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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6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5:23

기도에 대하여 6

 

김홍전 목사

 

제6강 형성주의의 종교


이사야 1장 10-17절



신령한 생활과 기도,즉 신령한 자의 기도의 정자(正姿)를 이야기해 나가는 중인데 듣지 아니하시는 기도의 이유와 우리의 신령한 생활과의 관계를 생각해 나가는 중입니다.오늘은 또 하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지난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하는 야고보 4장 2절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다시 또 하나 이사야서 1장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생각하겠습니다.

 

이사야 1장 10-17절까지 보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맹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이사야시대는 찬란(燦爛)하고 화려하던 시대입니다.히스기야가 제왕(帝王)으로 있으면서 통치하고 열심으로 주를 의지하는 왕으로서 종교의 일대 개혁(改革)을 한 시대인데 그런 개혁이 있었을지라도 많은 사람의 실생활을 보며는 그 개혁과 또 경건(敬虔)한 모든 생활 행위,종교행위는 그 속에 당연히 수반(隋伴)했어야 할 진정한 능력과 실질이 없어서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맹렬하게 저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베푸신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고 보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을 볼 것 같으면 그들이 많은 제사를 드린 이야기가 있어요.그 사람들을 마치 무엇에 비교했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과 관원 같이 다루셨습니다.“너희 소돔의 관원들아,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너희 고모라의 백성아,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나는 수양의 번제(燔祭)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 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4절까지의 말씀은 그렇고 그 다음에는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많은 제물을 가져다 드리지마는 이 많은 제물에 대해서 이사야의 그 예리(銳利)한 필치(筆致)로,말하자면 거룩한 하나님의 생각으로서의 홀리 새타이어(Holysatire),거룩한 하나님의 조소(嘲笑),비웃음이 이 이사야의 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그 형식에 가득차고 기구(器具)가 찬란하고 볼품이 있는 그 종교적인 형태(形態)를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비난하신 것입니다.무수한 제물(祭物)을 가져왔고 수양의 피,염소의 피 또 양의 피 이것을 갖다 많이 하나님 앞에 보이며 드렸고,수많은 송아지를 드렸으며 그뿐 아니라 월삭(月朔) 즉 매월 첫날을 안식일(安息日)로 생각해서 모였습니다.또 일년에 적어도 여러 개의 중요한 절기들이 있습니다.유월절(逾越節)이라든지 무교절(無酵節)이라든지 추수절(秋收節) 즉 오순절(五旬節)이라는 것,이 칠칠절(七七節) 다음엔 성력(聖曆)으로 보면 7월에 나팔절이 있고 대속죄일(代贖罪日)이 있고 또 그 다음엔 초막절(草幕節)이라는 것 이런 것들이 쭉 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유월절 즉 무교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들이 여호와께서 지정하신 곳 곧 성전(聖殿)이있는 곳으로 식구들을 다 데리고 모여서 하나님 앞에 먹고 즐기며 제사를 드리고 찬송(讚頌)하고 이것도 종교의 아주 성대한 행사였습니다.이러한 큰 행사를 절기 따라서 행하는 것들이,요컨대 제사 드리는 모든 제의(祭儀)나 제의에 또한 곁들여서 지켜야 할 중요한 절기 혹은 안식일 이런 모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의 중요한 제도의 부분들입니다.즉 제사를 드린다는 것과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어떤 절기를 지키며 찬송하고 축하를 드리고 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는 이런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든 제의 종교 형태의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이런 것들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비난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제사법을 내신 분은 하나님이시오. 절기를 정해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성막을 어떻게 지으라고 양식,식양(式樣)을 다 가츠쳐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이런 것을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리라고 하는 중요한 상징으로서의 성막이 그들 속에 있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보물(寶物)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다(출 19:6)는 이 거룩한 소망과 자격을 저들이 충분히 향유(享有)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뜻을 보이시고 저들에게 모든 제의에 필요한 제도(制度)를 주시고 그뿐더러 그 사람들이 마땅히 준거(準據)하고 살 거룩한 법칙들을 주시고 또한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내용들을 여러가지의 상태로 계시(啓示)하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주로 선지자(先知者)들을 통해서든지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들을 쓰셔서 저들에게 가르쳐 주셔야 할 여러가지 것들을 가르쳐 주심으로,이 세상 어느 백성도 이렇게 풍부한 계시에 접촉해서 살지 못하고 일반계시 속에서만 희미하게 하나님을 더듬어서 많은 우상 종교를 가지고 있었을 그 시기에, 참된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이며 참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는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다 가장 친근하게 또 가장 순순하게 절절이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그 가르쳐 주신 도리대로 바르게 산다는 생활 가운데에서 차츰차츰 깃들여진 중요한 상태가 뭐냐하며는 종교의 형식과 형태를 아름답게 꾸미고 엄격하게 지키는 전통이 섰고 이 전통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츰차츰 그것을 맹수(盲守), 고수(固守)하기 시작을 해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생활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자체가 자기네를 개성화(個性化)하고 그 민족(民族)을 특성화 (特性化)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알아서,도덕적인 노력 하에서 이 일을 지켜나가는 중에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이 수반해야 할 요구하는 내용은 점점 희미하여져서 마침내 상실(喪失)되고 그것의 형태와 형성한 축조(築造), 구조만이 남았습니다.이렇게 된 것이 결국 형식만 남아있는,형태만 남아있는 형성주의(形成主義)적인 종교입니다.형성주의, 혹은 형성식(形成式),즉 포멀리즘(Formalism)이라는 것입니다.한개의 폼(Form)을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이 폼이라는 것은 결국은 사람이 어떤 종교적인 도덕의 레벨(level)을 가지고 비판해 보면 그것이 외식(外食)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폼(Form)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필요하게 됐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왜 종교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으며 또 여러가지 형태를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꾸며서 거기에 맞추려고 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첫째 중요한 문제는 모든 종교의 여러가지 형태라는 것은 원래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요구에 부응(副應)해서 발생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는 야훼(הוהי) 하나님을 공경하는 종교입니다.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려고 할 것 같으며는 그 공경하는 마음이 첫째 중요한 것이고,공경하는 방법으로서 하나님이 내리신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이것이 여러가지 제의(祭衣) 방법,제사의 의식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날 말로 말하면 그리스도교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해서 살아가는 거룩한 도리인 것입니다.하나님과 화목(和睦)해서 살아가는 거룩한 상태는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功效)를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그 권세에서 벗겨내 주시고 그 노예 시장에서 사 내오셨다는 속량(贖良)의 큰 사실을 확신(確信)함으로써 그가 우리를 속량하신 실질(實質)을 맛보는 데에서 하나님께 늘 가까이 가고 하나님과 서로 교통하는 화목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제의(祭衣)의 형식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즉 속죄제(贖罪祭)가 있고 속건제(贖愆祭)와 같이 죄에 대한 제사가 있고난 후에는 번제(燔祭)가 있고 소제(素祭)가 있으며 마지막에 화목제(和睦祭)가 있어요.이 화목제라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화해를 하고 화목하고 지내가는 것입니다.화기가 애애하게 서로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그런고로 구약에 나타나는 제의가 가르치는 그 거룩한 도리든지,신약에 있어서의 복음,도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내용이든지가 다른 것은 없어요.서로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본질 가운데 들어가면 그 본질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생활 태도나 생활 형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께 늘 가까이 하고 만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고하고 사는 이런 아주 지근(至近)의, 지척(咫尺)의 거리의 생활을 하며는 필연적으로 그는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더 깨닫고 알려고 하는 말씀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기뻐하시지 아니 하시는 무슨 일에 대해서 자기가 명백히 아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배제(排除)하고 배척하고 포기해 버리고 살아 나아가는 것입니다.여기서 경건한 생활의 형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건한 생활의 형태가 그 속에 있는 필연적인 신령(神靈)한 능력과 생명의 요구에 의해서 발생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교회에 있어서는 좌우간 추장(推獎)되는 일,하라고 권하는 일이므로 교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자식다운 떳떳한 자기의 특성인 줄로 알고 살아나가는데,신앙이 연약하든지 혹은 정도가 저급한 신자들이 그런 생활의 형태를 볼 때 그 형태를 모방하는 것입니다.그 방식과 형태를 모방해서 형성해 놓으면 형성한 데 의해서 자기도 같은 경지에 도달했노라고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 본질적인 차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열어주신 유일의 방법이 있어요.그 유일의 방법은 아까도 이야기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속량과 속죄(贖罪), 죄책(罪責)에서 속하시고 죄의 권세에서 속량(贖良)해 내신 이 공로를 내가 믿고 의지하고,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까닭에 자기를 도무지 의지하지 않고 따라서 자기의 무능한 것을 절실하게 느껴서 자기를 붙들어 주시기를 호소하고 이래서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신(神)에 의지해서 거기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과 속죄를 관념(觀念)으로 믿고 또 어떤 정도에 있어서 행복주의적인 종교 관념에 의해서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즉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 하는 보수(報酬)와 행복을 바라서 믿고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그러면서 동시에 자기네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위(當爲)의 경지에 도달하겠다 해서 경건의 모양과 형태를 자기 자신을 자제(自制)해 가면서 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제해 가면서 사람이 경건의 형태를 지어나가는 일이라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의 도덕적 수양의 방식과 꼭 같은 것입니다.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그 정욕적인 것과 인간적인 여러 가지 약점을 될 수 있는대로 절제하고 억제해 가면서 자기네가 생각한 어떠한 고도의 윤리 형태 가운데,윤리의 상태 가운데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있는데 안 믿는 사람들 중 도덕군자(道德君子)라든지 성인이라든지 현인(賢人)이라든지가 다 그렇게해서 심지어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고 현인군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기독교적인 모든 사회상 윤리를 자기가 바로 지키기 위해서나 제의상 요구를 바로 지키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수양과 노력을 하듯이 도덕적인 노력과 수양을 해 가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절제(節制)해 나가고 용기가 없는 자기를 스스로 자책(自責)하고 용기를 고무(鼓舞)시켜 가면서 도달하는 어떤 일정한 인격적인 도덕적인 상태라는 것은 세상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가상하고 훌륭한 것입니다.왜냐하면 이 세상의 성인군자,현인이 다 그 식으로 해서 되는 것입니다.도덕적인 노력에 의해서, 절제에 의해서 자기를 경건(敬虔)한 자로 도덕적인 자로 앙상(仰上)시켜 놓는 것입니다.여기에 형성주의적(形成主義的)인 결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이런 형성주의적인 결과라는 것은 그 외모에 있어서 참으로 신령한 생활의 형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그런고로 사람들은 보통 외모로는 얼른 구분하기 어려워서 “아,저렇게 노력해서 하나의 단정하고 경건한 기독교인을 형성하는 것이구나” 곧 그렇게 알 수 있게 됩니다.곧 그렇게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또 생각하고 나갈 것은 이와 같은 절제,자제와 자책과 고무(鼓舞), 자기에게 용기를 부어주는 것 같은 것,또 어떤 선과 의를 보고서 자기가 할 수 있는 힘도 없고 하기도 싫지마는 자기를 꾸짖어 가면서 “이것은 의로운 일이다.당위(當爲)다.하지 아니할 수가 있느냐” 하고 자기를 채직질해가면서 그 일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는 것,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세상의 성인들이나 현인군자 신사들이 다 도달해야 하는 경지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에 가장 제일 기초적인 일이 무엇이냐,제일 초보적인 일이 어디 있느냐 하며는 “비록 내가 마음 가운데 스스로 그 원하는 도덕적인 심정의 상태를 못 가졌을지라도 최소한도로 내 언동(言動)은 그렇게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시작인 것입니다.그렇게 해서 군자들은 더욱 자기를 자책해 가면서 “네가 껍데기만 그러고 속은 정반대의 심정을 가졌으니 그게 어디 양심적이냐,그것은 비양심적이다” 하고 자기를 스스로 꾸짖어 가면서 자기의 마음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여기에 진실한,사람의 자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우리는 인도주의적(人道主義的)인 노력을 해나가고 자기 인격을 연마(硏磨)하는 사람들의 기록을 보며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어요.자기의 외모가 자기의 중심의 심상에 병행하지 못하는 까닭에 마음 가운데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어요.

 

자기 마음 가운데 미움이 있고 미움을 사람에게 가져서는 아니되겠다는 박애주의(博愛主義)적인 정신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박애를 부르짖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는 중심에 미움을 가져서는 도저히 안 될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을 자기가 아무리 지지 눌러도 누를 수 없이 그냥 들고 일어나는 무서운 힘 앞에서 자기는 전부 그냥 항복해 버리고 “에이,할 수 없다.나는 그 사람을 이제 적극적으로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미워해야 하겠느냐 하면 그 사람이 그렇게 못해요.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 첫째, 사회의 이목이라는 것도 있고 법률(法律)이라는 것도 있고 또 그 다음에는 사회가 말하는 바 의(義)의 표준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러한 여러 가지 크라이테리아(criteria)에 비춰서 자기를 생각할 때 “내가 가다가 넘어질지라도 이 미워하는 심정이 바깥으로 터져나오지 않게라도 최소한도는 해야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최소한도로 자기가 남을 미워하는 그 심정을 힘껏 누르는 것입니다.힘껏 누르고 그를 대할 때는 온언순사(溫言順辭)로 화기애애하게 대하는 것입니다.그리고 돌아서서 속으로는 무서운 귀신의 얼굴을 자기 속에다가 품고 삽니다.이것이 초보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출발해서 자기 스스로의 마음 상태가 자기의 외모의 온언순사와 외모의 부드러운 정에 부합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돌아가서는 또 자기를 책망하는 자기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톨스토이도 소설 가운데 “모든 사람과 같이 네풀루도프도 두 개의 자기가 있었다”고 쓰듯이,책망하면서 “에이,그래서야 쓰느냐.그래서는 안 되겠다.사람을 그렇게 미워해서야 쓰느냐.네 마음 가운데 미워하면서 껍데기만 화기애애하게 온언순사를 쓴다고 그것이 진짜냐?안 되겠다.너는 아주 기근(基根)이 낮차운 사람이다.너는 인간적으로서도 가장 열등(劣等)한 사람이 아니냐” 하고 자기를 스스로 타매하고 자기를 스스로 아주 비열하게 짓밟아 가면서 막 채찍으로 후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서는 적극적으로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한 미움을 없애야겠다고 애를 쓰고 괴로워하고 내가 그 사람한테 가서 내 진정을 한번 토로해 보면 이것이 평안해질까 생각하고,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러한 미워하는 상대를 찾아가서 간곡하게 말했습니다.“내가 오늘 참 자복을 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당신을 극진히 미워했습니다.생각하면 제가 여러가지로 부족해서,덕이 부족해서 이렇게 미워했는데 용서해 주십시오.” “허허,나를 미워했든지 나를 좋아했든지 내게 하등 상관이 무엇입니까?아무런 것도 내게 준 것도 없고 뺏은 것도 없는데 내가 당신한테 용서할 것이 무엇입니까?그런 것은 다 서로 잊어버리기로 합시다.당신이 스스로 지은 마음의 조작이니 당신이 스스로 그린 그림 당신이 지우시오. 나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요.” 이렇게 말하면,“그렇게 하지 마시고 제가 당신에게 미움을 가졌다는 것만 하더라도 당신 앞에 죄를 지은 사람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하,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나는 그런 일에 대해서 도무지 가타부타 할 생각이 없소이다.그런 일에 대해서는 일체로 서로 다 물에 흘리고 잊어버리기로 합시다.” “참 대단히 감사합니다.이제부터는 진정으로 이런 미움을 도무지 아니 가지겠습니다” 하고 돌아와서 자기를 돌아보면, “내가 오늘 그 미워하던 사람한테 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그렇게 미워할 만한 인물이 아니더라.그것을 생각할 때 미워할 것이 없다” 해 가지고 자기를 달래기도 하는 것입니다.달랠 수도 있지만 또 암만 달래봐도 여전히 미움이 꿈틀꿈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선인들,수양을 하고 있는 도덕군자들에게 다 있는 일이고 있던 일입니다.이것이 자제(自制)를 한다,절제(節制)를 한다는 상황의 한 중요한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요구도 꼭같은 양식으로 쌓아올려 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기독교의 도덕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 3:15)해서 하지 말라는 것도 많이 있지만 하지 말라는 것만 안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라고 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는 까닭에 그 하라고 하는 일을 해 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애를 쓰고 노력해 가지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남에게 자비도 베풀어 보고 자선도 하고 남을 돕기도 하고 또 사회에 대해서 기여(寄與)해 보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해 나가는 상태를 볼 때 보통 그런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복락이나 받고 이 세상에서 못되면 훗 세상에라도 좋은 복락이라도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노력해서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과 규례의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들을 잘 지켜 보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 그것이 성자로 보입니다.훌륭한 사람으로 보입니다.존경할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교회는 어느덧 이러한 형성주의적인 도덕 행동을 고귀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형성주의적인 도덕 행위는 전체의 생활 모든 면에 굉장하게 뻗어나가지 아니할지라도 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가상(嘉尙)하게 보이는 것입니다.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법을 하나하나 빈틈이 없이 다 지켜가지는 못할지라도 어떠한 부분에 있어서는 자기가 지킵니다.즉 최소한도로 어떤 부분이라도 지켜서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는 사람의 자태를 꾸며야겠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가령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 하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모토로 삼았으며는 “다른 것은 별로 못하더라도 내가 기도라도 해야겠다” 하고서는 날마다 엎드려 기도하고 예배당에 가서도 오래 기도하고 자꾸 기도하는 형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기도를 열심으로 합니다.

 

또 그러지 아니하면 “내가 교회에서 최소한도로 이것이라도 하나 잘 맡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일이 되어서 교인들이 많이 예배를 드리러 오며는 문 앞에 섰다가 안내하는 직분이라도 내가 해야겠다고 문 앞에 있다가 “이리로 가시지요, 저리로 가시지요” 하고 자리를 찾아주기도 하고 그것을 자기가 하나의 봉사로 생각합니다.기독교 대회가 있는데 각처에서 사람이 많이 오면 ”그 사람들이 정거장에 와서 대회 회장까지 길을 찾아 가려면 복잡한 도시에서 잘 모를 터이니 다른 것은 내가 못해도 최소한도로 내가 자동차를 가지고 그 분들을 맞이해서 한 열 번쯤 자동차로 그들을 대회장에다가 실어다 주고 와야겠다고 마음에 작정하고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자기가 다른 것을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허나 자기가 생각해서 이것이 주님을 봉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은 자기가 해 보겠다 하고 나아가서 하는 것입니다.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다 갸륵한 일이라,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그것이 안 됐다고 생각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태,스타일이라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교회의 도덕 행동을 하나의 형성주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아까 말한 것과 같이 각고면려(刻苦勉勵)해서 자기가 절제해 가면서 쌓아올리는 것이 됐든지 많은 부분을 다 못 지켜도 어떤 부분을 열심으로 지켜보겠다고 작정하고 자꾸 지켜가는 일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고 살아가라고 주신 율법을 다 지켜가는 것은 아닙니다.부분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결국 많은 부분을 지켰든지 적은부분을 지켰든지 부분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일에 대해서 뭐라고 가르쳤는고 하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된다든지 혹은 적덕(積德)이 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해석을 안 해 주는데 교회나 사람들은 그런 것을 그렇게 해석하기 쉬운 것입니다.자동차를 가지고 사람을 맞이하러 가는 그 일 자체는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필요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렇게 하는 것을 자기가 “이것이라도 기독교인의 자태를 형성하는 나의 수양과 수덕(修德)이요 덕을 쌓는 일이니 하겠다” 한다며는 사람을 실어다 주었으니까 그 혜택을 입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혜택이 되겠지마는 결과로는 형성주의적인 것을 그대로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이 조장되어 나가는 데에서 발생할 모든 사이비(似而非)적인 것에 대해 하나도 개선한 것이 안 됩니다.여러분 이런 것을 주의하셔야 해요.

 

형성주의적인 것,포멀리즘(formalism)의 윤리 행동이라든지 도덕 행동이라든지 이것이 차츰차츰 강렬해 질 것 같으며는 그리고 그것을 될 수 있는대로 많은 부분에 미쳐서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에는 거기에 무엇이 깃들이는고 하니 아까 말한 대로 속은 반대지만 껍데기만이라도 최소한도로 만들어내야겠다고 하는 생활 태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이 껍데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고도의 도덕관에서 바라볼 때는 외식(外飾)이라 하는 것입니다.그런고로 외식이라는 것이 반드시 악의 동기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희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화 있을지로다”(마 23:13,15)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아주 가짜로 더럽고 너절한 것같이 생각하기 쉽지마는 실지로 바리새인들이라는 경건주의자 핫시딤(Hassidim), 에스라 시대 이후에 “경건히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살아가겠다”고 일어난 이 사람들의 열렬한 종교운동에서 발생한 것이 바리새 운동인데 결코 외식으로 시작한 운동이 아닌 것입니다.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선의 노력에 호소하고 의지해서 최소한도로 이렇게라도 해야겠다고서는 자꾸 해 나가는 것,예를 들면 “과거에 우리는 우상을 섬기고 살았지만 최소한도로 우리가 다른 도덕적인 부덕이 많을지라도 이제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에스라의 대개혁(改革)과 부흥이래로 그들은 그것을 주장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 세 위(位)라든지 세 품위라든지 세 인격이라든지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는 하나님과 일체라고 하시니까 사람으로서는 훼방(毁謗)하는 자니까 돌로 쳐죽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이만큼 그들의 형성주의라는 것이 결국을 어떤 면에 있어서는 완전한 외식의 명백한 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기본(歸基本)하면 외식을 하려고 했다는 그것보다 “껍데기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속이 없으면 속이 없다 해서 껍데기를 포기해 버리며는 아무 것도 않는 자가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이 외식(外飾)의 문제에 대해서,“껍데기, 그 까짓것은 없애 버려라. 속만 있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말 안하셨어요.“화 있을진저,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바라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하셨습니다.“하나는 버려도 좋다.형체는 버려도 좋다.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버려서는 아니된다.그러나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할 수 없을 때,둘 중에 하나 밖에 할 수 없을 때 본질(本質)을 가지고 있으면 좋을 터인데 본질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사실상 신령한 위치에 올라가서 그 본질이 있으면 형태가 생기는 것입니다)본질을 가질 수 없었을 때는 무엇을 가지느냐 하며는 형태를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 대해서 말씀을 간절히 순종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명령인데,그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능력이 박약할 때에는 적어도 제의(祭衣)생활(生活)에서만은 충실하게 해야겠다는 것입니다.즉 “제사드리는 일과 월삭과 절기와 안식일 지키는 일은 충실히 하자.” 말하자면 “율법의 많은 부분 가운데 다른 것을 다 잘못 지키고 사회법을 내가 잘못 지킬지라도 종교법만이라도 잘 지키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안에 들어오며는 예수 믿는 일의 형태라도 잘 해나가자,즉 기도도 열심으로 하고 예배당도 열심으로 다니고 교회 일도 열심으로 하자. 세상에 나가서 인격적인 도덕적인 성품의 생활은 볼 것이 없고 안 믿는 착한 사람만 못하다 할지라도 교회에 들어와서는 열심으로 해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용인(容認)했습니다.이것이 히스기야 시대에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위대한 개혁으로 그 마음을 요구했지마는 마음이 따라가기 전에 형태를 다 만들어 놓아서 우상은 포기하고 제의(祭儀)는 존중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존중하는 제의와 의식을 열심으로 지켜나가니까 이사야는 일어나서 맹렬히 타매(墮罵)하기를 “너희의 월삭과 절기와 안식일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그 많은 수양과 수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내게 무엇이 되느냐.나는 그 기름에 배불렀다.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고 헛되이 내 마당만 밟지 말아라.” 오히려 이렇게 타매했습니다.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가 많이 기도해도 내가 안 듣고 너희가 하나님 앞에 손을 펴고 기도를 올려도 나는 안 들을 것이다.” 들어주지 아니하는 기도의 이유의 중요한 것 하나가 이 종교의 형성주의입니다.외식주의라고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형성주의,포멀리즘(formalism)이라는 것입니다.형성해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 나가겠다는 이 주의 때문에 기도해도 안 들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 해요.

 

하나님이 얼마나 이러한 제의의 문제에 대해서 그릇되이 지키고 나아가던 사람들을 타매하셨는가 하면 성경은 너무나 많은 데에서 그 이야기를 했어요.하나님이 제사법(祭祀法)을 냈어요. 하나님이 월삭, 절기, 안식일을 냈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을 이번에는 타매(唾罵)하는 이가 또한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이 교회를 내고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셨고 하나님이 찬송하라고 하셨지만 그것만을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다른 법,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배제한다든지 무시했다든지 돌아보지 않는다든지 무관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 기도 내가 안 듣겠다.네 찬송 안 받는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것 하지 말아라” 하십니다.이런 것을 우리는 오늘날 주의해야 해요.교회의 타락의 제의(祭儀)는 남고 정신과 신령한 능력은 어데로 빠지는 것입니다.그런고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딤후3:5),이제는 능력까지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 말입니다.우리는 이것을 주의하십시다. 같이 기도하시지요.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저희가 성신님을 의지해서 아버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신령한 생활의 경계에 도달해 있지 아니하고 도덕적인 요구와 자기 자세와 자기 스스로의 편달과 자책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이루어 보고자 어떤 부분을 각고면려해서 이루어 나아간다 하더라도 이것이 오히려 교회의 형성주의적인 그릇된 여러가지 상태를 빚어 내놓는 것뿐이고 그것이 극단으로 나아갈 때는 외식 가운데 들어가지 아니할 수 없고 또 그것은 하나의 필요로써 하게 되어 나가는 이 현실을 이제 생각했사옵니다.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크게 경종을 울리사 저희들의 스스로의 생활을 돌아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인가를 바르게 볼 수 있게 합소서.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항상 저회적(低回的)인 저급한 위치에서 돌고 있지 않게 합소서.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 1977.8.14/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