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1권 1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2. 10. 20:55

삼위일체론 제 1 권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김 종 흡 옮김

 

      제 1 권

 

      개요: 성경을 근거로 삼아, 삼위일체의 동일성과 동등성을 설명하며, 성자와 성령을 보내심에 대한 본문들을 해석, 검토한다.

 

      1. 이성(理性)을 오용해서 삼위일체 신앙을 공격하는 궤변가들을 반박하려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목적이다. 그들의 오류에는 3중의 원인이 있다. 성경은 오류를 제거하면서 점진적으로 신적 사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진정한 불사(不死)는 무엇인가? 우리가 신적 사물을 이해하도록 신앙이 우리를 양육한다.

 

      1. 이 삼위일체론을 읽는 사람은 우리가 일부 인사들의 궤변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을 체면 손상으로 생각하며, 이성(理性)에 대한 미숙하고 도착된 사랑으로 오류에 빠진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혹은 신체적 감각으로 혹은 타고난 재주와 부지런한 연구로 혹은 기술의 도움으로, 형체 있는 물건들에 대해서 얻은 개념들을 형체 없는 정신적 실재들에 옮겨서, 전자로 후자를 헤아리며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 중에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 영혼의 입장에서 즉 출발점에서 교묘하고 그릇된 원칙들을 끌어내어 이론을 세운다.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변천하는 피조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해서 변함없는 실재, 즉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한다. 그러나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며 알고자 하는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즉 그 죽을 운명의 짐에 눌리기 때문에 더욱 더 담대하게 자기들의 선입견을 주장해서 스스로 이해의 길을 막고, 그릇된 의견일지라도 여전히 고집하면서 한번 옹호하던 것은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참으로 내가 말한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병이다. 즉 육신을 따라 하나님을 논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사람의 영혼과 같은 정신적 피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물체나 정신적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릇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론에 근거를 제공할 만한 것은 만들어진 물체나 정신적 피조물, 또는 조물주 자신에게서 발견되지 않으므로 그들은 진리에서 그만큼 더 멀다. 예컨대 물체는 희거나 붉지만, 하나님을 희다거나 붉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잘못이다. 인간의 영혼은 잊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는 큰 권능이 있어서 자신을 낳았다고 믿는 사람은 더 큰 과오를 범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 존재나 물질적 존재도 존재하기 위해서 자체를 낳는다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성경은 인간의 마음에서 이런 오류들을 씻어버리려고, 어린이들에게 알맞도록 각종 분야에서 표현을 따왔다. 우리의 지성(知性)이 그런 말들에서 힘을 얻어, 이를테면 점진적으로 거룩하고 숭고한 일들을 향해서 올라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예컨대 "나를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소서"라고 해서(시 17:8), 물질적인 것에 관한 용어까지도 사용한다. 또 정신적인 피조물에서 여러 가지 것을 빌려, 예컨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출 20:5), "내가 사람을 지었음을 한탄하노라"(창 6:7) 하신 것 같이,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해야 되겠다는 뜻을 알린다. 그러나 성경은 전연 없는 것에서 용어를 얻어다가 비유나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예가 없다. 없는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사람들, 따라서 스스로 진리의 길을 막아버리는 사람들은 동류들보다도 더 헛되고 유해한 자랑을 하는 것이다.

      성경이 피조물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어린이들을 꾀는 것과 같다. 성경의 목적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서 그들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은 것에 올라서며, 낮은 것을 버리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마땅하면서 피조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은 성경에 언급이 극히 적다. 예컨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신다(출 3:14). 그런데, 있다는 말은 신체와 영혼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성경은 여기서 특별한 뜻으로 해석되기를 원치 않았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의 말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고 하는데(딤전 6:16), 영혼도 죽지 않는다고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그러하지만, 진정한 죽지 아니함은 또한 변하지 아니함이며, 이것이 피조물에는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마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도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고보도 말 한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다윗도 "주께서 (그것들을)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라고 한다(시 102:27-28).

 

      3. 이와 같이 하나님은 스스로 변함없이 만물을 변하며 스스로 시각적으로 움직임이 없이 시간적인 것들을 창조하시므로, 하나님의 본질을 생각하며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볼 수 있으려면, 정화(淨化)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직 이 능력을 받지 못했으므로, 믿음으로 힘을 얻어 더 접근할 수 있는 길로 인도됨으로써 실재를 파악하는 능력과 기술을 얻으려 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골 2:3) 언명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을 얻었지만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천거할 때에, 하나님과 능력이 동등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약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추천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다시 첨가 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2-3). 조금 뒤에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들으면, 자기를 얕잡아 보고 하는 말이라고 해서 기분이 나빠하고, 대개는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할 만한 말이 없는 것이라고 믿으며, 자기들이 듣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할 때에 우리는 간혹 설명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설명이 아니다. 그들은 설명을 이해할 능력이 없으며, 혹은 우리 편에도 이해하며 표현할 힘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요구하는 것을 이해할 힘이나 준비가 전연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원하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간교해서 우리의 무지를 감추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을 시기해서 악의로 하는 짓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흥분하고 노해서 우리를 떠난다.

 

      2. 이 글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논하려는가?

 

      4.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요구하는 그 일을 설명하도록 전력을 다하겠다. 즉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substantia 또는 essentia)이시라고 말하며 믿으며 깨닫는 것이 바르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우리의 구실에 희롱을 당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며, 최고선(最高善)이 있다는 것과, 완전히 정화된 마음이라야 최고선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또한 그들이 최고선을 보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의 눈이 약하기 때문이며, 믿음으로 인정받은 의(義)로 영양을 얻어 강하게 되지 않고서는 최고선과 같은 초월적인 빛을 주시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신앙에 이렇게 할 힘이 있는지를 성경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알아야 하겠다. 다음에 만일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우리는 혹시라도 말 많은 논객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유능하기보다 거만해서 위험한 병에 걸렸지만, 의심할 수 없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기를 우리는 바라는 것이다. 만일 이런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진리 자체나 우리의 설명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들은 돌아와서 바른 순서에 따라 우선 믿음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믿는 자들을 위해서 거룩한 교회에 맡겨진 약이 얼마나 건강에 좋은지를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조심하는 경건생활은 그 약을 이용해서 허약한 마음을 고치며, 변함없는 진리를 깨닫는 마음이 되게 한다. 무질서하고 경솔한 경건 생활은 해롭고 그릇된 신념에 마음이 빠지게 만들 수 있다. 내 자신은 의심이 있을 대에는 탐구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오류에 빠졌을 때에는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3. 독자에 대한 저자의 요구.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의 오류는 저자의 탓이 아니다.

 

      5.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나와 같은 확신이 있는 곳에서는 나와 함께 전진하며, 나와 같은 의심이 있는 곳에는 나와 함께 탐구하며, 자기가 잘못이라고 인정하면 내게로 돌아오며,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나를 불러 돌이키게 하라. 이와 같이 성경에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라고 한(시 105:4) 그분을 찾는 우리는 함께 사랑의 길에 들자. 이것은 내가 쓴 글들을 읽는 사람들과 주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맺는 거룩한 약속이다. 특히 이 글은 삼위일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통일성을 탐구하며, 이 주제보다 오류가 더 위험하며, 탐구가 더 힘들며, 진리를 깨달을 때에 더 유익한 것을 달리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읽어가는 도중에 "이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으니, 표현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내가 한 말을 비난하는 것이지 나의 믿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모든 일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한 사람은 없다. 만일 내 글에서 이런 결점을 발견한다면,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이해하는데, 내 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를 알아보라. 만일 그렇다고 생각하면 내 책을 내려놓거나 또는 버리고, 이해되는 사람들의 글에 시간과 노력을 돌리라.

      그러나 그가 이해하는 사람들처럼 유창하고 분명하게 쓰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모든 사람이 쓴 모든 글이 모든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더 분명한 글은 얻지 못하고 우리 글만 만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같은 화제에 대해서, 문체가 달라도 믿음이 같은 여러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유익하다. 그래야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 문제에 접촉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 글이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세하고 숙련된 글들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와 싸워서 지식을 넓히도록 결심하며 공부해야 한다. 불만과 비난으로 나를 침묵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만, 이것을 잘못된 말이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의견을 옹호하고 싶거나 내 의견을 반박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 사랑과 성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리고 수고로운 대로 내게 알려 준다면(내가 아직 살아 있다고 전제하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지극히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내게 알리지 못하더라도 그가 알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내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지 못하더라도(시 1:2) 짧은 시간이나마 시간이 있는 대로 묵상한다. 그럴 때에 묵상한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기록해 둔다. 나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확신한 진리를 모두 굳게 지키도록 하시며, 하나님이 비밀한 영감과 충고로나 명백한 말씀으로나 또는 형제들과의 토의로 "이것도 나에게 나타내시리라"고 확신한다(빌 3:15). 이렇게 되기를 나는 기도하며, 이 신념과 소원을 그의 수중에 둔다. 그는 주신 것을 지키며 약속하신 것을 실현하실 능력이 완비하시다.

 

      6. 그러나 이해력이 둔한 사람들은 내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어떤 곳에서는 내가 하지 않은 생각이 있다거나, 내가 한 생각이 없다고 믿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오류를 내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나는 어두운 밀림 속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듯 할 때가 있는데, 나를 따라 오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릇된 교리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것이 내 탓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 가지 오류를 많이 범하고 있는 이단자들은 모두 그 그릇된 교리를 성경 말씀으로 옹호하려고 하지만, 그와 같은 오류를 거룩한 성경 말씀에 돌리는 것이 아무도 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법 곧 사랑이 내게 주는 분명한 충고가 있으며, 그 지극히 온유한 원칙이 내게 하는 명령이 있다. 내가 가르치지 않은 그릇된 생각을 내가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그릇된 가르침을 싫어하는 사람과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나는 거짓을 옹호하는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기보다 그 거짓을 비판하는 사람에게서 비난을 받는 편을 택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 오류를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내게 대한 비난은 옳지 않지만 오류가 비난을 받는 것은 옳다. 그와 반대로, 진리가 비난하는 의견을 내가 가르쳤다고 해서 나를 칭찬한다면, 그 칭찬은 옳지 않다. 진리가 비난하는 그 오류 자체를 칭찬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착수한 일을 이제부터 시작하겠다.

 

      4. 삼위일체에 대해서 정통 신앙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7. 거룩한 신구약 성경의 정통적 해석가들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글을 쓴 선배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그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목적으로 삼은 것은 한 가지였다. 즉 성경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의 통일을 이루며 나눌 수 없는 동등성을 이룬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므로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났으므로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영에 불과하며 또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며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속한다.

      같은 이 삼위일체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며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달리며 장사되며 사흘만에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일은 성자만이 하셨다. 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이 삼위일체가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 위에 내렸다는(마 3:16) 뜻이 아니다. 주님의 승천 후 오순절에 큰 바람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렸을 때에, 같은 이 삼위일체가 불의 혀 같이 갈라져서 각 사람 위에 임하셨다는(행 2:2-4) 뜻도 아니다. 이것들은 성령만이 하신 일이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나(막 1:11), 세 제자가 그와 함께 산상에 있었을 때에(마 17:5)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난 것과,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소리가 난 것은(요 12:28), 같은 이 삼위일체가 하신 일이 아니라, 성자에게 하신 성부의 말씀일 뿐이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신다. 이것이 정통 신앙이므로 또한 나의 신앙이다.

 

      5. 삼위일체에 관한 어려운 문제들: 어떻게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시며, 불가분적으로 역사하시는 분들이 어떻게 어떤 일은 각각 따로 하시는가?

 

      8.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부가 하나님이시며 성자가 하나님이시며 성령이 하나님이시라고 들으며, 이 삼위일체는 세 신이 아니라 한 신이라고 들을 때에, 이 믿음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낀다. 특히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에는 모든 일에서 삼위일체가 불가분적으로 역사하신다고 하는데, 성자의 음성이 아닌 성부의 음성이 말씀했다고 하며, 성자만이 육신으로 탄생하며 고난을 받으며 부활 승천하셨다고 하며, 성령만이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다고 하니,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삼위일체가 어떻게 성부만의 음성을 냈으며, 삼위일체가 어떻게 성자만이 처녀에게서 그 육신을 창조하셨으며, 삼위일체가 어떻게 성령만이 나타난 그 비둘기 모양을 만들어 내셨을까 하고, 이 일들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만일 이 일들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삼위일체는 불가분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며, 성부가 어떤 일을, 성자가 어떤 일을, 또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게 될 것이다. 또는 어떤 일은 함께 하시고 어떤 일은 따로따로 하신다면, 삼위일체는 불가분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성령이 삼위일체 안에서 차지한 위치도 그들에게 문제가 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시면서도 성부나 성자나 또는 두 분이 낳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런 질문들로 우리를 피곤하게 하므로,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 힘자라는 데까지 설명하며 사람을 눈멀게 하는 시기심으로 앞길을 재촉하지는 않겠다(지혜서 6:23).

      우리가 보통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며, 진지하게 진상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 그들은 사랑의 법에 따라 우리가 얻은 생각을 알리라고 요구한다. 나는 이미 얻었다거나 완전히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이미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은즉, 멀리 그의 발 아래 처해 있는 나는 얼마나 더욱 더 그러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힘껏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하며, 나의 분량에 따라 하늘에서 부르신 상을 좇아간다(빌 3:12-14). 나의 길을 어느 정도까지 마쳤으며, 어느 점에 도달했으며, 목적지까지는 아직 얼마나 여정이 남아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나는 사랑 때문에 자진해서 이 요구를 만족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글로 그들에게 섬길 때에, 하나님의 허락으로 내 자신도 유익을 얻으며,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려고 애쓸 때에 나도 탐구하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 하나님의 명령과 도움을 받아 이 일에 착수했지만, 내가 이미 아는 것에 대해서 권위 있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주제들에 대해서 경건하게 말함으로써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6.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성부뿐 아니라, 삼위일체가 불사(不死)하신다. 만물이 성부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9. 어떤 사람들은 주장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는 참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와 함께 유일한 한 하나님이 아니라, 그는 변하므로 참으로 불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주장은 성경의 명확하고 일치되는 증언에 의해서 잘못임이 증명되었다. 성경은 예컨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한다(요 1:1).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며, 그에 대해서 뒤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라고 한다(요 1:14). 이것은 때가 오매 그가 처녀에게서 나서 성육신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 그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존재)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다음에 첨가하기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라고 즉 모든 피조물이라고 한다(요 1:3). 그러므로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된 그 자신은 지은 바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그가 지은 바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피조물이 아니라면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시다. 하나님이 아닌 존재는 모두 피조물이며, 피조물이 아닌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는 지어진 존재이며, 만일 그 존재가 지어졌다면, 모든 것이("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성경에 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존재이시며,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같은 요한이 그의 서간에서 이 점을 지극히 분명하게 주장 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그의 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니라"(요일 5:20).

 

      10.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 말을 성부에 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유일한 한 분 하나님 즉 삼위일체 신에 대해서 썼다는 논리적 결론이 생긴다. 자체가 영생인 것은 결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성자는 영생이므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하는 말씀은 성부와 함께 성자도 의미한 것이다. 우리도 그의 영생에 참가하는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의 제한된 범위 내에서 영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나눠받게 된 영생과, 나눠 받음으로써 영원히 살 우리는 서로 다르다. 가령 사도의 말씀이 "기약이 이르면 성부가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성부는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라고(딤전 6:15-16) 했더라도, 이 말씀은 반드시 성자를 제외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자는 하나님의 지혜신데(고전 1:24), 그가 지혜의 음성으로 "나 홀로 하늘을 두루 다녔고"라고 했을 때에(집회서 24:5), 성부와 자기를 분리하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 말씀은 성부에 대해서만 하는 것이며 성자는 제외한다고 반드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그 구절을 보면 훨씬 더 잘 알 수 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그가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그는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4-16). 이 말씀에서는 성부나 성자나 성령을 지명해서 말하지 않고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라고 해서 한 분이요 유일 진정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11. 혹은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라는 말씀 때문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보지 못했으나, 그의 육신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신성은 사람의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 사람 이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 즉 삼위일체를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라고 하며, "기약이 이르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라"고 하신 것은 바른 해석이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한 것 같이, 홀로 그만이 기사를 행하신다"고 했다(시 72:18, LXX).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은(요 5:19) 누구에 대한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지를 나는 알고 싶다. 만일 성부께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성자 자신이 하시는 말씀은 어떻게 참말이겠는가? 놀라운 일들 가운데서도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는가? 그러나 성자의 말씀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고 하셨다(요 5:21). 이 말씀은 성부나 성자만이 기사를 행하시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확실히 한 분이신 진정한 하나님만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성부만이 기사를 행하신다고 하겠는가?

 

      12. 마찬가지로 같은 사도가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고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할 때에(고전 8:6), 그가 창조된 만물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을 어느 누가 의심할 수 있는가? 요한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느니라"고(요 1:3) 한 때와 같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다른 곳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이라고 할 때에 그는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냐고 나는 묻는다.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따로따로 다른 행동을 돌리는 것이라면, 즉 "주에게서"는 성부에게서, "주로 말미암아"는 성자로 말마암아서, "주에게로"는 성령에게로를 의미한다면,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단수로 첨가하는 것은 성부-성자-성령이 한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는 것이 자명한 해석이다. 이 문장을 따온 구절의 처음에서 그는 "깊도다 성부의, 또는 성자의, 또는 성령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라고 하지 않고(롬 11:33)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며, 주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그러나 만일 이 말씀을 성부에 대한 것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면, 여기 있는 것과 같이 어떻게 만물이 성부로 말미암으며, 고린도서에 있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와 같이, 요한복음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어떻게 만물이 성자로 말미암겠는가? 만일 어떤 것은 성부로 말미암고 어떤 것은 성자로 말미암는다면, 만물이 성부로 말미암아 지어진 것도 아니요, 만물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만물이 성부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또 만물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면, 같은 만물이 성자로 말미암은 것과 같이 성부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다. 그러므로 성자는 동일하며 성부의 역사는 성자의 역사와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성부가 성자도 만들었고, 성자는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면, 만물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어진 것이 아닐 터인데, 그와 반대로 만물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성자 자신은 창조되지 않았고, 성부와 함께 지어진 만물을 지으셨다. 참으로 사도는 이 말씀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말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다(빌2:6). 여기서 사도는 특히 성부에 관해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쓴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한다(고전 11:3).

 

      13.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글을 쓴 선배들은 성령에 대해서 같은 식으로 수집된 증거를 충분히 이용했다. 성령도 하나님 자신이며,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성령이 피조물이 아니라면 (사람들까지도 신들이라고 했으므로(시 82:6), 성령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는 확실히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며, 삼위일체의 통일안에서 그들과 동등한 본질이며 동등하게 영원하시다. 그러나 성령이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은 피조물을 섬기지 말고 조물주를 섬기라고 하는 명령에서(롬 1:25) 특히 유감없이 분명히 나타났다.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섬긴다는(갈 5:13) - 헬라어로 둘레우에인(douleuein)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섬김 즉 헬라어로 라트레우에인(latreuein)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릴 섬김을 우상에게 드리는 자들을 이돌로라트레스(idololatres)라고 한다. 이 섬김에 대해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만을 섬기라"고 성경에 있다(신 6:13, LXX). 헬라어 성경에는 "라트레우세이스"(latreuseis, 섬기라)라는 말로 뜻을 더 분명히 나타냈다.

      그뿐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만을 섬기라"는 말씀이 있어서, 피조물을 이런 섬김으로 섬기는 것이 금지되며, 사도도 창조주를 제쳐 놓고 피조물을 경배하며 섬긴 자들을 타기하므로, 모든 성도가 이런 섬김을 드리는 성령은 확실히 피조물이 아니시다. 사도가 "하나님의 성령을" 섬기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하며(빌 3:3), 여기서 "섬기는"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라트레우온테스"(latreontes)이기 때문이다. 많은 라틴어 사본과 모든 또는 거의 모든 헬라어 사본이 "하나님의 성령을 섬기는 우리"라고 하며, 어떤 라틴어 사본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섬긴다"라는 말이 없고,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곁길에 들어, 더 유력한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에 대해서(고전 6:19) 사본간의 이본(異本)을 보았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어떤 피조물의, 즉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것의 지체라고 감히 말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모독적인 말이 있겠는가? 사도는 다른 곳에서 "너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기 때문이다(고전 6:15).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들이 성령의 전이라면,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다.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서 바쳐야 하는 그 성령에게 우리가 드리는 섬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 즉 헬라어로 라트레이아(latreia)라고 하는 것이라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끝으로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고전 6:20).

 

      7. 성자는 어떻게 성부보다 작으며, 자기보다도 작으신가?

 

      14.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선배들은 성경에 있는 이런 말씀들을 자유로 이용해서, 이단자들의 궤변과 오류들을 반박했다. 이 말씀들은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동등성을 우리에게 알리며 믿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실현시키려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했으며(요 1:14),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가 되셨기 때문에(딤전 2:5). 성경에는 성부가 성자보다 크시다는 뜻을 알리는 말씀이 - 심지어 어떤 때에는 가장 확실한 말로 선언하는 말씀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탐구하는 노력이 부족하거나, 성경 전체의 취지를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오에 빠졌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 말씀들을 성육신 이전에 영원했고 지금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본질에 옮겨서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예컨대, 그들은 성자를 성부보다 작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주 자신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라"고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요 14:28). 그러나 이런 식의 표현으로 성자는 자신보다도 작다는 것을 진리가 나타낸다. 성자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하므로(빌 2:7), 어떻게 자기보다 작게 되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종의 형체를 취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체를 잃으신 것이 아니었고, 성자는 성부와 같은 형체이셨다. 그러므로 만일 종의 형체를 취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체를 잃지 않으셨다면, 그는 종의 형체로나 하나님의 형체로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므로 - 즉 하나님의 형체로는 성부와 동등하며 종의 형체로는 신인간(神人間)의 중보인 인간 그리스도 예수시므로 - 하나님의 형체로는 자신보다 크시며, 종의 형체로는 자신보다 작으시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에 성자를 성부와 동등하시다고 하며 또 성부를 성자보다 크시다고 하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처음 말씀은 하나님의 형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 말씀은 인간의 형체에 관한 것이어서 조금도 혼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은 바울서간의 한 장에 있다. 거기서는 이런 구별을 더 놀라운 방식으로 인정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니라"(빌 2:6-8).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본성이 동등하지만, 그 모양으로는 성부보다 작으시다. 성자가 취한 종의 형체로서는 성부보다 작고, 종의 형체를 취하기 전에 가졌던 형체, 즉 하나님의 형체로서는 성부와 동등하시다. 하나님의 형체로서는 만물을 지은 말씀이시었고(요 1:3), 종의 형체로서는 율법 아래서 여인에게서 났으며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셨다(갈 4:4-5). 따라서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로 계실 때에 사람을 만드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에 사람으로 만들어지셨다. 만일 성자 없이 성부가 홀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라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이(창 1:26)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체가 종의 형체를 취했으므로, 둘이 다 하나님이며 둘이 다 사람이시다. 그러나 취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둘이 다 하나님이시며, 취함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둘이 다 사람이다. 취하는 일 때문에 한 쪽이 다른 쪽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신성이 피조물로 변해서 신성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며, 피조물이 신성으로 변해서 피조물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