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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10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5:58

기도에 대하여 10

 

김홍전 목사

 

제10강 "제자들의 신앙"


마가복음 4장 35-41절



그동안 우리는 ‘신령한 자와 기도’ 혹은 ‘신령한 자의 기도’라는 큰 제목 하에서 여러가지 것을 생각해 왔는데 특별히 형성해 나가는 것, 종교적인 감정과 그로 인한 종교의 틀을 가지고 주께 나아가서 우리 힘으로 진실하게 주를 섬기고자 하지만 때때로 주께서는 그러한 제사와 의식을 당신이 내신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금지하시고 차라리 우리 마음 가운데 책망(責望)을 내리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제 어찌하여 우리들 자신이 주님 앞에 항상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의 생활을 돌아보고 때때로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일이올시다마는 성경의 예(例) 가운데에서 또 하나 형성의 종교, 포머티브 릴리젼(formative religion)이라는 현실에서 또 어떻게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缺乏)되어 있는가를 때때로 알게 하시는 큰 사실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로서 전에 배운 바 있는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하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실을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의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제2년 말에 발생한 것으로 압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계시면서 어떤 날 많은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比喩)를 베풀어 나가셨는데 그 비유를 해석하신 것도 기록 가운데 있습니다. 예를들면 마태복음 13장에도 있고 마가복음 4장에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바로 전에 계속해서 여러가지 비유들이 있는데 물론 예수님의 비유를 모아서 기록했지마는 거기 있는 비유라든지 비유의 해석이라든지 그 하나 하나를 다같은 날에 한 번만 하시고 말았다고 하기는 어렵고 어떤 비유는 다시 반복해서 깨닫도록 말씀하신 것도 있는 듯하고 또 특별히 그 해석 때문에 따로 제자들만 모인 곳으로 가신다든지 조용히 따로 계셨다든지 하는 것은 동일(同日)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마태복음 13장에 일곱 개의 비유가 있는데 그 비유의 어떤 부분들이 마가복음 4장에서도 그날 아침 예수께서 배를 타고 앉아서 가르치고 전파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가지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어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막 4:1-4). 이것이 씨뿌리는 비유인데 마태복음 13장에 제일 처음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씨뿌리는 비유를 마태복음 13장(18-23절)에나 마가복음(4:10-20)에서 보면 이 비유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조용히 가르쳐 주신 이야기도 나오고 다시 마태복음 13장에는 씨 뿌리는 비유 다음에 24절부터는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를 하셨는데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를 하신 다음에 계속해서 겨자씨라든지 누룩이라든지 하는 비유를 하셨는데 이런 비유를 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다시 그 가라지와 좋은 씨의 비유를 여짜와서 알기를 원할 때 따로 방에 들어가서 조용할 때 하셨다”(마13:36) 하는 말이 있어요. 그러나 시간적으로 비유 자체는 아마 어느날 배에 앉으셔서 무리에게서 조금 떠나서 쭉 하신 것 같습니다. 그 해석을 꼭 같은날에 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됐든지 지금 문제는 예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날은 그 전에 바로 배에 앉으셔서 여러가지 비유를 가르치신 날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모든 비유의 해석이라든지 사실들을 다 그날 한 자리에서 전부 하셨다고 그렇게 얼른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 그 요점입니다. 이 요점을 늘 파악하고 계셔요. 성경의 기록법이라는 것이 어떤 시간에 된 일을 시순적(時順的)으로만 정돈한 것이 아니고 그 일과 관계된 것을 시간적으로는 나중에 했을지라도 거기다가 계속해서 붙이는 수도 있고 다시 돌아가서 그날 행한 그 다음 일을 이야기할 수도 있어서 그런 것을 우리가 주의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서 마가복음 4장 35절을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 배에 그동안 쭉 계셔서 가르치신 다음에 예수님은 다시 거기서 내려 가지고 집에 돌아가셔서 준비를 해 가지고 배를 타고 저 동남쪽에 있는 가라사 땅으로 --가다라 혹은 겔게사 혹은 거라사라고도 하는데-- 가신 것은 아니고 그냥 배에서 비유를 하시고 난 다음에 계신 데로 “자 우리가 저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서북방에 있는 도시지마는 배를 타시고 동남방에 있는 거라사 땅으로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가지로 가르치신 다음에 계속해서 배를 저어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신 것들은 여러가지 비유이지마는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비유 전부와 그 해석 전부가 그 배에서 한꺼번에 쭉 한 것이라고 얼른 말한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날 여러가지 비유로 거기에 있는 많은 무리에게 가르치신 다음에 하루종일 그렇게 일 하신 예수님은 피곤하시니까 “자, 인제는 그만 저 동안(東岸)에 있는 가라사 땅으로 가자” 하시는 의미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곧 어데로 가야할 것을 안 모양으로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배를 저어서 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날이 저물 때에’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모(日暮)라는 말인 것 보다도 ‘정오 지나서 이제부터 해가 기울어 내려가는 때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풍랑을 만나고 나중에 거라사 땅에 이르러서 다시 또한 큰 여러가지 일을 하신 것을 볼 것 같으면 석양, 황혼(黃昏)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찌됐든지 히브리 사람들의 용어로 해가 정오로 올라 갔다가 그 다음부터는 자꾸 기우는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차츰차츰 기울어가는 그런 때에 예수님은 가셨다, 즉 오늘날 여기서 말하자면 오후, 하오(下午)라 하는 의미가 더 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저쪽 갈릴리 바다 동남쪽에 있는 땅을 향해서 가시는 도중에 이 풍랑을 만났는데 그전에도 말씀을 드리고 배워서 알겠지만 갈릴리 바다입니다. 바다라고 하기 보다는 호수인데 이 호수의 주위가 한 25킬로미터쯤 되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좀 길쭉하고 모양이 비파 비슷하게 생겨서, 비파, 하프라는 것을 히브리 말로 킨노루라고 하는데 킨노루의 물이라 해서 암킨노루, 혹은 여성명사로 작은 비파의 물, 얌 킨네렛이라는 말로서 비파와 같이 생겼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 말대로는 바람이 그 호수 위로 몰아 불면 호수 위에서 휘-휘- 부는 바람소리가 마치 하프를 치는 소리와 같다 해서 킨네렛 바다라고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맨 북쪽 한 가운데로부터 요단강이 흘러서 들어오고 맨 남쪽에서 다시 문이 열려서 요단강이 흘러서 남쪽으로 사해(死海)까지 쭉 내려가는 바다지마는 그 호수의 수면은 지중해(地中海)의 수면과 같은 것이 아니고 지중해 수면 보다는 아래로 212m나 낮게 내려가 있습니다. 그렇게 갈릴리 바다는 저아래 낮춥게 처해 있는 것입니다. 길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21킬로미터이고 광은 평균 10킬로미터이지마는 제일 넓은 데는 13킬로미터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서쪽에 가버나움이 있고 서쪽 해안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탑가, 그 다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 막달, 믹돌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디베리아가 있고 이래서 이 바다 이름을 디베리아 바다라고 그럽니다. 헤롯이 특별히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를 기념해서 그 이름을 붙인 도시인데 업(業)이 아주 은성(慇盛)한 도시로 또 갈릴리의 수부(首府)입니다. 그 디베리우스에서 맞은편으로 반듯이 보면 이 바다의 폭이 한 9킬로미터쯤 됩니다.

 

이 바다는 사면으로 산이 병풍과 같이 둘려 있는데 특별히 동쪽의 산들은 높아서 직립(直立)한 것은 2000척, 600미터 이상 높이 올라 있습니다. 서쪽에도 산은 있지만 서쪽 높은 지대가 거기서 보면 남쪽으로 나사렛 지대가 있고 거기서 조금 북쪽으로 가나가 있고 산이 빙 둘러있는데 나사렛 지대의 높은 봉오리가 488미터라고 하는데 이렇게 산이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갈릴리 바다 서쪽으로 쭉 가면서 서있습니다.

 

산이 서있고 그아래 몇백 미터 되는 들이 있고 그리고 바다인데, 지중해에서 바람이 불어 올지라도 산이 이렇게 병풍같이 막혀 있어서 여기는 바람이 부는지 어쩌는지 모르다가 그 바람이 훅하니 산을 넘든지 골짜기 사이로 빠져 들어오든지 하면 특별히 서북쪽이 터졌고 거기에 가버나움이 있는데 그 쪽으로 바람이 막 몰려 들어오면 바람이 갈릴리 바다로 몰려 들어가서 동쪽으로 가다가 높은 동쪽의 바샨의 산들에게 부딪치면 그냥 바다로 바람이 다시 빙빙돌게 되어서 가만히 있다가라도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 가지고 무서운 풍랑이 배를 파선하게도 하고 혹은 사람을 많이 죽게도 하는 무서운 데입니다. 사람들이 얼른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이상하게 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하면 빨리빨리 바닷가로 저어 나가야지 그러지 않고 그냥 나가려 하다가는 혹시 어느 때는 무서운 일을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그러한 무서운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풍랑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대로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저어갔고 다른 작은 배들도 예수님의 배를 따라가는 것으로 여기 기록되었는데 그 후에 이 풍랑 속에서 작은 배들은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하나도 큰 문제가 발생해 가지고서 뒤엎어져 가지고 사람이 죽었다든지 아니했다든지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혹은 그 사람들이 가다가 바람이 이상히 불기 사작하니까 따라가기 어려워서 바로 바닷가로 그냥 빠져나가서 돌아갔는지도 알 수 없어요. 문제는 얼마나 저어가다가 그런 큰 풍랑을 만났는지 모르나 갑자기 무서운 바람이 불어 잦히니까 그만 그 바람 앞에 바다 물결이 흉용하게 막 뛰고 야단내는 데서 그만 할 수 없이 배로 물이 때려가면서 자꾸 들어오고 그러면 물을 퍼낼 여유가 없이 그냥 나중에 배에 물이 가득해 가지고서는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처음에 제자들은 갈릴리의 어부들도 그 속에 몇사람 예를들면 베드로나 안드레나 야곱이나 요한이나 다 벳세다 사람들로서 그 근방 바닷가의 북안(北岸)에서 늘 살면서 종래는 어업(漁業)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라 늘 배를 타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갈릴리 바다라는 것을 익숙히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갈 때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으로 알고 자기네가 예수님을 잘 모시고 가려고 했지마는 그만 그렇게 무서운 흉용한 바람에, 그 큰 노도(怒濤)에 휩쓸려 가지고 배에 물이 가득해서 그냥 배가 빠져 버리게, 무섭게 되니까 자기네가 힘껏 노력을 해서 물도 퍼내 보고 그대로 어떻게 이 풍랑을 견디어 보려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 어찌 할 수 없이 되니까 그만 배 고물 즉 선미(船尾)에서 벼개를 하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다급해서,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렀습니다.

 

마가복음 기록뿐 아니라 마태복음 8장에도 있고 또 누가복음에도 8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장에서부터도 있고 또 누가복음 8장 22절부터 이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들을 보면 “선생님, 선생님”하고 그냥 다급해서 부르면서 그냥 있는 그대로 “저희가 죽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을 했어요. “우리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평안하십니까?” 하는 그런 어의(語意)가 들어 있습니다. 마가는 그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기를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하고 이렇게 분명히 기록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깨우니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마태복음에 볼 것 같으면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4) 하는 말을 먼저 한 것같이 그 말이 먼저 기록됐어요. 그 말을 먼저 하셨든지 나중에 하셨든지 문제는 좌우간 일어나셔서 한 것같이 그 말이 먼저 기록됐어요. 그 말을 먼저 하셨든지 나중에 하셨든지 문제는 좌우간 일어나서는 두 말 할 것 없이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서 “잔잔하라! 고요하라!” 하니까 그렇게 흉용하고 막 그냥 미친 것 같이 으르릉거리던 바다와 바람이 즉시 순간에 고요해져 버렸습니다. 물론 이것이 자연 현상은 아닙니다. 자연 현상으로 바람이 자든지 바다 물결이 흉용하다가 자려면 그 자는 시간을 다 요해서 얼마동안 떠들다가도 차츰차츰 고요해지고 바람도 차츰차츰 적어져 가지고 고요하게 되는데 그렇게 막 무섭게 들어오든 것이 딱 그쳐 버리고 그렇게 무섭게 요동하던 바다가 그냥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이 거울같이 말갛게 조용해 졌습니다.

 

거기 제자들 누구든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게 사건이 발생하지 아니한 까닭에 아까는 그 풍랑을 무서워 했지마는 이번에는 그 인물에 대해서 큰 외포(畏怖), 무서움과 두려움을 가지고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다나 바람을 명하여 잔잔하라 고요하라 하니 즉시 이것들이 다 순종하느냐. 누구시기에 자연(自然)의 무서운 맹위(猛威)가 명령 일하(命令一下)에 즉시 순종(順從)하느냐” 하고서 그가 누구신가 하고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여기 이 비유(譬喩)가 가르치는 여러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으나 이 비유 전체를 다시 해석하는 것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중요히 어떤 한 점을 보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고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자기의 열정과 자기의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지지하고 모시고 살아갔지마는 이런 무서운 위기 앞에서 제자들은 그만 무서워했습니다. 큰 자연의 맹위가 내려닥칠 때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 극복(克服)해 보려고 하다가 할 수 없을 때 나중에는 그만 어찌할 길이 없어서 예수님께 구원을 청했지마는 이렇게 자연의 맹위, 말하자면 외타의 큰 세력에 대한 큰 두려움이 그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점을 제자들에게 책망을 하셨는가, 당연히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은 다 무서워하고 벌벌 떨고 큰일 났다 그리고 당황해 가지고 지푸라기도 잡으려고 해서 예수님 보고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됐는데 안 돌아보십니까” 하고 그때야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 어려운 사정을 고할 만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책망은 “왜 네가 나한테 고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이것을 나를 보고 어떻게 처리해 달라고 이제야 나를 깨우느냐” 가 아니고 “어찌하여 무서워 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요컨대 제자들이 이 자연의 행위가 막 휘몰아 금방이라도 삼켜버리고 목숨을 가져갈듯 할 때는 그만 마음 가운데 그것에 대한 큰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참으로 튼튼하고 위대한 신앙이라면 그런 일에 있어서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믿고 의지해서 예수님께 온전히 맡겨 버리고 의지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암암리에 암시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신앙의 정당한 상태, 자태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세력 앞에도 그 마음이 두려움으로 임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가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면 아는 만큼 오히려 곧 예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인데, 예수께 나와서 최종적(最終的)으로는 구하고 도움을 청하고 혹은 건져 주시기를 바라는 신앙은 있고 그런 정도의 종교라고 할지라도 만사에 어떤 일에서 자기의 심정으로 문제를 처리하거나 대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금방 맡기는 신앙이 없는 공허한 기간에는 세상에 있는 다른 세력이 와서 위협할 때는 그 큰 위험, 그 큰 위협 앞에 무서워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여기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동안 우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교, 그 종교의 감정과 또 그러한 종교적 상태가 정당하게 우리의 심정에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유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항상 그 형식이 훌륭하고 또 진실하고 또 열렬하지마는 그 속에 참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을 안 가지게 된다는 형식적인 종교, 혹은 형성해 가는 사람이 자기의 힘과 종교의 열정을 가지고 지어가는 종교의 상태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때때로 꾸짖음을 받고 싫어버림을 받는가를 우리가 보아 왔습니다.

 

여기서 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상태가 그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연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도 말한 것과 같이 최소한도로 위험이 있을 때에 예수님께 나와서 호소하고 부르짖는 정도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찬란한 부분은 거기에 나타나 있지 않고 많은 사람의 눈에는 예수님의 제자됐다는 그 제도나 일반 관계, 인간 관계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의 어떠한 것이 그에게는 찬란하게 남에게 비췄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히려 받아주신 부분은 그런 점에 있지 않고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하신 말씀대로 환난이 있을 때에 최종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와서 결국 부르짖는 것은 예수께서 가상히 여겼을 것이고 만일 무슨 취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이다 하는 정도입니다. 결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제자다 하고 그 제자로서 자기 의무(義務)를 충실히 해야겠다, 우리는 예수님 제자니까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면 우리가 또 잘 모시고 가야겠다 하는 그러한 일반적인 종교 도의의 표현에 중점이 있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현저히 표현된 점은 그런 점입니다. 예수께서 “자 저 건너편으로 가자.” 거라사 땅을 향해서 가르치면서 가자 할 때에, “예, 예수님 저희는 이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니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네가 나를 모시고 가겠느냐? 그래 어데 나를 모시고 가 보아라. 나는 피곤하니까 배 뒤에서 한잠 자겠다” 하고서는 배 뒤 고물에서 벼개를 하시고, 아마 베는 것이 나무 토막이 됐든지 무엇이든지 그것을 베시고 누워 계셨습니다. 깊이 잠들었어요. 제자들은 풍랑을 만났어요. 그 풍랑 속에서 지금 저기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 분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그 때는 생각을 못 했어요. 자기네가 풍랑을 극복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만일 자기네가 배가 침수되어서 다 죽게되면 배 고물에 주무시는 예수님도 물에 빠질 것이 분명한 이야기지마는 그렇게까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처음에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을 의지(依支)하고 “예수님이 돌아보시지 아니하면 우리가 아무리 재주있게 배를 잘 저을지라도 반드시 평안히 간다고 보장 못한다. 아무리 이렇게 잔잔하고 맑고 거울 같은 물이지마는, 또 아무리 우리가 과거에는 여기서 많이 살아 보았지마는 이제부터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이상 내가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고로 나는 그를 의지하고 여기를 건너가겠다”는 이러한 심정에서 시작을 한 것이 아니고 “아, 예수께서 명령하시고 우리는 그의 제자이고 우리는 그의 추종자니까 그를 잘 모시고 평안히 모시고 건너편까지 주무시는 것을 깨우지 않도록 잘 가자.” 그래서, 자기네의 약간의 종교적인 열정과 정성과 자기네의 가지고 있는 도덕이 예수님을 지지하고 나가려고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여”, 즉 “너희가 나를 택했느냐? 네가 기독교를 택하고 네가 그리스도를 택해서 모시고 살려고 했느냐? 아니다.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다. 처음부터 시작을 그렇게 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참된 바른 거룩한 종교의 상대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시간부터는 그리스도에게 전부를 늘 맡기고 잠시라도 내 마음 가운데, “아! 내가 이것을 곧 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이것을 잘 해드려야겠다”고 하는 그런 인간적인 충성을 가지고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기본적인 요소는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봉사하는 데 있는 것보다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적으로 늘 의지하고 전적으로 그만을 바라고 의뢰하고 사는가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심정이 날마다 주님만을 꼭 의지하고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라고 그가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심정 가운데에서 사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어떤 것은 우리에게 이미 은혜로 주셨으니 내가 주신 은혜를 가지고 잘 정돈해서 이것 쯤은 일일이 주님을 괴롭히지 않고 일일이 주님한테 묻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심정, 그렇게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관념을 안 가질지라도 주로 그러한 종교 감정, 생활 감정의 터 위에서 내가 어떤 문제에 늘 봉착하고 직면하고 있는가, 만일 그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는 이런 큰 풍랑 같은 어떤 위기 앞에서 비로소 자기가 어떻게 헛되이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주를 의지하고 주를 모시고 살려고 했는가 하는 것을 개안(開眼)하게, 눈이 번히 뜨이게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이 풍랑에서 아무도 무슨 일을 당한 일이 없어요. 다만 문제는 제자들이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눈떴냐 하면 자기네가 어떻게 허무하게 지금까지 자기네 자신의 종교 심정을 가지고 자기네 자신의 충성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려고 했는가를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러한 생활 태도는 옳지 않은 것을 아마 거기서 큰 경험으로 깨달았을 듯 해요. 왜냐하면 이 풍랑 앞에서 그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최후에 있어서는 결국 그 분을 의지했어야지 의지(依支)하지 않고서는 어찌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초에부터 의지하고 사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고 아마 깨달았을 듯 합니다. 우리에게 깨달으라고 가르치시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렇게 못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을 알되 예수님의 그 모든 자격과 능력과 속성을 충분하게 알지 못한 그 점에 있어서도 또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이 풍랑을 명령해서 잔잔케 하시니까 “이분은 대체 어떤 분이냐. 우리는 그렇게 몰라 뵈었다.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자연의 맹위라도, 모든 자연의 위력도 명령일하에 즉시 순종케 하시는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기독관(基督觀)혹은 메시야관, 예수관이 거기서 다시 의문을 일으키게 중요한 계기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으로 알고 의지할 분으로 알지마는 그것은 이론에 불과하고 생활에 있어서는 기독 종교를 우리가 잘 유지하고 충성을 해서 받들고 나가겠다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바로 대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뭘 기뻐 하시느냐, “전적으로 너는 의지하고 내게 맡겨라.” 그런고로 우리의 중요한 것은 “주여, 나는 주께만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줍소서. 할 수 없는 사람이올시다.” 다만 죄로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그것 뿐 아니라 우리가 죄 때문에 물론 기본이 이렇게 생겼지마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인간됨이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이 태도가 신앙에 있어서는 더 먼저여야 하고 중요한 것이고 그 요소를 잠시라도 빼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서 우리가 항상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는 생활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역대하 16장 9절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監察)하사 전심(全心)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다른 것을 안 돌아보고 자기의 열정이나 종교에 의뢰치도 않고 그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전심으로 여호와께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그랬어요. 잠언 3장 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明哲)을 의지하지 말라.” 자기가 가진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지혜도, 자기가 깨달았다는 그 사실도 의지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의지를 요구하는 것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어서는 “오직 의지(依支)하라”는 말이 가장 중요한 말로 그것이 신약에 와서는 ‘믿으라’하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런고로 믿음이 도무지 없는 것은 아니나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했느냐.” 저들이 무서워했다는 그것을 꼬집었습니다. “왜 무서워 하는 줄 아느냐. 전적으로 의지 못해서 무서워 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요구하신다는 것을 여기서 배우는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여, 저희는 참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순간순간에 일에 임할 때 마다 일이 크든지 적든지 깊이 느끼고 그때마다 할 수 없는 저희가 오직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살아야 할 것을 아옵나이다. 그러나 알 뿐이고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어느덧 그릇된 인간적인 종교 감정이 뒤섞여 들어와서 슬그머니 대치(代置)되어서 어떤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주님을 모시고 잘 이루어 보고자 하여 주님의 제자다운 제자가 되었다는 본분과 영예를 잘 지켜보고자 하여 나아가는 옛날의 이 제자들과 같은 일이 발생하기 심히 쉽사옵고 때때로 그렇게 하고 있사오나 이런 모든 데서 건져 주시고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어찌할 수 없는 저희가 오직 주님만 의지하오니 붙들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인도하시고 여기서 우리가 진실하게 주님의 지키시는 일들을 해나가게 합소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가만히 앉아서 주님께 울고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또한 순종하되 오직 자기의 힘으로 이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고 의지하고 나아가게 합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9.25./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