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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역사 2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7:06

성신의 역사 2

 

김홍전 목사

 

제2강 갈라디아서 5장16-26절

 

오늘도 지난 주일 아침에 계속해서 우리 믿는 사람이 구속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새사람이 된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 곧 성신님이 우리를 어떻게 주장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가르쳐 주시는가는 도리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사람이 중생한 후에 새로운 사람 즉 새로운 생명에 의해서 한 인간적인 모든 활동, 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 여러가지 불완전이 있고 잘못이 있고 유치한 바가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믿지않는 사람과는 다른것이 거기 있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그 향하여 나가는 목표가 그리스도적인 품성과 마침내는 그리스도적인 사명을 각성하고 사는 생활을 하도록 지향하고 가는 것이지마는 처음에 다른 말로 하면 인간성이라는 것이 점점 고귀한 것으로 바뀌어가고 올라간다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것이 완전한 형태는 다 아니고 거기 인간으로서 여러가지 불완전이 있을지라도 고귀한 형상으로 차츰차츰 나가는 변화가 성장해가는 모습에 더 나은 인간성이라는 것이 발휘되지 아니하며는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것이오.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그러고, 예배당에만 다닌다고 그러지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지마는 이런 종교적인 행사로서 자기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요. 그것을 비 기독교적이라고는 안할 거요. 그렇지만 참으로 새생명이 그 속에 있어서 그 속에서 정상적으로 역사해가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증명할 도리가 없어요. 또 증명을 하지 않고서 저는 혼자 예수 믿었느니라 할 때에 스스로 속는 일이 많은 것이오. 위험한 일인거요. 남이 나를 보아주시오 하고 남에게 꼭 증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스스로가 증험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오. 그게.

이러한 권고라든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꼭 강단에서 여러분께 애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신자든지 서로서로 할 수 있는 얘기인 거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겠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를 비취는 것이지 남이 어떻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닌 거요. 항상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까닭에 어떤 표준을 세우고 우리 생활도 단속하라는 말을 그전부터 이 성약교회에서는 해왔어요. 큰 원칙은 자연스럽게 되어야지 거짓을 꾸미지 말라고 그랬고, 자유스럽게 하지 구속받아 가지고 율법이 강제하는 그 강제력하에서 움직이는 것은 율법에 대한 자유는 아니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법을 무시하는 것은 무법인거요. 법을 짓밟는 것은 범법인 것이오.

그러나 거기에 항상 신령하라는 말이 붙어 있었어요. 그러면서 여러분이 다시 기억하시겠지만 생활에 남의 프라이버시(privacy)에 대해서 얘기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다른 사람 이러내 저러내 하고 그 사람을 끄집어 내어 가지고 취모역자(吹毛覓疵)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 그러냐하면 이것이 한국사회에 아주 널리 퍼져있는 큰 폐단인 까닭에 좀 교회로서 신성하고 거룩한 자태를 가질려면 그러한 폐단에서 탈피해야지 항상 어느 때까지 어린애 같이 두 세 사람 모이면 남의 흉하적 얘기하고 또 원래 사람이 사람의 얘기를 평가를 자기 레벨(level)에서 해버리는 까닭에 자기하고 레벨이 다른 사람을 우리가 바로 파악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운 것이오. 사람 속의 깊은 것을 우리가 얼른 알기 어려운 까닭에 폐일언하고 원래 동양의 일반적인 교훈에도 남의 결점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여러분 그런 얘기 들었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니까 한번은 어떤 다리 저는 사람이 다리를 절고 가니까 아기가 어머니보고 저기 저 사람은 왜 다리 한 짝이 저렇게 짧아서 절고 가느냐 하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돼, 다리 한짝이 길다고 그래라. 그런식으로 말했다고 이게 교묘한 얘기요. 얘기 가운데 그런 우스운 얘기 가운데 교훈을 담은 것이오. 그게... 사람이 보기를 항상 남의 짧은 점만을 볼려고 하는 그런 경향을 고쳐 줄려고 그러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프라이버시는 말하지 말라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성경 야고보서에서도 충분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 도리인데, 많은것 가운데 한국사회에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그 비속한 비천한 행습에 대한 것을 경고를 하고 원 성약교회가 무엇이 다르다 할 것 같으면 다른 면을 생활이나 사람 사는 관계에 있어서나 사회적으로나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아무 것도 다른 것 없고 우리는 특별히 예수를 믿겠다 하면 뭐 하나 특별한 것 있는가 하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거예요. 이것이 벌써 금년, 작년의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해 된 얘기요. 그러면서 항상 때때로 그것을 반복을 했어요. 이 중생한 사람의 생활이라는 문제를 이야기 할 때 멀리가서 굉장한 생각을 하지말고 우리 생활 주변에서부터 우리 생활 습관의 시시한 너절한 저급한 비천한 인간성부터 고쳐나가는 것이 이게 중요한 거요. 그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왔다 갔다 하면 저절로 고쳐지는 것이 아닌거요. 자기 반성을 해서 의식적으로 이것 여기에 나의 큰 잘못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고, 안믿는 사람처럼 자기가 각고면려(刻苦勉勵)하고 자기가 노력해서 진압해 가면서 수신(修身)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신을 의지해서 그가 나를 이끄시는 대로 자꾸 따라가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것 여러번 여러번 한 얘기 올시다.

이걸 다시 이번 신앙의 기초도리를 반복할 때에는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오. 또 이렇게 얘기를 아니하면 아마 들을 기회가 별로 없을거예요. 누가 이 바쁜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이러구 저러구 한다고 그 사람을 충고할 일은 없어요. 뒤에 앉아서 욕은 할지언정 그 사람을 면대해서 이러저러게 보이는데 어떠느냐고 충고를 할 수 없어요. 그건 피차의 감정문제도 있고, 남의 위신 문제도 있지마는 하기가 어려운 것이 있어요. 내 평가가 바르지 그른지를 모르는 거요. 나 역시 별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 놓고 이렇다 저렇다 하고 가장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있다고 좇아가서 그대가 이렇게 하니 이렇게 않하면 좋겠다고 해 보면 나는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단 말이오. 이러니까 사실상 소위 그 책선(責善)을 한다는 것, 선한 것을 가지고 그를 책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닌 것이오. 아니지마는 도리를 가지고서 어떤 개인을 지목치 않고 일반적인 원칙 하에서 얘기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게고 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은 착심하시기 바랍니다. 모여 앉으면 하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이길 바라는 거요.

아상(我象)이라는 문제 즉 나라는 것, 그 각각 자기의 문제요. 가장 심오한 자기의 문제요. 내가 얼마나 무얼 잘 해 볼려고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라고 하는 것을 드러냈는가! 또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보기에도 못된 인간성이 휙하고 발휘되는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인가? 이것 다 돌아봐야 하는 것이오. 안돌아 보고서 교회 안에서 교회에 있는 여러가지 기독교리에 다른 여러가지의 것을 도도히 얘기하여 보아도 그 인간성의 장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그 거룩한 말씀을 깨달아야 할 그 사람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 것이오. 이것은 다른 과학하는 것과는 달라요. 다른 과학이라는 것은 지적 기능이 지극히 우수하여서 인간적으로 못되었을지라도 재주가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잘 외고 할 수 있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말은 욀지라도 밤낮 외기만 하지 말 뜻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얼마든지 있는 거요.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도리를 깨달으려면 그 사람 바탕이 성신님의 조명을 받아야 하고 성신님의 주장하시는 바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그의 품성의 성신의 열매가 나오는 것이오.

여기도 그러니까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 즉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 이런 말로써 적어도 아홉가지 속성을 하나의 성신의 열매라는 말로 표시했어요. 성신의 거기에 관사를 따질때 거기에 있는 그 수, 수로 따질 때 원어대로는 이게 단수요. 성신의 열매들은 아홉가지다는 게 아니고 한 성신의 열매에는 이런 아홉가지의 속성들이 있는 것이다는 의미요. 이렇게 해서 사랑은 있는데 희락이 없다 그렇게 말이 안되는 거요. 이런 것이 그 속성이 있어서 사과에는 무엇은 있는데 무엇은 없다. 사과에 있는 성분을 쓱 써놓고 그 중에 무엇무엇은 이 사과에는 없고 그 중에 무엇무엇은 이 사과에는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요. 어떤 사과가 반드시 구유해야 할 그 속의 성분이 있으면 그것은 있어야 사과요.

그와같이 그 사람이 참으로 성신의 주장하시는 바 되어서 그 결과를 내는 사람이라면 우선적으로 그 품성에 인간성에 나타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오. 품성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성격이라는 말이오. 모럴 캐릭터(moral character), 그것이 간단하게 동양말로는 품성(稟性:선천적으로 타고남)이라 품수 품자를 써서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이 도덕적인 성격에 분명히 이런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요. 이런 그 신령한 생활, 신령한 생활이란 말로 아주 굉장하게 이상한 말은 아니고 어떻게 자기는 늘 기도만 하고 신비한 세계에서 계시만 받고 사는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거요. 성신께서 우리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주장하심으로 먼저 우리 인간성이란 것이 조화있게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덕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둘째 문제는 이러한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은 이것이 사랑하기 공부... 옛날에 충헌이 쓴 글을 볼 것 같으면 그런 인도주의적인 그런 논제를 가지고 얘기할 때 이제부터는 사랑하기 공부를 했다. 사랑하기 공부를 하는 까닭에 어떤 일이 있을 때 그전까지는 성을 발끈 내가지고 그 사람하고 다투고 내가 잘했다고 주장할 텐데, 아서라 내가 사랑을 하려 할 것 같으면 그러면 되겠는가 하고 꾹 참고 그래도 부드러운 마음으로 될 수 있는대로 그를 괴롭게 하지 않을려고 하면서 자기 할 일을 얘기하고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인도주의자 누구든지 생각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여기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란 말이오.

성신께서 열매를 내게 하실 때 여기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어놓고 희락이란 열매를 그 다음 날 맺어주고 또 화평이란 열매를 준다. 거기에 있어서는 일면을 보면 사랑인가 하면 이면을 보면 희락이고 이면을 보면 화평이고 이렇게 해서 자기 심상 가운데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말미암은 즐거움이나 그러한 펠로우 쉽(fellowship)이 아니라 성신 안에서 의와 평안과, 기쁨이라는 희락과 평강이라는 그런 말을 다 공통으로 쓰고 있어요. 사랑이란 바른 것,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오. 자기의 당위 그것이 있고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거기에는 평안이 있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 나라라고 로마인서14장 17절에 말했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먼저 있고 그 다음에는 인내라든지 자비라든지 양선이 주로 물론 대외적인 것이오. 먼저 마음이 있어야지만 그것이 대외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을 하는 거요. 무슨 일이 있었을 때 오래 참는 것, 여기에 반드시 대상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을 받았으면 오래 참아가면서 그냥 버티어 나가는 것, 또 양선이란 것은 사람 사는 관계에 있어서 그 사람이 남보기에 거세고 따지기만 하고 억세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부드럽고 양선하다 그 말이오. 그 다음에는 그런데 이 양선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친절이라는 말과 대단히 가까운 말이오.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인거요. 불친절하지 않다는 말이오. 그게 그러며는 그 다음에 볼 것 같으면 온유하다는 건 특별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며는 그 사람이 부드럽다, 부드럽다는 것은 모든 사람앞에 줏대도 없이 아무렇게나 히물히물하다는 말이 아닌 것이오. 그게. 이 말은 하나님이 무슨 명령을 하실 때 그 명령에 대해서 드세지 않고 반항하지 않고 따라간다는 그 말을 가르친게요.

그러면 이게 하나님께 대한 덕도 있고 인제 예를 하나씩만 들었으니까 이걸 지금 내가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혹은 양선이 있고 충성 그 다음엔 온유, 절제 이런 모든 것은 반드시 이건 하나님께만 대한 것이다, 이건 사람에게만 대한 것이다, 이건 자기에게만 대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엄격하게 현저하게 이렇게 나누기는 어려운 것이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현저하게 이렇게 나타나는 게고 그 나타날려 할 것 같으면 대내적으로 자기 속에 그것이 확연히 늘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러기 까닭에 이러한 말씀들에 의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그 인간성이란 것 혹은 인간적인 도덕적 성격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오.

이 도덕적인 성격이라는 것이 사람을 대하든지 하나님께 대하든지 자기 자신이 홀로 고요히 생각하든지 거기에 이모저모로 드러나는 것이오. 처음에 가령 사랑이라는 말도 반드시 자기 혼자의 세계만의 얘기는 아니요. 대상도 있는 것이고 그 대상의 첫째는 주님인 거요. 그렇게 해서 사랑, 희락이라는 것도 주님 앞에서 주님의 그 약속을 믿고 마음에 기쁨을 얻는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덮어놓고 히죽히죽 웃으라는 것도 아니요. 화평이라는 건 마음이 아무것도 않는 무심상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 평안이라는 것은, 사도바울 선생도 히브리 사람으로 히브리적인 개념이 늘 거기 주요하게 작용하고 성경에 있는 평안이란 말 뜻이 이에 헬라어에 있는 평안이라는 말 뜻과는 반드시 같지 아니해요.

그것 무엇이냐하면 히브리 말에 샬롬(םולשׂ)이라는 말이 오히려 더 강렬하게 그 평안이란 말 뜻을 표시하는데 여러분 자전거를 타고 갈때 자전거를 타고 자꾸 가며는 바퀴가 둘이니까 직선에 있는 바퀴가 둘이라도 서서 가지마는 안가며는 자빠지는 거라 말이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서 평안이라는 것은 끝없이 자꾸 전진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번영이라는 말로, 자꾸 발전해 올라간다는 의미로도 사용하는 거요. 여기 이 샬롬이라는 말을. 그러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향상해 나아갈 때에 가지는 안정을 의미하는 거요. 그냥 아무 것도 않고 은둔해 버리고 조용히 앉았으면 걸릴게 없으니까 얻는 그런 정요라는 것 정적이라는 것 그런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다는 충만한 가운데 어디를 향해서 자꾸 갈 때 얻는 그런 평안인 것이오.

그리고 오래 참는 것도 그렇고, 그 다음에는 자비라 하는 것도, 자비라는 것은 말하자면 사람에게 대한 바른 동정, 불쌍한 사람의 불쌍한 경영을 내일이 아니라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같이 생각하고 적어도 자기와 관계있는 일과 같이 생각할 때 생기는 그 측은한 심정도 생기는 게요. 이러한 것도 자비요. 또 그에 대해서 나도 무엇을 좀 해야겠다는 긍휼이라는 것이 있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저희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그랬는데 그 긍휼이라는 것, 이러한 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고, 아까 양선이란 것이 하나의 친절이라든지 충성이라든지 하는 것은 또 하나님 앞에 맡은 것을 끝까지 잘 봉사해 나가는 것이고, 온유라는 것 명령을 순종해 나가는 것, 절제라는 것은 자기 인생은 낭비하지 아니하고 아무것이라도 좋은 일이라면 덮어놓고 돌아다니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자기 일을 충성스럽게 하되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있게 해라 그 말이오.

그래서 자기 에너지나 자기의 모든 기능을 잘 항상 저축해 두고 보존해 두었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은 거기에 적응하게 쓰도록 하라는 것이지 시간과 정력과 자기 생활을 낭비해 버리라는 것이 아니예요. 할려고 안하더라도 지금은 낭비할 수가 얼마든지 있어요. 어떤 사회에 나가서 취직해 가지고 일하고 살려 할 것 같으면 많이 일을 자꾸 시키고 또 주인네는 돈 줬다는 핑계로 일을 자꾸 시키며는 좀 더 자기가 다른 고요한 시간 좀 더 자기 생각에 자기 인생이 가치있게 살아 갈 수 있는 여러가지 것이 있을 거예요. 반드시 어떤 바깥에 나가서 돈 버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것 할 수 없는 이런 사회적인 상태 가운데 이 세계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처해있는 것이오.

아무리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다 거기다 갖다가 쏟는거요. 이어 여기에 있어서 자기가 어떻게 하면 절제하느냐 어떻게 하면 존절히 해서 가장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사느냐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이오. 이것이 특별히 자본주의라는 것이 고도로 발전해 가지고서는 어느 때에는 거의 독점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되는 데에 따라서 사람을 잡아다가 얼마든지 그 자본에 있는 위력을 가지고서 쓸때 사람들은 자기가 살려니깐 자기 노동을 댓가로 하고 거기에 가서 취직을 해 가지고 일을 하면 그러느라고서 그만큼 많은 세월을 다 보내는 것이오. 일주일의 제일 좋은 시간을 거기서 보내지 자기가 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 반드시 보내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한 이러한 현재 일종의 그 흔히 쓰는 그 필요악이라는 것, 네서서리 이블(necessary evil)이라는 것의 속에 살면서 자기는 어떻게 해야 가장 가치있는 인생을 보낼 것인가 할 때 그것이 절제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오는 중요한 문제가 될 거예요. 적어도 절제라는 것을 생각해야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오.

또 그런 생각을 할 때 거기에 있어서 고귀한 인간성을 가진다는 것, 그걸 품고 산다는 것은 메마른 사회에서 그냥 사는 것 보다는 훨씬 가치있는 생활이란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할 것이오. 그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이것도 유용이 될 수 있다면 써야 하겠다 할 때는 그것도 고귀한 것이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을 전부 주님을 위해서 다 바치라고 하는 거요. 이래서 비로소 너는 인생의 낭비가 아니고 그것이 의미있는 생활로 변해가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장사하는 사람이 점방에 앉아서 장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될 때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라는 의미를 자기가 깨닫고 거기에 맞취서 그렇게 나가면 거기에 맞춰서 자기를 조절해 가면서 나가면 그만큼 의미를 가지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고귀한 말인 것이오. 인생의 모든 면에 하나님의 통치 대권이 늘 행사되고 있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이렇게 해서 성신의 열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에는 필요한 것인데 이런 것을 우리가 맺고 살아갈려고 할 것 같으면 물론 성신께서 우리들 앞에서 충만히 역사하셔야 하는 것이오. 그냥 저절로 후다닥 되는 것은 아닌 거요. 그런데 성신꼐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를 주장하시는 그일에 대한 것을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인데 성경에서 볼 것 같으며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들의 인생 안에서 역사하시는 얘기가 빌립보 2장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 안에서 행하신다” 그게 여러분은 이같은 빌립보서 안에서도 또 여러가지 우리에게 늘 기억하고 생각하는 말씀을 주신 것을 생각하실 거예요.

“너희가 그런고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점방에 앉아서 장사를 하든지 혹은 사무실에서 시무를 봐주든지 그건 직접 내일이 아니고 기업주의 일이지마는 그러든지 혹은 밭에 나가서 밭을 파고 논갈이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그랬으니까 그 말은 대단히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말이오. 아 내가 점방에 나가서 장사를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하는 길이 있다. 내가 기차를 타고 갈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는 길이 있는 것이다고 그 그렇게 길이 있는 까닭에 그렇게 위해서 해라는 것이지 아무 방법도 없고 어찌 할 바도 모르는데 무조건 해라하는 막연한 이야기는 아닌거요.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이 세속 어떤 사업을 하든지 우리 자신이 그것은 내가 하고 교회에 가서 예수 믿는 일은 예배드리는 일은 그건 성신께서 내 안에서 하셔야 하고 그렇게 나누고 하는 것 아닌 것이라 말이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첫째 가르치고 그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그 기뻐하시는 뜻이 있어요. 그에게서 하게 하실려고 너희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어떤 소원을 내가 품지마는 하나님이 그 소원을 품게 하시고 그것은 하나님이 기쁨을 거두실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건 여러분이 아마 잘 아시는 말씀일거요.

빌립보서 2장 13절에 여기에 행하게 하신다는 말은 그에게 능력을 공급해서 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 하는 말, 여러분 요새 흔히 많이 쓰는 에너지(energy)란 말, 에네르기 혹은 옛날 에네르기라고 옛날에 한 때 많이 독일식 발음을 해서 그랬는데 요새는 영어식으로 에너지라고 하는데 에너지 어떻다, 에너지 절약해야 한다. 얼마만큼 들어간다 그 에너지란 말하자면 무엇을 할 수 있는 세력, 힘 , 그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무엇을 할 수 있는 힘, 건설할 수 있는 힘, 혹은 파괴할 수 있는 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소작해 갈 수 있는 힘인데 그렇게 힘을 발휘한다는 말, 헬라말로는 에네르게오(ένεργέω). 에너지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왔어요. 이 동사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이 행하신다는 말을 꼭 그 말을 갖다 썼어요. 에네르게오, 에너지를 공급하셔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건 또 네 맘대로 네 멋대로 해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데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이 그 능력을 공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뜻을 비췸으로 소원을 가지게 하고 소원을 가진 다음에 주신바 공급하신바 에너지를 가지고 우리로 행하게 하셨다 이런 말 뜻이올시다.

이게 안믿는 사람, 특별히 하나님을 순종치 않고 완고히 제 길을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꼭같이 그 속에서 역시 에네르게오하는 에너지를 공급하게 해서 하게 하는 자가 있다고 에베소서 2장 2절에 가르쳤어요.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신이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역사한다는 말도 똑같이 에네르게오, 같이 에너지를 공급해서 그 불순종의 자식들속에서 일을 하게 하는 그런 말을 썼어요. 이렇게 대조할 것 같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주시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보여 주시고 소원을 받게 하셔서 가고 하나님을 순종치 않고 제 길을 가는 사람들은 꼭 안믿는 사람만을 꼭 의미하는지는 의문이오!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고서도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갈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자기가 소위 이상이라 하고 그것을 찾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특별히 청년시기에 무엇이든지 장래 함직한 할만한 것이 있음직한 그때에 자기를 내세워서 자기의 행복주의를 위해서 즉 자기 이상의 만족을 위해서 그게 정신적인 가치든 물질적인 가치든지 무슨 만족을 위해서 나아가는 일이 많이 있다 그 말이오. 그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지금 에너지를 공급해 가지고 자꾸 하고 빌고 나가게 하는 것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의 머리되는 자란 말이예요.

그걸 여기서 에베소서에는 가르치는 것이오. 그게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시고 소원을 두시고 그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그 도리를 그냥 저절로 앉았으면 아는 것도 아니고 않았으면 되는 것이 아니요. 가만히 앉았는 속에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이 되는지 순종의 아들이 알 길이 없어요. 이래서 그 거룩한 도리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깨우쳐 주시고 그와같이 살게 하실려고 예수님이 계실동안에는 돌아 보셨지만 예수님이 땅에서 떠나가신 다음에는 내가 지금 실상 너희에게서 떠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떠나지 않고 있으면 보혜사가 오시지 않지만 내가 떠남으로서 보혜사 그가 오실 것이니 그가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으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지난 주일날 본문 가운데서 우리가 본 것, 요한복음16장 7절 8절 말씀이에요. 그래서 성신께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경영하셨고 주께서 준비 하셔서 다 만들어 놓으신 그 은혜를 우리것이 되게 하실려고 우리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이게 성신이신데 이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그것을 역사해가시는 그 도리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오. 성신을 받는다는 그것은 이상한 신통력을 얻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런 것만 생각해 가지고서는 갑자기 손이 떨렸느니 갑자기 열이 났다더니 갑자기 무슨 환상을 봤다느니 그런 이상한 말을 할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든지 참으로 믿고 정당하게 하나님 앞에서 믿는 사람답게 생활을 해 나갈려면 성신님께서 그안에 계셔서 그를 주장하시지 아니하시고는 갈 재주가 없는 것이오. 그러지 아니할 때는 그 사람은 옛사람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에요. 그게.

그렇기 까닭에 이런 점을 우리가 주의해서 성신의 내주라든지, 교도, 가르치심이라든지, 인도라든지, 증거라든지, 도고라든지, 혹은 충만의 여러가지 역사 이런 것이 아주 기이한 종교현상으로 절대로 생각하지 마시라는 거요. 이거야 말로 가장 정상적인 소위 노말(normal)한 신자 생활에 있어서의 필요 조건인 것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이상하게 무슨 제 삼의 은혜, 제 이의 은혜 하면서 딴 소리를 자주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비치하시고 받게 하시는 은혜를 제 맘대로 나누어 가지고서는 차별을 만들고 구별을 만들고 클래스(class)를 만드는 그런 잘못된 짓이란 말이오.

첫째 성신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시다하는 사실을 우리는 늘 주의해야 할 터인데 와 계신 성신은 언제 얼마동안이나 계시고 얼마동안 계시다가 나가시느냐 그런일은 우리가 참 주의해야 할 일들이예요. 성신의 내주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 그에게 성신 떠났다.” 이런 소리를 옛날에는 많이 하고 돌아다녔어요. 지금도 많이 하는지 지금은 접촉이 잘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 왔다갔다 하면서 누가 와서 강설을 하고 얘기하는데 그냥 성신 은혜가 충만하여 가지고 사람들이 성신을 받아가지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뭐 이상한 종교현상 이야기를 자꾸 하고 그러고서는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해서 죄를 지으니까 그냥 성신이 거기서 떠났다고 이렇게 성신께 대해서 한번도 공부도 안해보고 제 마음대로 이렇게 중대하고 주요한 도리, 믿는 사람이 새생명을 받은 다음에 사는 도리는 성신을 떠나서 성신과 떠나서 별달리 절대로 할 길이 없다는 이 큰 사실을 무시해 버리고 믿는건 내 힘으로 믿고 성신님은 특별한 종교의 귀족 계급에만 임하고 이런 생각하는 것 아주 잘못이란 말이오.

그런고로 하나님의 성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과 또 그것이 신자에게 어떠한 역사를 하신다는 것, 특별히 충만하셨을 때의 역사는 어떠한 현상이 있다는 것,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슨 역사를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는 잘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 의해서 살도록 하고 우리 주님께서도 그 제자들에게 내가 있는 동안은 내가 돌아보지만 내가 간 다음에는 차라리 그게 좋은 것은 성신님이 즉 보혜사가 오셔서 너희를 다 돌아보시고 세상에 대해서도 죄와 의와 심판으로 책망하시고 일반 은총의 역사에서도 성신께서 하시는 게고 특별한 은혜의 역사에 있어서도 너희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도리들을 우리에게 다 가르쳐 주시는 것이오.

그러면 성신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내주하신다, 그런 사실을 우리가 볼 때 몇가지를 보십시다. 첫째 성신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 여러분은 고린도교회에 바울 선생이 편지를 할 때 3장 처음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형제들아 너희에게 편지를 할 때 신령한자에게 하듯 할 수가 없어서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안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하듯 한다. 내가 너희에게 젖으로 먹고 단단한 음식을 안줬는데 지금도 너희가 감당못할 것이다. 그때도 감당못해서 그랬다. 너희가 어찌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냐, 인간이 아니냐, 그냥 인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너희에게 성신님이 어떻게 역사하셔서 충만하게 주장하시는 사실이 있느냐 하면서 2장 14절 보면 전연 이 세상에 성신과 상관없는 사람, 소위 보통 육의 생명에 속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적인 일, 하나님의 성신의 일을 받지 않는다. 이건 왜 그런고 하니 저가 미련하게 여기는 까닭에 그렇고 또한 저가 깨달으려고 해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만 분변하는 것이다.

그래놓고 15절에는 2장15절에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분변하지마는 아무도 저를 또 분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 사람은 분변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말하면 신령하다는 것은 결국은 진리에 의해서 바른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있어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도리다 아니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잘 분별해 가는 것이 이게 신령한 자라 그거요.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속에서 살아서 역사해 가는 사람인 것이오.

그러고서는 3장 첫절에 들어와서 너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분쟁이 있는 것, 시기가 있는 것, 어찌 너희가 사람과 같이 보통 인간과 같이 행한 것이 아니냐고 그것이 역겨워서 거기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면서 너희에게는 성신이 없다든지 성신은 한번은 들어갔다가 떠났다든지 하는 말을 하시지 않고 거기 같은 3장 16절17절에 정신차리라 그랬어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신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각각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 성신의 전이다 하는 것, 그런 의미도 있겠지마는 이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고 뭐 여기서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해서 성신님은 너희라는 이 거룩한 교회를 성전으로 삼고 계신다. 물론 우리가 교회론을 배울 때 교회는 하나님의 집 곧 성신의 전이다 하는 말을 우리가 배웠지요. 배울 때도 이 말을 인용해서 고증을 해 갔어요. 또한 “이 교회는 곧 하나님의 집이오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하는 말씀을 우리도 이용했던 것이오.

다음에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또한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너희도 거룩하니라 그러니까 거룩하라는 것이오. 왜 거룩하냐? 너는 하나님의 성전이니까, 그러니깐 교회도 거룩해야 하고 개인도 그런 의미에 있어서 거룩해야 하는 것이오. 거기 다시 이번에는 고린도전서를 그냥 계속해서 나가보면 6장에 가서는 그 사람의 생활 행동을 어떻게 단정하게 거룩하게 구별되이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 말이오. 안믿는 사람과 같이 방탕하지 않아야 하고 마음대로 저를 제가 주장하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 말이오. 이래서 그때는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는 네 너희의 몸은 하나하나의 몸을 얘기하는 거요.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신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이제는 교회전체 보다도 그 몸 하나하나를 얘기하는 거요. 너희의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그 성신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몸으로 영광을 돌리라 하는 말이 여기 나와 있어요. 몸으로 영광, 몸으로도 영광 돌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요. 이게. 우리의 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이 되기도 하고 오욕을 끼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오. 그게. 다른 사람 앞에 그것이 그 사람의 몸의 행동이나, 그 사람의 왔다 갔다 하는 것이나 그 사람의 개인 접촉하는 이런 것이 하나님의 명예를 존중하고 나타내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그 뭐 예수 믿는다는 사람 꼬락서니를 보면 그렇게 무지하고 무례하고 우습고 이렇게해서 욕을 돌리기도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게 이렇게 해서 성신님은 그의 속에 각사람의 속에 내주하신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게. 로마인서 8장 9절을 보면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신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곧 성신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또 고린도 전서 2장 12절을 보더라도 “우리가 받은 신은 이 세상 신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온 신이니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신 여러가지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오신 것이다.” 또 그런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우리에게 가르치시는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신은 들어왔다가 나갔다 무슨 잘못했으면 한번 들어오신 후에도 그 사람이 잘 유지하고, 열심으로 기도하고 열심으로 예배당 다니면 계시지마는 그 사람이 타락하고 그 사람이 아무렇게나 하고 그럴 것 같으면 성신님은 나가신다. 그러면 어느정도 타락하면 나가시고 어느정도 훌륭하면 늘 계시는 건가? 또 그것을 따져야 할거요.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안따지고 자기 눈에 보기에 아 저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 저래서 써야 하나? 그러고서는 어떤 도덕적인 문제, 어떤 어느때나 아주 시시한 문제, 어느때 아주 말단의 문제만을 가지고라도 곧 폄론을 해 가지고 그 사람 성신 떠났다 이런 말하기가 참 쉬운 것이오. 여러분 우리들은 항상 이점에 대해서 안믿는 사람들의 비난을 늘 고려할 것이 있어요. 믿는 사람 말 잘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 말쟁이 같이 말들을 잘해서 그리고 보통 안믿는 사람들은 쓰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자기네 종교적인 내용을 가지고 하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고 말을 수근수근 수근대기 잘하고 그런다고 이게 아주 딱질린 얘기요. 우리교회에서는 옛날부터 이런 것을 절대로 하지 않도록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런 비천한 일로 자꾸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해왔어요.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한번 오시면 성신님은 다시 떠나시는 일이 없이 영원하신 것이예요. 이것이 요한복음 4장 13절 14절에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예수님께서 그 수가의 여인을 대상으로 거룩한 도리를 가르치시고 특별히 우물 길러 온 여인인 까닭에 물에 대한 생명수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실 물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셨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 내가 줄 물이 따로 있는데, 지금 이 샘물 여기 너희 네 샘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샘물이 되리라. 거기서 샘물이 영생하도록 끊임이 없이 솟아 나올 것이다. 그 얘기요.

이건 상징적인 말에 불과해요. 그 물이 무엇인지 그때 아마 그 사마리아 수가 여인도 알턱이 없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이 와서 믿었으나 자세히 알았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이 요한복음에서 그걸 해명을 해줘요. 7장으로 쭉 내려가서 읽어보면 37절로 39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제 여기 예수님이 주실 물이 있는 얘기를 한단 말이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고 샘물이 되어 흐른다”고 그랬지요. 이 생수의 강 얘기를 여기 다시 하셨어요. 39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신께서 사람의 속에 들어가서 마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늘 거기서 신선한 사역을 하실 것이다 그 얘기요.

그런데 여기 보며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신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은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고 하나님께서 성신을 한량히 주셨다 그런 말과 모순되는 것 같지마는 예수님께서 주실려고 약속하신 그 성신을 지금 주실려고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다 그 말이예요. 그런 현상, 말하자면 그래픽(graphic)한, 사실적인, 현상적인, 그 묘사적인 말로서 표현한 것이오. 그러니까 이런 말을 보다가 오해해선 아니되요. 예수님에게는 성신이 없었다고 한마디로 단언해서는 아니되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보혜사가 아직 올 시간이 아니니까 아까도 읽었지만 요한복음 16장 볼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부활하시사 승천하신 다음에 내가 가서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너희에게 보내마 하고 몇번이나 그 보혜사에 관한 것을 약속을 하신 거요. 그가 아직은 오시지 아니한 까닭에 사람들이 정확하게 그걸 아마 몰랐었던 까닭에 이 말을 거기다가 써붙인 것이오. 그게.

그건 어떻게 됐는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대로 볼 때에 성신께서는 한번 오시면 영원하시고 또 그런 까닭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거룩하신 뜻을 이룰려고 끊임없이 사역을 하시는 것이지마는 여기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도리는 우리는 얼마든지 성신을 저항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랬어요. 얼마든지 성신의 하시는 일을 막고 방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고. 그리고 그것은 제 이름하에 제 선의 의욕하에, 제 이상하에 하는 일이 또 많은 것이오. 자기가 잘못 되어서 정욕으로 죄짓고 성신을 근심케도 하지마는 또한 자기에게 베푸시사 감화하시고 유기적으로 사역하시는 성신의 감화와 가르침에 대해서 주의해서 생각을 집중해서 그것이 성신께서 나에게 비취시는 도리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당연한 도리다 하고 이렇게 깨달아 가지는 않고 소홀하게 아무렇게나 대하고 다른 종교적인 열정이 먼저 나를 지배해서 자기 생각하는 선입관적인 종교로 자꾸 밀어 댈려고 하는 까닭에 마음이 온유하질 않고 또 예하고 언제든지 대화가 되어 있지 않고 언제든지 자기의 주장하나가 그 속에 있어요. 아니 종교는 이래야 한다, 열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열심으로 뭐해야 한다, 무엇이 자꾸 붙어 있다 그말이오. 자꾸 그 무엇이 붙어 있는 것 때문에 그러고 그것이 종교의 미명하에서 움직이고 있는 까닭에 성신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자꾸 저해해요. 이러니깐 성신을 소멸하지 말라. 이 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우리가 성신께 대해서 안믿는 사람 영원히 구원 받지 못할 사람 종류는 성신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인 거요.

그러나 그건 논할 것 없고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할 때에도 항상 성신을 거스린다고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항상 성신을 거스린다고 막 스데반의 사도행전 연설을 보면 끝에가서 나중에 책망하는 것을 여러분은 보실거요. 이스라엘 백성이 성신을 거스리고 살았단 말이오. 믿는 사람들도 오늘날 크리스챤들도 수다한 사람들이 성신을 거스리고 살아가는 거요. 그게. 도리를 알지 못하고 자꾸 자기 맘대로 자기 생각하는 종교로 믿고 나갈 것 같으면 거스리는 짓 밖에는 없어요. 오늘 본문 말씀 16절을 보면, 또 갈라디아 5장 16절에도 육신의 소욕이 있다. 에피뚜미아가 있어요. 쌁스의 에피뚜미아(σαρξ의 επιθυμια), 육신의 원하는 바가 있다. 그것이 이상일 수도 있고 이건 좋은 욕망일 수도 있어요.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바울 선생이 말할 때 거기 에피뚜미아라고 그 말을 썼어요.

같은 어원에 있는 말을 그러니까 반드시 나쁜 욕망이란 말이 아니라 육신 제 자신으로는 위대한 욕망이라고 하겠지만 그게 위대한 욕망이라 할지라도 네 육신에게서 나온 이상 네 옛사람에게서, 너라는 인간에게서만 나온 이상 성신을 거스린다. 그리고 성신께서 원하는 것 그런 것 다 거스리는 것이다. 성신은 그것을 타협하고 중간에서 얘기를 한다든지 영입해 준다든지 하는것 아니다 그것을 언제든지 거스린다고. 내 생각에는 그것이 성신의 뜻같고 하나님의 뜻 같지마는 네가 성신님의 조명과 인도를 받아서 얻은 것이 아니면 그렇게해서 네게 비취는 것이 아니면 그건 성신을 꼭 거스리는 일에 적당하다는 것이다고. 이렇게 해서 성신이 우리 안에 먼저 신자의 속에는 다 계신 것이오.이게. 또 우리는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도 있고 성신의 가르치심을 받는다는 말도 있고, 인도를 받는다는 말도 있고, 또 성신이 우리를 위해 도고 한다는 말도 있고,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이런 말들을 앞으로 차례차례 조금 더 우리가 구별해 가면서 생각해 나갈 것이오. 오늘은 그만 하겠습니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이여, 성신님께서 저희 안에 거하시고 성신께서 보혜사로서 우리의 은혜를 온전케 하시며 은혜로 말미암은 거룩한 열매를 맺되 먼저 우리의 인간성에 도덕적인 품성을 맺게하시는 역사를 하시지마는 이 가장 기초적인 일부터 저희들은 미명하에서 그럴 듯한 구실하에서 항상 저항을 하고 항상 소멸을 함으로써 사실상 10년을 예수를 믿고도 그의 도덕적 성격에서 조화있게 그리스도적으로 자라는 것도 보이지 않고 보통 이세상 사람이 변화하는 그런 스타일(style)정도의 변화만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인 것 같이 스스로 속기도 쉬운일이 많사옵나이다.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가 또한 여러가지 세상의 문제와 마음의 여러가지 문제를 부딪혀서 만났을 때 그 때 우리의 심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사람들은 각각 반성할 수 있는데 그런 때 우리의 장성이 너무나 미미하고 보잘것이 없어서 거대한 문제 앞에서 어찌 할 수 없이 넘어지는 현상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의 장성이 성신으로 말미암아 건강하지 못하고 또한 조화가 있지 못한 것을 항상 느끼옵나이다. 주님의 중요한 사실을 간과치 않고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우리교회 각원이 중심에 깊이 생각하게 하옵소서.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무슨 일을 경영하고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참된 길이 거기 건전하게 설려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성전다웁게 거룩한 생활을 하고 그 거룩한 생활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이하고 특이한 종교적인 생활이 아니고 가장 정상적인 인간 생활을 하되 성신께서 그리스도적인 품성으로서 우리 안에 열매 맺게 해 나가시는 생활에서 늘 그런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조화있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 것을 명심하게 하시고 혹은 오해 가운데 그릇된 생각 가운데 하나님의 성신과 신령한 생활도 우리를 특이한 종교 귀족의 생활과 같이 생각하거나 신통력있는 생활과 같이 생각하는 모든 오류와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하시고 당연히 성신께서 내주하시고 내주하신 그 거룩한 목적에 의하여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늘 받지 아니하고는 차라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깨닫고 알게 하시사 저희들 스스로를 돌아보아서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그 도덕적인 성격이 건실한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이 장성함이 없이 항상 비천한 세상 사람과 같은 마음가운데 있는 여러 불결한 것들, 미움이라든지, 시기라든지, 질투라든지, 또한 괴악한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그대로 저희 안에서 판을 치고 지배하고 문제 앞에 성냥을 그을려고 할 때 그냥 불 붙어 올라오고 하는 이런 저희의 가장 비속한 상태를 건져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비옵나이다.

주님이여, 거룩한 고귀한 인격에 고상한 인물다운 인격의 완성이 사람의 노력으로가 아니고 성신님의 주장과 그 지시와 인도하심을 받아서 성신을 좇아가는 데에서 발생하는 이 확실한 생활의 행보가 먼저 우리에게 있으므로 교회의 행보도 건전할 것을 알고 바로 서게 합소서,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2.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