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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5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5:16

기도에 대하여 5

 

김홍전 목사

 

제5강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야고보서 4장 1-10절



신령한 생활과 기도 혹은 신령한 자의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오는 중인데 오늘은 특별히 야고보서 4장에서 몇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첫째, 2절 하반절에 있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하는 말씀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일의 근본적인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되 정당하게 하나님 앞에 구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할 터인데 구하지 아니함으로 즉 자기가 요구를 아니한다는 말은 아니고 정당하게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아니함으로 못 받는다 하는 것입니다.겸해서 그 아래 말씀을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情欲)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는 말이 있어서 구한다고 다 받아지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우선 구하지 아니하고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하는 이 큰 도리를 여기서 우리가 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자기가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왜냐하면 그 위에 있는 말을 볼 때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하고 사람들이 싸우고 다투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너희의 그 싸움이나 다툼이라는 것의 근원이 어디냐” 하는 말씀입니다.“너희 지체(肢體)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 지체 가운데 즉 개인이면 개인의 속에 있는 부분 가운데라는 의미가 되고, 교회면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는 그렇게 싸우는 정욕을 가지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여기 보면 무엇을 원해서 욕심을 안내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입니다)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시기하고 그것을 열망하더라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이 사람은 무엇을 아주 욕심을 내는 사람이고 남이 혹은 그것을 가졌는가 해서 남이 가진 것을 몹시 시기해서 “왜 내가 가져야지 그 사람이 가진다는 말이냐” 하고 시기해서 그것을 제가 가지고 싶어 가지고서는 몹시 안달하기는 해도 그래도 얻지 못하고 취하지도 못하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자기가 폭력으로 늑탈(勒奪)하고자 그냥 좇아가서 다투고 싸우고 한다. 이렇게 해서 싸움이 너희에게서 나온다 해서 맨 처음에 그 싸우는 근원이 너의 지체 중에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나온 것이 아니냐 해 놓고 그 싸우는 정욕의 발동의 중요한 동기를 암시하기를 “욕심을 내고 시기를 하고 있다.어떤 일을 가지려고 욕심을 내고 그것을 저만 가지지 왜 저 사람이 또 같은 것을 가졌느냐고 시기를 하고 있다.그렇지만 그렇다고 너희가 얻는 것이냐?그러니까 욕심을 내도 얻지 못하고 그 대신 가진 사람에게 있는 것을 미워하고 질시해서 마침내 그 미움이 살의에 이르게 된다” 하였습니다.혹은 마음 가운데 미움을 품고만 있어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하고 요한일서 3장 15절에 말씀했는데 살인한다는 말입니다.그 다음에는 시기를 해서 몹시 그것을 가지기를 원해도 능히 취하지 못하고 그 대신 다투고 싸우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기를 읽어볼 것 같으며는 콤마를 위에다 찍는가 아래다 찍는가에 따라서 말의 그 의미가 이쪽으로도 붙고 저쪽으로도 붙습니다만 그 결과는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예를 들어서 2절을 볼 것 같으면 원래 헬라어 말을 쭉 놓을 때는 콤마가 없으니까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혹은 살인하여)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이렇게 됐는데,읽을 때 꼭 같이 권위 있는 이들의 콤마 찍는 법이 어쩌냐 하면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콤마)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그렇게 인과(因果)의 관계로 말을 충분히 번역하더라도 도무지 잘못했다고 할 수가 없어요. 다른 말로 한다면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살인을 하며,또 시기를 하여도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투고 싸운다” 이렇게 말이 되는데 아마 그것이 해석을 하자면 좀더 근리(近理)한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나온 영어성경,뉴 아메리칸 스탠다드 버전(NewAmericanStandardVersion)이라고 하는 데는 분명히 그렇게 콤마를 찍어 놓았어요(참고.You lust and do not have; so you commit murder. And you are envious and cannot obtain; so you fight and quarrel. You do not have because you do not ask.-NASV).또 그 이외에 권위있는 학자들의 사역(私譯)을 보더라도 그렇게들 찍었는데, 다만 킹 제임스 버젼(KingJamesVersion)과 리바이스드 스텐다드 버젼 (RevisedStandard Verision)에는 아직도 옛날식으로 콤마를 그 아래에다 찍지 않고 위에다 찍어서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콤마)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콜론)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이런 식으로 해 놓았어요.

 

콤마는 나중에 찍는 것이지 원래 쓴 사람들은 콤마를 찍고 쓰지 않고 그냥 쭉쭉 써 놓았으니까 콤마가 어데에 붙어도 말은 다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이렇게 따져볼 것 같으며는 결국은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아요.그러나 얼른 이해하기에 콤마를 아래에다 찍는 것이 좀 쉽다는 말씀입니다."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얻지 못하고 오히려 살인을 하고 있다.사람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시기하여도 취하지 못하고(못하나니가 아니라)다투며 싸운다” 그런 말입니다.

 

어떻게 됐든지 사람들이 자기가 얻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하는 수도 있지마는 결국은 사람들 사이에 그것이 있는데 가서 그것을 자기 것을 삼으려고 해야 할 터인데,그것을 정당하게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일반 법칙이 있을 때에는 정당하게 노력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거기는 큰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정당하게 노력해도 얻을 수가 없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첫째는 다른 사람이 독점하고 있고 나는 없을 때도 그렇고 또 사회제도(社會制度)가 각박해서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사회제도가 각박하며는 애를 쓰고 노력해도 소득이 적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을 자기가 얻지 못하게 되면 그로 인하여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이나 또 그 일에 접촉되어 가지고 각박하게 된 현실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나중에는 거기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을 증오(憎惡)하게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그 증오가 심지어 자기네 형제들 즉 거룩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라도 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궁극적으로는 살인한다. 형제를 미워해서 살인이라는 실질상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것이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어떤 일에든지 욕심(慾心)을 내서 그것을 얻으려고 애를 쓴 결과 일어나는 사실이다 하는 것을 여기서 시사(示唆)했어요.

 

또 그 다음에 남이 가진 것에 대해서 시기를 하고 그것을 자기 것이 됐으면 하고 원했는데 자기 것이 안되고 미운 바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어서 “왜 그러한 특권이 그에게 가느냐,나한테 와야지” 하고 요컨대 독점하려는 의식 또 자기가 남보다도 나아야겠다,더 훌륭해지고 더 자랑하고 싶은 그런 의식 때문에 남이 그것을 가지지 않고 자기가 가져야 할 터인데 그것을 거꾸로 다른 사람은 가지고 내가 안 가졌을 때는 그를 미워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시기하기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시기라는 것이 좌우간 남이 잘 되고 남이 어떠한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것을 가졌을 때에 거기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를 못하고 자기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미워하는 데서 발생하는 이 부덕(不德),이 악덕인데, 그렇더라도 결국은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어데서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다투고 싸우고 하는 것이다 그랬습니다.마음 가운데 싸우는 정욕이 있어서,싸우려는 그런 심정이 있어서 그것이 표면화할 때는 다툼이 먼저 일어나는 것이라 말입니다.

 

이러한 말을 성 야고보가 이야기를 해 놓고서는 그 다음에는 거기에 기도의 큰 원칙에 대해서 결부시켜서 이야기를 했어요,“너희가 왜 못 얻느냐 하며는 구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못 얻는다.욕심을 안 내서 못 얻는 것도 아니고 시기하도록까지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지 아니해서 못 얻는다는 것은 아니다.네가 시기해서 간절히 사모를 하고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로 좇아서 그릇된 악덕의 감정,남을 미워하고 형제를 미워해서 심지어 살인에 이르고 또한 다투고 싸우는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아니해서 너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했습니다.그러면 여기 구한다는 말은 먼저 욕심을 내고 시기하고 사모한다는 것과는 대척적(對蹠的)인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욕심내고 시기하더라도 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러면 무엇이냐 할 때에 ‘구한다’는 것은 욕심을 낸다든지 그것을 가지려고 앙탈하고 애를 쓴다든지 혹은 남이 가진 것에 대해서라도 시기하고,시기하기까지 그것을 사모한다는 그런 것과는 전연 차원이 다른 별다른 마움의 요구요 감정(感情),별다른 힘의 작용인 것을 넉넉히 상상하게 여기 글을 썼습니다.실컷 그렇게 욕심내고 시기했는데도 구하지 아니한 것으로 치고 “너희가 왜 못 얻느냐 하며는 구하지 아니해서 못 얻지 시기 안 해서 못 얻는 것도 아니고 욕심을 품지 아니해서 못 얻은 것이 아니다” 했습니다.탐심을 안 가져서 못 얻은 것도 아니고 남에게 대해서 미움과 시기를 안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못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연약한 정욕적인 면을 충분히 상상케 하는데 그것은 뭐냐하며는 어떤 것을 자기가 가지려고 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은 정욕적으로 다른 사람이 가진 것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를 못하고 마음 가운데 그런 것을 자기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구하고 추구해 가면서 그것 가진 사람에게 대한 감정이 평온하지를 않고 무관심하지를 않고 속에서 파동이 늘 일어나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은 하필 왈 꼭 그 사람을 막 미워해 가지고 사갈 같이 미워해서 죽이려고 하는 그런 극단의 감정 가운데 이르지 아니할지라도 그러한 감정에 이를 수 있는 실마리가 사람의 속에는 첫째 마음 가운데 어떤 파문으로 일어나옵니다.그가 그것을 가진 것에 대해서 부러워한다든지 가진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그가 그것을 가지고서 잘 쓰기를 바라는 심성보다도 가졌지마는 결국 돼지에게 진주 가진 것같이 의미가 없게 되기를 바란다든지 하는 이런 이상한 증오의 혹은 그릇된 심정의 단서(端緖)가, 흔단(흔端:서로 사이가 벌어지는 시초나 단서. 불화의 단서)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기가 쉬운 것입니다.이것이 사람의 정욕적인 소치요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한 까닭에 그런 심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그것이 고귀한 것으로 가장 가치화하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이 가졌든지 가지지 않았든지 거기에 대해서 도무지 아무 관심이 없고 거기에 대해서 마음 가운데 부러워하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샘내지도 아니하고 그것에 대해서 마음에 파문을 가지지도 않고, 그것을 가지고 사람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을 깨달아서 잘 쓰기를 바라는 그런 심정이 자연스럽게 마음에 돋아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자식의 심정이지마는 그렇게 심정이 돋아나오지 아니하고 그런 것을 반대로 생각하는 그런 미미한 단서,큰 것 말고 작은 단서 이러한 것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서 커나가고 더욱 발전해 나가면 결과는 살인인 것입니다.결과는 마음에 증오를 가지게 되고 마침내 살인, 다툼 이런 것이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 가운데 아상(我相)이 있고, 없다는 문제는 내가 무엇을 잘 했다든지 내가 무엇을 주를 위해서 이렇게 훌륭하게 했다든지 그러한 심정이 말을 아무리 어떻게 하든지 말은 대단히 겸손하게 해도 그런 심정이 가득한 사람이 있고,말은 아무렇게라도 “내가 이것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했다는 사실을 한 개의 사실로, 팩트(fact)로 인정하는 것 뿐이니까 별로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런데 “나는 이렇게 했다”는 것이 무슨 큰 죄악인 것같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음 가운데 그릇되이 벌써 감정이 움직이는 까닭에 그래요.“나는 이렇게 했다”는 말을 안해야만 마음 가운데 이 심정이 없는 것같이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예수를 믿고 아상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한 어떤 것에 대해서 그 사실을 인정 않는 것은 거짓되는 것입니다.자기가 무엇을 했으면 ‘내가 했다’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목갈리지(목<이> 갈리다:목소리가 거칠게 쉬다)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그것이 마음에 딱 걸려 가지고서는 내가 했다고 가치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심정,자기가 마음 가운데 어떤 사실을 인정했을지라도 가치화(價値化)하지 않는 이 심정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이거든 또한 주의해서 생각할 문제는 이러한 가치있는 것을 자기가 터득하기를 원하는데 터득하기를 원하는 그 가치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졌을 때 --더군다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가 가졌을 때-- 그 일에 대해서 조금치라도 마음에 파문이 일어나는가 안일어나는가가 그사람이 아상(我相)이 있는가 없는가의 중요한 시금석(試金石)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도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 죽지 아니했는가 죽었는가에 대해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증험(證驗)할 수 있는 중요한 크라이테리온(criterion)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여러 가지로 도울지라도 특별히 남에게 대해서 시기하는 심정이 민감하게 많은 사람이 있어요.자연인 가운데는 별의별 성격이 다 있는 것이니까,학교에서 같이 학우들 하고 지내면서 볼지라도 특별히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오. 그런 것은 요컨대 그런 방면에 감정이 빨리 움직인다는 것 뿐이지 다른 사람은 도무지 그것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아담이 부패하고 타락한 심정을 가진 이래 그 자손된 사람으로는 다같이 그 부패를 가지는 것입니다.이것은 오히려 부패한 인간을 놓고 볼 때에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실입니다.다른 말로 말하면 누구에게나 있는 현실이지 그것이 도무지 없어진 그러한 사람이 불신자 가운데 있느냐 하면 없는 것입니다.그것이 자기(自己)라는 것이요. 그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에게는 방향을 전환시키면 야심(野心)이라는 말,나쁜 의미의 야심이 아니라 앰비션(ambition)이란 말로서 변해서 “청년들아, 야심을 가지라.” 말하자면 대지(大旨)를 품으라는 뜻으로 보이스 비 앰비셔스(Boys, beambitious).심지어 그런 말까지 하는 것입니다.그것이 아주 유명한 격언의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사람은 야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나는 저기에 도달하겠다”고 혼자 마음 가운데 꽉 마음을 작정한 다음에 남보고 말을 않고 열심으로 각고면려해서 거기 도달하라,이렇게 해야 인생의 길에서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고 성공하는 것이다고 말을 하지마는 그러한 것들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함께 달린 사람의 정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도달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냐 하겠지마는 우선 자기가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없어져 버려야 하나님의 생각으로 대치(代置)하는 것입니다.자기 생각을 그대로 다 두고, 자기 이상을 두어두고, 자기 야심을 그냥 다 두고 그리고서 또한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히 살겠다고 하며는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히 살겠다 하는 것은 자기라는 것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자기가 없어지려면 자기 속에 있는 --자기가 이상(理想)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야심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것도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어진 다음에는 마음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간절한 소원은 사도 바울 선생과 같이 “그리스도를 알고 더 알기를 원함이라.” 그래서 과거에 알았던 지식에 대한 큰 욕망(慾望)과 지식에 대한 추구(追求)를 포기해 버렸다. 어떻게 그 지식의 큰 욕망이나 추구를 포기를 한다는 말이냐? 그것 대신 그리스도를 알고 더 알기를 원해서 그렇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대치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뭐냐하며는 하나님 나라의 분자(分子)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市民)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다운 생활을 충족히 행하여 거기에 상당한 열매를 매일 맺어서 왕이신 하나님께 이것을 드려야 하겠다,왕이신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드려야겠다하는 것입니다.자기의 일을 거기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자기란 “아무 것도 안 맺어도 좋습니다” 하며는 그것은 거짓말도 되고 옳지 않은 무아상,그런 것은 무아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라는 것은 도무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생각할 때는 자기를 항상 중요히 봐야 해요.사람은 자기의 책임을 무시하거나 흐릿하게 생각하거나 하고 회피하고 못 사는 것입니다.자기 책임을 늘 중요히 생각하는데 그 자기의 책임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나는 어떤 책임을 지고 있고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거기에 대해서 당당하게 생각하고 주의하고 그 일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에게든지 기대 못 하는 것입니다.자기가 해야 하니까 자기가 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못 미루는 것입니다.부모가 해야할 것을 자식한테도 못 미루는 것이고 형제한테도 못 미루는 것입니다.이것은 자기가 일생 하나님께 요구(要求)받은 신성(神聖)한 의무입니다.그런 점에 있어서 자기 책임에 대해서 응시(凝視)를 하고 항상 그 일을 바로 해 나가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식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자기의 책무를 충실히 감당해서 하나님께서 날마다 나에게 맺기를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면 거기에 필요한 것들이 나에게는 지금 없다는 것이 많이 있어요.모든 것을 다 손에 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 보며는 새 길을 가면 거기에 해당한 필요라는 것이 있습니다.여기서 살다가 더 앞으로 진행해서 전진된 위치에 있을 때에는 그 전진된 위치에서 또 필요한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내가 다 충족하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장성하고 전진해 있으면 전진해 있는 위치에 필요한 것들이 그때에 결핍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다른 말로 말하면 ‘어젯날 나는 어떤 길을 가야겠다’는 것을 알아서 거기까지 왔지마는 오늘 온 다음에 ‘여기서부터는 어데로 가야 하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것은 자기에게 결핍되어 있으니까 그러한 지혜는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하라는 것을 우리가 지나 주일에 배웠는데 여기서도 우리에게는 구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생각하고 바로 구상(構想)을 해서 바른 합리적인 생각하에서 하나님 앞에 그것을 구하고 나아가는 것이 정당(正當)하지 하나님 앞에 기분 나는 대로 구하는 것은 부정당한 것입니다.우리가 이 세상에 가장 고귀한 인물이 있어서, 또 큰 권세를 가진 이가 있어서 그에게 내 소원을 고해야겠다 할 때도 기분 나는 대로 임시로 가서 구하지 아니하고 이 소원을 그에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다 있어서 그가 과연 들어줄 충분한 합리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해요.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는 것도 내가 하나님 앞에 왜 이것을 구하는가의 이유가,신령한 나라의 거룩한 도리로 보아서 이유가 충분히 서게 되어야 합니다.이것이 영혼을 가지고 인격자인 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한 때의 기분으로 부러우니까 “하나님 이것 주십시오.” 또 부러우니까 “하나님 저거 주십시오” 이렇게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주시는 이유’ 구해야만 주시겠다 하는 이유는 그가 구함으로 구한 것에 대한 자기의 합리적인 사상과 또 목적을 충분히 가지게 되는 연고에 있는 것입니다.자기가 구해야 할 것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구상하지 않고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네가 간절히 간절히 원합니다 하고서 나한테 이것을 구해서 지금 내가 너한테 이것을 주려고 한다.그러면 몇 가지 물어보자.너는 왜 그것을 달라고 했느냐?” 하면 그 때에 임시로 꾸려맞춰서 핑계로 하나님 앞에 대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네가 아까 세 시간 전에 간절히 구했던 것이 있는데 내가 그것을 주려고 그런다.내가 몇가지 물어 보겠다.너 구했던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세 시간 전에 “간절히 간절히 구합니다!”하고 구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기독교 생활을 한다고 하고서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만나고 왔다갔다 하고 가서 먹기도 하고 찾기도 하고 할 때 남의 집에 가자 해서 갔다고 합시다.가 가지고서는 그 집에서 좋은 음식도 내놓고 대접도 잘 하고 하니까 그것을 받아가면서 마음이 흐뭇해 가지고 “가지 전에 우리 기도하고 갑시다” 해서 그 집에 축복을 해 주고 가는데 그 집의 사정을 잠깐 들은 대로 이것저것 간절히 간절히 많이 구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그때 뿐이고 바쁜 일이 또 겹치고 겹쳐서 그 다음에는 갑자기 찾아와서 세 시간 지낸 후에, 지금 세 시간 동안 지낸 다른 일이 마음에 가득한 그 사람이 그 세 시간 이전에 남의 집에 가서 대접받으면서 그 집 사정에 대해서 “간절히 간절히 구합니다” 하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 기억하느냐 하면 기억 않는 사람들이 거재두량(車載斗量:수레에 싣고 말로 된다는 뜻, 물건이나 인재 등이 썩 많아 귀하지 않음. 다수가 모두 평범함의 비유)입니다.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들으시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고 곧 집 주인네가 듣고 좋으라고 아첨하는 기도인 까닭에 그렇습니다.그런 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기도하는 형식을 빌어서 주인네에게 아첨(阿諂)을 하고 주인네에게 치사를 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왜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어데 가서는 앉아 놀다가 떠날 때는 기도해야 좋다 하는 것도 그러한 전통이라고 그럴는지 그런 행습 때문에,뭐 특별히 간절한 필요를 느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게 한 행습(行習)이 되며는 반사적으로 떠나기 전에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입니다.모든 그런 심정을 다 하나님 앞에 정당화해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이 그릇된 전통이라는 것도 하나의 반사작용을 일으키는 까닭에 그릇된 전통을 파괴할 때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생각을 고쳐버려야 하는 것입니다.이것이 실질이 없고 형식과 어떠한 습관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이런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점으로 우리가 봐서 그 사람 마음 가운데 구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리에서 정당하게 드릴 말씀의 목적과 동기와 이론이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그것이 제정신을 똑똑히 가지고 영혼의 기능을 가지고 살고 있는 하나님 자녀의 정당한 태도입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 없이 기도할 때는 무수히 간절한 말이 많은데 그 무수한 ‘간절히’라는 것이 그때 임시로 꾸려 맞추는 것도 많고 그리고 그 며칠 동안에 갑자기 생각한 것도 많고 또 그 날 아침에 와서 갑자기 생각해 나가는 것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를 가 볼 때에 그 교회에서 주일 아침에 대표적인 기도를 할 때 그것을 개혁 교회에서는 패스토럴 프레어(pastoralprayer),목사의 기도라고 되어 있어요.목회 기도(牧會 祈禱)요. 그러니까 그 교회의 목회상 가장 중요한 것을 주님 앞에 구하고 무엇보다도 그 시간은 예배하는 시간이니까 예배로 인도해 나가는 기도인 것입니다.그런데 그것을 목사 아닌 다른 직원에게 맡기는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그러면 그 다른 직원은 그것이 처음으로 하는 일 같으면 아주 신중하게 잘 준비를 하지마는 그러지 않고 가끔 차례로 자기에게 돌아온다 할 것 같으며는 큰 준비가 없이 --기도는 또 큰 준비가 없어도 늘 하는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 그러한 묘한 생각이 있어서 큰 준비가 없이-- 올라서서 기도를 하는데 장장 20분이나 30분을 기도하는 일도 한 두 번 당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또 그렇게 길게만 해야 무슨 기도가 훌륭한 것같이 아침에 못회기도 대신 소위 대표적인 기도를 그렇게 길게 하는데 보면 간절한 것도 많고 또 끄집어내는 것도 많은데 그것이 어느 때는 무엇을 지금 참말로 가장 중심적인 목표로 하나를 기도하는 것인가 알기가 어려운 것이 많아요. 그것은 적어도 무엇을 어떻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 기도는 하는 것인가? 그 기도 자체의 목적도 불분명한 것이 많습니다.무엇이든지 기도 시간이니까 쭉 늘어놓는 것입니다.사실로 말하자면 그런 기도를 꼭 해야 할 것이라면 기도회날 저녁,수요일이든지 목요일이든지 모였을 때 개인 개인이 돌아가면서 하려고 할 때에 그 개인 개인이 서로 그 기도를 하기 위해서 서로 의논을 했다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가 깊이 생각을 했다든지 해서 할 수가 있는 일이지마는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도 그런 잡다(雜多)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 속에 간절하다는 것도 많고 그 속에 구하는 것도 많지만 그런 것들은 나중에 돌아가서 곰곰히 생각하면 대체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그 큰 동기나 큰 목적이나 그런 것을 생각하기 어려운 것도 더러 나타나는 것입니다.다만 기도하는 그 형식이 그렇게 붙어 있어 가지고 그런 것이 자꾸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그 기도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고 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열심으로 하지마는,또 기도를 굉장하게 말을 만들어 하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주의할 것은 거짓말하지 말아야 하고 없는 것, 허탄한 소리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요컨대 간절하지 않은데 “간절히 간절히 빕니다”고 하나님 앞에 꼭 그렇게 말을 해야만 들어주시는 것도 아니고 간절하지 않고 마음 가운데 이 말씀 드려도 좋을는지 어쩔는지 모르면 “주여, 이 말씀을 제가 드려서 좋을는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고 하면 차라리 정직한 것입니다.그런데 그러지 아니하고 자기가 재량(裁量)해 가지고 결국은 하나님한테는 간절히 빌든지 안 빌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이렇게만 생각하고 마음을 풀어놓고,하나님 앞에 교통하는 심정은 적고 막 무엇을 교섭하러 간 것같은 이런 심정에서 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이런 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구하지 아니해서 얻지 못한다”는 이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한테 무엇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가 구하되 아까 말하는 욕심을 내거나 시기하거나 그렇게 해서 사모하거나 그러한 차원이 아닌 마음의 높이에서 정당하게 하나님과 교통을 할 때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은 바에 의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자식에게 지금 있어야 할 것으로 제가 알게 됐습니다.제가 그것을 그렇게 인정을 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내가 그렇게 인정한 것입니다.그러나 최소한도의 이론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저는 이것이 있어야 할 것으로 인정했습니다.그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렇고 하나님의 보이신 계시에 의해서는 이렇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는 이것은 이렇다고 지금까지 배워오고 생각하고 믿어 왔사옵는데 거기 의해 보면 이것이 여기 있어야 할 것으로 믿사옵니다”고 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집안 식구를 위해서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사사(私事)를 경영하고 공사를 돌아본다는 그런 동양적인 사상으로 판단할 때 혹시 무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로 필요한 일입니다.동양은 그것을 덕으로 여겼어요. 공사(公事)를 맡은 사람이 나라의 일을 맡아가지고 갔다가 돌아갈 때에 자기집 앞을 지나가는데 세 번 지나가면서도 울타리에 문이 있는데 문 안으로, 자기 집에 안 들어가고 그냥 지나갔다는 것을 동양에서는 과거에 유명한 이야기로서 덕으로 여겼습니다.청맹과니(靑盲과니:겉으로 보기에는 눈동자가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도는 그런 사람. 당달봉사)같은 사람입니다.지나가면서 자기집에 한 발자국 들여놓고서 들여다 보고 말 한마디 하고라도 지나갈 수 있을 터인데 무엇이 대단한 의사(義士)라고 바로 싸리문 옆으로 그냥 지나갔습니다.후세에 그것을 전해 가지고 “하, 이렇게 공사(公私)를 명백하게 구별했습니다” 하는데 자라 콧구멍같이 대단히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밖에 없는 일입니다.

 

공사(公私)를 혼동하는 것은 좋지 않지마는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공사(公私)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이것은 공(公)의 일이고 사사(私事)로운 일이라는 것이 없어요.모두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일로 귀착(歸着)해 놓고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내 이야기도 그렇고 내 건강도 그렇고 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도, 소유도 그렇고 나에게 주신 내 가정이라든지 나의 부모라든지 일도 다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돌아보셔서 평안을 주시고 보존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장래가 있게 하시려고 다 이렇게 경영하시는 일이고 내 가정을 내가 경영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일로서 자기 가정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고 또 거기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고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진실한 태도지 그것이 조금치라도 미안하든지 해서는 아니 될 일을 우리가 그냥 불가부득이 하고 지나가는 일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이렇게 해서 자기 현실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생활의 한 단계라고 생각하고 진실한 생활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늘 나갈 수 있게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야지 그것은 미안하고 세속적인 일이고 하나님 일은 꼭 예배당에 가서 종교적인 일만 해 나가야만 하는 것같이 생각한다는 것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생각의 그 편협하고 잘못된 것,과거의 그릇된 전통에서 물들었던 것을 씻기 위해서라도 자기의 구하는 그 내용에 대해 합리성을 늘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즉 하나님 나라의 도리에 맞는 성격을 찾아야 합니다.그것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구하라는 것입니다.그것도 없이, 아무 것도 없이 덮어놓고 구하는 것은 욕심을 내고 시기하는 그 마음을 사람에게 부딪치기 어려우니까 하나님 보고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한다.시기해도 너희가 취하지 못한다” 할 때는 그 욕심이나 시기 가지고서는 얻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오.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욕심으로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자기가 남이 가진 것이 부러워 가지고서는 자기도 있어야겠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악질(惡質)을 쓰고 졸라대고 하는 이런 것은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그러니까 그 아래도 하는 말이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네 쾌락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까닭에 그렇다.” 당장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그 위를 보며는 무엇보다도 “구해라”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서 구함으로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고 구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는가에 의해서 많이 반성하는 것입니다.구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한테 지금 말씀을 드린 것이니까 신중한 이야기이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가장 이 세상에서 훌륭한,내 소원을 들어줄 만한 모든 권력과 능력과 지위를 가진 높은 그런 분한테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구한다 하더라도 꼭 필요한 것과 자기가 꼭 있어야만 할 것에 대해서 그 이론을 저저(這這)하게, 자세하게 또 수미(首尾)가 닿게 말씀을 드려 가지고서 “과연 그렇구나, 네 말이 과연 그렇다고 내가 인정하니까 받아라” 이렇게 받을 수 있도록 자기가 하겠다며는 하나님한테 나아갈 때 그렇게 아무렇게라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하는 말의 배경에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구하려며는 덮어놓고 구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합리성이라는 것을 중요히 생각해라.거기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동기가 있어야 하고 또 그 과정에 대해서 네가 생각한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요컨대 거기에 대해서 네가 이지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생각해야 할 것을 바로 생각해서 하나님한테 그것을 말씀드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장성의 정도와 분량을 하나님한테 고하는 것입니다.요컨대 물건만을 고하는 것이 아니고 구하는 내용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자기의 이해와 자기의 깨달음은 어떤 것인가를 하나님께 고(告)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그 인식(認識)에 있어서, 그 지혜에 있어서 장성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히 봐야 할 문제는 어떤 기도든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고 응답되기를 다 바라는 것입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떠한 형식으로 응답하셨는가를 늘 주의해서 보았다가 “왜 이 문제는 오래 끌고 가시다가 대답을 하셨나?왜 이 문제는 그것 아니고 다른 것으로 주셨는가”에 대해서도 “아!그렇겠다” 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해결이 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도하고 있는 그 사실에 대해서 자기는 반성을 해서 “이것이 내 욕심을 위한 것인가, 내 정욕 혹은 쾌락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그것을 잘 깨달아서 거기에 의해 차츰차츰 그 기도하는 내용이 좀 더 하나님의 뜻에 잘 부합(符合)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한 것에 대해서 크게 말하면 두 가지가 늘 있는데 자기의 욕심 즉 탐욕이나 혹은 시기나 그런 것으로 구한 그런 심정의 선(線),그게 현저하지 않더라도 그 선에 서서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구했는가,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주신 목적과 사명을 위해서 그 일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하나님한테 구했는가 그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그 구한 것에 대해서 반성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다음에 구할 때에는 좀 더 그러한 합리성,그러한 진리에 입각한 성격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우리의 기도는 차츰차츰 더 향상하는 것이고 구한 것에 대한 내용을 내가 바로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어서 일단 그것이 응낙되어서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는 방황하지 않고 정당하게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지도 않았는데,마음에 준비 없는데 덮어놓고 주시는 것보다는 그가 구하게 하시고 구하되 이지적으로 합리적으로 구하게 하시고,구하되 그 내용과 목적이 전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늘 구해 나아가게 하신 까닭에 그는 그것을 어데다 쓸 줄을 알고 어떻게 써야할 줄을 알고 그래서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기 책임도 느끼고 있는 그때에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그래서 그것을 주시고자 그에게 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주의를 해서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뜻은 “너희가 구해서야 얻는 것이고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고 말씀하신 뜻임을 우리가 늘 바로 이해하십시다.같이 기도하시지요.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저희들은 아버님 앞에 무엇을 구할 때 항상 저희에게 주신 거룩한 은혜로 지혜롭게 이지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리에서 합리적으로 기도하고 또 그것의 대답을 바로 느끼게 하시고 깨달음을 바로 가지게 하셔서 아버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는 지체없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선용하는 그 큰 생활 가운데에 있게 하시고 주신 바 은혜가 과연 저희에게 충만히 은혜로서 열매를 맺도록 저희를 붙들어 주시고 깨닫게 인도하여 줍소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 1977.8.7/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