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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8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5:41

기도에 대하여 8

 

김홍전 목사

 

제8강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1-31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민족(民族)으로 조직하도록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지시하셔서 그 지시한 양식(樣式)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고 그것이 특수한 단체가 되어서 천하에 비류(比類)가 없는 큰 목적과 사명(使命)을 가진 백성이 되었습니다.요컨대 혈맥으로, 혈통으로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그 점보다는 혈통으로 하나를 연결한 것을 가장 선히 이용해서 그 전체가 하나의 특수한 사명체로 또 특수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상(對象)으로 존재했던 것이 더 의의가 있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사람은 혈통의 연결로 가족이라든지 민족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지마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르심을 입었을 때,또 그 부르심의 내용이라는 것이 새로운 창조(創造)라는 위대한 사실과 관계되어서 부르셨을 때, 즉 새로운 창조라는 한 혈맥으로 새로운 한 백성을 지으셨다는 큰 사실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부르신 내용은 그 이전에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내리신 법칙으로서의 혈통의 연결보다도 신성하고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는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담이 창조됐다는 사실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再創造)됐다는 사실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아담으로 말미암아서 많은 인간이 이 세상에 나와서 혈통으로 서로 연결되어서 살지라도 그것이 이 세상뿐이요 하나님 앞에 받을 진노와 무서운 영원한 형벌에 대해서 어떻게 못하고 다같이 외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혈통으로 지음을,재창조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또한 하나님 앞에 영원한 언약 가운데 서서 그 영원한 나라가 약속이 되어있고 또 아름다운 세계가 그들에게 확실히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면서 깊이 생각지 아니하고,인간 세계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인 그리스도를 믿어서 혈통으로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세계를 유업으로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後嗣)가 됐다는 사실보다는 인간 세계에 있어서 받는 공동의 복락의 운명을 더 중요히 생각하고 기뻐히 생각하는 경향이라는 것은 무엇을 표시하느냐 하며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것,즉 중생하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강력한 욕망과 경향을 그대로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런데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았을 때 먼저 중요한 문제는 그 계시에 의해서 재창조되고,재창조된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장성(長成)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인데,이 재창조나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장성이나 새로운 인간성의 발휘(發揮)나 이러한 것들이 없을 때는 사람에게는 강렬한 종교의 여타의 부분,즉 인간적이고 정욕적인 인생들을 토대로 해서 발전되는 강렬한 종교적인 색채라는 것,주로 종교적인 감정과 행사와 여러가지 제사의식에 치중(置重)하게 되는 것입니다.요컨대 그들의 가지고 있는 종교 감정과 혹은 종교적인 법열(法悅:깊은 이치를 깨달았을 때와같이 사무치게 되는 기쁨)과 또한 여러가지 제사의식으로 말미암은 피안(彼岸)의 세계에 무슨 관련을 가진 듯한 생활감정이나 그러한 특수한 상태가 좀 더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거기다가 종교의 제사 의식이라는 것은 그대로 인간의 예술적이고 독특한,즉 종교적인 요소를 아주 풍성하게 가미한 어떤 창조적인 활동이 되는 까닭에 그것은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 하셨다는 그 말씀을 방패로 해 가지고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제사의식과 제도와 그것을 지켜 가는 성사(盛事),아주 거룩한 성대한 종교행사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실로 그들 민간에 퍼져나간 것입니다.이러한 사실이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의 왕국으로 이 세상의 다른 열국(列國)의 일원이 되어서 장성해 가는데 따라서 더욱 독특하게 이스라엘적인 특성과 예술성을 가지고 그러한 톡특성,개성을 가지고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이런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제사의식이나 제도 안에 감취어 있는,오히려 그것이 가르치고 있는 강렬한 권위(權威)와 진리라는 것을 거무하에(居無下-:시간적으로 있은 지 얼마 안되어서)떠나서 그 제사의식과 제도와 종교의 인간적인 세계에 있어서의 여러 행사를 심히 존중하고 살아가게 됐습니다.

 

이럴 때에 자연히 하나님께서는 사자들을 보내사 맹렬하게 그들의 제의(祭儀)라는 것이 그것에 있는 진리를 무시하고 세운 것이라 해서,진리를 무시하고 또 가지고 있는 제사의 생명이 되는 사실들은 무시하고 형해(形骸)만 남은 인간적인 종교감정과 종교행사와 성대한 화려한 종교적인 창조활동을 하나님께서는 맹렬하게 타매(唾罵)하고 비난하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지난 주일부터 형식 종교라는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게 됐는데,그것이 첫째 포멀리즘(formalism)이지마는 단순한 포멀리즘으로 그냥 규정해서 ‘외식’이다 이런 말로 너무나 간단하게 해석하는 것보다 포머티비즘(formativism), 형성해 나가고 무엇인지를 좀더 예술적으로 창조해 나가는 활동의 형태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그런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先知者), 그의 종들을 보내서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월삭과 절기와 안식일을 너희가 지키러 오니 누가 그것을 너희에게 요구했느냐.헛되이 내 마당만 밟는 것 뿐이다”(사 1:12-13)고 말씀하시고,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시 51:16). 이렇게 말하고 그것 이전에 있어야 할 중요한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심정의 자연스러운 당연한 발로와 또 제사의 가지고 있는 진리를 당연히 인식한 사람다운 진리의 고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것이 지난번 우리가 배웠던 시편 51장 17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중요히 생각해야 할 문제는 지금 읽은 사무엘상 15장에 있는 말씀인데 특별히 22절, 23절을 생각하려고 합니다.이것은 언제든지 우리가 깊이 기억해 두어야 할 만한 중요한 일인데, 22-23절에 있는 말씀은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頑固)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偶像)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여호와께서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처럼 다른 제사를 좋아하시겠는가,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 청종하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은 것이다. 그 다음에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은 것이다.”즉 완고를 가지고 전통이라 해서 제사를 백 번 드려도 그것은 오히려 사신(邪神:재앙을 내린다고 하는 요사스러운 귀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은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의식과 감정을 섞어서 하나님을 외치고 부르면 최소한도로 열납이 안 될지라도 무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나쁜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가지고 열심히 종교적인 행사를 하고 종교적인 외침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순종에 의한 원칙을 무시하고 자기네 종교 감정의 토로와 자기네 종교 관념 그대로의 실행으로 완고가 나타난다 할 것 같으면 이런 것은 거역하는 것이요 완고한 것으로서 사술의 죄와 같고 사신 우상 숭배와 같은 것이다고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들어있고 종교적인 행동이 있으며 종교적인 열정이 가미되어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거나 안 받아주시더라도 그것은 심히 하나님 앞에 잘못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그저 적고 적은 정성이나마라도 하나님께서 측은하게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오냐 그러냐,네가 몰라서 그러니까 그만 두어라” 하는 식으로 무마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런 그릇된 경향이 있는데,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열납될 만한 일이 되든지 그렇지 아니할 것 같으면 거역하고 완고하며는 사술(邪術:바르지 못하며 간특하고 능갈친 수다. 요사스러운 술법)과 우상 숭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여기 사실(史實), 역사적 사실을 보며는 사울이 왕이 된 다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서 사울에게 가서 이렇게 말을 하고 명령을 해서 일을 하라고 한 것을 오늘 우리가 사무엘상 15장에서 본 것입니다.사무엘이 사울한테 가서 “여호와께서 옛날 일을 추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고센에서 나와서 홍해(紅海)를 건너가 가지고서는 그 다음에 마라라고 하는 데를 지나서 물이 없어서 모세와 다투어 가지고 물을 내서 먹였는데, 이것은 마라에서 쓴물을 달게한 이야기가 아니고 물이 없어서 반석에서 물을 내서 먹게 한 이야기인데, 그곳을 므리바 혹은 맛사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므리바, 다툼의 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난 다음에 시내 반도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한 야만적인 부족이 갑자기 이스라엘의 곤비한 것을 계기로 습격을 해 왔어요.이 야만적인 부족 이름이 아말렉 부족입니다.아말렉 부족은 가나안 남쪽에 있는 광야 즉 술 광야의 동편에서 주로 살고 있으면서 북쪽 아라비아로도 침투하고 또 홍해에 또 하나 뿔이 삐쭉나온 항구에 있는 에시온-게벨 쪽으로도 침투해서 활동하던 야만적인 부족이예요.그 선조의 이름을 따라서 부족 이름이 붙었고 그외 부족에는 여러 잡동사니도 더러 붙었을 듯한데 그 선조는 아말렉이라는 사람입니다.아말렉이라는 사람은 에서의 손자입니다.에서의 손자의 이름 가운데 창세기 36장 12절을 보면 아말렉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전연 무관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곧 야곱인데 야곱의 자손인 이 사람들과 또 에서의 자손인 아말렉과 무관한 사람이 아니고 따지자면 친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아말렉은 아주 교활하고 공격을 하고 또 무엇을 강도질하고 늑탈을 하는 황야의 거친 부대들로서 신명기 25장 17-19절까지 아말렉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들이 여호와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습격해 온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그래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갑자기 습격하니까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가지고 “너는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나가서 저 아말렉과 싸워라.”여호수아가 자기의 부대를 모아가지고 아말렉과 더불어 싸우려고 나갔는데, 모세는 자기 형 아론과 또 훌이라는 사람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가서 자기의 손을 번쩍 들고 있으면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막 싸우다가 여호수아 쪽이 이기고,팔이 아파가지고 손을 떡 내리고 섰을 것 같으면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져가지고 막 몰려오고, “아이, 안 되겠다”고 다시 손을 들고 있을 것 같으며는 또 여호수아가 공격을 해 가지고서 몰고 나가고 했습니다.아론과 훌이 옆에서 쳐다보고서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하고 돌을 굴려다 놓고 모세 보고 거기 앉으시라고 하고 앉은 다음에 팔 한쪽씩을 아론과 훌이 각각 어깨에 딱 메고 있었습니다.종일 해가 지도록까지 그렇게 들고 있었습니다.그러니까 결국 여호수아가 그냥 막 밀고 들어가 가지고서 아말렉을 쳐서 완전히 물리친 고사(故事)가 있는데,이것이 시내산으로 와서 아직 율법을 받기 전에 일어난 이야기로서 애굽에서 나와 아직 민족으로 형성하고 조직되어 가지고 활동하기 전에 이런 일을 만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지 불과 두달 어간 밖에 안 됐을 때인데 그런 일이 발생했으니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 수많은 오합지졸(烏合之卒)도 섞이고 그저 “우리가 이스라엘이다” 하는 의식 정도에 서 있었지 사회의 제도나 조직이나 통솔이나 그런 것이 아직 공고하게 제도화 하지 아니하고 모세의 지휘와 분부에 따라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때이니까 여호수아를 세워서 앞에 나가서 칼을 가지고 가 싸우도록 하니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명령을 순종해서 단결해 가지고 아말렉과 더불어 싸운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을 나중에 모세가 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자기가 그 백성과 함께 허락하신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모세로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져내셨는가 무슨 법을 주셨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장정만 60여만 명이 되는데 그들은 광야에서 새로 낳은 사람들입니다.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전부 광야에서 쓰러지고 40년 광야 생활에서 난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부대를 형성하고 이렇게 거대한 대중을 만들어 가지고 애굽에서 나올 때에 수에 치지 않은 그 수가 거기 그대로 있던 판입니다.그들을 향해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이것이 신명기의 기록입니다.

 

신명기에서도 “아말렉을 잘 기억해 두어라.우리가 여호와의 명령을 받들고 애굽에서 나오는 도중에 먼 여로에서 곤핍해 가지고서 아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저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감연히 일어나서 우리가 피곤한 것을 틈타서 공격했던 것이다”(신 25:17-19)고 하였습니다. 가장 비겁한 일일 뿐 아니라 뭐 상대가 어떻게 됐든지 아무 것도 용서없는 아주 잔악한 백성입니다.그런 백성에게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이 국민으로 조직하고 하나의 왕을 추대하고 조직된 백성이 되었으니 나아가서 저희들 소원대로 전쟁을 할 때, “우리 왕이 우리를 통솔하게 합소서” 했으니까 그러면 전쟁을 하되 가장 가치있고 의의있는 전쟁을 해라 하는 것입니다.이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뿐 아니라 그 후에 사사시대에도 더러 전쟁이 있었어요.기드온의 싸움들 가운데는 미디안을 쳐 이긴 것이 굉장한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또 아말렉을 쳐 물리친 이야기가 간단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삿6:33-34).

 

그 후에 아말렉은 사울시대에 와서 사무엘이 사울을 시켜 가지고 “아말렉을 도륙(屠戮)을 하되 남녀노유(男女老幼), 우양할 것 없이 완전히 진멸하라.철저히 괴멸(壞滅)시키고 도멸을 해라.무엇을 남기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기의 군대 이스라엘 20만,유다 사람 만(萬)이면 큰 군대인데, 그 중에 얼마를 데리고 나갔는지 몰라도 좌우간 전법에 따라서 수비도 시키고 또 후비도 시키고 이군도 두고 전위분대들을 끌고 앞으로 나아가서 굉장하게 아말렉과 싸움을 해 가지고 결국 아말렉을 물리치고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사로잡아 가지고 왔지마는 그 중에 소나 양 가운데 기름지고 좋은 것들은 죽이기가 아까워서 안 죽이고 남겨 놓았습니다.

 

“전쟁 노획품(鹵獲品)인데 그냥 다 죽이다니 참 아깝다, 전쟁을 하면 노획품이 있어 가지고 싸움을 하러 나갔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래야 사기가 올라가고 그러는데 싸움을 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사기가 저상(沮喪)되어 가지고 실컷 애를 쓰고 싸웠어도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다면 이것도 국민을 통솔하는 정책상 심히 졸렬(拙劣)한 일이니까 이럴 때에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를 바로 써서 이 백성을 잘 무마하고 통솔하기 위해서 저들의 마음의 소원을 내가 잘 아는 대로 노획품으로 우수한 것들은 다 그대로 두어 두고 나머지 죽여도 아깝지 않은 것들은 다 싹 쓸어버리자” 하고 그렇게 행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와서 여기 기록대로 길갈까지 가서 만났어요.갈멜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길갈로 갔습니다.길갈로 가서 사울을 만나 가지고 “왕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준행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사무엘은 그 전날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나간 까닭에 이미 다 알고서 묻는 것이지마는 사울은 오히려 사무엘이 자기를 만나러 온 때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다고 “아, 오셨습니까.제가 여호와의 명령을 잘 순종해서 아말렉을 진멸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그러면 내 귀에 들리는 이 우양의 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하니까, “아,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 제사로 드리려고 아끼고 남겨둔 것입니다.” 그렇게 사무엘의 힐책(詰責)에 대해서 변명했습니다.그리고 자기가 직접 했다고 않고 백성들이 그것을 그냥 남겨 가지고 여호와께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사무엘이 강경하게 아주 엄격하게 다루는 말이 “왕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제물을 남겼는데 왕이 받은 명령은 그것을 남기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륙(屠戮)하라는 것입니다.그런데 여호와의 명령은 어기고 여호와께 제사만을 드리고 종교의 행사만을 성대하게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합니까?여호와께서 번제와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함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습니까?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청종(聽從)하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이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이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습니다.” 이렇게 아주 맹렬하게 힐책을 했어요.

 

사울은 구구하게 변명하였는데 오늘 읽은 말씀대로 “아,그런 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나를 떠날까 두려워서 백성들이 그것을 그냥 살려두자고 자꾸 그래서 그랬습니다.”사울의 이 말 가운데 얼마만큼 진실이 있는지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그러나 최소한도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그것들을 죽이자면 아까워 할 것만은 알고 있었어요.그것은 또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백성들이 “그좋은 기름진 소나 양은 아무 것도 아닌데 왜 이것까지 다 진멸하라고 하는가?사람들이야 도덕적 책임자로 죄를 짓고 잘못되어 있고 원한이 있으니까 우리가 치지마는...”그 원한이라는 것은 옛날의 원한을 지금 갚자는 그런 의미 정도로 일반 백성들은 아마 생각했을는지도 몰라요.

 

몇 백 년 전의 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 이전에 모세의 휘하에서 인도 하에서 나오다가 아말렉과 싸운 이야기니까 모세 시대로부터 지금 사울 왕 시대까지 벌써 그 동안에 사사 시대가 몇 백 년 지나갔습니다.그랬는데도 불구하고 그 몇 백 년 전의 원수라 해 가지고 도륙하라는 말이라도 혹시 그러한 평범한, 알아듣기 쉬운 그런 이유 하에서 그런 감정을 가지고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그러한 것도 사실상 “수백 년 전 몇 세기 전 원수를 이제야 갚는다는 말이냐.”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그렇게 몇 세기 전 일까지 미주알 고주알 캐어서 일일이 다 도륙하고 원수를 갚기로 한다는 말인가.사람에게는 혹시 그런다고 하더라도 짐승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이것은 몇 백 년 전 짐승도 아니고 그 시대에 그들이 짐승을 끌고 다니면서 우리를 해한 것도 아닌데 이 짐승이야 무엇 때문에 죽여야 하겠는가.좋은 것들은 우리가 먹든지 여호와께 제사라도 드리는 것이 좋겠다.” 아마 백성들 가운데에는 이런 일반적인 저속한 감정이 움직였을 듯해요.

 

그런 일에 대해서 사울은 백성의 그 감정을 자기가 대변을 하고 그것을 중요한 이유로 구실 삼고 방패 삼아서 사무엘에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정치적으로 그럴듯한 데가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정치적으로 가장 그럴 듯한 것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명령과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이 내신 원칙(原則)과는 못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정치적으로 이렇게 하면 유리하니까 원칙을 무시하고 편의,엑스피디언시(expediency)라는 것을 취하는 일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거룩한 진리가 무엇을 요구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지 아니하고 어떠한 일로 군중을 혹은 대중을 장악하여 그들을 이끌고 그들의 환심(歡心)을 사고 그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적당하게 책략(策略)을 농하고 원칙을 꾸부리고 하는 일들이 거재두량(車載斗量)으로 있는 것입니다.이런 것들은 여호와께 무엇이냐 하면 사술의 죄와 같고 사신 우상의 죄와 같다는 사무엘의 힐책을 받을 대상이 되는 그런 무서운 위험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문제는,항상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명령인 것이고 여호와의 명령의 모든 원인과 이유를 자기가 다 지실(知悉)하지 못할지라도 명령하신 것이 분명할 때는 그 분명한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첫째 중요한 것입니다.자기의 지혜에 의한 정치적인 예료(豫料)와 계산하에서 유리하리라고 하는 이권(利權)을 따라가고 혹은 이해(利害)를 따르고 그래서 편의주의를 쓰고 있는 이런 태도는 신앙상 가장(假裝) 되지 않은 일입니다.언제든지 중요한 문제는 사람이 자기의 지혜와 책략을 의지해서 유리하게 국면을 전개시키려고 하면서 원칙을 짓밟아 버리는 일들이 허다하게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겠다 할 때는 하나님의 명령은 첫째 명백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하나님의 명령의 내용이 우리에게 부분적으로, 단편적으로 떨어지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아무리 명백한 말이라도 그것이 단편적인 것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딱 나뉘어 있어서 그 하나님의 길을 알아야 하나님의 부분적인 어떤 구체적인 사항에 있어서의 명령도 명백해지는 것입니다.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가 그릇되이 가지 않으려고 할 것 같으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이 나에게 명백할 뿐더러 그것이 분명히 한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확인할 만한 전제,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과 계획과 명령 안에서 그것이 나에게 들려져야 한다는 것을 또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옛날 사울이 명백한 아버지의 명령이 있었고 그 명령은 어째서 그렇게 나와야 할 것인지의 이유가 아버지께로부터 계시가 되고 또한 그 이유를 사울이 사는 그 당시에 알지 못했을지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경영하는 그 나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종으로서의 자기의 위치를 생각하고 온전히 순종했어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주권자인 체하고 자기 스스로의 권위와 체면을 존중히 여겨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을 무시(無視)하고 또한 자기의 꾀에 의지해서 편의주의에 호소함으로 마침내 무서운 선고(宣告)를 받은 이 사실을 오늘 보았사옵나이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가운데에도 있기가 쉽고 오늘날의 교회의 여기저기에 많이 나타나기가 쉬운 일이로소이다.불쌍히 여기시고 저희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하시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명령인 것이 늘 분명케 하시고 거기 의해서는 추호도 타협 없이 그것을 이루어야만 하겠다는 간곡한 마음으로 의지하고 이권이라든지 혹은 정략상 유리한 점이라든지를 찾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말고 아버님을 진실하게 의지하고 봉사하며 그의 보호하심과 지키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확실히 서게 하시고 아버님께서 저희에게 이 거룩한 도리를 더 깊이 깨달아 알게 합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 8. 28./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