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2권 2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2. 10. 21:26

      10. 삼위일체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위격의 구별이 없었는가, 또는 어느 한 위격이었는가? 아담에게 나타나심, 아브라함에게 보이심.

 

      17. 우선 창세기의 기사를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사람과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문제를 논할 때에 비유적인 의미를 제쳐놓고,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은 사람과 말씀하실 때에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셨다. 성경에는 물론 이렇게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그 구절 전체는 그렇게 들린다. 특히 아담은 저녁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고,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을 때에, 그는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창 3:8-10). 만일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거니시며 말씀하셨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이 거니셨다고 하는데, 그 음성만 들렸다고 할 수 없으며, 동산을 거니신 분이 보이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다. 아담은 그의 얼굴을 피해서 숨었노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누구셨겠는가? 성부이셨는가, 성자셨는가, 또는 성령이셨는가? 혹은 그런 구별 없이 삼위일체 자신이 사람의 형체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인가? 확실히 성경의 문맥에는 한 위격으로부터 다른 위격으로 옮겼다는 표적이 없고, 처음 사람에게 말씀하신 분은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창 1:3,6). 그밖에 하루하루 계속해서 말씀하신 그 분이셨다. 또 우리는 그 분을 그 창조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창조되라고 말씀하신 성부 하나님이셨다고 보통 생각한다.

      그는 그의 말씀을 통해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는 믿음의 규범에 따라 그의 말씀은 그의 독생자임을 안다. 그러므로 만일 성부 하나님이 처음 사람에게 말씀하셨고, 하나님 자신이 저녁때에 동산을 거니셨고, 저 죄인이 그의 얼굴을 피해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면, 무슨 까닭에 그가 그 후에 아브라함에게와 모세에게와 그 밖의 원하신 사람에게 그의 뜻에 예속된, 변하며 눈에 보이는 피조물을 통해서 나타나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가? 그렇게 나타나시면서 자기 안에와 자기의 본질 안에 머무르셔서 변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으신 것이다. 혹은 성경이 무언중에 한 위격으로부터 다른 위격으로 옮겼다고 할 수 있다. 즉 성부가 "빛이 있으라"와 그 밖의 말씀들을 말씀을 통해서 하셨다고 기록한 다음에, 성자가 처음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을 분명히 언명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암시한 것이다.

 

      18. 그러므로 마음의 눈으로 이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 따라서 눈에 보이는 피조물을 통해서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것은 성부도 하실 수 있는지, 또는 성자와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이 문제들을 더욱 탐구하며, 할 수 있다면 말로 표현하며 토론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대로는, 적어도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셨다는 성경 기록은 모호하다. 아담이 평소에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며, 그들이 과실을 먹고 열렸다는(창 3:7) 그 눈의 성질에 대해서도 큰 논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은 과실을 먹기 전에는 닫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낙원은 지상의 어떤 곳이라는 것이 성경의 뜻이라면, 나는 하나님께서 어떤 지상적인 형태를 취하시지 않고는 낙원을 거니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경솔한 단정을 하지 않겠다. 사람은 아무 형체를 보지 않고도 그 말씀을 들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숨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평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결론내릴 수 없다. 아담은 실지로 볼 수 없었고, 자기편이 보일까 두려워했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하나님이 거니실 대에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인도 "내가 당신 낯을 피하여 숨겠나이다"라고(창 4:14) 하나님께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평소에 육안으로 하나님을 뵈었고,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어떤 보이는 형체를 가지셨다고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에도 그는 자기에게 질문하시며, 자기의 죄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반드시 어떤 형체를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외면적인 귀에 특히 그 처음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그 말씀의 종류는 알기가 어렵고, 우리는 이 논문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라나 만일 말씀과 소리가 났고, 그에 의해서 저 처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감각할 수 있는 임재가 계시된 것이라면, 무슨 까닭에 성부 하나님의 위격이 거기 계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 예수께서 산상에서 제자와 함께 계셨을 때에 전신이 휘황찬란하셨고, 그 때에 들린 음성에 하나님의 위격이 계시되었다(마 17:5).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위에 내리셨고(마 3:17), 예수님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문제로 말씀드렸고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요 12:28) 대답을 들으셨을 때에, 거기에 성부의 위격이 계시되었다. 삼위일체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으므로, 이때에도 성자와 성령의 역사가 없이 음성이 들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씀이 성부의 위격만을 계시하는 방법으로 들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삼위일체가 처녀에게서 인간의 형체를 지으셨으나, 그 형체는 성자의 위격뿐인 것과 같다. 보이시지 않는 삼위일체께서 성자의 보이는 위격만을 창조하신 것이다.

      또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삼위일체가 하셨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의 위격을 계시했다고 해석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마 3:17) 한 것은 성부의 음성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성령의 아들이라든지, 그 자신이 아들이라고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하신 데서 우리는 성부의 위격만을 본다. 이 말씀은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에 대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성부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성령의 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성령에게도 하실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창세기의 기록에서는, "주 하나님이("여호와 하나님") 아담에게 이르시되"라고 하므로, 삼위일체 자체였다고 해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19. 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는 기록에서도, 음성만이 아브라함의 귀에 들린 것인지, 또는 다른 무엇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는지,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조금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고 하는 좀 더 분명한 말씀이 있다(창 12:7). 여기서도 주께서 어떤 형체로 나타나신 것인지, 또는 성부나 성자나 성령으로서 나타나신 것인지, 분명한 말씀이 없다. 혹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하지 않고,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므로, 성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주라는 이름은 성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도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神)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말미암았느니라"고 한다(고전 8:5-6).

      그러나 성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는 곳도 많다. 예컨대,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며(시 2:7),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한다(시 110:1). 성령을 주라고 부른 것도 사도의 "주는 영이시니"라는 말씀에 있다(고후 3:17). 그리고 아무도 성자라고 해석하지 못하도록 따라서 성자의 비물체적 본질 때문에 성자를 영이라고 부른 것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본문에는 첨가한 말씀이 있는데,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한다(고후 3:17). 그렇더라도 주의 영이 성령이시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삼위일체의 어느 위격이나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삼위일체 유일신에 대해서, "주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만을 섬기라"고 하셨다(신 6:13).

      그러나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을 보았을 때에(창 18:1-2), 그는 그들을 손님으로 초대해서 손수 음식을 대접했다. 그런데 성경 기록에는 "세 사람이 그에게 나타났다"고 시작하지 않고,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한다. 그 다음에 주께서 어떻게 그에게 나타나셨던가를 순서대로 이야기하고, 아브라함이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한 그 세 사람 이야기를 첨가한다. 후에 그는 그들을 단수로 상대해서 말하고, 그들 편에서도 성경이 주라고 부르는 단수로서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약속한다. 이것은 처음에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고 한 것과 같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사람들인 것 같이 초대해서 발을 씻어주고 떠나 갈 때에 전송하면서도, 말할 때에는 주 하나님께 말씀드리듯 했다. 그들이 아들을 약속한 때나 소돔의 멸망이 임박했다고 알려줄 때나 마찬가지였다.

 

      11. 같은 이야기 계속.

 

      20. 이 성경 구절은 소홀히 여길 수 없다. 만일 한 사람이 나타나 것이라면, 성자는 처녀 탄생 전에도 그 자신의 본체가 보이셨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성자이셨다고 부르짖을 것이 아닌가?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은(딤전 1:17) 성부에 대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여전히, 발을 씻기며 사람들의 음식을 먹은 사람이 성자이셨다면, 그는 어떻게 우리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아직 하나님의 본체로 계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혹은 그가 이미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던"(빌 2:7)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처녀에게서 나셨을 때에 그렇게 하신 줄을 알고 있다. 그러면 성자가 이렇게 하시기 전에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가? 또는 그 형체는 참 형체가 아니었는가? 만일 한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고, 그 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믿는다면, 나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 보였다고 하며, 그 중의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형체로나 연령으로나 권능으로나 더 크더라는 말씀이 없으므로, 무슨 까닭에 우리는 여기서 눈에 보인 피조물은 삼위일체의 동등성을 알리며, 세 위격의 동일한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믿지 않는가?

 

      21. 그러나 혹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나타난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더 큰 사람, 즉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른 두 사람은 그의 천사였다는 뜻을 알린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들의 사변과 의견에 미리 대처했다고 한다. 조금 뒤에 성경은 두 천사가 롯에게 갔고, 불에 타는 소돔에서 구원을 받을 만했던 의인 롯은 그들 중 한 사람을 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성경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 18:33).

 

      12. 롯에게 나타나신 문제를 검토한다.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라"(창 19:1). 우리는 여기서 내가 증명하려고 한 것을 자세히 고려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확실히 세 사람과 말을 하면서, 그들을 단수로 주라고 불렀다. 혹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그 셋 중의 한 사람을 주라고 생각하고, 다른 두 사람은 천사로 생각했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면 다음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주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그러나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라." 혹은 셋 중에서 주님으로 인정되었던 분은 떠나가고, 데리고 왔던 두 천사를 보내서 소돔을 멸망시킨 것인가? 그러므로 그 다음에 있는 말씀을 보기로 하자.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며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복수)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오소서." 이것으로 보면 그 두 사람은 천사였고, 두 사람이 손님으로 초대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들을 주라고 한 것은 존경하는 뜻이었고, 아마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2. 그러나 다른 반대 의견이 있다. 즉 그들을 주님의 천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면, 롯이 땅에 엎드려 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이, 손님으로 모시고 음식을 대접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여기에 어떤 뜻이 숨겨져 있든 간에, 이제 우리는 시작한 일에 주의를 돌리기로 하자. 두 사람이 나타났고, 그들을 천사라고 하고 롯이 두 사람을 다 초청하고 소돔을 떠날 때까지 그들에게 사람을 상대하듯이 말한다. 그 다음에 성경은 계속해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한다. 그러나 롯은 그들에게 "내 주여(단수),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단수) 은혜를 입었고" 운운한다(창 19:1-19). 그들에게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주님이신 분은 이미 떠나가셨고, 그의 천사들을 보내셨다면, "내 주들이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만일 롯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말하려고 한 것이라며, 무슨 까닭에 성경에는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라고 하였는가? 혹은, 여기서도 두 사람을 상대로 말했다고 해석할 것인가? 두 사람은 한 사람 같이 상대하므로, 그 분은 동일한 본질을 가진 한 분, 주 하나님이신가? 그러나 여기서 어떤 두 위격이라고 우리는 해석할 것인가? 성부와 성자인가? 성부와 성령인가? 또는 성자와 성령인가? 이 마지막 추측이 아마 가장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성자와 성령은 파견되셨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보통 이렇게 말하지만, 성부가 파견되셨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다.

 

      13.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심.

 

      2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도록 모세를 파견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성경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주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주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1-6).

      여기서 처음에는 그를 주의 사자라고 부르고, 다음에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 천사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가? 그러므로 그를 구세주 자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을 수 있다. 구세주에 대한 사도의 말씀에 "조상들도 저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고 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해석해도 불합리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그 전에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에는 주님의 사자라고 부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천사 중의 하나였지만 특별한 섭리로 그의 주님을 대표하기로 되었기 때문이었는가? 혹은 그에게 있는 어떤 피조물적인 특색이 그의 사명을 위해서 나타나 보이며, 또 귀에 들리는 말을 해서 주님의 임재를 알린 것인가? 즉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피조물을 통해서, 경우에 따라 적당한 방법으로 사람의 감각에 하나님의 임재가 알려진 것인가? 그는 한 천사로서 어느 위격을 발표하라는 지시를 받아 언제든지 그대로 할 용의가 있었던 것인가? 성자나 성령이나 성부 하나님의 위격을 말하든지, 또는 삼위일체 전체 즉 유일신을 들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인가?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또 성령이나 우리가 유일신이라고 믿고 이해하는 삼위일체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아무도 감히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분은 조상들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단자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성부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성자도 하나님이신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의 말씀에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성령도 하나님이신 것은 같은 사도가 언명하는 바와 같다. "그런즉 너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고, 그 앞에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다(고전 6:19,20). 그래서 건전한 정통 신앙이 믿는 바와 같이,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시므로, 여기 나오는 천사가 다른 천사들과 같은 존재라고 할 때에, 그가 삼위일체의 어느 위격을 대표했는지, 또는 한 위격을 대표하고 삼위일체 자체를 대표한 것은 아닌지, 이런 점들이 충분히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목전의 사명을 위해서 피조물의 형체를 취했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며 귀에 들리고 주와 하나님의 사자라고 불린 것이라면, 그 하나님은 여기서 성부라고 해석할 수 없으며 성자나 성령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성령을 사자라고 한 곳을 나는 회상할 수 없지만, 성령은 그 사명으로 보아서 사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성령에 대해서 "그가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16:13). 헬라어의 천사(angelos)를 라틴어로는 사자(nuntius)라고 번역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예언서에 "위대한 지혜의 사자"라는 분명한 칭호가 있다(사 9:7, LXX, 개역성경의 "모사"). 성령과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의 주와 하나님이시다.

 

      14. 구름 기둥과 불 기둥에서 나타나심.

 

      24.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날 때에 대해서도, "주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추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 하니라"고 한다(출 13:21-22).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그 뜻에 예속된 피조물의 형체로 사람들 눈에 나타나셨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의 본질로 나타나신 것은 아니었다. 또 나타나신 이가 성부이셨는지, 또는 성령이셨는지, 또는 삼위일체 한 하나님이셨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대로는, 이 구별이 없는 말씀이 달리도 있다: "주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하시니라"(출 16:10-12).

 

      15. 시내산에서 나타나심. 삼위일체가 말씀하셨는가, 또는 어느 한 위격이 말씀하셨는가?

 

      25. 이제는 시내산의 구름과 음성과 번개와 나팔소리와 연기 이야기로 가자.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주께서 불 가운에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사람들이 심히 놀라며,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 19:18-19, LXX). 십계명으로 율법을 받은 후에 성경 말씀은 계속해서,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고 하며, 조금 뒤에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고 한다(출 20:18,29).

      나는 여기에 대해서 한 가지밖에 할 말이 없다. 즉 아무리 정신 나간 사람이라도 연기와 불과 구름과 암흑과 그밖에 비슷한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 즉 그리스도나 성령의 본질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아리우스파까지도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감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모든 현상은 창조주를 섬기는 어떤 피조물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적당한 섭리로 인간의 감각에 알려졌다. 혹 육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구름에 가까이 갔다고 성경에 있기 때문에, 구름을 사람들이 본 것은 사실이지만 모세는 구름 속에서 자기의 육안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본 것이라 암시할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떠드는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보인다고까지 한다.

      만일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뿐 아니라, 사람의 지혜까지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면, 모세는 물론 그리스도를 그 눈으로 보았을는지 모른다. 또는 성경에 이스라엘 장로들에 대해서 "그들이 이스라엘 하나님이 서 계신 곳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출 24:10)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가 - "세상 끝까지 힘차게 펼쳐지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리는" 지혜가(지혜서 8:1) - 땅 위의 어느 한 장소에 자기의 본질로 서 계셨다고 믿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요 1:3) 말씀이 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혹은 줄어들며 혹은 늘어나신다고 한다(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마음에서 이런 생각을 일소해 주소서). 그러나 우리가 자주 언명한 바와 같이, 이런 보고 만질 수 있는 표징들은 하나님의 뜻에 예속된 어떤 피조물을 통해서 나타났고, 보이지 않고 정신적인 하나님을 의미하려는 것이었다. 이 하나님은 성부이실 뿐 아니라 또한 성자와 성령이시다. 이 하나님에게서 만물이 나오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있으며, 그에게로 만물이 돌아간다(롬 11:36).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聖)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다"(롬 1:20).

 

      26.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된 문제점에 관해서 볼 때에, 시내산에서 사람들의 눈에 나타나 보이면서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킨 모든 현상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또는 성부나 성자나 성령이셨는지, 어느 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경솔한 주장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억측을 말해도 좋다면, 그리고 삼위일체의 어느 한 위격으로 해석한다면, 성령이셨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두 돌판에 새겨 주신 율법 자체를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쓰셨다고 하며(출 31:18) 복음서에서도(눅 11:20) 성령을 이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유월절 어린양을 죽여 유월절을 지킨 후 50일이 지나서 이 일들이 시내산 위에서 있었다. 마치 주님의 수난이 있은 후에 부활로부터 50일이 지났을 때에 성자가 약속하신 성령이 강림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있는 것과 같이(행 2:1-4), 성령이 오셨을 때에도 불의 혀가 갈라져서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고 하므로, 이 기록은 출애굽기와 조화를 이룬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주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고 하며(출 19:18), 조금 뒤에 "산 위의 주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고 한다(출 24:17). 율법을 써야 할 성령을 동반하지 않고는 성부나 성자가 그런 모양으로 나타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있었던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 본질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보이지 않으며 변하지 않으므로, 그런 피조물의 형체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독특한 표징으로 삼위일체의 어느 일정한 위격을 지적했다는 것을 볼 수 없다.

 

      16.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는가?

 

      27. 대부분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성경에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주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했는데(출 33:11), 조금 뒤에 같은 그 모세가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 자신을 밝히 내게 보이사 내가 주를 보게 하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라고 한다(출 33:13, LXX), 또 모세는 조금 뒤에 다시 주님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한다(출 33:18). 그러면 이 말씀들은 무슨 뜻인가? 위에서 있었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그 본질대로 보이셨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이 가련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피조물에 의하지 않고 그 자신에 의해서 볼 수 있다고 믿었으며, 모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간 것도 이런 목적으로 한 일이라고 했다. 즉 어두운 구름은 백성들의 눈으로도 볼 수 있었지만, 모세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말하자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주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세가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 자신을 내게 밝히 보이소서" 하지 않는가?

      그는 확실히 물체적으로 본 것을 알았고, 하나님의 참 모습을 영적으로 보려고 갈망했다. 여기에 있는 말로 된 표현 방법은 친구 사이의 대화와 같이 조정된 것이다. 그러나 누가 육안으로 성부를 보는가? 또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진 하나님이요 말씀이셨던 분을(요 1:1-3) 누가 육안으로 보는가? 또 누가 육안으로 지혜의 영을 보는가? 그러나 "주 자신을 밝히 내게 보이사 내가 주를 보게 하소서"라는 말씀은, 당신의 본질을 보이소서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모세가 이런 말씀을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힘껏 참았을 것이다. 그들은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그가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일을 원한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 여기서 아주 분명하다. 그러므로 누가 감히 피조물의 형체로 나타나 보인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예속된 피조물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죽을 인간의 눈에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본체이셨다고 할 것인가?

 

      28. 참으로 주께서 그 후에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셨다(출 33:20). 또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의 망대에 두고 내가 지나가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신다(출 33:21-23).

 

      17. 어떻게 하나님의 등이 보였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등을 보는 망대는 정통교회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 조상들은 성부만은 볼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경솔한 생각이다.

 

      이 말씀은 보통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의미한다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여기서 등 또는 뒤라고 하는 것은 처녀에게서 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신을 의미하며, 그의 죽을 성질의 후천성(後天性) 때문이거나 또는 그가 자기를 낮추어 세상의 후기(後期)에 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게 계시며 취할 것으로 여기시지 않은 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 2:6). 그 하나님의 얼굴은 물론 아무도 보고 살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도가 말씀하듯, 금생(今生)을 떠난 후에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기 때문일 수 있다. 금생에 대해서는, 몸에 거할 때에는 우리가 주와 따로 거한다고 하며(고후 5:6), 썩어 없어질 육체가 영혼을 내리누른다고 한다(지혜서 9:15).

      시편에는 "사람마다 진실로 허사뿐이라"고 하며(시 39:5),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시 143:2). 요한은 금생에서는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고 한다(요일 3:2). 요한은 물론 금생이 지난 후를, 즉 우리가 죽음의 빛을 치르고 약속된 부활을 받은 대를 의미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지 못한다는 다른 이유는,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된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금생에서라도 어느 정도로 파악한다면, 그만큼 우리는 육적 욕망에 대해서 죽는다는 뜻일 수 있다. 또 이 세상이 우리에 대해서 죽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도 세상에 대해서 죽으며, 사도와 같이 우리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갈 6:14)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일 수 있다. 이 죽음에 대해서 사도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 한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골 2: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의 얼굴을 즉 지혜 자체의 나타나심을 보고 살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나타나심이야말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보기를 열망하는 대상이다. 이웃도 이렇게 보기 위해서 그들은 그 이웃을 힘껏 도우며, 자기 몸 같이 사랑한다. 즉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이 두 계명을 지킨다(마 22:37-40). 이 점은 모세에게서도 예표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특별히 열렬한 사랑으로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 자신을 내게 밝히 보이사 내가 주를 보게 하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소서"라고 말했지만, 곧 이어서 이웃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라고 첨가했다(출 33:13). 그러므로 모든 이성(理性)적인 영혼은 이렇게 보기를 원하며, 그 소원이 강할수록 영혼이 더욱 청결하며, 청결할수록 영적인 일들을 향하여 올라가며, 영적인 일들에 올라갈수록 물질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더욱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동안은 보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걸으며(고후 5:6-7), 주님의 등, 곧 그의 육신을 볼 수밖에 없다. 이 믿음은 곧 반석이니, 우리는 반석이 의미하는 견고한 믿음을 토대로 그 위에 서며, 난공불락의 망대, 즉 정통 교회에서 내다보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것과 같다(마 16:18). 그리스도의 등에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알게 될수록, 우리는 보고자 하는 그이 얼굴을 더욱 확실히 사랑하게 된다.

 

      29. 그러나 육신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며 의롭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 10:9)하며,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한다(롬 4:25).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 대한 보수는 주님이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그의 원수들도 믿지만, 그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활을 굳게 믿으며, 굳은 반석 위에서 바라보듯 보고 있다. 우리는 그 반석 위에서 우리가 구속될 것을, 즉 우리의 몸을 부활할 것을 확실히 기대한다(롬 8:23). 우리는 이 일이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서, 즉 우리들에게서 실현되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는 이 일이 이미 실현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고 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가 지나가신 후가 아니면 그의 등을 보기를 원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의 부활을 믿으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파스카(pascha)는 지나감 즉 유월절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고 한다(요 13:1).

 

      30. 그러나 이것을 믿으면서도 정통 교회 안에서 믿지 않고 분파나 이단으로 믿는 자들은 주의 곁에 있는 곳에 서서 그의 등을 보지 못한다.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와 영적으로 접촉하는 곳이 아니면, 지상의 어느 곳이 그의 곁에 있는가? 그의 곁에 있지 않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땅의 한 끝으로부터 다른 끝까지 힘차게 펼쳐졌으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리신다(지혜서 8:1). 하늘은 그의 보좌며 땅은 그의 발등상이라고 했으며,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느니라"고 하신다(사 66:1-2).

      우리가 반석 위에 서는 곳, 주의 곁에 있는 것을 정통 교회 자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주의 부활을 건전하게 믿는 자는 거기서 주가 지나가시는 것과 주의 등, 즉 주의 몸을 본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고 주는 말씀하셨다. 참으로 우리는 존엄하신 주께서 주를 영광스럽게 하시면서 지나가셨을 때에 그 위에 굳게 서 있었으며, 그 때에 주께서는 부활하시고 성부께로 올라가셨다. 베드로는 굳게 서기 전에 공포심에 사로잡혀 주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지만(마 26:70-74), 주가 승천하신 후에 서서 확신을 가지고 주를 전파했다. 그가 하나님의 예정으로 이미 반석 위의 망대에 서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주님의 손이 그를 덮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주님의 등을 보게 되어 있었으나 주께서 아직 지나가시지 않았었다.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가시지 않았다. 그는 아직 부활로 영화롭게 되시기 전이었다.

 

      31. 출애굽기에 있는 다음 말씀, "내가 지나가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모세가 그 때에 대표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믿었다. 마치 그들의 눈에서 주님이 손을 거두시고, 그들은 이제 그의 등을 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는 이사야의 비슷한 예언을 회상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고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사 6:10; 마 13:15). 끝으로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셨으니"라고 하는 시편의 말씀은(시 32:4) 그들의 입장을 가리킨 것이라고 해도 무리하지 않을 것이다. 주야로 라고 한 낮은 아마 주께서 분명한 기적을 행하셨는데도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며, 밤은 그가 수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은 그가 보통 사람과 같이 죽임을 당하여 아주 없어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나가신 후에 그들은 그의 등을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부활하실 수밖에 없었다고(행 2:23-24)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에 그들은 심히 통회했으며(행 2: 37, 41),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시편 처음에 있는 말씀이 실현되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그러므로 "주의 손이 나를 누르셨다"고 했으며, 지나가시면서 그 손을 거두시고 그들이 그의 등을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통회하며, 고백하며, 주의 부활을 믿고 죄의 용서를 받는 자의 음성이 들린다: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주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4-5).

      우리는 육신의 암흑에 휘말려서, 하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등은 보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종의 형체를 취하신 주는 그 얼굴과 등이 다 보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에, 사람의 몸과 같이 한 쪽에 얼굴, 다른 한 쪽에 등이 있다고 하든지, 외형이나 운동이나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32. 그러므로 출애굽기에 기록된 음성들과 모든 물질적 현상들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었고, 또는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이 우리를 설득한 것처럼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이셨고, 위에서 한 설명이 암시하는 것과 같이 어떤 때에는 성령이셨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성부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도 조상들에게 나타나시지 않았다는 결론은 내릴 수 없다. 옛날에는 그런 출현(出现)이 많았고, 성부나 성자나 성령의 이름을 분명히 들지 않았을 뿐이다. 다만 어떤 추측, 곧 개연성이 많은 결론을 할 수 있는 시사는 때대로 있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결코 보이는 모양으로 조상들이나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경솔한 것이다.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관해서 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의견을 제시한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성경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라고 하며(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는 말씀이 있다(딤전 6:16). 건전한 믿음은 이런 말씀들을 최고의 본질(또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 본질은 최고이며, 최고로 거룩하며, 변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출현 현상들은 하나님의 실상(實相)을 그대로 계시하지 않고, 때와 장소의 사정에 적합한 암시를 할 뿐이다.

 

      18. 다니엘이 본 환상.

 

      33.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이상 중에 다니엘에게 나타나신 것을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나는 모른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낮추어 되신 인자가 그 이상 중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서 나라를 받았다고 한다. 즉 시편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라"고 하시며(시 2:2-8),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신"(시 8:6) 분에게서 받으셨다. 나라를 주시는 성부와 나라를 받으시는 성자가 다니엘에게 형체로 나타났다면, 그들은 어떻게 성부께서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이 결코 없다고 주장하는가?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성부는 "아무도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유일한 분이라고 이해해야 된다고 하는가?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전한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9-10). 조금 뒤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보라, 영원한 나라를 성부가 주시고 성자가 받으시며, 두 분이 다 보이는 형체로 선지자의 눈앞에 나타나셨다. 따라서 성부가 하나님께서도 이런 식으로 죽을 인간들에게 곧잘 나타나셨다고 믿어도 부적당하지 않다.

 

      34. 혹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성부는 꿈꾸는 사람에게 나타나셨으므로 보이시지 않고, 성자와 성령은 모세가 깨어 있을 대에 모든 것을 보았으므로 보이시는 것이라".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그의 육안으로 보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는 사람의 육체에 생명을 주는 사람의 영이나 바람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기운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육안이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영은 더욱 더 볼 수 없을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본질이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모든 인간과 천사의 마음을 초월하셨다. 성자와 성령은 깨어 있는 사람에게도 보이시지만, 성부는 꿈꾸는 사람에게만 보이신다는 그릇된 말을 누가 감히 무모하게 할 수 있는가?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도 없는 자"라는 말씀은 그들은 어떻게 성부에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가? 혹은 사람이 잘 때에는 사람이 아닌가? 혹은 몸의 모양을 취해서 꿈꾸는 사람에게 이상 중에 자기를 알리실 수 있는 분이, 동일한 물체적인 피조물의 형상을 만들어 깨어 있는 사람의 눈에 자기를 알리실 수는 없다는 말인가? 성부의 실상은 이루는 그의 본질 자체는 자는 사람에게 어떤 물질적인 형상을 통해서도 나타낼 수 없으며, 깨어 있는 사람에게 어떤 신체적 형태로 나타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성부의 본질이 이러할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의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이 본 이상들에 감격을 느낀 사람들이 성부는 사람의 육안에 보이신 일이 없고, 성자와 성령만이 그렇게 나타나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곳이 많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곳들을 보고, 성부께서 깨어 있는 사람들의 눈에 물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신 곳이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광범한 성경 구절들을 빼놓고,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만을 그들에게 묻고자 한다. 그는 확실히 깨어있었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 나타난 것을 초대해서 대접했다. 그 중의 어느 한 사람도 특출하지 않았고, 더 빛이 난다든지, 더 권위가 있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창 18:1). 그런데도 성경은 이 사건을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는 말로 소개했다(창 18:1).

 

      35. 3분법에 따라서 우리가 탐구하기 시작한 첫째 문제는, 피조물의 형태들을 통해서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성부이셨는가 또는 성자이셨는가, 또는 성령이셨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때는 성부이셨고, 어떤 때는 성령이셨는가; 또는 위격의 구별이 없이, 이른 바 유일신 즉 삼위일체 지체가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대로 또 충분하다고 생각한 대로 여러 성경 구절들을 연구했다. 거기서 하나님의 신비들을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연구한 결과로 얻은 결론은 한 가지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성경의 문맥이 그럴 듯한 논거를 제시해서 삼위일체의 어느 특별한 위격을 지적하지 않으면, 어느 위격이 어떤 조상이나 선지자에게 나타나셨다고 경솔한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상 그대로를 형체적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성자나 성령뿐 아니라 성부께서도, 그의 뜻에 예속된 어떤 피조물을 수단으로 삼아 구체적인 형태로 죽을 운명인 우리의 감각에 자기를 알리실 수 있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일이 이만큼 되었으므로, 이 권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나머지 문제들을 다음 권들에서 검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