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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7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5:31

기도에 대하여 7

 

김홍전 목사

 

 

제7강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벧전 2:1-10, 시편 51:17



지난번에 우리는 이사야서 1장 15절을 중심으로 해서 그 좌우에 있는 10절부터 17절까지를 봐 가면서 종교가 한 의식(儀式)과 종교생활이라고 하는 독특한 면을 강조(强調)하고 중시한 나머지 그것에 큰 가치와 공로를 부여(賦與)하는 것같은 생활 태도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의 교통을 막는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수한 제물과 많은 수양의 기름을 나에게 드리고 하지마는 그러나 그런 것을 내가 지기에 곤비했다.그런 것을 다시 가져오지 말아라.너희가 손을 펼지라도 내가 듣지 않고 많은 기도를 할지라도 듣지 않겠다.이것은 너희의 손이 피에 더러웠음이고 너희가 성회와 모든 거룩한 교의(敎儀)와 아울러서 악을 행함이라.월삭과 절기와 안식일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했느냐.헛되이 내 마당만 밟는 것이다.” 이러한 무서운 질책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렸는데,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굉장히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이사야의 활동의 중요한 시대가 히스기야 왕 때인데 히스기야 왕은 가장 메시야적인 이스라엘적 기대에 방불(彷佛)한 왕이라고 유대의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지목할 만큼 훌륭한 종교개혁을 이룬 왕입니다.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말하자면 위대한 개혁의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 히스기야 시대일 터인데도 불구하고 히스기야의 시대에 살고 주로 활동한 이사야가 이렇게 무서운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활동시기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히스기야 왕 때인데 히스기야 이전 아하스 때 아주 악을 많이 행하고 불의를 많이 행한 것이 있는데, 지금 이사야 1장의 시대에 문제가 더러 있어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그것이 아하스 시대라고 가정하더라도 마찬가지고 히스기야 시대라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맹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은 마찬가지입니다.가령 아하스 시대에 그들이 표면으로 우상을 많이 섬기고 악을 행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보는 이사야의 타매(唾罵),질책(叱責)의 말씀은 저들의 우상숭배라는 잘못된 제의(祭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신전(神殿)에 있어서의 정당한 제의에 대한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많은 제물을 드린다는 것,또 월삭과 절기와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 이런 것을 그대로 꼬집어 가지고 그러나 그런 것은 그것대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계속해서 그 문제에 의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며는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으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종교적인 규례(規例)를 잘 지켜 나아간 것을 왜 선지자들이나 시인들은 오히려 맹렬하게 타매하고 그런 것을 누가 너한테 요구했느냐고 할 만큼 됐나 하는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해서 이 헛된 제사를 가져오지 말라 혹은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는 부분이 나옵니다.하나님께서 제사의 의식을 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떄는 그것을 당신이 친히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가령 우리가 성경 말씀 가운데 시편 40장 6절을 볼 것 같으면 “주께서 나의 길을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贖罪祭)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하였습니다.이런 말이 여기 한 군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시편 51장 16절에도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러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였습니다.이런 말씀들이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많이 나타나는데 예레미야도 이런 말씀들이 나타나고,아모스서에도 나타나고 혹은 호세아서에도 나타나고 미가서에도 나타나고 이렇게 여러 선지자들 글 가운데도 또한 많이 나타납니다.왜 하나님께서 이 제사의 의식을 이 백성에게 주시고도 제사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느냐 할 때는 그들에게 그보다 먼저 있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없이 껍데기의 제의(祭儀),제사 의식만이 가장 진실되게, 가장 신중하게, 가장 열성적으로 지켜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월삭이라든지 매월 초하루,절기,유월절과 무교절은 계속하는데 성력으로 보면 정월 14일 저녁이 유월절이고 15일부터 한 주일동안 무교절입니다.15일부터 계산해 가지고 50일이 되며는 오순절(五旬節),추수절(秋收節)입니다.그 다음에는 민력(民歷)말고 성력으로 봐서 7월 들어가서는 또 대속죄일(大屬罪日)도 있고 나팔절도 있고 그 다음에는 초막절(草幕節)이라는 절기도 있습니다.그런 절기 때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찬송을 하고 형제가 서로 즐거워하고 다 그랬습니다.또 구약의 법대로도 “너희 이스라엘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나를 보이러 올지니라(출23:17, 34:23,신16:16). 내가 지정한 그곳에 너희는 모여서 성회를 열고 또 너희 모든 식구와 너희 고을에 있는 레위 사람을 데리고 와서 내 앞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해라(신 12:12,18).” 이래서 대 축전(祝典)이 일 년에 적어도 세 번 있습니다.그러니까 유월절(逾越節)과 무교절(無敎節)이 계속한 기간에 한 번, 그 다음에는 오순절 때 한 번, 그 다음에는 장막절(帳幕節)혹은 초막절 혹은 수장절(收藏節)이라고 하는 이 절기 때 한 번,이렇게 일년에 세 번씩 모여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흩어져 가지고 각각 따로따로 조그마한 배타적(排他的)인 부족주의(部族主疑)로 변하지 말고 혹은 소위 나만 잘났다 하는 쇼빈이라는 사람의 주장하는 식으로 쇼비니즘에 빠져들지 말고 전부가 대동해서 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한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대로 다 모여서 안한 것이 아니라 했는데 한 그것에 대해서 지금 이렇게 이사야를 통해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아모스를 통해서, 미가를 통해서, 호세아를 통해서 이런 위대한 선지자들이 나타나 가지고 다 타매를 하면서 특별히 그 제의(祭儀)를 꼬집어서 이야기했습니다.이와 같은 거룩한 사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심히 중요한 것으로써 이사야는 그것을 분명히 “너 그와 같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는 줄을 알지 말아라.네가 그것을 한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 손을 펴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즉 나와 교통을 하기를 원할지라도 내가 그를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했다”는 것을 가르쳤어요.

 

그것이 지난번 우리가 특별히 이사야 1장 15절에서 본 말씀인데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이라는 의미의 신령한 자의 기도도 그런 것으로 막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다른 말로 말하면 신령한 자라는 것은 그런 일에 대해서 어떻게 바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 인식과, 그 다음에는 어떻게 바로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그의 행동이 바르러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현실을 볼지라도 종교의 여러가지 구성해 나가는 것과 형성해 나가는 문제,형식주의,포멀리즘(formalism)이라 할 때 형성한다는 것을 더 의미해서 만일 우리가 새로 단어를 쓴다며는 포머티비즘(formativism),무엇을 구성해 나가는 주의,즉 의를 자꾸 쌓아올려 가는 주의인데 지난번에는 주로 사람이 자기의 노력을 가지고 자기의 종교적인 열정과 의지의 힘을 가지고 자기의 의를 자꾸 쌓아올려 나아가는 점에 그 형성주의의 큰 난점이 있고 결함이 있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는 그것보다 좀더 인식론상(認識論上) 문제, 사람은 잘못 알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제의를 존중히 여기는 데에 근본적으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까닭에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속죄제(贖罪祭)나 속건제(贖愆祭)를 드리고 번제와 소제(素祭)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제사의 의미라는 것이 붙어다니는데,속죄제나 속건제라고 할 때는 죄를 지었을 때에 속죄하기 위해서 일정한 양식에 의해서 희생의 제물을 가지고 오도록 하신 것입니다.속죄제는 자기의 죄를 속하는 것을 믿고 그것을 의지하는 고백의 형식으로 희생의 제물을 갖다가 드려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받으셔서 속죄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속건제라고 할 때는 특별히,단순히 하나님께 향해서의 직접적인 금령을 범한 그것에만 한하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서 자기의 공동사회에 개인에게나 여러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손해를 끼쳤을 때 그 손해를 배상한다는 의미로 속건제라 해서 그 손해를 배상해 나가는 것입니다.다같이 죄를 속하는 의미의 제사입니다.

 

그 다음에 번제(燔祭)라고 할 때는 전부를 다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뜻으로 ‘태울 번(燔)’자를 쓰는데,그것은 자기 자신의 머리터럭 하나라도 다 하나님의 것이올시다 하는 의미로 짐승의 터럭 하나라도 다 하나님 앞에 불질러서 태워서 올리는 것입니다.이렇게 전부를 드려서 완전한 희생의 제물로 동시에 전부가 하나님의 것에 불과하고 결코 그 나머지 자기가 자유로이 할 부분이 없다 하는 것을 확실히 고백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이 두 가지가 우리 편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전체로 남김없이 드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에 소제(素祭)라는 것은 요컨대 순수한 가루,즉 농산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으로써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에 필요한 이것도 하나님의 것이요,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 가운데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하는 뜻이 더 강한 것입니다.그래서 곡물을 갖다가 하나님 앞에 드리고 이렇게 매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강하게 나오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또 일생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자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다(요 4:34)는 말씀을 연상하게 하는 거룩한 제사입니다.

 

그 다음에 화목제(和睦祭),평안제(平安祭)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갖다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사를 다 받으시고 속죄(贖罪)를 하시고 “내가 너를 속죄할 뿐 아니라 의롭다고 했으니 이제 너는 내 권속이다.내 앞에서 너는 먹어라” 해서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양식을 가지고 그 사랑하는 백성,죄를 용서하신 그 백성의 생활에,또 그 마음 가운데 필요한 것들을 내려 주시는 의미가 있습니다.그래서 그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린 다음에는 드린 그 제물을 가지고 자기뿐 아니라 자기의 식구들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일정한 장소에 같이 먹으라고 해서 같이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화목제라,하나님과의 화해가 성립됐고 하나님이 나를 죄인으로, 원수로 보시지 않고, 나를 진노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사랑하는 자식으로 받아서 하나님의 권속,즉 가정에 한 일원을 삼으셨으니 내가 하나님의 권속으로 그 아버지의 주시는 것을 먹고 산다 하는 의미가 이 화목제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은 제사들을 잘 지켰어요.유월절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를 다시 표시하는 것이고 또 그 이외에 하나님께서 여러 절기를 주셨을 때는 절기마다 그들은 제사를 드려서 제물이 표상하는 중요한 의미를 생각하고 결국 모든 절기가 합해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세월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 있는 것인데,이런 것들을 그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제정하신 대로 지킨 것입니다.지켰는데 만일 그들이 그 일을 하면서 죄를 범했다 할 것 같으며는 죄를 범했으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없고 가까이 나와서 하나님 앞에 화해를 청할 수가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고 죄 있는 자가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소제,화목제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화해하시고 그를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의미로 이런 제사의 의식을 주셨으니까 당연히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은 만큼 그것을 더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다 존재하는 것입니다.우리가 다 마음 가운데 죄가 없고 사념(邪念)이 없는 사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에게는 때를 따라서 잘못하는 것이 많고 또 인간적으로 죄의 오염 가운데 빠져들어가는 시간도 많고 오욕 가운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넘어지는 때도 많이 있는 것이지마는 그러면 그런 만큼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서 기왕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났으니까 좀 더 죄를 짓고 이 세상에서 향락이나 하고 살자고 미끄러져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으면 죄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서 용서하심을 바라야 할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사죄해 주십시오” 하고 빌고 나아가서 죄 짓고 또 돌아와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사죄해 주십시오” 하고 빌고,다른 말로 말하면 죄는 자꾸 짓고 예수님은 자꾸 용서,사죄의 은혜를 내게 더 입혀 주십시오 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모양이 오늘날 신자에게도 다 있는 것입니다.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해서 헛된 제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맹렬하게 타매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고 무수한 제물을 내게 드리지 말라 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그 중요한 이유를 우리가 볼 때에 오늘날의 종교의 방식이라는 것과 종교적인 특성 있는 생활 양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면 하나님 앞에 포머티미즘(formativism), 형성주의(形成主義)에 불과하고 그것이 지난번에 말한 것과 같이 외식(外飾)과 한발 사이여서 그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외식이라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외식이라는 것은 누가 보든지 “저것은 더럽다.저것은 누추하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할 때 그들의 외식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그들은 가령 “박하(薄荷)와 회향(茴香)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마 23:23) 할 때 박하와 근채와 혹은 회향의 십일조(十一條) 드린 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인데,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 드리는 것은 그러면 죄인가 할 때,그것은 죄가 아닙니다.왜냐하며는 그 다음을 보면 그런고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드리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버리는 것은 아니다.이것을 하고 의와 인과 신을 행하고 이것도 해라” 이렇게 요구하십니다.“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알지 말아라.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마5:17). 이렇게 이야기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타매하신 그 외식이라는 문제도 종교의 제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저들의 제사의 의식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요컨대 종교 의식과 혹은 종교적인 여러 가지 방도,방법을 존중히 여기는 데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원칙을 갖다가 오늘날 크리스찬들에게 적용을 한다며는 “화 있을진저,너희 무수히 많은 기도를 하고 있는 자들아.너희들이 사소한 모든 문제에까지 이르러서 하나님 앞에 낱낱이 다 고하지만 그러나 율법의 더 중요한 이것은 안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왜냐?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혹은 종교의 의식을 존중히 여기고 혹은 종교적인 특성이 있는 생활을 존중히 여기는 것,하필 왈 기도에 한하는 것은 아닙니다.물론 기도도 중요한 종교의 생활의 양태,혹은 특성적인 양태입니다.보통 세상 사람은 않는데 믿는 사람, 종교적인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특성적인 상태입니다.

 

가령 찬송을 하는 것도 안 믿는 사람은 찬송은 않고 자기의 흥을 따라서 혹은 예술적인 정취에 따라서 무슨 다른 노래는 부르겠지마는 찬송이라는 특성적인 노래를 부른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그 사람의 종교의 특성이 있는 생활의 양태입니다.헌금을 드리는 것도 다른 이 세상 아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일로서 이것도 특성적인 양태입니다.주일날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종교의 특성적인 양태인데,이런 종교의 특성적인 여러 가지 일의 그 여러 가지 양태,모드(mode)라는 것이 결국은 그것 자체로서 다 존중히 여기고 행하지마는 그 존중히 여기고 행하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하시고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괜찮고 이스라엘 사람만 그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제사를 존중히 여긴 것 절기, 월삭, 안식일을 존중히 여긴 것,성전을 존중히 여긴 것들,그리고 모세의 여러 가지 종교적 규례라는 것을 아주 존중히 여겨서 행동한 것들은 다 뭐냐? 그것은 다 귀한 것입니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일반 종교론으로 볼 때 그것은 그들의 공적(功績)이고 잘하는 일이지 그것을 잘못하는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특별히 포로로 잡혀갔다 온 이후부터 그 사람들이 아주 세밀하게 주의해서 다른 어떤 신도 하나님과 병치(倂置)한다든지 인정한다든지 하지 아니하려고 하는 아주 철저한 유일신론(唯一神論)을 주장한 것만이라도 그 사람들의 신관에 있어서 다 존중히 여겨주어야 하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해야 하고 문화사(文化史)적으로 건설적인 일이지 그게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에게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역시 타매할 수 있는 것이고 타매하셨던 것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입니다.그렇게 쉽게 봐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고 괜찮다고 그렇게 넘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소홀한 일입니다.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무수한 기도라든지 우리의 정규적인, 빠짐없이 자주하는 예배라든지 혹은 헌상이라든지 또 우리의 찬송이라든지 우리의 가지고 있는 이 종교적인 특성있는 특색있는 생활 양태라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님 앞에 무섭게 이스라엘 백성을 타매하듯이 타매를 받을 수 있는 일이 됩니다.

 

그러며는 그 타매를 받는 문제에 대해서 무슨 이유로 그러셨을까 할 때 여기서 몇가지 중요한 것들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시편 51장 16절과 17절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 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傷)한 심령(心靈)이라.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蔑視)치 아니하시리이다” 하였습니다.제사는 기뻐 아니하고 그러면 그 대신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하나님이여,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주께서 제사를 기뻐하셨더면 내가 드렸을 것입니다.그러나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상한 심령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제사라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증표입니다.그 짐승의 피가 속죄를 해줄 까닭은 없는 것입니다.짐승을 천 마리를 잡아가지고 드려도 그것이 조금치라도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되어서 그 사람의 사죄의 조건이 안 되는 것입니다.요컨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는 자기를 위하여 어떤 죄없는 생명 하나가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어떠한 중요한 생명이 희생하는 것은 이러한 법칙하에서만 내가 속죄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는 것을 또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면 이 법칙의 주재자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은 이 법칙하에서 나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그러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법칙을 마련해 내신 것을 감사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즉 하나님께서 속죄하는 법칙을 내신 것을 믿는 것이 첫째입니다.

 

둘째는 속죄(贖罪)라는 것은 죄없는 다른 것이,도덕적인 책임을 져야할 이유가 없는 다른 것이 나를 대신 해서 그 책임을 지고 마치 그 희생의 제물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내가 그렇게 죽는 것으로 보시고,그러면 여기에 무엇이 있느냐 하며는 대속(代贖)이라는 사실이 늘 나타나는 것입니다.이 대속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열납(悅納)해 주시고 가납해 주시고 그 대신 이 대속자가 나를 속한 까닭에 그 대신 사유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그 보이는 짐승이라는 것은 그 생명의 가치가 사람의 생명의 가치(價値)와 같지 아니한 것입니다.무한한 가치를 가졌다고 할 수는 없어도 사람의 가치는 짐승의 가치에 비교해서 비교할 수 없이 무한대(無限大)하게 위대한 것입니다.그런데 미물(微物)인 짐승의 생명의 가치로서 나를 대신하느냐 하면 그것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거기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그런 까닭에 이것은 어디까지든지 하나님의 마련하신 어떠한 큰 사실의 씸볼(symbol)에 불과하다, 혹은 대표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이라든지 혹은 단체가 제사(祭祀)를 드리면서 인정하고 나가야 합니다.그런고로 속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또 속죄를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무한한 가치의 희생을 자기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이 무한한 가치의 희생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犧牲)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당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잘 몰랐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명의(名義)가 아니고 어떤 실질(實質)을 믿고 있어야 합니다.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큰 사실을 믿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 “주께서 요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니라” 그랬습니다.상한 심령,항상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 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할 것 같으며는 어떤 종교적인 방식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액을 면하려고 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표현하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고 반성한 결과 그 잘못을 통절(痛切)하게 느껴야 비로소 상한 심령이 생기는 것입니다.그냥은 안 생기는 것입니다.“아!이것을 다시 할 수 있느냐!도무지 어떻게 가까이라도 할 수 있는 문제냐” 하고 통절하게 잘못을 느끼는 것입니다.그렇게 통절하게 자기의 잘못을 느끼고서 회개하는 데에서부터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마련하신 바 거룩한 대속의 사실을 믿는 정신(正信)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사실을 믿는 바른 신앙이라는 것은 결코 자기의 죄는 어쨌든지 괞찮다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죄를 지었거든 용서를 구해라. 그러면 용서해 주마” 하셨으니 나는 죄의 용서를 구한다 하고서 돌아가서는 다시 그 죄를 헤어나지 못하고 또 하기로 하는 그런 심령하에서는 대속이라는 하나님의 큰 법칙, 나를 위해서 무한한 가치의 생명이 대신 속했다는 것을 믿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죄를 먼저 인정해야 속죄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한테 우리가 죄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옳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처지나 환경에 대해서는 별로 예수 믿는 조건으로서는 언급을 않는 것입니다.예수 믿는 조건으로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병이 많고 고통이 많으니까 어쩌면 좋을까 하니까, “그렇게 병 많고 고통 많으면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며는 당신 병도 잘 낫고 고통도 다 풀어주시고 그럽니다” 하고 그에게 평안을 주는 약방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무가치하다고 느끼고 허황한 속에 사람은 산다 생각하고 기세(棄世)를 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당신의 소망이 올시다” 하고 그리스도를 그 사람의 허무(虛無)를 메워주는 대증적(對症的)인 약으로 주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소위 신복음주의라는 것이 복음을 정상적으로 전하지 않는 큰 흠을 기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중요한 이유는 사람에게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개인적인 죄와 죄에 대한 통절한 심정을 먼저 요구하는 것 없이 하나님이 그에게 큰 행복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데부터 이야기하는 것이고,죄를 이야기할 때는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행복을 못 받았으니까 당신부터 예수를 인격적(人格的)으로 사귀십시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이런 것은 복음의 정자(正姿)가 아닌 것입니다.이와같은 형태에서 우리가 볼 때 사람이 어떠한 다른 방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고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그 위급(危急)과 갈급(渴急) 때문에 그렇겠지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로서는 그것을 그대로 대충적(代充的)으로 이야기 않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이 있을지라도 기본상 중요한 문제는 죄인데 세상의 죄일 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 개인의 죄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믿으려고 하는 그 사람의 죄를 이야기해야 해요.세상의 죄가 어떻다고 떠드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세상이 다 죄스럽고 세상이 흑함한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다 인정하는 것입니다.그것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그러면 그 개인의 죄가 더 중요한 문제고 그 죄를 깨닫고 이 죄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분명(分明)히 이야기해야 합니다.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절실하게 느끼는가,그렇게 느끼고 다시 이렇게 죄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는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다시 죄를 또 짓고 살아갈 계획을 다 하고 있지마는 좌우간 죄로 벌역(罰역<버력>:사람의 죄악을 벌하려고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는 것은 무서우니까 우선 벌역은 면해 놓고 나가서 죄를 짓겠다고 하는 그런 야소로운 공리주의자 같으면 예수 믿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점으로 볼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의 존중이라는 것은 주로 어디 있느냐 하며는 그 제의에 의해서 죄를 용서함을 받고 화를 면하고 그대로 행복을 유지하고 살겠다 하는 소위 행복주의적인 혹은 공리적인 기독교 관념,혹은 공리적인 종교 관념 그것이 더 강하게 그들을 지배할 때에 꼭 이렇게 제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간절히 기도를 할 때 대체로 어느 때 하게 되느냐 하며는 자기가 아쉬운 때 많이 하게 됩니다.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하나님이 나를 만나시기를 원하시고 나도 하나님께 늘 뵙고 하나님께 모든 사정을 고하고 지내는 것이 좋다는 거룩한 교통(交通)이라는 의미가 앞서지를 않고 보통때는 별로 필요 없다가 다급하면 마치 나를 위해서 항상 좋은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분한테 이야기하듯이 그냥 급할 때 나가서 비로소 이야기를 하고 또 일이 안 풀어지면 또 간절히 간절히 구하고 그러는 그러는 것입니다.이런 것은 뭐냐하며는 다 공리적인, 유틸리테리언(utilitarian)적인 종교 관념 가운데에서,그것이 은연중 잠재의식으로 그 아래 있어 가지고 나오는 까닭에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 많은 제의(祭儀)를 가지고서 하나님을 될 수 있는 대로 유화(宥和)를 해서 벌역을 내리시지 않고 그저 복을 더 내려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것이 동양에 있는 여러 이교(異敎)들과 또 샤만(shaman)적인 이교의 사상과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무당집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가서는 하는 말이 “지금까지 얻은 복도 많지만 새로 새 덕을 더 많이 입혀 줍소서” 하고 더 많은 덕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약간 제수물을 차려 놓고서는 그 앞에 제사드리고 귀신이 보고서 좋아하라고 갖은 굿을 다 노는 것입니다.이것은 물론 하는 형태가 대단히 패간(pagan)한,이교적인 것이지마는 가령 신성한 성전에 있어서의 제의도 그 중심에 있어서 같은 종교적인 동기나 거의 같은 종류의 종교적인 심정에서 하고 나갈 때 같으며는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상한 심령’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먼저 무엇보다도 죄인은 그 죄에 대해서 자기가 상한 심령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먼저 속죄제를 드리러 오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순서로서 먼저 죄에 대한 자기 심정의 상함을 먼저 생각해라. 심정을 상할 만큼 통회를 하고 슬퍼하고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버릴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붙드사 죄책을 용서하시고 죄에 오염이 되어 가지고 힘이 없어서 내가 버리지 못하고 끌려가는 것을 붙들어 주시사 거기서 나오게 합소서” 하고 두 가지에 대해서 간절한 심정이 생겨야 합니다.“죄책을 용서하시지 않으면 천상 천하에 하나님 앞에 설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하는 것과 그 다음에는 “죄의 권세를 나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고 아무 것도 이 세상의 다른 힘을 가지고 이길 수 없사오니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사 죄를 다 씻어주신 크신 뜻으로 죄의 권세에서 나를 늘 벗겨줍소서.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법겨줍소서”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그런고로 은혜가 더 많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결단코 아니라”(롬 6:1,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속죄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죄중에 거하겠느냐”고 로마인서에서도 그것을 강력하게 논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한 심령이 없이 그냥 나아가서 제의 그것 자체만을 전부로 알고 존중하면 그것은 옷은 있어도 옷에 함께 있어야 할 그 사람의 몸뚱이가 없는 것같이,마네킹에다 옷입혀 놓은 것같이 정신은 어디로 빠지고 등신에다 옷만 입혀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제의라는 것은 하나의 형태,형식,하나의 폼(form)입니다.그것 자체에다가 사람이 예술적인 의장과 또 정열을 다 기울여 넣어 가지고 잘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형태인 것입니다.거기에 곁들여야할 중요한 스피릿(spirit), 정신은 뭐냐하면 그것은 ‘상한 심령’입니다.첫째 이 상한 심령이 중요한 것입니다.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번제나 그런 다른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제의를 타매하신 이유를 그때 그때마다 성경에서 또 보인 데가 많이 있어요.그것을 우리가 앞으로 생각해 나가겠지만 그 중에 첫째 오늘 생각해야 할 것이 이 상한 심령이라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컨대 우리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인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깨닫는 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깨닫지 못할 때는 이런 제의의 존중 종교의 여러가지 형식이라는 것,혹은 제사 의식이라는 것,종교의 특성적인 자태로써, 형태로써 나타나는 것들을 몹시 존중히 여기고 거기에 수반해야 할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할 혼과 같은 스피릿(spirit)은 빠져나갈 때는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맹열히 타매하신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신 중요한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기도는 열심으로 하고 또 하고 몇 시간씩 엎드려서 혹은 어느 때는 울어가면서 야단내고 혹은 산에 들어가서 몇 끼씩 굶어가면서 혹은 “몇 년을 기도 생활 합니다” 하고 소의소식(素衣素食)해 가면서 기도하고 그러는데,대체 그것이 무엇을 원한 것이고 위하는 것이 되는가,이 기도라는 하나의 종교 형태나 의식에 있어서 참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않고 기도만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무엇인가,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열심으로 월삭과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느라고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 나아가서는 깊이 울고 찬송하고 하니까 “누가 너를 보고 절기를 지키러 오라고 하더냐.누가 그것을 요구하더냐. 헛되이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마치 헛되이 예배당 마당만 밟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입니다.그러니 예배당을 많이 나오는 것을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드시 필수해야 할 거룩한 정신이 함께 있지 아니하면, 그것이 함께 움직이지 아니하며는 그것 자체만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증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하나 배웠지요?잠언 28장 9절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많은 기도를 하고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는 대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며 또 나는 지금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마음 가운데 곰곰히 생각해서 하나님의 그 거룩한 도리에서 오늘 내가 자기를 어떻게 율(律)하며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하며 또 나는 어데로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해서 자기 생활의 기본적인 것이나 생활에 필요한 것이나 또 자기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태도가 도무지 없다면 현실상, 실질상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는 것은 자기 생각에 젖어 있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들은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의 종교의 관념과 구상 가운데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있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한 것만 열심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도 가증히 여기신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의 제의를 하나님께서 몹시 타매하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그러한 기도에 대해서도 가증히 여기신다 하는 것입니다.그런 까닭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체 이러한 종교적인 특성이 있는 양태 혹은 의식에는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일이며 이것에는 무엇이 꼭 따라다녀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현실상 문제로는 예배에도 필요하고 헌금에도 혹은 우리들 매일매일 생활하는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기도하는 것,찬송하는 것,모든 종교적인 방식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고 알 뿐 아니라 거기 의거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그러지 아니하며는 오늘날에도 꼭 마찬가지로 그것을 외식이라 하는 것입니다.뭐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정한 십일조를 드리고 또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몹시 주의해서 그 사람들이야 이스라엘 민족으로 봐서는 대단히 애국자입니다.

 

로마(羅馬) 사람에게 들어붙어 가지고, 친노파(親羅派)가 되어 가지고 로마 사람들의 착취(搾取)하는 전위분자(前衛分子:앞잡이)가 되어 가지고 세금 청부(請負),소위 도가(導駕:임금이 거동할 때에 벼슬아치가 먼저 나가서 길가에 사는 백성으로 하여금 길을 쓸고 황토를 깔게 하던 일)를 해서 자기가 미리 돈을 갖다 얼마만큼 정부에다가 딱 드려 놓고 자기는 돌아와서 로마 정부의 권위에 의해서 수세리(首稅吏)라 하는 직위에 앉아 가지고 다른 여러 세리라 하는 사람들을 시켜서 나가 가지고서는 각 이스라엘 집집에 다니면서 돈을 거두고 악착같이 그것을 걷어대서 드린 돈과의 차액을 자기가 먹고 이렇게 해서 부자들이 되는 이런 소위 청부 수세리들이 그 시대에 많이 있었는데 그것을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죄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바리새인은 “저런 세리와 같은 그런 죄인과 같은 생활 하지 아니했습니다.”(눅 18:11,12)고 말했습니다.

 

바리새 교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에 거짓말은 없어요.다 정당한 말을 했지요.그러나 문제는 “너는 너 잘한 것만을 쭉 이야기를 하고 네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의만을 이야기 하지 그런 모든 의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제일 중요한 스피릿(spirit)은 너는 못 가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그러나 특별히 그 마음에서 나타난 바리새인에 대해서는 더 나쁘다고 이야기할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그 세리가 저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얻어가지고 돌아갔다”(눅18:14)하는 이야기 뿐인 것입니다.왜?“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13),상한 심령이 있는 까닭에 그렇습니다.“나는 그 계급에 속했고 그 사회층에 속해 있고 그것을 업이라고 해가지고 내가 살아온 사람이고 죄인이로소이다.” 가슴을 치면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면서 그랬습니다.여기도 볼 것 같으며는 예수께서 그 바리새인들을 생각하시는 방식에는 그들의 무슨 도덕적인 불의라는 것을 자꾸 따지는 것보다도 그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볼 때 가지고 있는 그 민족적인 사명이나 특성에 있어서는 우수한 점들 그것들이 중요한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바리새인들이 유지하려는 소위 유다이즘(judaism)의 우수성과 특성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특성을 삼으시려고 한 것이 아닌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그런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구별성(區別性)을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옛날 출애굽기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 앞에다 놓고 하신 말씀대로 “너희는 온천하 열국 가운데 너는 내 것이 되고 또 너희는 이 세상 사람앞에 제사장 나라가 되고 또한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이것으로 이스라엘의 특성을 삼았는데 그것을 떠나 가지고 이제는 자기네가 이스라엘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그래서 여러나라 가운데 특이한 한 백성이지마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에코노미(economy)로서의 특이성은 떠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큰 문제이니까 이후에 차례 차례 이야기해 가면서 생각해 나가겠지마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우리의 모든 제의 가운데에 반드시 그리로 같이 나가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기본에는 어떤 큰 목표가 있어서 그 목표를 향해서 우리를 가게 하는 것입니다.이것을 이스라엘 사람의 역사에서 우리는 역력하게 보아 나아가는 것입니다.이스라엘에도 목표가 있었고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면서 그 사람들에게 주신 민족적인 특성이라고 할 것이 무엇인가를 그려주셨지마는 이스라엘 백성은 차츰차츰 거기서 떠나서 자기네가 생각한 이스라엘적인 독특성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 가지고 거기를 향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이 바리새인들이라든지 핫시딤 운동이 있었습니다.그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런 것들은 주로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제의 존중이라는 데에 있었어요.제의의 존중이라는 것,종교의 총 내용을 종교적인 특성에다 두었습니다.인생의 생활과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그 나라의 진행의 역사에다 두지 아니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며는,나중에도 보겠지마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느냐 하며는 제사라든지 번제가 아니라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마23:23)든지 “공의와 자비를 베풀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마 6:8). 이것은 뭐냐 하며는 공의나 자비라는 것은 한 사회적인 덕인 것입니다.그 사회가 당연히 가져야 할 특성적인 덕으로써 만방 위에 하나님의 산업으로 하나님의 통치하는 나라로서 의미가 무엇인가를 증시(證示)하라는 것인데 그런 민족사명(民族使命)은 뒤로 두어두고 제의를 존중해서 다른 사람 다른 백성이 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제사 의식과 독특한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민족 특성을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해 내는 그 역사의 코스라는 것과 역사의 특성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원래 경영하신 특성이 그렇게 다릅니다.기독교 안에 있어서의 문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사람들이 생각해내는 기독교의 특성이라는 것이 소위 특성적인 여러 제의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이것은 제의가 아니라 기독교회라는 것이 하나님이 왜 이런 새로운 에코노미(economy)를 지어내시고 경영하시며 친히 왕으로서 통치하시며 친히 인도하시느냐,이것을 기본으로 알아야 그 다음의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면 이 말씀에 대한 연구를 우리가 이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저희에게는 아버님께서 알기를 원하시는 거룩한 도리가 있고 그 나라의 심오한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은 뒤로 두고 종교적인 여러 제의를 심히 존중히 여겨서 방도를 묵지한 것과 같이 오해해 가지고 거기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아서 행복을 누리겠다 하는 공리주의에까지 타락하는 양상이 너무나 많사옵는데 이런 모든 가운데서 저희를 건져 내시고 이 우매한 저희들을 지혜와 성신의 거룩한 도리로 깊이 깨달아 알게 합소서.정신차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 것을, 우리 생애 가운데서 요구하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며 속죄하신 크신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깨달아 알게 하시옵소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 1977.8.21./주일 예배 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