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4권 2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3. 22. 20:34

       12. 마귀는 죽음의 중보요, 그리스도는 생명의 중보.

 

      15. 따라서 신성모독적인 모방 행위나 불경견한 의식이나 마술의 주문으로 영혼을 정화하거나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는 없다. 거짓 중보는 사람들의 영혼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만할수록 더욱 사악한 감정을 불어넣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는다. 이런 감정은 덕성이 높이 비약하도록 그 날개를 강화할 수 없고, 도리어 죄악으로 더욱 무겁게 만들며 아래로 떨어지게 한다. 사람들의 영혼은 스스로 높아진 듯이 여길수록 더 깊이 떨어진다. 그래서 겸손한 주님을 경배하려고 별의 인도를 받아 온 동방박사들이 하늘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같이(2:12), 우리도 오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길은 겸손한 왕이 가르치신 것이며, 겸손한 왕의 대적인 교만한 임금이 막을 수 없다. 우리가 겸손한 그리스도를 경배하도록, 하늘은 우리에게도 하늘 영광을 선포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19:1,4).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음의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이 길의 중보인 마귀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설득하며, 죽음 속에 거꾸로 집어던진다. 그도 그 자신의 한 죽음을 이용해서 우리를 두 번 죽게 만들었다. 그는 불경건으로 그 영이 죽었으나 육신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를 설득해서 불경건으로 몰아넣었으며, 그 결과로 우리의 육신이 당연히 죽게 만들었다. 우리는 죄많은 설득으로 영의 죽음을 원했고, 공정한 정죄로 육신의 죽음이 우리를 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다"고 했다(지혜서 1:13).

      하나님은 죽음의 원인이 아니셨고, 그 지극히 공정한 보응으로 죄인에게 죽음을 내리셨다. 재판관이 범죄에 대한 공정한 보복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중보가 우리를 보내면서 자기는 가지 않은 곳, 바꿔 말하면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 주 하나님께서는 치료제를 도입(導入)하셨다. 다만 하나님의 숭고한 공의의 신비하고 숨은 결정으로 마귀는 그 치료제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 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와야 했다(고전 15:21,22).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육신의 죽음을 영의 죽음보다 더 피했다. 즉 그들은 벌의 원인보다 벌을 더 피했다.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 데는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아주 적지만, 죽지 않겠다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을 한사코 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 따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우리는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믿음으로 막을 수 있는 불경견이야 말로 심히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나가서 우리가 온 종점에서 우리를 만나시지만, 우리가 온 길을 오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죄를 통해서 죽음으로 왔고, 그는 의를 통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 제물로서 겪으신 것이다.

 

      13. 그리스도는 자진해서 죽으셨다. 생명의 중보는 어떻게 사망의 중보를 극복하셨는가? 마귀는 그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게 만든다.

 

      16. 영은 신체보다 우수하며, 영의 죽음은 하나님이 영을 버리신 것을 의미하며, 신체의 죽음은 영이 신체를 버린 것을 의미한다. 신체의 죽음이 벌이 되는 것은 영이 원치 않으면서 신체를 떠나기 때문이다. 영은 하나님을 자진해서 버렸기 때문에, 원치 않더라도 신체를 버려야 한다. 그래서 영은 자체에 어떤 폭력을 가하지 않고는, 그래서 몸을 죽게 하지 않고는 원하는 때에 몸을 버리지 못한다. 중보의 영은 죄에 대한 벌 때문에 그의 육신이 죽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는 원치 않으면서도 육신을 버리신 것이 아니며, 원했기 때문에 원한 때에, 그리고 원한 대로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육신과 섞여서 하나가 되었으며, 그래서 "나는 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얻기 위하여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신다(10:17,18). 복음서에 있듯이, 그는 우리의 죄의 모습을 보여주는 최후의 말씀을 하신 후에 즉시 운명하셨고, 이 일을 현장에서 본 사람들은 심히 놀랐다(15:37,39). 십자가에 걸린 사람들은 보통 오래 고통하다가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에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사람들을 안식일이 되기 전에 십자가에서 내리기 위해서 그 다리를 꺾어 곧 죽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운명하신 것을 보고 그들은 놀랐다(19:31-33). 그를 장사하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또 역시 이 일을 알아보고 놀랐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15:43-45).

 

      17. 죽음의 중보인 사기꾼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중보로 가장하고, 사람들을 정화한다는 구실로 신성모독적인 의식과 제사로 교만한 자들을 끌어간다. 그는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거나 자기의 죽음에서 부활할 수 없다. 참으로 그는 한 죽음을 우리의 두 죽음에 이용했지만, 물론 한 부활도 - 우리의 갱신의 신비가 되며 종말에 있을 부활의 예표가 될 그런 부활을 - 사용할 수 없었다. 영이 살아 있어서 자기의 죽은 육신을 다시 살리신 분, 즉 생명의 중보이신 분께서는 자기를 믿는 사람들의 영에서 영이 죽은 죽음의 중보를 몰아내시고, 그가 그들을 밖으로부터 공격하지만 결국 실패하며, 내부에서는 전혀 지배하지 못하게 하셨다.

      또는 그는 자신을 사기꾼에게 맡겨 시험에서 구출하는 중보가 되실 뿐 아니라 시험을 이기는 모범을 보이셨다. 마귀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속에 기어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세례 후의 광야시험을 마치고 완전히 쫓겨났다. 영이 죽은 마귀는 영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내부에 침입하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죽이려는 열성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했으며, 또 허락을 얻었다. 그는 살아계신 중보가 우리에게서 받으신 부분, 즉 죽을 운명인 몸을 죽이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에서도 그는 정복을 당했다. 그는 우리의 구주를 밖으로부터 죽일 권능을 받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우리 인간들을 사로잡은 그 내면적인 권능은 죽임을 당했다. 죄 없이 죽으신 주님의 한 죽음이 많은 죽음의 많은 죄의 결박을 타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죽을 까닭이 없는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의 죽음이 해치지 못하게 만드셨다. 그는 어떤 권위에 복종해서 육신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셨다. 죽지 않으려면 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으나 죽으려고 하셨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정사와 권세를 폐하여 밝히 드러내시고 당당히 승리하셨다(2:15).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희생이었기 때문에, 정사와 권세들이 우리를 사로잡고 벌을 받게 한 이유가 된 우리의 허물은 무엇이든지 간에 주께서 모두 깨끗이 씻어버리며 말소하며 제거하셨다. 그리고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로운 생명을 받도록 예정하시며 부르셨다. 또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8:30). 이와 같이, 사람이 악마의 유혹을 받는데 찬성했으므로 악마는 이를테면 절대적인 권리로 사람을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었다. 악마는 혈육의 부패를 받지 않으므로, 사람의 연약하고 죽은 운명인 몸을 수단으로 사람을 지배했다. 사람은 심히 가난하고 허약하며, 악마는 그와 비교해서 풍성하며 강하므로 더욱 교만했다. 사람은 이를테면 남루한 옷차림에 근심 걱정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육신이 죽었을 때에 악마는 사람을 잃었다.

      그는 죄인들을 넘어지게 만든 곳에 자기는 따라가지 않았지만, 구세주를 따라가서 그를 넘어뜨렸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낮추어 우리와 함께 죽으시며 우리의 친구가 되셨다. 한 편에서 우리의 원수는 그런 죽음을 당할 수 없으므로 우리보다 우수하며 위대하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15:13)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주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악마에게 양보하셨으므로, 악마는 자기가 주님보다도 높다고 믿었다. 시편에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나이다"(8:6)라고 한 것은 이런 뜻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정당한 권리처럼 우리를 해하는 죄 많은 자에게 죄가 없는 분이 죽으신 것은 더 정당한 권리로 그 자를 극복하며, 죄로 인해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려는 것이었다(4:8). 그리고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며 죄인인 우리를 구속하셔서 부당하게 흘리신 그의 의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심으로써, 죄 때문에 당연히 사로잡힌 우리를 해방하셨다.

 

      18.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마귀는 자기의 추종자들을 희롱해서, 자기가 그들을 정화할 중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며 정화하기보다 도리어 그의 의식(儀式)으로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며 물에 빠져죽게 만든다. 그는 교만한 사람들을 쉽사리 설득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며 조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멀어질수록 그들은 그가 더욱 더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밑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수효는 아주 적다. 만방이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치르신 희생을 경건하고 겸손하게 인정하고 믿으며, 그런 신념 때문에 그들의 원수인 마귀를 버리고 구속주에게 함께 달려간다. 마귀는 하나님의 지극히 숭고한 지혜를 모른다. 하나님은 마귀가 격분하며 함정을 팔 때에 그를 이용하셔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적 창조가 시작하되 위의 끝으로부터 육신이 죽는 마지막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린다(지혜서 8:1). 지혜는 순결하여 모든 것을 통찰하며 아무 것도 지혜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지혜서 7:24,25). 그러나 육신이 죽지 않으며 그 때문에 터무니없이 교만하게 된 마귀를 위해서는, 영원한 불의 지옥에서 다른 종류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는 지상의 몸을 가진 영들뿐 아니라, 공주의 몸을 가진 영들도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죽으심으로써 비싼 값으로 우리를 사신 그리스도를(고전 6:20) 이 교만한 사람들은 멸시하면서, 처음 죄에서 온 앞의 죽음으로 돌아가며, 또 사람들을 가련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 그들은 또한 앞으로 마귀와 함께 뒤의 죽음에 던져질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마귀를 더 우수하다고 믿은 것은, 마귀가 그들을 앞의 죽음에 던지고도 자기는 본성이 달라서 거기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자비심으로서 그리고 내려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슴치 않고 자기들이 귀신들보다 우수하다고 믿으며, 항상 온갖 저주로 귀신들을 비난 공격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육신의 죽음을 멸시하는 그들은 귀신들에게 그런 고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체대로 있으며 변함이 없으면서도 낮은 본성을 입고 낮은 종류의 고통을, 즉 지상적인 몸이 없는 불결한 귀신들이 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다는 가능성을 그들은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들은 귀신들보다 우수하지만, 육신을 썼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데, 귀신들에게는 그런 몸이 없어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치는 제물이 죽는 데 대해서 많은 기대를 가지지만, 그 제물을 받는 귀신들이 교만한 사기꾼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혹은 깨닫더라도 그 시기하는 배신자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귀신들의 목적은 우리가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14. 우리의 허물을 깨끗이 씻는 가장 완전한 희생은 그리스도이시다. 희생에 대해서는 네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한다.

 

      19. 교만한 영들은 유일 진정하신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이 경배를 받고자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만일 하나님이 진정한 희생을 받지 못하신다면 아무리 교만한 영들일지라도 희생을 받는 명예를 기뻐할 수 없다는 것과 거룩하고 의로운 제사장이 없이는 희생을 바로 바칠 수 없다는 것과 희생에서 덕을 볼 사람들이 바쳐야 한다는 것과 허물 있는 자들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허물없는 희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희생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점을 원한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독생자 같이 거룩하고 의로운 제사장인가? 그는 원죄나 인간 생활에서 가해진 죄거나 간에, 희생 제물로 씻어버려야 할 죄가 없었다(7:26,27). 사람의 육신보다 더 적합한 제물은 무엇이겠는가? 이 죽을 운명인 육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적합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죽은 인간들의 허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정욕에 물들지 않은 처녀의 태중에 잉태되어 난 육신과 같이 깨끗한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희생 제물이 된 육신, 즉 우리의 제사장의 몸과 같이 드릴 만하며 받을 만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어떤 희생에 대해서든지 고려해야 할 점은 네 가지이다: 즉 누가 드리는가, 누가 받는가, 무엇이 드려지는가, 누가 제사의 덕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고 진정한 중보 되신 분 스스로 화목제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켰으며, 그 목적은 제물을 받은 분과 그가 하나가 되어 지내며, 제사의 덕을 볼 사람들이 중보 안에서 하나가 되며, 중보되신 분 스스로 제물을 드리는 자와 드려지는 제물이 되시려는 것이었다.

 

      15. 자기의 의로 정화되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교만이다.

 

      2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의로 깨끗하게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노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로 그 교만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럽혀진다. 교만처럼 하나님의 법이 금하는 죄가 없으며, 반대로 마귀는 그에 대해서 가장 큰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마귀는 낮은 것으로 인도하며, 위에 있는 것으로 가는 길을 막는 중보이기 때문이다. 마귀가 파는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로 가거나, 그가 광분할 때에는 주의 십자가로 극복해야 한다. 마귀가 죄된 백성을(즉 아말렉 같은 백성; 삼상 15:18) 이용해서 광분하며,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막을 때에는, 모세가 두 팔을 편 것이(17:8-16) 십자가의 예표가 되었다. 이 사람들이 자기의 의로 자기를 정화하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은, 그들 중의 일부가 마음의 눈으로 피조 세계의 한도를 넘어 변함없는 진리의 광명의 극히 작은 부분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들은 믿음만으로 살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하며 조롱한다. 그러나 그 교만한 사람이 그렇다고 해서 나무로 된 배에 오르기를 부끄러워하며, 바다 건너에 있는 고국을 멀리서 보기만 하는 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또 겸손한 사람이 그 먼 거리에서 고국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떤 손해가 되는가? 그는 교만한 사람이 타기를 싫어하는 배를 타고 실지로 고국에 돌아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16. 부활과 장래 일에 대해서는 옛 철학자들에게 묻지 말라.

 

      21. 이 사람들은 우리가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비난하며,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자기들을 믿어주기를 원한다. 그들은 피조물들에 의해서 높고 변함없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해서(1:20), 변하는 것들의 순환이나 시대들의 질서 정연한 연속에 관해서도 자기들이 가르칠 권리가 있다는 듯이 생각한다. 그들은 가장 확실한 증명으로, 모든 무상한 것들은 영원한 지식을 따라 지어진 것이라고, 바르게 주장하며 우리를 설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이 지식 자체의 문제를 분명히 들여다보거나 그 지식에서 동물의 종류가 몇 가지며, 각 종류의 처음 씨는 무엇이며, 어떻게 자라며, 그 잉태와 출생과 연령과 죽음을 통해서 흐르는 수()는 무엇이며, 그 본성에 맞는 것을 원하며 반대되는 것을 피하는 데는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를 알아내는가? 그들은 이 모든 일을 변함없는 지혜를 통해서 구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시대의 실지 역사를 통해서 얻었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경험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더 긴 시대의 전후 계속을 탐구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인류는 마치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는 것 같은데, 그 시간의 흐름이 향한 목표를 확인하는 데도 그들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그 목표에 이른 후에 다시 각각 그 정해진 곳으로 갈 것이다. 아무도 경험하거나 이야기한 일이 없는 이런 장래 일들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도 기록할 수 없었다. 높고 영원한 지식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이 철학자들은 미래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역사가들과 같이 과거사를 연구하지 않고, 미래의 사건들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은 점술가라 부르고 우리는 선지자라고 부른다.

 

      17. 미래사를 아는 방법은 몇 가지인가? 철학자들이나 탁월한 고대인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물어서는 안된다.

 

      22. 그들의 문헌에도 선지자라는 이름이 있다. 그러나 미래사를 예견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혹은 과거사에 대한 경험으로 미래사를 추측한다. 의사들은 자기들이 경험해 본 일들을 예견의 형식으로 기록하며, 농부와 선원들도 여러 가지 일을 예언한다. 이런 예언이 먼 미래에 관한 것인 때에는 그것을 점()이라고 한다. 혹은 미래사가 이미 우리에게 오기 시작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감각이 예민한 정도에 따라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세상에 알린다. 공중의 권세들은 이렇게 해서 예견한다고 세상이 생각한다. 마치 산상에서 멀리 오는 사람을 보고, 가까운 평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리 알리는 것과 같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안에 있는 미래사와 과거사들을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알리시고, 그것을 일부 사람들이 천사들을 통해서 듣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마음이 높이 들어올려서, 미래사의 부동의 원들을 본다. 그들은 우주의 최고 절정에 서서, 천사들을 통함 없이 자력으로 보는 것이다. 공주의 권세들도 천사들이나 사람들에게서 이 원인들을 듣지만,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적합하다고 보시는 범위 내에 제한된다. 또 자기가 예언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면서, 본능 또는 내면적 충동으로 예언하는 것도 많다. 예컨대 가야바는 자기가 하는 말을 깨닫지 못하면서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예언을 했다(11:51).

 

      23. 그러므로 시대들의 전후 연결이나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해서 우리는 철학자들에게 묻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있는그 창조주의(17:28) 영원성을 힘껏 이해했다. 그러나 지어진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고, 지혜가 있노라고 공언하면서 우매하게 되었다(1:21:22). 그들은 변함없는 영적 본성의 영원성에서 마음의 눈을 굳게 집중할 수 없었으므로, 우주의 창조주와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시대들의 변천을 볼 수도 없었다. 이 변천은 이미 또 항상 지혜안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있으려 했지만 아직 있지 않았다. 그들은 또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영혼도 개선되어 그 고유의 분량을 완전히 채우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이런 일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거룩한 천사들에게서 들을 자격도 없다고 인정되었다. 외면적으로 신체의 감각을 통해서 알거나 내면적으로 그 마음에 계시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심을 받은 우리 조상들에게는 이 일들이 실지로 계시되었다. 그래서 조상들은 예언을 하며, 동시에 있었던 기적으로 믿음을 얻기도 하고, 불원간에 사실로 나타난 사건들로 인해서 권위를 얻어, 세상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먼 장래에 대해서도 세상이 그들을 믿게 되었다.

      그런데 공중의 교만하고 기만적인 영들도 그들의 점술가들을 통해서 성도들의 사회와 도성이나 진정한 중보에 대해서 예언을 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을 거룩한 선지자들이나 천사들에게서 들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예언을 한 것은 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충실한 벗들을 유인해서, 자기들에게는 이질적인 이런 진리들을 구실로 자기들의 거짓말을 믿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각처에서 믿는 자들을 도우며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반대 증언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가 하는 말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통해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

 

      18.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신 목적은 우리가 믿음으로 깨끗이 되며 들어 올림을 받아 변함없는 진리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24. 우리는 영원한 것을 파악할 수 없으며 추악한 죄에 눌려 지내기 때문에, 깨끗이 씻길 필요가 있었다. 무상한 것을 사랑해서 우리는 죄에 감염되었고, 우리의 죽을 운명의 뿌리가 그 죄를 우리의 본성에 깊이 박아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무상한 것과 조합되며 고착되어 있으므로, 그 무상한 것들을 통하지 않고는 죄를 깨끗이 씻어 영원한 조합될 수 없었다. 건강한 질병의 반대 극단인데, 그 중간적인 치료 과정은 질병에 적합하지 않으면 우리를 완전한 건강 상태로 가져가지 못한다. 무상한 것들 중에서도 무용한 것은 병자를 속일 뿐이며, 유용한 것은 병자를 지원하며 이미 치유된 사람은 영원한 것들에 인도된다.

      그러나 이성적인 마음은 정화되면 영원한 것들을 정관해야 하는 것과 같이, 정화가 필요한 때에는 무상한 것들을 믿어야 한다. 옛적 헬라에서 존경을 받은 어떤 현인이 한 말이 있다: 진리와 믿음의 관계는 영원과 시작이 있는 것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그의 말은 물론 옳다. 우리가 무상하다고 하는 것을 그는 시작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신체뿐 아니라, 영혼도 변하는 점에서 이런 종류에 속한다. 그것은 어떤 변화를 거치는 것을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하는 동안은 우리와 영원 사이에 거리가 있다.

      진리로 말미암아 영생이 우리에게 약속되었지만, 우리의 믿음은 진리를 분명히 아는 경지에서는 멀다. 죽을 운명이 영원에서 먼 것과 같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시간 안에서 행해진 일들을 믿으며, 이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정화되어 보는 경지에 이르려 한다. 보는 경지에서는 믿음에 진리가 따르므로, 그와 같이 영원히 죽을 운명에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곧 영생이다. 진리이신 분이 - 우리의 믿음이 도달할 미래의 진리가 아니라,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에 항상 진리이신 분이 -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우리의 믿음이 보게 되어 진리로 변할 때에, 그때에 변한 우리의 죽을 운명에 영원히 고착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까지, 또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의 죽을 생명의 믿음이 영생의 진리와의 사이에 불협화음을 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관의 진리를 영원한 것들 안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시작이 있는 것들에 우리의 믿음을 적응시켜야 한다. 그래서 성부와 함께 영원하신 진리 자신이 땅에서 시작하셨다(85:11).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며, 우리의 믿음을 받아 우리를 자기의 진리에 인도하려 하셨으며, 자신의 영원성을 잃으심 없이 우리의 죽을 운명을 스스로 취하셨다. 영원의 시작이 있는 것에 대한 관계는 진리와 믿음에 대한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초를 얻어 영원히 지속하기 위해서 정화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믿음에서 얻는 시초와 진리에서 얻는 시초가 다르지 않게 된다. 우리가 시작함으로써 영원하신 분이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를 그의 영원성에 옮기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시작한 상태로부터 영원한 것들로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지금 어느 정도까지는 그를 따라 그가 올라가신 곳으로 갔다. 우리는 그가 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가운데서 처음 두 가지는 우리가 안다. 사람이 나며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가지 즉 부활과 승천은 미래에 우리 것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그 일들이 주님에게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시작되었던 것이 영원으로 옮겨갔으므로, 우리에게서도 믿음이 진리에 도달할 때에, 시작되었던 것이 영원으로 옮겨갈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그리로부터 진리에 이르며, 다시 영원에 이르러, 죽음을 겪지 않게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다. “어떤 결과가 될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듯이 주께서는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라고 하셨다. 다시 죽을 사람들에게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신 듯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선언하셨다(8:31-32). 이 자유는 죽음과 썩음과 변함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가 아니고 무엇인가? 참으로 진리는 언제까지나 죽지 않으며,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죽지 않음과 진정한 썩지 않음과 진정한 변하지 않음은 영원 자체이다.

 

      19. 성자는 어떻게 파견되며 미리 선포되셨는가? 그는 어떻게 육신 탄생으로 파견되어 작게 되면서, 성부와의 동등성에는 상함이 없으셨는가?

 

      25. 그러므로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이 보냄을 받으셨는지를, 아니,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보냄을 받으셨는지를 보라. 믿음을 일으키며, 그 믿음으로 우리가 정화되어 진리를 정관하도록 시간 안에서 일들이 행하여졌으며, 그것이 시작이 있었으나 영원에서 왔으며 영원으로 다시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들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이 파견에 대한 증언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의 파견 자체였다.

      그 증언 중의 어떤 것은 그가 오시리라고 미리 선포했고, 어떤 것은 그가 이미 오셨다고 증거했다. 모든 피조 세계를 만드신 분이 한 피조물이 되었다는 데는 전 피조 세계에서 증언이 있어야 했다. 여럿이 파견된 가운데서 특히 한 분이 지적되는 것이 아니면, 많은 사람이 배제된 후에 한 분만 보존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증언들이 작은 자들에게 위대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면, 미천한 모습으로 미천한 자들에게 파견된 그가 위대한 분이므로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천지와 그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으신 것이며, 그에 대한 증언으로서 나타난 표적과 기사들에 비하면, 비할 수 없이 더 위대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작은 일들이 위대한 것인 듯이 놀랐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자들이 이 위대한 일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지으셨다는 것을 믿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26. 그러므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지음을 받으며 율법하에서 지음을 받게 하셨다”(4:4). “지음을 받았을만큼 그렇게 심히 낮았으며, “지음을 받아서파견되었다. 더 큰 이가 더 작은 이를 보내면, 우리도 그가 더 작게 되었다고 인정한다. 또 그는 지음을 받은 점에서는 더 작으며, 파견된 점에서는 지음을 받으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지음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그가 그를 보내신 이와 동등하시다고 주장한다. 그가 지음을 받아 파견되시기 전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직 없을 때에 그러하셨다. 그런 그에 대해서 우리는 그가 보냄을 받으셨고 성부보다 작으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가 파견되시기에 적합한 때가 차지 않아서, 그가 파견되시지 않았는데, 어떤 천사들이 조상들에게 나타났을 대에, 어떻게 조상들은 그를 볼 수 있었는가? 그가 이미 파견되신 후에도, 사람들은 그의 계신 그대로, 성부와 동등하신 그대로를 볼 수 없었다. 빌립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확실히 그를 보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육신을 입은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14:9). 사람들은 그를 보았지만, 또 그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지음을 받아 파견되신 그는 보았다. 만물을 지으신 그는 보지 못했다. 또 그가 하신 말씀이 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그가 이미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때가 차서 말씀이 육신이 되고, 우리의 믿음이 받아들이도록 그 육신을 제시하였으나 만물을 지으신 말씀 자체는 보류하셔서 마음이 믿음으로 정화된 후에 영원히 정관하도록 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20. 보내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가 동등하시다. 무슨 까닭에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다고 하는가? 성령의 파견: 누가 어떻게 보내셨는가? 성부는 신성(Godhead) 전체의 처음이시다.

 

      27. 만일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다고 하는 뜻이 한편은 아버지요 한편은 아들이라면, 이런 표현 방법 때문에 우리가 성자와 성부는 동등하며, 본질이 같으며, 같이 영원하며, 그러나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다고 믿지 못할 리는 없다. 성부가 더 크고 성자가 더 작으시다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은 아버지시오, 한 편은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즉 한 편은 낳은 분이시요, 한 편은 난 분이시며, 한 분은 파견되는 다른 분에게 존재를 주시며, 또 한 분은 파견하는 분에게서 존재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오신 것이요 성부가 성자에게서 오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1:14) 성자가 파견되셨다고 할 뿐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몸으로 임재 함으로써 기록된 일들을 성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성자가 파견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말씀은 파견된 그 사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씀이 파견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성자가 파견되신 것은 권능이나 본질이나 그 밖에 성부와 동등하지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자가 성부에게서 오시고, 성부가 성자에게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자는 성부의 말씀이시며, 말씀은 또한 지혜라고 부른다.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지혜로서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순수한 빛이시므로"(지혜서 7:25), 그 성자가 파견되시는 것이 무엇 때문에 이상한가? 나오시는 분과 나오는 근원이 되신 분의 본질이 동일하시다. 물이 땀구멍이나 돌 틈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고, 빛이 빛에서 오는 것과 같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라"는 말씀은(지혜서 7:25) 지혜가 영원한 빛에서 오는 빛이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빛의 광채는 곧 빛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그것은 그 근원인 빛과 같이 영원하다. 그러나 "빛의 빛"이라고 하지 않고 "빛의 광채"라고 한 것은 근원이 된 빛보다 거기서 나온 빛이 어둡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빛의 광채는 곧 그 빛이라고 하면, 그 광채는 빛으로 빛나는 것임을 믿기 쉽다. 그러나 빛을 낳은 빛이 더 작다는 생각은 이단자도 감히 주장하지 못한 것이며, 어떤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감히 하리라고 믿음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경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빛에서 난 빛이 그 근원보다 어둡다는 생각을 성경은 예상하고, "영원한 빛의 광채"라는 표현으로 그런 억측을 막으며 동등하다는 것을 밝혔다. 만일 더 작으면 그것은 어두움이며 광채가 아닐 것이다. 만일 더 크다면, 그것은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태어난 그 근원보다 우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원에서 나오므로 더 크지 않으며, 또 그것은 희미한 빛이 아니라 광채이므로 더 작지 않으며, 따라서 동등하다.

      또 지혜에 대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지혜는 전능하신 분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그 자체가 전능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곧 그 다음에 있는 말씀에 "지혜는 비록 하나이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지혜서 7:27)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면 누가 전능한가? 그러므로 지혜는 그를 보내시는 분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지혜를 사랑하고 원한 사람이 그것을 구했다: "당신의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보내 주시고, 영광스러운 당신의 보좌로부터 보내 주소서. 그리하여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일하게 하소서"(지혜서 9:10). , 내가 헛되이 노고하지 않도록 일하는 법을 가르치게 하소서라는 것이다. 지혜가 하는 일은 곧 덕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한 것과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은 보내는 방법이 다르다. 지혜는 "거룩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들은 하나님의 벗이 되게 하고 선지자가 되게 한다"(지혜서 7:27). 그는 또 거룩한 천사들로 가득해서 그들로 말미암아 이런 섬김에 합당한 모든 일을 한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에 지혜는 천사들을 채우거나 천사가 되기 위해서 파견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의 계획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 사람들과 함께, 또는 그들 안에 있기 위해 파견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미 조상들과 선지자들의 경우에 있었던 일이다. 그렇지 않고, 말씀 자신이 육신이 되셨다. 즉 사람이 되셨다. 이 장차 일을 신비가 계시되었을 때에, 성자 자신이 처녀에게서 나시기 전에 여인에게서 난 현인들과 거룩한 분들에게 그 소식이 구원이 될 것이었으며, 이제는 그 신비가 이미 실현되며 알려졌으므로,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구원이 된다. 이것이 "경건의 큰 비밀이며,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28. 그러므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보내신다. 말씀을 낳으신 분이 보내신다. 그리고 나신 분이 파견되신다. 각 개인이 지혜를 깨닫고 알 때에, 그 깨닫고 아는 범위 내에서 지혜가 각 개인에게 파견되신다. 즉 이성적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전진하는 도중이거나 하나님 안에서 이미 완전한 상태에서 지혜를 깨닫는 데 비례해서 지혜가 그 영혼에 파견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신다고 해서 파견되셨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다"(16:28)고 하신 것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내주소서, 그리하여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일하게 하소서"(지혜서 9:10)라는 말씀과 같이, 가끔 개개인의 마음이 말씀을 깨달을 때에 파견되신다. 영원으로부터 난 것은 영원하며,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파견되시는 것은 각 개인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그는 때가 차서 여인에게 지음을 받아 이 세상에 파견되셨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고 하듯이, 하나님의 지혜에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고"(고전 1:2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1:14). 그는 가끔 개인의 마음에 나타나서 이해되시므로 참으로 파견되셨다고 하지만, 세상에 파견되신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신체 감각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으로 영원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인들도 비록 그 육신은 이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깨닫는 점에서는 이 세상에 있지 않다. 그러나 개인이 가끔 성부를 깨닫는다고 해서 성부가 파견되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누구에게서 존재를 얻으신다든지, 누구에게서 나오신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다"(집회서 24:3)고 지혜가 말하며, 성령에 대해서는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다"(15:26)고 하지만, 성부는 아무에게도 오시는 것이 아니다.

 

      29. 그러므로 성부가 낳으시고 성자가 나신 것 같이, 성부가 파견하시고 성자가 파견되셨다. 그러나 낳으신 분과 나신 분이 하나이신 것과 같이, 파견하신 분과 파견되신 분이 하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10:30). 그와 같이 성령은 두 분과 하나이시다. 세분이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성자가 나신다는 것은 성부에게서 오신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파견되신다는 것은 성자의 경우에는 성부에게서 오신 것으로 알려지신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성령이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뜻이며, 파견되신다는 것은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것이 알려지신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성령이 성자에게서 나오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같은 성령이 성부의 영이라고 하며 또 성자의 영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 제자들의 얼굴에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20:22) 어떤 다른 뜻이었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 몸으로 숨을 내쉬는 것, 숨이 몸에 닿은 감각 - 이런 것은 성령의 본질이 아니고, 성령이 성부에게서 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적합한 상징이었다. 아무리 정신없는 사람이라도 주께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셨을 때에 주신 영과 승천 후에 보내신 영이(21:1-4) 달랐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곧 성부와 성자의 영이며,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성령이시다(고전 12:6).

      그러나 그를 두 번 주신 데는 확실히 중대한 경륜이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주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 그러면 주께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분이라고(15:26) 하신 말씀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알린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실" 분이라고 하셨을 때에도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을 첨가하셨기 때문이다(14:26). 주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내실"이라고 하실 것과 같이, "아버지께서 내게로부터 보내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즉 성부께서 신성 전체의 처음이심을 알리신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분을 다시 소급해서 성자를 낳으신 분에게 관련시키는 것이다.

      복음서에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한 말씀을(7:39)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성령을 특별히 주신 것 또는 보내신 것은 이 이전에는 없었던 종류의 일이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 전에도 있었지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 전에 성령을 주시지 않았다면, 선지자들은 무엇으로 충만해서 말했는가? 그들이 성령으로 말했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며 여러 곳에서 알린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함을 입으리라"고 했다. 그 아버지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해서 그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마리아도 성령이 충만해서 자기 태중에 있는 주님에 대해서 이런 일들을 예언했다(1:15, 41-79). 시므온과 안나는 성령이 충만해서 어린 아기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인정했다(2:25-38).

      그러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을 주시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성령을 주신다, 허락하신다, 또는 보내신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결코 없는 특별한 종류의 임재를 의미하기 때문이 아닌가? 참으로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알지 못했던 언어를 말했다는 기사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때에는 성령이 오신 것을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알리며, 전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언어로 구성된 세계 만민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게 되며, 시편에 있는 말씀이 실현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시편에 이르되,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다(19:3,4).

 

      30. 그러므로 때가 차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합하여 이를테면 섞여서 한 인격을 이루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들을 위해서 사람의 아들이 되려고, 여자에게 지음을 받아 이 세상에 파견되셨다. 이 분을 미리 알리기 위해서 천사적 본성이 미리 그를 보일 수 있었으나, 그 인격 자신이 될 만큼 그를 가질 수는 없었다.

 

      21. 성령이 감각에 나타나심과 삼위일체 신의 공동 영원성에 대하여, 여기까지 한 말과 앞으로 할 말.

 

      그러나 성령이 감각적이므로 나타나신 것에 대해서는, 예컨대 비둘기나(3:16) 불의 혀 모양으로(2:3) 나타나서, 즉 그 때에 순종하게 된 피조물이 그 일시적 운동과 형태로 말미암아, 성령의 본체가 성부 및 성자와 함께 공통적으로 영원하며 불변하시다는 것을 계시했으며, 그러나 그 피조물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달라서, 성령과 결합해서 한 인격을 이루지는 않았다 - 이런 예가 이전에는 없었는지,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동일하시므로, 창조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삼위일체 신으로서 분리할 수 없이 일체로서 역사하신다. 이것은 내가 절대로 확신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점을 본질이 다른 피조물로, 특히 물질적인 피조물로, 분리할 수 없이 나타낼 수는 없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우리의 음성으로 - 물론 물질적인 이 음성으로 - 부를 때에, 우리는 시간적 간격을 두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간격을 그 이름의 음절들이 채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존재의 본질에서 세 분이 같은 하나이시다. 거기에는 시간적 운동이나 시간, 공간의 간격 없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 세 분은 함께 영원으로 영원까지 같은 하나이시며, 이를테면 영원 자체이시며, 그 영원에는 진리와 사랑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말할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되며, 동시에 말할 수 없다. 한 분 한 분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글자로 공간을 차지하신다. 마치 내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를 말할 때에, 이름들은 서로 다른 특수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 어느 이름을 말할 때에도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가 즉 영혼 전체가 협력하지 않으면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으므로, 셋이 모두 합해서 한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성부의 음성과 성자의 육신과 성령의 비둘기를 각기 한 위격에 돌리지만, 사실은 삼위일체 전체가 함께 지으시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우리는 삼위일체 신은 분리됨 없는 하나이시지만, 보이는 피조물의 형태를 통해서 분리되어 계시될 수 있다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기 특유하게 계시한다고 하는 이 모든 일도 그 하나하나에서 삼위일체 신이 분리됨 없이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다.

 

      31.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 일을 예시하는 음성이나 보이는 형태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떻게 지어졌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이 그 천사들을 시켜서 하신 일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점을 성경의 증언들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육신 자체는 어떻게 이루어졌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육신이 되셨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말씀은 사람으로 변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지어진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육신뿐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인 영혼도 있었으며, 이 전체를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사람 때문에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 점을 이해하기 어려우면, 그 마음은 믿음으로 정화되어야 한다. 즉 죄를 더욱 더 버리며, 선을 행하며, 거룩하고 간절한 소원으로 기도함으로써 마음이 정화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전진해서 깨달으며 사랑하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말씀이 성육신한 후에,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지어졌으며, 성령을 계시하는 물질적 형태가 어떻게 지어졌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현상들은 피조물을 수단으로 삼아 나타내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질적 감각적인 것만을 썼는지, 이성적 또는 지성적인 영도(즉 헬라어로 noeron이라고 하는 것)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이 때에 그것이 한 인격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리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신 것을 알리는 사명만을 위한 것이었는지, 이러한 것들을 알기 어렵다. 처녀가 지은 사람이 곧 성자이시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낸 피조물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곧 성부 하나님이었다든지, 비둘기나 불의 혀 모양으로 성령을 나타낸 것이 곧 성령이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는가? 또는 이 모든 일에 어떤 다른 뜻이 있었는지 알기 어렵고, 우리는 경솔한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성적 또는 정신적인 피조물이 없이 이런 일이 어떻게 있었을까 하는 것을 나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내가 무슨 까닭에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하겠지만, 아직 여기는 적당한 곳이 아니다. 우리는 우선 이단들의 주장을 토론하며 논박해야 하겠다.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을 근거로 삼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성경에 있는 증언들을 우리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믿는다.

 

      32. 그러나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다고 해서 그 때문에 성자가 더 작으신 것이 아니며,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셨다고 해서 그 때문에 성령이 더 작으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판단한다. 성경에 있는 이런 증언들은 보이는 피조물의 관점에서, 또는 (삼위일체 내에서) 시초를 알린다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본질에 어떤 같지 않음이나 차이나 부동성이 있다는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비록 성부 하나님이 순종하는 어떤 피조물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 나타나시기를 원하셨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가 낳으신 성자나 그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이 그를 보내셨다고 말하는 것은 비할 데 없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이제 이 권을 끝내겠다. 앞으로 우리가 하는 논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단의 주장이 얼마나 간교하며, 그것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