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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역사 4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7:14

성신의 역사 4

 

김홍전 목사

 

제4강 로마서 8장 1-11절

 

교회가 연례(年例)로 중요한 시기를 맞이할 때 특별히 그것을 기념하는데 이 특별히 기념하는 교회 일로서 우리 교회에서는 이번 주간 목요일 저녁 7시부터 세례와 성찬의 성례를 우리 교인들 앞에서 베풀것이올시다. 이미 광고했지만 미리 이 시간에 우리 예배하는 이 시간에 그것이 주님 앞에 아주 신성한 중요한 일이므로 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자기를 깨끗이 잘 보존했다가 나오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오는 목요일 저녁, 수난 주간 가운데 주께서 성찬을 제정하신 기념일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날 성찬을 행할 것이고 동시에 세례를 베풀 것이올시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주최해서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동우(同友)교회인 강변교회가 그날 저녁에 같이 여기에 참석할 것이올시다. 강변교회에서 마침내 그날 저녁에 같이 참석하기를 기꺼이 원하고 나온 까닭에 그러면 우리가 한 교회인 까닭에 우리가 이것을 같이 집행할 것이지만 우리가 주최해서 하는 줄로 아시고 우리는 같은 동일한 교회, 큰 교회 안에 있는 강변 교인들을 맞이해서 같이 성찬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또 그 다음에 주님의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오는 주일날, 오는 주일 오후의 예배는 이것을 저녁으로 미루겠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기념하는 특별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뭐 예배가 특별한 것 있고 보통인 것은 없습니다만 순서를 좀 종래의 정규적인 순서를 바꾸어서 찬양을 중심으로 해서 할 것이므로 그날 저녁 7시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이것도 우리교회와 강변교회가 합해서 하는 것이올시다. 그런 줄 아시고 이것이 무슨 축전으로 즐기려고 하는 것보다 중심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즐거움을 바로 깨닫고 맛보기 위해서 우리 주님을 찬송하려고 찬송을 위하여 모이는 저녁이올시다. 그런 줄 아시고 이것도 마음을 준비하시고 경건하게 신령하게 혹여라도 그런 축전 기분 가운데서 인간적인 축전으로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오전에 강설한 그 강설을 계속해서, 주로 이제 수난 주간이니까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 듯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이번 ‘신앙의 기초 도리’라고 하는 제목하에서 시작할 때에 이야기한 까닭에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서 지금 신자의 생활에 관한 것을 이야기해가는 까닭에 그대로 그것을 계속하는 것이 좋은 줄로 알고 그렇게 합니다.

성신께서 이 세상에 일반적인 역사를 하시고 또 성신께서 믿는 자들 안에서 특별한 역사를 하신다. 거기에 의해서 우리의 생활이라는 것을 바르게 늘 잡고 거기에 의해서 우리는 중생하고 새사람이 된 이후에는 그런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우리가 처음부터 생각하고 이야기했는데 그 성신께서 신자들 속에서 역사해 가시는 사실의 중요한 것이 첫째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 안에 각각, 개인 개인 안에 성신님은 이미 계신 것이고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그것을 들었지요. 그런고로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거하신다. 육이라는 말에 대립해서 영이라는 말을 쓴 까닭에 오늘 우리가 성신이라고 할 때에 독립된 한 인격을 표시할 때 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그것이 상대적인 어(語)로 쓸 때 영이라는 말을 또 쓰는 것이올시다. 다같이 하나의 단어를, 원어를 그것을 신이라고 했다, 영이라고 했다 표현을 하게 됐는데 그것은 우리의 과거에 내려오던 한 역사에 그런 사실이 있는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것 뿐이고 그런 그 번역에 너무 구애될 것은 아니고 우리는 그의 도리를 중요히 늘 보아야 할 것이올시다.

하나님의 성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 다음에 성신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그 다음에는 성신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 다음에는 성신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신다. 또 성신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 도고를 하신다. 또 성신께서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우리로 찬송과 또한 감사를 가지게 하셔서 “성신 충만을 받으라 그래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 그리고 다음 차례에 “주께 감사하라”는 말씀을 했는데 이와같이 성신님의 그 우리 안에서의 역사는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보면 이런 말씀들이 거기에 모두 있어요.

그런데 물론 성신님의 그 역사에 관해서는 이 세상 전체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반드시 의미를 가지고 어떤 효과, 어떤 하나님 법칙에 의한 영향을 꼭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 전체에 모든 인류 속에, 인류 위에 하나님의 성신님은 역사하셔서 가령 일반의 은혜라, 보통 은혜라 하는 말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 형상에 상응(相應)한 의와 선과 미와 진리를 추구하는 생활 태도가 그러한 제도, 그렇게 사회에서 움직여 나가는 것들, 이런 것들이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만 움직여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그 구원하신 백성을, 주께서 기르시고 그 나라를 거룩되이 발전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서 또한 하나 부대적인 한 원조의 사실로서 전능의 왕께서 그 전능의 그 왕, 국왕, 힘의 국왕, 그러한 왕국에 있어서의 그 전능의 왕께서 주님의 친히 통치하시는 사실은 그의 신인 성신께서 일반적인 은혜와 일반적인 역사 커먼 오퍼레이션(general operation)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은혜 커먼 그레이스(common grace) 이것을 가지고 역사해 나가시는 까닭에 거기에서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일반 계시에 의한 가르침이 또한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의 사역이라는 것이 섭리라는 한 명확한 사실로 또한 나타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고 하나님의 보존하심이 있고 또한 시의(時宜:그 때의 사정에 알맞음. 그 시대에 적합한 사회적 요구)에 서로 협조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존재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이런 하나님의 섭리의 사실은 또한 사람들에게 늘 적용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중요히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일반론이 아니고 특별히 구원을 받은, 중생하고 새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성신님의 내주나 가르치심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깨달을 수 있고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받는 것인가 하는 그런 독특한 현상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특별한,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의 현상을 지금 공부해 나가는 것이올시다. 그것이 여러분들, 우리 신자들의 생활에는 실질상으로 가장 유익한 교훈이 될 것이므로 그점에서부터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것이올시다. 그런고로 이제 일반적인 역사의 여러 그 도리는 그것은 나중에, 후일에 다시 그 특별한 역사라는 사실을 공부해 나갈 때에 필요한 사실로 때때로 관언(關言)하겠지만 지금 우리가 중점으로 생각할 것은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신다, 즉 가르치심이오, 그것을 이번에는 생각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희를 인도하시리라.” 그 인도라는 말은 호데게오(όδηγέω), 안내해준다. 요것이다 요것이다 하고 지적해서, 지시해서 끌고 가신다는 그런 의미이고 로마인서 8장 14절에 있는 인도라는 말과는 같지 않다고, 또 갈라디아 5장에 있는 “너희가 성신의 인도하신 바가 되면 율법에 있지 않다”의 거기 인도라는 말도 로마인서 8장 1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은 어(語), 단어를 써서 아고(άγω) 꼭 붙들고 다른 데로 비키지 못하게 하고 끌고, 끌고도 가시고 혹은 보호하고도 가시고 계호(戒護)해 주시면서 가신다. 이런 말과는 다르다고 그전에 말씀을 드렸는데 요한복음 16장 13절의 인도라는 말은 번역이 인도일지라도 영어 성경도 같이 리드(lead)라 번역했을지라도 그런데 개념은 무엇이냐면 주로 “요것이 기다. 요것은 아니다” 하고 이렇게 일러 주시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도 “우리가 받은 이 영은, 혹은 신은 이 세상의 신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신이니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여러가지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알려 주시는 것이라 그말이오. 또 분변케 하시는거요.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아까는 12절 말씀을 내가 읽었는데, 14절 말씀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 보통 자연의 생명만 프슈키코스(psuchikos, φυχικός) 즉 프슈케(psuche, φυχή)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신의 일을 받지 않나니 이는 저가 미련히 여김이오 또 깨닫지도 못할지니(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分辯)함이니라.” 영적으로야 분변한다고 그랬지요. 아나크리노(ανακρινω)한다고. 자세히 살펴 가지고 과연 그런지 아닌지를 다 따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로서만 한다 하는 말을 거기에다 썼어요. 이렇게 성신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바로 알게 하심으로 바른 크라이테리아를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주시고 따라서 우리의 영혼의 기능에 유기적으로 역사하심으로 바른 판단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 그거요. 이런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자식답게 살아가려 할 때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바르게 알고 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오.

이런 성신의 가르치심이든지 성신의 인도든지 또한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에서 기본적으로 여러분이 언제든지 주의하고 알아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오. 거기는 하나의 목적이 있어요. 마치 성신의 내주, 내 하나 하나의 속에 거하시는 것이 어떤 목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요. 성신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한 성신이 열 사람이면 열 사람에게 다 계시는 것인데 한 성신이 열 사람에게 계신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재의 속성 하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보통 사람으로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항상 어떤 일정한 범주 하에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일반적인 논리와 사고에서는 그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오. 그러면 열 사람 속에 하나 하나의 인격이 있다면 열 인격이 아니냐고 얼른 따질 것이오. 그러나 그런 점은 항상 성신님께서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그 독특한 속성, 편지(遍知)라든지 편재(偏在)라든지 하는 또 편능(遍能) 다른 말로 말하면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능(無所不能), 무소부지(無所不知)라는 것, 이 거룩한 속성 하에서 필연적으로 우리한테 나타내시는 일이란 말이오. 성삼위의 거룩한 신비의 양상이 자연히 이런 신비한 여러가지 사실들을 하시게 하는 것이오. 그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하시는 거요. 그러면 성신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이것은 유니오 미스티카(unio mystica), 그리스도의 신령한 일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거룩한 목적 하에서 그것을 현상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보편의 교회에서만 이룬 사실이라고 하지 않고 볼 수 있는 이 현상의, 가시(可視)의 교회 안에서 그것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성신님은 우리 각 사람 속에서 내주하시는 것이란 말이오.

여기 에배소 4장 4-5절을 볼 것 같으면 거기 “몸도 하나고 또 성신도 하나시니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의 부르심도 하나라.” 이 “하나”라는 말을 자꾸 강조해요. 5절 보면 “주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고 또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가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다 받아서 그 생명 안에서 혼연히 그리스도의 신령한 한 몸, 하나의 거룩한 사실을, 존재의 사실을 일으키는 거란 말이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체(一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만 그리스도에게서 내린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된 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오.

이러한 거룩한 도리는 교회 역사에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개혁 시대에 이르러서 찬연히 그 문제를 아주 깊이 생각들을 해서 칼빈 선생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유니오 미스티카(unio mystica), 즉 미스티컬 유니온(mystical union) 신비적인 일체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했어요. 그것은 누가 됐든지 문제는 우리가 받은바 고귀한 신앙과 교리의 유산 가운데 있는 이런 신령하고 깊은 도리로서 반드시 교회를 바로 깨달으려면 우리의 구원의 사실이 어떤 위치, 어떤 양상,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가를 바로 알려면 이것을 모르고서는 안되는 것이오.

이 동양적인 종교의 나쁜 영향을 받아 가지고 항상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로만 모두 생각하는 이런 습관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거요. 우리의 인간관이라든지 세계관을 좀 고쳐야 해요. 어때야 할 것 같으면 성신님의 내주도 그러하시고 성신님의 가르치심도 유니오 미스티카라는 큰 사실, 그래서 그것이 보이는 교회 안에서는 커뮤니오 쌍토륨(communio santorium), 성도들의 거룩한 한 가정을 이루는 사실, 기반을 이룬 사실, 커뮤니티(community)를 만들어 나가는 이 사실에다가 중점을 두고 인도도 하시고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내주도 하시는 것이란 말이오. 이 점을 우리가 오늘 제일 먼저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성신님이 내주하시는 사실이 이 거룩한 교회의 중요한 사실을 바르게 하고 정당하게 구현될 수 있도록 하신다는데 목적을 두고 하시는 것이지 그 사람의 복리를 위해서나 그 사람 개인이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게 하신다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버려야 해요. 왜냐? 우리 개인이 혼자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은 없는 것이오.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닌거요.

하나님의 법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함으로 비로소 우리가 죽었던 자가 산 사람이 돼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정을 받고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이 있는 까닭에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 가치체로서 인정을 받은 것이고 이 생명체는 그리스도와 저(자기)만 결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자들이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보편의 교회요. 처치 캐톨릭(church catholic) 보편의 교회라는 말, 즉 신비하고 보이지 않고 하늘에 있고 땅에 있고 고대(古代)에 있고 지금도 있고 그리고 그것은 영원까지 있어야 할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라는 말로 표상적으로 표현한 그 거룩한 사실 안에서 비로소 나의 존재와 가치는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인정을 받은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않고 하는 문제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야 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존재를 인정하시고 가치를 인정하신 사실은 유니오 미스티카 안에서만, 신비한 일체성을 이룬 안에서만 그것은 있는 법칙이올시다. 그런 까닭에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할 때에 궁극적으로 항상 신령한 신비의 일체를 이룬 사실이 정당하고 또 의미있게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것을 완성하시는 지경으로 끌고 가시는 그 사실에 나의 부분을 하기 위해서 나에게 성신님의 가르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의해서 늘 생각해야 해요.

에배소 2장 10절도 볼 것 같으면 그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제작하셨다는 말이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선한 일을 위해 새로 창조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 선한 일이란 “이 일은 하나님이 이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신다.” 이렇게 해서 너는 네 마음대로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너희가 믿는다면 그 믿음이 있은 다음에 네 멋대로 사는 길은 없는 것이다. 네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그 길도 없는 것이고 네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자정(自定)한, 스스로 정한 그 법칙대로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위하여 있게 하셨는가는 지으신 이의 소관이고,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 하나를 가지고서 토기를 만들었으면 상위에다 올려 놓고 큰 도가니를 만들었을 것 같으면 원 장독대나 어따 뭐 그런데다 놓는 것이지 장독대의 도가니를 밥상 위에다 올려 놓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거요. 이렇게 각각 쓸데가 있어서 그 목적을 가지고 만드시고 하나님이 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만드는 법이 없다 이거요. “이전에 예비하사”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거룩하신 경영대로 너를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실 위에 있을 것 같으면 이 사실이 바르게 잘 구현되기 위해서 성신님은 보혜사로서 모든 은혜를 보존하시되 나를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인도하시기도 하시고 또는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그러는 것이오.

그러면 무엇보다도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 성신님이 내 안에서 무엇을 가르쳐 주신다 하는 데의 목적이라는 것은 거기 그런 것이 있는데, 만일 어떤 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 할 때에는 하나님은 필연 그를 위하여 그 예비하시고 정해 놓으신, 경영해 놓으신 거룩한 일, 선한 일이 있을거요. 그러면 그 길로 그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오. 그 길로 그가 들어가도록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기다리고 인도하시는 대로만 받는 것이지 제멋대로 제 장래의 길을, 나는 무엇이 되겠다 무슨 가(家)가 되겠다 않는 것이란 말이오. 만일 참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앞에 새로남을 받았다는 것이 확신이 들어가면 또 그것이 안 들어가고 어떻게 하는 길이 없고 들어가면 그날부터 자기의 과거에 가지고 있던 계획이나 이상이라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거요. 그것을 쥐고 앉아서 요것을 좀더 미화해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것을 합니다 하고 어줍지 않은 생각은 안해야 하는거요.

그것을 포기하고 “주여, 나를 위해서 정하신 길은 무엇이고 경영하신 일은 무엇이며 계획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만세전에, 이전에 예비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이전, 하나님의 이전(以前)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앞서는 거요. 그런고로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밀하시고 완전하신 계획 가운데서 나도 그 계획 안에서 살도록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거요.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바라고 그리고 무엇이든지 인도하시는 대로 가르쳐 주시는 대로 나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나는 순종하고 살겠다고.... 이것이 전적인 헌신이라는 거요. 다 드려서,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스스로 운전하려고 절대로 하지 말란 말이오. 이 전적인 헌신이 모두 부족해 가지고 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 되어 가지고 교회를 하겠다고 하는 통에 문제가 자꾸 생기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온전히 헌신을 하고 전부를 드리고 그의 인도를 받아 나가게 되면 두개의 단계가 있어요. 이것은 도리에 의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거요. 첫째는 그가 어떤 일정한 지점까지 장성해 올라가야 하는거요. 아주 유치한 자에게 어린 아이에게 나락섬을 한 섬씩 짊어지고 이것을 짊어지고 고개를 올라가자고 않는거요. 그러나 필요는 나락섬을 한 섬 짊어지고 가게 될 필요가 생겼는데 자기 힘으로 봐서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어요. 그렇기 까닭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사 열매를 거두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는 특권을 그에게 주시고자 하시면 특권을 받을 자격을 구비케 만드시는 거요. 이것이 육성하는 길이오. 이래서 장성, 성숙의 경지까지 올라가게 하는 거요. 사람의 일이 현 역사의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구체적으로 늘 있을 때에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다 갖다 놓이시는 이런 장성, 이것이 상대적인 의미로 그것이 성숙이란 것이오.

그런고로 그런 사람, 예를 들면 전쟁에 나가려면 열 살 먹은 아이는 무장시켜 가지고 싸움시키려고 내보내지 않아요. 장정을 뽑아내는 것이오. 사람의 완전한 성숙이란 것을 우리가 다 기대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장정이 되면 정상적으로 노말(normal)하게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어떤 일정한 표준을 세운다면 그 표준하에서 군인을 뽑아내는 것이고 그 뽑아낸 군인이 그 표준에 적용되었을 때 비로소 중무장도 하고 전투에도 나가고 사지(死地)에도 나가서 싸우게 만드는 거란 말이오. 우리에게 말을 하실 때 우리의 사명의 수행의 길에 관해서 교회를 말할 때는 전투의 교회라, 쳐치 밀리턴트(church militant)란 말을 써요. 이것이 신학상으로 아주 중요하게 쓰는 말이오. 이 전투의 교회라는 것은 이 땅 위에서는 필연적으로 싸움을 하게 돼 있어요. 악마의 세력이 있고 그것이 교묘하게 여러가지 형식으로서, 합리적인 물질적인 협상으로서, 환경의 사실로서 자꾸 부딪치는 거요. 거기서 그것을 극복하고 어떤 것은 배제하고 싸워가면서 전진해야 할 때 그 싸움에는 성신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공격의 유일한 무기로 쓰이는 것을 그 전에 배웠지요.

에배소 6장에서 다 보면 전부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에 불과해요. 가령 허리띠를 매고 그 다음에는 의의 흉배라는 것을 붙이고 또 화평한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쓴다. 전부가 이것은 전쟁 마당에서 자기가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요. 특별히 그 중에 믿음의 방패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귀의 화전이 있어 가지고 멀리까지 미치는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어요. 내게는 그런 것이 없는데 내가 화전을 쓴다는 말은 없어요. 그런고로 이 믿음의 방패로 그것을 막아내면서 접근해서 최후에 내 칼이 도달할 수 있는데까지 가서 그를 찔러야 한다. 그런 때 너는 성신의 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빛이되고, 자기의 발등에는 빛이되고 혹은 등불이 되는 거요. 이것을 우리가 배웠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메스가 되는 거요. 그래서 관절과 골수, 저 숨은 것까지라도 찔러서 쪼개기까지 하는 것이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도리가 되는 것이오. 그렇지만 성신의 검이 되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 되는거요. 아무 한테도 성경 몇구절만 외면 그 검이 있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이야기요. 그런고로 이번에는 검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용(用)을 보면 그것은 검을, 검을 쥔 사람이 쓸 수 있을 때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칼을 내두를 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칼을 주어가지고 가서 네가 격검(擊劍)을 하라든지 펜싱(fencing)을 하라든지 칼로서 나와 전투를 하라든지는 말도 안되는 것이오.

이와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경우에는 검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게 그것이 필요한 것이고 있어야 하는 거요.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겪으라 군사로 뽑힌 자는 자기를 기쁘게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명료하게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나를 군사로 뽑은 그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 사랑하던 것들이 많고 자기가 쥐고서 아끼던 것들도 많지만 일단 전신에 나갈 때는 어느 때는 다 포기해야 할 때가 오는 것이오. 그리고 오직 내가 이 앞에 놓여 있는 싸움을 싸우러 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 선생도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 그러니까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셨다”고 이렇게 했지요? 그 마지막에 쓴 편지, 디모데후서 4장에 그런 말이 있는 것을 잘 아시지요.

이와같이 선한 싸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그 자녀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것을 합목적적으로 정밀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제작한 바라, 제작 받았으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성숙성이 있는 위에서 해야 할 자기의 인간의 사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교육도 시키고 또 교양도 쌓게 하고 여러가지 훈련을 하게 하고 해서 합목적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길러내시는 기간이 있는 거요. 자기가 그것을 충분히 의식을 했든지 못했든지 그것 문제없이 훈련하시는 거요. 이렇게 나아가시는 기간이 있지마는 이 기간이 지나서 어떤 일정한 포인트 혹은 지점에 이르면 그 다음부터는 항상 앉아서 책만 쳐다보고 공부만 한다고 그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가서 해야 할 일을 하라 그것은 다 그 시대라든지 역사라든지 현실이라든지 하는 모든 문제, 물질적인, 물리적인 현상과 서로 대조해 가면서 그 사람이 나가서 일을 하게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일을 시킬 것 같으면 그것이 그에게는 사명이 되는 거요. 이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데는 절실하게 성신님이 언제든지 모든 일을 가르쳐 주시는 대로, 즉 안내해 주시는 대로 받고 인도하시는 대로 받고 가는거요.

그렇기 까닭에 성신님께서 가르쳐주신다 하는 일에 그 큰 목적은 이렇게 함으로 그 개인이 자기의 사명을 하는 것이 끝이 아니고 그 개인이 보편의 교회, 쳐치 캐톨릭(church catholic)속에서 자기의 부분에 서서 자기의 해야 할 당위, 의무를 충실히 다 감당하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하는 것이란 말이오. 이렇게 함으로 궁극적으로 그 교회가 건전하게 주께서 경영하신 그대로 주께서 계획하신 그대로 건전하게 형체를 이루어서 마침내 그것을 완성하는 날 주님은 재림하시고 그 거룩한 신령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은 영원한 위치로 들어갈 것이란 말이오. 영원한 세계, 영광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말씀했어요. 이러한 궁극적인 큰 목적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개인을 뽑아 내시고 그를 기르사 그 안에 거하시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거요.

성신님이 나를 가르쳐주시기를 여러분 누구든지 원하시거든 이 큰 목적을 잊어버리지 말고 해야지 내 욕심을 위해서 내 종교적인 욕심이나 내 도덕적 완성이라는 그 개인적인 윤리관에 의한 욕망을, 자기의 욕망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성신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셔야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선하게 살고, 그 하나님의 뜻과 선하다는 말은 밤낮 이야기는 하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내신 본래의 큰 목적과 도리에 대해서는 모르고 앉아서 항상 일대일이라는 생각, 내가 무슨 이상한 지식을 갖든지 꿈을 꾸든지 환상을 보든지 무슨 소리를 듣든지 이런 이상한 데로 달아난 이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란 말이오. 이게. 거룩한 보편의 교회의 사실을 구체적으로는 보이는 교회 안에서 그 사람이 얼마만큼 자기의 당위를 잘 해 나가는 것으로 나중에 나오는 것이오. 결산을 자꾸 지어가는 거요.

그리고 그것이 좀 더 크게 말하면 보이는 현실에 있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돌아가요. 왜? 모두가 보이는 교회가 규정할 때는 모두가 교회의 일은 아니오. 장사하는 것은 교회의 일이라고 안해요. 그러나 늘 말했지만 장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인거요. 그를 상인으로 쓰시면 상인으로 상인답게 장사하는 그것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겠다는 목적이 분명히 있는 것이오. 장사의 목적도 있는 것이지 돈벌어 가지고 내가 잘 살자는 것이 최종의 목적이 아닌 것이오. 하나님의 가르쳐 주시는 거룩한 목적을 따라가면 가는 동안에 즉 의(義), 자기 의라는 것, 당연히 해야 할 당위를 찾아가는 동안에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필요한 것을 준다해서 자기 먹고 입고 쓰고 사는 것들을 거기다 충당해 주시는 거요.

그런 까닭에 우리가 우리의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관을 그릇되이 가지지 않아야 해요. 나 하나로서 무엇이 완성이 안되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리스도에게 붙고 그의 생명이 연결됨으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것은 보편의 일원이 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고 땅위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보이는 교회안에서 자기의 당위를 충실하게 해 나가고 그것은 마침내 또한 일면으로 보면 자기가 받은 바 사명을 끝까지 충실히 완수해 나가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성신님의 내주와 힘주심과 인도와 가르치심이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 이거요. 이 점이 지금 우리가 우선적으로 이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이 올시다.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가 성신님의 그 가르친다는 문제에 대해서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는데 지금 이야기 한대로 벌써 그것을 아시겠지만 그것이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를 판별해 주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거요. 성신님의 가르치심은 “아! 너 그것은 나쁜 일이다. 아! 좋은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윤리적인, 도덕적인, 선악의 사실을 위주하는 것이 성신님의 가르침의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거요. 이것이 없는 것은 아니오.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우리에게 감화하시고 가르쳐주시는 것이 있지마는 성신님의 가르치심의 가장 크고 또한 본질적인 부분은 어디에 있냐면 보편의 교회 안에서 그가 일생 이루고 나아가야 할 그 사명을 위주로서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더 심히 중요한 일이라고...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인 것이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겠다. 의미가 없는 것이오. 내게 무엇을 주셨든지 당위를 하는 거요.

사람은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이 아니오. 어느 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는 것이오. 그 마음 가운데 확신이 오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준비가 자기에게 얼마만큼이라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 일에 대한 자기의 의사가 하나님께서 이미 비치하신 바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해서 그것을 마음 가운데 기뻐하면 이로서 대체로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요. 이것이 개혁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도리올시다. 그 사람이 그것이 사명인가 아닌가를 우리가 따질 때는 너 거기에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먼저 따지는 거요. 목소리가 아주 쉬어서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은 성악가가 못되는 것이오. 그런 사람이 성악가가 되겠다면 그것은 은사 없는 것을 가지고 괜히 쉰목소리 가지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각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가 가장 목적에 합당하게 쓰이도록 하시는 거요.

이렇게 해서 먼저는 그 사람의 은사를 보고 거기에 대한 어떤 준비가 있는가를 보는 것이고 그리고 그 방면으로, 지금 자기가 원하는 이것이 나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이 아닌가하고 생각되는 그 방면으로 인도해 나오시는 어떤 경험이 있어야 하는 거요. 즉 전에 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어떻게 그런 인도를 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경우에 흔히 성신의 인도라는 것을 잘못 생각해서 다른 문은 다 닫히고 그 문 하나만 열렸으니까 인도다, 이점을 우리가 주의해야 할거요. 하나님께서 물론 그 섭리에 의해서 우리의 환경의 사실에 있어서 무엇을 가르쳐도 주시지만 다만 어떠한 사실이 그밖에는 없으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라고 속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인 것이오.

사람이 평소에 공부를 열심으로 않고 흥청거리고 놀고 하다가 어떤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니까 안되고 또 다른 학교에 입학하려니까 안되고 하니까 나중에 제일 쉬운 어떤 학교, 특별히 그런 실력을 과히 중시 않는 그런 학교에 쑥 들어가고서는 하나님이 인도해서 이리로 갔다. 왜 그러느냐? 다른 문은 다 닫히고 이것 하나만 열려서 들어왔다고... 자기의 잘못과 결핍과 자기의 그 게으름이란 것은 하나도 따지지 않고 마치 하나님이 그리로 보낸 책임자인 것같이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오. 미국에서 한 번 어떤 사람보고 어떻게 해서 신학교에 왔느냐고 신학생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주께서 인도하셨다”고, “너는 주께서 인도하신 것을 어떻게 해서 아느냐”하고 물었더니 “다 다른 문이 자꾸 닫히고 이 문만 열려서 왔다”고 그래요. “너 그것 참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다른 문 다 닫히고 하나만 열리면 그것이 지옥이라도 하나님의 인도라고 가겠느냐? 그것 판별은 네가 해야 되지 않느냐? 아닐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는 것이지 어째서 네가 거기에 가느냐?”

이런 것 아주 흔히 경망하게 생각해서 마치 자기의 모든 잘못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거두는 것을, 이것은 잘못의 결과가 대부분 있는 것이오. 거두는 것을 하나님이 책임자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께서 환경으로써 인도하신다. 성신님이 그렇게 안하시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아주 주의해야 하는 것이오. 혹여라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런 망상을 하지 아니해야 하고 오히려 그런 것은 훨씬 거룩한 도리에 대해서 깊이 알고 익숙한 사람, 현실을 잘 보는 그런 선배나 스승에게 묻는 것이지 그것을 함부로 자기가 “이것이 옳다”고 않는 것이오. 그 신학생과 같이 그런식으로 다른 문 닫히고 이것만 열렸다. 다른 문 닫힌 것이 아니오. 제가 닫았지. 왜냐하면 다른 사람 모두 들어가는데 저는 실력이 부족해서 낙제하는 것 뿐이오.

그런데 실력 부족한 사람이 꼭 신학을 해야 할 이유는 없는거요. 미국에서는 이야기가 있어요. 대통령을 할만한 유능하고 준비가 있는 사람이 목사가 되면 그것이 좋은 목사가 되고 한 주의 지사가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주의 지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 버리고 목사가 되면 그것은 그만큼 은혜를 끼치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물론 유럽 국가에서는 이 서구라파나 미국 같은 국가에서는 목사될 그 자격과 품질이라는 것을 아주 높이에다 놓고 보지, 그냥 쉽게, 수월하게 않는거요. 개혁교회가 특별히 그랬어요. 왜냐하면 개혁교회의 특성은, 특성의 하나는 진리를 사람에게 주신 일반적인 이성과 논식에 의해서 성신님이 조명으로 인도를 받아서 선천적인, 이 선험적인 논식(論式) 즉 사고의 형식에 의해서 우리는 규명해 가는 까닭에 꼭 우리가 일일이 다 경험해야만 그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규명해서 나오는 것인 까닭에. 그것은 해명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명된 진리도 진리로 받는다는 것이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해명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고도의 교육도 받아야 하고 고도의 경험도 있어야 하고 깊은 통찰력도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아무렇게라도 돼 가지고 자기 기분대로서 한마디로 사해(私解), 사사롭게 해석해 가지고 이것이 뜻이다. 그것은 안되는 것이란 말이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결국은 논식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신 이 사고의 형식인 까닭에 거기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고 타당성이 있어야 하는 거요. 보편 타당을 무시해 버리고 이것은 진리다, 진리다 하는 것은 독단에 불과한 것이오. 그런 까닭에 신학이라는 것이 있는거요.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성신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이 그 환경이라든지 하나님의 섭리와 함께, 즉 하나님의 일반 계시의 사실과 하나님의 보통 은혜의 사실 속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방법으로 쓰시사 결국 궁극적으로 이것이 성신님의 가르침이라고 확인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게 되어야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지 덮어놓고 그럴듯하다는 것은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아까 말한 것과 같이 그렇게 그릇된 데에 빠져 들어가기가 쉬운 것이오.

이렇게 해서 자기 환경이 나를 인도했다는 것은 환경이 인도했을 뿐이지 성신님이 꼭 인도했다고 단언 못하고 혹여라도 그로 말미암은 중대한 과오와 실수라는 것을--그 때는 모르고 있었다가 성신님이 인도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다 했다가--하나님께 돌치는 그런 망발에 빠지기가 쉬운거요. 이래서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오. 신자는 자기의 환경의 변화나 그 거룩한 인도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아니나 이런 때는 신중히 문제를 다른 가능성을 늘 쳐다봐야 하는 것이란 말이오.

다만 하나님의 도덕적인 법칙, 그것만 배울 뿐만 아니라 지금 말씀 드린 대로 우리 환경의 변화, 그에 대한 자기의 깨달음이나 해득이 무엇을 가르치느냐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데 하고서는 도덕적인 법칙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인생의 행로의 방향과 전진의 가르침과 인도도 거기에서 흔히 구하려고 하는데 이런 경우에 성신의 가르치심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를 성신의 가르치심에서 우리가 이제부터 배워나가야 해요.

거룩한 나라의 원칙과 그 사실에 지식이 빈곤한 사람은 이러한 때에 자기 환경에 어떤 사실이 자기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 듯 할 때에 방황하기도 쉽고 어느 때는 확신도 없이 암중에 자꾸 모색하기가 쉬운 것이 올시다. 그런고로 알아야 할 것은 먼저는 그 특별한 계시 안에서, 일반계시 말고 특별한 계시 안에서 이미 가르치신 중요한 사실, 하나님이 나를 계획하시고 나를 거룩하고 높은 위치에다 두셨으며 거기에 상당하게 자격을 구비케 하도록 나를 길러 주시고 힘주시는 그 일을 먼저 배워야 하는 거요. 그 일이 먼저 앞서야 하는 거요. 그래서 사명의 확인이 있기 전까지는, 내 사명을 알게 되는 때까지의 하나님의 준비의 인도가 거기에 있는 것이고 나를 준비해 주시는 인도요. 그런 기간이 있는 것이고 일단 사명이 그에게 있은 그 때부터는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대로, 다른 말로 말하면 거룩한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람의 꾀로 하지 않고, 사람의 효과주의를 노리지 않고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게 밀고 나가려고 하는가 하는 이런 거룩한 도리를 배워서 그리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 그거요.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리 사명이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는 거요. 예를들면 교회를 형성해 놓고 교회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에서 벗어나는 헌금의 강요나 헌금의 징수(徵收)라고 할는지, 원, 헌금을 좀 부과해서 내라고 자꾸 요구하는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헌금이지 받으실 수 없고 얼굴을 찡그리실 수 밖에 없는 것을 해서 자기 살림은 잘 할는지 몰라도 해놓고 그래도 가르치려고 교회를 하는 것이지 원칙을 파괴하려는 단체를 만들려고 교회를 하는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자기 개인 생활도, 교회 생활도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거룩한 원칙하에서만 사명을 수행하는 거요. 꾀를 부려가지고 숏컷(short cut), 지름길이라는 것을 가는 그런 법이 없어요. 대도(大道)를 늘 걸어가야 하는 것이오. 성신님의 가르치심의 목적은 그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일생을 정당히 살아가면서 낭비를 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생활, 곧 그 사명을 완수하는 생활을 하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아까도 바울 선생의 말과 같이 자기는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 사명을 완수했다, 싸워야 할 싸움도 다 선한 싸움을 싸웠다, 또 내 믿음은 떨어지지 않고 지켰다고 나는 믿는다. 당당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늘 같이 했다는 것은 성신님의 인도와 성신님의 가르치심 가운데서 살았던 까닭에 그렇고, 그렇게 풍부하게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유례가 별로 드물어요. 아주 특색있는 인물이오. 그래서 하나님의 성신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자기는 편지로 썼지만 그것은 성경으로 오늘날 남게 되었다 그말이오. 또 성신님 대(對) 한 개인으로만 성립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성신님이 보편의 교회에 은혜를 내리사 이루어가시는 일, 그 일환(一環)으로, 한 부분으로서 그 개개의 분자에게도 가르치심의 역사를 하시는 것을 먼저 우리는 주의해야 할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먼저 성신님의 특별하신 역사, 이것이 중요한데 성신님의 특별역사라는 말은 신학상으로 이 말, 스페이셜 오퍼레이션(special operation)이라는 말은 어디에 적응하는고 하니 마치 일반은혜라는 것이 일반 피조물에게 내리시는 거룩한 은혜로서 성신님의 일반적인 역사라는 것은 피조물들 위에 일반적으로 하시는 역사를 의미하는 거기에 대조해서 그와 비슷하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에게 그 새로운 생명의 보호와 육성과 충분한 가치 발휘를 위해서 하시는 그 역사가 곧 특별한 역사라는 것이오. 이게. 그런고로 이 특별한 역사 안에서 그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물들어 가지고 압도 당하지 않게 늘 막아주시는 것도 있고, 그를 길러 주시는 것도 있고, 일생 그의 할 일을 가르치시며 알아야 할 거룩한 지혜를 주시면서 인도해 나가시는 것들이 있어요.

이런 모든 특별한 역사도 물론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두 배우셨어요.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나 대(對) 성신, 별도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혼연히 내 자신의 영혼의 모든 기능을 쓰셔서 나는 깨닫게 하시고 나는 생각하게 하고, 나는 판단하게 하고, 나는 마음을 먹게 하고, 나는 마음을 느끼게 하고... 이렇게 내 자신의 영혼이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은 완전히 그 사람 한 개인의 어떤 활동인 것이지 심리적인 활동인 것이오.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성신은 내 의지를 억압하거나 내 정서를 어디로 치워 버리거나 내 요구라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다른 것을 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충만한 은혜 안에서 유기적으로 역사하시는 거요.

그러나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그럼 그러한 상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상태가 있느냐 하면 분명히 그렇지 않은 상태가 있는 것이오. 이 그렇지 아니한 상태에 비로소 저오(抵悟:서로 어긋나 거슬림. 서로 용납되지 않음)라는 것, 서로 착오가 나는 거란 말이오. 나는 원하는데 성신님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 거기 나타나는 거요.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 가운데서 단순히 어떤 미미한 그 양심의 가책이라든지 미미한 심적인 갈등이라든지 하는 그런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니오. 이런 현상이라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좀 더 자세하게 꼬집어서 생각을 하고 싶은데 문제는 유기적인 역사가 없다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무리 새생명을 가졌다 해도 옛사람에 속해서 그냥 사람대로만 산다면 거기서 성신님이 그것이 전부 역사해 가지고 그 마음을 일으킬 까닭이 없는거요.

그런데 자기는 자기 스스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 하고 자기 출세를 죽겠다 하고 노리면서 “아, 이 권력의 세계나 혹은 이런 큰 세계에도 내가 나가서 아, 신자가 이런 대 재벌이 되었다든지 대 통치의 권력을 가지는 사람이 되었다. 아, 이러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된다”고 어줍지 않은 생각을, 되지도 않은 생각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까지 자기를 나중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성신의 교도(敎導)를 받은 사람이라고 갖다 들어 붙이는 망상이 있는 거요. 이런 망상에서 우리는 주의하셔야만 할거요, 이게.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이 오늘 이제 차례차례 해 나가겠지만 오늘은 이미 많이 시간이 갔으니까, 첫째 한가지 주의할 것은 내가 주님의 도를 바로 먹고 바로 크는 것이 성신님의 가르치시려 하는 것인데 이런 바로 먹고 커서 장성시키는 이 일에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이 나타날 것이오. 그런데 이 가르침이라는 것이 꼭 내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바깥에서도 오는 것이오. 첫째는 물론 성경 말씀으로 하는 까닭에 그것이 내 안에 그냥 있던 것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던 여러가지 도리를 날마다 공부하는 데서 배움으로 지금까지 좁던 생각과 몰랐던 것을 깨닫고 아는데서 이번에는 문제를 새로 보고 새로 깨닫고 새로 생각하는 거요. 이렇게 나의 장성을 첫째 붙들어 주시고 주장하시는 이 성신님의 이 가르치심이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성경으로 하시는 것이고 또 성경의 거룩한 뜻을 해명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에 의해서 의미를 터득하게 하시나 그러나 궁극적으로 항상 특별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오. 그러나 이 성경으로 한다는 사실에서 오도(誤導)되는 일이 많단 말씀이오. 잘못가는 길이 많단 말씀이오. 이게. 이 잘못가는 길이라는 것이 큰 문제요. 다음 시간부터 우리 그 문제에 대해서 자꾸 계속해서 생각하시지요. 같이 기도하십시다.

사랑하시는 주여!

저희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사 성신님이 저희 안에 거하시고 저희에게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은혜로 주신 여러가지 것들을 가르쳐 주시는 이 큰 역사를 하시는 것을 확신하옵나이다. 그러나 그것을 저희들이 확신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어야겠고 그것이 저희에게 실제로 늘 적용되는 데서만 저희의 행보가 정당한 것을 믿사옵나이다. 저희가 그렇지 못하고 항상 자기 옛사람에 속해서 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기 종교로 열정을 해서 하면서 마치 성신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돌려대 말하는 여러가지 오류가 참으로 있기 쉬운 빈곤한 지식과 빈곤한 이해 가운데 있는 일을 주께서 불쌍히 보시고 건져내어 주셔서 참으로 이 거룩하고 신령하고 오묘한 도리를 바로 깊이 깨달아서 저희의 생의 행보가 확고하게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그의 인도함을 늘 명확하게 받고 알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2.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