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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14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6:35

기도에 대하여 14

 

김홍전 목사

 

제14강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정자(正姿)


마태복음 6장 5-8절



지난 주일과 그 전 주일에 걸쳐서 오늘 읽은 마태복음 6장에 나타난 산상보훈 가운데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대한 교훈에 대해서 특별히 두 가지의 점을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기도에 대하여, 구하는 문제에 대하여 몇 번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 말씀도 그 중에 몇가지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이 끝에 나가면 있고 7장에 들어가서는 “구하라 그러면 주시고 찾아보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 하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또한 어떻게 하나님 앞에 구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어떤 심정 가운데 하는 것인가를 가르친 데가 있습니다.

 

먼저 산상보훈에서 구하는 기도에 대한 적극적인 교훈을 본 것인데 그 두 가지의 문제는 첫째 “바리새 교인이나 서기관들 같이 사람에게 들리고 보이려고 거리나 회당에서 큰 소리로 길게 기도하지 말아라. 그 사람들은 제 상급을 이미 다 받았다. 그런고로 너희들은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해라.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다” 이 말이 있고, 다음에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나니 저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고 계신다.” 이렇게 예수께서 산상보훈 전체에서 가지고 있는 방식이지마는, 이 기도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것들을 먼저 지적하고 분석하여 그것이 틀린 것을 잠시 말씀하고 난 후에 너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고 직접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나라에 있어서 해야할 것은 어떤 것이다는 것을 늘 가르치시는 방식을 여기서 썼습니다.

 

이 장면의 제목이라고 할 것은 “삼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사람 앞에서 행하지 말라”는 6장 1절에 있는 말씀인데 사람에게 보이는 의에 대해서 세 가지 것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시제(施濟), 구제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나팔을 불고 그렇게 하지 말아라. 오른손이 행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하나님이 갚으시도록 해야한다.” 둘째는 지금 여기서 말하는 기도이며, 셋째는 금식(禁食), 이렇게 특별히 세 가지의 중요한 종교적인 행동이나 중요한 선행(善行) 문제를 들어 그 의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이 두 군데 5절, 6절과 7절, 8절 말씀을 지나간 두 주일 간에 이야기했지마는 오늘은 그것을 종합하여 여기에서 주의해서 보아야할 것을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도록 다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첫째 “사람에게 보이려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거리 어귀나 회당에 서서 기도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듣고 보고 “아, 훌륭하다”고 칭찬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기도라는 형식을 써서 전달(傳達)하고 알려주려고 그렇게 기도를 남용하고 혹은 그 본래의 목적을 떠난 방법으로 삼아서 쓰지 말라는 것이 중요한 뜻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하라는 것입니다. 하되 “골방에 들어가서 문 닫고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누구한테 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골방에 들어가거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일체 다른 사람과 상관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것입니다. “네가 네 기도를 하나님 앞에 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너와의 상관이지 왜 다른 사람에게 그 기도하는 것을 알려야 하고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하고 들려주어서 다른 사람이 그 기도의 언어 가운데 무슨 관념을 형성하도록 하고 무슨 감상을 느끼도록 하고 무슨 평가를 가지도록 하고 무슨 인상을 받도록 하느냐. 무엇 때문에 기도라는 것을 하나의 방편으로 써서 다른 사람에게 네 생각이나 네 마음이나 네 심정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쓰느냐. 기도라 할 때는 개인이 하나님께만 아뢰는 방식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그 의미를 떠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공기도(公祈禱)라는 것이 있지마는 공기도도 여러 사람을 대표해서 그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이지 여러 사람이 들어서 무슨 기도의 효과를 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할 말을 한 대표자가 하면 대표자가 한 데 따라서 “저도 제 심정을 기울여 저도 이와 같이 기도합니다” 해서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뜻으로 ‘아멘’이라는 말을 같이 쓰는 것입니다. 공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여러 사람에게 들리므로 여러 사람도 자기가 지금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최소한도로 필요해서 거기에 한정한 것 뿐이지 공기도의 대표자가 하는 말소리가 그 이외의 다른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만일 대표자가 그 이외의 다른 효과를 노리고 했다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서 하는 하는 기도의 성질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 개인적인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너 사이에 가장 내밀(內密)하고 은밀(隱密)한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지 다른 사람도 거기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네가 가져야 할 관계를 다른 사람과 먼저 맺고 다른 사람에게 오히려 효과를 얻으려고 치중(置重)을 하는 그런 생각은 기도 자체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본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해라. 다른 사람이 들을 필요 없는 것 아니냐. 다른 사람이 네가 기도를 하는지 않는지 조차 볼 것도 없는 것 아니냐. 은밀히 해라. 가장 고요히 은밀히 사람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관계하지 않는 그곳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네가 드리는 것이 온전해질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사실상 기도가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방해와 인간적인 관계로 분산되고 산란해지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 보는 데서 비록 기도할지라도 눈을 감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안 보고 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서 기도한다고 기도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가급적(可及的)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생각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심정과 그 소원이 어떠한 방식을 취하는고 하니 최소한도로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감는 그 본의를 좀더 확대해서, 발전해서 생각하면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안 보는 데서 조용히, 또 아무도 안 듣는 데서 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께만 마음을 모을 수 있어야 하고 다른 것을 고려할 아무 방해나 아무 유혹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연약한 인간으로는 중요하고 필요한 일들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까닭에 다른 사람이 옆에서 기도를 듣는가 생각하면 기도하는 말도 잘못됐는가 하고 꺼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자유롭게 토로(吐露)를 못하고 그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은 않고 그 사람이 또 들어서 나를 비평하고 폄론할 만한 그런 표현을 안 하려고 말을 꾸미노라고 정신을 쓰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사람의 장식과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아니하는 위치와 그런 상태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둘째, 여기에 나타난 것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해서 그렇게 하나님께 네가 전적으로 마음을 묶어서 네 심정을 토하고 호소(呼訴)한다 할 것 같으면 비로소 하나님만이 들으시는 분이니까 다른 사람은 들을 필요도 없고 들어서 효과를 낼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 효과도 기대 않고 하나님이 안 들으시면 어떻게 할 수 없고 아무 효과가 없는 일이다 하는, 그런 말하자면 배수(背水)의 진을 친 그냥 유일의 길만을 보고있는 상태인 까닭에 기도가 훨씬 더 간절해지고 또 사실상 그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니 들으신다면 효과가 없는 일인고로 전무(全無)든지 전부(全部)든지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극한 상황(極限狀況)에다 놓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무(全無)냐 전부(全部)냐, 이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으시면 다시는 다른 효과를 어데서 거둘 수 없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아니 들으시더라도 충분한 효과를 거두려고 하는 자기의 정책과 수단을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들음으로 그 사람들이 그의 경건(敬虔)한 것도 인식해 주고 평가(評價)해 주고 또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관인대도(寬仁大道)한 사람인가도 알려주고 또 어떻게 히브리주의, 헤브레이즘(Hebraism)이라는 것을 견고(堅固)히 쥐고 나가야 할 것인가를 기도를 듣는 사람들도 마음 가운데 깨닫게 하고 또 그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수사적(修辭的)으로 완곡한 방법을 써서 듣는 사람의 죄를 공격 안 할지라도 자기의 의를 자꾸 나열함으로써 듣는 사람이 부끄럽게도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비유로 쓰신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요컨대 완곡하게 세리같은 사람의 죄짓는 것 미급한 것 제 마음대로 세속적으로 더럽게 사는 것을 평(評)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리와 같지도 않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얻는 것의 십일조를 드리고 무슨 선행을 하고 무엇을 하고...” 자기의 잘 한 것을 나열하되 심정은 그럴지라도 말이야 번드름해서 “그렇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제가 그렇게 의롭게 선행을 했다. 율법을 잘 지켰다”하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오직 하나님만이 들으시는 극한의 상태에서 기도를 할 때에는 아무 것도, 하나님이 안 들으실 때에는 아무 것도 그 기도의 효과를 기대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대답해 주시면 “네 기도를 유효하게 하실 전부의 분이요 유일의 분인 상태 가운데서 함으로 그로써 하나님께서 과연 들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 그 사실을 다른 어떤 인간하고도 나누지 않도록 다른 모든 인간과의 어떠한 관계도 가지지 않고 하나님께만 기도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신다.” 기도에는 하나님이 대답을 해 주셔야겠다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신다 할 때는 하나님께서 기도한 일에 대해서,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응답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응답 받기를 원하면 따라서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는 내용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대해서 그것이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께만 말하고 다른 아무에게도 말 안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있고 아니 들어주시는 기도가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까닭에 성경에 의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 있는 기도와 그러한 내용을 또한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데 있어서 둘째번의 문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아라. 저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나니 저들과 같이 하지 말라. 대개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미 아시느니라” 하시는 7절, 8절의 말씀을 이제 생각하겠습니다.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아라”는 말씀에서 무엇이 중언부언이냐, 어떤 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이렇게 거듭거듭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은 지난번에 해석한 대로 사람이 말을 많이 붙이고 간절한 심정을 자기의 소원에다가 쏟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을 때에, “이방인(異邦人)들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 해서 이방인의 생각은 기도가 응답될 수 있는 중요한 길은 말을 많이 하고 간곡하게 그 말을 반복해야 한다는 그런 아이디어입니다. 이 아이디어(idea)는 물론 비기독교인(non-Cristian)들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반복해서 이야기했으니 한번 척하고 지나가는 그것보다는 훨씬 효과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 효과에 대한 컴플렉스(complex), 잠재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이나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말을 많이 했다는 데서 기도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의 평가와 가치판단(價値判斷)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이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또 거기 무엇이 있는고 하니 “너희가 구하기 전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네 쓸 것을 이미 아시느니라.” 이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말을 많이 하지 말아라” 함은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아시니까 내가 말을 많이 안 해도 하나님은 다 아시는 것 아니냐, 내가 말을 아니하더라도 아시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모르시는데 알려주시도록 하나님께 품(稟)해서 하나님이 비로소 그것을 깨달으시고 “아하, 네게 그것이 있어야 할 줄을 이제야 알았다. 그러면 주마. 그것은 안 주겠다”든지 뭐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품고(稟告)를 하고 고지(告知)를 한다, 하나님께 알려드린다, 하나님께 보고를 해 드린다는 그런 의미로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벌써 네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 그것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6장 끝에 내려가더라도 “너희 하늘의 천부는 네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하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왜 나는 기도하느냐. 그러면 기도는 안 해도 좋으냐. 다 알고 계신데 뭐 특별히 할 것 있느냐, “하나님이 알아서 처분해 줍소서” 그 한마디면 되지 않는가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어요. 야고보 4장 2절에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그랬어요.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얻으려고 할 때 기도함으로 하나님은 주시고, 기도하지 않을 때는 기도했더면 받을 것을 못 받게 안 주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지마는 그 필요한 것에 대해서 “네가 기도해라. 그러면 내가 주마”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내가 네 필요를 알지만 너도 네 필요를 바로 알고 기도해라. 그래야 내가 네게 주마”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께 통고를 해드리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의 필요를 바르게 인식한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인식한 것을 하나님 앞에 고하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신앙의 심정에서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기도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모르셔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다 아시지마는 네가 몰라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네 자신의 필요와 구할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로서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기도는 않는 것입니다. 효과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르는 기도란 뭐냐하면 추상적(抽象的)인 개념(槪念)이 쭉 나열되어 있는 그런 기도는 별로 효과 없는 것입니다. 여기 이 말 가운데서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간취(看取)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나열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합소서 하면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함으로 영광을 나타내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말이 되지 “하나님이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어떻게 받으라는 말이냐? 이런 것이 추상적입니다. 또 무엇이 어떻다고 구체적으로 꼭 집어서 그것이 내 발 뿌리에 있고 내 현실 생활에 있어서 훤히 방법과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해야 최종적으로 결론을 얻을 때 영광을 나타낸다든지 기쁨을 거두신다든지 하는 것도 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즉 논리(論理)의 결론으로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것은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논리의 결론이 아니고 맨 처음 전제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한다든지 처음에 프로포제이션(proposation), 제언을 하는 데 “하나님이여” 하고 한두 마디 하다가 말을 많이 할 수도 없고 무엇인지 모르고 갑갑하니까 그냥 영광이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식의 기도라는 것은 사실은 무성의한 기도인 것입니다.

 

자기가 곰곰히 생각하고 깨달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며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필요하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아야 나라를 위한다는 말도 의미가 있고 영광을 위한다는 말도 의미가 있는 것인데 곰곰히 구체적으로 생각을 않고 최종적인 결론 하나만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합니다”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다는 것이고 나라 위한다는 것은 대체 뭐냐, 당신 생활에 어떤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냐고 물어볼 때 아무 것도 모른다면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공허하고 공소한 추상적인 개념만을 나열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있어야 할 것 다 알고 계시는데 너는 모르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는 구해라. 구하는 데서 만일 잘 모르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금방 안 주신다” 그 말입니다. 깨달아 안데 이르러서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중요히 배워야 할 문제는 기도를 할 때 내가 A라는 것을 구했는데 하나님은 B라는 것으로 주신다는 대답의 방식의 한 양태가 있다고 그랬는데, 그 A라는 것을 구할 때 B라는 것으로 대답하는 것도 대개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 당장에 다른 것으로 환치(換置)가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A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너에게 있어야 할 것으로 알고 그것만 자꾸 구하고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의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냥 금방 주시지를 않고 기다리고 계실 때, 만일 그가 진정으로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 같으면 자기의 기도하는 내용의 의미를 더 기도해 갈수록 더 깨닫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하는 내용을 처음에 기도했을 때 비교적 몽롱했던 것이라도 자꾸 더 기도해 나가는 것에서 더 깨닫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의미, 그것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는지의 여부의 의미,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성격 내에서 어떠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가의 의미들을 자꾸 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 사람이 그것을 점점 캐고 깨닫고 안 후에 “아! A가 아니라 B로구나” 하는 것을 각성할 때 비로소 B를 주어야 이것이 기도의 응답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A를 구했는데 B라든지 C라든지 A와 상관없는 다른 것이 온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별로 내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온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줄 때는 이것이 응답이다 하는 것을 그 사람은 각성할 수 있고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상태에 그의 심정이 올라와 있어야 A가 아닌 B를 주었어도 “아, 나는 A를 구했더니 그게 아니고 B로구나” 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이것이 그 응답이다. 감사합니다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B라는 것이 충분히 A를 대치(代置)할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A보다도 좀더 적절(適節)한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A를 기도했던 내용은 그 개념이 발전하고 그의 사색(思索)이 점점 전진해 가지고 B에 대한 결론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답(變答)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그냥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알기 전에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을 툭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간절히 기도한 그 사실에 대해서 “이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러면 무엇이냐” 하고 찾아나갈 때 “이것이 그것이다.”하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답에서도 중요한 도리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있어야 할 것들을 다 아시는데 그런데도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시고 하도록 하시는 그 중요한 이유의 몇가지가 지금 말한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무엇을 구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꼭 주시리라고 믿는 것같이 좋은 것이 없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안 주실 수 없고 꼭 주신다는 튼튼한 약속과 근거가 성경에 있고 그것을 내가 믿는 믿음 안에서 기도했다면 받는 것이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많은 것입니다. 시작할 때 우리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 내가 모르나 당장 내가 알기는 내 자신에게는 이것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내가 하나님을 섬겨가는 데는 이것이 있어야 할 것으로 아는 까닭에 이것을 내가 기도한다 하고 처음에는 시작하는 것입니다. 허다한 많은 기도가 그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 안에서 그대로 생각에 발전이 없고 해석에 발전도 없이 그 말을 계속적으로 문득 “아, 내가 그것을 기도하고 있으니 또 해야지” 하고 그 말을 또 하고 그 다음에 다시 기도할 때는 “아, 기도하기로 했으니 그것 또 해야지, 안 받았으니까” 하고 또 하는 이것이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동어(同語)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간간히 떼어서 했든지 계속적으로 반복했든지 한 기도 안에다 반복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고 또 하고 하나 그 하는 내용에 대한 나의 상념과 해석은 일호도 발전하지 아니하고 그만한 정도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우리에게 요구하신 본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자꾸 동어반복(同語反覆)하라고 기도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말한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아라. 동어반복을 하지 말아라. 말을 이렇게 많이하고 자꾸 여러번 하면 들으실 줄 아느냐. 그렇게 들으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를 보고 기도하라고 했으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그것의 의미를 잘 알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장과 약속은 무엇인가를 점점 밝히 알아야 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적응성은 무엇인가를 자꾸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만일 그것이 부적당하다 할 때 그리고 나 자신이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아니하시고 거기에 대해서 보류를 하신다든지 하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내가 그것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몰랐으니까 하나님께서 혹시 지금 당장에는 이것으로 주시지 않으시려는 것은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으로 이 경우에 나의 필요를 충당해 주시려고 준비하셨는가. 그 준비하신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 그 말씀을 여기다 쓴 것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 쓸 것을 다 알고 계신 하나님이다. 그런데 네게 기도를 요구했다. 그리고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주시는 경우가 있는 것을 알지 않느냐?” 여기에서 우리가 얻는 결론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줄 아시고 참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기도하려면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 뜻이 무엇인가를 더욱 바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아버님께서 주신 이 말씀의 거룩한 뜻을 더욱 바로 깨닫고 알아서 주께서 과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심정은 무엇이며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가질 바른 자세는 무엇인가를 바르게 파악해서 아버님께 기쁨을 드리고 아버님께서 받으실 기도를 할 수 있게 은혜로 인도합소서. 주님, 저희에게 성신님으로 더욱 조명(照明)하셔서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 가운데에 나타난 그 오묘(奧妙)한 도리를 더욱 깊이 깨달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10.23./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