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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역사 6 - 김홍전 목사

Bavinck Byeon 2015. 3. 7. 17:20

성신의 역사 6

 

김홍전 목사

 

제6강 사도행전 10장 34-43절

 

오늘 아침에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라는 제목하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생각할려고 하던 사도행전 10장에서의 한 실태, 그 원칙을 나열하는 것보다 대체(大體)를 가지고 그 실태에서 몇가지를 또한 생각하려고 했는데 오늘 오후에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주로 사도행전 10장에 있는 이야기인데, 이 10장을 가지고 이제 생각해 보면 고넬료가 어떤 환상을 본 다음에 그 명령대로 사람을 욥바에 있는 피장이 시몬의 집에 우거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보낸 것이올시다.

그런데 그 이튿날에는 베드로가 한낮에 지붕에서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일까 생각하는 중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찾게 되었어요. 그래 그 사람들이 온 내력을 듣고 그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단숨에 돌아갈 수 없으니까 여기는 욥바고 욥바에서 지중해를 옆으로 끼고 즉 왼쪽으로 서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반듯이 올라가면 샤론의 둥지라고 하는 가장 잘 알려진 평야, 샤론의 백합화라든지 샤론의 장미라든지, 장미도 비슷하고 백합화도 비슷하고 나르시서스(narcissus), 즉 수선화도 좀 비슷할 그런 꽃이올시다. 그러나 거기 둘 다 있어요. 그런 종류의 장미, 함박슬렐이라는 것 그 다음에 백합화 슈샤니, 그런 것들이 거기 아름답게 피고 비옥한 땅인데 거기를 얼른 개략해서 약 150리 올라가면, 욥바에서 조금 올라가면 바로 거기가 텔아비브(Telaviv)이고 텔아비브에서 계속해서 해안으로 올라갈 것 같으면 가이샤라인데 여러분 다 아시는 것과 같이 가이샤라는 그 때 팔레스틴을 통치하고 있던 이 로마의 그 지역 감사라고 할런지 지사라고 할런지 총독이라고 하든지 무엇이 됐든지 좌우간 거기에 다스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빌라도나 혹은 베스도나 펠릭스는 다 사도행전에서 혹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다 아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 위에 있는 상관은 저 수리아에 있는 사람이고 그 아래에서 이 사람들은 통치를 맡은 사람들인데 맡았다고 하더라도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사람같지는 아니해요. 훨씬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는데 거기의 수부(首府)가 바로 가이사랴예요. 그럼 거기 수부에, 말하자면 총독부가 있는 곳이니까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군대가 주둔한데서 백부장으로, 즉 지휘관 장교로서 일하고 있는 코넬리우스, 즉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 이 사람의 사실(史實)이 여기에 기록된 걸 여러분은 아실거요. 그러니까 한 150리 길이 되며는 걸어서 오면 하루 반나절이 걸리게 되니까 고넬료가 오후 한 3시 경에 환상을 보고 즉시 사람들을 보냈다고 하더래도 그 이튿날 낮에쯤에나 도착할 것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거기서 환상을 보고난 다음에, 밥을 좀 차리라 하고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고 난 다음에 바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거기서 찾아와서 만나 가지고 이야기를 듣고서 떠날려면 이제 그 이튿날 새벽이나 일찌감치 일어나 가는 것이 좋으니까 거기서 그날을 우거하게 하고 이튿날 그러니까 고넬료가 사람을 보낸걸 보면 그냥 그게 무엇일까 하지않고 그 천사가 나타나서 명령한 그 말을 듣고 거기에 의해서 사람을 보내니까 사람은 준비를 해가지고 떠나서 밤을 도와서 온 것 같아요. 준비를 해 가지고 석양에 선선할 때 떠나 가지고 밤새 걸어서 그 이튿날 한 낮에 오전중에 여기에 온 것 같아요. 이래가지고 그 이튿날 베드로랑 그 일행이 아마 일찌감치 일어나 가지고 그 먼길을 온 사람들이 노독을 풀기위해서 하루밤 거기서 쉰 다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가지고 당일에 당도할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하겠으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걷게 했는지 혹은 무슨 말을 가지고 와서 타고 가게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모시러 왔으니까 그냥 걸어 갑시다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이렇게 해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그 날 도착을 했더니 고넬료는 자기의 일가 가까운 친척들과 그 뿐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까지 불러서 모아놓고서 조용히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곳에 가서 묻는 말은, 여기 28절 29절을 보며는 “당신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유대인이 이방 사람과 서로 교제하지 않는 것,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것을 다 아는데 그게 위법인 것을 아는데 내가 특별한 어떤 계시에서 하나님이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이것 때문에 내가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습니다. 나를 무슨 까닭으로 불렀느냐?”고 물었어요. 그래 30-33절이 고넬료가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한 것이 올시다. 즉 환상을 본 것을 그대로 다 이야기하고 그 대답에는 마지막에 “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어요. 자기네가 베드로 앞에 있습니다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오늘 읽은 34절로부터 43절까지 이 고넬료의 그 일족과 거기 앉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올시다.

전할 때 받은 바 강렬한 인상을 먼저 이야기했어요. 내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취하시는 표준은 외모가 아니고, 즉 형상이 유대 사람이거나 이방 사람이거나 당신과 같이 로마 사람이거나 이런 것으로서 따지지를 아니하시고 오히려 어떤 나라 사람이 되었든지 각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자를, 당위를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대로 늘 준행하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히브리 종교의 대표적인 용어죠.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고 또 두려워할 줄 알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뭐며 어떻게 선을 행할 것인가, 남을 사랑하는 것도 성경에 의라는 말로 표현했어요. 그것이 그 가령 그 사람이 그 재물을 흩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었다. 인류애에 근거둔 행동이지마는 그것을 단순한 자비라 하지 않고 “그 의가 영원히 있나니라” 해서 의란 말을 써요.

의라는 말은 아주 광범한 말로서 사랑이든지 인자든지 긍휼이든지 혹은 참는 것이든지 혹은 용기 있게 나가는 것이든지 또 옳게 판단하고 의를 좇아가는 모든 것을 종합해서 구체적으로 실천적으로 행동할 때 의라는 말로 표현했어요. 이게 성경의 용어이고 구약에는 특별히 그것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그러한 사람이 그렇게 정당하게 바른 품성과 바른 도덕적인 생활과 또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바른 일들을 바르게 하느라고 애쓰고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의인이라, 그래서 아브라함도 의인이라, 롯도 의인이라, 노아도 의인이라 이런 의인이라는 말로 거기다 붙이는 거요. 그러니까 그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당신네들을 보고서 깨달았다. 나를 그 기이한 환상으로 먼저 가르치시더니 이렇게 깨달았다 했어요.

그 다음에 한 말씀이 차례 차례 있는데 오늘은 그 경위, 가령 환상을 봤다든지 하는 그것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고넬료의 집에까지 인도하실양으로, 그렇지 아니하면 강렬한 유대주의적인 사상 가운데서 그냥 주저 앉아있는 베드로가 이렇게 이방 사람의 집에 썩 들어오지 아니할 것이 분명하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가 이방사람의 집에라도 와서 하나님이 명하는 대로 행할 수 있게 그의 사상적인 입각지(立脚地)라는 것을 시정해 주신 것이오. 너는 부정하다 했고 너는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관념하에서 차별을 했지만 이제 하나님이 한번 손을 드사 정결케 했으면 다시 네가 전통적으로 가진 관념하에서 판단하는 그것은 효과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하지 말라고 한 까닭에 내가 여기에 왔다는 고백을 했던 것이오. 고넬료에게 말할 때... 그래 이제 처음 인상은 하나님이 사람을 외부의 형식, 그게 가령 형상이라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시각적인 형식 뿐만 아니라 그의 가지고 있는 어떤 생활의 스타일도 외모라는 것이오. 가령 그것이 유대적인 스타일, 양식, 그것이 외모예요. 형식이나 양식이나 이런 것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취하지 아니한다 하는 것을 강하게 인상 받은 것으로 이야기 한 다음에 이 베드로가 이제 해나가는 말을 볼 것 같으면 몇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어요.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되 제일 먼저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라.” 즉 “만유의 주”라 했어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믿고 살았던가를, 믿고 이야기하는가를 여기에 표시하는 것이오.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그것을 당신이 알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다 그 이스라엘 자손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보내신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요한의 세례를 반포한 그때 이후로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이올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오. 그것은 당신네들도 이미 아시거니와 그건 무어냐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신과 권능을 기름붓듯 하셨으며”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성신이 기름붓듯이 부음받아서 충만하였다 하는 것이오. “하셨으매”(저가) 지상에 있어서의 생활을 잠깐 표시하는 것이오. “저가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그 착한 일이란 곧 마귀에게 눌린 세력에서 벗겨 주시는 일이다. 마귀에게서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그 마음이 흑암에 눌렸든지 육신이 악으로써, 육체의 악으로써 눌렸든지 그걸 다 고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와함께 하셨음이라.”

여러분 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 주의하세요.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계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그 막연한 추상적인 용어를 쓴 것과 다른 것이예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 뜻에는 몇가지가 있어요. 하나님의 보호가 그와 함께 했다든지,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가 그에게 함께 했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 더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신이 그와 함께 했다든지 그런 정도의 이야기예요. 그러나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할 때는 그는 사람이었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또 한면 같이 계셨다 그말이예요. 그는 디엔드로포스(theanthropos)라 말이예요. 하나님-사람, 신인(神人)이라는 말, God-man이오.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다. 그게 하나님이 그에게 함께하셨음이라.

그러기 까닭에 신인이 행하여 하실 일을 마땅히 하신 것이올시다. 우리는 유대 사람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을 같이 보고 또한 증참한 까닭에 우리가 그의 증인이올시다. 베드로는 자기가 그의 증인이다고 했어요. 그렇지 만은 그 다음에 한 이야기는 이러한 신령하고 숭고한 그분과 선을 행하고 마귀의 세력에서 사람을 건져내신 그분에 대해서 저들, 막연히 저들이라고 했지만, 로마사람들이라는 말보다도 악당들, 특별히 유대사람들이오. 저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했어요.

그 다음에 40절에는 그의 부활을 이야기한 거요. 즉 복음 사실을 다 여기에 포함해서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셨다 그거요. 그런데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그냥 다 공개적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고, 모든 백성에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그것을 나타내 보이시는 까닭이 있는 것이오. 본 사람은 그에 대한 증거자란 말이오. 그러니까 그 증거자, 그 나타내 보이신 그 사실을 후일에 증거해야 할 그 증인들, 그럼 그 증인들이 누구냐 하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에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 증거인데 우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무엇보다도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셨을 때 그 오후에 우리는 만나서 함께 모시고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같이 음식을 먹을만큼 분명하게 우리는 보았고 같이 회합했고 같이 지냈습니다.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분은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전도의 내용에 또 하나 우리가 전도란 지금 사실을 증거하니까 증인이니까 증거를 하는거요. 어떠한 예수님이었나? 신인이신 예수님, 땅에서 생애를 보내셨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붙들려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셨다. 그 다음에는 보이시되 그것을 증거할 사람들인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렇게 했지요?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명령하여 백성에게 전도를 하게 하지마는 그 내용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며는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분이 곧 이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게 했다. 여기서 죄에 대한 것을 논하는 거요. 재판장이오. 신자도 또 죽은자까지라도 마지막에 심판의 부활, 생명의 부활은 다 일어나서 그에게 재판을 받을 것이고 그 행한대로 그에게 모든 공로에 따라서 또한 판단하실 것이다.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분이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고 저에게 대해 우리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를 하는데 모든 선지자들이 하는 증거는 그럼 무엇이냐?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그가 누가 됐든지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셨느니라”고 얘기 했어요.

그럼 여기서 예수님은 만유의 주 예수라 하고 그가 땅에 계셨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 분이었다. 또 흑암의 세력의 총대표인 마귀의 세력에 눌린자들을 건져 내 주셨다. 그렇지만 저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려 내셨고 살아나신 그분은 당신을 보이되 아무에게나 한 것이 아니고 그걸 증거한 우리들에게 즉 부활하신 다음에 함께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명하사 가서 전도를 하되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으로 되신 분이, 재판장이신 그분이 또 이분이다 하는 것을 일러 주게 했고, 선지자들은 일찌기 무어라고 증거했는고 하니 저를 믿는 사람들은 그가 누가 됐든지 그 이름을 힘입어서 죄 사람을 받는다고 증거한 그 예수다. 그 예수를 지금 소개하는 것이오. 그 다음에 44절로 끝절까지 보며는 그 결과는 어찌되었나? 이 말을 여기까지 했지 이 말을 좀 더 보태서 무엇이 있을른지 우리가 알 수 없는데 그것만으로도 메시지 내용은 사신(使信)의 내용은 벌써 충분했다 그말이오. 이 말을 할 때 그 사람들 위에 성신님의 특별한 강림의 자태가 증험할 수 있게 자기네가 틀리지 않고 그를 확인할 수 있게 내리셨다 그말이오.

항상 그런 스타일로 성신님이 꼭 내리신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순절 때 그 큰 성신 강림의 사실의 그 결과를 어떤 식으로 보였는가 말이오. 뭐지요 그 결과는? 각국 방언을 하고 그 방언들이 무엇인가를 거기 왔던 사람들은 알아들었고, 하되 아무 소리라도 그냥 중얼거린 것이 아니고, 그것은 반드시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할렐(ללה)의 어떤 부분들을 각국방언으로 하게 된 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그들이 그것을 곧 알아 들었단 말이오. 그런데 여기서도 여기까지 말을 할 때,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성신님이 거기 이 말을 듣던 모든 사람에게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친구였든지 그의 식구였든지간에 그들 위에 다 내렸다. 내려가지고 그 방언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을 방언으로써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말이오.

그러니깐 이것을 보고서 베드로와 같이 온, 그 할례받은 사람들, 즉 유대주의적 신자들도 깜짝 놀랐어요. ‘원! 하나님이 할례받지 않은 저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받으셨다는 확실한 증거로 성신을 내려 주셨는가!’ 이 “이방인에게도 성신을 보여주신 것을 인하여 놀랐다.” 기이하게 생각했다, 놀랐다 그 말이오. “그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그 사람들이 들으니라” 그랬어요. 역시 할렐을, 하나님을 높이 찬양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 결과로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이 우리와 꼭 같이 성신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준다는 형식을 이제 금할 수 있느냐?’ 실질과 큰 사실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증명되는데도 사람이 제도로써 그것을 막는 법이 어디 있느냐? 누가 능히 세례줄 것을 금할 권위가 있느냐? 해놓고 거기에 아마 같이 동행한 사람들에게 명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접붙이는 세례를 그들에게 다 주었어요. 그것이 중요한 이야기올시다.

지금 그것이 대개 여기 있는 내용의 개략인데 이 개략 가운데서 우리가 몇가지 보십시다. 몇가지 10장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이장에 일어난 이 사건이라는 것은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데 어떤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줘요. 그러면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보이시고 생각하게 하시고 생각하던 나머지 고넬료에게서 보낸 사람들이 와서 그 사정 설명하는 것을 듣고 베드로가 거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을 알고 비로소 깨닫고 곧 그들과 함께 갈 것을 작정하고 그들의 노독을 풀기 위하여 하루 거기서 쉬게 한다음 이튿날 함께 그들과 가이사랴로 가서 이방인의 집, 고넬료의 집에 자기가 온 이야기를 내가 유대사람이다. 유대사람의 법을 지켜온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정결케 한 것을 불결하다 하지 말라고 했던 까닭에 내가 왔으니 왜 나를 청했는가 라고 물어서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여기 볼 것 같으면 성신께서 가르치심이 베드로에게 그런식 환상으로 가르쳤고 또 사정이, 환경이 그에게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어요. 그런걸 그렇게 깨달을 때는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것같이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가 있는 까닭에 깨닫는 것이지 그냥 덮어놓고 “아, 이것이다” 하고 얼른 정하지 못하는 것이오. 철저히 논리적으로 규명할려고 하면 가령 자기가 그런 환상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 다음에 고넬료에게서 보낸 사람들이 와서 무어라고 말할 때 그것이 그 환상의 의미인지 그 환상의 의미는 별다른 곳에 또 있는지 의심을 할려면 할 수 있는 것이오. 그건 절대로 빈틈없이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이다고 확정하기 어려운 것이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성신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장하심을 받는 위치에서 자기가 기도하고 본 환상에서 보자기에 있는 여러가지 짐승, 결, 불결의 짐승들을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해가지고,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들을 내가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자기가 유대 주의를 잘 지켰던 것을 이야기 할 때, 네가 그 유대주의 지켰다는 그것이 어느 때는 무용하게 된다. 하나님이 만일 깨끗하게 한다면 너는 그래도 더럽다고 하겠느냐? 대체 최초에 더럽거나 깨끗하게 정하신이가 누구냐?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시면 네가 그래도 더럽다고 하겠느냐? 그런 논리요. 그래서 거기 대해서 그렇다, 원래 결, 불결이라는 가치 판단의 표준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의한 것이지 그것이 생래로 자연스럽게 비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비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분명히?

가령 그 사람들이 불결하다는 짐승을 보더라도 오늘 날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반드시 그 짐승이 불결한 것은 아니오. 파충류는 우리가 불결하게 느껴지지마는 토끼 같은 놈, 발굽이 갈라졌다 어쩌다해서 또 뭐 그런것 사반같은 것 이런 걸 볼 때는 뭐 오히려 애완적으로 볼 때나 아름답고 깨끗한 놈도 있단 말이예요. 돼지는 그렇다고 하겠지마는 그 외에 산에서 뛰는 여러가지 짐승의 불결하다는 것들은 우리 보기에는 대단히 사랑스러운 것들이 있는 것이예요. 심지어 요새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큰 구렁이를 보고도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건 어찌 됐든지 그 심미의 표준이라는 것이 사람들에 따라 다른거요. 사람들에 따라서... 그러니까 최종의 절대적인 표준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정하시는거요. 이스라엘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중대한 교훈과 큰 뜻을 가르쳐 주시려고 짐승을 가지고 나눠준거요.

그런데 그런 것을 여기서 환상중에서도 보고 깨닫고 둘째는 자기가 받은바 거룩한 사명이 있는 거요. 베드로는 그 사명에 대해서 소홀히 하려고 한 사람은 아니예요. 그 사명은 뭐냐? 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하는 것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서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을 해야 해요.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게 예수님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내린, 사도들에게 내린 위대한 사명(The great commisson)인 것이오. 그래 그것이 위대한 명령이오. 그런데 그 위대한 명령대로 다 지금 시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건 언제고 어떻게 해야 할텐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베드로에게는 중대한 장벽이 하나 딱 걸려 있는게 있어요.

그건 유대주의라는 것이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사람으로 이방사람과 어떻게 접촉하며 이방사람을 어떻게 무슨 조건하에서... 그러면 유대사람으로 유대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사회로 즉 거룩한 새로운 오이코노미아의 사회로 맞아 들일 것인가? 여기서 발생한 이론, 결국은 추출된 이론이라는 것은 할례를 주자는 것이오. 이방사람도 마땅히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고 일단 선민의 테두리에 들어와 가지고 거룩한 이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새로 받아라. 이러한 소위 쥬다이져(Judaizer), 유대주의화 운동자들이오. 이런 사람들이 초대교회에 중대한 장벽 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유대주의라는 무서운 철벽 안에다가 복음 선물을 딱 가두어 놓고 그리로 들어오면 너희가 자유롭게 얻을 수 있지만 이것이 밖으로는 안 나간다는 무서운 주장과 그러한 행습이, 행동이 한개의 큰 사회 세력으로 형성되어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이때쯤이면 교회가 선지 가깝게는 한 5년, 좀 멀다면 한 10년쯤 된 때요. 생각건데 아마 AD30년 정도. 교회가 처음으로 섰던 그때부터 한 10여년 지났다고 할 것같으면 AD40년정도 되었을 때 이런 운동이 발생되었을 것이오. 그래서 교회의 경영이라는 건 유대주의학자들의 주도적인 세력하에서 움직여 나갔던 것이오. 이것이 무서운 사실이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한번 큰 충돌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생겨야 할 것이었어요. 그 충돌의, 발생한 큰 격돌의 한 가운데에서 앞장 서 가지고 싸운건 물론 사도 바울이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하여 크게 기독교 역사상 금을 그은 획시기적인 사실에서 판단되었던 것이 예루살렘의 공회라는 것,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것이올시다. 그게 주후 50년, 교회가 선지 20년만에 결국은 그 때 오랬동안 곪았던 것을 터트리는 판이오. 거기서는 맹렬한 논쟁들이 오고 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맹렬한 논쟁이 오늘날에 현세로 기독교 역사상 큰 사실이 케쏠리시티(catholicity), 그 카토릭성, 즉 보편성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 그것이 그렇게 굉장한 논쟁이 될만한 사실이겠는가? 하지마는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눈으로 볼 때는 유대주의적 세력이 기독교 전체를 차라리 모나폴리(monopoly), 전매특허를 딸려고 쥐고 앉았었던 시대란 말이오. 모두가 유대사람이오. 사도들도 다 유대사람이오. 이방사람 하나라도 낀 일이 없어요. 그런고로 그 세력은 다 유대주의로 흘러가고 만거요.

이런 무서운 사실이 앞으로도 계속할텐데 앞으로 계속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거룩한 경륜과 계획하에서 우선 지금 교회가 선지 5년으로 10년 사이에 벌써 이런 초석을 놓기 시작한 거요. 그런고로 이것이 말하자면 유대주의의 철벽이라는 일각을 무너뜨리고 복음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그 효시(嚆矢)의 이야기올시다.

이러한 큰 중대한 의미를 포함해서 성신님은 베드로를 선택해 가지고 쓰시는 거요. 왜 베드로를 선택하느냐? 이건 유대주의자 아닌 어떤 바깥의 다른 사람들이 하면 싸움이 안되는 것이오. 또 사도들 가운데서 이런 문제가 발생되어 가지고 철벽을 뚫고 나가야 해요. 그러려면 유대주의자요 사도 중에 있어서는 저명하고 적극적인 인물인 베드로를 선택하셨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그럴듯하게 그렇겠다고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도 마땅하게 느껴지는 것이오. 요한이나 마태나 바돌로매나 다른 사람을 썼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베드로를 써 가지고 서로 자신의 문제와 동시에 기독교의, 하나님의 새로운 오이코노미아의 문제를 여기서 크게 부각시켜 가지고 큰 돔을 하나 세우고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역사적인 행보를 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이 그렇다고 해서 유대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했거나 해탈한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이 사도 베드로는 한 AD44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두번째 올라 왔다 돌아갔죠? 그후에 베드로가 아마 안디옥을 방문한듯해요.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서 14절을 보며는 바울 선생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하면서 책망할 일이란 것은 유대주의와 문제에 대한 중요한 일이오. 사건--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사건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안디옥에 오니까-- 벌써 거기에 이방 사람들이 교인들이 되어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것이 한 2년쯤 후가 되었을 거요. 즉 42년경에 베드로가 가서 새로 그 이방 사람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에게 큰 사도로서 환영도 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는데서 이야기만 하는 정도가 이닐 것 아니예요? 자연히 음식을 같이 먹자, 그러면 그때 ‘예, 당신은 이방 사람이니 안되겠오. 암만 기독교인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주의요’하고 유대주의를 내세워야 하는가? 기독교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그 가르침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내세워야 하는가?

베드로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사람인 까닭에 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을 절대로 회피하거나 사양하거나 할 처지가 못되요. 모든 것을 따져 볼 때 같이 음식을 먹었지요. 그런데 유대 사람은 이방 사람하고 교제를 한다든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유대법으로는 위법이란 말이오. 아까 고넬료의 집에서도 말을 하듯이 그랬으면 괜찮지만은 예루살렘 감독 야고보, 이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요. 예루살렘의 감독 야고보가 사람을 보냈어요. 이 때에 온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주세력을 가지고 있던 할례파, 할례를 받고 유대주의적인 색체를 강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들인데 베드로가 거기 있으니까 누가 와서 유대에서 형제들이 왔습니다. 아무게 형제, 아무게 형제가 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베드로가 난처하게 됐거든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할례파들인데 필시 비난을 굉장하게 하고 막 욕질을 퍼부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란 말이오. 어쩌면 좋을까 하다가 슬그머니 안먹고 싶은척하고 일어나 버렸다 말이오. 이게 대사도 베드로를 일어나게 했어요.

왜냐? 그속에 철저히 기독교의 가지고 있었던 보편성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라든지 교회의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속성 케솔리씨티(catholicity)라는 것이 아직 들어가지를 않았어요. 이래 가지고서는 슬그머니 일어나니까 거기에 있는 다른 몇사람들도 거기에 유혹되어서 함께 일어나고 그러니까 같이 음식먹던 사람들에게 있어 기가막힌 일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게 하는 저것이 지금 가짜 사랑이었나? 저 친절이 가짠가? 아까는 그렇게 형제, 형제 해 가면서 모두 그러더니... 그러니까 바나바도 거기 앉았다가, 바나바는 거기서 주동적인 목사 아니었어요? 앉았다가 바나바도 ‘그러면 나도 일어나야겠구먼’ 하고서 모두 다 일어났다 그말이오.

바울만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그 외식에 대해서 분개했다는 것이오.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이건 기독교의 큰 문제다. 바울과 같이 영리한 사람인 까닭에 문제가 항상 어디에 집중되었는고 하니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진행의 내용은 무엇이냐? 어떤 성격을 가졌느냐? 유대주의적인 철벽 안에다 가두어야 할 것인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케솔리씨티라는 것이 창달하고 퍼져나가야 할 것인가? 할 때 명확하게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것,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 유니버설리티, 혹은 케솔리씨티라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요. 오늘날에도 그것은 위대한 것이오. 기독교회에서 케솔리씨티를 뺀다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교회냐? 금방 문제의 하나요. 대 속성의 하나요. 교회는 거룩해야 하고 교회는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교회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거요.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유대주의라는 구각(舊殼)에다가 꽉넣어 놔 둔체 그걸 헐어 버리려고 않는다 그말이오. 이게 말이냐 하고서는 바울 선생이 베드로를 면책했어요. 거기 성경을 볼 것 같으면 물론 그건 말을 쓰려고 그렇게 쓴 것이지만은 그 면책의 내용이라는 것을 볼 것 같으면 베드로 선생 당신이 유대사람이면서 유대사람답지 않게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 왜냐하면 이방사람은 다 맞아들여야겠고 또 유대의 모든 법을 여기서는 지켜가지고 안될 것으로 하고 지금까지 살면서 그럼 이 사람들은 당신이 그런다며는 할례를 받고야 꼭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이런 주장으로 굴레를 씌우려는가, 즉 이방 사람도 유대인답게 살게 할 작정인가? 당신도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다른 말로 말하면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법에서 우리는 이탈하고 나가야만 이 교회라는 것이 바로 서겠는데 이탈했다고 스스로 그러는 사람이 이게 뭐냐? 그 사람들도 함께 집어 넣을 작정인가? 라는 논리로 면책을 했단 말이오. 그 면책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요. 14절까지.

그런데 그것이 한 AD44년경이랄 것 같으면 고넬료의 집에서 상당히 그 때는 새로운 시대적인 큰 거보를 내디딘 것같이 분명히 우리가 보이는데 그후에 불과 한 4년이나 5년사이에 아직도 완전히 이탈을 못하고 그 큰 세력에 밀려가지고서는 부지불식간데 점점 예루살렘에 있는 그 많은 신자들, 유대주의적 신자들 속에서 자기도 동화되어 가지고 들어 갔었다 말이오. 말하자면 그 사상성이 독창적으로 강렬하지를 못하고 어떤 모습이냐 하면 행동에 있어서는 발빠른 인물이지마는 사상적으로는 그냥 질질 끌려간 것이오. 이러한 문제가 베드로 사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오. 그런 일은 오늘날까지도 늘 있어요. 그때 볼 것 같으면 각각 한10년전이나 20전에 전에 고넬료 집에서 당한 일과 그때에 받은바 그 거기에 묵시에 관한 것을 그것을 가지고 맹렬하게 사도 바울의 논증에 뒷받침 해가면서 자기도 같이 과녁 노릇도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공회의 대세는 기독교의 큰 진리를 바르게 천명하는대로 들어가고 말았어요.

그러면 이런 일이 여기에 발생하지만 이 베드로 자신이 어떻게 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보는 문제인데 지금 고넬료의 집에 갔다가 그것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받은 베드로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했었나 하는 것을 조금 추적하는 것 뿐이오. 그렇다면 지금 성신께서 아까 말한 것과 같이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나타내서 새로운 오이코노미아가 어떠한 것이냐? 그것은 유대사람들이 지금까지 생각할 수 없었던, 도무지 유대사람으로 전통적인 완고에서는 상상하지 못하는 이 큰 사실들이 여기 발생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하고 베드로도 그때는 그걸 그렇게 깨달았으니 각나라 사람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는다고까지 즉 거기에 외모라는 것을, 외부의 양식이라는 것을, 스타일이라는 걸 생각지 않았던 베드로요. 그러면 그런 깨달음을 가질 수 있는거요. 성신의 가르침으로... 허나 그것을 자기가 견지하지 아니하면 대사도 베드로도, 성신의 충만함을 받아가지고 활동했던 그 사람도 어떤 방면의 좀 더 부지런하게 그걸 밀착하고 견지하고 나갈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이 생겼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는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으나 좌우간 무슨 이유로인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다시 안디옥에 가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이다 말이오.

성신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것을 우리가 배울 때 항상 우리 자신의 책임이 무엇보다도 큰 것이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성신께서는 가르치시되 그때는 순종하고 그래서 어떤 때는 획시기적인 일이지마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상의 한 초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생명의 양식이라는 그것이 우리에게 살과 피가 되어가지고 우리의 생명력을 더 발휘하게 하는 한 중요한 재료, 한 원인이 되어야 하는거요.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안되고 희미해지고 그래서 그것이 자기 전체 사상의 초석이 되지 못하고 한 때의 감격과 한 때의 교훈에 머물러 버린다 할 것 같으면 후에 다시 자기는 옛 그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쉬운 것이오. 정신적인 그 자세가 향상이 안되고 도로 후퇴해 버리기가 쉬운것이다 말이오.

성신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오. 성신님이 인도해서 이룬 일은 그 자체는 역사적인 거보요. 이 고넬료의 문제는... 그렇지마는 베드로 개인에게 있어서의 그 계시의 사실은 그게 무슨 연고일른지 그것이 귀중하게 발전된 것이 아니라 후퇴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친구인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강렬한 책을 받았단 말이오. 강렬한 규제를 받았다. 그 강렬한 비판을 받은거요. 그러고서 정신을 차리고 이번에는 예루살렘 공회에선 자기도 맹렬하게 함께 나서서 다시 전진을 했던거요.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받았던 그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문제를 생각하는데 요켄데 모든 것이 합력해서 가령 그 사람이 환상을, 그 욥바 피장의 시몬 집에서 우거하면서 지붕에 올라가서 환상을 본 것이라든지 고넬료의 보낸 사람을 만난 것이라든지 함께 고넬료의 집에가서 사정을 자세히 알고 하나님의 이루시는 일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라든지 이것이 자기에게 있어서는 다 성신꼐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결과로 되는 거요. 그런고로 가르치심이라는게 “아무개야, 네가 이거해라. 이것 저렇게 해라” 이것만이 또 그런 양식을 언제든지 바라지를 아니해야 하는거요. 그런 양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말(normal), 우리의 정상적인 생활가운데서는 없는 거요. 오늘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마는 하나님의 배제(配制:여러 종류의 약제를 배합 함)의 그 특별한 은혜가 오늘날 성신을 우리에게 보혜사로서 내주케 하시고 내주하시는 성신님의 역사로 감화하시고 또한 우릴 주장하시므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이렇게 해서 가르쳐 가시는 거요.

알게 하신다는 것, 우리가 받은 신은 이 세상 신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이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여러 것들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2장 12절 말씀과 같이 이와같이 우리를 알게 하시려고 하신거요. 그 알게 하신다는 것이 반드시 나에게 속삭여 가지고만 알게 하시는 것은 아니오. 나는 내 환경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큰 뜻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게하고 자기자신이 무엇을 받았는가를 생각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알아가는 것이오.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성신의 가르침을 받을 때 늘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어요. 첫째 우리는 자기 자신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어떤 은사를 받아서 무슨 자리에 세움을 입은자인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거요. 베드로는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이고 그것은 새로운 거룩한 경륜을 퍼칠 사람이고, 그건 지금까지 없던 일인 까닭에 거의 창조적인 새로운 일이고 그런고로 거기는 사람들이 예기치 않고 준비치 않은 것인 까닭에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던 일이오. 그런 일에 자기가 전면에 서있는 사람이라는걸 느꼈어야 하고 아마 느꼈을 거요. 이게 자기라는 것을 먼저 바로 생각해야 하고 자기를 생각할 때 아상이 없어야 하는 거요. 내 자신의 목적과 공리를 위하여야 한다는 게 없어야 해요.

둘째는 자기를 생각할 때 자기의 분수를 알고 있어야 해요. 자기가 무엇하는 사람인가 무얼 할 수 있는건가 분수모르고 부허하니 신기루 같은 이상을 꾸미고 그림을 보고 앉아있는 것은 그게 정당한 것이 아닌거요.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준비하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 해서 크고 기이한 일은 생각치 않는 것이 하나님 종들의 태도였어요. 주여! 내가 누구오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십시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겸손한게 겸손이 아니오. 자기는 자기대로 사명이 있는 것을 알았어요. 일이 너무 벅찬 것을 알았어요. 몇번 실패 했으니까 그 실패했던 원인을 후에 반추해보고 뒤돌아보고 반성해 볼 때 내가 그 임(任)에 당할 사람이 아닌 것을 아는 거요. 너무나 일은 벅차고 크다. 그리고 나는 첫째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이 지지하지 않는데 혼자 가서 지도자라고 하느냐? 그것 아주 자명한 도리인거요.

그러니까 그냥 겸손으로 한 양이 아니올시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까닭에 정직하게 고백한거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보내리라. 그 사람들의 마음을 네게로 모아 줄테다.’ 이렇게 해서 약속을 받은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뽐내고 나서는 일이 없어요. 위험이 있을때 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아가겠느냐고 할 때 그건 내가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사양하는 것은 아니오. 그것은 뭐냐하면 희생을 의미하는 거요. 마치 이사야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니까 주여 저를 보내옵소서.” 나중에 죽음을 각오하고 갔고, 과연 전설대로는 톱으로 켜서 죽임을 받은 사람이오. 그런건 있지마는 어떤 큰 일에 대해서 ‘아, 하면 보람이 있겠는데, 내 생이 가치가 있겠는데’ 그런 생각을 않는거요. 항상 겸손한 위치에 있어요. 이렇게 해서 제 분수를 알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 누구든지 자기가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말아라 그랬어요.

그러기 까닭에 이렇게 자기 분수를 안다면 자기를 먼저 생각할 것이고 다음에는 자기 환경이라는 것을 읽고 해석해야 해요. 인터프리트(interpret)해야 하는 거요. 자기 환경이 이 전체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해석할 줄을 알아야 해요. 그러면 이 환경(circumstances), 혹은 자기 가지고 있는 일 전체의 어떤 사실이든지 거기에 대한 자기의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것이 그에게 있으려면 해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재료가 있어야 하는거요. 그런 까닭에 항상 평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바 거룩한 내용이 체계 있는 사상으로 그의 안에 있어야지 편언척구(片言隻句:한 두 마디의 짧은 말과 글)가 와서 갑자기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하고 결정을 해 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서 여러가지 사상적인 기초를 가져야 해요.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나? 가정이란 어떻게 보셨나? 사회란 어떻게 보셨나? 경제란 어떻게 보시는건가? 정치란, 또 문화의 여러 양식 같은 것, 여러 다양한 각 장르(genre)이런 것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럼 우리는 어떤 도덕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어떤 전통에서 살고 있는가? 그건 바른가 그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언가? 이런 것이 다 사상이라는 거요. 하나님 나라의 건전한 사상 속에서 자꾸 자라나야 하는거요.

그래서 각 사람이 장성한 분량이 있는 것인데 그 장성한 분량에 응해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지, 덮어놓고 일양 모두가 똑같은 아이디어(idea)로서 성신의 인도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니오. 그 사람의 그릇을 따라서 장성한 분량이라는 것은 그릇이 얼마만큼 크고 얼마만큼 유용한가에 따라서 말하는 것이오. 그러면 자기를 생각할 때 아상이 없어야 하는 것과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과 또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알고 그리고 그 사명하에서 그리스도적인 품성하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바로 생각하는 것과 자기 환경이 나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떤 환경이 왔으면 여기서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야 할 것인가를 늘 바로 생각해야 하는거요.

이 환경이라는 것을 잘못 해석하면 마치 그것이 가장 권위있는 하나님의 인도인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오. 환경의 조성에는 그것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오. 내 잘잘못이 다 붙어다니는 거요. 잘했으면 그렇지 않고 잘못하면 이렇게 되고 하는 것이다. 붙어서 내 환경을 이루는 거요. 그런데 자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 없이 어떤 환경을 덮어놓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기 맹종한다면 그 큰 잘못인거요. 그렇게 하는 것이 일이 아니다고 전에도 내가 이야기했지요? 어떤 사람이 어째서 너 신학교 왔느냐 하니까 다른데 시험 다 봐서 떨어지고 그리고 문이 다 닫혔으니 할 수 없이 그 문만 열려서 들어 왔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소명있느냐 하니까 그것이 소명이라고... 그건 기가 막힌 이야기요.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해야 하고, 더 사명 의식이 분명해야 하고 남의 인생의 길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제가 제 길도 모르고 앉아서 거기 들어가서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그런 학교 거기서 해서 뭣 되겠는가? 그러면 그런 사람이 목사되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 답답한 이야기오. 슬픈 이야기이고...

그런 까닭에 사명에 대해서 우리가 해석을 할 때 그것이 그릇되이 오해를 하면 안되는 것이오. 어떤 문제가 어떻게 되었으면 첫째 거기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내가 그때 그렇지 아니했다면, 내가 좀 더 부지런하고 내가 좀 더 근실했더면 지금 저렇게 안 되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환경의 여러가지 착찹한 양상 가운데에 있는 어떠한 이블(evil)이라는 것, 악이라는 것, 혹은 결함이라는 것, 이런 것이 나의 결함과 관계가 있는 것이 많아요. 때때로 우리는 탄식해요. 하! 내가 오늘 올라서야 할 자리를 못 올라서고 잘못해 가지고 열 걸음 걸어야 할 것을 세 걸음 걸었으니 나머지 일곱 걸음은 부채(負債)다. 그 부채가 그냥 그 이튿날 또 있고 또 있고 그래서 누적된다면 나는 얼마후에 도달한 것은 도달해야 할 지점의 십분지 일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 1/10에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그렇게 생각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저기 100이라는 데를 주시려고 했지만 내가 잘못해서 나는 이걸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의 은혜가 겨우 그 정도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내 잘못이 많아서, 내 부채가 많아서 그렇게 되는 거요.

그러나 그런데에 그런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오. 기왕 나는 부채를 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 죄를, 내 부채를 주여 용서하시옵소서. 첫째 부채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빈곤이나 잘못이라는 것을 나에게서 토죄(討罪)하실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공로로써 먼저 죄책에 대해서 책망에 대해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거요. 책망에 대해서 용서를 받으면 진 부채가 홀연히 다 충족이 되느냐 하면 충족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결국은 그런 것이 나라는 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거요.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의 오늘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요. 훨씬 이 보다는 하나님 앞에 더 충실하고 하나님의 그 맡기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야 하지만 겨우 되다 못되어서 이 정도다 하는 것을 느끼고 살아라 그거요.

그러더라도 하나님이 쓰실 때는 기이하신 손으로 역사하시는 거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실패하지 않으시는 거요. 나를 들어서 쓰고 내가 쓰인 부분은 아마 백분지 몇이나 되는가 하는 그런 정도지만 결국은 상은 내가 마치 다한 것 같이 주시는 거요. 이것이 우리가 이 현세에서 끝날 수 없는 우리의 부채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영화를 입히시고 우리에게 상을 주셔서 영광의 세계에서 계속적으로 주를 봉사하게 하시는 거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주님은 여러 번 그것을 이야기하셨어요. 상을 받는다는 것과 벌을 받는다는 문제... 그래서 영광의 세계에서 상을 가지고 살 때 땅 위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 축적이 있을 때 그만큼 더 들어와서 많은 것으로 맡길테니 이제는 주인의 즐거움을 누려라. 많은 것으로 맡기마.

여러분, 이런 거룩한 도리에 의해서 자기라는 것을 늘 반성하고 그러나 현재 내가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일을 할 그 주체는 모양이 이꼴이지만 이런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이것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면 이 환경에서, 이 능력에서, 나의 이 용력에서, 용량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내가 탄식만 하고 앉았어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오. 탄식은 앞으로 자꾸 다시 반복해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그릇된 역사적인 원인을 자꾸 심는 일을 이제는 지양해 버리도록 하는데 유효한 것이지 그냥 앉아서 센티멘탈만 한다는 것은 소용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면 가지고 있는 자본이 이 뿐이다. 이것만이라도 가지고 그러면 최선을 여기서 하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이하신 손으로 인도하시는 거요. 최선을 해 나가려고 할 때.. 그것도 우리가 믿는 거요. 우리에게 있는 그것만 가지고 전부인양 써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못나고 힘없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맡기면 어리고 유치할 지라도 세상의 지혜자에 능가하는 거룩한 일을 자꾸 해주시는 것이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특별히 선택함을 받은 특권들인 것이오. 이런 큰 은혜가 있는 것이오.

성신님의 인도는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서 이룰 바를 우리 내부에서 인도하시지만 동시에 성신님의 그 은혜의 역사는 우리 외부에서라도 내 스스로가 자기의 용량 때문에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도 필요할 때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려고 할 때는 이루어 버리시는 것이라 말이오. 이와같이 성신께서는 또한 함께 일하시는 것이지 나만 시켜가지고 일 시켜 가지고 내가 내놓으면 그것이 결론의 전부는 아닌 거요. 여기에 은혜로우시고 감사하신 주님의 거룩하신 마련, 준비가 있는 거요. 나는 결국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대단히 적은 부분이지만 주께서는 마치 많은 부분을 내게로 회향(回向)해 주시는 것 같이, 마치 내가 할 것 같이 나와 관계되어서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거란 말이오.

여러분, 그런 예를 간단한 데서도 볼 수 있어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우리가 그 일을 내 스스로 하면 내 가지고 있는 에너지나 용량에 의해서는 어떤 일정한 정도밖에 못하는 거요. 그러나 어떤 자연적인 세력이라는 것이 가담해서 큰 일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오. 자연 세력이란 것이 가담할 수가 있어요. 사람은 이것을 우연이라 그러고 재수가 좋았고 그러고 운세가 좋았다고 말해요. 세상 사람은 그래요. 세상 사람은 그런 알지 못하는 것을 많이 기대하고 있는 거요. 재수가 좋으면, 운수가 좋으면 하고... 하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움직이되 하나님께서 마치 내 자신을 그 일에 올라타고 할 수 있도록 주위를 주장하시고 타고 갈 수레를 만들어 주시면 나는 그것을 타는거요. 말하자면 그 전체의 환경과 역사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그 위에다 올려 앉히면 나는 타고 갈 수 있는 것이오. 그러지 못할 때는 못가는 거요.

그런 까닭에 이와같은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기묘하신 손 안에서 움직이는 까닭에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라는 것은 나에게 있지만 동시에 어떤 일의 계획과 운영이란 건 나 이외에까지 다 미쳐서 전체 위에서 역사해 가는 거요.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생애 가운데 나타나는 큰 도리인 것이오. 우리가 가령 거룩한 도리를 알았다고 합시다. 거룩한 도리를 알았지만 그것을 남에게 전달한다고 할 때 가령 책을 써서 냈다고 해요. 책이 얼마만큼 나갈지는 우리는 아무 예측도 못하는 거요. 어떤 예상을 한다고 하지만 바다에 뭘 뿌리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어디서 어떤 세력이 어떻게 움직여서 그외에 그때의 시세의 불리라고-도는 말에-시세 불리해서 아주 잠겨 버릴 수도 있고 그런거요. 그것 다 알 수 없는 거요. 그러나 꼭같이 유용하고 꼭같은 정도의 것인데도 시세가 좋아서 싹 나가는 일도 있고 시세가 불리해서 갇혀 버리는 일도 있고 그런거요.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내가 아무리 지혜있다고 하더라도 미리 알고 미리 조처 못하는 거요.

그러기 까닭에 전능하신 손에 딱 맡기고 나의 당위를 하고 나는 내 길을 간다 그것이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이것을 싣고 갈 거대한 시세를 역사적인 현실에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 사람들의 마음에든지 그러면 어떤 큰 움직임이든지 거기다 그 놈을 탁 놓아서 밀고 나가시는 거란 말이오. 여러분, 그런 일을 생애 가운데서 많이 당해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기묘하신 손으로 그때 그런 일이 없었다면 도저히 이것이 이렇게 될리가 없다 하는 것이 많이 있는 거요. 우리는 거의 그런데다 많이 그 혜택을 받고 살아요. 그런 혜택을...

그렇다면 그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령 어떤 컨커런스(concurrence)라고, 꼭 그때 적시에 발생하는 일이 있어요. 적시에 발생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우연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필연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거번먼트(government), 통치의 한 방법인 거요. 컨커런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일이 동시에 발생해서 서로 협조해 가지고 일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말이오. 어떤 사람이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을,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지 아니했더면 그 일생이 지금 그 후의 그 사람의 생애에 비춰볼 때는 전연 별다른 길로 갈 뻔 한거요. 그런 일도 많이 있는 거요. 그런데 그의 인생의 길을 가다가 누구를 만났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아주 중대하게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란 말이오. 인생의 행로가 그렇게 달라지는 거요. 그런 일 얼마든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지요? 그 용케 어떻게 그때 그렇게 만났나? 언제든지 그 사람이 기다리고 앉았다가 만나는 것은 아니오. 이것은 컴 어크로스(come across)하는거요. 처음 만난 그것 때문에 그때부터는 그의 인생이 전연 새로운 것으로 시작된 것이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놓고 볼 때도, 이런 걸로 볼 때도 하나님의 그 기묘하신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은 그뒤에 하나님의 기묘하신 준비와 그 은혜의 모든 배치가 있어 가지고 그와 더불어 합작해서 일을 해나가신 거요. 여기서도 고넬료의 집 안에서도 준비하게 하신 것이고 그것도 환상으로, 베드로에게도 준비하게 하신 것이오. 그리고 여러가지 모든 사실들이 거기 베드로로 하여금 거기 가서 그런 역사적인 거보를 내디디게 하신거요. 그러면 그런 사실들을 우리가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신이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신다 할 때는 거기에는 부르심의 큰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그때 자기의 그 걸음이 욥바 시몬의 집에선 내디디고 말을 탔든지 걸었든지 가이사랴를 향해서 걸어가는 그 걸음이 역사적인 거보가 될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베드로 자신도 몰랐을 거요.

이렇게 자기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큰 의미를 자기 발걸음 하나 하나에다 벌써 족적(足積)을 남겨 놓고 간 거요. 이러한데서 하나님의 성신의 인도의 기묘한, 신비한 점을 본 거요. 이런 신령한 거룩한 뜻을 알고 먼저 그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해 나가신다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지적이어서 우리들 자신이 성실하게 아상이 없이 자기 분수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거룩한 뜻을 늘 찾고 그렇게 하고 그 거룩한 말씀의 뜻은 개인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해석하고 하는 그것을 따르지 않고 교회가 전통적으로 고귀한 유산으로서 받아 내려온 것을 전할 때 그 테두리안에서 전하고, 이렇게 해서 비끄러진 생각을 아니해야 된다 하는 것들을 우리가 주의합시다. 다음 시간에 우리가 또 생각합시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이여, 주님의 극진하신 사랑은 저희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너무나 많은 부채를 지고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결핍을 가지고 있어서 좀 더 쓰일 가치가 없는 것들이지만 극진한 사랑으로 오셔서 기묘하게 그 거룩한 은혜로 인도해 주시고 만날 사람을 적시에 만나게도 하시고 또 생각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보여 주시기도 하시고 인도도 해 주신 그 주님의 여러가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할 때에 만만이나 감사하옵나이다.

이 거룩한 도리를 더 깊이 깨닫고 저희가 성신의 인도함을 늘 받고 살게 하시고 혹여라도 아상에 의해서 자기의 궁리와 자기의 열정을 실현해 보려고 하는 그릇된 태도를 버리게 하시고 자기의 분수 너머의 생각을 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또한 자기에게 부탁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끝까지 충성스럽게 해 나갈 수 있게 저희 주위 환경의 여러가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깨닫고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마치 베드로가 찾아온 고넬료의 집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때, 그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그때 당면했던 자기의 환경이 주님의 뜻을 따라서 샤론의 들을 건너서 가이사랴로 가라고 하신 것을 곧 느끼고 알고, 또 많은 사도들이 다 자기의 환경과 자기의 당면한 문제를 명석하게 해석하고 꺠닫고 나간 이 사실을 알고 자기의 환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할 줄 알도록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항상 자기를 단속하고 바로 거룩한 사상을 포회하여서 문제에 임했을 때 문제를 하나님의 나라의 안목으로 보고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도리를 더 깊이 깨달아 알게 하여 줍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82.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