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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15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6:42

기도에 대하여 15

 

김홍전 목사

 

제15강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방향과 성격


마태복음 7장 1-12절



그동안 우리는 몇주일에 걸쳐서 특별히 산상보훈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교훈을 생각해 왔는데 오늘도 계속해서 생각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12절까지에 있는 말씀들인데, 산상보훈에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그냥 기도라는 제목 하나를 떼어다가 아무런 조건이나 또 전제적(前提的)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 위에 처음부터 기도를 이야기하는 그러한 교훈의 방법이 아니고 산상보훈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와 그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과 하나님 나라의 가지고 있는 성질에 대해서 말씀해 나아가시는 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기도가 어떻게 바르게 서야 하는가’ 하는 큰 구상(構想)하에서 이야기를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산상보훈이 일반 사회에 있어서 어떤 인도적(人道的)인, 윤리적(倫理的)인 교훈들을 들어 가지고 하나씩 그냥 보통사람을 기초하고 이야기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컨대 전제적으로 큰 사상(思想)은 메시야(Messiah)의 왕국(王國),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기대하고 오던 그 메시야의 왕국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실 때 사이비적(似而非的)이고 전통적(傳統的)인 그릇된 생각을 일방으로 부분부분 척결(剔抉)하고 비판(批判)하고 시정(是正)하시면서 그러나 더 많이 더 명백하게는 그 사이비적인 것을 비판, 시정하는 것이 산상보훈의 주류(主流)가 아니고 참으로 이 제자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하고 바른 자태를 가르쳐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까닭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거룩되이 가르치시면서 그들이 그 나라에 있어서 기도라고 하는 이 특별한 성격과 의미를 가진 것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이것을 언제든지 전제로 하고 기초로 하고서 기도에 대한 교훈을 우리가 배우는 것이 바르게 서 나가는 소위(所爲)입니다.

 

기도라고 할 때 물론 사람들은 기도에 대해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기도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정의(定義)해 가지고 시작을 아니 하셨지마는 그러면 기도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기도가 무엇이냐 할 때 기도가 단순히 자기의 소원을 자기의 신앙의 대상(對象)앞에 진개(陳開)해서 고하고 고한 것을 받는 그런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 것이고,궁극적으로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셔야만 효과와 의미가 있는 것을 지난번에 보았고 또 사람은 기도를 할 때 대부분의 기도는 자기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하나님께만 고하고 하나님께로부터만 꼭 받아야 할 것으로 하는 것이 기도의 정자(正姿)인데 그런 의미에 있어서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하나님은 나에게 대해서 무엇을 대답하시고 한다는 의미에 있어서 두말 할 것 없이 기도의 가진 뚜렷한 성격은 하나님과의 아주 명백한 그리고 현저한 현실적인 교통(交通)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과의 그 현저한 교통이라는 사실 안에서 또 한가지는 기도의 결과로 그것이 목표로 하고 소원하고 나아가는 바는 요컨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 세상에 두신 거룩한 본의를 하나님께서 더욱 이루어 나아가시기에 적응하도록 자기가 장성하고 전진한다는 것을 대개 예상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기도를 10년을 하고 살았다면 십 년 동안 그냥 그만큼 장성(長成)을 했어야지 기도는 10년을 했다고 하면서 아무 장성이 없다 할 것 같으면, 즉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좀 더 잘 드러내는 아무런 능력이 그에게서 발휘되지 않는다면 그 기도가 과연 자기 종교의 삼매와 어떤 종교적인 제의(祭儀)를 계속적으로 집행(執行)하고 나아가는 일에 불과한 것이고 그런 점에 있어서 종교적인 어떤 제의를 계속적으로 집행함으로 자기의 종교적인 감정에 다소간 항시적으로, 지속적으로 만족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그런 까닭에 이 세상에 많은 다른 종교,이교(異敎)들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감정의 만족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신 생활상 어떠한 것을 다소나마 가(加)해주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그런 것이 있겠지마는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야 왕국 안에서 참으로 기도한 본의(本意)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불교도 같으면 부처를 염한다, 생각하고 기원한다 해서 염불(念佛)이라도 합니다. 부처를 염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부처의 이름을 자꾸 불러가면서 자기의 정신을 그리로 집중시키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통일된 정신 하에서 자기를 응시(凝視)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래서 소위 득도(得道)를 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기도의 중요한 목표도 되고 또 기도한 결과로 얻는 바 효력이라는 것도 그런 데 있는 것입니다.불교에도 그렇고 모하메드도 그렇고 힌두도 그렇고 세계의 종교의 크나 적으나 간에 혹은 적으면 주문(呪文)을 외는 형식을 취한다든지 해서 기도라는 제의가 다 있는데 그 기도라는 제의가 가지고 있는 이교상의 큰 의미나 큰 효과라는 것을 우리가 응시(凝視)하면서 기독교인이 메시야 왕국에서 기도를 할 때에 그 기도해서 거두어 들이려고 하는 것이 그런 이교적인 기도 삼매(三昧)에서 얻는 종교적 효과를 주로 해서 주축이 되어가지고 그것을 효과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계속적으로 기도를 일생을 통해서, 혹은 수십년을 통해서 해 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를 30년을 믿었다고 하면 30년 예수 믿은 사람의 기도의 생활 가운데서 그 기도의 생활에서 얻은 효과라는 것이 대부분 이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고 기도가 가지고 있는 별다른 특성 혹은 오히려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그렇게 많이 발휘되지도 않고 체험하지도 아니했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크게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그런 것은 어딘지 크게 잘못된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보통 사람은 그렇게 열심으로 기도도 하지 않지마는 가령 열심으로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을 한다고 가정 하더라도 하루에 한두 번의 기도가 열흘이면 벌써 그만큼 수가 많이 쌓이는 것이고 1년 혹은 5년이면 그만큼 많은 수가 올려 쌓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기도를 10년동안 기도를 하루에 한번씩만 간단하게라도 했다고 하더라도(하루에 한번씩은 모두 기도할 것입니다) 10년일 것 같으면 3650번은 기도한 것이 됩니다.10년동안 3650일을 기도했는데 3650회의 기도 가운데 몇 번이나 현저하게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 있는 바른 기도를 드린 것이고 그 나머지 몇 번이나가 혹은 몇 퍼센트가 그저 큰 효과없이 지내고 만 것인가를 냉정하게 곰곰히 생각하고 비판해 볼 때 만일 한 반절이나는 큰 효과 없이 지냈다든지 그냥 종교적인 관습상 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든지 한다면 자신의 신앙의 기본에 대해서와 신앙 생활에 대해서 깊이 다시 재검토하고 반성해 볼 중요한 필요가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이것이 대수로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문제가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그렇지마는 사실상 생각하고 보면 대단한 문제입니다.대수로운 문제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시대에 큰 도전(挑戰)을 받고 큰 문제 앞에 섰을 때 그 교회 교인들이 다 신령한 능력을 더 많이 받아서 능히 그것을 대전(對戰)할 만큼 되어야 하겠는데 대전할 만큼 되려면 한 사람의 기도의 생활이 자기의 10년 동안 기도한 일의 약 반절이라는 것이 큰 효과가 없는 것이라고 가정하면 그러한 사람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대체로 있을 만한 사실이고 어데서나 대체로 볼 만한 사람이고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면 그 교회는 대부분 기도에 있어서는 효과를 못 얻는 교회가 된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로서 어떤 시대의 도전(挑戰)에 대전(對戰)을 하고 능히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 보겠다고 한들 그것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그렇게 효력이 없고 그렇게 정신적으로 각성이 없이 살아가는 교회의 상태라는 것은 결코 어떤 훌륭한 교회를 이룰 조짐이 아닌 것입니다.각성이 없이 특별히 원통하지도 않고 반성할 것이 없고 하는 것같이 지낸다면 말입니다.그것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을 해보는 것이냐 하면 비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왜냐하면 우리 주위에서 많은 크리스챤들이 기도를 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것이 관습적(慣習的)이거나 기독교인이니까 기도를 한다는 면이 그런 성격이 더 강하지 그것이 종교적인 어떤 효과를 초래(招來)하기 위해서 한다는 것도 비교적 그 보다는 약하고 황차 가장 본질적인 기도의 성격이 있는데 그 성격을 바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이는 기도라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효과라는 것은 기도의 정자(正姿)가 아닌 것입니다.기도를 하고 정신이 통일되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를 응시하고 혹은 그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어떤 도(道) 가운데 깊이 들어가서 살고 그렇게 해서 어떤 종교의 가르침에 의해서 도달해야 할 고도(高度)의 삼매 상태나 종교 상태에 도달하겠다 하는 것은 중요한 종교적인 상태인데, 그것이 중요한 목적이 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본의가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특별히 하기를 원해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3년이나 4년이나 혹은 5년 동안 소의소식(素衣素食)을 하면서 굴속에 깊이 들어가 앉아서 기도를 했다면 그 사람의 그 기도하는 생활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대부분 그 사람의 이야기가 신비한 것, 어떤 알 수 없는 큰 세계를 자기가 스스로 발견하고 혹은 거기에 도달하고 한다는 것을 이야기는 하겠지만 정확하게 주의해서 잘 듣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생각하면 그러한 말은 요컨대 기도의 가진 일반적 종교 효과라는 것이지 기도의 가장 본질적인 효과가 아닌 것입니다.이것을 주의해야 해요.

 

우리는 그동안 세 주간에 걸쳐서 산상보훈에서 우리 주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했는데 우리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있어서 빼지 못할 가장 중요한 요소(要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사 직접(直接)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문제입니다.자기가 어떤 심령통일(心靈統一)을 해서 종교적인 삼매 경계,엑스타시(ecstasy)의 경계 가운데 들어간다는 그런 것은 도무지 비취지도 아니하셨습니다.‘하나님은 네 기도를 들으셔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그것을 우리는 지난번 세 번에 걸쳐서 거듭거듭 생각해 온 것입니다.“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늘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7).이렇게 해서 “다른 것 말고 하나님과의 직접 교통이 있어야 하겠고 그는 기도를 들어시고 갚으셨다는 증거가 네게 있어야만 효과 있겠다.그러지 아니하면 전무(全無)다.전부 상실(喪失)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지난번 다 배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 계시고 혹은 하나님은 계셔도 팔장을 끼고 앉아서 쳐다만 보시고 기도의 어떤 일반작인 법칙이라는 것이 하나 있어서 마치 신체의 법칙이 있듯이 영혼의 운동(exercise)의 법칙이 있어서 기도라는 형식의 어떤 운동을 하면 그로 말미암아 어떤 영혼의 결과를 거둔다, 소위 황홀경(ecstasy)이 됐든지 정신 통일이 됐든지 마음에 어떤 통일이 되어있는 까닭에 무사하고 무탈한 그런 정신 세계에 도달했든지 또 여러 가지 것에 대해서 번로(煩勞)가 많고 번거로움이 많았다가라도 그런 것을 딱 잊어버리는 소위 무슨 청정(淸淨)한 세계에 도달했다든지 이런 것은 이교(異敎)에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교도라도 앉아서 염불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주문(呪文)을 외우든지 무엇을 자꾸 구하더라도 아무 효과 없다 할 것 같으면 세상에서 벌써 그런 것은 없어졌을 것입니다.그러나 어떤 정신적인 효과를 얻는 까닭에 그런 것들을 하는 것입니다.혹은 마음 가운데 후련함이 있다든지 좌우간 어떤 통일된 정신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이 아마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그런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우리 주님께서 시사(示唆)를 하셨느냐 하면 전혀 시사한 것 없어요.우리가 지금 보았지마는 오히려 그런 것을 시사한 일이 없습니다.항상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하겠다는 것이 강조(强調)되어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셔야 하고 하나님께만 고해야 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랬고 또 하나님은 너 쓸 것을 아시지만 너는 네 쓸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 네 쓸 것을 네가 분명히 이지적으로 깨닫고 있는 상태에 올라가는 그런 위치, 그것이 기도에 있어서 또 중요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번에 우리가 또 마태복음 6장 7절, 8절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같은 상태에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이 다 아시는 문제지마는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네 편으로는 네가 인식(認識)을 바로해야 하겠고 깨달음에 도달해야 하겠고 네 생각은 발전해야 하겠고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주시려고 하는 것을 네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資格)과 위치(位置)에 올라섰을 때 주시기를 원하는 까닭에 너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다가 거기 도달하면 그것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볼 때에 기도의 가장 본질적(本質的)인 것은 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셔야 한다는 문제인 것입니다.종교적인 삼매에 이르든지 자기가 마음을 기울여서 다른 것에 마음이 산란히 흩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마음의 통일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즉 마음이 이리도 가고 저리도 가고 이 생각도 하고 저 생각도 하고 그러지 않고 마음이 오롯되어서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도달하려는 어떤 공허하고 막막한 소위 정신통일이라고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불교에서는 염불을 하고 염불을 않더라도 석장(錫杖)을 짚고 조용히 앉아서 득도를 해 가지고 도달하는 세계, 아주 환하고 통일된 세계, 거기는 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진공법계(眞空法界),진공, 공허(空虛)한 것이요,아주 둥그런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말입니다.이러한 통일의 세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거기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그 존재 혹은 그 임재(臨在)의 현실성(現實性),리얼리티(reality)를 기도하는 가운데 더 느껴야 한다 그것입니다.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현실적인 거룩한 존재 앞에 내가 도달(到達)해서 엎드려 그 앞에 나는 내 자신의 요구와 필요를 가장 냉철하게 인식한 위에서 기도를 해나가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거룩한 기도의 참된 본질의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우리가 알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이 오늘 우리가 본 마태복음 7장 7-12절까지의 나타난 이야기 특별히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는 하나의 중요한 공식이라고 할지 기도의 단계에 관해서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는 여기서 기도의 가는 방향,기도라는 성격은 결국 이렇게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게 가르친 것입니다.

 

사람이 기도를 함으로 어떤 종교적인 황홀경(ecstasy)이나 혹은 소위 진공법계나 통일된 정신 세계에 도달하는 종교적인 효과를 보통 생각할 때 기도할 때마다 통일된 잡념이 없는 순수무탁(純粹無濁)한 경계에 도달하겠다고 다 노력하는 것입니다.이것이 이교든지 무엇이 되었든지 다 그것을 합니다.그렇게 올라가 가지고서 거기에 명확하게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 계시사 대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여러분 불교는 불(彿)이라는 것이 꼭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사람이 성불(成佛)을 하는 것이고 결국은 도달하고 보면 아무 것도 없는 세계라 하는 것입니다.“환한 세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허깨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일체(一切)는 다 적멸(寂滅)이다.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모든 것이 있는 것인 줄 알고 하지만 그것 다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다.부처라는 것도 사실상 사람들이 어데 무슨 불이 앉았느니라 생각하지만 그것도 헛된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이렇게까지 불교에서 주장하는 그런 중요한 파가 있어서 또 그러한 세계 가운데 도달하기를 아주 노력해 나가는 것인데 성경이 가르친 경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충일(充溢)한 세계고 하나님으로 전체가 충만했을 때가 가장 좋은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기도를 해서 도달하는 세계는, 기도할 때에 나는 내 마음 가운데 있는 여러가지 소원을 아주 이지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결국 궁극적으로 자기의 소원 그것 조차도 생각하면 대단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안에 그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안에 그 모든 것을 이야기 하든지 간에 큰 은혜의 손으로 나를 지배하고 계신다는 이런 생각,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영광과 권능과 극진하신 사랑에 대한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이것 저저(這這:있는 사실 그대로 낱낱이 모두)하게 이런 것을 이렇게 해 줍소서 저렇게 해 줍소서 그것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경계,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어냐 “하나님 당신이면 다이다” 하는 이 경계에 올라간다면 이거야말로 가장 좋은 경계(境界)입니다.이것이 예배(禮拜)하는 경계인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자기의 소원이 중요한 문제가 되어가지고 늘 앞서고 감사할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중요한 문제로서 내 눈앞에 있지마는 예배할 때에 그 사람의 의식을 전체적으로 가장 크게 지배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당신이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예배의 경계인 것입니다.예배의 경계란 그러니까 내 마음의 소원이 많아서 자꾸 자기 소원을 이야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를 하는 것 보다도 하나님 당신의 속성(屬性)과 존재(存在)에 대해 찬양을 올린다 그말입니다.마음으로 기리고 높이는 것입니다.아주 축하를 하고 찬양(讚揚)을 올리고 그러니까 찬양이 예배에 제일 가까이 늘 연결하는 것입니다.찬양을 올리는 심정으로 “아!이렇게 높고 거룩하시고 이렇게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 앞에 나는 엎드려 절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그 영혼이 절하는 상대를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 그것 자체는 어디까지든지 거기에 자기 의식이 명백하게 하고 기도 안에는 자기 자신의 문제가 거기 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 도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늘 거기 남아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진공법계에 이르는 것과 같이 통일한 정신 세계,혹은 막막하고 호호 막막한 소위 청정 법계(淸淨法界) 혹은 적멸경계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런 종교적인 효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으로 무슨 특별한 효과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부터 성신(聖神)께 의지해 가지고 잡념(雜念)을 버리고 마음에 자기 소원이 있으면 간곡한 마음으로 그 소원을 이야기해야 해요. 그러니까 진공법계에 이르렀을 때 자기도 없고 아무 것도 없고 일체(一切)가 적멸(寂滅)이라는 그런 정신이 아니고 내 소원은 분명히 거기 있는 것이고 내가 도달해야 할 것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내가 내 마음 가운데 하나님 앞에 지금 아뢰고 있는 것은 무엇이다는 것을 분명히 나는 의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그런 종교적인 효과를 얻는 데에 최선의 상태를 가진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것이 아닙니다.내 자신이 아주 지적으로 냉철하게 나와 관계된 사실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그 인식하고 있어야 할 사실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여기서 생각하고 알 수 있게 만드신 거룩한 교훈이 “너는 구해라.너는 찾으라.너는 문을 두드리라.” 구해야 할 것이 있고 찾아야 할 것이 네게 있고 문을 두드려서 문이 열려야 할 사실이 네 앞에서 지금 있는 것이다.거기에 중요히 그의 필요(必要)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가지고 있는 중요한 성격의 방향(方向)이다 그것입니다.

 

기도는 일차 구하는 것으로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기도의 어떠한 심오(深奧)한 성격(性格)의 방향이 하나의 공식으로 여기 나타났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너는 기도만 하고 하나님 앞에 구하기만 할 것은 아니다.너는 찾아야 할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그 뿐 아니라 너는 어떤 문 앞에 이르렀거든 문을 두드리는 것이 네게는 중요한 일이다.그러면 문이 열리는 것이다.두드려서 비로소 문이 열릴 그러한 길로 너는 이끔을 받아서 가야 하겠다.” 그가 어데로 이끄심을 받아서 가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거기에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문제입니다.나는 대체 무엇을 찾아서 나아가야 하는가,나는 대체 무엇을 지금 구해야 하겠는가 이런 문제가 다 거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해야 할 것과 찾아야 할 것과 또 내가 두드려야 할 것이 거기 있는데 그 문에 나는 이르러야 하겠다는 이런 나의 도달의 목표가 명백히 섰으면 이것은 청정법계에 홀로 이르고 무아의 경계 가운데 홀로 이르는 심경은 아닌 것입니다.그것은 분명히 자라가는 의식(意識)이 분명히 있어요. 내가 잘났다는 평가가 아니라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나는 무엇을 찾아야 하겠는가가 있고 나는 언제 이 문에 도달하고 문을 두드려서 나에게 문을 열어주심을 내가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거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그렇게 단독으로 하나 구하기만 하고 구한 다음에 무엇을 찾기만 했어도 끝날 수도 있지마는, 그러나 구하고 찾고 마침내 도달할 곳에 도달해서 거기 닫혀있는 문 앞에 서서 “너는 문을 두드려라. 그래서 비로소 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여기 문이라는 하나의 분기점을 확실히 세웠습니다. 이 문이라는 분기점(分岐點)을 세우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그것을 너는 찾고 나가야 한다” 그것입니다.

 

이런 것이 지금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신 중요한 것들인데 이러한 중요한 문제 앞에서 전체를 우리가 한꺼번에 다 말하기가 어려우니까 먼저 부분부분 공부해 가지고 나중에 또한 전체를 볼 것인데 부분부분으로 먼저 ‘구한다’는 문제부터 생각해 봅시다.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기도는 구한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내가 구하는 것이 없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고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찬송(讚頌)을 올리고 그 다음에는 감사를 올리고 그 다음에는 죄를 자복(自服)하고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마는 기도의 가지고 있는 또한 중요한 구실, 작용의 하나는 나에게는 여러가지 결핍이 있고 또 나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할 은혜가 있는 것을 늘 발견하는 까닭에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서 첫째는 죄 사하심을 받아야 하겠고,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거룩한 확신을, 확증(確證)을 또 한번 얻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용서 아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용서하시지마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죄책, 형벌을 면제해 주셨을지라도 또 짓고 하는 우리의 연약(軟弱)으로 말미암은 죄책(罪責)은 거기 있는 것입니다. 이 죄책감(罪責感)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다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소위 포텐셜 길트(potentialguilt)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의 가지고 있는 액츄얼 길트(actualguilt) 즉 직접 우리가 쌓아 놓은 죄책은 예수 스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로 말미암아 완전히 사죄함을 받았고 완전히 도말됐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의 가지고 있는 연약성이라는 것은 항상 포텐셜 길트(potential guilt),가능한 혹은 발생(發生)할 수 있는 죄책을 예상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런 발생할 수 있는 예상하는 죄책에 대해서 자기는 죄책감을 가지는 것입니다.“하나님이여,나의 과거에 가지고 있는 죄책에 대해서, 나의 사실상 가지고 있던 죄책에 대해서 다 도말하시고 없이 하셨지마는 그런 위에서 저는 때때로 죄를 지어서 다시 그 책임을 져야 할 위치로 뛰어 들고 떨어지고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는 것을 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로 말미암아 넘어졌을 때에 특별히 그 생각은 현저한 것이고 이래서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하는 것입니다.그럴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사유(私有)하셨다는 확신을, 확언을, 확증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고 그 확증 가운데서 안심하고 다시 의지하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다가 범죄(犯罪)하는 수가 있는데 범죄함으로써 받는 큰 하나님의 징계(懲戒)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징계의 첫째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시고 대답을 아니하시고 계시는 것 같은 상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鈍)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다” 하신 이사야 59장 1절 말씀과 같이 우리의 죄책이라는 것이 혹은 우리의 죄라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는 그런 슬픔 가운데, 막막한 상태 가운데 들어가면 곧 다시 자기의 가지고 있는 이 연약성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고하고 사죄(赦罪)의 확신을 다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리하여 마음 가운데 다시 위로를 받고 하나님과 다시 교통을 하면서 그 확신 위에 서서 하나님 앞에 “주여 주께서 사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의지하고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죄를 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죄를 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까닭에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우리는 항상 간구(懇求)하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사죄와 귀영(歸榮)과 감사와 고죄(告罪)가 있을지라도 거기에 고죄와 따라서 간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첫째 나의 심령상(心靈上)나에게 사죄의 확신 가운데에서 주님이 용서하신 그 사랑의 손길을, 사랑의 은혜를 거기서 보기를 원하고 그뿐더러 그 다음에는 자기의 물질상 자기 심령상 여러 가지 이 연약한 것을 생각할 때에 보충되어야 할 것 결핍(缺乏)은 채워야 할 것,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 내게 있어야 할 것들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뿐 아니라 자기와 관계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인사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마지못해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해야지” 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을 드려서 기도를 해야만 간구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형식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마지 못해서 입 인사로 입치레로 하기 쉬운 것입니다.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입치레로 할 이유가 없고 필요가 없고 그런 것이 또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진정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그 사람의 사랑과 그 사람의 각성과 인식(認識)이 얼마만큼 큰가에 따라서 그의 남을 위한 기도, 자기 이외를 위한 기도의 내용도 풍부해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이것이 도고, 인터쎄션(intercession)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어서 구하는 것인데 그 구하는 것 가운데 우리가 어떠한 것을 구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문제입니다.그냥 막연히 남겨놓고, 그냥 환한 들판에다가 내던져 놓고 “너 혼자 생각해라”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전체의 사상이 먼저 우리에게 당연히 이것을 하나님 앞에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데 물론 우리의 구하는 내용은 모든 것입니다.

 

빌립보 4장 6-7절에 볼 것 같으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懇求)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즉 모든 일에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절에,“그리하면 모든 지각(知覺)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서 헛투로 그릇되이 네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그 생각이 바르게 늘 서 있어야 하고 마음이 바른 상태 가운데 확연히 서 있어야 한다 그말입니다.이렇게 해서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구하게 되어 있어요.

 

원래 구하는 것이 기도의 중요한 성격이라고 처음에 이야기했는데,“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하는 것을 야고보 4장 2절 하반절에서 보셔서 아는데,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해서 못 얻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할 때는 구하는 것을 기다려서 주시려고 하시지, 구하지 않아도 그냥 펑펑 내려 주시려고 아니 하신다 하는 의미가 거기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가,그러면 아무 것이라도 구했다고 하면 다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이루어 주셨느냐 하면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그러면 그것은 왜 그런가 할 때 야고보 4장 3절에는 “구하여도 얻지 못한 것은 너희 쾌락,헤도네(ήιδονη)로 쓰려고... 정욕으로 쓰려고” 하는 말로 번역됐지만 에피뚜미야(επιθυμια)라는 의미가 아닙니다.“너희의 쾌락을 위해서” 쾌락이라는 말은 욕망 가운데에서도 좀더 어떤 성격을 특별히 표시하는 말입니다.자기가 그로 말미암아 “상쾌하다. 아!기쁘다. 좋다” 하는 것을 위하여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쾌락을 쓰려고,자기 자신이 그로 말미암아서 어떤 즐거움을 스스로 취하려고 잘못 구함이라, 이렇게 사람이 잘못 구할 수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잘못 구할 수가 많이 있는 까닭에 자기의 쾌락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여기 성경에 가르친 대로는 안 되는 것이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가 할 때에 성경에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가르쳤지마는 특별히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셨으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러가지 것을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는 은혜의 위치에, 자격의 위치에 놓아두셨지만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무엇을 쓰려고 구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여기서 보았고 그 다음에는 자기의 인간적인 고귀한 이상이나 목적을 위해서 추구하는 것을 주께서 원치 아니 하시는 것을 우리는 또한 생각할 수 있어요.

 

그것은 “너희는 성신을 좇아 행하라.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육체의 소욕은 성신을 거스리고 성신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갈 5:16-17).성신의 소욕(所欲)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신의 소욕을 의지해서 기도할 것이지 네 육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가지고 기도하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네가 이루려고 하는 것은 성신을 거스리는 일을 충분히 능력있게 하게 해 줍소서 하는 기도 같이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갈라디아 5장 16절부터 있는 이 말씀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육신의 소욕은 성신을 거스리고 성신의 소욕은 육신을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원수가 되어서 너희의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함이니라.그런고로 너희는 성신을 쫓아 행하라.” 쫓아 행하기 전에 더 주의할 것은 성신의 가르치시는 그대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신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시니라”는 로마인서 8장에 성신이 하시는 중요한 역사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도고의 역사가 있는 것을 배웠는데 이 도고의 역사에 의해서 성신이 나를 위해 친히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 자신이 성신께서 감동하고 내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신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 간곡(懇曲)하게 탄식(歎息)스럽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사실에 화해서 내가 또한 기도할 것이다(롬 8:26)그말입니다.요컨대 성신의 감동함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아서 기도는 하는 것이다, 무엇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구할 때는 그렇게 구하는데 그러면 구하는 세상에 세우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신 어떤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문(門)이고 그 문 안으로 들어가야 할 문제입니다.그것을 우리 주께서는 가르치실 때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부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 가거라.” 문이 거기 있어요.‘좁은 문’ 그 다음엔 길이 있어요. “대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좁고 험하다” 그랬습니다. 거기 길이 있고 거기 문이 있는 것을 그 다음에 바로 이 기도 다음에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서 두드려야 할 문은 좁은 문인 것입니다.우리가 걸어서 가야 할 길은 그것은 좁은 길, 험로(險路)인 것입니다. 이렇게 좁은 문, 좁은 길이 우리의 중요히 걸어가야 할 것인데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 두말 할 것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주여 우리로 하여금 문에 도달케 합소서. 문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것이 그 문이겠습니까? 어디에 있고 그것은 왜 우리 앞에 닫혀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두드리면 열어 주신다고 하셨으니 열어주시는 그 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가서 우리에게 또한 중요한 교훈을 하시는데 그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제자들이 묻기를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하니까 구원을 받는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지 않고 거기에서 한 개의 중요한 비유를 들으셔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4절을 볼 것 같으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 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어떤 사람들이 거기 이르러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이여 주인이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그러면 주인이 너희가 누군지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면 우리는 주와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고 주는 우리의 거리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할 때 내가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행악(行惡)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 이런 문제가 있어요.그런 까닭에 이렇게 좁은 문에 이른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여기서 가르치셨습니다.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시는 동안 가서 좁은 문으로 너는 들어갈 것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으로 봐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들어가라고 하시는 문이나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도달해서 가라 하는 길이나 그것이 무엇인가를 늘 명확하게 알고 그 길로 걸어가야 할 것이고 이미 우리가 우리 생애 가운데서 좁은 문을 들어서서 좁은 길을 걷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최종의 문제가 아닙니다.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문제는 결국 길로 가다가 최종의 그 문에 이르러서 들어가면 거기가 천당이다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문제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요.여기서 첫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좁고 험한 길이 네게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그런 까닭에 인생의 좁은 문이라 하는 것은 신자가 되어서 바로 각성(覺醒)을 하고 바로 들어가라는 것이지 자기의 신앙 생활의 마지막 판에 최종으로 들어갈 문이라는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그렇다면 사람마다 그것이 다 다를 것입니다.왜냐하면 죽는 시간이 다 같지도 않고 신앙생활 한 기간 동안이 같지 않으니까 신앙생활 할 때 좁은 길을 걷고 좁은 길 끝에 결국은 그런 문이 달렸다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그런 까닭에 누구든지 맨 처음에 시작을 할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다음에는 좁은 문을 지내서 좁은 길을 늘 걸어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을 두드리라. 네게 열릴 것이다”는 그 문은 반드시 좁은 문 이것만의 이야기인가? 그것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처음에 문을 두드리라. 들어갈 것이다 하는 것이 좁은 문일 수 있으나 좁고 험한 행로를 가면서 우리는 때때로 문이 열려야만 할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한 단계씩 한 단계씩, 혹은 문이 열려서 거룩한 단계 가운데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그런 의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찾고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늘 보여 주셔서 나에게 빛을 비취시는 대로 바른 그 길,좁고 험한 길이지마는 바른 길을 늘 걷게 하시고 마침내 나에게 거룩한 문을 여시사 거기 가서 주님의 그 영광스러운 위치, 거룩한 경계에서 주와 더불어 먹고 주와 더불어 같이 늘 동거하는 생활의 위치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하는 마음의 큰 소원인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각각에게 어떠한 뜻을 가지고 계시며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가 알기를 원함으로 그 일에 대해서 간곡하게 기도하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 기도의 큰 제목의 하나입니다.그런데 이러한 기도에는 다만 하나님께 “그 뜻을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줍소서” 하고만 막연히 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그 계시,그 말씀 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즉 구할 뿐 아니라 찾아 나아가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구하고 찾고 해서 마침내 그 뜻을 보이시면 이번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依託)하고 그 힘을 받아서 보여주시는 그 길로 가는 도중에서나 혹은 한참 가면 그로 인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자신의 생활의 경지를 더 높고 거룩하고 좀 더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는 경지로 이끌고 나가시려고 할 때 거기 또 문이 있는 것입니다.그런 때에 그 문을 두드리고 가는 것입니다.

 

거기 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가다가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만나고 그런다고 해서 옆으로 가는 것은 세상과 타협(妥協)하는 길이 되고 뒤로 물러가는 것은 타락하는 길이 되고 꼭 이 문을 열고 앞으로 나가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만일 이 문을 두드려 열리는 대로 앞으로 전진하는 일이 없이 거기서 좌절(挫折)하든지 옆으로 새든지 한다면 주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욕되게 할 수도 있는 그러한 분기점(crisis)에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그런 때에 그 문을 꼭 두드려서 열고 앞으로 나아감으로 주님의 큰 능력과 영광이 거기에 비취도록 하는 그런 일을 우리가 해야 할 것입니다.오늘은 이만 하고 다 같이 기도합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에게 주님께 참된 간곡한 기도를 올리고 인생의 큰 제목에 대해서 잊지 말고 늘 구하며 주님이 보여 주시는 대로 거룩한 행보를 늘 하게 합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977.10.30./주일예배강설/Canada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