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3권 2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3. 14. 15:01

        8. 마술에 의해서 변하는 것들은 하나님만이 창조하신다.

 

      13.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반역한 천사들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숭고하고 영적인 보좌에서 판단하시는 대로 이 능력을 주신다. 광산에서 일하는 범죄자들도 물과 불과 흙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허락된 범위 내에 국한되어 있다. 애굽 술객들이 하나님의 종에게 대항했을 때에, 악한 천사들을 통해서 개구리와 뱀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악한 천사들을 창조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체가 있으며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생겨나는 것들은 모두 그 씨가 이 세계의 물질적 원소들 안에 숨어 있다. 우리는 지금 과실들과 생물들에서 그것들의 씨를 보고 있지만, 이 씨들과 저 숨어 있는 씨들은 다르다. 숨어 있는 씨들에서 창조주가 명령하시는 대로 물은 처음 물고기와 날개 있는 새들을 내었고, 땅은 처음 싹들과 처음 동물들을 각각 종류대로 내어 놓았다(1:20-25). 이와 같이 그 종류대로 각종 물건을 생산한 씨들은 생산함으로써 그 능력이 소진한 것이 아니고, 올바르게 발육해서 그 종류를 완전히 생산하는데 적당한 환경이 대체로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유의할 것은, 가장 작은 싹도 일종의 씨라는 것이다. 그것을 땅에 적당히 심으면, 나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종류의 낟알 속에 이 싹의 더 미묘한 씨가 있으며, 여기까지는 우리도 볼 수 있다. 더 들어가서 이 낟알의 씨가 있으며, 이것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으로 그런 씨가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원소들 안에 이런 능력이 없다면, 씨를 심지 않은 땅에서 자주 여러 가지 것이 나지 않을 것이며, 수컷과 암컷의 결함이 미리 없었는데 여러 가지 동물이 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버이들의 결합이 없이 난 그 동물들은 발육해서 자웅의 결합으로 새끼들을 낳는다. 그리고 꿀벌들은 자웅의 결합으로 새끼의 씨를 배 속에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입으로 씨를 모은다. 만물을 창조하시는 분 자신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씨들도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나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 기원이 숨은 씨에 있으며, 맨 처음에 정해진 법칙에 따라 점점 자라서 고유한 부피와 특유한 형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버이들을 사람의 창조자라고 부르지 않으며, 농부들을 곡식의 창조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의 외면적인 운동을 이용해서 물건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천사들이나 악한 천사들은 그 지성(知性)과 몸이 우수해서 우리에게 숨겨진 씨들을 알며, 원소들을 적당히 혼합함으로써 그 씨들을 비밀히 뿌리며, 그래서 거기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생겨날 기회를 유리하게 만들어 그 성장을 촉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사들을 창조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으면, 선한 천사라도 이런 일들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의롭게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악한 천사들의 해로운 행동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죄인은 악의가 있기 때문에 그 의지가 불의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가 이 능력을 받는 것은 공정하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는 벌을 받게 되려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는 악인이 벌을 받고 선인이 칭찬을 받게 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1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부에서 창조하며 형성하시는 하나님과 외부로부터 역사하는 피조물을 구별하며, 농사에서 비유를 따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느니라고 한다(고전 3:6). 그러므로 영적 생활에서도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우리의 영혼이 의롭게 되도록 만들 수 없지만, 사람들도 같은 목적을 위한 외부적인 수단으로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진지하게 전하고 악한 사람은 외모로 전한다(1:18). 그와 같이,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는 데에도 내부로부터 역사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농부가 밭을 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천사와 사람, 심지어 각종 동물의 외부적인 행동들을 자기의 절대적 권능으로 지도해서 자기가 창조하시는 만물의 본성에 적용하시되, 자기가 이미 그들에게 주신 행복에 대한 욕망과 나눠주신 능력에 따라서 하신다. 그러므로 개구리와 뱀을 만든 것이 애굽 술객들이 불러낸 악한 천사들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악인들이 수고한 결과로서 돋아난 곡식에 대해서도 그 악인들을 창조자라고 할 수 없다.

 

      15. 야곱이 새끼를 밴 양들이 물을 먹는 눈앞에 여러 가지 무늬가 있는 가지들을 놓았다고 해서(30:41), 그가 아롱진 양떼의 창조자였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양들도 아롱진 새끼들의 창조자였다고 할 수 없다. 그 여러 가지 빛의 형상은 시각을 통해서 그들의 영혼 안에 인상이 박히고 보관된다. 몸은 영혼이 살리며, 몸과 영혼 사이에는 공감(共感)이 있으므로, 새끼들이 아주 어린 초기에 거기 뿌려진 빛깔의 정도에 따라 영혼이 몸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영혼과 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지극히 높은 지혜안에서 변함이 없는 합목적성(合目的性) 때문이다. 그 지혜는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지혜가 창조하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변함없는 지혜는 변하는 피조물들을 자존(自存)하게 버려두지 않는다.

      양들에게서 나뭇가지가 아니라 양들이 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변함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성(理性)이었다. 그러나 양들이 잉태한 새끼들에게 나뭇가지의 빛깔이 옮아간 경로는 다음과 같다: 새끼를 밴 양들의 영혼이 그 눈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내부에서는 그 자체의 정도에 따라 형성(形成) 원칙을 끌어 들였다. 그것은 창조주의 가장 내면적인 권능으로부터 받은 원칙이었다.

      그러나 형체가 있고 변하는 물질에 영향을 주는 영혼의 힘이 얼마나 크냐하는 것은 광범한 문제이며, 우리의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는 필요하지도 않은 문제이다. (영혼을 몸의 창조자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만 알면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어떤 변화며 감각되는 본질과 그 분량과 수량과 중량에서 어떤 본성을 가진 존재가 생겨나는 원인은 모두 정신적 생명에 있다. , 만물 위에 있으며 가장 먼 지상(地上)적인 것들에까지 미치는 그 생명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야곱이 한 일에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나뭇가지들을 그렇게 놓아 둔 사람을 새끼양들의 아롱진 빛깔의 창조자라고 할 수 없다면, 태중에 든 씨에게 그 빛깔을 준 암양들의 영혼을 그 빛깔의 창조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암양들의 영혼은 몸의 시각(視覺)으로 받은 빛깔의 영상(映像)을 통해서 자연히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작용한 것이다. 더군다나 개구리와 뱀을 만든 애굽 술객들이 악한 천사들의 힘을 빌렸다고 해서, 그 천사들을 동물들의 창조자였다고 할 수도 없다.

 

       9. 모든 것의 처음 원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16. 모든 원인의 가장 높고 가장 내면적인 중추적 원인으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하며 지배하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과는 다른 외면으로부터 가하는 작용도 있다. 즉 창조주가 가가 피조물에 허락하신 능력과 기능에 따라 외부로부터 어떤 작용을 가()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이미 창조된 것이 때에 따라 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나타나는 것들은 이를테면 그 원료가 될 원소들의 구조에서 이미 모두 창조되었으나 기회가 올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식들이 있는 것과 같이, 우주에는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의 원인이 가득하다. 이 나지 않은 존재들은 오직 최고의 본질이 창조한 것이며, 최고의 본질에서는 나거나 죽는 것이 없으며, 있기 시작하거나 없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위에서 농사의 비유로 설명한 것과 같이, 악한 천사들뿐 아니라 악한 사람들까지도 외부로부터 외면적인 원인을 자연에 적용시킬 수 있다. 이런 외면적인 원인들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지만, 자연에 따라 적용되어 자연의 비밀한 품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터져 나와서 외면적으로 창조되게 한다. 즉 창조주로부터 비밀히 받은 그 고유한 분량과 수와 무게에 따라 외면적으로 전개된다. 창조주는 만물을 각각 그 분량과 수와 무게에 따라 정돈하셨기 때문이다(지혜서 11:20).

 

      17. 그러나 동물들의 경우는 형편이 다소 다르기 때문에 마음에 동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동물들은 살아서 숨을 쉬며, 본능적으로 그 본성에 맞는 것을 원하며 맞지 않는 것을 피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동물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떤 풀이나 살점이나 즙이나 액체를 혹은 묻고 혹은 가루를 내고 혹은 섞어서 일정한 상태에 두면, 거기서 동물들이 생견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둔 사람이 자기가 그것들을 창조했노라고 주장할 만큼 어리석을 수 있겠는가? 그뿐 아니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어디서 이런 벌레나 저런 각다귀가 나는지를 알 수 있다면, 감각이 예민한 악한 천사들이 개구리와 뱀이 생겨나는 원인 즉 원소들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씨들을 잘 알고 있어서, 거기에 비밀한 운동을 가함으로써 개구리나 뱀이 창조되게 만든다면, 그러나 그들이 창조하는 것은 아니라면, 이 일을 이상하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사람들이 보통으로 하는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물들이 속히 자라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이 그 능력 범위 내에서 생물들이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같은 물체에서 겨울보다 여름에, 찬 곳에서보다 더운 곳에서 벌레들이 더 속히 생겨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사람들의 경우에는 감각이 섬세하지 못하고, 완만한 지상적 지체들 때문에 운동이 빠르지 못해서, 이런 조건들을 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천사들은 어떤 종류를 물론하고 원소들에 있는 근인(近因)들을 끌어내는 것이 쉬울수록, 이런 일을 하는 그들의 속도가 더욱 더 놀랍다.

 

      18. 그러나 이런 것들을 처음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분은 창조주뿐이시다. 맨 처음에 모든 존재의 분량과 수와 무게를 그 수중에 쥐고 계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없다. 그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다. 천사들이 허락을 받으면 할 수 있을 것이나, 허락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도, 그 창조주의 형언할 수 없는 권능에서 오는 일이다. 개구리와 뱀을 만든 천사들인데, 하나님의 더 위대한 권능이 개입해서 성령으로 그들을 금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그런 천사들이 지극히 작은 이들을 만들지 못한 이유를 나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애굽의 술객들도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하면서 이 점을 인정했다(8:19).

      그러나 천사들이 그 본성으로는 할 수 있으면서도 금지될 때에는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며, 그 본성의 상태 때문에 허락을 받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사람이 확인하기 어렵고 아니, 하나님의 은사를 받지 않고는 사람이 확인할 수 없다. 사도는 어떤 이에게는 영을 분별함을 주신다는 말씀으로(고전 12:10) 이 점을 우리에게 알린다. 사람은 걸을 수 있지만 허락을 받지 않으면 걷지 못한다. 그러나 허락을 받을지라도 날 수는 없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에 따라서 더 권능이 있는 천사들이 허락하면 천사들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지만, 더 권능이 있는 천사들이 허락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 본성마다 그 능력에 분량을 정해 놓으신 분이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은 천사들에게 능력을 주신 때에도, 보통은 그들이 그 일들을 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19. 그러므로 나는 전연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물질적 현상들을 제외한다. 예컨대, 별들이 떴다가 지며 동물들이 났다가 죽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종자와 봉오리, 안개와 구름, 눈과 비, 번개와 천둥, 벼락과 우박, 바람과 불, 추위와 더위 - 이런 모든 것을 제외한다. 또 어쩌다가 있는 현상, 예컨대 일식과 월식 같은 것과 비상한 별과 괴물과 지진과 그밖에 비슷한 것들도 고려하지 않겠다. 이런 것들의 최고의 처음 원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에서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를 말한 다음에 즉시 그의(즉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이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148:8). 이런 일들이 우연히 생긴다든지, 또는 물질적 원인만으로 생긴다고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또는 하나님의 뜻을 떠난 어떤 영적 원인을 생각하는 사람까지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피조물은 몇 가지 표적으로 볼 수 있는가? 성찬에 대하여.

 

      그러므로 내가 방금 말한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다른 종류의 피조물들이 있다. 그것들도 같은 물질로 되었지만,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그것들은 표적과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전하시는 사건에서 항상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시는 것은 아니다. 나타나실 때에도 어떤 때에는 천사로서 나타나시고, 어떤 때에는 천사가 준비하며 섬김으로써 된 일에서 천사가 아닌 어떤 다른 형태로 나타나신다. 그뿐 아니라, 천사가 아닌 형태일 때에는 혹은 이미 있었던 물체를 바꾸어서 이용하심으로써 그 뜻을 전하신다. 또 어떤 때에는 이 특별한 모적을 위해서 만드신 물체를 쓰시고, 그 사명을 다한 다음에는 그것을 버리신다.

      사람들이 사자(使者)인 때에는, 혹은 소개하는 말을 붙여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또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밖에 같은 뜻의 말로 시작한다(31:1-2). 혹은 이런 말로 시작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너를 훈계하며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리라고 한다(32:8). 또 선지자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면서 그 예언의 사명을 다한다. 예컨대 선지자가 자기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그 중 열 조각을 솔로몬 왕의 신복에게 주면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고 한 것과 같다(왕상 11:30,31). 또 어떤 때에는 선지자 자신이 아니고 이미 있는 어떤 물체를 취해서 한 행동과 같다(28:18). 어떤 때에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종류의 물건을 만들어 변함없이 일시 유지시킨다. 광야에서 높이 들어 올린 놋뱀이나(21:9), 글로 쓴 기록과 같다. 또 어떤 때에는 그 물건의 사명이 완수되면 없어진다. 성찬에 쓰기 위해서 만든 떡이 성찬을 받음으로써 소비되는 것과 같다.

 

      20. 그러나 이런 일들은 사람들이 하며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거룩한 일로서 높일 수는 있어도, 기적인 듯이 경이감을 일으킬 수는 없다. 천사들이 하는 일은 더 어렵고 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놀랍게 생각한다. 그러나 천사들로서는 고유한 행동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서 하기도 쉽다. 사람을 향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천사는 하나님을 대신한 것이다. 성경에는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시니라고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3:6,2).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나는 네 하나님이라”(81:8,10)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한 것이다. 표적으로 삼기 위해서 천사의 권능으로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었다(7:10). 사람은 이런 권능이 없지만, 돌을 취해서 비슷한 표적으로 삼았다(28:18).

      천사가 한 일과 사람이 한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천사가 한 일은 경탄할만하여 또 이해하고 사람이 한 일은 이해할 뿐이다. 양쪽에서 이해되는 것은 아마 같을 것이지만, 이해하게 하는 수단은 다르다. 마치 하나님의 이름을 금()으로 쓰는 것과 잉크로 쓰는 것과 같다. 전자는 더 진귀할 것이요, 후자는 무가치할 것이지만, 두 가지가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다. 모세의 지팡이에서 생긴 뱀은 야곱의 돌과 같은 것을 의미했지만, 야곱의 돌이 의미한 것은 술객들의 뱀이 의미한 것보다 우수한 것이었다. 돌에 기름을 부은 것은 육신의 그리스도를 의미했으며, 즐거움의 기름으로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기 때문이다(45:7).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신(2:9)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3:14,15). 광야에서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높이 들린 뱀을 쳐다보고 죽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려 함이다”(6:6).

      결과를 그 원인에 돌리는 식으로 말한다면, 죽음은 낙원에서 뱀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므로(3), 여기서 뱀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팡이가 뱀이 된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신 것을 의미하며, 뱀이 다시 지팡이가 뱀이 된 것은 그리스도 전체가 그 몸과 함께 부활하신 것을 의미하며, 이 몸은 곧 교회이다(1:24).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아서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한 것은(4:4) 세상 종말(꼬리)에 있을 부활과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애굽 술객들의 뱀은 이 세상에서 죽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몸에 삼키며(7:12) 그 몸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의 안에서 부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야곱의 돌이 의미한 것은 술객들의 뱀이 의미한 것보다 나은 것이었다. 그러나 술객들이 한 일은 훨씬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점들은 사실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을 금으로 쓰고 하나님의 이름을 잉크로 쓴 것과 같다.

 

      21. 또 천사들이 그 전하려는 소식을 의미하기 위해서 구름과 불을 만들거나 취했는데, 그 물질적 형태들이 주 하나님이나 성령을 계시했다고 하더라도, 천사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어떤 사람이 아는가? 마치 어린이들은 제단 위에 놓였다가 거룩한 예식을 집행함으로써 소모되어 버리는 것이 어떻게 제조되며, 종교적 예식용으로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들이 끝까지 자신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으로 알게 되지 못하며, 성찬식에서 주고받는 것을 볼 때 이외에 그런 것을 볼 수도 없다면, 그리고 큰 권위를 가진 분에게서 그것이 누구의 몸과 피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들은 주님은 이런 형태로 사람들 눈에 나타났으며, 이것과 같이 생긴 옆구리를 찔려서 이러한 액체가 사실로 흘러나온 것이라고(19:34) 밖에 달리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생각하고 하는 것이 확실히 내 자신에 대한 좋은 경고가 되며, 형제들에게도 그들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라고 충고해야 할 것이다. 연약한 인간이 자기의 한도를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이다. 천사들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하는지, 아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사들로 말미암아 이 일들을 하시는지, 또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그 숨은 최고의 권좌에서 허락이나 명령이나 강제로 악한 천사들에게까지도 이 일들을 시키시는지, 나는 눈으로 들여다보거나, 이성의 확증으로 밝히거나, 지성의 힘을 다해서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일들에 관한 모든 의문에 대해서 나는 천사나 선지자나 사도인 것처럼 확실한 말을 할 수 없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확실치 않으며, 인간의 의도는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는 영혼을 내리누르고, 이 세상살이는 온갖 생각을 일으키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무섭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일을 짐작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며,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을 찾아내기도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누가 하늘에 있는 것을 알아 낼 수 있겠습니까?”(지혜서 9:14-16). 따라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며, 천사들의 몸과 그들의 몸으로 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도 알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 한다: “당신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지 않고, 당신께서 하늘에서부터 보내시는 성령을 받지 않고, 누가 당신의 의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지혜서 9: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위에서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성령과 우리의 마음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나는 확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성부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그 어느 분도 그 존재와 그 본성이 전혀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더군다나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 변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생각과 기억과 의도와 모든 비형태적인 피조물이 그렇다. 그러나 보이면서 동시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11.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나타난 일은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천사들의 섬김으로써 된 일이다. 화법(話法)에서 온 반대론을 제거함,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과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모두 천사들의 봉사로 된 일이다. 이 권에서 한 말과 다음 권에서 할 말.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라틴어로 숩스탄티아”(Substantia)라고 하기보다 에센티아”(essentia)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아주 작은 능력과 정도로 그 본질에 의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이해하는 것인데, 그 본질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으므로 또한 결코 볼 수 없다.

 

      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적합한 경륜(經綸)으로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사건들을 피조물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사들의 도움으로 그 일들을 하셨는가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천사들이 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추리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분수에 넘치는 지혜가 있는 듯이 세상이 생각할까 두렵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12:3) 지혜롭고 온건하게 생각하려 하며, 믿는 고로 또한 말한다(고후 4:13). 성경의 권위가 건재하므로, 우리의 이성은 거기서 떠나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확고한 근거를 떠나서, 우리의 감각이나 진리의 밝은 빛이 비치지 않는 억측의 절벽으로 떨어져서도 안된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합당한 시대와 시기에 관해서 신약의 경륜과 구약의 경륜을 구별할 때에, 천사들이 중간에 들어서 보이는 일들을 했을 뿐 아니라 말씀까지도 전했다고 분명히 기록되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고 하였는가?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1:13-14).

      이 구절을 보면, 모든 일을 천사들이 했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즉 영생의 기업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다(고전 10:11). 옛날에는 천사들이 이 소식을 전했고, 지금은 성자가 전하시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명백하고 논리적인 결론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 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2:1-3). 여기서 어떤 구원이냐고 하는 질문을 받았듯이 신약의 구원임을, 즉 천사들로 한 말씀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말씀임을 밝히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로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2:3-4).

 

      23. 그러나 혹은 묻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러면 무슨 까닭에 성경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고 하며, ‘천사가 모세에게 이르되라고 하지 않았는가?” 재판정의 정리(廷吏)가 판사의 말을 기록할 때에 공()문서에는 정리가 말하되라고 쓰지 않고 판사가 말하되라고 쓴다. 그와 같이, “주께서 이르시되라고 쓰더라도 선지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에게 주의를 돌릴 뿐이다. 참으로 성경에는 천사가 주이심을 알리는 때가 많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때때로 말한 분이 천사였는데도 주께서 이르시되라고 한다. 그러나 비록 성경이 천사라고 밝힐지라도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때문에 선지자가 그를 천사라고 부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이 서간에 있는 더 현저한 증언을 제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사용된 말은 천사가가 아니고 천사들이라고 되어 있다.

 

      24. 스데반도 사도행전에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일들을 이야기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7:2).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을 인간의 눈앞에 그 자신을 그대로 나타내신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그 다음에 있는 구절들에서는 천사가 모세에게 나타났다고 말했다.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리라. 40년이 차매 주의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하셨다(7:29-33).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분명히 천사라고도 하며 주라고도 한다. 그리고 같은 분을 창세기에 있는 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25. 그러나 혹은 주께서 모세에게는 천사를 통해서 나타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친히 나타나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대답을 구하지 않고, 그가 근거로 삼은 그 책에서 얻겠다. 거기에는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라고 하며(12:1), 조금 뒤에 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라고 한다(17:1). 그렇다고 해서 이 일들을 한 것은 천사가 아니었다고 말할 것인가? 다른 데에도 같은 식의 말씀이 있다: “주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있는지라”(18:1-2). 우리는 이미 이 이야기를 논했다.

      이 사람들은 말을 듣고 그 뜻으로 올라가기를 원하지 않거나, 뜻을 이해하면서 그에 대한 말에 걸려 넘어진다. 그들은 여기서 세 사람 안에서 주를 보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그 다음에 있는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난 것과 같이, 그 사람들은 천사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또는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거나 나타났다는 말씀이 없다고 해서, 그들은 그것을 이유로 모세의 경우에는 성경에 있는 대로 천사가 물건이 보이게 하며 음성이 들리게 한 것이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천사에 대한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이 그 본질로 나타나며 말씀하신 것이라고 감히 말하려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천사에 대한 말씀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의 아들을 죽여 바치라는 명령이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1-2). 확실히 여기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있어도 천사는 전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조금 뒤에 있는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주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22:10-12).

      이 구절에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려는가?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하시고, 천사는 금지시켰다고 하려는가? 죽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아브라함이 어기고, 죽이지 말라고 한 천사의 말에 순종했다고 하려는가? 이런 해석은 가소로운 것이며 따라서 버려야 한다.

      이렇게 어리석고 무가치한 해석에 대한 근거는 성경에 전연 없다. 거기에는 곧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22:12). “내게또는 나 때문에라는 것은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분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천사와 동일한 분이었는가, 또는 천사를 쓰신 분이었는가? 그 다음에 있는 말씀을 들으라. 아주 분명히 천사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계속되는 본문을 보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주가 보셨다고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주가 산에서 보이셨다고 하더라”(2:13-14, LXX).

      바로 이 구절 앞에서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하나님이 그 때에야 아시게 되었다는 것 같이 해석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기를 알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자기의 독자를 죽이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한 자기의 마음이 얼마나 강한가를 자각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결과를 원인에 돌리는 화법이다. 추우면 우리의 운동이 지둔하게 되기 때문에 추위를 지둔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알게 하셨으므로, 하나님이 아셨다고 한다. 이런 시험을 받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자기의 믿음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모르고 지났을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아브라함은 그 곳을 주께서 보이셨다고 불렀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자기를 보이게 하셨다. 거기 곧 첨가된 말씀에 그러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주가 산에서 보이셨다고 하더라고 한다. 여기서 같은 천사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주께서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다음에 있는 말씀에서도 천사는 한결같이 선지자적 정신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린다. “주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은즉”(2:15-16).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은 물론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로 시작할 수 있으며, 선지자들은 보통 이렇게 말했다. 성부에 대해서 주께서 가라사대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인가 또는 성자 자신이 성부의 천사(사자)이셨기 때문인가?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저 세 사람은 그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가? 그들이 오기 전에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람이라고 했으니, 혹은 천사가 아니었을까? 다니엘서에서 그 사람 가브리엘이운운하는 말씀을 읽어보라(9:21).

 

      26. 그러나 명백하고 중대한 발언으로 이 사람들의 입을 속히 막아야겠다. 그것은 단수의 한 천사나 복수의 여러 사람들을 말하지 않고, 그 복수의 천사를 말할 뿐이다. 여기서는 천사들이 어떤 특별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 말미암아 율법 자체를 주셨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밝힌다. 율법을 모세에게 주신 것은 백성을 통제하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천사들을 통해서 주셨다는 것을 의심하는 신자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스데반은 밝히 말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들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7:51-53).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렇듯 위대한 권위에서 온 증명보다 더 강력한 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율법은 천사들이 전한 것이었으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며 예언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천사들 안에 계셨으며, 그 천사들의 명령으로 율법이 전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하셨다(5:46). 그러므로 그 때에는 주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인간의 중보시며 아브라함의 씨에서 장차 오실 분은 자기의 오심을 천사들을 통해서 마련하셨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범법자가 된 자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그 중보를 영접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사도도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말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3:19). 즉 중보의 수중에 있었던 천사들로 말미암아 베푸신 것이다.

      중보의 출생은 제약된 것이 아니라 권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을 보면, 사도는 어느 천사를 중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 사람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한다(딤전 2:5). 그래서 어린 양을 죽이는 유월절이 있었고(12); 그래서 율법에서 여러 가지 일들, 즉 그리스도의 육신 탄생과 고난과 부활을 비유적으로 말하며; 그 율법은 천사들이 사이에서 전했으며; 그 천사들 안에는 확실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셨으며; 어떤 때에는 성부께서, 어떤 때에는 성자까지, 또 어떤 때에는 성령께서 계셨으며; 또 어떤 때에는 위격의 구별이 없이 하나님을 비유적으로 의미하되, 눈에 보이며 감각할 수 있도록,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피조물로 나타나셔서, 눈으로 보며 귀로 듣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 하나님을 뵐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27. 이제 이 권에서 알리려고 한 것은,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충분히 논하며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럴 듯한 이유와 성경 말씀들의 권위를 힘입어 사람의 아니, 나의 힘이 자라는 데까지 우리의 주장을 확립했다. 즉 구주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우리의 고대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이 말씀을 들으며 몸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천사들이 한 일이었다. 그들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과 행동을 했다. 이것은 선지자들도 한 일이다. 또 어떤 때에는 자기들이 아닌 어떤 피조물의 모양을 취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이려고 했다. 이런 예는 성경에 많으며 선지자들도 이 방법을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은 주께서 처녀에게서 탄생하시며, 성령께서도 비둘기 모양으로 내리시며, 주님 승천 후에 오순절 날 하늘로부터 큰 소리와 함께 불의 혀 모양으로 나타나신 후다. 처녀 탄생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대로가 아니었다. 그 말씀의 본질은 성부와 동등하시며 함께 영원하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도 그 본질대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본질로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며 함께 영원하신데, 그 때에는 확실히 피조물이었으며 죽을 인간의 육체적 감각에 나타나도록 형체가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옛날의 현상들과 보이는 피조물로 된 이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이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른 권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