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6권 1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4. 24. 18:28

삼위일체론 제 6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김 종 흡 옮김

 

      6

 

      개요: 한 의문. 사도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가? 문제가 제기된다: 성부 자신은 지혜가 아니고 지혜의 아버지이실 뿐인가? 또는 지혜가 지혜를 낳았는가?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잠깐 뒤로 물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 되심과 동등하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 신을 믿어야 하며 삼중 신(三重神)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끝으로, 힐라리우스가 한 말 - "성부 안에 영원성, 형상 아넹 나타남, 은사 안에 효용" - 을 설명한다.

 

      1. 성자는 성부의 능력과 지혜라고 사도는 말한다. 그래서 정통파는 초기 아리우스파를 반박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성부 자신은 지혜가 아니시고, 지혜의 아버지이실 뿐인가?

 

      1.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성을 인정할 수 없노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이 옳다면 동등성이 있는 것 같지 않으며, 성부 자신은 능력과 지혜를 낳는 분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사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능력과 지혜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비상한 열성으로 묻는 것이 보통이다. 사도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고전 1:24).

      그래서 우리 편의 어떤 사람들이 아리우스파를, 적어도 처음에 정통 신앙에 반기를 든 자들을 반박하는 이론을 전개했다. 아리우스 자신이 했다는 말은 다음과 같다: 만일 그리스도가 아들이시라면, 그는 나셨다; 만일 나셨다면 성자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는 나는 것까지도 하나님에게는 영원부터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게 영원하시다. 마치 불이 발산하는 광채가 불과 함께 같은 기간 계속하는 것과 같다. 만일 불이 영원하다면 그 광채도 영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의 아리우스파 중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논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성자는 시간 내에서 생존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성자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하는 자들을 반박한 우리 쪽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논했다: 만일 하나님의 성자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며, 하나님에게 능력과 지혜가 없었던 때가 없었다면, 성자는 성부이신 하나님과 동등하게 영원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도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능력이나 지혜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또한 성자가 없었던 때는 없었다.

 

      2. 그런데, 이 논법은 우리를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즉 성부 하나님은 그 낳으신 지혜를 가지시지 않으면 지혜로우실 수 없으며, 성부 자신이 지혜 자체이신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자 자신을 또 하나님에게서 온 하나님, 빛에서 온 빛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 문제를 생각해야 될 것이다. 즉 성부 하나님이 지혜 자체가 아니고 지혜를 낳으신 분일 뿐이라면, 성자를 지혜에서 온 지혜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이 이론을 세운다면, 무슨 까닭에 성부를 또한 그 자신의 위대성, 그 자신의 양선(良善), 그 자신의 영원성, 그 자신의 전능을 낳으신 분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대성과 자신의 양선과 자신의 영원성과 자신의 전능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낳으신 위대성으로 위대하며, 그가 낳으신 양선으로 양선하며, 그가 낳으신 영원성으로 영원하며, 그가 낳으신 전능으로 전능하신 것일 것이다. 그 자신이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그에게서 난 지혜로 지혜로우시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성부가 자신의 위대성과 양선과 영원성과 전능을 낳으신다면, 성부께서 피조물을 양자로 삼으시는 이외에도, 그와 동등하게 영원한 아들들이 많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궤변은 대답하기 쉽다. 여러 가지 이름을 열거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와 동등하게 영원한 여러 아들들의 아버지시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두 아들의 아버지시라는 결론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지혜인 것은 확실히 권능이며, 권능인 것은 지혜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권능인 것은 위대성이며, 그밖에 우리가 열거한 것들과 앞으로 언급할 모든 것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2. 성부와 성자에 대해서 함께 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3. 성부에 대해서 그 자신으로서 어떠하신가를 말하지 않고, 성자와의 관계만을, 즉 성자의 아버지나 그를 낳은 분이나 그의 시초만을 말한다면; 그리고 또 낳은 분은 그에게서 난 분의 시초라면, 성부에 대한 그밖의 말은 성자와 함께 한 또는 성자 안에서의 그 분이실 것이다. 성부는 그가 낳으신 그 위대성과 함께 위대하시든지, 그가 낳으신 공정성과 함께 공정하시든지, 그가 낳으신 양선과 함께 선하시든지, 그가 낳으신 권능 또는 힘과 함께 권능이 있든지, 또는 그가 낳으신 지혜와 함께 지혜로우시다. 그러나 성부를 위대성 자체라고 하지 않고 위대성을 낳은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자의 경우에는 그 자신을 고려할 때에 아들이라고 부른다. 성부와 함께 성자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성부와의 관계로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자를 그 자신만으로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성자는 성부의 위대성이며 그 성부와 함께 위대하시다. 그와 같이 성자는 성부의 지혜이시며 그런 성부와 함께 지혜로우시다고 한다. 그리고 성부는 성자와 함께 지혜로우시다. 성부 자신이 낳으신 그 지혜와 함께 지혜로우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 그 자신을 말할 때에는 다른 편을 말하지 않고 한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두 분의 본질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두 분을 모두 함께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자 없이 성부는 하나님이 아니며, 성부 없이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며, 두 분이 함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은 말씀이 성부(시초) 안에 계셨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혹은 "태초에""만물이 있기 전에"라는 뜻이라면, 그 다음에 있는 "말씀이 하나님과 계셨으니"라는 말씀에서 "말씀"은 확실히 성자로만 해석되고, 성부와 성자 두 분이 말씀이라는 뜻이 아니다(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뜻이며, 같은 분이시다. 성부와 성자가 함께 두 분이 형상이신 것이 아니라, 성자만이 형상, 즉 성부의 형상이시다. 그만이 성자이시고 두 분이 다 성자가 아니신 것과 같다.). 참가된 말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지지하는 이유가 많다. "말씀"은 성자만을 의미하며, "하나님"은 성부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를 함께 의미한다.

      서로 아주 다른 두 가지 것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성부와 성자에 대한 이 말씀이 이상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영혼이 사람과 함께, 즉 사람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혼은 신체가 아니며, 사람은 영혼과 신체를 합한 것이다. 그와 같이, 그 다음에 있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 "성부가 아닌 말씀은 성부와 함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는 그 자신의 위대성을 낳는 분, 즉 그 자신이 권능이나 그 자신의 지혜를 낳는 분이시며, 그러나 성자는 그 위대성과 그 권능과 그 지혜이시며, 두 분이 합해서 위대하고 전능하고 지혜로운 하나님이시라고 할 것인가? 그럴 경우에는 성자는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온 하나님과 빛에서 온 빛이시겠는가? 두 분이 함께 하나님에게서 온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성자만이 "하나님에게서 온" 즉 성부에게서 온 분이시다. 또한 두 분이 함께 '빛에서 온 빛'이 아니라, 성자만이 '빛에서 온' 즉 성부에게서 온 분이시다.

      이런 표현 방법은 성자가 성부와 함께 영원하시다는 것을 알리며, 아주 간단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온 하나님이나 빛에서 온 빛이나 그밖에 비슷한 뜻을 가진 표현을 쓸 때에는, 그것을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성부 없이는 성자가 아닌 이것이 성자 없이는 성부가 아닌 이것에서 온다. 즉 성부 없이는 빛이 아닌 이 빛이 성자 없이는 빛이 아닌 이 빛, 즉 성부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부 없는 성자로 해석할 것이 아니며, "하나님에게서 온"은 성자 없는 성부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하나님에게서 온"이라는 두 말은 낳으신 분이 난 분보다 먼저 계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린다. 사실이 그렇다면, 무엇에서 온 무엇이라는 표현을 그들에 대해 써서는 안될 때가 있으며, 그것은 두 분에게 함께 해당하지 않을 때이다. 예컨대, 우리는 말씀에서 온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두 분이 다 말씀이신 것이 아니라, 성자만이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상에서 온 형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두 분이 함께 형상이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자에게서 온 성자라고 할 수도 없다. 두 분이 함께 성자이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10:30). "우리가 하나라"고 하셨으며, 그 뜻은 나는 관계에 따라서가 아니라 본질적 존재에 따라 그가 계신 그대로니라라는 것이다.

 

      3.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존재가 서로 하나임은 "우리가 하나이라"는 말씀으로 추축된다. 성자는 지혜와 모든 다른 일에서 성부와 동등하시다.

 

      4. 본성이 다른 것들에 대해서 "그것들을 하나라"고 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같은 본성을 가졌으면서도 생각이 서로 다른 것들이 많을 때에, 그것들은 생각이 다르다는 점에서 하나가 아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성부에게 부탁하셨을 때에, 그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이미 하나였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라고(17:11)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는 둘이 다 사람이요 생각하는 것도 같았기 때문에 "심는 자와 물주는 자가 일반이라(하나라)"고 했다(고전 3:8).

      따라서 어떤 것을 하나라고 하면서 어떤 점에서 하나라는 것을 뚜렷이 알리지 않으며 여럿을 하나라고 한다면, 그 때에는 본성과 본질을 의미하며 본성과 본질이 다르지 않거나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하나라는 것을 첨가한다면, 그것들이 본성은 다르지만 그 많은 것에서 어떤 하나가 생겼다는 뜻이다. 마치 영혼과 몸 같이 서로 다른 것이 있겠는가마는, 이 둘은 합하든지 또는 하나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즉 한 사람이나 한 동물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물론 하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이라"고 언명했다(고전 6:16). 그들이 하나라든지 그가 하나라고 하지 않고 "한 몸이라"고 했다. 남성과 여성의 두 다른 몸을 합해서 한 몸이 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한다(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하나라, 또는 그는 하나라고 하지 않고, "한 영이라"고 첨가한다.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은 그 본성이 다르지만, 서로 결합함으로써 두 다른 영에서 한 영이 생기며, 사람의 영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영은 행복하고 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영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면 사람의 영은 행복하지 않다. 요한복음에 이 하나 되는 데에 대한 주의 말씀이 많고 자주 있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와 성부가 하나라고 하시며, 우리가 서로 하나 된다고 하신다. 우리와 저희가 하나가 되기 위하여 라고 말씀하신 곳은 없고,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신다(17:11). 그러므로 확실히 성부와 성자는 서로 본성이 하나이시기 때문에 하나이시다.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 한 위대한 하나님, 한 지혜로운 하나님이시다.

 

      5. 그러면 어찌하여 성부가 더 위대하신가? 만일 더 위대하시다면, 위대성으로 더 위대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자는 성부의 위대성이시지만, 자기를 낳으신 분보다 더 위대하시지 않으며, 성부는 그를 위대하게 하는 그 위대성보다 더 위대하시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등하시다. 어찌하여 동등하신가? 그의 본성이 동등한 것이 아닌가? 즉 그는 존재하는 것과 위대한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 혹은 만일 성부가 영원성에서 더 위대하시다면, 성자는 어떤 점에서도 동등하시지 않다. 동등성은 어디 있는가? 위대성에 있다면 덜 영원한 위대성은 동등하지 않다. 동등성은 어디 있는가? 위대성에 있다면 덜 영원한 위대성은 동등하지 않다. 다른 일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는 권능이 동등하시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으시다고 하는가? 그러나 지혜가 적은 권능이 어떻게 동등하겠는가? 혹은 지혜는 동등하신데 권능은 동등하시지 않다고 하는가? 그러나 권능이 적은 지혜가 어떻게 동등하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그가 어느 한 가지 점에서 동등하시지 않으면, 모든 점에서 동등하시지 않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한다(2:6). 그러므로 진리에 반대하는 자라도 사도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성자는 모든 점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고 인정해야 한다. 어느 점이든 원하는 대로 택하여 보라. 거기에서 출발해서 성자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는 모든 점에서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시다는 것을 그에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4. 같은 논법의 계속.

 

      6. 같은 모양으로, 사람의 마음에 있는 덕성(德性)들도 각각 뜻이 서로 다르면서도 결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예컨대, 용기에서 동등한 사람들은 지혜와 절제와 공정성에서도 동등하다. 어떤 사람들이 용기가 동등하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은 지혜가 더하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용기에 지혜가 덜하다는 뜻이 되며, 따라서 용기도 동등하지 않게 된다. 한 사람의 용기는 지혜가 더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덕성들도 그 하나하나를 검토한다면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신체의 힘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한 본질, 즉 하나님의 변할 수 없고 영원한 본질에서는 얼마나 더욱 더 그럴 것인가? 사람의 마음에서는 존재하는 것과 강하거나 지혜롭거나 공정하거나 절제하는 것이 같은 일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존재하면서도 이런 덕성이 하나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에는 존재하시는 것과 강하시거나 공정하시거나 지혜로우시거나 그밖에 어떤 속성이라도 같은 일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은 단순한 다양성(多樣性) 또는 다양한 단순성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오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이 이름은 두 분을 각각 의미하면서도 두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두 분은 사도가 증언한 식으로 결합되어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 사도는 서로 다른 실재들에 대해서 말했다. 주는 그 자체가 영이시요, 사람의 영도 그 자체가 확실히 영이지만 사람의 영이 주의 영과 합하면 "한 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절대로 분리할 수 없고 절대로 영원한 결합이 있는 것에서는,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 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두 하나님에만 적용한다면, 이런 어리석은 현상이 생길 것이다. 혹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키기 위해서 어떤 말을 할 때에 반드시 두 분을 함께 - 아니, 삼위일체를 함께 말하는 것인가? 이 중의 어느 편이든지 간에(이것은 더 신중히 고찰할 문제지만), 지금은 이미 말한 바에 비추어, 성자의 본질에 관련된 어떤 한 점에서 성자가 성부와 동등하시지 않다면, 그는 어떤 점에서도 동등하시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면 족하다. 이 점을 우리는 이미 증명했다. 그러나 사도는 성자가 동등하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성자는 모든 점에서 성부와 동등하시며 그 본질이 동일(同一)하시다.

 

      5. 성령도 모든 점에서 성부 성자와 동등하시다.

 

      7. 그러므로 성령도 동일한 하나인 본질(substance)과 동일한 동등성으로 존재하신다. 그가 두 분의 하나되심이거나, 거룩하심이거나, 또는 사랑이시므로 하나됨이시거나, 거룩하시므로 사랑이시거나 - 어떻든 간에, 성령은 두 분 중의 한 분이 아니시다. 두 분은 그로 말미암아 결합되며; 그로 말미암아 낳은 이가 난 이를 사랑하고 난 이가 낳은 이를 사랑하며; 그로 말미암되 그것은 그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본질로 인함이며; 위로부터 온 은사로 인함이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 인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신다(4:5). 우리는 은총을 받아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을 향해서 이 일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22:37-40). 그래서 세 분은 하나님이시다 - 한 분이시며, 유일하시며, 위대하시며,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시며, 행복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에게서 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또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에 의해서 서로 하나가 되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께 밀착할 때에 우리의 영이 그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붙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시겠기 때문이다(73:27). 그러므로 성령은 무엇이든 간에 성부와 성자에 공통하시다. 그러나 그 친교 자체는 서로 본질적이며 서로 영원한 것이다. 그 친교를 우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면, 그렇게 불러도 된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그리고 이 사랑은 또한 본질적 존재이다. 하나님이 본질적 존재이시며, 성경 기록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16). 그러나 성령은 성부 성자와 함께 한 본질적 존재이신 것 같이, 그 본질은 성부 성자와 함께 위대하시며, 함께 선하시며, 함께 거룩하시며, 그밖에 무엇이든지 본질에 관한 것은 모두 함께 그러하시다.

      하나님의 경우에는 존재하는 것과 위대하거나 선하거나 그 밖의 것이, 우리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로 다른 일이 아니다. 만일 저의 안에서 사랑이 지혜보다 덜 위대하다면, 지혜가 그 본성에 합당한 사랑을 다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그 존재에 따른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랑이 동등하시다. 그리고 지혜가 성부와 동등한 것은 우리가 위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러므로 성령도 동등하시다. 그리고 동등하시면 모든 점에서 동등하시다. 본질적 존재에 있는 절대적 단순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셋 이상이 아니다: 즉 자기에게 존재를 얻은 이를 사랑하는 이와 자기의 존재의 근본이 되시는 분을 사랑하는 이와 사랑 그 자체이다. 그리고 만일 이 끝의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님은 사랑"이시겠는가? 만일 사랑이 본질적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본질적 존재이시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