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2권 1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2. 10. 21:20

삼위일체론 제 2 권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김 종 흡 옮김

 

      제 2 권

 

      개요: 저자는 삼위일체의 동등성을 계속 옹호한다.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며, 하나님이 여러번 나타나신 문제를 논하면서, 보냄을 받으신 분이 보내신 분보다 작은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삼위일체는 만사에 동등하며, 다 같이 불변하며 보이지 않으며 전능해서, 보내시며 나타나실 때마다 불가분적으로 함께 역사하신다고 한다.

 

      서론

 

      1. 사람들이 그 연약한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며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 그들은 이 일에 따르는 여러 가지 곤란과 피로를 경험으로 알게 된다.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을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보려고 하기 때문에, 또는 성경 말씀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곤란인 것이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영혼이 어려운 시련을 겪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화롭게 된 후에 기쁨을 얻게 하시려는 뜻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사람들이 모든 모호한 점을 제거하고 어떤 확신을 얻은 때에는, 이렇듯 심원한 비밀을 탐구하다가 길을 잘못 드는 사람들을 아주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의 경우에, 두 가지는 관용하기 어렵다. 진상이 알려지기 전에 어떤 일을 기정 사실로 경솔히 인정하는 것이 하나요, 진상이 알려진 후에도 이렇게 인정한 거짓을 옹호하는 것이 또 하나다. 이 두 가지 결함은 진리 탐구와 성경 연구에 심대한 방해가 되는 것이므로, 만일 내가 기도하며 기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호의의 방패와(시 5:12) 자비의 은총으로 나를 호위해 주셔서 이 두 가지 결함을 면할 수 있다면, 나는 게으름 없이 성경과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겠다. 성경과 피조물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성경에 감동을 주시고 피조 세계를 창조하신 분 자신을 우리가 탐구하며 사랑하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나는 담대히 의견을 말할 것이며, 악인들에게 여지없는 혹평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고결한 분들의 검토를 더 갈망할 것이다. 심히 아름답고 심히 겸손한 사랑은 비둘기 같은 눈을 너그러이 환영하지만, 개의 이빨에 대해서는 지극히 조심하는 겸손으로 피하거나 심히 견고한 진리로 그것을 무디게 해야 할 뿐이다. 오류에 빠졌거나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보다, 누구의 비판이라도 나는 원할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의 비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를 비난하는 것은 그의 원수나 친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원수가 욕설을 하면 참아야 하며, 친구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는 가르쳐야 한다. 그가 가르칠 때에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칭찬하는 사람이 오류에 빠졌다면 그는 오류를 굳히며, 아첨하는 사람은 오류에 끌어넣는다. 그러므로 "의인은 자비로 나를 징계하며 책망하겠으나 죄인의 기름은 내 머리에 붓지 못하리라"(시 141:5, LXX).

 

      1.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원칙이 있으며, 그 성경 말씀에는 세 가지 양식이 있다.

 

      2.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성경이 전파한 것을 우리는 가장 굳게 믿고 지킨다. 그것은 유식하고 정통적인 성경 해석가들이 이를테면 규범(規範)적 원칙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가진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서 성부와 동등하며, 그가 받은 종의 형체를 따라서(빌 2:6-7) 성부보다 작으시다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종의 형체로서는 성부보다 작으실 뿐 아니라 성령보다도 작으시며, 그뿐 아니라 자신보다도 작으시다. 그것은 그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받으신 종의 형체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본체를 잃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 권에서 인용한 성경 말씀들이 가르친 바와 같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어떤 말씀은 어느 원칙에 의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피조물이 되신 성자가 작다는 원칙인지, 또는 성자가 확실히 작지 않고 성부와 동등하시며, 그러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서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 빛에서 난 빛이라고 이해하는 원칙인지 분명하지 않은 말씀들이 있다. 참으로 우리는 성자에 대해서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성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고만 말하고,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자의 경우에는 다른 분이 있어서 성자는 그 분에게서 나며 그 분의 아들이신 것이 분명한데, 성부의 경우에는 아들이 있어서 그에게서 나신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 있을 따름이다. 대개 아들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나서 그가 되었고 그 아버지의 아들인 것인데,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나는 법은 없고, 자기 아들의 아버지가 될 뿐이다.

 

      3. 그러므로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에 관한 일들을 말할 때에, 성부와 성자의 본질의 동일성(同一性)과 동등성을 가리킨다. 예컨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며(빌 2:6-7), 그밖에 비슷한 본문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은 성자를 그 종의 형체 때문에, 즉 그 취하신 피조물의 인간적인 변하는 본질 때문에 성부보다 작다고 한다. 예컨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느니라"(요 5:22). 그리고 조금 뒤에,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고 하신다(요 5:27). 또 어떤 말씀은 성자가 작으시다든지 동등하시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다만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것만을 알린다. 예컨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부어 그 속에 있게 하셨느니라"(요 5:26), 또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피조물에서 형체를 취하시고 성부보다 작으시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면, 성부께서 성자보다 먼저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마 14:26). 또 진흙과 침으로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성부께서 먼저 보게 하셨고(요 9:6-7), 그밖에 성자께서 사람들 사이에 육신으로 나타나서 하신 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것만을 한다고 하신 성자께서 성부가 먼저 하신 후에 하시려는 것이었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도 이런 추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이 말씀들을 하신 것은 성자의 생명은 곧 성부의 생명이어서 변함이 없지만,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셨고, 성부와 성자의 행동은 분리할 수 없으며, 그렇더라도 성자가 역사하는 권능은 아버지이신 분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성자가 성부를 보신다는 것은 성자가 성부를 보시기 때문에, 그는 성자시라는 뜻이다. 성자의 경우에 성부에게서 난다, 바꿔 말하면 성부에게서 출생한다는 것은 성부를 본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 성부의 일하시는 것을 본다는 것은 성부와 함께 일하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결과 그는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 성자는 다른 일을 그와 같이 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자기도 그린다든지, 같은 일을 다른 모양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생각한 것을 몸이 같은 글자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무엇이든지 그와 같이 행한다"(요 5:19)고 아들은 말씀하신다. 그것을 "그와 같이" 행한다고 하시는 것은, 성부의 일과 성자의 일은 분리할 수 없고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로부터 성자에게로 간다. 따라서 성자는 성부가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

      이 원칙에 따라서 해석가들이 하는 말은, 한 편이 다른 편보다 작다고 해석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어느 쪽에서 났느냐 하는 것으로 해석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원칙에서 다른 뜻을 끌어냈다. 즉 성자를 작다고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 학식이 적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이 본문들을 설명하려고 할 때에, 종의 형체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동안은, 그 참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을 느낄 것이다. 이 폐단을 피하려면, 우리가 방금 말한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 원칙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보다 작으시지 않으며, 성부에게서 나셨다. 이런 말은 그가 동등하시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출생을 알린다.

 

      2. 성자에 대한 어떤 표현 양식은 어느 쪽 원칙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4. 그러나 내가 말하기 시작한 것과 같이, 성경의 어떤 말씀은 어느 원칙에 따라 해석할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성자가 취하신 피조물 때문에 성부보다 작으시다는 원칙인지, 또는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시면서도 성부에게서 나셨다고 계시된 원칙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와 같이 모호해서 풀어내며 식별할 수 없다면, 그런 때에는 적어도 나는 어느 원칙으로 보아도 위험이 없는 해석 방법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예컨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다(요 7:16). 이는 앞 권에서 고찰한 것과 같이, 종의 형체에 적용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본체에 적용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본체에서는 성자가 성부와 동등하시며, 그러나 성부에게서 나셨다. 하나님의 본체로 계시는 성자와 그의 생명은 서로 다르지 않고, 성자는 그 생명 자체이시다. 그와 같이 성자와 그의 교훈은 서로 다르지 않고, 성자가 곧 그 교훈이시다. 따라서 "그가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말씀이(요 5:26) 성부가 생명이신 성자를 낳으셨다는 뜻과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이, "그가 그의 교훈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그가 그 교훈이신 성자를 낳으셨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르다. 그래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는 말씀은 마치 나는 나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에게서 났노라고 하신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3. 성령에 관한 어떤 일들은 한 가지 원칙으로만 해석해야 한다.

 

      5. 성령에 관해서도, 성령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말씀이 없는데, 주님 스스로 언명하셨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즉시 계속해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고 하시지 않았다면, 아마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신 것 같이, 성령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셨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하셨고, 성령에 대해서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라고 하시며, 또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가 내 것을 가지고"라고 하신 뜻을 설명하셨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5). 그러므로 역시 성령께서도 성자와 같이 성부에게 속한 것을 가지셨다고 해석된다.

      우리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지 않다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요 15:26)고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성부에게서 나오시므로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아들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행할 뿐이라"고 하셨다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보다 작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종의 형체를 따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 하신 것이며, 성자가 성부보다 작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이 구절에서도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들은 것을 말하리라"고 하신다고 해서 성령이 작다고 추리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데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시며,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므로, 우리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허락한다면, 또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 무슨 까닭에 두 분을 모두 아들이라거나 나셨다고 하지 않고 성자는 독생자라고 하며, 성령은 아들도 아니요 나신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를 논할 것이다. 나셨다면 확실히 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4. 성부가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은 불평등을 증명하지 않는다.

 

      6. 그러나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여기서 깨는 것이 좋다. 성자의 말씀에 "아버지여,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므로(요 17:5), 이 말씀도 성부가 성자보다 크심을 알린다는 자기들의 주장에 유리하다고 그들은 상상한다. 성령도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요 16:14). 성령도 성자보다 크신가? 그뿐 아니라, 성령이 성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그가 성자의 것을 받으시리라("내 것을 가지고," 요 16:14), 따라서 성부의 것을 받으리라고 하신다(무릇 성부에게 있는 것은 성자의 것이므로). 그렇다면 성령이 성자를 영화롭게 하실 때에, 성부도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그러하므로 무릇 성부에게 있는 것은 성자의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성부가 영화롭게 하실 때에, 성부가 영화롭게 하시는 성자를 성령이 영화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영화롭게 하는 분이 영화를 받는 분보다 크시다면, 서로 영화롭게 하는 분들은 동등하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해서(요 17:4), 성자가 성부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한다. 성령이 성부가 영화롭게 하시는 성자를 영화롭게 하시지만, 성부나 성자가 성령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으므로, 성령이 성부나 성자보다 크시다는 생각을 자칫 조심해야 한다.

 

      5. 성자와 성령이 파견되신다고 해서 작으신 것이 아니다. 성자는 자기를 파견하신다. 성령의 파견에 대하여.

 

      7. 이 문제에서 자기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발견되자, 그들은 다른 논법을 쓰려고 한다. "보내는 분은 보냄을 받는 분보다 크시다.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으셨다고 여러번 말씀하시므로, 성부께서는 성자보다 크시다. 또 성부께서는 성령보다도 크시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라고(요 14:26) 하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말한 대로 성부께서 성령을 보내시며, 성자께서도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고(요 16:7) 하셨으므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 두 분보다 작으시다"고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 나는 우선 어디서부터 어디로 성자는 보냄을 받으셨는가를 검토하겠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다"고(요 16:28)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이 보냄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같은 복음서 기자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다음에 "그가 자기 땅에 오매"라고 첨가하기 때문이다(요 1:10-11). 그는 확실히 그가 오신 곳으로 파견되셨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이 세상에 계셨으므로 이 세상에 파견되신 것이라면, 그는 그가 계셨던 곳으로 파견되셨던 것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이 하셨다고 전하는 "나는 천지에 충만하니라"(렘 23:24)는 말씀도 같은 뜻을 알린다. 어떤 사람들은 성자가 이 말씀을 선지자에게 또는 그의 안에서 하신 것이라고 하므로, 만일 그렇게 성자가 이 말씀을 하셨다면, 그는 이미 계신 곳에 파견되신 것이 아닌가?

      "나는 천지에 충만하니라"고 하신 분은 도처에 계신 것이다. 만일 성부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면, 성부는 그의 말씀 및 지혜와 떨어져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었는가? "지혜는 세상 끝까지 힘차게 펼쳐지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린다"고 하셨다(지혜서 8:1). 그러나 성부께서는 성령과 떨어져 어디에도 계실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도처에 계시다면 성령도 도처에 계시다. 따라서 성령은 그 이미 계신 곳에 파견되셨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당신은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 139:8, LXX)라고 해서 하나님이 도처에 계시다는 뜻을 말하며, 그 앞 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말한다: "내가 주의 신(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8.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그들이 계신 곳에 파견되신 것이라면, 우리는 이 파견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이제 물어야 한다. 성부에 대해서만은 파견되셨다는 말씀이 아무데도 없다. 그런데 성자에 대해서 사도가 한 말씀이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하는데 여자라고 해서 처녀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히브리 말투로 여자는 성별(性別)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함으로써, 성자가 여자에게서 나신 것이 곧 그 파견되셨다는 충분한 증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나심으로써 성자는 이 세상에 계셨고,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써 이 세상에 파견되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자는 성령 없이 파견되실 수 없었다. 성부가 성자를 보내실 때에, 즉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을 때에 확실히 성령 없이 보내신 것이 아니었다고 해석되기 때문일 뿐 아니라, 복음서에서 마리아가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했을 때에 천사의 대답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라"고 했기 때문이다(눅 1:34-35).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라"고 하며(마 1:18), 이사야서에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으로 자기의 장차 오실 것에 대해서 "주께서 나와 그 신(영)을 보내셨느니라"고 한다(사 48:16).

 

      9. 혹시 어떤 사람은, 성자는 자신에 의해서도 파견되었다 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이유로서, 마리아에 의한 잉태와 출생은 삼위일체가 하신 일이며, 삼위일체의 창조 작업으로 만물이 창조되기 때문이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에 그는, 성자가 자신을 파견하신 것이라면, 어떻게 성부가 파견하셨겠느냐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우선 질문을 하겠다: 성자께서 자기를 거룩하게 하셨다면, 어떻게 성부께서 그를 거룩하게 하셨는지를 말해보라. 주께서 두 가지를 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하시고(요 10:36), 또 다른 곳에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나이다"라고 하신다(요 17:19).

      나는 또 묻겠다: 성자가 자기를 내어주셨다면, 어떻게 성부가 그를 내어주셨겠는가? 사도 바울이 두 가지를 다 말하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라고 하나(롬 8:32), 다른 곳에서는 구주 자신에 대해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원어에서는 '내어주신') 이"라고 한다(갈 2:20). 만일 그가 이 말씀들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는 성부와 성자의 뜻이 하나이며, 그들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자의 파견은 곧 성육신과 처녀 탄생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일들도 성부와 성자의 분리할 수 없는 단일 행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령도 확실히 이 일에서 배제되지 않으셨다. 성령에 대해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나타났더라"고 분명히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이 성자를 어떤 방법으로 보내셨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말하는 뜻이 더 분명하게 될 것이다. 성부가 성자에게 가라고 명령하시고, 성자는 그 명령에 순종해서 가셨는가, 그렇지 않으면 성부는 용무나 의견만 말씀하신 것인가? 그러나 어느 쪽으로 하셨든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말씀으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성부가 말씀으로 성자를 보내셨다고 하므로, 그 보내는 일은 성부와 그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성부의 말씀은 곧 성자 자신이므로,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성자가 파견되셨다. 성부께서 시간 내의 말씀을 창조하시고, 영원하신 성자가 파견되어 육신으로 시간 내에 나타나게 하셨다는, 이런 불경건한 논의를 누가 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 자체 안에서, 즉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었던 그 말씀,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지혜 자체 안에서 시간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가 언제 육신으로 나타날 것인가가 결정된 것이 확실하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가 언제 육신으로 나타날 것인가가 결정된 것이 확실하다. 태초에 아직 시간의 시작은 흔적도 없이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으므로, 어느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사이에 거하시리라는 것이 말씀 자체에서 시간과 관계없이 발언되었다(요 1:1-2, 14).

      그리고 이 기한이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 즉 성육신한 말씀이 시간 내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다. 그러나 어느 때에 이 일이 있으리라는 것은 시간 밖에서 말씀 자체 안에서 표명되었다. 때와 기한의 질서는 확실히 시간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안에 있다. 따라서 성자가 육신으로 나타난 분을 파견되었다고 하며,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은 분을 보내셨다고 하는 것은 합당한 말이다. 신체의 눈앞에서 외면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은 영적인 본성의 내부 구조 안에서 시작되며, 그 때문에 파견된다는 말을 쓰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자가 취하신 종의 형체는 성자의 위격이지만, 성부의 위격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성부께서 동등하게 보이지 않는 성자와 함께 성자를 보이게 함으로써 보내셨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성자가 보이게 되시고, 성부와 함께 보이지 않는 것을 그치게 되셨다면, 바꿔 말하면, 보이지 않는 말씀이 본성이 변해서 보이는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때에는 성부에게서 파견된 성자는 파견된 분일뿐이요, 성부와 함께 파견하기도 하는 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종의 형체를 쓰셔도 하나님의 본체는 변하지 않은 채로 있었으므로, 성자에게서 보이게 된 보이게 된 것은 계속 보이지 않는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즉 동일한 성자가 보이지 않는 성부와 보이지 않는 성자에 의해서 파견되어 보이게 되셨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그는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가? 그 때에는 종의 형체를 따라 말씀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있으며,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고 하신 것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요 8:15).

 

      10. 그러므로 성자가 파견되셨다고 하는 것은 신체가 있는 피조물로서 외면적으로 나타나셨으며, 그 영적 본성은 내면적으로 인간의 눈에서 항상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라면, 성령에 대해서도 파견되었다고 하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때에 어떤 피조물의 형체가 만들어져서, 그것을 수단으로 성령이 보이게 나타나시게 하기 때문이다. 비둘기 모양으로 주님 자신 위에 내리신 때라든지(마 3:16) 승천 후 10일이 지난 오순절 날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소리가 하늘에서 왔으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진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한 것과 같다(행 2:2-4).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난 이 역사를 가리켜 성령을 보내셨다고 한다. 성부 성자와 함께 보이지 않고 변함없는 그 성령의 본질이 나타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외형적인 표적들에 감동되어, 그의 이 시간 내의 출현으로부터 영원히 계시는 그의 숨은 영원성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6. 성령이 피조물을 취하신 것은 말씀이 육신을 취하신 것과 같지 않다.

 

      11. 또 아무데도 성부 하나님이 성령보다 크시다든지, 성령이 성부 하나님보다 작으시다는 말씀이 없다. 성령이 나타나실 때에 피조물의 모양을 취하신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될 때에 인자의 모양을 취하신 것은 달랐다. 인자는 다른 거룩한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되,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시려는(히 1:9) 것도 아니며, 말씀을 더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에서 월등하려는 것도 아니며, 다만 그가 말씀 그 자체였다.

      육신 안에 있는 말씀과 육신이 된 말씀은 다르다. 즉 사람 안에 있는 말씀과 사람이 된 말씀은 다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든지(요 1:14),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고 하든지(눅 3:6) 육신 또는 육체는 사람을 의미한다. 육체에는 영혼이나 마음이 없지 않으며, "모든 육체"는 모든 사람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나타나실 때에 취하신 피조물과, 처녀 마리아에게서 취한 육신과 인간의 형체는 취하는 방법이 달랐다. 성령은 비둘기나 바람이나 불을 훌륭하게 만들어, 자신과 영원히 연합하여 자기의 위격과 한 모양이 되신 것이 아니다. 참으로 성령은 변할 수 없으며, 이 표징들이 피조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것과 같이 성령 자신이 혹은 이것으로, 혹은 저것으로 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나타나야 할 때에 나타나서,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섬긴 것이며,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변할 수 없는 분의 명령에 따라 변해 가면서, 죽을 운명의 인간들에게 그 분을 의미하며 알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비둘기를 성령이라고 부르며(마 3:16), 그 불에 대해서 "불의 혀 같이 갈리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한다(행 2:3-4). 이는 성령이 불과 비둘기로 계시되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하나님과 비둘기라든지, 하나님과 불이라고 부를 수 없다. 성자를 하나님과 사람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고(요 1:29), 복음서 기자 요한도 계시록에서(계 5:6)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한 것을 보았다. 이 선지자적 환상은 물질적 형체가 신체적인 눈에 보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 형체의 영적 형상이 정신(심령)에 보인 것이다.

      그 비둘기와 불을 본 사람들은 모두 눈으로 본 것이다. 다만 그 불에 대해서는 거기 사용된 말들 때문에, 과연 눈으로 보았는가 하는 논의가 있을 수 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진 것을 그들이 보았다"고 하지 않고, 그런 것이 그들에게 나타나 보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내게 나타났다고 하는 것과 내가 보았다고 하는 것은 뜻이 다르다. 물질적인 형체들의 영적(정신적) 환상에 대해서는 내게 나타났다고고 하고 내가 보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명확한 물체적 형태로 눈에 보인 때에는, 내게 나타났다고 하지 않고 나는 보았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불에 관해서는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보였는가 하는 것이 논의 될 수 있다. 마치 외면적인 것처럼 내면적 영적으로 보였는가, 또는 참으로 육체의 눈앞에 외면적으로 보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체적 형태로 내려 왔다고 하는 비둘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눈으로 보였다는 것을 의심할 사림이 없었다.

      또 성경에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해서(고전 10:4),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성령을 비둘기라고 부를 수도 없다. 반석은 이미 창조되어 있었고, 그 작용의 성질로 그리스도를 상징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고 부른 것이다. 야곱이 베고 자던 돌에 기름을 부어 주님에 대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나(창 28:18), 이삭이 자기를 죽일 번제나무를 지고 간 것이 그리스도와 같았던 것과 같다(창 22:6). 그것들은 이미 있었던 것에다가 어떤 상징적인 작용이 가해진 것이고, 비둘기와 불과 같이, 오직 그 상징적 작용을 하기 위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과 더 유사한 것은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불꽃과(출 3:2), 광야에서 백성들이 따라간 구름기둥과 불기둥(출 13:21-22), 그리고 산상에서 율법을 주셨을 때에 있었던 번개와 우레였다(출 19:16). 그것들의 물질적인 형태는 어떤 일을 상징한 다음에는 사라지려는 목적을 위해서만 생겨났던 것이다.

 

       7. 하나님이 나타나신 데에 대한 의문.

 

      12.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존재하면서 인간의 감각에 맞는 방법으로 성령의 임재를 알리며 성령을 상징한 물질적 형태들 때문에, 성령이 파견되신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을 하나님보다 작다고는 하지 않는다. 성자에 대해서는 그 취하신 종의 형체 때문에 성부보다 작다고 한다. 종의 형체가 성자의 인격에 포함되며 통일되어 고유(固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경우에 물질적 형태들이 보이게 된 것은 그 순간에 보여야 할 것을 보이고 그 후에는 사라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성부에 대해서는, 떨기나무에서 나온 불같은 물체적 형태를 통해서 파견되셨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경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구름기둥과 불기둥, 산상에서의 번개와 우레, 그 밖의 현상들이 있었다. 이렇게 성부께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피조물의 형태로 사람들의 눈에 물체적으로 보임으로써 성부가 계시된 것이다. 그러나 성자가 이런 현상으로 알려지셨다고 해서, 오래 지난 후에 그에 대해서만은 파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자에게서 나셨을 때에 사도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고 한다(갈 4:4). 성자는 그 이전에도 피조물의 변하는 형태들을 통해서 조상들에게 나타나서 파견되셨던 것이 아닌가? 혹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때 이외에는 성자의 파견을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성령의 경우에는 성육신이 없었는데 무슨 까닭에 파견되셨다고 하는가? 그러나 만일 율법과 예언서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알리려고 한 것은 성부도 아니요 성자도 아니요, 오직 성령뿐이었다면, 무슨 까닭에 지금 와서 성령도 파견되셨다고 하는가? 성령은 전에 이미 형태들을 통해서 파견되셨기 때문이다.

 

      13. 이 문제는 복잡하므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받아, 이런 피조물의 형태들을 통해서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누구였는가를 우선 확인해야겠다. 성부이셨는가, 또는 성자이셨는가, 또는 성령이셨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때는 성부이셨고, 어떤 때는 성자이셨고, 어떤 때는 성령이셨는가; 또는 위격(位格)의 구별이 없이, 이른바 유일신(唯一神) 즉 삼위일체 자체가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 여러 가능성 가운데 어느 것이 참이라고 단정되더라도 다음에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는 그 피조물은 이 목적만을 위해서, 즉 하나님이 그 때에 적당하다고 여기신 방법으로 사람의 눈에 계시되시기 위해서만, 그 피조물이 지어졌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미 있는 천사들이 파견되어서 하나님을 대변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천사들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각각 그 때에 필요한 피조물의 형태를 취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몸을 변해서 그들의 행동에 적합한 물체적 현상을 원하는 대로 취한 것인가이다. 끝으로 우리는 탐구하기 시작한 문제를 고찰해야겠다. 즉 성자와 성령은 이전에도 파견되신 일이 있는가, 그리고 만일 있었다면 그 때의 파견과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는 어느 분도 이전에 파견되신 일은 없었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성자의 경우와 성령이 비둘기나 불의 혀 모양으로 나타나 보이신 경우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8. 삼위일체 전체가 보이시지 않는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사고 방법이 심한 사람들을 문제 삼지 않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르며, 지혜는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지혜서 7:27) 믿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변하게 할 뿐 아니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경건하다기보다 무모한 편이어서, 거룩한 일들을 연구하기에는 마음이 너무도 둔하다. 영혼은 영(靈)적인 존재며 피조물이므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는 분(요 1:3) 이외의 어느 분에게서도 창조되었을 수 없다. 영혼은 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영혼을 지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와 지혜 자체에 대해서 변하며 보인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혼을 지은 이 말씀과 지혜는 영혼과 같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영혼과 달라서 변하지 않는다. 지혜에는 이 불별성(不變性)이 있기 때문에, 지혜에 대해서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고 했다(지혜서 7:27).

      이 사람들은 그 허망한 오류를 성경 말씀으로 지탱하려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호소하며, 유일신 즉 삼위일체에 대해서 사도가 한 말을 성부에 대해서만 한 것이라고 하며, 성자와 성령에 대한 말씀은 아니라고 한다. 사도는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라고 하며(딤전 1:17), 또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분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라"고 한다(딤전 6:15-16).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9. 성부만이 영생하시며 보이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진리는 평화 속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15. 그러나 이 말씀들은 성자나 성령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오직 성부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성자는 처녀에게서 취하신 육신으로 눈에 보이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 자신이 보이셨다고 한다. 즉 성자 자신이 조상들의 눈에 나타나 보이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성자는 그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또한 그 자신이 죽을 운명이며, 그래서 그대들이 해석한 대로 한다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는 말에 분명한 결론이 생긴다. 성자는 그 취하신 우리의 육신 때문에 죽을 운명이라면, 그는 또한 그 육신 때문에 눈에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라.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 말씀들은 성자가 그 육신 때문에 죽을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이전에도 눈에 보이신 것과 같이, 그 이전에도 죽을 운명이셨다." 만일 그들이 성자는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에 죽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럴 때에는 성자와 분리된 성부는 죽지 아니함이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닐 것이며, 만물을 지은 그의 말씀도 죽지 아니함을 잃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몸과 함께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10:28).

      혹은 성령께서도 육신을 취하신 것인가? 여기서 이 사람들은 확실히 그 처지가 곤란할 것이다. 만일 성자는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에 죽을 운명이 되었다고 한다면, 성령은 육신을 취하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성부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하는가? 만일 성령에게 죽지 아니함이 없다면 성자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죽을 운명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에게 죽지 아니함이 있다면,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 말씀은 성부에 대해서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자는 성육신하기 전에도 그 본성으로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노라고 생각하면서 그 방법을 말한다. 즉 변할 수 있다는 것(可變性)을 반드시 죽는다는 것(必滅性)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으며, 이런 의미에서 영혼까지도 필멸적이라고 한다. 영혼이 몸이나 어떤 다른 존재로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이 이전과 현재의 상태가 다른 것은 필멸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이전에 있던 상태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추리를 계속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처녀 탄생 이전에 조상들에게 나타났으며, 같은 한 가지 형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어떤 때는 이런 모양으로 어떤 때는 저런 모양으로 나타났으므로 그는 그 자신의 본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직 육신을 취하시지 않았을 때에 그의 본질이 사람들의 눈에 보였으며, 그 본질은 변할 수 있으므로 필멸적이다. 그리고 성령도 어떤 때는 비둘기 모양으로, 어떤 때는 불로 나타났으므로, 성령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결론을 내린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삼위일체에 해당하지 않고, 오직 성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상가들에게는 주의를 두지 않겠다. 그들은 영혼의 본질은 볼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유일신,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순수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영원 불멸하다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부로서나 성자로서나 성령으로서나 그 권능 하에 있는 물체적 피조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체적인 눈에 나타나신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정통적인 평화로운 연구를 하려 아며, 형체적인 엄정한 책망을 받으면 언제든지 시정을 받을 것이며, 비록 트집을 잡는 원수일지라도 진리를 말할 때에는 기꺼이 그것을 바로잡겠다.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일이 있는가를 탐구해야겠다. 혹은 위격의 구별 없이, 혹은 삼위일체의 어느 한 위격이, 혹은 위격들이 단독으로, 이를테면 번갈아가면서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