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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11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6:03

기도에 대하여 11

 

김홍전 목사

 

제11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아모스 5장 22-27절



오늘도 신앙의 기본에 대하여 지난 주일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온 제사(祭祀)와 예물을 드리는 것 혹은 의식(儀式)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타매(唾罵)하시고 혹은 몹시 진노하시는 언사(言辭)로 그것을 거절하시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주신 일이 있는데, 그런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가 한두가지 생각해 왔지마는 오늘 우리가 몇가지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아모스 5장에 있는 말씀을 읽었는데, 여기에 따라서 말씀을 몇군데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호세아 6장 6절 말씀은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데 호세아 6장 6절에는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했습니다.

 

또 예레미야 7장 22절에서부터는 “대저 너희 열조(列組)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燔祭)나 희생(犧牲)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聽從)치 아니하며 귀를 귀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귀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곧게 하여 너희 열조 보다 악(惡)을 더 행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아모스의 말씀 다음에 한군데 더 보겠습니다. 미가서 8장 6절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몇가지 중요히 추출(抽出)해서 생각할 문제들은 호세아에서는 제사와 예물보다는 인애를 원하시고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 그랬고, 예레미야 7장 23절에서는 “내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다음에 아모스 에서는 “공의를 물과 같이 정의(正義)를 하수(下水)와 같이 흘러 나가도록 해라”(5:24). 미가서 6장에서는 “공의(公義)를 행하고 또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7장 23절에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모든 말씀들에서 번제나 혹은 다른 제사보다 더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인애(仁愛), 인자(仁慈)와 자비(慈悲)라는 것입니다. 인애라는 것을 원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요구했고, 또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라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명하신 그 길을 좇아 행하라 하시고, 이 모든 길로 행하라 그랬고 공의(公義)를 물과 같이, 정의를 하수와 같이 너희에게 있도록 하라 했고, 마지막에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謙遜)히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들이 여기에서 중요한 강조점(强調点), 즉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 강조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그 동안에 우리가 배웠던 사무엘상 15장 22절 23절 말씀에는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頑固)한 것은 사신 우상(邪神 偶像)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말씀들에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공의나 인자, 긍휼, 이런 것들과 또 하나님을 겸손히 좇아서 가는 것과 그 명령하신 길로 가는 것과 그 목소리를 늘 순종하고 사는 것 이런 것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제의(祭衣)보다 그것이 먼저 앞서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라고 궁극적(窮極的)으로 그 제도(制度)를 보이셔서 사람이 드리게 했지마는 이 히브리적 용법으로 보아서는 “너희가 공의나 인자를 행치 않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고 그 길을 행하지 않으면서 제사만 드리는데 내가 언제 너희보고 제사 드리라고 했느냐?” 즉 “그런 제사를 드리라고 했느냐” 그 말입니다. 히브리적인 표현에는 부인(否認)할 때는 전적 부인이 아니고 부분적인 부인입니다. 가령 “나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인애를 원한다” 할 때 “제사라는 것은 도무지 내게 상관없다. 인애만 하라”는 그런 의미보다는 ‘좀 더’ 혹은 ‘첫째로’ 인애를 행하라. 인애를 행치 않는 제사는 내가 원치 않는다는 조건이 붙는데 이런 용법을 우리가 주의해야지 주의하지 않고 오늘날 우리의 문법식으로 그냥 억지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제사를 당신이 다 지내라고 내 놓고서는 또 도무지 준 일도 없다.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어디 그렇게 됐나?” 이렇게 의심하기 쉽지마는 그 표현법이 그런 것입니다. 요컨대 그 말을 우리가 잘 읽어보면 거기에 다른 말 즉 ‘첫째’ 라든지 ‘좀 더’라든지 하는 말이 없다 하더라도 그대로 곧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 원치 않는다” 고 했으면 “하나님은 제사 드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오직 인애를 행하는 것만을 원한다” 고 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애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제사를 내신 제도에 맞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제사만 드리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첫째 문제는 모든 제의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다른 도덕적(道德的)인 요소(尿素)를 같이 곁들이지 않고 그 형식만 유지하고 나갈 때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오히려 가증한 것도 되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도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추출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종교적인 모든 의식과 방도 그것 자체는 필연적으로 어떤 도덕적인 요소 즉 그것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고 당연히 요구하고 당연히 가져다 주는 도덕적인 결과와 도덕적인 성격을 다 함께 요소로서 곁들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한다 하는 것은 기도 그것 자체만을 계속적으로 산에 올라가서 몇년이고 소의소식(素衣素食)해 가면서 그것만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런 것을 기뻐하실 까닭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도덕적인 요소가 있는 어떠한 사실을 그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수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도덕적인 요소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가령 기도를 한다면 덮어놓고 눈을 딱 감고 엎드려 있으려고 산에 갔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기도를 하려면 적어도 마음의 요구가 있을 것이고 목적이 있을 것이고 동기(動機)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나 구(求)하자면 왜 이것을 구하는가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에는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성적(理性的)인 작용을 가지지 않고서 덮어놓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공허한 소리요 그야말로 종교의식에 불과한 것으로 외식(猥式)을 위한 외식에 불과하지 기도 자체의 의미는 안가지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의 의미를 가져서 확실한 목표나 동기를 다 가지고 있고 충분히 필요한 이유가 있으면 그 이유는 도덕적이라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따라서 분명히 그것을 위해서 쓰이는 생활에서만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가령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가(可)타고 여기시면 주실 것이고 부(否)타고 여기셨으면 안 주셨을 것입니다. 가하다고 여기셔서 주셨을 때에는 금방 주셨을 수도 있지마는 오래 참고 계시다가 주실 수도 있고 또 가하다고 여기실지라도 “네가 구하는 것이 그것일런지는 네가 잘 모른다. 너는 그것이라고 하지마는 그것이 아니고 사실상 이것이 좀 더 너에게는 지금 필요한 것이다” 하고 다른 것으로도 주십니다. 그러면 그 주신 것을 받았다는 사실 위에서야 기도는 계속하는 것이고 더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삼년이나 오년 심지어 십년이 되더라도 산속에 가서 굴을 파고 거기 들어 앉아서 기도만 하고 앉았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쓰이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쓰이는 사람은 그 때 그 때 임해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품성과 생활에 있어서의 어떤 결실(結實)을 가지고 구해야 하는 것이고 모든 경우에 결실이 없는 기도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이른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대로 구하라. 다 이루게 하리라”(요 15:7)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원하는대로 구하라. 다 이루게 하리라” 하셨는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가서 열매를 맺고 더 풍성히 맺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함이라” 하셨습니다. 기도를 해서 무엇을 우리가 얻으면 그만큼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어야만 기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열매를 맺지 않는 생활은 기도는 그만 두고 그 여타 굉장한 환희(歡喜), 법열(法悅), 황홀삼매(恍惚三昧) 가운데 들어갈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혼자 굉장히 우화등선(羽化登仙:전설에서 사람이 신선으로 되어 하늘을 오르는 일)하는 것 같은 황홀경 가운데 들어갔을런지는 몰라도 그렇게 혼자 들어가는 황홀경의 문제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체적으로 덕을 세우는데는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 선생이 자기가 삼층천(三層天)에 올라간(고후 12:2)경험이 있을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모든 제의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것이 요구하는 바 선행(先行)되어야 할 도덕적인 조건이라든지 혹은 그것이 요구하는바 생활에서 실증(實證)해야 할 조건들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곁들여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고 그 대신 공의를 행하는 것과 자비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면 요즈음 흔히 기독교인들이나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회 공의를 이야기하고 사회 부조리를 타매하고 나아가서 사회의 공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진출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 당연히 해야 할 것이요 따라서 교회의 가지고 있는 중요한 임무(任務)고 성격이다 하고 일을 많이 하려고 나서는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부조리(不條理)나 사회악(社會惡)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든지 어떤 사회든지 다 있는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가 계속적으로 그것과 더불어 늘 싸우기로 한다면 기독교는 무엇을 이루어 왔느냐 하면 기독교는 별로 이룬 것이 없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사회악을 향하여 싸우는 것은 기독교인만이 아니고 소위 일반적으로 정의(正義) 관념이나 정의의 열정이 강렬한 사람들도 다 나서서 이 사회의 부조리라든지 악에 대해서 타매도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만 꼭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한 결과는 한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 사회라는 것이 그러한 것들로 말미암아서 한때 어떠한 조그마한 영향을 안 받는 것은 아니겠지마는 전 역사의 흐르고 있는 도도한 사탄의 세력과 흑암의 거대한 세력의 움직임 앞에서 몇 사람이 사회의(社會義)를 위해서 부르짖고 노력하고 애를 쓰고 각성시키고 떠들고 하다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홍로점설(紅瀘点雪), 발갛게 단 화로에다 눈을 한줌 줏어다가 놓는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세계는 항상 거대한 암흑의 큰 움직임이 일방적으로 있는데 그를 향하여서 여러 사람들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애를 써서 싸워가며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가령 경제적으로 대단히 여러가지 악이 있는데 살기 어려운 것, 배 고픔이 있고 또 가난 속에서 비위생적이고 별 소망이 없고 애를 쓰는 말하자면 빈곤한 생활의 문제인데 빈곤한 생활은 특별히 동남아세아(東南亞細亞)에 심한데 그 생활 속에서 “아, 우리도 이렇게 빈곤하게만 밤낮 살게 아니라 어떻게든지 좀 숨을 쉬고 사는 것 같이 살아야지”하고 애를 써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정치가(政治家)도 당연히 그 생각을 하고 활동하는 것이고 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자기 사회의 빈곤을 구축(構築)하겠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회악에 대한 싸움 내용입니다. 이런 것은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회에서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공동으로 살게 하시면서 다 같이 하나의 정치체제(政治體制)속에서 같이 한 시민으로서 건실하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사회를 서로 도와가면서 붙들어 가면서 살도록 되어 있는데, 지혜롭고 능력 있는 위정자(爲政者)들이 나타나서 사회악 가령 여러가지 빈곤이나 질병이나 기타의 요소를 구제(救濟), 없애버리려고 하는 활동을 하면 그런 일로 다 같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가면서 하나님께서 내신 일반적인 은혜, 일반 은총의 기구로서의 정부도 자꾸 정당하게 서서 땅 위에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고 언론기관도 그렇게 해서 바르게 유지되는 것이고 또한 그여타 사람들의 공론(公論)들, 사람들의 여러가지 사회 활동 하는 것들, 문화의 내용이라는 것이 유지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서 바르게 해 나가면 그것이 잘 유지되는 것이고 그러지 아니할 것 같으면 가다가 큰 여러가지 재난을 만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회악이라는 것이 많은데서 서로 싸워나가는 것은 세상의 시민사회에 있어서 모든 시민의 공동의 부담으로, 공동의 의무로서 해 나가는 것으로서 누구만 특별히 훌륭해서 그것을 더 잘 알고 해야 하고 누구만은 덜 해야하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교회의 본연(本然)의 사명은 혹시 그런 것같이 강조하고 나가는 것이 정당하냐 하면 성경에서 가르친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라”는 이런 말씀들이 이 세상에 들어가서 사회악과 더불어 싸우고 극복해 가면서 정의(正義)와 인도(人道)를 세워가면서 살아가라는 말로 만일 해석해 가지고 거기에다가 적용하면 정당치 않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기 자신의 본연의 사명이 있어서 그 사명의 내용이라는 것은 비록 공의라든지 자비라든지 하는 것이 분명히 중요한 요소로 있어서 불공의 해서도 안되고 기독교인이 매정스럽고 각박해서 자비가 없다면 기독교인 답지 못한 것이지마는 그런 모든 개인적인 도덕이든지 혹은 가정적인 도덕이든지 사회 도덕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표준을 하고 있느냐 하면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땅에다가 드러낸다는 큰 목표와 동기와 그 사명하에서 그것을 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코 이 땅에 있는 일반 사회의 문화생활(文化生活)을 하는데 한 부분이 되어 가지고 문화 생활의 부분 속에서 교회 전체가 하나의 사명(使命)을 가지고 늘 활동하다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공의롭고 아름다웁고 선한 영광의 내용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교회(敎會)라고 하는 것이 있고 그 안에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결속해서 그 사회를 건설하되 서로 사랑하고 또 의롭게 대하고 또 자비로서 대하고 또 무엇보다도 겸손히 하나님을 늘 섬기면서 살아가는 생활로 대하는 것룩한 나라의 형식, 하나님의 거룩한 산업(産業)의 형식,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작용의 구체적인 형식을 취하고 살아가라는 데에 제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의미를 무시하고 덮어놓고 기독교가 거리로 나가야 하고 시장에 나가서 시장에 있는 부조리를 타매하기로 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기독교(基督敎)가 언제 타매해서 한번 승리했으며 제국주의적(帝國主義的)인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기독교가 언제 타매하고 승리를 하고 나온 일이 있었는가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 사회의 운영의 여러가지 형태가 때를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발생하는데 그런 여러가지 형태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배역(背逆)하고 하나님께 훼방(毁謗)할 것 같으면 기독교는 자기의 거룩한 것과 교회로서의 신앙을 확고하게 지키는 생활로서 그것을 반증(反證)하고 또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생활을 보증하는 것은 옳지마는 그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두드려 부수는 무슨 사회운동을 하고 민중 운동을 하고 집단 운동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기독교인이 압도적인 다수가 기도교인이 된다는 것을 예상하지 않는 것이고 대부분 많은 기독교 국가들의 다수가 기독교라고 하는 사람들도 진짜로는 기독교의 종교의 등록(登錄)을 한 것 뿐이지 기독교의 중생을 하였다든지 특별히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언제든지 소수(小數)인 것입니다. 소수가 어떤 일을 생각할 때 소수로서도 족히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명을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으로 바로 깨닫고 하는 것이지 다수의 사회 세력과 민중의 세력을 가지고야 비로소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집단 운동을 하는 데다가 주력하는 것은 원래가 기독교의 원칙이 아닙니다.

 

만일 로마의 제국 때 노예제도가 있을 때에 노예제도(奴隸制度)라는 그자체가 비공의, 불공의한 것이고 비인도적인 것이니까 이것을 타매하고 타파(打破)해야겠다 하고 제1세기에 기독교가 만일 사회적인 문제를 괘론(掛論)하고 나설 것이라면 그것을 들고나섰어야 하는데 노예제도를 들고 나선 일이 없고 오히려 성경은 노예에 대해서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네가 노예면 노예의 자리에서 그대로 충실하게 주인을 섬겨라. 섬기되 주를 섬기는 도리로서 섬기면 주께서 기뻐이 받으시는 것이다”(엡 6:5-8)고 가르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니체나 이런 사람들이 공격한데로 “기독교는 노예 종교다” 그런 괴악한 소리를 하겠지만 그러나 그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거기에 착목(着目)하고 주의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 끼리는 노예가 됐든지 귀족(貴族)이 됐든지 이미 그것이 없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요 형제로서 거룩한 아름다운 한 콤뮤니티(community), 거룩한 한 일체성(一體性)을 드러내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도 거룩한 것을 드러내면서 살아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것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밖에 나가서 무슨 사회 부조리니 무엇이니 하고 나서는 것을 볼 때 개인으로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개개인이 다 자기 자유로 하는 것이니까 누가 뭐라고 할 것은 아니나 교회를 끌고 나가서 교회라는 이름 하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본 도리가 아닙니다.

 

첫째 기독교에서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베풀어라”는 것은 기독교의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은혜의 왕국을 땅 위에다가 퍼쳐 나가는 거룩한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지 이 사회로 그냥 들어가서 섞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또 둘째로 중요한 것은 그런 거룩한 덕을 행할 때에는 그 덕에 대해서도 어떤 하나만 가지고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부조리니까 안 된다” 하고 그것만 가지고 떠들어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많은 도덕적인 요구, 가령 사랑을 하라든지 인자를 베풀라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냉담하면서 “아, 그것은 불공의하다. 그것은 부조리다. 그것은 안된다”고 한쪽만 가지고 그렇게 떠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르친 거룩한 도덕적인 요구는 하나도 독립해서 서있지 아니하고 항상 조화되게 서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바로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이 어떤 도덕적인 문제 하나만 들어서 이 세상의 윤리서라든지 사상서를 바라봄으로써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 율법을 우리가 공부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율법을 공부해 볼 것 같으면 어느 하나도 관련이 없이 저 혼자 따로 독립한 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 했지마는 적극적으로 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있는데 “사랑 하라”든지 “마음과 뜻과 성품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사랑하라”(신 6:5, 레 19:18)했는데 그것은 도무지 안 해도 괜찮은 것으로 하고 “무엇이 나쁘다. 무엇이 나쁘다. 무엇을 했으니 못쓰겠다”고 그것만 떠드는 것은 또한 율법의 큰 정신을 체득하는데 바른 소위가 아닙니다.

 

요컨데 공의나 인자나 이런 것이 가장 정당하게 발휘되는 도덕적인 사상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얻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면 그 말씀에 의해서 무엇이 정의냐, 무엇이 인자냐, 무엇이 긍휼이냐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중생한 새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적인 새로운 생명이 속에서 역사할 때만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적인 새생명이 역사함으로 성신을 의지해서 하지 아니하면 육신의 열매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일반 은총의 내용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대해서는 그런 문화적인 활동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내용을 땅 위에다가 증시하고 나가려고 하는데는 그런 것으로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누누히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공의나 인자도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하나의 인간으로 의롭고 또 관대(寬大)해라 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하닙니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항상 인애스럽고 의로와라. 네 당위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중요한 이유들이 있어서 이 위에서만 이 말씀들을 우리가 해석하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지 이런 여러가지 도리를 무시하고서 덮어놓고, “그러니까 이세상에 나가서 사회 부조리를 향해서 싸워야 하겠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먼저 할 것을 먼저 않고 다른 것을 들고나서면 기독교의 바른 자태를 외곡(嵬曲)시키는 것입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사회 복음이라해서 “사회에 여러가지 부조리가 있다. 노자(勞資)의 관계, 혹은 자본(資本)이 한쪽으로 축적(蓄積)되는 고도자본주의의 문제, 또 빈곤의 문제, 혹은 여러가지 병폐의 문제, 무슨 문제...” 하고서 사회 문제를 드러내고 “아프리카에서는 인종(人種)의 차멸의 문제가 있으니 어떻다”고 그런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늘 관심을 두고 기울여 나가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일인 것 같이 생각합니다. 사실상 세계의 큰 교단(敎壇)들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회(大會)를 열고 총회(總會)를 열면 그런 선언을 합니다. 지난 번에 카나다에서도 앵글리킨 교회의 총회를 모은 다음에 아프리카의 인종 투쟁의 문제에 대해서 선언을 하고 나왔는데 교회라는 것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을 위해 하나님이 이 땅 위에다가 교회를 세운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 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의 권세(權勢)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즉 마귀와 그 휘하에 많은 자들이 큰 세력을 잡고 잘 조직되어서 이리 저리 움직여 나가는 이런 큰 세력이 역사 위에 흘러 내려가는데 그것을 향해서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이 한 말들은 누구에게 향해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민중을 향해서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중은 그냥 사회가 아닙니다. 항상 주의할 것은 이스라엘 민중은 그것이 하나의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낼 단위(單位)로서의 구상적이고 조직적인 사회였습니다. 교회라는 말을 쓰자면 구약의 교회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마음대로 포악(暴惡)하게 사니까 교회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거룩한 도덕은 이런 것이 아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주의를 해서 우리가 제사와 번제, 수양의 기름 이런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먼저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그 거룩한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나서 그것이 무엇보다도 관대성(寬大性)즉 인자(仁慈)한 것 또 그것이 항상 공의로운 것 공평하고 의로운 것 이런 것으로 나타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청종하며 그와 동행(同行)하는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에게 주신 이 큰 은혜, 주님의 거룩한 품성에 의하여서만 주께서 받으실만한 아름다운 생활의 열매를 맺는 것이지 세상 사람과 같이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서, 열정에 의해서 이 세상 일에 나아가서 거연히 뛰어들고 간섭하는 것이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주님께서 저희를 붙들어 주셔서 거룩되이 주님을 섬기며 살며 마음이 참으로 관대하고 거룩하여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분부를 받자온 자로서의 본분을 잘 해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10.2./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