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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12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6:11

기도에 대하여 12

 

김홍전 목사

 

제12강 바리새인의 기도


마태복음 6장 1-6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어떠한 심정을 가져야 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지만 또한 우리의 생활이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사상이 어떠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생활의 방향이 부정당하고서는 하나님께 대한 생활 감정이 정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가 한가지 배우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취하는 어떠한 자세(姿勢)를 주께서 꼬집어서 비판하신 것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6장 5-6절 말씀은 기도에 관한 주님의 교훈입니다. 이 기도에 관한 교훈을 보면 “너희가 기도 할 때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거리나 혹은 회당에 서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서서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 저희들은 다 사람 앞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고로 너희들은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런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이야기 했는데 특별히 그것을 우리 주님은 ‘외식하는 자’라는 말로 그 성격을, 도덕적인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賞)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특별히 바리새인이라든지 서기관이라는 말을 붙이신 것은 아니고 ‘외식하는 자’라 하는 말로 모든 그러한 도덕적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일괄(一括)해서 하신 말씀인데, 그 전형적인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맹렬하게 공격하신 점으로 볼 때 물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대상으로 중요히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외식이라는 말에 대해서 주의하여 보았는데 외식이라는 말이 순전히 속은 악하고 껍데기만 착한 체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보다도 그 사람들의 외식, 바깥을 꾸민다 할 때는 꾸미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형식을 취할 때에는 거기에 정당한 사회적인, 정치적(政治的)인 이론이 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뿐 아니라 5장에서부터 6장, 7장까지 세 개의 장을 걸쳐서 산상보훈이라고 하는 큰 교훈(校訓)이 드러나 있는데 이 산상보훈 전체를 통해 두 개의 큰 조류(潮流)가 흘러가는 것을 보이심을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두 개의 큰 조류라 할 때 이 산상보훈의 맨 처음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처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거룩한 것을 들어 가르치는데, 보통 말한 대로 팔복(八福)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해서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을 가르치신 다음에는 우리 주께서 당신을 율법(律法)과 선지자(先知者)와의 관계를 비추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관계 아래에서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을 자연스럽게 결론을 짓도록 이끌고 나가셨고 그 다음에는 “그런데 이제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 완전케 하러 온 나의 가르침에 의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너희들이 너희 선조들과 장로(長老)들과 지도자들의 전승(傳承)한 그 율법이나 선지자에 대한 태도를 그냥 유지해서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의를 쌓는 것 가지고는 이제 내가 너희에게 선포(宣布)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즉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天國)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해서 큰 결론을 하나 내려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을 볼 것 같으면 첫째의 네 가지가 사람이 직접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다음의 여섯 가지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인데, 특별히 다섯째 계명은 부모에 대한 계명이고, 그 다음에 일반 사회에 나가서의 계명, 제육계명부터 시작해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관계인 프린시플(principle)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제 육계명과 칠계명입니다. 육계명과 칠계명을 들어 계명의 기본 정신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이 사람끼리의 신용사회(信用社會)를 건설하고 살 때에 맹서라는 문제, 서약이라는 문제를 말씀하시고 또 여타의 이야기를 차례 차례 해 나가신 것입니다. 또 사람간의 맹서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악이라는 것에 대해 율법적인 교훈은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지마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거기서 일보 더 나아가 사랑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으로 5장의 중요한 것을 가르친 다음에 6장에 와서 사람 앞에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을 삼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대표적인 중요한 예로서는 구제(救濟)하는 문제를 들어서 구제할 때 다른 사람과 같이 나팔을 불고 크게 선전하고 사람들 앞에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어 가면서 구제하지 말아라. 그 사람들은 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하니 저희 상급을 이미 받은 것이다. 그 말 끝에 기도에 대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자같이 거리 어귀에서나 회당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는 데서 손을 높이 들고 크게 기도하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기도의 바른 원칙, 프린시플(principle)을 여기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보훈의 중요한 내용을 전부 통찰(洞察)해서 개괄(槪括)할 것 같으면 예수님의 크라이테리아(criteria)로써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여기서 이렇게하는 것을 꼬집어서 말하고 저기서 저렇게 하는 것을 꼬집어 말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다음에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서 볼 것은 예수님께서 공격(攻擊)한 대상, 예수님께서 비판(批判)하신 대상의 내용들을 나열하면 그것도 하나의 중요한 시스템(system)이 있는 중요한 조류입니다. 어떠한 일정한 계통(系統)이 서 있는 조류에서 파생(派生)한 여러가지 행동, 종교적인 태도, 도덕적인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크라이테리아(criteria)에서 당신의 거룩한 위치에서 “그렇게 않는다. 이렇게 해라. 그렇게 않는다. 이렇게 해라” 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도도 역시 이런 큰 조류 아래에서 비판하신 것이고 또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안 들으신다. 저런 기도는 안 들으신다”고 산발적으로 이 세상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기도하는 태도의 잘못을 그냥 꼬집어서 말씀한 정도가 아니고 여기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하나의 씨스템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총괄적(總括的)인 비판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예수님 당신의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매니페스토(manifesto) 중요한 선언(宣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선언을 하실 때 그냥 하나님 나라는 이렇다고 적극적으로 이런 이야기만 조르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당시 사람들이 가장 오해(誤解)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일일이 저촉하면서 그것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분석(分析)하고 배제(排除)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 생각한 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다” 하고 바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어떠한 종류의 기도라는 것이 가장 진실하고 가장 큰 의(意)와 목적 하에서 할지라도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오묘한 여러가지 내용이 있는데 오늘 개론적(槪論的)으로 먼저 한가지 중요히 생각해야 할 문제는 대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로 대표되어 있는 바 예수님이 공격하신 여러가지 사이비적(似而非的)인 것들이 근본적으로는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인도함을 받아 시내산에서 하나의 민족(民族)으로 조직되고, 하나의 민족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한 신입, 오이코노미아(oikonomia)로서 땅 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자태를 드러내도록 제도를 주시고 사명(使命)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을 보면 “모든 천하가 내 것이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명령을 잘 순종할 것 같으면 너희는 너희는 내 보물이 될 것이고 또한 이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대로 (신약의) 교회로 다 옮겨와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祭司長)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해서 유대 사람들에게 시내산에서 민족사명(民族史命)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자격을 주신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다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고로 이 말씀은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틴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신 거룩한 나라의 형식을 취해가면서 그 나라의 아름다운 것들을 건설해서 현상적으로 구체적으로 한 민족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大權)작용은 어떤 것인가를 증시하고 증거하고 보여야 할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차례 차례 뒤로 떨어져 가지고 가령 그 후 사사 시대에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또 정치제도(政治制道)로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상적인 정치 형태를 보유할 식견(識見)과 각성(覺醒)이 없고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세상의 다른 나라들의 여러가지 조직 형태를 볼 때, “아! 우리도 저처럼 다른 나라들 같이 됐으면” 해서 결국 전제주의적(專制主義的)인 왕권(王權)을 강력하게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최초에 아브라함을 택해서 그가 큰 부족을 거느리고 왕노릇을 하고 살 때에도 왕으로서의 위치를 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보면 족장(族長)이고 사회에서 볼 것 같으면 그와같이 절대의 권력을 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식구 이외에는 전부가 그의 종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의 존재(存在)의 의미가 그들의 존재 의미가 될 만큼 위대한 의미를 가졌지마는 한번도 그가 독재자(獨裁者)로, 왕으로 행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장막에 거하면서 두류방랑(逗瑠放浪)하는 하나의 유목민의 추장 비슷하였는데, 추장으로서도 그런 추장은 없어요. 다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이런 형태를 사사시대(師士時代)도 취하고 왕국시대(王國時代)도 취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 나라가 왕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왕국의 스타일은 세상의 왕국같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깨달을 눈이 없고 생각할 정신이 없는 까닭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왕과 같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주시고 왕국을 만들어 주셔서 우리가 전쟁에 나갈 때 그가 우리를 인도하게 합소서”(삼상 8:5, 20) 하며 강경하게 사무엘에게 와서 자꾸 담판하니까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도 “그러면 할 수 없다” 하고 그 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간곡하게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의 말을 들으라. 저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렸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저들의 왕노릇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고서는 왕을 세우고 왕의 제도를 이야기할 때 무서운, 전제적인 그리고 찬탈을 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마음대로 하는 왕의 이미지 하나를 그려서 가르쳐 주니까 백성들은 “예, 그래도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들은 네 자식들을 데려다가 자기 앞에 달리게 할 것이고 좋은 딸들은 데려다가 자기 첩을 삼을 것이고 그래도 좋으냐” 하니까 “예! 그래도 좋습니다”(삼상 8:10-19)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이라는 왕을 얻었더니 과연 사울이라는 왕은 대단히 왕권 신장을 위해서 연연하고 왕권을 어떻게 하면 유지(維持)할까 하는 데에만 정신을 쏟아 가지고 비록 이름은 왕으로서 이름과 형태만 바뀌었지 여전히 하나님의 종으로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요 나는 종이다” 하는 태도를 도저히 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제가 왕노릇 하려고 하고 백성 앞에는 항상 권위(權威)를 나타내려고 해서 심지어 하나님의 책망을 듣는 그 시간까지라도 사무엘 보고, “저한테는 말씀해도 백성에게는 저하고 좀 같이 가셔서 위신을 세워 주십시오”(삼상 15:20) 하고 허무 맹랑한 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취했을 때 다윗의 왕권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위치를 명백하게 주위에 선포하고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주위에 있는 다른 이면 왕국과도 완전히 다른 상태였습니다. 이렇지마는 그 왕권도 차츰차츰 쇠미하고 그 왕도 차례 차례 타락하고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이를 쟁하고 점점 부패하고 타락해서 볼품 없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몰락(沒落)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그 나라의 거룩한 형태가 나타나지 않고 몰락해 버리고 마니까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리아에 잡혀가게 만들고 남쪽 유다는 주전 586년에 신 바벨로니아 제국에 병탄(倂呑)이 되고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냥 병탄만 되고 점령(占領)만 된 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이래로 성전도 훼파해 버리고 법궤(法軌)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그 기명(器皿)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의 명령으로 바벨론과 앗수리아의 그 넓은 메소포타미아 혹은 동방에서 살고 있던 지역에서 차츰차츰 귀환한 사람들이 돌아와서 일대의 운동, 이스라엘 복권 운동을 했어요. 첫째는 이스라엘적인 정신과 주의와 신앙과 사상을 회복해야겠다. 여기에 총 지휘자로 나섰던 사람이 서기관이고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바사 왕이 유대 땅 총독을 삼아서 보낸 ‘느헤미야’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같이 에스라와 모두 합해서 중흥(重興)운동을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가 있고 만족(蠻族)들의 방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도 쌓고 성전도 중수하고 이스라엘의 국권 즉 민족정신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 사람들이 그 지방 가나안 여자들과 혹은 애굽 여자들과 잡혼(雜婚)해서 혼혈(混血)의 자녀들을 낳은 사실들에 대해서 조처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제 마음대로 이방 풍속을 쫓아 살던 사람은 그것을 죄다 버려야 한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은 다 이방 여인과 갈라 서서 아내를 보내야 한다”(스 10:10-11). 그것은 어려운 조건입니다. 지금까지 살던 이방 여인과 그로 인한 자녀(子女)까지 다 내버리고 헤어져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자비(無慈悲)한 것 같지만 무자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든지 문호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살겠다고 하면 반갑게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 자기네 선조 할머니 가운데 룻과 같이 자기 하나님을 삼고 찾아오면 그 품에 넉넉하게 받아들여서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그 이방 여자들은 그런 여자들이 아니고 끝까지 자기 귀신들을 가지고 와서 귀신을 섬겨가면서 남편을 떠나지 않겠다는 그런 주장입니다. 철저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과 종교는 철저한 종교다. 그렇게 반거충이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양다리 걸치는 것을 용인(容忍)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언제든지 문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우상을 포기(抛棄)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하고 “나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 하면 곧 그것을 이스라엘이라고 받아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원래 조성(造成)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모세 자신의 부인이 구스 여자요 히브리 여자가 아닙니다. 지도자 모세의 부인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에 와서 살 때, 예를 들면 여리고 성에 있던 기생 라합도 그가 하나님 편으로 설 때에 반갑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와같이 항상 이스라엘 종교는 문호를 열었지 이스라엘 핏줄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는 법이 없어요. 언제든지 개종자(改宗者)를 받아 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충분히 하나의 순일(純一)한 종교로서 신앙을 세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반대하고 그것을 파괴하려는 이질적(異質的)인 요소로 들어와 있는 여인 같으면,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 들어와서 완전히 여기 사람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헤어져서 가던지 해야지 중간에서 머뭇 머뭇 해가지고 여기에 독소를 집어넣는 파이프 노릇을 하지 말아라.” 이것이 에스라의 부흥의 정신이지 결코 비인도적(非人道的)인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자기 신을 섬기고 싶어서 개종을 못하겠다 하는 여자들은 할 수 없이 떨어져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떨어져 가게 아니하면 이스라엘은 다시 부패할 것입니다.

 

이와같은 운동을 적극적으로 여행(旅行)을 할 때 무리한 일도 많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 운동을 하는 에스라의 운동 세력의 중심이 된 것이 경건주의자,경건 운동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이후에 핫시딤(Hassidm) 즉 경건주의(敬虔主義)운동이라 해서 내려오면서 이스라엘적인 것, 히브리적인 것을 숭상하고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적극적인 노력은 히브리 민족주의라고 할는지, 한마디로 말해서 정신적으로 봐서는 참으로 순결한 헤브레이즘(Hebrewism)이라는 것인데, 이 헤브레이즘을 이들의 노력에 의해서 유지를 하지 아니하였더면 그 후에 이스라엘은 바사(페르시아)가 망하고 그리이스(헬라)가 그 다음에 와서 지배하면서 헬레니즘(Hellenism)을 도입(導入)하고 창대하게 세계에 퍼쳐 나가든 알렉산더의 문화정책 하에서 제대로 잘 유지했을는지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알렉산더의 나라는 네(四) 나라고 갈려 가지고 알렉산더의 네 장군 가운데 씰룩커스라는 장군과 풋톨레미라는 장군이 각각 하나는 수리아를, 하나는 애굽을 차지하고 왕조(王朝)를 건설했는데 이들은 팔레스틴을 가운데다 놓아두고 남쪽에 있는 풋톨레미가 강하면 또 와서 점령하고 항상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그 나라를 점령해 나가는 주전 2세기경에는 앤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는 유명하고 괴악한 자가 나타나서 적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방불(彷佛)한 자태로 나타났던 인물이 있는 것을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결국 그의 압제하에서 살기 어려웠습니다. 성결한 제단에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결히 여기는 돼지를 잡아 피를 성전의 놋제단, 번제단에 흘리는 만행을 실룩커스가 진행할 때 마지막에 유다스 마카비우스가 일어나 자기의 동지들을 이끌고 저항하는 운동을 해서 유다스 마카비우스의 위대한 항전(抗戰)이 마침내 승리를 얻어 하스모니안 왕조를 건설하고 소강(小康)을 유지하면서 자치정부(自治政部)를 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후 70년간에 마침내 로마의 장군 디벨리우스가 와서 완전히 괴멸(壞滅)해 버리고 로마의 한 속주를 만들어버린 이래는 로마의 속방이 되어서 그의 군정하에 엄엄히 지내던 것이 그 때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파탄이 많은 정치 속에서 헤브레이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핫시딤, 경건주의자들의 운동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귀환한 이래로부터 계계 승승해 가지고서 계속해서 그 나라에서 자기네의 헤브레이즘을 맹렬하게 지도하고 나갔는데 이 사람들을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부르기를 분열(分列)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보태서 ‘핫셈’이라는 말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을 서기관이라고 불렀는데 결국 성경을 친숙하게 아는 그 사람들과 경건한 운동을 해서 히브리적인 종교와 사상과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이 사람들의 활동은 언제든지 일반 우매한 백성에게는 구체적인 현실을 늘 요구한 것입니다.

 

일반 우매한 백성에게 정신적인 것만을 고취하려니 잘 안 되니까 결국 그 사람들은 이리로 저리로 그때그때 때를 따라 가지고서 세속주의(世俗主義)와 세상의 큰 권세와 사대주의(事大主義)에 휩쓸려 가지고 가는 이 사람들을 될 수 있는대로 끌어 잡아 당겨 가지고 하나의 지도정신(指導情神)아래에서 움직여 나아가려고 할 때는 자기네의 바리새당이라고 하는 경건주의 운동 단체가 항상 그들에게는 유력해야 하고 지도록을 가져야 하고 그들과 긴밀한 접촉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긴밀한 접촉을 위해서는 그들이 항상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저들은 알아야 하고, 요즈음으로 말하면 퍼블릭 릴레이션(public relation)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피알(P.R.)이 참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즉 사회적인 접촉, 구체적인 연락,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것과, 릴레이션(relation)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정당이 자기네 정당 세력을 그 사회에다 늘 잘 부식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령 한재(旱災)가 있다든지 수재(水災)가 있다든지 어려운 일이 갑자기 생기면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자기네 기관지나 선전지를 동원해 가지고서 의연금(義捐金)을 모집합니다. 의연금이 자꾸 답지할 것 같으면 그것을 모았다가 가지고 나아가서 그 한재 혹은 수재를 당한 사람들에게 줄 때에 누가 했는지 모르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주지 않습니다. 무슨 정당, 무슨 단체 하고 이름을 깃대에 크게 써붙이고 사람들에게 “어서 오시오”하고 나팔을 불어저치는 것 이상으로 스피카로 “구제를 받기 위한 사람들은 이리로 가까이 와 주십시오” 하면 사람들이 모두 와서 어떻게 살 길이 있나 하고 보고있노라면 “아,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의연금을 나누어 줍니다. 나누어 주면 그 사람들이 감사하다고 누가 준 줄이나 알아야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다” 하고 자기의 이름을 거기다 곁들여서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을 때 호소를 하든지 혹은 선전을 하든지 혹은 지도를 하고 나갈 때 “아! 그 사람들이구나” 하고서는 열복(悅服), 즐거이 따라갈 수 있는 관계를 그런 기회를 이용해 가지고 긴밀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바리새 당들도 시시하게 그냥 멍청하지 않았습니다. 민중 앞에서 자기네가 지도력을 안 잡으면 그와 반대로 헬라화한 사두개당들이 지도력을 잡겠다, 그렇지 않으면 헤롯당이 잡겠다(당시 헤롯당과 사두개당은 아주 친했었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 이 민중을 히브리 사람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도력을 잡아야 하겠다, 이렇게 해서 붙들고 나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야 말로 너희들에게 가장 중요한 헤브레이즘을 늘 가르친 사람들이 아니냐? 보아라” 하고서는 기도나 구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조용히 하지 않고 반드시 “우리가 한다. 바리새가 한다. 봐라.” 즉 “경건한 우리가 한다. 너희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우리들이다. 우리와 접촉이 늘 긴밀해야 하겠다. 또 우리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빌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하는 식입니다. 적어도 거기에는 늘 종교라는 것이 엄연한 색채로써 움직였습니다.

 

사두개당의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같은 움직임을 하지 않고 종교적인 움직임, 경건의 움직임을 뵈어 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들의 마음 가운데 자기네가 바라고 원하는 그 이상주의적인 국가, 이것이 메시야 왕국인데, 메시야 왕국에 대한 이미지(image)를 늘 그리고 있게 하고 그것을 소망하고 기대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중은 다 그 영향 가운데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좀 더 극단적인 엣씬(essin)이나 소위 사해축서(死海縮書)를 쓴 금랑종도와 같이 됐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소수가 친로파가 되어서 로마의 주구(走句) 노릇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민중 앞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제도와 내용과 성격을 표시하려고 할 때 첫째는 “너희 생각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것이라고 미리 짐작을 하는데 그 짐작을 버려라. 너희 생각에는 내가 무슨 이야기 하면 마치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나서는 것같이 생각 하느냐.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반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完成)하려고 온 것이다”(마 5:17).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개혁적인 참된 진리로 말미암아 바른 것을 드러내는 정신을 저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왜? 저들은 모세와 선지자들, 다른 말로하면 토라와 느비임, 즉 성경이 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곧 지금까지 백성의 장로들의 유전과 바리새당들이 지금까지 지켜오려던 그 길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것이 전통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의 종교적 감정을 가지고 가르치고 거기에다 전통이라는 조건으로 “성경를 절대로 합니다”하고 나오면 그렇게 믿는 것이 정통인줄 알고 그렇지 않다고 비판할 때에는 이단시하고 사설시(邪說視)하는 이런 우매(愚昧)한 경향이라는 것을 어는 사회든지 찾아보기 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 제도에도 그처럼 우매한 경향이 있었어요. 그래서 정통이라 하면 바리새당적인 교육의 주장과 그러한 방법을 늘 정통으로 알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비판(批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자태는 무엇인가를 가르친 것입니다. 가령 구제의 문제에 있어서도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할만큼 그렇게 분명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구제 문제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기를 구제할 때에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이 물질이 나타내는 효과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물질을 가지고 가서 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을 주도록 해야 하겠고 그 사람들의 필요에 충당하도록 해야 하겠다.” 이것은 구제할 때 누구든지 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으로 그 사람들에게 누가 이것을 주었는가 생각할 때 우리가 주었다 하는 것을 생각해서 우리와의 의리(義理)의 관계, 고마운 심정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도록 해야 하겠다 하는 것이 중요한 고려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그 물질을 필요로 하니까 물질을 주는 것이 좋으나 누가 주었다 해서 네가 그 물질을 매개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너를 팔지 않고 너와 그와의 관계를 물질을 매개해서 하지 않으면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그렇다 네가 그 사람과 물질로 매개해서 관계를 자꾸 맺고 내가 합니다 하는 것을 보이지 않는 동안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직접 관계를 맺으신다. 너하고도 관계를 맺으신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어떠한 행동 가운데서라도 직접 영광을 받으시고 직접 권위자로서 높임을 받도록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제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게 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너희들 보기에는 너는 손해보고 정치적으로 아무 소득이 없는 것 같지마는 하나님께서 너에게 갚아 주시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그러한데서 자꾸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 너희가 정치 세력을 유지함으로써 즉 그 사람들이 네게 붙어 있고 네가 헤브레이즘을 자꾸 파는 것으로 로마나 무슨 나라를 이겨 가는 줄 아느냐? 아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 분명히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아주 앞에다가 내세운 것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이 네게 대해서 이것을 갚아 주시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구제에서는 물질의 문제가 직접 관계되니까 알기가 쉬운데 그 다음에 기도의 문제는 어떠합니까? 이 바리새인들은 심지어 기도까지라도 그런 정치적인 효과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기왕 기도를 하려면 가만히 하지 말고 거리에서나 회당에 서서 손을 높이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데서 모든 사람이 듣는 큰 목소리로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보고 “아! 경건하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그 사람들의 자기들에 대한 인정이 더 있게하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가져오고 그럼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는 좋은 터전을 만들어 놓고 지내가자. 그것이 일거양득이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하려면 기도 정신이 마치 구제할 때도 하나님이 저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처럼 네가 하나님 앞에 직접 사실을 호소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다른 사람에게 네가 하나님 앞에 사실을 고하는 것을 일일이 보일 필요가 있느냐? 안 보이면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사 네가 누리라고 하는 무슨 능력을 하나님이 너에게 주시면 능력이 발휘될 것 아니냐? 그런데 그 능력은 원치 않고 네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행동으로 프로퍼갠더(propaganda), 선전을 하는 그것으로 일을 삼는다는 말이냐. 얼마나 천박하고 천단(淺短)한 생각이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항상 기도 그 자체의 내용이 하나님께 호소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히 들으시고 하나님이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도록 하는 데다가 모든 것을 집중하라. 골방에 들어 가거라. 다른 아무 것도 너한테 관여하지 않도록 하고 아무 것도 너를 평가(評價)할 자태도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公)기도를 할 때 자기의 가치를 사람들이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할 때면 그것이 바리새인의 기도와 꼭 같은 것입니다. 무슨 말을 치장한다든지 무슨 유식한 말을 자꾸 한다든지 당당하게 문장을 만들어 한다든지 하는 그런데다가 주력하는 것은 그런 예입니다. 공기도는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니까 모든 사람의 소원을 대신해야 할 테니까 모든 사람 하나 하나의 가지고 있는 별다른 소원을 다 일일이 말할 수 없고 모두 보편적인 하나의 소원과 하나의 목적 때문에 거기 모였으면 그 목적만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딴 소리를 집어 넣으면 그것이 잘 하는 것 같지마는 안되는 것입니다. 소위 정통(正統)이라는 교회 안에서 그런 것이 많은데 목사들이 교인들의 이해를 고려하고 교인들의 환심을 고려해서 “누구는 어떠하오니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누구는 어떠하오니 주께서 복을 주시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가 나팔 부는 소리입니다. 기도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듣고서 좋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야소록하게 속으로 은밀하게 노리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 안 들으시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요한 정신은 그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오히려 그 경건한 운동을 유지한다는 신성한 목적과 전체의 운동 하에서 한 것이라도 안 들으셨거든 하물며 요사이 많은 교역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환심과 그들과의 무슨 좋은 연락을 위해서 하는 그 따위 것들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혹여라도 마음이 그런데로 달아났다면 주의해야 합니다. 벌써 얼마나 천박하게 타락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기도라는 문제가 이스라엘 전체 사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바리새인적인 사상을 비판하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은 무엇인가를 세우는 것을 배웠는데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은 어떤 경우라도 기도 그것 자체를 하나님 앞에 직접 호소해서 그 은혜를 닫는 이것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가지고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내용 자체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다는 거기에만 모든 것을 집중해야지 그것을 떠나서 그것도 원하며 동시에 무슨 프로퍼갠더(propaganda)의 효과도 노리고 피알(P.R.)의 효과도 노리는 이런 어줍잖은 사사로운 생각, 사특(邪慝)한 생각은 절대로 넣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가 심히 연약할지라도 항상 저희 마음을 온전하고 순결하게 주장하셔서 하나님 앞에 순결히 기도 올리고 은혜 받고 살고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시는 그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아서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고 살아가게 합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10.9./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