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3권 1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3. 14. 14:50

삼위일체론 제 3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김 종 흡 옮김

 

      3

 

      개요: 앞 권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출현을 논한다. 그때그때 적합하다고 인정된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피조물이 만들어졌을 뿐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미 있었던 천사들을 보내서 하나님을 대변하게 하셨는가? 그렇게 했을 경우에, 창조주가 천사들에게 권한을 주어 피조물의 형태를 취하든지, 또는 자기의 몸을 적당히 변하게 하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은 결코 나타나 보이지 않았는가?

 

      서론: 저자는 무슨 까닭에 이 삼위일체론을 쓰는가? 독자들에 대한 요구. 앞 권에서 말한 것.

 

      1.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읽으려는 글을 구술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는데 전념하고 싶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독서에서 얻는 해답들을 허용하기 바란다. 나는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제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직책상, 또는 내 자신의 열심 때문에, 육적이며 감성적인 사람들의 공격에 대해서 우리의 믿음을 변호하려고 하며, 또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이 사정을 안다면, 내가 얼마나 이 일을 그만두고 붓도 쉬게 하고 싶은지를 이해할 것이다.

      또 그 사람들이 유의해야 할 사정이 있다. 이 문제들에 관해서 내가 읽은 글들은 라틴어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거나 얻을 수 없었거나 또는 적어도 우리는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또한 헬라어에 썩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문제들에 대한 헬라어 서적들을 읽고 이해할 수 없다. 다만 발췌한 것들이 조금 있어서 그것을 번역시켰으며, 우리가 얻어서 유익할 만한 것은 거기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렇더라도 사랑의 법으로 형제들의 종이 된 나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특히 그리스도를 연구하려는 그들의 기특한 노력을 말과 붓으로 도와야 한다. 나의 경우에 말과 붓은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모르던 것을 깨달은 것이 많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게으른 독자나 박식한 독자가 나의 이 노고를 공연한 짓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 부지런한 사람들을 위해서, 또 내 자신을 포함한 여러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의 노고는 상당히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많은 혜택을 입으면서, 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최고의 하나님이시며 최고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즉 삼위일체에 대해서, 경건하게 연구하며 토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또 나는 이 탐구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과 나의 설명에 대한 주의 도움을 기대한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의욕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책들을 얻지 못할 때에 내 책이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책들이 있을 때에는 이런 종류의 책이 많을수록 그만큼 얻기가 더욱 쉽게 되기를 원한다.

 

      2. 나는 나의 모든 저서에 대해서 경건한 독자뿐 아니라 공명정대한 비판가가 있기를 원한다. 특히 중대 문제를 논하는 이 책에 대해서 많은 반대와 동시에 많은 규명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독자가 내게 매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비평가가 그 자신에 매이지 않기를 원한다. 경건한 독자는 나보다 보편적 신앙을 더 사랑해야 하며, 비평가는 자기보다 보편적 진리를 더 사랑해야 한다. 독자에 대해서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쓴 글들이 성경인 듯이 거기 매이지 말며, 성경에서 믿지 않던 것을 발견하면, 주저하지 말고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글에서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확신이 없는 한, 그것을 고집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비평가에 대해서 나는 말한다: 당신 자신의 의견이나 이론을 표준으로 삼아서 내 글을 시정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나 반박할 수 없는 이성(理性)을 표준으로 삼으시라; 만일 내 글에 어떤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내 글에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내 것이라고 하지 말고 이해하고 사랑하면 당신의 것도 될 것이며, 어떤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내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피한다면 그것은 당신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제2권에서 도달한 점을 이 제3권에서 출발점으로 삼겠다. 거기서 우리가 도달한 점은 다음과 같았다: 성부가 보내시고 성자가 보냄을 받으셨다고 해서 성부보다 성자가 작으신 것이 아니며; 성경에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셨다고 한다고 해서, 성령이 두 분보다 작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리려고 했다. 성자는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세상에 계셨으므로, 그는 이미 계신 곳으로 보냄을 받으신 것이었고, 성령도 그 계신 곳으로 파견되신 것이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으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알고 계신다”(지혜서 1:7)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육신으로 탄생하셔서 더 숨겨지시지 않고, 이를테면 성부의 품에서 나와 종의 형체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셨기 때문에, 주님을 파견되셨다고 하는가를 우리는 알아보려고 했다. 또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3:16), 또는 불의 갈라진 혀 모양으로 보이셨기 때문에(2:3) 파견되셨다고 하는 것인가? 그래서 성자와 성령의 경우에 파견된다는 것은 영적 칩거 상태를 벗어나 어떤 물체적 형태로 사람의 눈에 보이셨다는 뜻인가? 또 성부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므로 보내는 이라고 하며, 보냄을 받는 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밝히려고 했다.

      그 다음에 일으킨 문제는, 성부께서도 고대인들에게 물체적으로 나타나신 일이 있는데, 무슨 까닭에 보냄을 받으신다는 말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 때에 성자가 계시되셨다면 훨씬 후대가 되어서, 즉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나셨을 때에(4:4), 그가 보냄을 받으셨다고 해야 하는가? 그는 물체적 형태로 이미 나타나시지 않았던가? 혹은 말씀이 성육신하신 때(1:14) 이외에는 성자가 보냄을 받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대에 있었던 출현 사건에서 알려진 것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고 성령이셨다면, 지금 그의 보내심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이전에도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냄을 받으시지 않았는가?

      그 다음에 이 문제를 극히 주도하게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문제를 세 가지로 나눴다. 처음 부분은 제2권에서 설명했고, 나머지 두 부분을 이제부터 논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미 탐구하며 설명한 끝에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즉 나타나신 분은 성부만도 아니요, 성자만도 아니요, 성령만도 아니었으며; 실지로 나타나신 분은 주 하나님, 즉 위격을 구별하지 않고 부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셨거나 그렇지 않으며 어느 한 위격이셨는데, 어느 위격이신가 하는 것은 성경 기록에 비친 단서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1. 삼분법의 둘째 문제에 대하여.

 

      4. 그러면 이제부터 순서대로 우리의 탐구를 계속하겠다. 우리가 위에서 말한 구분에서 그 둘째 부분에 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눈에 계시되셨을 때에 적당하다고 여겨서 취하신 피조물의 형태는 그 일을 위해서만 지으신 것이었는가, 또는 이미 있었던 천사들이 파견되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 천사들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그 때에 필요한 물질적 피조물의 형태를 취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창조주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자기의 몸을 변화시켜서 자기들의 활동에 알맞은 창조주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자기의 몸을 변화시켜서 자기들의 활동에 알맞은 몸을 마음대로 취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의 몸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바꾸어서 취하는 몸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택하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 문제의 이 부분을 논한 다음에, 우리가 탐구하기 시작한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즉 성자와 성령도 이전에 보냄을 받으신 일이 있는가 하는 것과, 또 만일 그렇다면 그 보냄과 복음서에 기록된 보냄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 또는 성자가 처녀에게서 탄생하시고, 비둘기나 불의 혀 모양으로 성령이 나타나신 사건들을 제외하고도 성자나 성령이 보냄을 받으신 일이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5. 그러나 천사들의 문제는 현재의 연구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나는 인정한다. , 천사들은 지금도 그 몸의 영적 속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어떤 비밀한 수단으로 낮고 조잡한 원소들을 자기들에게 적응시킴으로써 어떤 형태를 취하며, 그것을 마치 옷과 같이 변해서, 주님이 참 물을 참 포도주로 바꾸신 것과 같이, 원하는 대로 실지로 있는 것으로 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천사들은 자기의 몸 자체를 바꾸어서 어떤 특성 사명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몸을 취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이것은 지금 우리가 연구하려는 문제에 속하지 않는다.

      또 나는 인간이므로 이런 일들을 당사자들인 천사들처럼 체험으로 이해할 수 없다. 또 나의 의지력으로 나의 신체 내부에 얼마만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천사들이 나보다 더 잘 안다. 즉 그 변화는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알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성경의 권위에 따라 어느 쪽 이론을 믿는지를 말할 필요는 없다. 목전의 문제에 필요하지 않은 제목에 대해서 긴 토론을 하거나 증명을 해야 되겠기 때문이다.

 

      6. 지금 고려해야 할 점은 물체적 형태가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나며 그들의 귀에 소리가 들렸을 때에, 천사들이 그 일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즉 감각에 알려지는 피조물이 조물주에 복종해서 섬기며, 그 때에 필요한 것으로 변한 때였다. 지혜서에 말씀이 있는 것과 같다: “피조물들은 창조주이신 주님께 순종하여, 악인들을 벌하는 데 힘을 다하고 한편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기 위해서는 그 힘이 부드러워진다. 그래서 그것은 무엇으로나 변하여, 만물을 먹여 살리시는 주님의 선물이 되어, 궁핍한 사람들의 뜻을 채워 준다”(지혜서 16:24-25). 하나님의 의지력은 영적 피조물들을 통하여 퍼지며, 물체적 피조물에게서 보이며 감각되는 결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그 뜻하시는 결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곳은 어딘가?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끝까지 힘차게 펼쳐지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리시기 때문이다(지혜서 8:1).

 

      2. 하나님의 뜻이 모든 물체적 변화의 더 높은 원인임을 예를 들어 증명한다.

 

      7. 그러나 물체의 변화와 변천 중에서 어떤 종류는 일상적, 규칙적으로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면서도 우리에게 경이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늘과 땅과 바다 등에서 보는 자연 질서가 이런 것이다.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시간적으로 아주 짧으며, 대체로 그다지 오래지 않다. 예컨대 떴다가 지며, 때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같은 종류에 속하면서도 오랜 간격을 두고 나타나기 때문에, 덜 관례적이다. 이런 현상을 놀랍게 생각하는 미련한 사람들이 많지만, 이 세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해하며, 여러 세대가 경과하는 동안에 같은 현상들이 반복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수록 경이감이 적어진다. 예컨대 일식과 월식, 어쩌다가 나타나는 별들, 지진, 보통 방법과 다르게 나는 생물들, 그밖에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다. 이런 것들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을 모르는 사람이 심히 많다. 그래서 허망한 철학자들은 마음대로 다른 원인으로 돌린다. 그들은 최고의 원인, 즉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지적하는 원인이 바르면서도 근인(近因)에 불과한 때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물체와 운동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고 편견과 오류에서 생긴 관념을 근거로 삼기 때문에 그들은 틀린 일을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8. 내가 말하는 뜻을 더 명백히 나타내기 위해서 예를 들겠다. 사람의 몸에는 물론 일정량의 근육과 일정한 외형과 위치와 외형이 다른 사지와 일정한 건강 상태가 있다. 이 몸을 지도하는 것은 거기 불어넣어진 영혼이며, 이 영혼에는 이성(理性)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지혜에 참여할 수 있으며, 모든 성도에 대해서 시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스스로 있는 자, idipsum”에 참여한다.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인 하늘 예루살렘은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이런 성도들로 건설되었다. 성경에 예루살렘아, 너는 성읍과 같이 건설되어 스스로 있는 자에 참여하도다라고 노래한 것과 같다(122:3, 불가타).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는 변함이 없는 최고선(最高善), 즉 하나님과 그의 지혜와 뜻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대해서 다른 시에는 천지는 주께서 바꾸시면 바꾸려니와 주는 여상하시도다라고 노래했다(102:26-27).

 

      3. 같은 문제의 계속.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겠다. 그의 이성(理性)적인 영혼은 이미 변함없고 영원한 진리에 참여해 있으며, 그는 행동을 할 때에 반드시 그 진리에 물으며,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 진리 안에서 깨닫지 않으면 결코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진리에 복종하며 순종하기 때문에 바른 행동을 한다. 이런 사람이 그 마음에 있는 비밀한 귀로, 하나님의 정의의 최고 원칙에 묻고 들은 대로, 그 명령에 따라 어떤 자선 행위를 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는 그 노고에 지쳐 병이 든다. 의사에게 물으니, 한 의사는 몸이 건조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다른 의사는 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사람은 옳고 한 사람은 틀린 것이 분명하지만, 두 사람이 다 근본 원인, 즉 신체적 원인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몸이 너무 건조한 원인을 찾아서, 자진해서 한 노고임을 발견할 때에, 우리는 한층 높은 원인을 안 것이다. 그것은 영혼에서 출발해서, 그 지도에 따른 신체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제일 원인은 아닐 것이다. 노고보다 더 높은 원인은 물론 변함없는 지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현인(賢人)의 영혼은 사랑으로 지혜를 섬기며 그 말없는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자발적 봉사라는 노고를 치른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병의 제일 원인은 그 이름의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인이 그 경건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얻었다고 상상하겠다. 그 사람들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쾌락을 얻거나 육신적인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 보수를 바란 것이다. 또 이 선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짐 나르는 짐승들을 썼다고 하면, 이런 짐승들은 이성이 없으며 선행을 생각해서 짐을 나른 것이 아니라, 본능적 쾌락을 얻고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다. 끝으로 그는 심지어 무감각 한 것들 예컨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의복과 돈과 책자와 그 밖에 비슷한 것들을 썼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사용한 이런 것들은 생물이나 무생물이며, 때와 장소에 따라 필요한 대로 그것들을 혹은 움직이며 혹은 수리하며 혹은 소모 또는 파괴하며 혹은 개량했다. 그러면 이 모든 물건에 관해서, 나는 이 모든 보이며 변하는 행동들의 원인은 보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 어떤 다른 원인이 있었느냐고 물을 수 있다. 현인의 의로운 영혼에 하나님의 지혜가 자리를 잡고, 그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모든 것을 사용한 것이다. 그 사용된 것들 중에는 악하고 비이성적(非理性的)인 영혼들과 영감으로 움직인 신체와 아무 감각도 없는 물체도 있었다. 하나님의 지혜가 경건한 경배 행위로 선하고 거룩한 영혼을 자기에게 복종시킨 후에 선한 사업을 위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뜻대로 쓰시며,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보이는 것들을 만드신다.

 

      9. 우리가 현인 한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은 여러 사람이 구성한 단체나 어떤 도시나 심지어 전 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 경건하고 완전하게 복종하는 사람들이 사건들을 지배하며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공동체에 적용해도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우선 죽을 인간들답게 이 유랑생활에서 훈련을 받아야 하면, 채찍으로 온유와 인내를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타향생활 중에 떨어져 있는 저 하늘나라, 저 높은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기로 하자.

      영들로 자기의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의 사역자를 삼으시는(104:4, LXX) 하나님께서는 영들 사이에 계시며, 그 영들은 완전한 평화와 우애로 단결되며, 일종의 영적인 불로 융합되어 한 의지(意志)를 이루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기의 집과 자기의 성전에 계신 것과 같이, 마치 높고 거룩하고 신비로운 자리에 앉아 계신 것 같다. 거기서부터 만물의 지극히 질서 정연한 운동을 통해서 자기를 확산시키신다. 그가 사용하시는 피조물들을 우선 영적인 것이며 다음에 물질적인 것들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그의 변함없는 기쁘신 뜻대로 사용하시되 빗물체적인 것과 물체적인 것, 이성적인 영들과 비이성적인 영들, 그의 은혜로 선한 영들과 그들 자체의 뜻대로 사악한 영들,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낮고 조잡한 물체들을 미묘하고 강한 물체들이 일정한 질서에 따라 지도하는 것과 같이, 모든 물체는 생명의 영(생령)이 지도한다. 비이성적인 생령은 이성적인 생령이 지도하며, 게으르고 죄 많은 이성적 생령은 경건하고 공정한 이성적 생령이 지도하며, 이 후자는 창조주 자신이 지도하신다. 만물이 그에게,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어 함께 세워졌다(1:16). 이와 같이 형체 있는 존재의 모든 형태와 운동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제일 원인이며 최고 원인이다. 이 지극히 광대무변한 피조 세계 전체에서, 보이며 감각되는 방법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최고 지배자의 내면적이며 보이지 않으며 영적인 궁정의 명령이나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이 없다. 상과 벌을 주시며 은혜와 보응을 주시는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공의에 따라 명령과 허가가 있는 것이다.

 

      10. 사도 바울은 영혼을 내리누르는 썩어질 육체의(지혜서 9:15) 짐을 지고 있었을 때에, 아직 부분적으로 또 희미하게 보았을 뿐이며(고전 13:12),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했으며(1:23), 속을 탄식하여 양자되기를 곧 그의 몸의 구속을 기다렸지만(8:23), 그래도 혹은 음성으로, 혹은 서간으로, 혹은 주의 몸과 피로, 부호들을 이용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말할 때에는, 사도의 혀나 양피지나 잉크나 음성이나 가죽에 쓴 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땅의 열매에서 받은 것만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비적인 기도로 성별되었으며,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 주의 수난을 기념하면서 합당하게 받은 것이다. 비록 사람의 손이 보이는 형태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성별되어 위대한 성체(聖體)가 되었으며, 그것을 성별한 것은 오직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사람이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결과이다. 우선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자들의 보이지 않는 일들을 출발시키셨기 때문이다. 그 사역자들은 사람들의 영혼이거나 하나님께 복종하는 숨은 영들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임재를 알리며 자기를 계시하시기 위해서, 적당한 줄로 아시는 방법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피조물에게 어떤 감각할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나타내시는 것을 놀랍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하나님은 그런 때에 자기의 실지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변함이 없으며, 그가 지으신 모든 영들보다도 더 내면적이며 더 신비로우며 숭고하시다.

 

      5. 무슨 까닭에 기적은 일상적으로 행해지지 않는가?

 

      11. 모든 영적이고 물질적인 피조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매년 바닷물이 일정한 날에 모여지고 땅 위에 부어진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 시대에 그가 기도를 드리고 비가 내렸을 때에는 오랫동안 날씨가 좋아서 사정이 달랐다. 사람들이 주리고 지쳤고, 그가 하나님에게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비가 곧 내릴 듯한 습한 공기나 그 밖의 조짐은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서, 하나님의 권능이 분명히 나타났으며, 한 기적을 행해 주셨다(왕상 18:45).

      또 하나님은 보통 때에도 번개와 우레를 일으키신다. 그러나 시내 산에서는 보통 때와 달랐고, 들린 음성도 혼란한 소음이 아니고, 지극히 확실한 증거에 의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것은 기적이었다(19:16).

      사람이 심고 물을 주지만, 그 습기를 포도나무의 뿌리로부터 포도송이에까지 끌어올리며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인가?(고전 3:7). 그러나 주님의 명령으로 물이 보통 이상으로 신속히 포도주로 변했을 때에는(2:9), 거기에 하나님의 권능이 계시되었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인정한다. 하나님 이외에 누가 보통 때에 나무에 잎과 꽃으로 옷을 입히는가? 그러나 제사장 아론의 지팡이에 꽃이 피었을 때에, 의심하는 인간들과 일종의 회화(대화)를 나눈 것은 하나님이셨다(17:8). 모든 동물의 모든 살은 땅의 흙이 그 공통된 원료인 것이 확실하지만, 땅이 생물을 내라고(1:24) 명령하신 분 이외의 누가 그렇게 하시는 것인가? 그는 말씀으로 그들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같은 말씀으로 그들을 지배하며 지도하신다.

      그러나 그가 같은 그 원료를 모세의 지팡이로부터 뱀의 살로 즉각적으로 바꾸셨을 때에(4:3), 그 변화는 비록 변하는 물건에 생긴 것이었지만 보통 것이 아니었고 한 기적이었다. 그러나 필요한 단시간 동안 그 뱀을 살리신 하나님 이외의 누가 태어나는 모든 생물을 살리는가?

 

      6. 색다른 것만이 기적이 된다.

 

      또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났을 때에(37:1-10), 각 시체를 그 원래의 영혼에게 돌려주신 분은 누구였는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살덩어리에 생명을 주셔서, 나게 하며 죽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닌가?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종의 강 속에서 움직이며 흐르며 숨은 것이 보이게 되며 보이던 것이 숨게 될 때에, 이런 일시적인 것들의 일상적인 과정을 우리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떤 교훈을 가르칠 목적으로, 같은 결과가 비상한 변화로 생겨날 때에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7. 마술로 위대한 기적을 행한다.

 

      12. 나는 여기서 지성(知性)이 부족한 사람이 당하는 곤란을 본다. , 마술로도 기적을 행하며, 바로의 마술사들도 뱀과 그밖에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훨씬 더 놀라운 것은, 뱀을 만들 수 있는 애굽(이집트) 술객들은 아주 작은 이를 만들 수 없었다. 애굽의 자존심이 대단한 백성들은 아주 작은 이 때문에 고통당했고, 그것을 만들지 못한 술객들은 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라고 말했다(8:19). 이것을 보면, 죄를 짓고 숭고하고 아름다운 하늘 고향을 쫓겨나니 이 가장 깊은 암흑에 떨어진 천사들과 공중의 영들도 위에서 주시는 능력을 받지 않고는 마술을 쓰더라도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애굽 술객들에게 이 능력을 주신 것과 같이, 속이는 자들을 속이시기 위해서 능력을 주시는 때가 있다. 그들은 악령들을 달래서 마술을 행함으로써 훌륭한 체 했지만, 하나님의 진리에 정죄를 받게 마련이었다. 혹은 믿는 자들을 경고하시기 위해서 이 능력을 주시는 때가 있다. 이런 것이 선행인 듯이, 그것을 하고자 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혹은 의인의 인내심을 훈련하며 시험하며,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이 능력을 주신다. 욥이 모든 재산과 자녀와 건강까지 잃어버리게 한 기적들에는 적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