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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역사 1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7:03

성신의 역사 1

 

김홍전 목사

  

제1강 요한복음 16장 7-15절

 

요즈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기초의 도리를 생각하고 나가는데 지난 주일까지 “믿음”이라는 문제로 이야기를 했어요. 특별히 믿음 가운데 “구원 받은 믿음” 혹은 “구원을 실증하는 믿음”이란 어떤 요소를 가지고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기초적인 이야기 올시다마는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이렇게 중생하고 또한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은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는 새사람, 새사람의 생활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평이하게 다시 생각해 보려합니다.

새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은 얼른 도덕적인 면에서 무슨 완전 무결한 그런 생활은 아니올시다. 그러나 불신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이올시다. 다른 것이 거기 있다는 생활이올시다. 비록 그 사람이 유치한 것이나 흠있는 것이나 불완전한 것이나 혹은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런 점이 예수를 믿었다고 금방 다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갑자기 무능한 사람이 유능해졌다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러나 거기에 불신자와의 생활에 비교할 때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 그 다른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볼 때에, 그것은 하나의 어떤 목표를 향해서 자꾸 장성해가는 모습이 올시다. 그의 아는 것이나 그의 정의(情意)적 생활이 점점 성숙을 향해서 향상되어 나가는 장성의 생활 자세올시다. 그런데 이 장성의 생활 자세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에 불신자에게라도 있는 것이고 그것을 다 구하는 것이 올시다마는 신자의 장성의 생활이라는 것은 불신자의 그 자기의 도덕적인 완성이라든지 인격적인 성숙성을 향한 장성의 자태와 모든 점에 꼭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이 있는데 그 다른 것들에 의해서 그 장성이라는 것은 그 현저히 불신자와 상이되는 부분들이 자꾸 더 명료해져 나가는 것인데 그것의 기초에는 무엇이 있느냐면 전적으로 주님께 자기를 전부 헌상했다는 기본 위치가 거기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고 나온 사람으로 주께 자기를 드린다는 정신이 없을 때에는 그게 구원의 신앙이 그에게 주는 도리가 아니올시다.

우리가 구원의 신앙에서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고 자기의 일생의 길을 주께 다 맡겨버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구상하고 계획하고 경영하던 것을 일단 다 포기해 버리고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이것은 어디서 시작하느냐하면 전적으로 자기를 헌상하는데서, 완전히 드리는데서 시작하는 거요. 예수를 믿고 나왔서도 자기를 드리기를 꺼려한다면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의 공리적인 목적에 가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환연히 깨어난 자태가 아니올시다. 여기에 세상의 종교, 기독교라는 종교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사람의 생활이 환연히, 찬연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오.

예수를 믿고도 아직도 자기를 주님 앞에 전부 드렸다는 정신과 그 자세를 가지기를 내적으로 꺼리면서 적당히 문화적으로, 도덕적으로 또 자기를 수양하는 의미로, 윤리적으로, 그렇지 아니하면 좀더 지적인, 또 좀더 무슨 발달한, 혹은 세상적으로 좀더 적합해 나가는, 이러한 등등의 자기의 이익에 대한 고려가 늘 앞서 나가는 공리 종교는 원래 기독교의 근본정신 하고는 대치되는 것이오. 그런데 기독교의 근본정신은 안믿었을 때는 몰랐지마는 믿고난 다음에 깨닫는 것은 자기는 과거에 주께서 건지지 아니하셨다면 죽어있던 상태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분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과 서로 멀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보다 떨어져 있는 한 인간의 존재 상황이라는 거요.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있는 까닭에... 그리고 그것은 빛이 세상에 임하여도 사람이 어두운 것을 더 좋아하는 까닭에 빛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같이 마음으로서 세상적인 것, 어두운 것, 죄, 허물,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허물과 죄 속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 행보를 하는 거요. 이것이 죽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을 죽었다고 에베소서 2장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이제 다시 살리신 것이라.”

이렇게 다시 살아 났으면 새로운 생명 곧 중생 혹은 하나님께서 새로 주신바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생명이 자연히 변화된 영혼의 기능을 통해서 나타나서 그로 인해 자연히 자기는 전적으로 주님 앞에 드리고, 살고, 맡기고, 의지하고 살아야지 그냥은 나대로는 못가겠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심정을 가지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지난번에 말한 바와 같이 정서적인 갈구와 완전한 의지라는 이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오. 이것이 구원의 신앙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런 까닭에 먼저 전적으로 자기는 홀로 어떻게 할 수 없다. 다 주님 앞에 드리자.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영혼이 찬양하는 심정으로 엎드려 절을 하고자 할 때 어떠한 하나님이신가를 바로 알고 결례(缺禮)되는 일이 없어야 해요. 마치 우리가 새상의 훌륭한 이를 만나서 인사를 할 때에도 그이의 가치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내가 속속들이는 몰라도 적어도 그가 어떤 레벨(level)이 있는 인물인가를 알고 거기에 상당한 경의를 표해야지 그는 높은 분인데 그를 보통 대단치 않은 사람으로 여기고 내가, 비록 경의를 표하고 인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단히 실례가 되는 것이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도, 하나님 앞에 예배라, 경배라, 절한다는 말이오. 포로스큐네(προσκυνη)... 하나님 앞에 절을 한다 할 때도 하나님이 육신으로 계셨더면 그 육신 앞에, 마치 옛날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 사귀(邪鬼)들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쫓아와서 그앞에 부복(俯伏)하고 엎드려 절하고 그러고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나와 지금 무슨 상관이 있어서 벌써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습니까?” 하는 말을 한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시죠.

이와같이 그 본체를 바로 인식했을 때는 그 신비를 속속들이 우리가 알 길이 없을지라도 적어도 “우리 전체를 땅에다가 내던지고 엎드려 절해야 할 분” 이라는 그런것은 분별하게 되는 거요. 그와같이 우리가 참으로 예배를 드릴때도 하나님 앞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적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알고 모셔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알지 아니하고 마음이 허망하여지고 어두워져서 각각 버러지나 그 은이나 금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우상의 형상으로 신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로마인서 1장에서 강렬하게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대신관계(對神關係) 그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면 그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느껴야 하냐면 나는 전부 그에게 드리지 않고서 내가 무엇을 스스로 주장하고 나도 하나의 주체성 있는 자라해서 대등한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오만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요. 내가 무엇을 해야 그에게 상당한, 적당한, 합당한 경의를 다 드릴 수 있을까 할 때는 전부를 다 드려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인 거요. 이래서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 전부를 드립니다 하는 것도 우리의 경배의 심정에 구체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고 이런 구체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서 “주여 나에게 있는 모든 것, 내 생명이 내 놓은 것을 생명 전체를 대표해서 혹은 상징해서 여기 드립니다” 하고, 여러분이 돈을 얼마를 드렸든지, 그것으로서 자기의 생명과 존재와 장래의 가능성과 내 일생과 지금까지 드린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대표적인, 상징적인 것을 갖고 드리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린 전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 것도 아니예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그런것을 요구하신 것은 아니오. 요컨데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전부를 드리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 지금은 형편이 통화(通貨)라는 것이 있으니까, 통화를, 즉 돈을 갖고 대표를 하는 거요. 그때에는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정성을 물질로나 무엇으로나 갖다가 또한 드린 것이오. 이방 사람도 그런 짓을 하지만 이방사람은 “이것 잡수고서 새로 새 덕을 많이 입혀 주소서” 하는 태도이지 요컨데 교환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있는 진노를 좀 거두시고, 잡수시고 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해 주십시오” 뭐 이런 따위지, “이것은 다 주님께 속했습니다,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는 이지러뜨리고 더럽히고 잘못했지마는 이제 하나님 앞에 그래도 이것을 드립니다” 이렇게 드리는 거요.

우리가 헌상할 때 마다 하나님 앞에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하나님, 이런 것이 없어서 필요해서 하나님의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궁전에 나같이, 누더기와 같이,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는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남루(襤褸)같은 것을 갖다가 놓아서 놓을데가 있느냐면 놓을데가 없는 것이오. 여러분, 영화에서라도 보셨죠. 어떤 화려한 궁전에 씬(scene)을 촬영할 것 같으면 찬란한 대리석으로 꾸미고 그리고 모두 전부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찬란한 옷을 입고 나가는데 어떤 거지가 누더기를 입고 들어 온다면 그것을 거기다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예복을 제대로 입어야 할 때에 예복을 제대로 입고 가지 아니해도 그것은 그 자리에 못가는 것으로 예수님도 그런 비유를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같이, 누더기 같은 남루같은 우리를 드린다고 뭐 대단히 주님이 받아서 부전스럽게 어디에다 두시겠는가? 그렇지만 그 크신 자비와 그 크신 사랑과 경영으로 “네가 더럽지마는, 네가 부족하고 이지러졌지만 나한테 내놓아라, 내가 너를 받을 것이다.” 받으신 다음에는 이를 거룩되이 하시고 이것이 합목적적으로 쓰이도록, 효과있게 쓰이도록 은사를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이오. 드리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오.

드렸다는 것은 우리의 관념에 자기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을 떼라는 거요. 드렸으니까. 이제 내 것은 없는 거요. 무엇이든지 있던 것을 다 드려버렸으면 그 다음에는 내 것, 남은 것 아무 것도 가치있는 것은 없는 것이오. 내가 소위 가치있다고 생각하던 것을 다 드려버리는 것이오. 이래서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의 행보까지라도 드리라고 구약에서는 그것이 소제(素祭)라 해서 자기가 늘 먹는 고운가루 에바 1/10을 갖다가 드리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전체를 다 드리는 이 헌신이라는, 헌신(獻身)이란 것은 몸뚱이만 드리는 이야기는 아니오. 우리의 영혼을 담고 있는 이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올시다. 이것을 아직도 마음 가운데 깨름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태도를 취하지 못한이가 있다면 오늘이라도 그것을 취하는 것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다운 정당한 도리인 것이오. 청년이 자기가 기독교를 이용해서 기독교 안에서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것 포기해 버리고 이제는 주님 앞에 다 드려버려야 할 것이오. 주께서 다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고 드리는 것이오.

둘째, 그 근본 자세에 있어서 안믿는 사람과 성장하는 점에서 다른 것은 무엇이 더 현저해가냐면 만사에 있어서 자기의 전적 무능력이라는 것, 전적인 무능력, 이것이 아담이 처음에 시초에 범죄를 한 이래로 사람은 그 죄에서 돌아설 능력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상실됐다는 이 거룩한 교리로 토우틀 이너빌러티(total inability)라는 거요. 전적인 부패, 그러나 그 부패에서 회복할 능력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믿은 다음에는 자기라는 것을 의지할 아무것도 없는 것이오. 의지해 가지고 이룰 것이 없는 줄 아는 거요. 여기에서 무엇이 생기느냐면 지난번 구원의 신앙의 제 세째요소 피두키아(fiducia)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의지적(意志的)인 요소라는 말이오. 의지(依支)한다는 말이오. 트러스트(trust) 한다는 말,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이오.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그 하나님께 의지한다 할 때에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활 행보를 다스리고 힘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일으켜 주시기 위해서 거룩하신 법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성신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이고 그렇게 가르쳐 주시고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환기도 시키시고 그렇게 주장하시는 거요. 그런고로 좀더 구체적인 말을 하자면 전적으로 성신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 다음에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자기의 인간이라는 것과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할 때, 물론 인간관이 벌써 변했어요. 과거와 같이 자기를 인정하는 어떤 것도 없는 것이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 안에서 비로서 자기는 새사람으로 존재한다는 인정을 하는 것이오. 그러면 옛사람은 나에게 의미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요. 이렇게 해서 자기의 능력만 부인할 뿐 아니라 자기라는 가치의 본존(本存)을 부인해 버리는 것이오. 그뿐더러 그러한 자기가 인생의 길을 갈 때에 어디로 향해서 간다는 것을 스스로 정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무서운 죄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요. 이렇게 해서 무엇보다도 인생의 목적은 내가 내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아는 거요. 하나님께서 거룩히 정해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룩히 정해주신 길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확연히 깨닫고 나가는 것이오.

이것이 믿는 사람으로서 사는 생활의 제일 먼저 근본적으로 늘 저변에 깔려있는 중요한 사상인 것이오. 에배소 2장 10절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하나님이 그냥 아무렇게라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아주 정밀하게 어떤 목적을 위해서 가장 효과있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거요. 정밀한 기계를 만들어 놓듯이 만들어 놓았다 그 말이오. 워크맨쉽(workmanship, 직공등의 솜씨, 기술 혹은 그 기술에 의해 완성된 물건) 하나님의 솜씨를 보일만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말이오.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었는데 어떻게 했는고 하니 선한 일을 위해 새로 창조를 하신 그런 대상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떤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창조를 받은자라 그 말이오. 이것은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은자는 죽은 것이니까 새로운 생명으로 새피조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창조라는 사실이 있지, 있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오.

거기 창조의 요소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 간다는 것이 창조의 요소요. 처음에 창세기 1장에 <창조>란 말이 세번 나올 때 볼 것 같으면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할 때 어떻게 하셨는가? 그 흙으로 빚어 놓았다는 말이 있어요. 그 흙으로 빚은 것은--그것은 이미 있던 재료지만--그것으로 빚었다는 것은 곧 창조를 즉시 표시하는 말은 아니오. 사람이 생령(生靈) 되었다는 것이, 즉 하나님의 기식(氣息)이 거기 들어가서 생령이 되었다는 것이 전에 일찌기 없었던 것,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 가운데에서만 그 거룩하신 신비 속에만 있던 것이지 일찌기 현상 세계에나 혹은 피조된 세계에 생각할 수 없던 것이고 있지 못하던 것이다 말이오. 이것이 창조, 조성(造成)이란 말이고 창조한다는 말 뜻이오.

그런데 여기서도 카이네 크티시스(καινή κτίσις),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 창조함을 받은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합목적으로 새로 창조를 하시되 그냥 아무렇게라도 어디든지 두루두루 쓰게 한것이 아니라 정밀하게 그 솜씨를 보여서 만드셨다는 것은 어딘지 어떤 목적을 위해서 꼭 필요해서 만드신 것이고 그 목적 아니면 그것은 이지러지는 것이고 그것은 비틀어지는 거요. 어떤 정밀한 기계가 제자리 아닐 것 같으면 안맞는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이와같이 새로 창조를 해놓은 것이라, 이 일은 이 선한 그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새로 피조(被造)가 되었는데 그 사람이 피조된 이유를 구성하는 그 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예비하사” 이전에 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지혜와 도략을 가지고 예비하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라” 우리로 하여금 다른 데로 비끄러져서 제 마음대로 이상(理想)이라고 세우지 않고 그 안에서 반듯이 살게 하신 것이라, 이것이 에베소 2장 10절에 있는 말씀이오.

우리에게는 그와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향해서 목적적으로 피조된 것들이오. 그렇다면 자연히 우리의 길도 자정(自定)하는 거요. 목적이 있으니까 길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있을 것이오. 이 길에 의해서 우리는 이 원단(元旦)에 시편1편 강해를 늘 해나가는데 이번달 초에도 다시 시편1편을 우리가 강해했어요. 여러분 시편1편 다외시는 말씀이지요. 거기 볼것 같으면 악인과 의인을 대립해 놓고서 악인에게는 자기의 이론과 사상이 있어요. 에싸(הצע 모의, 충언, 계획, 작전, 상담, 꾀) 그래서 악한자의 의논대로 복 있는자는 행하지 않는 것이라. 거기 의논이 있다 그 말이오. 거기에 사상이 있고 거기에 주장이 있고 거기 인생론이 있어요. 그 다음에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거기 죄인들은 자기가 가는길들이 있는 것이오. 서 있는 길들이 있어요. 그 인생의 길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하고 다들 가고 있어요.

그 다음에는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있어요. 결국 이런 세계를 충성하는 것이다. 여기 좌정하자. 모샤브(בשׁומ, 앉다)라고 해서 말하자면 그 사람들의 좌처(坐處)요. 꼭 어떤 의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샤브할 때는 집단적으로라도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그러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오만해서 그것이 인생이 참으로 도달해야 할 자리인가? 그것이 인생이 올라가야 할 목표지 인가를 확연히 결정하고 이것이 기다할 때는 그것이야말로 오만한 정신과 이론이 되는 거요. 아직도 암중(暗中)에 모색(摸索)을 한다면 그것은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기다하고 단정할 때 그 독단은 오만이라 그 말이오. 그런 오만한 자의 자리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거기 볼것 같으면, 2절에 보면 의인에게는 그에게 주시는 지혜는, 거룩한 빛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요. 악인의 인생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주장에 대립해서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랬고 그 다음에는 거기 5절을 볼 것 같으면 의인의 회라는 것이 있어요. 오만한 자의 자리에 대립해서 의인들의 에다(הדע 회중, 회합) 혹은 그것이 나중에는 교회라는 말로도 번역되고 했습니다마는, 사람들이 모아서 그것을 큰 목적을 위해서 같이 호흡하고 나가는 그런 자리요. 그런 회(會), 의인의 회가 있고, 또 거기 6절을 보면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 있는 것이라고,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했어요. 죄인의 길, 악인의 길은 망하지만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 이렇게 우리는 시편 1편에서 거기 분명히 의인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들이 무엇을 자기가 흡수해서 자기의 영혼과 정신의 양식이 되게 할 것인가 믿고 어떠한 길에 서 있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세계를 향해서 가고 어디에서 자기는 안착(安着)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할 것인가를 가르쳤어요.

이와같이 여호와의 법을 앎에도, 의인의 길에서서 행함에도 그로 의인의 회중에 일원으로서 자기가 생활해 나가는 것도, 요컨데 이것이 또 확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생활인데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힘주심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것 없이는 되는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고 힘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그 역사를 즉 하나님이 많은 은혜, 준비해 주신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직접 내리시고 주장하시고 다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그 분을 우리는 성신이신 하나님이라고 늘 말하신 것을 배웠지요. 아드님이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속죄의 일을 이루셨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크신 작정하에서 경륜을 해 놓으셨으면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서 적용되려고 할 때에는 성신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요.

성신이라는 말은, 신약에는 성령이라고 요즈음 개역성경에는 되있습니다만 옛날 성경에는 성신이오. 이것도 어떻게 해서 신약만 그렇고 구약에는 아직도 완전히 다 성령이라 하지 않고 성신이라고 하는 데도 나오고, 뒤섞여 나오고 있는데 요컨데 그것은 어느 말을 쓰시든지 상관 없어요. 다만 우리 교회에서 성신이란 말을 쓰는 것은 신(神)이란 말이 하나님의 인격을 구체적으로 표시할 때에는 영(靈)이란 말보다 신(神)이란 말이 더 접근한 말이 되는 까닭에 쓰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신으로서 영적인 역사(役事)를 하는데 중점을 두지 않고 그의 인격적인 존재, 삼위(三位)의 일위(一位)로서 인격적인 존재를 중시할 때 신이란 말을 썼어요. 그런 까닭에 성신이라 그런줄 아시고 성령이라고 하시고 싶은 분은 성령이라 한다고 뭐라고 할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하십시오마는 왜 성경이, 신약이 누구한테 의논하고 슬그머니 성령으로 고쳐 놓았는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어요. 요즈음 번역하는 일에 때때로 그런 일이 자꾸 발생하니까... 그것은 어떻게 되었든지 문제는 그 성신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은혜들을 적용하시는 것이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세계에 살아 가면서 우리를 자신의 인생관 뿐 아니라 윤리관이나 도덕관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완성이라는 생각의 윤리관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함으로 전체가 거룩되이 지어져 간다는 데에 대한 책임자로 처하는 것이 첫째 임무로 따라서 개인이 혼자 도덕적으로 성자되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주의 깊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일부분이 되어서 그와 신비한 연합체를 이룬다는 것, 미스티컬 유니온(mystical union)이란 것, 즉 유니오 미스티카(unio mystica)라는 이 것이 우리의 윤리관을 형성할 때에도 기본적인 저변에 깔려있는 사상이 되는 것을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이오.

동시에 우리의 살고 있는 생활은 이 세상에서 한 시민으로 여러가지 직업에 종사하고 살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만 이 세상에서 육신이 살기 위한 방편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에서, 장사하는 일이면 장사하는 일,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증거해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오. 그것이 교회라고는 안해요. 장사하는 일이 교회의 일은 아니지만 어떤 한 신자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구속을 받고 성신을 의지해서 살면서 장사를 할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이오. 먹어서 기운을 얻어서 기운을 영광을 위해 쓰라는 말 뿐 아니라 너 먹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어야겠다 하는 이야기요.

이와같이 광범하게 신자 생활, 어떤 면에든지 그것을 위하지 아니하는 그런 면이 없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지, 생활은 별달리하고 종교는 별달리 있어가지고 그것이 분리되어 가지고 주일날 만은 기독교인이고 다른날은 안믿는 사람하고 크게 차이 할 것 없이 현저한 기독교적인 아무런 사상이나 정신이나 프린시플(principle, 원칙)이 작용하는 것이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 태반을 상실하는 것이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매일매일 촌시(寸時)의 생활 전체에 있어서 그 사상이든지 그 인생의 행보든지 그 전체의 나가는 목적이든지 전부를, 거기서도 전부 지배하고 주장하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이루게 하시는데 의미가 있는 거요. 이것이 신자 생활의 요체(要諦)라는 것이오.

이런 생활이 없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 종교를 만들어 낼른지 몰라도 그로 말미암아서 허다히 많은 부분이 은폐되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대신 그리스도를 은폐하는, 거꾸로 가는 일을 많이 하기가 쉬운 거요. 교회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려면 그 교인들이 매일매일 나가서 생활하는 데서 어떠한 사상, 어떠한 목적, 어떠한 인생의 행로 어떠한 태도, 어떠한 참된 하나님 나라적인 윤리관, 도덕관, 그런 세계관 그런 사관(史觀)을 가지고 거기에 준해서 살아가는가에 의해서 되는 것이지, 그것을 떠나서 교회 안에 와서 열심으로 종교적인 행사에만 치중해 가지고 교회가 바른 의미를 다 가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바른 의미란 그런 종교적 행사에 있는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교회란 말뜻은 코뮤니오 쌍토룸(communio sanctorum)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들 즉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서로서로 가지고 있는 커뮤니언(communion, 친교)에서 형성하는 것이라고, 이렇게만 1세기의 사도들은 생각했던 거요. 모여서 어떤 행사를 어떻게 한다는 데에 주의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나가서 시민 생활을 해나가는데 의미가 있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던 것이오. 어떻게 나가서 시민 생활을 한다는 것은, 현실 생활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보가 영광의 저 목적지를 향해서 매일매일 전진해 나가는 거요. 죽어서 천당가는 데다가 목표를, 최종의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영화되어서 영원히 거룩한 교회로서의 신령한 각 부분을 다 완성해서 드러내는 시간을 향해서 자꾸 전진해 나가는 것이오.

그럴려면 우리가 이런 모든 점에 있어서 심히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성신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것, 성신님께서 주장하시는 그 생활가운데 들어 간다는 것이 심히 중요한 것이 올시다. 성신은 이게 동시에 예수님의 영이라. 사도행전 16장 7절 보면 성신이 아시아도(道)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그래서 바울선생이 아시아도로 안들어가고 거기를 알과(마땅히 찾아야 할 친한 사람의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만나보지 않고 지나감)해 가지고 무시아 앞에서 비두기아로 들어가려 할 때에 또한 못들어 가게 되었는데 누가가 그것을 기록하기를 7절에는 “예수님의 영이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셔서 못들어 갔다”고 기록했어요. 성신은 예수님의 영이라. 혹은 오늘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16장 7절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保蕙師)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오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있을 때에 여러가지를 가르쳐주시고 예수님이 같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그 육신의 생활에 있어서도 어찌할 바를 늘 가르쳐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사실인 것을 생활로서 다 경험했어요.

예를들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저 동편으로 건너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가지고서 기지사경(幾至死境)에 그만 배 한쪽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한테 쫓아가서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는데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니까 즉시 잔잔해 버렸단 말이오. “어째서 너희는 이렇게 믿음이 적으냐?” 하고 예수님은 그때 책망하신 일이있죠? 그러니까 모두들 “저가 대체 뉘기에 바다와 바람도 순종하는고” 했다고 그랬어요. 이와같이 예수님과 같이 다니면서 죽음에 임했을 때에도 “선생님 살려주십시오” 할 때에 예수님은 항상 보호하셨어요.

그렇게 튼튼하게 믿고 의지하는 그분이 이제 떠나가신다는 고유(告諭)를 하시니까 걱정이 많았어요. 걱정이 많으니까 요한복음 14장부터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고 근심하지 말 것을 차례차례 고유해 나가시면서 여기 16장에 와서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내가 너희하고 같이 있으면 항상 너희와 같이 있게도 되지 아니할 것이니까 내가 떠나가는 것이 결국 너희에게 유익할 것이다. 만일 떠나가지 않는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것을 너희들을 돌아보고 보호해주고 그럴 것이지마는 떠나간다면 나를 대신해서 내 임무를 할 그분이 오신다. 그래서 내가 너희 은혜를 늘 보호해 주듯이 그 은혜를 보호해 주실분, 그래서 아마 보혜사(保惠師)라는 말로 번역한 것이오.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이 보혜사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하실 일을 마치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그러나 그 보다는 훨씬 광범위로 훨씬 미묘한 데까지 육신이 아니고 온전히 신으로써 하시는 까닭에 미치지 아니하는 곳이 없는 곳까지 사람의 속에까지 다 미쳐서 일을 하실 그분이 곧 보혜사라 그 말이오. 혹은 다른 보혜사란 말도 쓰셨는데 그 말은 그 은혜를 지키시는 분으로는 예수님 당신이지만 내가 떠나가면 훨씬 광범위로, 훨씬 능력있게 또 그 많은 사람들이 내게로 올 때에 그 많은 사람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돌아보실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모든 임무를 남김없이 다 행하실 것이다. 내가 떠나간 후면 그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실 것이다 그랬어요. 너희한테 보낼 것이다. 떠나지 아니하면 내가 너하고 같이 있으니까 내가 돌아보지만 그러나 그것은 12사람이나 혹은 주위에 있는 당신의 늘 접근해 있는 제자들에게만 하는 일이 되겠지만 떠나간 다음에는 그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님의 조건하에서 이미 벗어나서 완전히 영으로만 계신 까닭에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그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무소불능의 크신 능력을 가지고 부소부재하신 그의 지혜를 가지고 곧 필요한 때 모든 필요를 충당해 주시는 거요. 이렇게 해서 성신을 보혜사라, 마치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때에 그 제자들의 은혜를 보호해 주신 것과 같이 성신께서는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또 주장해 주시는 것이오. 힘주시고 하시는 것이 올시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 할 때에 골고다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오늘날은 그 골고다를 지난 이후의 시대요. 골고다의 사실이 역사의 사실로 확연히 서 있어서 그 사실과 동시에 그것이 실재의 세계에서 나타내시는 모든 은혜를 받고 사는 시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말은 무엇인가? 또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지난 주일 오후에 그 이야기를 조금 했지요. 예수님을 따라 가려고 좇아 가겠습니다 하는 사람들. 각각 그 결함을 주께서 지적해 주신 것인데 요컨데 생전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육신으로 계신 그분이 간 곳을 가는 것이 따라가는 것이 되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대해서 “주여 주를 따라 가겠습니다”라든지 혹은 “너는 너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한 말이 그때에 한(限)한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력히 나팔소리 같이 잘들리는 소리인줄 우리가 다 아는데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오. 그중에 한가지 여러분 아실 것이 있어요. 예수님을 대신해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지시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보호하시고 힘주시는 그 분, 그 다른 보혜사 성신께서, 예수님의 영께서 나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그러기 까닭에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도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성신을 좇아서 행하거라.” 성신을 좇아서 가거라 그 말이오. 누구를 따라 가느냐? 성신께서 너를 지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는대로 가거라, 그것이 중요한 말씀의 뜻이 올시다.

이와같이 성신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성신께서는 먼저 우리 안에 와 계시고 한번 와 계신 성신이 다시 적당한 시기에 그가 죄를 짓고 잘못할 것 같으면 떠나가 버리고 그런 일이 없단 말이오. 이것이 은혜의 시대에 있어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도리인 것이오. 혹은 구약에서 “주여 나에게서 성신을 거두지 마소서” 하든지 다윗이 기도를 했다 할 때에 인격자이신 성신님의 내재의 문제를 그 때 논한 것이 아니오. 그때에는 “성신의 능력으로, 기능으로 감화해 가지고 있던 사실에서 나를 탈취해 버리시고 거기에서 이를 빼앗아 버리시면 아주 무능하고 저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은사가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찬송하고 백성을 다스리고 그러겠습니까?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나를 이 자리에 두신 이상 그 일을 할 수 있게 그냥 성신을 거두지 맙소서” 하는 말이고 그런 말을 갖다가 신약에다 함부로 들여 붙여 가지고 생각지 마셔야 해요.

성신께서 한번 들어오신 다음에는 다시 우리에게서 분리되시는, 영원히 떠나시는 법은 없으나 우리가 “성신을 소멸치 말라”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9절 말씀대로 소멸하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내주 하신다 하더라도 오직 성신을 근심하시고 계신 것 뿐이오. 에베소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신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근심케 하는 것이오. 죄로서, 성신님께서 감화하시사 “자, 이리가야 하겠다. 가자” 하고 그 유기적인 역사를 하실 때, 강제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마치 내 의식속에서 성신께서 불어넣어 주셔서 내 자신이 가야할 당위를, 가야할 필요를, 가야할 신성한 의무를 느낄 때 “아니 그래도 가면 손해 보겠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되면 내가 굉장히 손해를 보는데, 내 일생에 그 꿈이 다 무너지겠는데” 하고서 안가면 그 성신을 소멸하는 것이 되는 것이오. 오늘날도 마찬가지요, 그건.

성신께서 은사를 주시고 능력주시고 목표를 향해서 밀고 나가시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도하시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뿌리치고 “아니, 아니오. 내게는 손해 되겠습니다” 할 수가 있는 것이오. 이런 것이 오늘날도 있기는 있는 것이오. 이것은 우리가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배울 것이고, 한번 들어오신 성신님은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히 늘 함께 하시는 것이오. 성신께서는 이 세상을 향해서든지, 믿는 사람에게라든지 또 믿는 사람에게라도 특별히 성신님을 좇아서 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시는가가 성경에는 분명히 씌여 있어요. 이것이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알고 깨닫고 나가야 할 도리 올시다. 이번에는 우리가 믿음이란 말에서 잠시 떠나서 성신께서 어떻게 우리를 주장하시고 이끄시는가 이것을 차례차례 배워 가십시다. 같이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 크신 사랑으로 저희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성신께서 저희 안에 내주케 하심으로 저희 안에서 저희의 영혼과 더불어 도고도 하시고 증거도 하시며 저희를 위하여 거룩하신 능력을 나타내시고 유기적으로 저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큰 사실을 믿사옵나이다. 그리하여 저희들이 기경(奇擎)한 것과, 괴이한 것들을 찾지 아니하고 가장 정신 똑똑하게 가장 온건하게 그리고 가장 인격이 명료한 사람다웁게 주의 성신을 좇아서 가게 하시고 그 거룩한 도리를 저희가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시고 이러므로 주께서 저희를 만세전에 경영하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새로 정밀하게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인생의 행로를 걷게 하시고 자행자지(自行自止)하거나 자기의 인간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자기의 길을 스스로 취하고 가던 그 아담과 같은 죄를 다시 범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고 전적으로 무능력 한 것을 알고 자기를 온전히 포기하고 주께 다 드리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2.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