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 Reviews/Korean

기도에 대하여 4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5:07

기도에 대하여 4

 

김홍전 목사


제4강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디모데후서 3장 12-17절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읽은 시편 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는 이 말씀을 볼 때 현실상 주의 말씀이 어떻게 내 발에 등 노릇을 하며 내게 빛 노릇을 하는가 이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서 빛이 되고 등이 되는 이 실용(實用)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으로 우리들이 그것을 받을 만한 위치에 서있을 때 받는 것입니다마는 모든 사람에게 신자라고 해서 반드시 다 그것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주님의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조건 위에,어떤 차원(次元)위에 서있을 때 --“성신의 검”이라(엡6:17)하는 말이 과연 옳다고 수긍(首肯)할 만큼 그것이 적진(敵陣)과 더불어 싸울 때에 무기(武器)로써 능력있게 사용되는 것이올시다마는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은 것이 적용되는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우리 생활 경험 가운데서 알 수 있습니다.어떤 사람에게는 주님의 말씀은 마치 의사의 손에 있는 예리한 메쓰와 같고,또한 양쪽에 날이 서 있는 아주 정밀한 칼과 같아서 “신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하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경우에 모든 사람에게 다같이 그렇게 늘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일정한 조건하에, 일정한 상태하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이렇게 주의 말씀의 실질상 작용이라는 것은 항상 거기에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다 구비되어서 성립(成立)되어 나가는 것인데,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고 내 길에 빛이 된다 하는 이 말씀의 응험(應驗)도 어떤 조건 하에서 그것이 성립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며는 그것이 먼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등명(燈明)이 되는가,등이 되고 빛이 되는가 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말씀에 주의할 것 같으며는 첫째 내 발에 등 노릇하는 주의 말씀의 용(用)을 내가 어느 때 현실적으로 맛보느냐 하며는 내가 내 발길이 어두워서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때입니다.그 때에 등불이 나에게 비춰서 “자, 여기는 위험이 있고 여기는 이러하니 너는 이렇게 가거라” 하고 나를 깨닫게 하사 바르게 발을 디디게 하시는 것입니다.‘내 길에 빛이라’ 하는 말도 자기가 자기의 생애에 있어서 어느 길로 가야 옳을지 알지 못하는 때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어떠한 조건 하에서 거룩한 빛이 비췸으로 “아!내 길은 이것이구나” 하고 자기의 길을 깨닫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되어서 그의 생애의 길을 비춰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그렇지 아니하면 그가 자기의 생애를 뜻대로 결정해서 신기루(蜃氣樓)와 같은 행복을 추구하거나 이상을 추구해서 자기의 길을 자정(自定)하고 걸어가게 되기 쉬운 것이고 그러고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순진스럽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길이 평탄하도록 기도하고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생애를,자기의 모든 하는 일을 여호와께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또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오지 하나님만을,여호와만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만 비로소 그에게 빛이 비취어서 그리로 나아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발걸음을 어디로 행하여야 할는지 알지 못할 때에 가르쳐 주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약 1:5). 그런 말씀이 있어요.“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 이것은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그러나 이 문제를 우리가 바르게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여, 내가 지금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있사오니 지혜를 주사 어찌할 바를 가르쳐 줍소서” 하고 기도하면 그대로 주신다 하는 말인데 그렇게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 꼭 조건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어요.“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께 지혜를 구할 때도 첫째 누구든지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하거든,지혜가 부족한 줄 알거든,그리고 “달리 구할 데가 없이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만 이 지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하는 것입니다.만일 달리 지혜를 찾아볼 나머지 방책이 있다면 그는 그 방책을 쓸 것입니다.혹은 그 방책은 뒤에 두어두고 하나님께 구하다가 아무 것도 오지 않고 아무 응답도 없고 그러면 “할 수 없다.문제는 절박해 왔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 그러면 마지막에 감추어 두었던 이 방식이라도 써야겠다” 하고 자기가 최후에 의지해야 할 것 하나는 뒤에다 두어두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절대로 믿음의 소치(所致)가 아닌 것입니다.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네가 지혜가 없다고 그러니 내가 주마” 하고 그냥 주고 싶어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때에는 믿음을 요구하시고 또 하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바로 배워서 요구하시는 믿음을 과연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하셨으니까 꼭 믿음으로만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의심을 하고서는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는 이 말씀과 함께 믿음으로 구하며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다른 말씀이 있는 것을 알 것입니다.마태복음 21장 21절로부터 보십시다.

 

주의 수난 주간 첫날 월요일 아침 일찍이 예수께서 베다니에 계시다가 예루살렘을 향해서 오시는 도중에 혹시 무엇 잡수실 것이 있는가 하고 이파리가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바라보셨습니다.그때가 유월절(逾越節) 때로 작은 어린 열매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때인데 아무 것도 없이 이파리만 무성했습니다.무화과 나무 잎사귀는 열매와 함께 나오는 것이고 열매가 아직 익지 않을 때 잎사귀가 먼저 나와 무성하지는 않는 것이 그 특성인 까닭에 잎사귀가 무성한 것으로 봐서는 거기 먹을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렇지 아니하면 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無化果) 나무입니다.그러나 아무 것도 열매를 얻지 못하시고 예수님께서 “네가 이제부터는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하셨더니 그날 오후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이 바라보고 묻기를 “선생님, 저주하신 무화과가 뿌리로부터 말랐습니다.어찜이니이까” 하고 물을 때에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을 믿으라.” 마가복음 11장 22절에는 “하나님을 믿으라” 하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마태복음에 있어서는 2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셨습니다.마가복음 11장 22절로 24절에 같은 말이 있는데 22절에는 “예수께서 저들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 말씀이 있고 무화과에 관한 이야기와 이산이수(移山移水)에 관한 이야기,이 산을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에 특별히 기도와 연결해서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아주 철저한 믿음입니다.안 받았지만 이미 받은 것으로,“이제는 꼭 받은 것이다” 하고 신지무의(信之無疑)하고 무요동하는 그런 태도는 그대로 되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문제가 있고 동시에 어떻게 하며는 이런 믿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어떻게 하면 이러한 경우에 믿음이 있게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아까 지혜를 구할 때에도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어요.“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만일 의심한다며는 두 마음을 품어 정향(定向)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했어요.여기 무화과의 경우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있는 이 말씀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라.그리고 신이무의(信而無疑)하면 이산이수(移山移水)를 하리라” 하는 이야기인데,특별히 기도하여 구할 때 그것이 반드시 되리라고 믿으면,다른 말로 말하면 이미 받은 것이라고 그렇게 믿을 수가 있다며는 그것은 그대로 되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1장 5절에 있는 지혜를 구하는 문제에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하는 말에 의해서,그러면 모든 경우에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를 하느냐고 반문해볼 때,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혹여 믿음으로 구하는 일도 있어요.그러나 어떤 것은 믿음을 가지고 꼭 그대로 되리라고 믿고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렇다면 여기 이 말대로 보면 우리는 두 마음을 품어서 정향이 없는 사람인가 하고 반문(反問)해야 할 것입니다.우리의 기도의 많은 부분은 꼭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주시기를 바라면서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이 일을 들어주시되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닐 때에는 꼭 그것이 이루어 주기를 우리가 바랄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그런 때에는 “주여 그 뜻을 이루시옵소서” 하는 말을 딱 붙이는 것입니다.이것이 또한 정당한 기도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인가 할 때 그러한 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왜냐하면 여기 야고보서의 말씀과 또 마태복음 21장 22절 말씀 혹은 같은 이야기가 마가복음 11장 24절에 있는데, 이 말씀들은 양쪽의 극단을 이야기하고 대체로 우리는 그 중간 지대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첫째 마태복음에나 마가복음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행한 문제에 대해서 “그런고로 너희들이 기도하여 구할 때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그러면 그대로 되리라” 했으며는 자기가 기도하고서는 “뭐, 이것은 꼭 영낙없이 된다” 하고 믿을 수 있는 어떤 확신할 만한 조건이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확신할 만한 조건이 있으니까 그렇게 믿는 것이지 확신할 만한 아무 것도 없는데,“주여 믿습니다.믿습니다” 하고 자기가 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믿습니다 하는 말을 열 번 되풀이해도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확신할 만한 조건이 있는데 안 믿으면 그것은 문제입니다.확신할 만한 조건이 있어서 그 조건 때문에 자기가 기도한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 들어주시지 않는다.반드시 들어주신다” 하는 것을 아주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도 더 분명하게 저희가 믿을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에 이런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모든 기도가 그런 상태에 다 올라있는 것은 아닙니다.

 

첫째 확신할 만한 조건이 있을 때라는 것은 뭐냐,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기도하는 내용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을 알고 있고 자기가 지금 구하는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시는 일이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런 사실들을 내가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내가 기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주시기를 원하니까 주실 것이다”고 그렇게는 않는 것입니다.왜냐하며는 “너희가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이렇게 구하지 아니함으로 못 받을 수가 많은 것입니다.그러니까 우리에게 기도의 최후의 결정을 하게는 만드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고 지금 구하며는 지금 주시고자 하시는 확실한 약속,확실한 지시를 그에게 보이셨을 때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많은 우리의 기도는 그런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로 야고보서 1장에 있는 말씀은 왜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어 정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느냐 하면 이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하나님의 말씀에 약속을 한 것입니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말씀 한 마디면 벌써 약속입니다.하나님께서 약속을 했는데,하나님의 약속이 명문으로 우리에게 누가 봐도 손으로 잡듯이 분명하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못 믿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그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서 즉 이심(二心)을 품어서 정향이 없는 사람이다.이렇게 이심무정향(二心無定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한 사실도 안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한 내용에 준거(準據)해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어찌 할는지 알지 못하고 아직 하나님의 뜻이 어떨는지 모르는 데서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로서는 그것이 있었다면 좋겠고 있으며는 하나님께 이것이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겠다고 스스로 판정한 까닭에 하나님 앞에 “그것을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이렇게 구하나 우리의 그런 기도는 주로 무엇이냐 하며는 아직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그 뜻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대답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신속해도 그렇고 그렇지 않으면 먼저 그 뜻을 기도하는 가운데 일러주시기를,가르쳐 주시기를 바라는 심정이 더 크고,그 뜻을 가르쳐 주신 다음에는 그 뜻에 의해서 언제 주시든지 주시는 것입니다.그 뜻이 지금 당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오래 있다가 주시기로 한다며는 오래 있다가 받는 것입니다.그 뜻이 우리에게 그것을 안 주시고 다른 것으로 주시기로 한다며는 다른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그 뜻이 우리에게 그것을 안 주시고 “네가 지금 네 상태 그것이 넉넉하다.왜냐하면 네가 약해서 그것을 메워달라고 보충해 달라고 기도하지마는 내 능력은 네 약한데서 이루어진다”(참고, 고후 12:9)고 하시면 “아!그러면 약한 그대로 감사합니다” 고 찬송하는 것입니다.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도리입니다.

 

그런 까닭에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은 ‘믿음을 가지고 구하라’ 할 때는 믿을만한 조건을 주신 것입니다.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성경에는 그 말씀을 가지고 약속하신 것이 있어요.가령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우리의 의식주에 대한 문제는 주께서 나라와 의(義)를 구할 때 거기다가 더해 주시리라는 이것도 약속하신 것입니다.또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의 풍성에 따라서 우리의 쓸 것을 채워주신다.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향해서 하는 약속입니다.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구체적인 조건을 약속도 하시고 혹은 전체의 생활에 대한 지시도 약속을 하시는 것이고,또 우리들의 물질상 문제도 약속을 하시고 우리의 모든 수요(需要)에 대해서 어떻게 공급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이런 것을 읽을 대는 그것을 받아 가지고 그것은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하는 말씀이 있습니다.두 세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내가 그 중에 있으마 했으면 그것도 약속인 것입니다.그런고로 별로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시지 아니하시는 것같이 생각하고 “주 예수여,두 세 사람이 여기 주의 이름으로 이제 모여서 예배하오니 계십소서” 하고 빌지 않는 것입니다.왜?주님은 분명히 현재 여기도 와 계신다,임재(臨在)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다 믿는 것입니다.우리의 눈으로는 안 보이지마는 분명히 여기 우리 회원 하나가 앉아있는 것같이 명확하게 주님은 같이 앉아 계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와 교통을 하시고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주의 약속인 것입니다.그런 약속을 못 믿으며는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마치 바다 물결이 바람에 밀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같이 시세(時勢)따라서 어느 때는 그런가 하고 종교적 감정이 나면 그쪽으로 쏠리고 어느 때는 세상이 부르며는 세상으로 쏠리고 신(信)과 불신(不信)의 사이를 방황하고 다니는 이런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거룩한 여러 가지 은혜들을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 길에 빛이 되고 내 발에 등불이 된다 할 때,첫째는 “네가 지혜를 믿고 구하므로 또 믿고 기다림으로 하나님께서 네게 빛을 비취사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내가 지금 당장에 어떻게 할 길을 알지 못할 때에 빛으로 비친다는 것은 내가 필요한 현실상 지혜가 없을 때 그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지혜를 내게 주시면 그 지혜를 네게 주시면 그 지혜에 의해서 나는 애 행보를 할 것이다는 말입니다.이 지혜를 받으려고 한 것 같으며는 분명히 약속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약속을 믿는 믿음이든지 마태복음 21장에 있는 이 무화과나무에 관한 말씀 끝에 하신 그 기도에 관한 믿음 혹은 마가복음 11장 24절에 있는 그 기도에 대해서든지 어떻게 해야 그런 믿음을 우리가 가지게 되느냐,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약속한 것을 신지무의하고 의지해 버릴 수 가 있겠는가 이런 것을 우리가 좀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왜냐하면 분명히 약속이 있는데도 못 믿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보고 믿어라,믿어라” 한다고 해서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마음이 그것을 믿을 만한 근기(根氣)혹은 믿을만한 위치에 못 있는 사람인 까닭에 그렇습니다.그 마음이 이 세상으로 어두워져 가지고 딱 갇혀 있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도 도저히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믿음은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까닭에 그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지혜에 관한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볼 것 같으며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약속,지혜를 주신다는 말씀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을까 할 때에 우리가 첫째로 중요히 생각할 문제가 있어요.하나님 나라의 그 말씀 안에 있는 큰 도리로 볼 때에 요컨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지시하시고 인도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임시적으로, 일시적으로 자기의 지혜가 궁해 가지고서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이상을 추구해서 목표를 향해서 가는 도중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지혜가 궁해서 “하나님이여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이것을 타개하겠습니까”고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고 “오냐,내가 너에게 타개할 길을 가르쳐 주마,타개할 길을 네가 배워가지고 그것을 타개해서 네가 세운 그 목적,네가 지금 추구하는 그 행복을 잘 추구해서 나아가거라” 하고 목전의 곤란을 열어주시사 그가 자정(自定)하고 자의로 만들어낸 자기의 인생의 길을 걷게 만드시겠는가 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큰 법칙은 그런 법이 없다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전체가 자기 인생의 길이 빛을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실 때,“네 길을 네 스스로 정하고 거기에 비취옵소서 하고 방향을 네가 정해놓고 하지 말아라” 그것입니다.“네가 네 생의 길의 방향을 더 정해놓고 이 길로 갈 터인데 어떻게 가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보아서 되는 일이 아니다.그것입니다.왜냐하며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했으며는 그 가는 목표가 그리스도께서 정해 주신 그것을 향해서 가제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조건 세 가지를 붙일 때 그중 하나가 십자가를 날마다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혹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물론 제 십자가를 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해요)나를 따라오너라”(마 16:24, 눅 9:23) 그랬어요.“나를 따르라. 다른 데로 네 마음대로 십자가 지고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네 십자가를 지어라.내가 졌던 십자가를 네가 대신 지라는 말은 아니다. 네가 져야 할 십자가가 하나 있다.그것을 지고 그것이 비록 남의 몰이해와 남의 수모(受侮)와 모멸(侮蔑)을 받는 일이라도 내가 받던 수모와 모멸과 같은 것을 받는 일일지라도 십자가를 네가 지고 있으니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걱정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그 다음에는 나를 좇으라.” 예수님이 앞에 가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뒤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한다 할 때도 의지할 만큼 예수님은 생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구름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구름이 눈앞에 아무리 뿌연하게 공중에 떠 있어도 몸뚱이를 구름에다가 내던지지 못하는 것입니다.나중에는 자빠지는 것입니다.우리는 안개를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상(像)이 안개나 구름 같아서는 아니 됩니다.생생해서 의지해도 조금치라도 낙심하거나 혹은 실패할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예수님을 우리는 바라보면서 매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목표가 벌써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믿어야 할 그분이 거기 분명히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우리가 얻을 수 잇느냐,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따라갈 수 있느냐 할 때,“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5-16).“어떻게 해야 한다.너는 이것 잘못하고 있다.또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성경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을 바르게 가질 수가 잇고 또한 둘째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가 듣고 성신을 의지함으로 즉 구하고 의지하는 마음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가지도록 신생(新生),중생(衆生)가운데 이미 그에게 비치하셨으니까 이 중생한 새로운 생명의 본능적인 작용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고자 그리로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그런 경우에 성신을 의지해서 나의 믿음의 부족을 채우시기를 바라고 나의 의지가 없는 것을 책망해 주시기를 바라서 성경이 나에게 책망도 하고 또 “이렇게 해야 한다” 하고 방법을 교훈하기도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내가 그 안에서 차츰차츰 장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차츰차츰 장성하는 그 심정은 처음에 시작을 할 때에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습니다”하는 확신 가운데 혹은 확실한 마음의 작정 가운데 시작하는 것입니다.요컨대 나의 전 생애를 주님 앞에 온전히 드리고 “주께서 나를 전부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6절이나 누가복음 5장 36절에 “새 감에서 생에 조각을 떼어다가 헌옷을 깁는 사람이 없다,새 옷에서 한 조각을 딱 썰면 새 옷만 버리고 헌옷에다가 그것을 붙여도 새것이 헌옷을 잡아당겨서 도저히 헌옷도 유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새 옷을 누구든지 씻어내 가지고 이렇게 헌옷을 깁는 사람이 없다” 하는 이런 비유를 하셨는데,이런 비유의 말씀의 첫째의 뜻은 새로운 제도에 관한 이야기지마는 거기서 우리가 또한 간취(看取)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의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나에게 향하사 나를 계획하신 경영을 새 옷에 비교를 하나면 우리의 잘 아는 것과 이상과 뭐 우리가 하겠다는 이런 것들은 더러운 옷과 같은 것입니다.이사야 64장 6절에 “우리의 의는 (혹은 의로운 행실은)다 더러운 옷 같으며” 이렇게 말을 했어요.이러한 더러운 옷과 같은 자기 스스로의 이상(理想)과 선(善)과 자기의 행복의 추구와 자기의 선미의 추구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어떤 부분만을 기워대고 나머지 부분은 또한 자기가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해 나가겠다 하는 것은 새 옷에서 옷감을 하나를 찢어내 가지고 헌 옷에다가 꿰매는 것과 마찬가지다.새 옷도 버리고 헌옷도 못쓰게 되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새 옷도 버린다 하는 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그렇게 부분적으로만 그 사람에게 적용된다며는 전체의 하나님의 뜻에 조화도 되지 않고 맞지도 않고 전체 하나님의 뜻을 공연히 파괴하는 일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뜻은 철두철미(徹頭徹尾)처음부터 끝까지,마치 옷의 어떤 부분은 헌 것,어떤 부분은 새것이 아닌 것같이 철두철미하게 그를 입혀야 하는 것입니다.그가 철두철미하게 처음부터 자기의 생애를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려 놓고야 비로소 자기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가는 것입니다.“하나님이여,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생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만 가기로 하는데 이제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그 말씀대로 진리의 성신이 나를 인도해 주시기를 즉 지시해 주시기를 바라는데 여기서 되는 어떻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디로 갈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내 일생이나 내 진 생애나 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지금 나아가야 할 길이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를 나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하신 바가 있으니까,내 생애의 계획하신 바가 있으니까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이래서 요지부동하게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렇게 믿는 믿음으로야만 지혜가 부족할 때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生)을 내 일생을 경영하셨다고 하더라도 나는 영혼을 가지고 하나의 인격으로 사는 까닭에,그 인격을 기재와 같이 쓰지 않는 까닭에 그 인격이 스스로 자기의 생에 대해서 판단도 하게 하시고 행보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경영 안에서 우리가 그 뜻대로 살되 그 뜻을 내가 알아서 내가 자의지(自意志)로 스스로 자기의 영혼의 기능이 충분히 활동해서 그것을 이루어 나가도록 해서 나가시는 것입니다.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하나님 뜻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그런 까닭에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전체를 맡긴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를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지혜를 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위하여 계획하신 바가 있으실 터이니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인지 그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바랐으니까 가르쳐 주시는 대로 나는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겠다” 이렇게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네 일생을 계획하셨다며는 요지부동하게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하면 안 되고 꼭 이렇게만 하게 한다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취사선택(取捨選擇)할 수 있는 여유를 많이 주신 것입니다.그러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내 위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전체의 뜻을 이루시고 마는 것입니다.그런 까닭에 내가 그것 때문에 걱정할 것 없는 것입니다.그리고 나는 내 자신의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저도 따라서 판단을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것입니다.다 만전(萬全)의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지시하신다고 하실 때 그것은 기계적으로 그렇게 아니하면 아니되게 절대적인 사실로만 늘 오는 것은 아니고,나에게 생각도 하게 하시고 내 장성의 정도 따라서 판단도 하게 하시고 나에게 스스로 원하게도 하시고 결정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실 때에는 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자 이렇게 생겼으니 너 이렇게 하겠는가 저렇게 하겠는가?” 하십니다.그래서 혹은 내가 판단이 어리고 장성이 유치해서 가다가 부딪치면 부딪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시고 마련하셔서 부딪칠지라도 그것으로 실패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사도 바울 선생이 아시아현에서 전도하려고 할 때 성신이 “아시아도에서는 전하지 말라”(행 16:6)하시니까 이번에는 어디로 갔는고 하니 무시야 앞에 가서 비두니아로 나가려고 했지만 거기서도 “예수의 신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7),이렇게 몇 번 부딪쳐 가지고 비로소 드로아로 갔고 드로아에 가서야 비로소 마게도니아로 갈 것을 작정한 것입니다.그때까지는 마게도니아로 가리라는 것을 확정한 일이 없습니다.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의 환상을 봤을 때 그것이 최후에 결정적인 사실로 마게도니아로 가야겠다고 정했어요. 물론 마게도니아로 가는 것이 어떨까,장차에는 헬라의 지대에도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어쩔까,아마 생각건대 요원한 장래 이야기로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장래가 아니다.이제 네가 가거라” 하는 뜻으로 마게도니아 사람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으로 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 사람의 정도에 따라서,그 사람의 신앙의 장성의 분량에 따라서 인도하십니다.빈틈이 없이 그냥 바로 조루루 가게 되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혹시 가다가 이리 가고 저리 가는 것 같으지마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가지고 다른 길로 빗겨 가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께서 그의 장성의 정도에 따라서 인도하시는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지혜에 대해서도 결국은 우가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생각할 때에 모든 내용은 지금까지 배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그 때에 갑자기 성경을 보며는 성경이 우리에게 환연히 무엇을 깨닫게 해 준다고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요.내가 무슨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 배운 성경 말씀과 그런 거룩한 도리가 함께 다 움직이는 것이지 그 때 묘하게 잠깐 10분 동안이나 혹은 한 30분 동안 읽은 성경 말씀이 결국 나를 지시해 가지고 가게 한다든지 그렇게 기이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성경을 보아야 하고 성경을 볼 때는 거기서 가라든지 오라든지 지시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마는 성경을 그렇게 이상하게 첨귀가 나타나는 식으로 시취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사상은 사상대로 받고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받고 도덕적인 교훈은 도덕적인 교훈으로 받아서 그것이 나의 속에 쌓여 있어 가지고 내가 인생에 대해서나 특별히 인생의 길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깨닫게 한 것입니다.또 성경만 들여다 보고 앉아서야만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는 이에게 가서 묻기도 하는 것이고 혹은 다른 사람이 무슨 좋은 도리를 가지고서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할 때 거기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우리 속에 잇는 모든 인식의 내용 자체가 성신님의 조명(照明)과 역사 하심으로 나에게 바른 길을 판단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봐 가지고 양식을 보충하고 우리의 지식을 더 풍부케 하는 것이 옳지 아미 가지고 있는 지식만 가지고 항상 만사를 판단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활을 풍부케 해 주시는 양식으로,자료로써 나에게는 늘 필요한 것이지마는 지혜는 성신께 의지해서 그가 반드시 가르쳐 주시리라고 믿고 기대하고 또한 만일 안 가르쳐 주면 이렇게 하겠다고 뒤에 다가 괴상한 것을 놓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없다는 진실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늘 기도하고 나가는 것입니다.그러면 내 발의 등불로써 비춰 주시는 것입니다.“아!이리 가라고 하시는 것이구나 ”내가 거기서 보고서는 그 다음에 판단을 해서 여기는 돌이 있고 여기는 나쁘니 여기는 뛰어야겠다든지 이렇게 걸어야 하겠다든지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주신 능력대로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빚이고 내 발에 등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주의 말씀이 저희에게 저의의 일생의 길에 빛으로서 늘 비취고 매일매일 생활의 행보에서 매시각 매시각 발을 옮기는데 등불로서 늘 비춰주는 그 큰 은혜의 실용이 저희 안에서 분명히 있을 수 있도록 저희가 전체를 주님께 맡기고 일생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거룩한 길로 갈 것으로 확정한 자로 늘 주님의 뜻을 추구해 나아가게 하시옵소서.이러면 주께서는 인도하시리라 하시고 또 하나님의 신으로 인도를 받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사오니 주의 인도를 믿고 또한 진리의 성신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저희를 안내하고 지시하시리라는 말씀을 믿고 주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교훈과 저희의 잘못을 책망하심과 또한 저희를 늘 기르시려고 가르쳐 주시는 이 풍부한 여러 가지 양식을 주의 말씀을 공부하는 데서 건전하게 늘 얻어가게 하시고, 또한 때를 따라서 저희에게 지혜가 부족한 것을 알 때, 구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있고 의지할 다른 것이 있는 것으로 망상하지 말고 주께 다 맡기고 의지하고 그 약속을 믿고 구하고 나아가서 과연 주의 말씀의 거룩한 도리와 주님의 그 거룩한 뜻이 그 말씀 가운데 나타난 것이 나를 매일매일 인도하시는 것을 맛보아 알게 하시옵소서.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7.31./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