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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9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5:51

기도에 대하여 9

 

김홍전 목사

 

제9강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마태복음 7:15-26



우리가 몇주일에 걸쳐서 종교의 형성이라는 것과 또 형성에 의한 자기의 종교적 공덕, 또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형식의 종교, 그래서 마침내 외식(外飾)한다는 문제 이런것들을 생각해 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무엘상 15장 22절, 23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주께서 싫어버리시는 것, 주께서 왜 그 명령하신 제의 즉 제사(祭祀)와 절기(節期)와 또 여러 가지 가시적(可視的)인 종교의 형태를 어느 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서 또 어느 때는 맹렬하게 타매하시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중요한 이유의 몇가지를 우리가 지금 생각해 나가는 중인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사무엘상 15장 22절, 23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제 고집대로 하는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하고 사무엘이 사울을 중요하게 책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 형태를 벗어나서 하나의 왕국 형태를 취하고 싶어서 “우리도 다른 나라 같이 왕을 가지게 합소서. 그리하여 전쟁 때 그 왕이 우리를 명령해서 전쟁에 나가게 합소서”(삼상8:20)하고 간절히 왕국 되기를 원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사사제도(師士制度)의 민주적이고 동시에 직접 하나님의 통치의 관계를 구현하고 있는 특이한 그 정치제도의 가치를 모르고 세상 주위에 있는 여러 나라의 왕국 형태를 부럽게 생각해서 왕국을 정할 때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들의 완매(頑昧)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저급한 정신에 대해서 깨우쳐서 말씀을 하셨어도 알지 못하고 원하는 까닭에 사울과 같은 왕이 결국 그들에게 생겨났습니다.

 

그 때에 사울 왕이 행동한 여러 가지 가운데는 왕국의 형태로 전제적인 왕권을 수립해 보려는 노력을 해 왔지마는 아직 사사라는 특이한 제도에서 왕국의 확고한 제도의 기초를 다 세우기가 어려우니까 점진적으로 행했을지라도 지향하는 바는 일종의 전제왕권(專制王權) 수립에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정책(政策) 가운데 종교 관념이라는 것이 결국은 그의 성격상 형성해 나가는 종교는 포머티비즘(formativism)적인 종교를 가지는 경향을 자꾸 뚜렷이 보여 나갔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 자기의 왕권(王權)의 위신(威身)이라는 것을 존중하는 생각 때문에, 금방 여호와 앞에 중대한 잘못을 저질러 자기 옷을 씻고 무릎을 꿇고 재무덤에 앉아서 뭇사람의 환시(環視)하는 속에서 여호와 앞에 자기 죄를 자복하는 그러한 순진하고 여호와만 절대로 의지하는 태도가 없고, 비록 자기가 아말렉을 다 도륙(屠戮)치 않고 짐승을 살려두고 왕 아각을 그냥 살려두었던 자기의 짓이 하나님 앞에 잘못됐다는 것을 사무엘의 책망으로 알았을 때라도 백성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범죄했으니 이제 너희는 떠들지 말고 다 같이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같이 바라고 구해라” 이렇게 백성을 신칙(申飭)하고 동원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연결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사무엘을 보고서 “백성 앞에서는 그러지 마시고 나를 무시하지 말고 내 청하는 것을 들으시고 같이 내려 가십시다. 같이 좌석에 앉아서 나를 선대해 주는 모양을 그냥 뵈 주십시오. 이래서 내 위신을 살리는 모양을 그냥 뵈 주십시오” 하는 내내적인 교섭을 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이나 그의 생각, 그의 인간됨은 필연적으로 소위 형식 종교라는 형태를 수립하려고 하는 정책을 세우게 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방증(傍證)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형식 종교를 세워놓으며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그로 말미암아서 종교의 본질보다는 종교의 절차와 방법과 그 형태라는 것이 가장 저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점점 느끼게 되고 그러한 신학을 건설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카톨릭적 신학의 어떤 부분이 그렇듯이 그러한 것이 건설되었을 것이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전인류에게 주시는 거룩한 계시의 내용이 그것을 묵인하고 지나가실 까닭이 없어요. 이런 까닭에 맹렬하게 “제사 예물, 그 따위 것 차라리 나에게 가져오지 말아라. 또 누가 절기를 지키라고 너에게 강요(强要)했느냐. 헛되이 내 마당만 밟는 것이다.” 이렇게 무섭게 타매를 하신 것입니다.

 

이 정신을 우리가 확고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고하게 포착(捕捉)을 해야지 이런 정신이 미지근하고 그것은 그때 당시의 일이라고 생각하며는 형식적인, 종교 감정적인, 종교적인 절차에 치중하는, 즉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종교 생활로 그냥 치달음질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생활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가령 찬송을 하는 것이라든지 기도를 하는 것이라든지, 주일날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든지가 만일 그것 자체의 목표가 달성되지 아니할 때는 그것은 하나의 형해(形骸:사람의 몸과 뼈)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령 기도 같은 것을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많이 하고 오래하고 또한 “전문적으로 몇 해 동안을 기도하는 생활만 합니다” 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이런 발상법은 어데서 나오느냐 하면 사울의 경우와 같이 종교의 형태와 절차를 종교의 내용인 것으로 그릇되이 간취(看取)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거룩한 교회의 본질을 이루어 나갈 때에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무어냐 하면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 의식 집행하고, 교회 행사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다가 헤어지고 또 돌아가서는 자기의 문제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호소한다 해서 많은 기도를 하고 때를 따라서는 새벽에 나와서 열심으로 기도하고 울고 이렇게 종교의 형태라는 것을 참 중요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다가 치중하게 되는 것이라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름은 정통이고 성서신앙(聖書信仰)이라는 것을 자기네가 주장하여 “우리는 성경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그대로 믿습니다” 고 복음주의(福音主義)라고 자칭하고 정통(正統)이라고 자칭하고 나오지마는 이스라엘 사람이 정통이 아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신권위성(神權威性)을 부인해서 그렇게 무섭게 타매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울왕 자신도 복음주의가 아닌 것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의 신권위성이라는 것을 무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종교의 여러 가지 절차를 존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아말렉에게 그 많은 좋은 우양을 아낀 이유를 들어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그랬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해서 그 법칙대로 따라 나아가는 것이 받으실 만한 제사이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의 본의는 무시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종교의 형태만을 건설하면 그것이 무엇이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 이런 망상, 이것은 사울의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는 주어진 어떤 종교 형태 그것은 하나의 전통으로 늘 내려오는 것인데 이것을 그대로 잘 고수하고 지키고 나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 의식 때에 예배 의식 자체를 좌우간 반듯하게 갖추면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 가령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많은 말을 도도하게 나열해서 과연 예배를 간절히 중심으로 원하는 사람의 기도인가 그렇지 아니하고 예배 의식 하나를 성대하게 꾸미려고 그 자리에 나서서 이야기해 나가는 것인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요컨대 그러한 기조(基調) 즉 종교의 형태를 본질(本質)로 바꾸어서 생각하는 그릇된 이해 가운데서 발생한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행정상 고려 때문에 주일에 예배 기도를 목사가 직접 하지 아니하고 당회(堂會)라는 장로교의 조직에서는 당회 회원 혹은 장로(長老)에게 그것을 맡겨서 장로가 돌아가면서 하도록 하는 이런 형식을 취하는데 그것은 왜 발생했느냐, 목사가 하는 것보다는 장로가 하는 것이 효과가 있고 하나님께서 더 기뻐이 받으시는 까닭에 한 것이냐 하면 그러한 이론적 근거의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그것을 경험했지마는 그런 흔적이 없어요.

 

원래 목사가 준비했다가 중심으로 예배(禮拜)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인식한 사람답게 바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어서 영어로도 패스토럴 프레어(pastoral prayer), 목사의 기도라 그랬습니다. 그렇지마는 이제는 패스토럴 프레어를 아침 예배를 보며는 모-닝 프레어(morning prayer)라 하고 저녁 예배를 보면 이브닝 프레어(evening prayer)라고 이름을 고쳐 가지고 목사(牧師)나 여타 교회의 장로들이 번갈아 가면서 하게 됐는데 그런 경우에 예배가 무엇인지, 예배의 경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 것인지, 그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표와 가장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연구도 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에 있는 대로 이것 저것을 보태 가지고서 당당하게,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그러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긁어 주려고 이상하게 대중에 대한 호소의 효과를 노려 가지고 하는 기도들을 수없이 많이 들은 것을 여러분이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요컨대 종교의 형태라는 것과 어떤 형식을 밟아 나가는 것, 절차를 밟아 나가는 것 자체를 종교의 내용으로 생각하고 가령 그것이 완전치 못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물리치지 않고 받으시리라고 멋대로 오해한 까닭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명백하게 “누가 너에게 그 많은 제물을 요구 했느냐. 그리고 헛되이 누가 너에게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느냐” 하였습니다. 사실상 이것은 모세의 제도로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거룩한 명령인 것입니다. 즉 종교법인 것입니다.

 

율법의 중요한 한 부분, 사람이 하나님께 나올 때는 어떠한 법칙이 있느냐 할 때 종교법을 주었는데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나가는 법칙으로 준 것이지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종교적인 감정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방편으로 쓰라고 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방법을 써서 하나님 앞에 나가면 좋지만 하나님 앞에 나가지는 못했어도 자기의 종교 감정만 만족시켰으면 그만이라면 그것이 이교의 행동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썼고 아무리 성경을 사용하고 아무리 기도를 했어도 그게 이교적인 것입니다. 이런 이교적인 것을 16세기 종교개혁(宗敎改革) 시대에는 개혁자들이 명민(明敏)하게 척결(剔抉)해 가지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도 카토릭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참회(懺悔), 무한히 하는 기도, 거기에 따라 가지고 행하는 자선 사업까지 막 맹렬하게 타매를 했지마는 오늘날은 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면서 그것은 어디로 가고 카토릭과 같이 종교의 형태라는 것이 벌써 신학화(神學化)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의식에다가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어떤 사람이 예배를 보러 왔으며는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마음의 요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적어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겠다.“ “하나님이여 내 예배를 받아 주십시오.” 이것이 영혼을 가지고 영혼의 기능으로 사색(思索)할 수 있고 염원할 수 있는 개인 개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심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아니하고 교회 예배 의식에다가 자기가 몸을 던지고 의지해 버려서 교회에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낭독하고 설교하고 그러니까 예배 의식은 됐다. 그러니까 예배 의식에 가담했으니 나는 예배 드렸다. 이것이 뭐냐 하며는 종교의 형식주의 가운데 그런 전통 가운데 젖어있는 사람들의 흔히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신자들이 적겠는가 많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주일날 예배당에 가서 예배 의식에 조용히 앉아서 가담하면 그것으로 예배는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의식(意識)은 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개인이 하나님 앞에 절하기를 바라는 것이지 교회가 전체로 하나의 분위기를 가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교회가 살아있는 한 인격자가 아닌 까닭에 결국 영혼을 가진 하나 하나가, 즉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쏘울 바우잉(soul bowing), 영혼이 절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절하려면 그 의식(意識)이 있어야 하고 또 절하는 대상을 알아야 하고 또 대상의 가치를 바로 인식해야지 대상의 가치를 폄하(貶下)해서 인식하면 대단한 무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보고 인사할 때라도 고개를 숙이고 모자 벗고 하는 것은 형식이고 그에게 “내가 경의(敬意)를 표합니다” 하는 것이 그 진정(眞情)인 것입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하는데 저 사람은 어느 정도만큼 경의 표하는가는 그 사람이 그 상대를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굉장히 경의를 표해야 할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오매불망(寤寐不忘) 늘 찾아서 그에게는 내가 진정으로 모든 경의를 다 표하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길에서 만났는데 지나가는 사람 정도로만 알고 그 사람의 본색을 몰라서 그냥 실례하는 짓을 합니다. 경례는 하지마는 그만한 존경이 나에게서 안 나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실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禮)를 잃어버렸다, 혹은 무례(無禮)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교의 도덕만이라도 나중에 그것을 알았을 때에는 찾아가서 공손(恭遜)하게 복죄(服罪)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누구신지 몰라뵙고 참으로 이와 같이 무례를 행했사오니 제 무례와 제 무지(無知)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례라는 것은 경례 자체에 반드시 따라야 할 그리고 덜도 않고 결핍(缺乏)이 없는 상당한 경의를 함께 가져야 한다는 말인데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는 하나님께 상당한 즉 하나님께 대해서 내가 어떠한 정도의 마음을 기울여서 그 앞에 절을 해야 할 것인가를 바로 깨닫고 인식한 그 정도 안에서 내 영혼이 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눈 앞에 보이셨다면, 예수님과 같이 땅 위에 계셨다며는 우리는 예수님 앞에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하더라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의 영혼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쏘울 바우잉(Soul bowing)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보이지 않지마는 예수님은 당신의 약속대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했으며는 여기 와 계신 것이 분명하고, 계시니까 예수님께 나는 절을 해야 합니다. 경배(敬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禮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드리려며는 거기에 상당한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절대이시고 전능(全能)하시고 편재(遍在)이시고 또 전지(全知)하신 그 하나님, 그러면서 선하시고 즉 하나님의 선의 속성 가운데 특별히 우리를 향해서 늘 착하게 대하시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우리에게 있고 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있고 거룩하심이 있다. 이러한 속성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르게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심으로 내가 소홀히, 만홀(漫忽)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연히 자기 몸이나 자기의 태도도 단정(端正)하게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 의식 가운데 자기가 앉아서 가담한 것으로 그냥 예배 드렸느니라고 생각할 때는 그 가지고 있는 의식이 심히 부족합니다. 그 마음 가운데 자기의 상당한 경의(敬意)를 가져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와 둘이 같이 가는데, 아들이 어린 아이지만 상대가 아주 경의를 표해야 할 인물이라면 아들한테 “인사해라. 인사해” 하면서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며는 그 아들도 자기 마음 가운데 경의 여하를 불구하고 좌우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생각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어린 아이 된 사람은 자기 마음 가운데 전체로 하나님께 대한 상념(想念)을 종합적(綜合的)으로 좀더 풍부하게 가지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울지라도 좋아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사람이 아니신 것을 알고 높으신 분, 지극히 절대이신 분으로만 알고 그 분 앞에는 나의 모든 것을 드려도 다함이 없다 생각하고 마음 가운데 엎드려서 절하려는 심정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만한 정도 안에서만 주저앉았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장성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더 깊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더 바로 깨달아 나간다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무시하고 다만 그 의식(儀式)에 가담해서 내가 의식만 집행했으며는 나는 했느니라 생각하고 나가는 소홀한 생각은 어째서 발생했느냐 하면 이 전통적인 의식 존중, 전통적인 절차와 목적을 혼동하는 이런 사고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이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맹렬하게 타매하실 것입니다. “누가 너를 보고 주일날 예배당에 와서 내 마당만 헛되이 밟으라고 하더냐. 다시는 오지 말아라.” 그렇게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던 말씀과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참으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것이 여러 군데 있는데,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있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제사(祭祀)와 예물이 무엇으로 효과를 내느냐 하면 그것 보다는 더 앞서서 순종(順從)하는 것과 주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왜냐하면 거역하면 사술(邪術)의 죄이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 숭배의 죄다. 그런 까닭에 순종하고 들어라.” 그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제사와 예물보다 더 중요한 것, 제의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말을 우리가 생각할 때 얼른 생각나는 것은, 오늘 읽은 말씀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며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예배 의식을 집행하고 기도하고 호소한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물론 죽어 천당 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경계 가운데 그 사람이 들어서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경지(境地)가운데 들어가서 사는 사람은 나를 보고 “주여 주여” 하고 제의를 존중해서 그것만을 계속적으로 집행(執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잘못 행한 사람들의 예를 그 다음에 썼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러 귀신(鬼神)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해서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닙니까 하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가지고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심지어 귀신을 쫓아냈다, 실력과 능력을 증명을 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 “아 이렇게 실지로 권능이 배경이 되어서 입증(立證)을 했는데도 나는 주님이 인정할 사람이 아닙니까? 나는 주께서 승인 안 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그날에 물으니까,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나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했습니다. 불법, 즉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더라도 귀신 쫓아내는 일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꼭 요구하시는 것을 행한 것이 아니더라도 어떤 권능이 있는 일을 남에게 보일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귀신을 잘 쫓아내고 어떤 사람이 교직(敎職)을 가지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이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해서 “그것이 본질적인 일, 네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바른 기독교의 정신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것을 참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여기서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보훈의 마지막 부분인데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6:1下半),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 혹은 “아버지”, 혹은 “하나님” 이런 말로 20여 번 썼지만 여기 한 군데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7:21下)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냥 하나님의 뜻이라고 않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너는 네 마음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러지만 그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즉 최종적으로 예수님 당신이 계시하고 승인(承認)하신 그 하나님의 뜻,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 뜻이라야지 너희가 멋대로 생각한 신개념 가운데서 추출(抽出)해서 만들어 내서 “이것이 신의(神意)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사람이 해명한다고 해서 주관적으로 제 멋대로 해 놓으며는 아닌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사실상 아닌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무슨 일이고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습니다”고 자기가 잘못하고 일을 저질러서 최선을 해야 할 것을 차선(次善)으로 해 놓고서는 나중에 “다 하나님의 뜻대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셨는데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런 말 하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나는 좀 더 잘 했다면 그렇게 안 될 뻔 했지마는 내가 못나고 내 힘이 부족하고 과거에 내 잘못이 누적(累積)되어 나의 결핍이 큰 까닭에 오늘날 한 것이 이것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 그것으로 겨우 내가 열매를 거두었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아닙니다. “좀 더 잘 했다면 좋을 뻔 했다. 하지마는 너는 네 재주껏 해 봐도 네 잘못이 누적된 것이 많고 결핍이 많아서 너는 그것 밖에 못하게 되었구나” 하시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것 참 기쁘다. 참 그것이 꼭 내가 네게서 원하고 꼭 내가 너한테서 하려고 하던 계획이다”고 그렇게 말 안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심히 부족한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이 후회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해놓고 미급(未及)히 생각하고 미하(微瑕:약간의 결점. 조그마한 흠)히 생각할 것이 많은 것입니다. “하! 내가 과거에 좀 더 일찍부터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일찍부터 진실하게 살고 잘 장성을 하고 일찍부터 공허한 짓을 아니했더면, 낭비(浪費)를 적게 했더면 오늘 날 이 모양, 이 정도에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마는 이제는 무관계하다. 내 자신이 힘이 없고 내 자신이 이만큼 밖에 못 됐으니 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해 놓고서는 나 자신도 “좀더 잘 했더면 좋을 뻔 했는데, 좀더 할 수 있는 기회가 젊어서는 있었는데 나는 내 잘못으로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허송한 까닭에 오늘날 이만한 꼬락서니 밖에는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놓고서는 “참, 이것은 최선이다. 이거야말로 좋다. 가장 훌륭하다. 하나님도 가장 기뻐하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못나고 결핍투성이인 어떤 업적을 이루시려고 애 쓰셨는가?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을 하면 결론으로는 아무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행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행하신 분은 한 분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한분 예수님의 공로에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를 쓰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주십시오 할 때 비로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의 경지 안에, 그 카테고리(category) 안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어떤 착한 일 하나를 생각해 가지고 내가 경영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직접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뜻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몇가지를 전제적(前提的)으로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 뜻을 먼저는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그냥 밀려가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혼을 주시고 영혼의 기능이 작용하게 하신 것은 자기가 인식하고 자기가 인식한 다음엔 목적을 가지고 거기에 대한 방안을 세우고 또 거기에 대해서 어떤 능력을 얻을 것인가 즉 하나님의 성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이렇게 해서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지 그것 없이 나는 나대로 내 멋대로 하고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건실한 생각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가 의식하기를 바라는 일은, 그렇게 아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도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라는 것이 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는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시고 요구하시는 그 뜻을 내가 이루었다는 사실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것이 병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못 이룬 것이 많고 하나님은 섭리(攝理)를 가지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고 그러는 것 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묘(奇妙)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내 뜻을 행하라”는 요구는 하나님의 섭리로 다 할 터이니까 네가 잘못해도 네가 무의식해도 네가 모르고 나가더라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네가 모르고 못하면 못한 만큼 결핍을 냈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알아야 하고 인식해야 하고 또 목적 의식을 가져야 하고 그를 향해서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또 알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가 적어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어떻게 해서 나는 마련할 것인가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서 그저 목적만 알고서 그냥 내가 한번 가볼까 덮어놓고 튀어나가야 못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디든지 가고 싶어면 거기 갈 만한 수단을 강구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예료(豫料)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해요. 즉 목적이 있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또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현실화 할 능력 이 세 가지는 늘 있어야 하지마는 거기에 보태어서 하나 더 자기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이루려고 해야지 이루려고 안하면 목적도 있고 방법도 있고 또한 능력이 다 구비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않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자 해야지 않고자 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뜻을 이루려는 간절한 마음의 요구가 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서 얻느냐,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우리에게 첫째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성신으로 지시한다 할 때는 그냥 백지의 무식한 위치에서 지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내시고 경영하신 크신 뜻이 무엇인가를 보이시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내시고 경영하시는 크신 뜻 안에서 나는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일을 시키는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하나님께서 인류를 내시고 인류 가운데에서 당신의 특수한 백성 즉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따로 불러내시사 경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사상이 체계있게 서있어야 그 체계 가운데서 나는 어떤 길을 가고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지 그런 것은 전연 알지도 못하고 어떠한 개개의 사물에 있어서 자기가 여러 가지 일을 해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렇게 사소하게 자자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자꾸 찾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왜 일이 아니냐, 때를 따라서 보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늘어 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가 많은 것입니다. 왜? 당초의 경영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자기가 경영한 것이고 결코 하나님과 의논해 가지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하나님이 하라고 놓은 그 길로 지금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먼저 자기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 다 드리고 또 자기의 길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 주시는 당위에 대해서 충성해 나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하나님은 나의 하는 일을 합작(合作)해서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태도는 절대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主)요 우리는 종이지, 하나님은 나의 의논 상대자, 컨설턴트(consultant)로 같이 의논해 가지고 이것 해 나갑시다 그렇게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인류를 내신 크신 본의와 그 안에서 거룩한 교회를 택하사 당신의 백성을 삼으시고 친히 섭리하시고 경영하시고 주장하시는 그 큰 도리와 그 안에서 나도 뽑힘을 받아 가지고 그 한 분자가 되어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한 분자가 되어서 나아가는 것과 이런 기초 위에서 거기서 나는 어떠한 방면의 은사(恩賜)를 주심으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인가, 또 둘째로 나의 날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생애의 신성한 의무와 당위는 무엇인가 이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충성해 나가면서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한 품성의 생활에서 자기의 당위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땅 위에서 행하려고 하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적인 품성(品性)을 가지고 즉 그리스도적인 도덕적 성격을 가지고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 그대로를 놓아두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해서 이루어지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너희는 성신을 쫓아 행하라”. 이 성신을 쫓아 행함으로서 비로소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이룬다고 갈라디아 5장 16절에 “성신을 쫓아 행하라” 고 말하고, 22절에 가서 성신을 쫓아 행하는 사람의 열매를 쭉 나열한 것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良善)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것이 다 그리스도적인 품성, 크라이스틀라이크 캐릭터(christlike character)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신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신을 거스리고, 성신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 5:16-17). 육신의 소욕은 성신을 거스린다는 까닭에 사람이 인간적인 본성(本性)을 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성신을 거스리는 일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온전히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가지고만 시작을 해야합니다. 즉 성신을 쫓아 행함으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성신을 쫓아 행하되 내게 주신 바 은사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거룩한 교회의 분자로서 자기가 충실히 살고 자기의 당위를 충실히 행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당위란 자기가 가정인이면 가정에, 또 자기가 이 세상 사회인이면 사회의 일원으로서 각각 무슨 직업을 맡았든지 사회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자기의 당위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해야하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해야하고 어떤 사람은 농사짓고 어떤 사람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이런 것들은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만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주신 당위인 까닭에 그리스도를 섬기는 도리로서 그것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주께서 나에게 주신 일을 내가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점방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할지라도 그냥 나혼자 일해 가지고 돈 벌어 먹고 살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자나 하는 것입니다. 신자 같으면 자기 하는 직업 자체의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아무 상관도 없다. 이렇게 해서 돈을 벌어가지고 연보하는 것이 상관이다.” 그런 것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활 전부가, 자기의 날마다 먹고 사는 이 양식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이렇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라는 제사는 자기 곡식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전부 드림이 됐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 이 일을 충실히 감당해 가지고 돈을 벌어 가지고 자식도 기르고 교육도 시키고 경건한 인격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부탁해서 더욱 하나님 말씀도 가르치고 또는 집에서도 때를 따라서 주께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함으로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백성답게 이 땅 위에서 사는 것은 나 혼자로는 미미한 것 같지마는 합하고 합해서 바른 도리에서만 서며는 땅위에서 이 세상과 더불어 늘 대립해서 대전(對戰)해 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변증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증해 나가는 일이 된다 하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 버는 것이 용이하거나 돈 버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는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위(當爲)요 하라는 것입니다. 오트니스(oughtness), 마땅히 그 사람이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일을 충실히 해 나가면서 하나님 앞에 좀 더 의미있게 하나님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내가 쓰일 부분이 없겠는가를 누구든지 늘 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간절히 늘 기도하면서 주께서 은혜로 나를 인도하시기를 바라는 것이지 자기가 덤벙 뛰어들어가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우선 현실적인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 즉 그 말씀을 순종한다는 그 거룩한 도리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여, 주께서 은혜를 주셔서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날마다 우리 매일매일 생활 가운데서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매일 생활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좀더 바로 알게 하시며 이리하여 주께서 저희에게 주신 생활이 의미가 있고 충실하게 하시며 그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목적이 분명하게 하시고 자기 행복을 건설하기 위해서 사는 것 같은 생각을 버리고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땅 위에다가 증시해 나가는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이제부터 더 깊이 깨닫고 나가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9.4./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