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 Reviews/Korean

기도에 대하여 16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6:49

기도에 대하여 16

 

김홍전 목사

 

제16강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성격


빌립보소 3장 1-14절



산상보훈 안에 있는 기도에 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의 몇가지를 들어서 기도에 대하여 같이 공부해 나가는 중인데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 7장 7절로부터 12절에 있는 말씀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는 말씀, 그 다음에는 어떤 비유를 들어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여기에서 몇가지 기도가 가지고 있는 성격(性格)이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 했고 전체적으로 개론적(槪論的)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즉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 그 기도하는 사람의 생활이 당연한 논리적인 발전이고 현실적(現實的)인 발전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했는데 오늘은 “구하라”는 말씀 다음에 오는 “찾으라”는 말씀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저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는 것이 논리적(論理的)으로 차서적(次序的)으로 그 기도와 관련이 되어 있는 중요한 단계로 모든 기도마다 구한 다음에 찾아야 하게 된 것은 아니올시다마는 기도는 당연히 간절(懇切)히 하나님 앞에 올려서 하나님이 들으실 때에 때를 따라서 “단순히 네가 나한테 구하기만 하지말고 이제는 네가 찾으라.” 찾을 수 있게 찾아야 할 것들을 보여 주시고 또한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며 성신님으로 인도하셔서 찾아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단순히 “주십시요” 하면 간단히 “오냐, 여기 있다” 하고 주신다는 그것으로 끝나게 되어 있지 아니하고 어떤 것들은 심오(深奧)하게 “네가 그것을 구했으니 그러면 너는 그것에 대해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냐. 자, 찾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그 기도한 내용에 따라서는 간단하게 하나님이 “여기 있다”든지 “가져라”든지 그렇게 직접 대답을 하거나 조금 끌고 가다가 어떤 물질로 대답을 하거나 그러는 정도가 아니고 그 대답 자체가 바로 하셨든지 다음에 하셨든지 간에 그 기도한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찾고 나아가는 태도와 그러한 활동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우리가 구하는가에 따라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까닭에 또 사람이 그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내신 거룩한 법칙 하에서 점진적(漸進的)으로 탐사, 탐구해서 터득해야 할 것들인 까닭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찾으라” 하시고 “찾으면 네가 얻는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찾아서 그것을 얻어 나아가는 생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한다 찾는다 심지어 마지막에 문을 두드린다 하는 한 차서(次序, 한 포뮬러(公式, formula)라고 할런지 그것이 기도라는 것은 결국 어떤 방향을 취하는 것인가를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있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한 것과 같이 기도는 단회 혹은 여러번 반복 함으로 하나님께 말만 자꾸 아뢰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아뢰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거기에 대해서 그가 그 다음에 어떻게 하도록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명백하게 하나님께 무엇을 고하는 일이 되어야지 그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는 들으셨든지 아니들으셨든지 주의 사람이 듣고 그로 말미암은 종교적인 교육적인 효과를 낸다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가 말을 많이 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공로를 쌓았다는 감정을 가진다든지 그렇지 아니할 것 같으면 기도를 열심으로 하는데서 그 기도하는 말의 내용, 요구하는 내용보다는 오히려 기도 자체가 이끌고 가는 종교적인 황홀(恍惚)의 경지, 무아(無我)의 경지 혹은 종교삼매(宗敎三昧)의 경지에 도달하게 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본질적인 기도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가 할 때 분명히 기도할 때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거기 하나님이 계시사 친히 이것을 들으신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니 들으신다면 그 기도는 전무(全無)가 되고 아무 것도 얻는 것이 되는 것이고 의미가 없는 것이 되지 하나님이 아니 들으셨더라도 기도하는 데에서 마치 염불하듯이 혹은 동어(同語)를 자꾸 반복해 가지고 그로 말미암은 종교적인 황홀경이나 법열 경계(法悅境界)나 무슨 청정계(淸淨界)나 그런 것을 얻는 식으로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내 자신의 종교적 심령이 어데 도달 했다는 문제에 중요성이 있지않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도록 나에게 가까이 교통하고 계시느냐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꼭 들으셔야만 하겠다 하는 경우에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들으시느냐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기도라는 하나의 하나님과의 교통의 관계에서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것도 있어요. 예를 들면 하나님께 금방 무엇을 꼭 받아야 할 것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주시거나 안 주시거나 하는 것인데 주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왕상 18:20)가 가멜 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수백명을 앞에다 놓고서는 “어떤 것이 참 하나님인가. 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應答)하고 불로써 그 제물을 사루어 가시는 그분이 참 하나님인 것을 보자” 하고 기도를 했더니 엘리야의 기도에 대해서는 당장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제물 뿐 아니라 그 좌우에 철철 흐르고 넘치도록 있던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직답(直答)으로 하나님이 금방 무엇을 대답하사 그 기도의 응답으로서의 의미를 나타내지 아니하면 효과가 없는 일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혹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꼭 지금 금방 대답해주셔야 할 문제, 그러나 그런 것도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꼭 그렇게 해 주셔야 하겠다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 혹은 많은 경우에 우리의 생활 경험 가운데서는 그런 직답보다도 하나님께서 끌고 가시다가 대답을 하시는데 대답을 하시면 그 대답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응답 가운데는 “너는 찾아 나서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응답을 해주신 결과로 사람은 그 다음의 ‘찾는다’는 중요한 단계(段階)에 이르러서 그 다음부터는 그 길로 걷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기도는 했는데 하나님은 “그러냐, 그러면 너는 이렇게 하라”고 무엇을 하라, 즉 찾아 가거라 하는 요구를 하시는데 찾기는 싫고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라고만 자꾸 하고 이렇게 해서 언제까지든지 얻지 못하고 언제까지든지 같은 말을 반복해 가지고 일 년이고 이 년이고 계속적으로 기도하고 그러면 무엇이 되는가, 그런 것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찾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없이도 찾을만한 아무 것도 아니 올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많은 경우에는 사실상 기도하고 나서 찾어야 할 것인데, 내가 깨닫지 못하고 기도라는 것을 안이(安易)하게 생각해서 기도라는 것은 어쨌던지 눈을 감고 중얼중얼 하나님 앞에 무엇을 말하면 그것으로 내 할 부분을 다한 것으로 생각할 때에, 많이는 찾아야 할 것인가 여부를 깨닫지도 못하고 넘어가는 때가 있어요. 그런 것이 항상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생기는 것인데 기도는 하나님께 반드시 무엇을 내가 말로 고한 것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음 단계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고 문을 여시고 혹은 가게도 하시고 여러가지 일을 하시는데 여기에서 현저하게 주님께서는 “찾으라” 하는 말을 쓰셔서 찾는다는 것은 너에게 있어서 기도를 한 사람으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사람으로 기도에 버금해서 혹은 기도를 하고난 후에 계속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고 또 행해야 할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개괄적으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렇게만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는 것은 그러면 다 같이 거기에 물어 볼 문제가 붙어 있어요. 무엇을 구하며 무엇을 찾으며 어떠한 문을 두드리라는 말인가, 사람들이 흔히 주석에서 구하라는 것은 무엇인지 나에게 없으니까 구하라는 것이고 찾으라는 것은 무엇을 잃어버렸으니까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라는 말이겠고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내 앞에 어떤 문이 있는데 문이 닫혀 있으니까 그것을 두드리고 열어 주기를 바라고 들어 가거라 하는 것이겠다 하고 그 반대의 현상 혹은 그 말이 표시하고 있는 그 대상, 배경(背景)을 이야기 하지마는 그러나 한마디로 주연(周延)되는 말들은 아닙니다.

 

구하라는 것은 물론 우리는 일생 살면서 구할 것이 많이 있으니까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찾으라는 것은 무엇을 잃어버렸으니까 그것을 찾으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단순히 하나님께 구해서 하나님이 주시고 그냥 가만히 앉았다가 받고만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찾아서 발견해서 터득하여 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 때때로 어떠한 문이 닫혀있는 것과 같은 현실에 부딪히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문이 닫혀있는 현실에 부딪힌다는 말은 다른 데로 돌아갈 데도 없고 들어 갈 수가 없는 것 아니지마는 돌아가서는 아니 되겠고 그런다고 뒤로 물러서서는 아니되겠고 문제는 꼭 닫혀 있는 문이 열려서 그리로 지나가야만 하겠다, 그러한 정당성(正當性),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증거(證據)를 온전히 하겠다고 하는 확실한 이유를 깊이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은 좌우간에 결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타협(妥協)하면서 돌아가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거기서 주저앉아 버리고 뒤로 물러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만란을 배제(排除)하고 문이 열리기를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고 문을 두드려서 열어주시는 대로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다음에 “문을 두드린다”는 데서 더 자세히 보기로 하겠습니다.

 

찾는다는 문제는 큰 문제가 무엇을 찾느냐, 대체 무엇을 찾으라고 하셨나 하는 문제가 있어요. 이것은 산상보훈에 있어서 교훈의 한 가지인데 이 산상보훈 전체가 우리에게 찾아야 할 많은 것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해야 할 많은 것을 가르치고 찾아야 할 많은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아! 그렇게 가르치심을 받고보니 그렇게 되어야겠다” 든지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다” 하는 것들이 비로소 깨우쳐지지만 우리에게 없을 때 나에게 전에 있었던 것으로 잃어버린 것도 아니지마는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식 다웁게 장성하고 전진하고 살아가는 데는 이것은 있어야 하겠다 하는 것들이 거기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구하거나 찾거나 혹은 그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으나 문이 닫혀 있으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것들입니다.

 

산상보훈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많은 것들이 있지마는 그 다음에 직접 가까이 연결한 말은 13절에 볼 것 같으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좁은 문과 좁은 길, 넓은 문과 넓은 길을 표시했는데 그 좁은 문은 우리가 도달(到達)해야 할 곳이고 우리가 그 앞에 이르렀으면 문을 두드려서 열어야 할 것이고 열리우면 들어가서 좁은 길을 우리가 또한 구해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좁은 문을 찾아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이 닫혔으면 문을 열어주시도록 거기 가서는 문을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구해야 할 혹은 찾아야 할 중요한 문제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 뿐 아니라 그 다음에 지난번 우리가 본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볼 것 같으면 먹고 입을 것에 대한 걱정을 하는 이방인들의 심정과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산다는 사람들의 심정이 너무나 흡사해서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의 당위인 것같이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지마는 그런 경우에 그 심정은 달라야 한다. 누군가가 든든히 보장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면 보장하는 분에 대한 보장을 신뢰하고 기대할 것이 당연하지 말로나 입으로는 보장(保障)하는 분이 계시다고 하면서 그 생활은 일단 문제에 이르면 하나도 그런 것 없이 막막한, 제 힘 밖에 믿을 것이 없는 불신자와 무엇이 다르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이 그런 것을 그렇게 못하느냐, 물론 믿음이 적어서 그렇다. 그러나 너희들이 왜 항상 인생의 길에 있어서 그 결핍을 느끼고 신뢰할 아무 대상도 없는 것같은 공허한 심정을 가지고 사느냐 하면 너희들 자신의 인생의 추구와 행방이 부정당해서 그렇다” 하는 것을 분명히 거기 말로 명시는 않았지만 사상으로써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먼저 구할 것이 있는데 그러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지금 자꾸 구하지 않느냐, 그래서 너희는 구하면서 걱정하고 사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보장할 분이 계시니까 그 보장할 분의 보장을 믿어야 할 터인데 보장을 믿기 위해서 그 뿐 아니라 네 자신의 인생의 행로에 있어서의 먹고 입고 쓰고 사는 문제를 정당하게 관찰하려면 너희들은 무엇을 위하여 먹는가 무엇을 위하여 입는가를 바로 알아야지 먹을 것을 위하여 살고 입을 것을 위하여 산다면 이것은 불신자의 생활이다 그것입니다. 왜 먹느냐 왜 입느냐 왜 살고 있느냐,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다면 무엇이 이방인과 조금치라도 다를 것이 있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생의 목적을 어데다가 두셨는고 하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그것을 구해서 얻어라, 여기 구하라는 말은 역시 찾는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 “하나님 나라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그 일을 나타냅소서” 말만 하고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도에는 그 기도가 당연히 찾는 것을 포함하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주기도문에서 분명히 말로써 구했어요. “나라이 임하게 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줍소서” 하고 우리가 말로 구했지만 그 다음에는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줍소서” 그렇게 말로 구했으면 그 뜻을 땅에서 이루기 위해 나는 어데 쓰여져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그 뜻을 나타 낼 것인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뜻을 우리가 알지도 못하면 행치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릇으로 내가 있게 합소서” 하는 기도를 금방 해놓고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는 말씀이 있어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라 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행해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리고 24절부터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과 행치 않는 사람이 얼마나 지혜롭고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예를 들어서 반석 위에다 집을 지어놓은 사람과 또 모래 위에다 집을 지어놓은 사람의 그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비교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구했으면 그것을 알도록 찾아야 할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았으면 저절로 알려지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안 만들었다 그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 한마디만 하면 “오냐, 이것이다” 하고 보여주게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것이 아니고 “너희에게는 영혼의 기능을 다 주어서 네 영혼이 정당하게 활동 하도록 했고 너희에게는 성신(聖神)님으로 내주(內住)케 하사 비취고 안내하며 인도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성신님의 그 비취심, 즉 가르쳐주심, 안내하심, 인도하심에 의해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찾아 나가거라. 네가 말로써 기도하고 구했으면 그 다음에는 그것이 네게 있어서 실현되고 네게 있어 알려지도록 너는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나라의 생활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나라의 심정이고 계획인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런 것을 안 찾고 기도는 항상 자기의 현실적(現實的)인 어떤 수요(需要)에 한정(限定)되어 버리면 이방인(異邦人)의 생각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자기 자신의 부족한 것을 느끼고 그것을 사람의 힘으로 채워보려고 애를 쓰다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면 나중에 자기가 믿는 신 혹은 자기가 혹은 어렴풋이, 어슴프레하게 있다고 생각하는 신을 향해서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순서가 그렇게 안되어 있어요. 첫째, 자기의 부족에 대해서 자기가 반성하고 깨닫고 둘째는, 하나님 앞에 그것을 기도하여 구하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도록 빛으로 비취시고 인도하는데 따라서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결핍을 알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찾아나가 돌아다니고 그러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길이 없다면 비로소 자기의 신이나 자기의 부처나 자기의 무슨 초자연적인 어떤 존재에게 대해서 확신을 하든지 어렴풋이 믿든지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나와서 비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그렇게 않고 먼저 하나님은 분명히 나의 모든 것을 날마다 돌아보신다는 것,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 68:19)하신 말씀대로 날마다 짐을 져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뢰(信賴)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핍이 있을때에 주시려는지 안 주시려는지 생각지 않고 나의 모든 짐, 걱정 스러운 것, 내게 결핍되어 있는 것, 이런 것들은 날마다 짐을 져 주신다고 그랬고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勸告)하심이니라”(벧전 5:7)했어요. 모든 염려를 가져다 그에게 맏기고 구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걱정으로 맡아서 해 주십시요. 그러데 이것이 부족하고 이것이 없사오니 어떻게 하오리까” 하고 만사에 자기의 결핍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이것 도저히 어떻게 할 길이 없다는 것, 또 그런 것 할 수가 있든지 없든지 문제가 아니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또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응답하실 때 사람이 스스로 찾아서 터득할 것이 못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원하시는대로 처리하시겠거니와 사람이 찾아서 터득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 사람이 해야 할 찾아 터득하는 과정까지 하나님이 대신 다 생략해 주시고 “애쓸 것 없다. 가만히 앉았거라. 평안히 거기 앉았어. 내가 주마” 하고 이렇게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한 자에게는 때를 따라서 “찾아라” 하고 찾도록 하시는 것이고 그 찾는 것은 지금 말한 것과 같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으면 “무엇이 그 나라요 무엇이 그 의인가? 네가 무엇이 당위요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상 반드시 네게 있어야 할 것들인가? 너희들이 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며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가” 그것을 찾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는 사람은 지혜를 더욱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혜도 우리는 구하는 것입니다. 지혜도 하나님 앞에 주시기를 바라고 또 그것도 덮어놓고 가만히 자기가 무슨 재주 있게 해 달라고 하는 식의 엉뚱한 그런 정신적인 기능을 요구한다는 그런것 보다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을 바로 알도록 해 주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잠언 2장 1절부터 보면 “네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智慧)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明哲)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여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은을 구한다는 말은 돈을 번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꼭 돈을 버는데 애를 쓰는 것 같이 네가 지혜와 명철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찾는다(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네가 지혜를 찾으면) 여호와 경외(敬畏)하기를 깨달으며...” 결국 얻는 것은 뭐냐하면 여기 지혜란 말을 해 놓고 그 지혜를 얻은 결과로는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하는 것인가, 무엇이 참 종교냐 하는 말입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말은 간단한 말이지마는 구약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종교의 중심적인 실질(實質), 가장 실질적인 것을 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라고 하는 것,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리에 대한 바른 지식, 그들은 그것을 가르쳐서 지혜라 그랬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어늘 혹은 “지식의 근본이어늘”(잠 1:7) 그 어느 편이나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그의 총명(聰明)인 것이다. 그것이 명철(明哲)이다. 그러니까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거기까지 읽었는데 여호와 경외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말의 내용은 결국 가장 기본되는 그 나라의 모든 가치와 능력과 영광의 가장 본질적인 중심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가 그 나라의 왕이 되신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나라의 가지고 있는 실지 가치의 전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통치자(統治者)라는 것이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지 그 나라의 문화나 그 나라의 모든 재산이나 가치의 총화(總和), 총본질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치의 중심이 되어 있어요.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리스도를 내가 확고하게 터득하고 나간다는 것은 그 나라의 영광을 내가 바로 터득하는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참 하나님을 사람들은 알만한 것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들이 알 만한 즉, “지으신 만물로 보아 알지니 그러므로 사람들이 핑계하지 못할 지니라”(롬 1:20)고 로마인서 1장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에 있어서는 참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쳤으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가르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말은 했어도 “하나님의 존재는 이러이러 하니까 존재한다”고 논증(論證)한 일이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논증을 구하면 성경에서는 대답을 아니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대답을 해서 성경 아닌 다른 것으로 깨달으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이론과 말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을 주창(主唱)했을지라도 저 영혼의 깊이, 하아트(heart)의 깊이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인(否認)할 수 없는 중요한 기본적인 요소가 사람들에게는 다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친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알지 못할 때에는 “이것이 과연 그런가, 어쩐가” 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알려고 의문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불만스러운 것을 생각할 때 좀 더 높은 지식 좀 더 깊이 하나님 나라의 도리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다고 하는 것을 칼빈(Calvin)선생은 건전(健全)한 불만(不滿)이라는 말로 표현했어요. “불만이다. 그러나 그것은 건전한 불만이다.” 그런고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 정도를 늘 만족히 여기고 산다면 그것은 건전한 불만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주의할 것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고 방황하는 것은 건전한 불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무한히 위험한 일입니다. 시편 14장 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런 것을 보고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했어요. 욥도 자기 아내가 욥이 그 고생을 하고서도 하나님을 그대로 의지하고 찬송하고 부르고 그러니까 “아직도 당신은 고생이 모자라서 그냥 그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저주(詛呪)하고 죽어라.” 그러니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욥 2:10).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무서운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상태에 대해서는 우리가 늘 주의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계시사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사는 터 위에서 자기의 부족에 대해 불만히 여기고 자꾸 알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건전한 불만이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부인할 때에는 달리 구제할 길이 없어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논증해서 알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설명을 더러 해 주면 그런가 하겠지만 그것으로 믿음이 발생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이외에 다른 것 가지고 믿음이 발생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역사론적(歷史論的) 논증(論證), 우주론적 논증(宇宙論的 論的)을 한다든지 스콜라(Scholar) 철학(哲學)에서 신 존재의 논증을 한 것들이 있지만 신 존재의 논증으로 신학이 발전한 일이 없어요. 그런 것으로는 혹시 논리하는 법이나 발전했을까 몰라도 신앙(信仰)에다 그런 것을 도입(導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서 우리가 늘 구별해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도리에 대해 더 알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리를 안다는 이 지혜라는 것은 무신론(無神論)을 유신론(有神論)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희미하게 알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 부분적으로만 알았지만 그러나 구원받기에 족할 만큼은 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나 구원 받기에 족한 그 기본적인 최소한도의 지식이 하나님께 대한 풍부한 지식은 아닌 것입니다. 빈곤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더 풍부한 지식으로 자꾸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를 얻은 자의 중요한 내용이고 그 나라를 얻는다는 것은 이렇게 해서 그 나라의 아름다운 자태를 더 깊이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항상 사물을 생각할 때 무엇이 정당하냐 하는 것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인간은 어떠한 것인가를 가르친 것을 바로 깨닫고 또 하나님은 누구시냐 하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해요.

 

다음에 심히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성경이 가르치는 그 풍부한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려면 하나님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여러가지로 신학상 설명을 해서 소위 신론(神論)이라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론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해 잘 알려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트(Westminster) 신앙고백(信仰告白)에도 제일 처음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本性)의 빛으로 하나님을 알고 지으신 만물(萬物)을 보아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다 있다. 그것으로 알 수 있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사람이 구원(救援)받기에는 부족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도리,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도리(道理)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제일 처음에 성경에 대해서 하는 말인데, 본성의 빛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치심입니다. 짐승이 아니고 사람으로 난 이상은 사람은 본성의 빛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 못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석학자들도 신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무신론자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는 무신론자의 무신론의 이유가 하나님이 계신 까닭에 나오는 것이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계시니까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려는 반작용(反作用)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말입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없는 것을 없다고 선언한다고 그러겠지만 계시니까 계신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을 “이렇다. 저렇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다” 하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없는 것이라고 설명해 가는 것을 주의해서 읽어볼 것 같으면 결국은 “신은 계시다. 신은 계실 수 밖에 없다” 하는 아이디어를 차라리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든지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깊이 바로 알려면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 선생도 항상 간절히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고 또 우리가 때때로 하는 말과 같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많은 지식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지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빌립보 3장 말씀을 볼 것 같으면 “자기도 육체를 의지할 만하다” 하고서 자기를 쭉 자랑한 다음에 “그러나 과거에 내가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긴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 고상한 까닭에 그렇다. 내 자신이 과거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헤브레이즘(Hebraism)에 대해서 나는 투철하게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에게 무어냐. 나는 열심이 있었다. 또 나는 어떻게든지 충실하게 했다. 율법의 의로는 책망할 것이 없는 도덕적인 인물이다고 했어도 그런 것들을 다 내게 해(害)로 여기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아는 일의 고상(高尙)함을 인함이라.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장 고귀한 것을 생각할 때에 다른 것을 내가 다 뒤로 두고 앞을 향해 달음질해서 표대를 향해 내가 쫒아가는 것이다.” 14절까지 우리가 오늘 읽었는데 거기 그런 말이 있어요.

 

그 뿐더러 그는 자기 자신의 그 달려갈 길이라는 것을 또한 이야기를 했어요. 디모데후서 4장 7절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이렇게 자기의 달려갈 길이라는 것, 자기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갔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으로 그것을 잡으려고 부활의 현실 가운데 이르는 그 큰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길을 자기는 그대로 걸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본래 내신 그 영광의 목적에 해당한 목표를 향해서, 표대를 향해서 자기는 달음질을 했다 그말입니다. 이렇게 달음질한 바울 선생의 생활의 길이라는 것이 그 나라를 구해서 찾고 나갔던 길이고 또 그 의를 추구해서 찾아나간 길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찾으라” 하는 말씀 가운데 이상의 몇가지를 보았는데 계속해서 우리가 좀 더 배울 것들을 다음 시간에 배우겠습니다. 기도하시지요.

 

 

기 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저희에게 구하라고 특권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께 나와서 구하면 아버님께서는 들으시고 저희의 기도에 대해서 “네 일생 동안 너는 찾아야 할 길인 까닭에 일생동안 네 길을 바로 찾아서 한 발씩 찾은 대로 그 길을 걸어서 나가라”고 먼 앞 길을 다 못 볼지라도 우리 앞에 가야할 길을 보이실 때 그리로 날마다날마다 찾아서 바로 나감으로 우리의 이 연면(連綿)한 길은 결국 그 나라에 있어서의 행보(行步)요 그 나라를 구한 길이 되게 하실 것을 믿사옵나이다. 주께서 저희를 세우사 영광의 목적을 위해서 쓰시고 거룩한 능력을 저희에게 나타내시며 이 큰 도리를 바로 잘 깨닫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11.6./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



출처: 지명교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