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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13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6:27

기도에 대하여 13

 

김홍전 목사

 

제13강 기도하는 자의 생활 방향


마태복음 6장 5-15절



오늘 읽은 말씀과 관련해서 한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은 마태복음 23장 14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4절은 없다고 개역성경에 나와 있는데 “화(禍)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또한 길게 기도하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난하를 보면 “14절에 마가복음 12장 40절과 누가복음 20장 47절과 유사(類似)한 구절이 있음”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전에 번역한 성경이라든지 어떤 사본에는 분명히 14절이 있어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길게 기도하니”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 6장에 있는 말씀 가운데 기도를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는 중요한 이유와 소위 제사의 의식과 사람들이 그 의식을 준행(遵行)하고 사는 문제와 하나님이 그에 대한 거룩하신 태도를 어떻게 보여나가셨는가를 이야기했는데 다시 그 다음을 계속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7절 말씀을 생각하겠는데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늘 말하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 그 다음은 남의 죄를 사(赦)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는가 즉 기도할 수 있는 기본 위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할 것은 예수께서 기도에 대해서 산상보훈에서 몇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즉 마태복음 6장 5절, 6절에 이어서 15절까지에 계속해서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지적하신 말씀은 “기도를 외식(外飾)하는 자 같이 하지 말아라. 저들은 회당과 길거리 어귀에 서서 사람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데 저들은 제 상급을 이미 받았다.” 그렇게 그릇된 것을 하나 꼬집어 말씀하시고 또 하나, “이방인(異邦人)과 같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 저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안다” 하는 것을 꼬집어서 기도의 그릇된 것, 비위 두 개를 적발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할 때,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말한 가운데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이 듣고 갚으실 것이다”고 말씀하셨고, 또 하나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그 대신 너희들이 생각할 것은 이것이다. 자 내가 너희에게 기도의 전범(戰犯)을 가르친다” 하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해명(解明)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한 내용은 그 정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는 6장 1절 서두에 큰 선언이 있는데 “삼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말아라”는 말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 말을 해놓고 거기서 세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들어서 말씀하셨는데, 2절에서부터 4절까지는 구제(救濟)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5절부터 15절까지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16절이하로는 경건한 생활의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 가지 중요한 것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 19절서부터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한다’는 그 큰 제목에서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서 “너희 보물(寶物)을 하늘에 쌓아두어라”는 말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고로 삼가 남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말라.” 행의(行義)의 문제와 종교의 경건한 생활 문제를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그 중요한 예로서 시제(施濟)와 기도와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 27절까지 세장에 걸쳐 예수께서 산상보훈이라는 교훈을 산에 올라가셔서 축근의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는데, 절수로 따지면 예수님의 직접 교훈의 내용은 108절쯤 되는데, 이 산상보훈에서 두 개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미지(image), 상(像)이 흘러가고 있다고 지난번 말씀 드렸습니다.

 

두 개의 상이란, 하나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 즉 장로들 혹은 종교교육자(宗敎敎育者)들 혹은 백성의 어른들 즉 특별히 정신적인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주동이 되어서 유대의 다수의 민중을 이끌고 나오면서 역대(歷代)를 통해서 가르쳐 준 메시야 왕국에 대한 한 상념(想念)이 거기에 중점적으로 적발되어서 주께서 묘사해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의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지는 두 말 할 것 없이 레그놈 그라티아에(Regnom gratiae) 즉 은혜(恩惠)의 왕국(王國), 참된 의미의 메시야 왕국, 그리스도의 왕국의 자태를 반명제적(反命題的)으로 제시해가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적발(摘發)해내신 일반 이스라엘 민중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념과 기대가 흘러가는 중요한 사실은 계통적(系統的)인 사실로 우리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그려 나가시는 것입니다. 산발적(散發的)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어떤 것의 비위를 적발하여 말씀하실 때는 단순히 여기저기 있는 그릇된 것, 사람들이 세상 어디서든지 행하기 쉬운 어떤 그릇된 것을 적발해 가지고 그 적발된 그릇된 것 한두 가지를 유례적(類例的)으로 들어 비판하셔서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 보다는 그것의 중점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자태를 묘사해 나가려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된 자태를 묘사(描寫)하기 위해서 적발하신 안티테시스(antithesis), 반명제(反命題)라는 것은 그대로 그 당시 유대 사람들과 또한 정통적인 유대 교사들의 교훈에 의해서 바르다고, 정통이라고 견지(堅持)되고 나왔던 구약(舊約)의 해석 즉 성경의 해석과 그로 말미암아 저들의 사상 형성과 기대들을 중요하게 적발해서 이야기하신 것이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기도에 대해서도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을 본받지 말라” 하셨는데 수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에 여러가지 비위가 많습니다만 하필왈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만을 꼭 꼬집어서 말씀을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잘못을 일일이 다 지적해서 말씀하지도 않고 그 중에 대표적인 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도 지적하지 않고 하필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별로 대단히 중요치도 않고 흔하지도 아니한 어떤 사실 하나를 적발하신 것입니다.

 

만일 산상보훈이 대단히 유니버설(universal)한 것이라면 잘못된 기도의 유형(類型), 대표형(代表型)이라고 할 때는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왜? 그 수가 적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하는 짓이고 일반 민중도 그러지 않고 또 오는 많은 세대와 전에 흘러온 많은 세대 사람들도 그렇게 한 사람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희소(稀少)한 어떤 사례(事例)를 들어가지고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나머지 사례는 다 괜찮은데 꼭 이런 것은 그 많은 사례 가운데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고 집어내서 한 이야기인가? 이렇게 예수님의 교훈이나 가르침을 해석할 때 항상 보편적인 악의 현상 가운데 어떤 한가지를 임의로 적발해서 말씀하신 것 같이 생각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혹은 광범위로 적용되지도 아니하는 어떤 특수한 한두 가지만 들어 가지고 그것을 맹렬히 공격하면 공격을 위한 공격 밖에 안되는 것이 아니냐, 실제 적용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냐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중언부언(重言復言)의 문제도 이방인들이 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방인이 중언부언하는 것을 하필 꼬집어서 이야기 하실 것 없지 않는가? 왜냐하면 지금 듣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 가운데에도 특별히 제자들입니다.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많은 사람이 따라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런 희소한 예를 보편화 하시려는 것도 아니겠는데 왜 이것을 들어서 말씀을 하시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있기 쉬운 잘못 가운데 어떤 특성적인 것을 들어서 말씀하신다고 해석한다면 예수님이 그런 유례를 척결하고 적발하여 말씀하신 본의를 잊어버리고 그 나타난 비위를 마치 보편적인 것같이 해석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유명한 주석들이 대개 그러한 터 위에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깊은 것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으로부터 7장까지에서 선언(宣言)해 나가시는 것은 부정적인 면에서는 사이비(似而非) 신국적(神國的)인 습관들과 행습들과 상념들에 대한 시정(是正)이 중요한 목적이고 아닌 것을 잘 구분하도록 크라이테리아(criteria)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肯定的)인 면에서는 예수께서 대표하시고 보이실 하나님 나라의 자태가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이야기해 나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의 말씀을 한자리에 앉아서 이대로 다 하셨는지 몇번에 나누어서 하셨는지 명확하게 역사적으로 어떠한 상태였는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성신님의 주장으로 마태는 이렇게 편성해서 순서를 만들어 놓았으니까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거룩한 순서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리에서 다 안 가르치고 (가령 누가복음에도 그런 것이 나오니까) 몇 번에 나누어서 말씀하셨든지 혹은 말씀하신 것을 반복하여 하셨든지 결국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최후에 정리되어 파악된 것은 이 5-7장의 순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 순서대로 파악하는 것이 성신께서 그와같이 성경를 쓰게 하신 본의를 체받는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처음에 우리가 잘 아는 8복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8복 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그 다음에 주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 알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 해서 정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대표하는 표현, 즉 토라와 느비임을 나는 조금이라도 변경한다든지 폐한다든지 하고 다른 것을 새로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터 위에 서서 그 충분히 계시하지 않은 사실들을 더욱 계시함으로 완전케 하려고 왔다 하신 것입니다.

 

토라와 느비임이 완전한 것이었느냐 하면 그 때는 계시 시대에 있었고 계시의 발전 과정에 있던 그대로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을 좀 더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 하신 말씀대로 과연 신약(新約)이 후에 가담되고 그 중에도 예수님 당신 시대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자체로 액트 레빌레이숀(Act Revelation)에 의해서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점에서 토라와 느비임을 완전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율법에 대한 태도를 완전케 하면서 완전케 하신 충만한 계시의 현실에서 해석할 때에는 “너희들의 의, 너희들의 당위(當爲)의 행동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너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5장 20절에 전제적(前提的)으로 해놓고 그 전제하에서, “그런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의(義)의 사상 구조와 사상 기초는 이것이 아니냐?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해 왔고 이스라엘 민중은 그것을 헛되이 오랜 세월 동안 견지하면서 바라보고 자기네의 마음대로 구상한 메시야 왕국을 지금 기대하고 있으나 메시야는 여기 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을 암암리에 보이시면서 “내가 세우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내용은 그런 것은 아니다. 구약을 통해서 전통적으로 거룩한 나라는 있어 왔지만 너희들은 딴 세계에 지금 살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의 시정(是正)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그 당시 유대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이러한 큰 오류(誤謬)는 그대로 횡행(橫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세히 척결해 놓고보면 사이비적인 레그놈 그라이티아에(Regnom Gratiae)관념과 사이비적인 예수님의 통치 사실의 관념이 횡행하고 있는 것을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단순히 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통이라는 이름 하에서 자행(恣行)되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실 그 나라의 거룩한 것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제일 중요한 것은 제의(祭儀)의 절차법이 아닙니다. 어떤 절차, 제사와 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 가장 기본되는 대강령(大綱領)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십계명(十誡命)이라고 하는데 십계명 가운데 네 가지 계명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쳤는데 특별히 나머지 여섯 가지 가운데에도 사회적인 의미는 다섯째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여섯째부터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계명은 주로 부모와 자식간의 가장 긴밀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첫 네 가지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고 제 다섯째가 그 부모와 자식 사이고, 여섯째부터 차례차례 사람의 관계를 가르치는데 그 관계 가운데 가장 성격적이고 두드러져 있는 관계가 어데 나타나느냐 할 때에 사람과 사람 관계에 있어서의 미움과 사랑이라는 문제 또 사회의 정결과 불결이라는 관계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회는 아름답고 정결해야 하겠고 사람과 사람은 서로 아름다운 심정을 가지고 사랑하고 돕고 미움을 제거하고 삼제(芟除)하고 살아야겠다 하는 것이 한마디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런고로 사회의 법으로서 중점적인 것이 제6계명과 제7계명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다른 잔 사설을 떼버리고 제6계명을 들어서 그것을 대표적으로 놓고 그 6계명의 기본 정신을 서술해 나가신 것이고 그 다음에는 7계명을 들어내놓고 그 기본 정신인 가정과 사회의 순결(純潔)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6계명에 있어서 가정과 사회에 있어서 사랑과 상호부조(相互扶助)라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다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의 관계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가르친 것 가지고서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나타내기는 부족하다, 그러면 신뢰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맹서하는 사실로 대개 표현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부족하다 하고서는 “맹서를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시(是)는 시고 비(非)는 비라고 해라. 무엇이든지 이에서 더 지나쳐 나오면 그 악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맹서의 관계, 신용의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신용의 관계를 이야기한 다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 미움이 있을 때 발생하는 보복, 서로 그릇됨이 저질러져서 발생하는 문제는 보복의 문제입니다. 즉 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직보악(以直報惡)하고 이덕보덕(以德報德)하라”는 유교적인 정신과 같은 것에 서야 할 것인가?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다. 하지마는 나는 너희에게 그렇게 안 가르친다” 하시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원수는 미워하고 형제는 사랑하라고 그랬다. 나는 너희에게 그렇게 안 가르친다.” 이것이 지금까지 예수께서 기도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기 이전에 말씀하신 대강들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대지(大旨)들입니다.

 

6장에 들어가서는 처음에 대번에 “삼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말라” 해놓고 세 가지의 구체적인 생활의 경건(敬虔), 즉 종교적인 경건성을 표시하는 세 가지의 문제를 들어서 첫째는 구제하는 일, 둘째는 기도하는 일, 셋째는 금식하는 일로 가르친 것입니다. 기도의 위치가 이런 자리에 있는데 우리 주께서 척결해 내신 중요한 기도의 두 가지의 비위, 첫째는 “사람에게 소위 존경과 신뢰를 받으려고 기도를 전시하지 말아라.” 둘째는 “하나님 앞에 무슨 공효를 쌓고 신뢰를 얻으려고 하는 듯이 중언부언하지 말아라.” 즉 “사람에게 대해서 너희 기도의 동기(動機)와 정신은 이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너희 기도의 동기와 정신은 이래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어요. 이런 까닭에 “사람 앞에서 너희가 신뢰와 경외(敬畏)를 받고 사람들에게 너희의 신용을 쌓고 너희의 권위를 보존해서 지도자의 위치를 그대로 확보해서 헤브레이즘(Hebraism)이 탈락되지 않고 헬레니즘에 먹히지 않고 로마의 군국주의에도 먹히지 않고 끝까지 견디고 나감으로만 이스라엘적인 유대주의적인 위대한 메시야 왕국은 그대로 건설될 것이다는 그릇된 메시야 왕국관(王國觀)에서 파생한 바 방법론이라는 것을 고쳐라는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한 것같이 메시야 왕국에 대한 저들의 간절한 소원과 열정은 저들의 모든 종교의 행동과 교훈과 생활 태도를 메시야 왕국의 기본적인 사상인 헤브레이즘을 바로 유지(維持)하겠다는 데 있는 까닭에 헤브레이즘을 일반 우매한 민중에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사두개인들이 아니고 헤롯당이 아니고 제사장들이 아니고 우리들이 민중의 정신 세계를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간단(間斷)이 없는 연락 관계가 있어야 하겠고 우리의 가지고 있는 헤브레이즘적인 경건주의를 저들에게 늘 선전, 프로퍼갠다이즈(propagandize)해서 저들과의 소위 퍼블릭 릴레이션즈(Public Relations)를 바로 가져야겠다. 이러기 위해서는 거리나 회당에 서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봐라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해서 그 사람들에게 교육적인 의미와 지도자적인 의미를 많이 보이는 기도 태도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함으로 메시야 왕국은 오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 우리 주님의 단정적인 한 부인(否認)의 태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도는 기도 자신의 정신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것을 붙들어 주시고 들어 주셔야지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 그 여타의 어떠한 종교적인 효과나 어떠한 제의(祭儀)의 완성과 실현도 의미는 안 가지는 것이다”고 기도라는 것을 종교적인, 제의적인 의미에서 떼어놓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관계(交通關係)에다가만 중점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려고 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하면 어떤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은 좀더 들어주실 것이 아닌가 하는 야릇한 종교감정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뭐냐하면 이방 사람에게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사실이고 모든 신자에게 다같이 보편적으로 발생하기 쉬운 사실이다. 그것은 자기가 열심으로 애를 써서 어떤 한 사실을 놓고 구하고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데에서 하나님께 조르면 불쌍히 여기고 들어주실 것이다, 혹은 “이렇게 내가 열심으로 했으니까 하나님은 들어주실 것이다” 하는 그 미묘한 감정이다 하신 것입니다.

 

어떤 불의한 법관이 있어서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에게는 무례하지마는 어떤 과부가 자기의 원한을 풀도록 원수를 갚아달라고 여러번 구해도 안 듣다가 귀찮아서도 내가 들어주어야겠다(눈 18:1-5). 이런 비유를 베푸시고 하물며 밤낮 비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를 듣지 아니하시겠는가 하신 문제에 대해서 주의를 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곡하게 무엇을 반복해서 기도하는 그것 자체가 중언부언한다 그랬습니다. 왜 중언부언 하느냐 하면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그것이 종교적으로 기도의 효과에 있어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 상념(想念)이 나쁘다 그것입니다.

 

중언부언하면 말을 간간히 하는 것보다는 좀더 기도가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야릇한 심정, 야릇한 해석, 야릇한 상념이라는 것이 있기 쉽습니다. 왜? 신자라도 열심으로 기도하면 나중에는 자기가 열심으로 기도한 그것 때문에 “나는 열심으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이렇게 울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후련하다. 하나님도 어떤 크레딧(credit)을 주시겠지. 하나님도 여기에 대해서 그냥 싫어버리시지는 않겠지” 하는 야릇한 컴플렉스(complex)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대한 시험입니다.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대해서 보면 이방인의 중언부언, 반복용어 쓰는 그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것입니다.

 

“네가 지금 기도를 안하면 하나님이 네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시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한테 기도를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요컨대 하나님이 인포메이션(information)을 너한테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네 필요가 무엇인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요구하시는 줄 아느냐? 그러니까 낱낱이 자세하게 이야기해서 마치 무슨 진정서나 탄원서를 쓰듯이 그렇게 할 것인가?” 기도의 참 정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께서는 여기서 가르친 것입니다.

 

여러가지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또 말하고 또 말하고 하는 그런 데서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심정, 상념, 해석이 무엇인가를 보이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무엇을 잘 모르셔서 네가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너는 그렇게 이야기하느냐”고 그 기도하는 심정 하나하나를 예수님이 따지신다면 궁극적으로 나오는 것은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고 있는 신개념(神槪念)이 부정당하다는 것이 결론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나님을 아주 부자로 능력이 많고 너를 사랑하고 네가 무엇이든지 자세히 고하면 듣고 “아! 네가 과연 필요하겠다. 그러면 내가 네게 주마” 하고 주시는 그런 분으로 알고 있느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줄로 알고 있기가 쉽다. 그러니까 너는 자세히 말하고 간곡하게 말하고 자꾸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개념,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심정 자체에 그릇된 종교 감정이 끼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요컨대 너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르셔서 하는 것이 아니잖는가. 다 아시고 계시지마는 네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문제는 하나님은 너하고 대립하고 있어서 네가 주상을 하면 비로소 알아듣고 ‘아, 그러냐. 나는 지금까지 몰랐다마는 그런 줄 알았으니 이제는 주마’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너와 대등(對等)한 위치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원하시는 대로 네게 주시려면 주시고 안 주시려면 안 주시는 것이지마는 나에게 나와서 말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나와 교통하기를 원하시고, 둘째는 나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상념을 바로 잡아주어 나가는 것이고, 셋째는 나 자신의 자기의 요구에 대한 해석과 상념도 또한 시정해 주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확신이 없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확신이 없으니까 기도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닐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가운데 나의 기도에 내 스스로가 생각하고 구하는 사실에 대해 반성하게 하시고 다시 관조(觀照)하고 비판하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서 다시 생각하고 “하나님, 지난번에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동안 생각하고 깨닫고 보니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아나이다.” 이렇게 우리들 자신의 욕망 혹은 소원에 대한 해석도 자꾸 변경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변경하기 위해서 주님은 때를 따라서는 대답 않으시고 우리를 오래 자꾸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요컨대 기도의 참된 의미라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좁은 것과 혹은 오류(誤謬)나 미망이나 이러한 데에서 차츰차츰 끌어올려서 기도하는 데에서나 자신이 좀더 높은 위치에 자꾸 늘 올라 앉도록 해 주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물질이나 사실들만 채워주시고 내 차원은 그만한 정도로 좋다, 급급하던 것을 그냥 주시면 좋다 하는 것은 내 생각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그런 위치 그러한 상념, 그런 인격의 차원에서 너를 끌어 올려야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나와 좀더 긴밀하고 정당한 바른 교통을 더 가질 수 있지 않느냐”고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적인 목적이 중요히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니까 그러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서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서 장성해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중요한 수단이 되어서 하나님은 나와 장성하는 자태 가운데서 때때로 교통을 하는 것입니다. 교통은 어느 식으로 하느냐면 나에게 대답하는 것으로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은 내게 대답을 하고 그 대답이 “오냐”하는 것도 되고 “아니,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다” 해도 되고 “아니, 내가 다른 것으로 일러준다.” 그렇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전연 묵묵무답 한다면 그때야말로 “너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현실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요컨대 하나님 앞에 무슨 보고를 드린다든지 하나님께서 잘 모르실는지도 모르니까 좀 잘 알려드려야겠다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가 많이 열렬하게 기도했으니까 열렬한 것을 보고 간절히 구한 것을 보고 들어주리라는 생각은 제일 빠지기 쉬운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간절히 구했는데 주께서는 들어주시겠지...”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라 자기의 간절이라는 공로를 은연중에 생각하는 그런 컴플렉스(complex)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대해 놓고 보면 이방인의 중언부언이 그것이다, 중언부언해서 자기의 공로감을 얻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많이 말씀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하는 그런 감을 가지는 것인데 그것은 신자들 사이에도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한 마디만 해버리면 그만이냐 할 때 예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네 쓸 것을 아시고 중언부언하는 네 컴플렉스를 없이해야만 하겠고 그렇다면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하겠다”고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전통적인 히브리 사람들의 종교 생활 가운데 있어서는 자기의 종교적인 노력에 대한 크레딧(credit)을 사람에게 취하려고 하든지 불연이면 하나님께 취하려고 하는 그런 야릇한 그릇된 타락의 심정이 발생하는 것이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하고 그러한 것을 확대해서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는 종교적인 사회, 커뮤니티(community)를 형성하는 것을 메시야 왕국으로 알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필 다른 여러가지를 뽑지 않고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뽑아낸 것입니다. “네가 기도할 때에 너는 공로감(功勞感)을 어데다 두고 있느냐. 사람에게 있느냐, 즉 네 자신의 공로를 사람 앞에서 쌓으려고 하느냐. 네 자신의 공로감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고 하느냐. 그 어느 것도 옳지 않다” 그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바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십니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들은 주님 앞에 기도를 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중요한 기저가 아무 것도 저희에게는 공로가 없고 저희에게는 아무 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저희들 말 자체가 아무리 열렬하고 울부짖을지라도 그것이 상달되지 않는 것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쓰임을 받아서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하에서만 아버지께서 취하사 들으시는 것을 아는 까닭에 혹여라도 그릇된 공로감으로써 많은 말을 하고 울고 혹은 어느 때는 천 번 주기도문을 외우면 무엇이 된다는 둥, 혹은 많은 자선을 행함으로 그로 말미암은 터 위에 있어서의 공로감을 가지고 기도하면 된다는 등 전통적인 교회의 잘못이 아직도 많이 횡행하고 있고 흘러나가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참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는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가르친 것을 이제 바로 저희들도 깨닫고 은혜로 인도하시고 거룩되이 주님만 의지하고 살게 합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10.16./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