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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역사 3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7:10

성신의 역사 3

 

김홍전 목사

 

제3강 베드로후서 3장 8-18절

 

오늘은 지난 주일 아침에 계속해서 성신께서 우리들 안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서 또한 역사하시는 도리에 대하여 다시 상고하겠습니다. 성신님의 역사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성삼위의 그 각각 우리가 알만하게 특성적인 그 역사의 어떤 성격적인 것, 분명한 것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올시다. 신약에 와서는 구약에서보다 훨씬 성삼위의 그 거룩하신 역사나 그 양상에 대해서 밝히 알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는데 각각 그 경영하시는 내용에 있어서 그런 것으로 우리가 곧 그 사실을 믿고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오.

예를들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할 때에 주로 예수님의 하신 일의 특색이란 구속이라는 사실이올시다. 구속이라는 모든 은혜의 사실을 그는 다 준비해 놓으셨고 그리고 그 일에 필요한 하나님의 법에 의해 필요한 일들을 완성하신 것을 보이십니다. 성부의 하시는 일이라 할 때에 크신 작정하에서 창조의 일을 현저하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올시다. 그러면 성신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이냐 할 때는 무엇보다도 우리 개인 개인이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령한 몸을 거룩하게 성화해 나가는 일, 그러면 아버지와 아드님이 이미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고, 비치하시고, 이루어 놓으신 여러 은혜들을 우리가 받아서 실제로 그 은혜 가운데 우리와 관계 맺어질 수 있도록 하시는 역사, 그러니까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은 곧 성신님의 역사이시고 성신님의 하시는 일이 올시다.

성신님께서는 물론 그 독특한 그 성신의 한 인격을, 품위(品位)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오. 하나의 퍼어슨(person), 영어로 말할 때 한 person, 한 인물(人物)이라, 한 인격(人格)이라, 그러한 모든 요소를 구비해서 포함하고 있어요. 마치 아버지께서 한 person, 인물 혹은 인격으로서, 아드님이 하나의 인격으로서, 성신님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그 특색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예요. 성삼위의 도리는 물론 대단히 오묘한 도리이고 깊고 깊어서 사람들이 다 말로 이야기 할 수도 없고 우리가 다 잘 깨달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지만 거기 분명히 신비한 사실이 있다는 것과 그 성삼위가 세 신의 일이 아니고 한 하나님의 세 개의 인격적인 활동이고 그것은 각각 호칭을 할 때에도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아드님 되시는 하나님, 성신님 되시는 하나님 이러한 말로 부를 수 있게 됐고 또 신학상, 개혁 신학상 늘 그렇게 불러오는 것이 올시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신께 대해서도 첫째 생각할 것은 늘 한 세력이든지 한 능력이든지 현상이든지 어떤 감화든지 그런 것이 제일 중요히 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엄연하신 존재라는 점이 아드님이나 아버님이나 그 인격적 존재의 현저한 것과 같이 현저한 것이 올시다.

이래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령이라는 말이 어느새 신약에서만, 이것은 구약에서도 반드시 다 그런 것도 아니올시다마는, 신약에서만 알지 못하던 새에 성신으로 부르던 말이 성령으로 모두 고쳐져서 모두 그렇게 하는데, 그야 어떤 말을 쓰던지 그것은 표시니까 그 말을 쓰는 것이 무방하지만, 우리는 전통적으로 성신이란 말을 써 온 이유는 인격신을 표시할 때는 영이라는 육에 대립되는 상대어(相對語)보다는 다같이 인격이면서도 사람이라든지 천사와는 대립되는 신이라는 말로 우리가 표시하는 것이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신이란 말을 쓰던 예(例)올시다. 그렇기 까닭에 신이라 하는 말을, 성신이라 하는 말을 그냥 쓰는데 이 말에 의해서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성령이란 말을 쓰고 싶은 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그냥 쓰시라는 말이오.

그러나 성령이나 성신이나 어떠한 말로 표시했든지 그 말이 대표하는 그 성격의 첫째 앞서는 것은 그의 인격이지 그의 감화나 또한 그의 능력, 세력의 작용이라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신을 의지한다든지 성신님의 인도를 받는다든지 가르침을 받는다든지 심지어 성신을 받았다라는 말을 쓸 때라도 그 말이 될 수 있는대로 인격신이신 하나님의 그 삼위(三位)의 일위(一位)가 되시는 성신의 그 인격적인 존재 사실에 모호하거나 배치되는 그런 용법을 하지 않는 것이 늘 중요한 것이 올시다.

함부로 ‘성신 받았다’하는 말을 하는데 어떤 인격신을 받았다 하는 말로 만일 치중(置重)하고 생각할 때는 주의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어요. 성신을 받았다라는 말이 비 성경적이란 말은 아니올시다마는 그런데 그런 독특한 용법을 쓸 때 그 독특한 경우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런 말로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강조하느라고 쓰는 그것을 그냥 보편화하고 일반화해서 성신을 받았다, 성신을 받았다 하면 다른 것보다도 무슨 이상한 힘을 받았다든지 어떤 신통력을 얻었다든지 하는 정도의 의미로 자꾸 표현하기가 쉬운 것이오. 그런 말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오. 성신께서 내 안에 와 계신다는 말로써 그런 뜻으로 성신 받았다 하려면 성신님은 들어왔다 나갔다 하시는 법이 없다고 우리가 지난 번에 배웠어요. 그리고 믿는 자에게 그 은혜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보혜사(保惠師)로서 한 번 중생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면서 그 시간에 와 계시면 그 다음 부터는 영구히 우리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런 후에도 새벽기도할 때도 성신 받게 하소서 주여, 성신이여 강림하사 하고서는 마치 성신 받지 못한 것과 같이, 이것이 과거에 우리 한국교회에 있던 많은 폐단이올시다. 우리교회, 한국교회에 원로가 되실 만한 훌륭한 목사님들도 이 사람이 참석한 새벽기도회, 소년시절에 참석한 새벽기도회는 주로 이 성신 받으라 하는 것을 강조했어요. 그러니까 그 때에는 멋모르고 그렇게 기도를 했지요. ‘나도 성신 줍소서.’ 그래도 아무 감흥이 없어서 ‘아마 나한테는 성신님이 별로 관계가 없는 모양이다’하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에게 한 번 주신 성신이 또 새롭게 무슨 이상한 현상을 일으켜야만 하겠다 생각해 가지고서 계시면 계시다고 조금 소리좀 내 주십시오 하는 식으로 성신받았다고 소리를 하고 ‘주십시오’ 하는 소리를 쓴다면 그것도 참 아주 그 별로 대단히 만홀히, 그 예(禮)에서 많이 벗어나는 일이예요.

신뢰한다면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을 각 개인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계신 성신님께 대해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나를 무엇하려고 나같은 사람의 속에 와서 계시는가? 이것을 우리가 더 주의해서 깨닫고 거기에 의해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아직 계시지 않는 양으로 와 계십소서 한다든지 성신 받아야겠습니다, 성신 줍소서 이렇게 자꾸하는 것이 뜻을, 그 말 뜻을 성경에서 성신받는다는 말 뜻을 모르고 그것을 아무렇게라도 원용(湲用)해서 쓰는 것은 참말로 혼돈을 일으키는 장본이올시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성신님의 그 하시는 일에 대하여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구원, 인류의 구원 혹은 결국 모든 것의 구원의 큰 사실의 공로를 다 쌓아놓으셔서 그 공적과 그 공효(功效)라는 것이 거기에 분명히 있게 해놓으셨으면 성신님의 큰 일은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거요.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그 추호도 흠이 없는 절대의 의를 완전히 다 이루셔서 충당(充當)하셔서 구원의 모든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공효로 쌓아 놓으셨으면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올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일을 하시고 계시는데 그는 그 생명을 버린 대상들이 있어요. 누구를 위해 버렸는가? 오늘날 여기 앉은 우리들을 위해 다 버리신 것이오. 그러나 여기 앉은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로 흘러 가면서 지금까지 내려온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 생명을 버리신 것이지만 동시에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버리신 모든 자에게 저들을 위해서 쌓아 놓으신 이 공효의 축복을 그들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지금도 하늘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거란 말씀이오. 그런데 그와 같은 공효를 주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그 일을 하실 때는 거기에 분명히 당신이 그 거룩한 법칙을 따라 쓰시는 법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성신님, 즉 다른 보혜사이신 그분이 와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보존하시도록 하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성신님의 그 사역을 통해서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의 안에서 우리에게 일을 계속적으로 하시고 계신 것이오.

성신님은 물론 그리스도의 그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이것 만이 하시는 일의 전부는 아닌 것이 올시다. 즉 구원의 사실에 관여한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내려 주시고 받게 하시고 보존하게 하시고 발전하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것만이 성신님이 하시는 일의 전부는 아니예요. 하나님의 성삼위의 일위로서 창조에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신이 관여를 하셨고 또 그가 이 세상에 있는 여러가지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현상에 있어서 그 속에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동안에 그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과 그런 생애를 잘, 무량(無量)히 보낼 수 있도록 늘 이 천지에 있는 모든 것들에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베풀어서 보존하고 그것이 타락해서, 악화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재촉을 빨리하지 않도록 어떠한 하나님의 크신 법칙과 경륜하에서 이를 유지하고 이것을 흑암 가운데서 파괴하고 파멸해 버리지 않도록 하시는 이 큰 일이라는 것, 이것은 성신님의 일반적인 사역이라는 거요.

이런 일반적인 성신님의 역사가 있으므로 사람이 세계에 있어서 살면서 사람끼리에 악마와 같이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고 죽어 버리고 그냥 소실되고 하나님의 진노로 불타버리고 하는 일이 급격하게 다 쏟아지도록 하지 않고 악한 사람이 비록 있고 불의가 거기에 창궐(猖獗)한 것 같을지라도 유지하는 것이오.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대로 만사를 하나님의 법에 조금치도 어김이 없이 그 법칙에 의해서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막을 것을 막으셔요. 예를들면 적그리스도가 지금 나타나고 싶지마는 그것이 제 때에만 나타나게 하려고 막으시는 일도 성신님의 일반적인 사역 가운데 하나이고 마귀가 준동(蠢動)을, 요동을 해 가지고 사람들을 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잡아서 휩쓸고 싶지만 못하게 막아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성신님의 일인데 이것이 이 세상과 이 일반적인 세계에서 베푸는 바 하나님의 보통의 은혜, 혹은 일반의 은혜, 혹은 커먼 그레이스(common grace)라는 것, 그것을 가지시고 내리시는 거예요. 이러한 은혜가 아니면 이 세상이라는 것이 도저히 그대로 존재도 할 수가 없는 것이오. 성신님의 역사는 그런고로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역사, 일반 역사, 일반의 은혜, 즉 보통의 커먼 그레이스에 의한 일반적인 역사, 소위 제너널 오퍼레이션(general operation)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하시는 것이오.

그러나 이런 성신님의 일반적인 사역, 역사를 하시는 것은 그것 그대로만 무제한 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최종이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현저한 사실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의 대상이 되는 자들의 복리와 보존과 또 일을 달성하는 생활을 위해서 그 주위에서 늘 역사하시는 까닭에 이 세상에 사회가 질서가 있고 사람들에게 그래도 정의 관념이 있어서 불의에 대해서 대중이 분노를 하고 또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고 불쌍한 이를 보면 동정하는 일들이 있고 이런 모든 일들이 그것대로 한 사회를 형성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복리와 또한 향상과 결실을 돕기 위해서 선용되고 있는 것을 늘 주의해야 할 거요.

그런 것을 각성한 사람 같으면 그 사회에 자유가 있을 때 그 사회에 복리를 위한 노력이 있고 사람들의 정의관이 아직도 있어서 그것에 차탄(嗟嘆:탄식하고 한탄함)을 하고 대부분이 지지를 할 때는 역시 성신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의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자꾸 더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큰 사회가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맹목한 가운데 그냥 밀고 나갈 때 하나님의 그 거룩한 법칙과 우리로 다 측량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한 큰 사회라도 폐쇄해 버리고 더 살기 어렵고 더 의를 행하기 어렵고 더 하나님을 찬송하기 어려운 사회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오.

여러분은 이 공산주의 국가나 적색 제국주의의 체제하에서 무서운 그 발굽아래서 꽉 눌려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만큼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사는가 생각해 보세요. 우리만큼 자유롭게 성신님의 특별한 은혜를 추구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가? 자유롭게 성경을 볼 수 있는가? 자유롭게 성경을 보고 거기에 대해서 그 뜻을 묵상하고 생활을 해 보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세계의 큰 부분에서 벌써 이와같은 무서운 검은 구름 혹은 도도한 탁류가 흐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깨우치지 못하고 한 사회가 악으로만 자꾸 치닫고 그리고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람들이 타락하고 불의한 데로만 자꾸 가고 이 세상 사람하고 똑같이 공리적이고 자기 종교적 욕심만 채우려하고 나아가는 동안에는 언제 하나님의 진노에 저촉할지 알 수 없는 거요. 성신님께서 근심하시고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 ‘회개하고 바로 서라’ 할 때에 회개하고 바로 서야 하는 것이오. 그런 것이 하나만이라도, 우리 조그만 교회 하나라도 정신을 차려서 서려고 하는 그런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생활 태도가 있어야 할거요.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10명이 없을 때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을 여러분은 보셨어요. 의인 50명 때문에, 의인 45인 때문에, 40명 때문에, 심지어 나중에 10명 때문에, 10명만 있다면 10명 때문에라도 내가 그것을 아끼마. 이것이 중요한 것이오. 사회라는 것은 거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오. 예수님이 오시는 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들려서 공중으로 올라가 버리면 더 아낄것이 없는 까닭에 대 환난으로, 물론 그 환난은 큰, 그전부터 있어 오지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오늘 읽은 말씀과 같이 하늘이 뜨거운 불에 다 녹아지고 체질이 불에 녹아질 것이라, 녹아질 것이라 그랬어요. 이런 무서운 사실이 발생할 것을 알아야 할거요.

그렇기 까닭에 한 사회에 의로운 사람들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은 하나님의 그 거룩한 백성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존재하는 거요.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고 따라서 그 생활이 항상 경건하고 단정해야지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한없이 종교를 자기 공리적인 목적을 위해 추구하고 나아가는 것 가지고는 안된다 말이오. 이게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신님의 그 거룩한 사회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역사라는 것을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오.

이 그리스도의 지금 계속하시는 일이란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신님의 우리에게서의 적극적인 역사,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전체위에서 항상 역사하셔서 보존하시고 또한 지키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성화하시고 이것을 향상시키시고 이것에 결실을 하도록 힘 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주시는 그런 역사가 있다고 그랬어요. 그런 역사는 성신님이 단독으로 하신다고 생각지 마시고 그 일과 그리스도의 일과는 하나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는 것이 아니오. 여러분은 요한복음 16장 13-14절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거기 볼 것 같으면 주께서 성신님이, 장차 보혜사가 오셔서 진리,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희를 인도할 것인데 그가 장래 일을 말할 것이고 그가 내 일을 가지고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고 자의(自意)로 하시지 않고 내 일을, 여기 성신님과 그리스도의 일은 혼연히 하나인 것을 그리고 성신께서 그렇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오.

이 성신에 관한 도리를 구약에서부터 우리가 공부해 나와야 하겠지마는 구약에서 공부할 때 이것은 우리가 이 짧은 기간 안에 그렇게 상세하게 다 논하기가 어렵지만 다만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한가지 구약의 성신에 관한 것을 우리가 이야기 할 때에 하나님의 신이라, 여기 성령이라 쓰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라 하는 말로 표현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반드시 다 어떤 인격자를 표시하는 말은 아닌 것이오. 그러나 인격자 아닌 다만 세력이나 감화나 그것만을 표현한 말도 아닌 것이오. 또 그 속에 어떤 인격자란 것을 분명히 나타낸 그 인격인 요소가 들어 있을지라도, 이 하나님의 신이란 그 말을 쓴, 그렇지만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제 삼위인 성신의 역사라고 단언하기가 어려운 데가 있어요. 그런고로 이와같은 용어 ‘하나님의 신’이란 용어가 혹시는 표상적으로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기식을 표시하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하나님 당신을, 하나님의 신이 어떻게 어떻게 하셨다 하는 말로, 그 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 하는 말과 꼭 같은 의미로서 사용한 것이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제일 이 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사상은 생명의 힘을 특별히 표시하려 할 때에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므로 이 피조물 가운데 그가 생명체로서 존재하게 하려는 것, 그런 때에 하나님의 신이란 말과 결부되어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기는 그런 정도로 하고 오늘 날 우리가 현실적으로 필요한 공부는, 지금 성신님은 어떻게 역사 하시느냐? 가령 일반적인 은혜의 사실에서 어떻게 역사 하시느냐?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가령 진리의 성신 그분이 오셔서,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죄와 의와 혹은 심판으로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도 이 세상에 대한 역사의 한가지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제일 중요히 관심해야 할 것은 지금 일반적인 역사 위에다가 우리 안에서의 특별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오. 이것이 일반역사와 대립해서 신학상 특별한 역사라, 더 스페셜 오퍼레이션스(the special operations), 이 특별한 역사라는 말로 쓰는데, 그것은 마치 일반역사가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 위에 역사하는 그 사역을 의미하는 것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그 재창조된 새로운 생명체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또 그들 위에서 역사하는 그것이 특별한 역사올시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신의 일반의 역사의 은혜 가운데 다른 어떤 사람에게 못지않게, 늘 받고 살지만 그 위에다가 가(加)해서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의 그 대상으로, 또 그 특별한 역사의 은혜 아래 늘 살고 있는 것이 올시다.

그러면 성신님의 여러가지 역사를 그 한 사람의 내부에서 하시는 그 역사를 그 사람은 어떻게 바르게 판별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요. 먼저 그러면 성신님의 신자에게서 하시는 특별한 역사를 보면 중생도 성신님의 역사로 “중생의 씻음과 성신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한 것을 우리가 디도서 3장 5절로 7절까지에서 지난번 봤어요. 그 다음에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지난번에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에 특별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신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런고로 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겠다”하는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할 때 무엇보다도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사 우리의 모든, 우리 몸의 움직임,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성전의 존재로서 하나님을 표시하고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한다 말이오.

어제 저녁에 여기 우리 합창단들, 찬양대를 모아서 이야기할 때도 잠깐 했지마는 우리가 찬미하는 제사를 드린다는 것,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면 달리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못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그 미(美)를, 그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것과 아름다운 것들을 드러내는 거요. 그런고로 찬송을 교회가 예배의 중요한 프로그램(program)으로서 드리게 돼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배하는 정신 자체가 찬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니까 그래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앞에 절하는 것이니까 찬송을 하게 되는데 그런 때에 그냥 다 알아버린 찬송이라 벌로, 반사적으로 그냥 그대로 하고 그리고 마음은 딴 곳으로 움직이고 그렇지 않고 그 말과 그 곡조에 마음을 집중해가지고 또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이 찬송을 올리는 제사를,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고 할 때에 달리 우리가 어떻게 안할지라도 그것으로써도 우리 몸으로 우리 육체의 기능의 작용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영광을 위한 것이 되는 거요. 물론 선행하는 것도 그렇게 되는 것이고 몸으로 산 제사, 교회의 일을 위해 자기 시간을 내고 몸을 내서 수고를 하면 그것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한 일체(一體)가 되는 거요. 이런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기쁘시게 흠향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란 말이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몸으로써 친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성신님께서 내주하시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안해야 할 것인가를 감화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오. 그 몸이 성신의 전이라. 하나님의 성전의 전에 하나님의 성신이 거하신다 할 때에 누구냐 할 것이면 삼위되시는 하나님, 즉 성신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 말씀이오. 우리를 또 인(印)치셨다 해서, 거룩한 교회의 형상에 있어서 인치심을 받았다 확실한 확증은 해 주셨다 하는 것, 세례를 주셨다 하는 것.......

성신의 세례라는 것은 누구 말마따나 어떤 사람이 성신 충만을 곧 세례라고 이렇게 혼동해 놓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말할 때 그 사람이 충만한 사람들은 아니오. 그러나 그 사람들 보고 말할 때는 내가 너희에게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한다. 너희는 감당 못한다. 이렇게 책망을 하면서도 그러면서 우리는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느니라 한 것이지, 충만하다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올시다... 충만하다는 것은 에배소서 5장 18절에 “성신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 볼 것 같으면 성신께서 그와같이 충만히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의사로서 그것을 저해를 하지 않고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거요.

주의할 것은 이런 모든 역사는 우리 의식을 박탈해 버리고 당신이 들어와서 입신(入神)한 사람같이 딴 소리를 한다든지 딴 생각을 갑자기 가진다든지 내가 생각지 못한 기상천외한 생각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유기적인 역사, 올개닉 오퍼레이션(organic operation)이란 것, 이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내 지적인 작용, 정의적인 작용에 함께 작용해 가지고 결국 내가 노력하고 내가 찾고 내가 논리하고 내가 결론을 얻고 내가 행동하고 내가 밀고 나가는 거요. 이렇게 해서 외인이 볼 때는 신통력이 아닌 아주 노말(normal, 일상적인)하고 아주 정상적이고 아주 똑똑한 자기가 움직이고 나가는 거요. 그 사람이 움직이는 거요. 그런데 이것을 마치 사람의 의식을 박탈해 버리고 신통력이 들어와서 야단 내는 것같이 하고 무슨 입신한 것처럼 말하는... 이것이 성신 충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부정당한 생각이오.

성신충만이라는 것이 원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위치인 것이오. 어떤 특수한 종교 귀족에게만 임하는 독특한 사건이 아닌 것이오. 그러나 성신께서 당신의 의사대로 어떤 사람을 갑자기 어떤 특별한 능력을 주어서 그 어떤, 소위 요즈음 말하는 그 카리스마(kharisma)라는 것을 주어서 일을 하시려고 할 때에 보통사람 이상의 어떤 독특한 현상이 들어날 수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충만이라 할 때에 먼저 카리스마틱한 것이 튀쳐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품성이 그리스도적으로 서는 것이오. 그의 도덕적인 성격, 그의 마음 쓰임이 그의 심정가지는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먼저 화(化)하는 거요. 이 말은 그가 무식하던 사람이 유식해진다라든지 모르는 것을 다 무불통지(無不通知)한다든지 그렇게 금방 변해서 뭐 새사람이 되어서 이상하게 된다는 말도 아니올시다. 어디까지든지 그러한 그릇, 그릇 안에서 일이 되는 거요.

충만이란 말도 그릇에다 물을 부어 가지고 가득히 부었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 우리 그릇이 작으면 작은대로 가득히 붓지 작은 그릇이 갑자기 그냥 배나 3배나 4배나 그러한 것을 용인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견이나 지혜의 장성이나 다 분량이 있어서 충만하면 그것이 성신님의 주장하시는 바 되어서 성신님의 감화 가운데서 정상적으로 자꾸 자라가는 것을 의미하지 갑자기 그 사람이 5살 먹은 사람이 한 25세나 된 청년 같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 아니올시다. 충만한 까닭에 그는 자꾸 정상적으로 먹고 크고 자라나는 거요. 그런고로 그 사람이 장성의 정도가 어디가 있는가에 따라서 그가 어린아이이면 어린아이짓도 하는 것이고 연약하면 연약한 만큼 밖에 감당 못하는 것이오. 이것을 충만하다 해 가지고 신통력이 붙고 초인이 된 것같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이오.

이런 사람들에게서 성신님이 하시는 역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르치는 역사를 해요. 그 다음에는 인도하신다. 손을 잡고 끌고 가는 역사를 하시는 거요. 그 다음에는 우리 신과 더불어 우리 속에 있는 영을 감화하셔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확증해 주는 거요.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는 거요. 그 다음에는 우리 안에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 신으로 더불어서 역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성신님이 간구하는 것은 유기적인 역사인 까닭에 우리가 그것을 아는 거요. 마음 가운데 우리가 참된 기도라는 것은 성신의 간구와 더불어 할 때 참으로 능력있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방도로서의 충분한 효과를 내는 기도를 하는 것이오. 그 다음에는 우리 안에 충만하신 그는 우리에게 찬송을 하게 하고 감사를 하게 하는 거요. “성신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라고 그랬죠.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고 또한 주께 감사하도록” 했어요. 이와 같은 일이 성신님의 우리에게 있어서 역사의 몇가지, 성경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몇가지 올시다.

이제 오늘은 시간이 많이 갔을지라도 한가지 우리가 주의해서 배웁시다. 이것은 첫째 우리에게 큰 문제라는 것은 무엇이냐 할 때에 성신의 여러가지 우리 안에 있어서의 역사 그것 자체들을 그 사람은 어떻게 판별하느냐? 예를들면 나에게 성신님이 가르치신다 하면 내 생각인가 성신님의 생각인가? 이것을 내가 어떻게 판단해서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요. 그것 아마 참으로 성신님을 꼭 따라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너희는 성신을 좇아 행하라” 했으니 성신을 좇아가고는 싶은데 성신님의 가시는 자취를 내가 보아야 하지 않은가? 성신이 ‘이리로 가자 저리로 가자’하는 것을 내가 알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내 마음 가운데 우연히 ‘아 이리로 가야겠다. 저리로 가야겠다. 이 버스는 타야겠다. 이 버스는 안타야 겠다’ 그것이 성신님의 인도라고 생각한다면 아 내가 혼자 망상을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러한 것들이 흔히 발생하는 것들이오. 이러한 것들이 성신의 도리에 대해 깊이 생각치 못하면 필연 그러한 이상한 생각으로 유도되기가 쉬워요. 그래 이제 어떻게 그 사람이 판별하느냐? 가령 성신님의 가르침이나 인도를 다 아는 그 사람이 어떻게 바로 그것이 성신님의 가르침이라고 확인하고 그에 순종하겠는가 하는 문제올시다.

성신이 한 사람 안에서 하시는 역사, 성신의 한 사람 안에서의 그 역사는 아까 말씀한 것은 첫째 내 안에 계시다고 그랬어요.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거요. 내 안에 계신 것을 지금 당장에 내가 성신이 그 안에서 어떤 이상한 작용을 하심으로 가만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 요것, 성신이 이 안에서, 요렇게 역사하시는 구나” 그렇게 성신을 해석해야 하고, 성신님의 내주라는 것은 그러한 심리현상이겠는가? 그것을 우리가 주의해야 해요. 내주(內住)라, 내 안에 성신님이 거하시는 것의 여부라는 것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거요. 첫째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이것이 있는 사실인 거요. 그런고로 새로운 생명은 분명히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 선언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사는 사람이지 그것이 과연 그런가 하고 의심하고 그것을 퇴(堆:물리거나 물리침)하는 법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성신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하고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바울선생이 고린도 교회에 두번이나 3장이나 6장에 그 말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었어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신의 전인줄 모르느냐?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이야기 했어요. 이런 말이 오늘 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첫째, 새로 창조를 받은 이 새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약속이나 명확한 선언에 대해서 의심을 붙이지 않고 믿는 것이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가지는 신앙인거요. 구원의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믿고 나가는 것이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하실 때에 부활에 대해서 이의를 붙이지 않고 다른 괴상한 해석을 붙여가지고서 그것을 무슨 상징화하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딱 믿는 거요. 이러한 것을 확인하고 나가는데는 물론 테두리가 있어요. 모든 성경의 하는 말이 명확하게 약속이라든지 선언은 아니예요. 어떤 것은 표상적인 표현을 한 것이 있어요.

이렇기 까닭에 이제 앞으로 성신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것을 우리가 공부해 갈 때 배우겠지마는 교회의 권위와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흘러 내려와서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신 교리의 큰 테두리 안에서 늘 내가 믿는 것이지 무엇이든지 성경이 이랬으면 그 말이 어디 한 군데 간단히 난 것도 그렇다고 믿는다면 성경 자체가 원래 그런 의도로 쓰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어요. 서로 얼른 보기에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선언들이 있는 거요. 한편은 ‘한다’하고 한편은 ‘않는다’하고...‘해라’ 해놓고 ‘하지 말라’ 하는 식으로 나왔단 말이예요. 구약에 여러가지의 제사의 법 같은 것,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이런 것들을 다 드려라 하는 것이 구약에서, 오경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시편에 있어서는 40장에 있어서는 “주께서 번제와 소제를 기뻐하지 않는다 기뻐하셨더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고... 시편에서 여기서 저기서 우리가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또 주께서 내 귀를 그 40장에, 내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하면서 이야기 해요. 그러면 주께서는 하라고 해 놓고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가져오지 말아라. 여러분 배웠죠. 이사야 1장에서 댓바람에 다시는 그런 것 가져오지 말라고. 아니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우리가 좋든지 나쁘든지 기왕 부족은 있고 죄는 있는 몸이지만 이것 갖다 드리겠습니다. 이것 하나님 명령하신 것 아닙니까 하고 이론(異論)할 것이오. 그러나 주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 까닭에 항상 성경의 말씀은 건실한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그것을 믿는 것이, 받는 것이 안전한 것이지 건실한 교리의 뒷바침이 없이, 테두리가 없이 그냥 자기가 이것은 성경에 씌여 있는 말이다 하고서 그대로 믿고, 곧이 곧대로 믿고 그놈 대로만 나가야 한다 하고 나갈 때 자체의 모순 가운데 빠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믿되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적인 보증으로 마땅히 사람이 그대로 믿고 받아야 할 도리라 하고 확인해 놓은 것들은 성신님께서 그런 거룩한 말씀의 해명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인 까닭에 그것이 많은 이설(異說)이 있을지라도 쭈그러짐이 없이, 흠(欠)이 없이 그대로 계계승승(繼繼承承) 전승해 올 수 있도록 만드신 까닭에 그것에 의해서 믿는 것이라 말이오.

단순히 내가 독립해서 성경 하나만 들면 믿을 것 믿고 안 믿을 것 안 믿고, 그렇게 못되었어요. 왜? 나 한사람의 기억이나 판단력이라는 것은 아주 국한되어 있는거요.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이 역사를 통해서 계승해서 낳고 또 낳고, 낳고 또 나서 계승해서 전해주고 연구하고 깨닫고 그리고 이야기한, 말하자면 신약의 선지자들이 그 전해준 말씀이라는 것은 그것은 고귀한 것이오. 이 고귀한 유산을 가지고 거기에 의해서 우리는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오. 이것을 무시하고 보편의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의 내용을 이번에는 볼 수 있는 교회 안에서 해명하고, 해명한 바를 받도록 하신 까닭에 어떤 유명한 선생이 말한바와 같이 ‘해명된 진리도 진리다’ 그렇기 까닭에 해명된 진리를 진리로 받고 나갈 것이다. 어떤 한 개인이 해석한 것이 진리라는 것이 아니라 해명되었다 하면 그것은 분명히 교회요. 확실한 도그마(dogma, 교리)로, 교회의 확실한 선언으로서 교회적인 권위를 가져야 하는 것이오.

이 교회적인 권위라 하는 것은 보편의 교회의 권위에 가장 가까와야 되는 것이고 그것은 역사적인 테스트(test), 시험을 지내서 풍우상설(風雨霜雪)에서도 끄떡 않고 그 시험을 끝내서 금과 같이 빛나는 교리들인 것이오. 이렇기 까닭에 우리 교회는 그런 교리들을 우리의 표준문서라 해 가지고 선언해 놓은 것이오. 이 태두리 안에서 받아야 한다고. 여러분 다 아시죠? 그것이 무엇인지? 그렇기 까닭에 이와같은 교회의 권위라는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지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개인의 권위, 개인의 좁은 지혜와 지식과 판단력을 제일강산(第一江山:경치가 썩 좋기로 첫째 갈만한 산수)으로 여겨서 성경만 들면 자기는 무불통지(無不通知)다. 그 뜻을 정확하게 정당하게 오도됨이 없이 파악할 줄 안다는 것은 굉장한 교만인 것이오.

이렇기 까닭에 성신의 내주,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이 거룩한 사실도 성경이 명확하게 우리에게 선포한 말이 있고 이 말에 대해서는 그 말이 표상적인 언어라든가 그것이 별다른 의미를 지닌 상징적인 사람을 오도하기 쉬운 이상한 표현법이라든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봐서도 알고 교회도 역사적으로도 증명해 내려오는 거요. 그래서 이러한 조목에 의해서 무엇보다도 성신님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첫째 믿어야하는 것이오.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한 것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한가? 사람의 그 연약하고 변하기 쉽고 취약한 이성과 판단에 의해서 실험을 했다고 하는 것을 쥐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한가 할 때에 최종적으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명확한 선언, 그리고 그것이 역사의 시련을 겪어서 금과 같이 빛나는 그것, 이것이 더 중요한 거요.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 말씀의 선언에 의해서 그 선언을 해석하고 사실을 역술(譯述)해 나가는 이것은 신학이 되고 이것은 중요한 해명의 활동이지만, 어떠한 명제 하나를 놓고, 가령 예를들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이 조목 하나를 놓고, 제목 하나를 놓고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이 입증한, 성경이 선언해 놓은 그것을 믿는 것 보다는 예수님은 누구냐 할 때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의 모든 사업이나 언어가 의미가 없으니 우선 신이라는 가정 가운데서 출발해서 생각할 때에는 신인 까닭에 영원히 죽을 수가 없고 죽는다는 것은 신으로서 적극적인 행동이 되는 까닭에, 무엇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 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다시 생명은 그에게 명확히 있다는 정상위(定裳位)로 돌아가야겠다. 그렇기 까닭에 그는 부활했다. 신이니까, 죽을 수 없으니까 살았다 그 이야기요. 이것이 칼 바르트(Karl Barth)가 이야기하는 부활에 대한 논리요.

그러면 이와같은 것이 신학이 되느냐 하면 신학이 안되는 거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논식(論式)에 의해서, 사람의 논리 형식에 의해서는 논법을 가지고 증명을 하겠다는데 결국 사람은 그런 것을 수긍할런지 몰라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선언했으니까 의심붙을 여지없이 믿는 것이다고. 이것이 신앙 태도인 것이오. 이 신앙태도 하에서 그것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내가 해석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지 자기가 그 제목을 놓고서 그 제목을 제 멋대로 논리해가지고 다행이 결론이 긍정적으로 도달했으니까 그렇다 한다면 자기를 믿는거요. 자기의 논식이라는 것을 너무 의지하는거요. 사람은 보편적으로 논리의 형식, 소위 사고의 방식이라는 것이, 형식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이 선험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만들어 내신 까닭에 둘에다 셋 보태면 다섯된다는 것을 아무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오. 다만 그 수의 이름은 둘이라고 하든지 투(two)라고 하든지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러나 이런 것들은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요. 왜 그러냐면 그것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것을 아는 재주가 없어요. 이렇기 까닭에 우리의 본성의 가지고 있는 광명이라는 것은 다 한계 안에서, 조건 안에서 움직이는 거요.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고귀한 사실들, 특별한 은혜의 사실들은 계시에 의해서 그리고 이 계시는 일반계시가 아니라 특별계시에 의해서 우리가 알도록 하신 것이오. 이 특별한 계시 하에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믿어야 할 것으로 선언하시고 그것이 교회의 대 기둥이 되고 대본(大本)이 되었을 것 같으면 그 믿는 거요.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이것은 대본의 하나인 것이오. 성신님이 안계셨다 할 것 같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이것은 전혀 별다른 종교학을 하나 만들어야 할거요. 이렇기 까닭에 무엇보다도 첫째는 성경이 우리에게 명시하신 까닭에 우리의 감성, 그렇게 느꼈든지 안느꼈든지 그것은 크게 필요없는 것이오. 내가 이 속에 성신이 계시다고 찌르르 했든지 안했든지 그것이 하나도 나에게는 도움이 안되는 것이오. 오히려 이상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이에 내주하신 성신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면 그 행하시는 여러가지 사역은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오. 지내온 다음에 나를 인도하심을 분명히 알 수 있고, 지내온 다음에 아! 나를 붙드사 바로 가르쳐 주셔서 내가 곁길로 들어가서 저 사람들과 같이 방황하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한다 하는 것을 우리는 우리 생애 가운데 때때로 생각할 수 있는 거요. 그것은 뭐냐면 맺은 열매로 봐서 그것을 아는 것이다. 나무를 아는 것이다 그랬어요. 그러면 그때는 성신님이 내주하셨다는 그 거룩한 말씀과 약속하에서 이루는 이 일들은 결국 궁극적으로 다시 돌아가서 성신님의 내주라는 것이 진리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하는 거요.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내가 감성을 가지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내가 인도함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내 마음 가운데 참 찬송을 올렸고 성신께서 기도하신 그 기도에 내가 참여했고 증거하시는 것을 받고 했으면 성신님이 내주하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믿게 되는 것이라 그거요.

이렇게 내주라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이지만 이제 우리가 구체적으로 더 알아야 할 문제들은 어떻게 하면 그 가르침을 우리가 알 수 있는가? 어떻게 받는 것인가? 어떻게 성신님의 가르침과 그렇지 아니한 것을 판별해 가면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인가? 이것도 중요한 것들이오. 우리가 이 다음 시간에 그것을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이여. 주께서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거룩한 도리를 바로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고 성신께서 저희 안에 거하셔서 역사하시는 그 여러가지 은혜롭고 사랑이 깊으신 역사를 분명히 받으면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한가지 한가지 생활의 경험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하나의 역사적인 변증으로 사랑하시는 성신님의 거룩하신 도리를 더욱 확신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을 저희가 아옵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들의 생활 행보에 있어서 항상 반성하여 성신께서 어떻게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며 어떻게 나에게 가르쳐 주시고 증거하시고 도고하시며 찬송과 감사를 일으켜 주셨는가를 늘 바르게 파악하고 깨닫고 이런 일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자기 종교적인 욕심과 소원에만 매달려 가지고 사는 일을 하지 않고 진리의 사실들을 우리의 생애와 역사를 통해서 항상 우리에게 명시하시고 깨닫도록 하실 때 그런 일을 소홀히 않고 바로 깨닫고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성신님의 거룩한 도리를, 또한 성신님의 비취심과 저희 마음을 여시사 깨닫게 하심에 의하여 바로 깨닫게 하시고 의지하여 주님의 그 가르치심에 풍부한 은혜 가운데 들게 합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2.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