 여기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것이오. 이 환상을 바울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러니까 이건 여행하던 첫해의 환상인 것이오. 아직 어디 멀리 간 때가 아닌 까닭에 주후 50년경 일일 것이오. 그 환상에 마게도니아 사람의 상이 나타나 가지고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구하라.” “바울이 이상을 본 후에 우리, 즉 누가를 포함한 일행은 곧 마게도니아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서 재료가 무엇이 되었든지, 재료가 자연 현상이든지 특이한 환경이든지 우리의 시각을 통해서나 우리의 촉각이나 우리의 감각 기능을 통해서 무엇이 되서 왔든지간에 온 거요. 그것은 항상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의 성신의 뜻을 알고자 하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걸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덮어놓고 “아, 이건 그렇습니다” 하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말이오.
왜냐하면 가상(假想), 헛된 상도 많은거요. 이 사람들이 환상을 봤으니까 우리도 환상만 보면 하나님의 환시다 하고 생각했다가는 큰 야단 날 수가 있어요. 이 사람들은 다 환상을 보되 환상에서 방황하지 않을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풍부하고 그리고 경험도 풍부하고 또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까운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아직 시대가 계시 시대요. 계시의 시대인 까닭에 특이한 계시의 내용이라는 것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많이 있지마는 계시 시대가 지난 이후부터 사람은 함부로 환상을 본다든지 묵시 받았다든지 계시 받았다든지 이렇게 해서 성경적인 권위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지침으로서의 권위 있는 소리를 다시 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이오. 이것을 오해하고서 자기도 같은 레벨(level)에서 환상을 받는 것같이 마치 바울이 환상을 보고 베드로가 환상을 봤으니 나도 보니까 묵시를 받았다, 그 무슨 소용이 없는 이야기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계시가, 특별계시가 완성되기 위하여 자꾸 내리는 시대의 사람인 까닭에 그들을 도구로 잡아서 특별계시를 자꾸 내리시는 것이지 마는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기에 특별한 계시의 도구라고 자만하고 있습니까? 마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과 같은 동렬에 있는 사람과 같이 생각을 해야합니까? 겸손하게 생각을 해야 하는 거요. 우리에게 있어서 함부로 계시를 받을려고 않는 것과 또 감각적으로 오는 것이 우리의 가지고 있는 연약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 될 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바울 선생에게도 이 마게도냐의 환상은 환상 그 자체를 계시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해석했단 말이오. 해석할 만큼 마음에 준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인정했다고 했어요. 이것이 부르신 것이다. 그런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자면 그 의미를 해석한 거요. 그래서 이런 우리를 인정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해요. 어떻게 바울은 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마게도니아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 이 기록에서 그리고 바울 선생이라는 그 인물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찾을 수 밖에 없어요.
이미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오늘은 이만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이여.
사랑하시는 주님이 저희에게 크신 사랑으로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빛을 비추심이라는 큰 사실의 은혜가 있게 하시고 저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말씀에 의하여서 그 가르치심을 받아 가지고 당연히 우리들 자신의 양식이 되어서 건전하고 충일한 인격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어 가지고 거기에 의하여 저희의 길을 열어 주시는 대로, 눈 앞의 문제를 제출해 주시는 대로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고 또한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을 저희가 믿사옵고 이와같이 모든 것을 주장하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저희들 모두가 주의 거룩하신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도리를 바로 배우고저 이제 주의 말씀에 의하여 상고하고 있사오니 성신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거룩한 도리 안에서 건강하게 서서 살게 하시고 기괴한 일을 하는 일이 없게 하시며 건전하고 건실한 인격자로서의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주여, 앞으로의 시간에 더욱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 오묘한 도리를 바로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2.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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