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1권 2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2. 10. 21:10

        8. 성자를 성부에게 복종시킨다는 말씀이 오해를 받았으므로, 그에 대한 성경 본문을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나라를 아버지께서 바치리라는 것은 나라를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뵙게 되는 것이 모든 행동의 약속된 목적이다. 성령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성부와 동등하게 충분하시다.

 

      15. 그러므로 사도의 말씀으로서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라"고 한 것은(고전 15:28)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취한 그리스도의 모양이 후에 신성(神性) 자체로 변하리라,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자신으로 변하리라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며, 삼위일체의 비물질적이며 불면하는 통일성이며, 본질이 자체와 같으며, 영원성이 자체와 동등하시다. 둘째 해석은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라"고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필경은 그 피조물 자체가 복종하고 변하고 변경되어 창조주의 본질로 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믿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피조물의 본질이었던 것이 창조주의 본질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을 인정한다. 즉 주께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아직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승천하시기 전이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수난과 부활이 있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 안에 있는 인간성이 하나님의 본질로 변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자에게 복종케 되리라"고 했으며, 이 말씀은 마치 그 때에 인자(人子)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이 취한 인성(人性)이 만물을 인자에게 복종케 하신 이의 본성으로 변하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한 이 일이 "그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고전 15:24), 즉 심판 날 후에 있으리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의견을 따르더라도, 처녀에게서 받은 종의 형체보다 아버지가 여전히 크시다. 그러나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하나님의 본질로 변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가 수난 전에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하셨을 때에 그에게 아직 인간성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말씀을 하신 뜻에 따라, 성자는 하나님의 형체로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지만, 종의 형체로서는 아버지가 그보다 크시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사도의 말씀, "만물이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라는(고전 15:27) 말씀을 들을 때에, "만물을 아들의 아래 두신 이"를 성부라고 생각하면서 성자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이 점을 빌립보서에서 알린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그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한다(빌 3:20-21). 성부의 역사와 성자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킨 것은 성부 자신이 아니라, 성자였을 것이다. 즉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신 성자일 것이다. 성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복종시키는 이와 멸하는 이는 같기 때문이다.

 

      16. 또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하나님께 바치신 후에는 손을 떼시리라고 어떤 허망한 사람들이 생각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리라고"고 할 때에, 성자는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므로, 자기를 제외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 문절에 "둘 때까지"라는 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고 논쟁을 구하는 사람들은 속았다. "저는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가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라고(고전 15:25) 있기 때문이다. 발아래 둔 후에는 왕노릇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으로 그들은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견교하여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볼 때까지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에(시 11:8) 같은 뜻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가 그들의 운명을 실지로 본 때에, 그는 두려워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혹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은 나라가 없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고, 신인간(神人間)의 중보이신 인간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믿음으로 사는 모든 의인들 사이에서 왕노릇하시며, 필경은 그들을 사도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리라고(고전 13:12) 한 그 보는 경지까지 인도하시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신자들을 인도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뵙게 하시리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주님 말씀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성자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실" 때에 바꿔 말하면, 천사들의 정사와 권세와 능력으로 형상(形像)들을 처리할 필요가 없어질 때에, 성자가 성부를 나타내 보이실 것이다. 이것은 아가서에서 신부에게 하는 말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무리가 은구슬 박은 금형상(金形像)을 만들어 너에게 주리라"(아 1:11-12, LXX). ("왕이 상에 앉았다는 것은") 즉 그리스도가 그의 비밀한 것에 계실 때라는 뜻이다. 성경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골 3:3-4)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이 실현되기 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즉 형상으로 보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고전 13:12).

 

      17. 우리에게 약속된 이 정관(靜觀, contemplatio)은 우리의 모든 노고의 궁극적 목적이며 우리의 기쁨의 영원한 충만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고 했다(요일 3:2).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출 3:14)고 하신 이 분을 우리는 영원계에 살 때에 정관할 것이다. 주의 말씀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말씀이(요 17:3)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오셔서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며(고전 4:5), 이 죽음과 썩음의 어두움이 없어져 버릴 때에, 이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시편에서 언급된 우리의 아침이 될 것이다: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주를 정관하겠나이다"(시 5:3, LXX). 나는 "그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는 말씀에서 이 정관에 대한 언급을 본다. 바꿔 말하면, 인간인 그리스도 예수 즉 신인간의 중보인 예수가 지금 믿음으로 살면서 그의 지배하에 있는 의인들을 인도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정관하는 경지로 이르게 하신다는 뜻이다.

      만일 내가 여기서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잘 아는 사람은 나를 고쳐 바로잡게 하라. 내가 보기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 우리가 기대 가운데서 기뻐하는 동안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정관하게 된 때에는 우리는 다른 것은 전혀 구하지 않을 것이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이것은 왕이 상에 앉아 있는 동안에 대한 말씀이다. 그 때에 "주의 앞에서 기쁨이 충만하다"는 말씀이(시 16:11) 실현될 것이다. 기쁨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외에 원하는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부께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나실 것이며, 그것으로 우리에게 충분할 것이다. 빌립은 이 점을 잘 파악했기 때문에,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다(요 14:8). 그러나 그는 아직 같은 뜻을 "주여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 점을 그에게 알린 것이 주님이 하신 대답이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빌립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그가 이 점을 알게 되기 전에 믿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말씀을 계속해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셨다(요 14:8-10).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6-7).

      참으로 정관은 믿음에 대한 상(賞)이며, 상을 받기 위한 준비로서 믿음으로 우리의 심정을 청결해야 한다. 성경에 "믿음으로 저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고 한 것과 같다(행 15:9). 그러나 정관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깨끗이 되리라는 것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 5:8)는 말씀이 아주 명백히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므로, 시편에서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시 91:16).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들을 보이소서"라고 하든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이소서"라고 하든지 그 뜻은 같다. 한 쪽을 보이지 않고 다른 쪽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자 자신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두 분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성자와 성부는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앞에 기쁨이 충만한 분으로서 성부만 또는 성자만 충분한 때가 있다.

 

      18. 성부와 성자 두 분의 영 즉 성령도 이 통일성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 성령에 대해서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라고 하신 것은(요 14:17) 적합한 말씀이다. 그 형상으로 우리가 지음을 받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즐기는 것 이상의 기쁨이 우리에게 없으며, 그것은 충만한 기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에 대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성령만으로 충족하다는 듯이 말하는 때가 있으며, 성령은 성부 및 성자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참으로 그만으로 충족한 것이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분리할 수 없으므로 성부만으로 충족한 것과 꼭 같으며, 성자가 성부 및 성령과 분리할 수 없으므로 성자만으로 충족한 것과 꼭 같다.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를 생각하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이 능히 저를 받지 못하느니라(요 14:15-17). 즉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받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이다(고전 2:14).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성자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듯한 말씀이 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 그러면 성자 자신은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지 않았다는 듯이, 또는 성자가 완전히 가르치지 못한 것을 성령이 완전히 만든다는 듯이, 성자가 여기서 제외된 것인가? 그러므로 평소에 성령을 성자보다 작다고 말하는 그들은 원한다면 성령이 성자보다 크다고 주장해 보라. 또는 성령만이 모든 진리를 너희에게 가르치리라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는가?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라는 말로 성자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고 제외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근거로 삼아 이 악심 있는 자들은 성령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사정을 성자에게까지도,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하듯이 가르치지 못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자의 말씀이 성령에게 이런 큰 권능을 돌리기 때문이다: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요 16:6-7).

 

      9. 어떤 때에는 한 위격으로 모든 분을 의미한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말씀과 성령이 동등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인자가 그들 사이에 계시는 것이 성령이 오시는 데 방해가 되리라는 듯한 뜻이었다. 성령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함으로써 작게 되시지 않았다. 따라서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종의 형체로만 보고 그 보는 대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종의 형체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 대한 다른 말씀도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다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하신다(요 14:28). 바꿔 말하면, 너희가 나의 현상(現狀)을 보는 동안은 나를 아버지보다 작다고 단정하므로, 내가 아버지께로 갈 필요가 있다. 너희는 내가 취한 피조물과 그 모양에 주의를 빼앗겨서 나와 아버지와의 동등성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뜻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에도(요 20:17) 있다. 만지는 것은 이를테면 우리의 지식에 한계를 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그가 나타나 보이는 대로만 마음에 생각해서 그 생각이 제한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그가 성부에게로 올라가면 그들은 그를 진상(眞相)대로 즉 성부와 동등하신 그를 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드디어 우리에게 충분하다고 하는 때가 있으며, 우리의 사랑과 동경의 완전무결한 보응으로 성자를 뵙는 것을 약속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신다(요 14:21).

      그런데 이 말씀에 "내가 또한 그에게 아버지를 나타내리라"는 말씀이 없다고 해서, 예수님은 성부를 제외하신 것인가? 그러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참이므로, 성부를 알리는 때에는 성부 안에 계신 성자도 알려지며, 성자를 알리는 때에는 성자 안에 계신 성부도 알려진다. 따라서 "그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는 말씀도, 성자가 나라를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자가 신자들을 인도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뵙게 하실 때에는, 확실히 성자 자신도 뵙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다가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주님의 대답은 논리적이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2-23).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자신만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에게 와서 그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19. 성부와 성자는 그들을 사랑하는 자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므로, 혹은 성령이 그 거처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전에 성령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그러므로 "너희와 함께 거하며 너희 속에 계시리라"고 하신 그 성령은 이 집 밖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성부와 성자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셔서 그와 거처를 함께 하실 때에 성령은 그곳을 떠나며 자기보다 큰 분들에게 양보하시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심히 어리석을 것이다.

      성경은 이런 육적인 생각에 반대한다. 이 말씀이 있기 조금 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14:16). 따라서 성부와 성자가 오실 때에 성령은 떠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같은 거처에 영원히 계실 것이다. 그들이 없이 그가 단독으로, 또는 그가 없이 그들만이 오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알리기 위해서 그들의 이름도 말한다. 그리고 한 분 한 분에게 따로 따로 어떤 일을 돌리는 것은 다른 분들을 제외하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이 삼위일체는 하나가 되어 있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과 신성(神性)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10.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모양으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까? 나라를 바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지 않으리라.

 

      20.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라를 바치시되, 충실한 자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뵙게 하실 때에, 자신이나, 성령을 그 나라에서 제외하시지 않을 것이다. 거기 우리의 모든 선행의 결국이 있으며,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 있다. 주께서는 이 점을 가리켜,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6:22).

      주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들은 마리아는 이 기쁨과 비슷한 것을 미리 보여 주었다. 바꿔 말하면, 그는 모든 일을 쉬고,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진리에 열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히 계속될 내세의 모습을 미리 보인 것이다. 그의 언니 마르다는 필요한 일을 분주하게 했고, 그 일은 선하고 유익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지나가고 안식이 따를 것이다. 마리아는 그 안식을 주의 말씀에서 얻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생이 돕지 않는다고 마르다가 불평을 말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눅 10:38-42).

      주님은 마르다가 한 일을 나쁜 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는 직업은 그 필요성이 없어지는 때에 끝나버린다. 선행은 지나가지만, 그에 대한 상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뵙는 경지에서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며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빛을 받으며 하나님을 즐기는 것으로 충분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속에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롬 8:26) 사람이 한 말이 있다: "내가 주에게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생전에 항상 주의 집에 거하여, 주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신인간의 중보이신 인간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신 때에,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뵐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의 중보와 제사장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더 이상 간구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종의 형체를 취하여 우리의 제사장이신 그 분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키신 분에게 복종할 것이며, 그도 만물을 그 분에게 복종시키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과 함께 우리를 복종시키실 것이다. 그는 제사장이시므로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복종하실 것이다(고전 15:24-28). 그러므로 (성육신 하신) 성자는 하나님이신 사람이시므로, 성자 안에 있는 인간성은 성부 안에 있는 성자와 달라서 본질이 다르다. 마치 나의 영혼과 육신은 한 사람 안에 있으면서도 나의 육신이 나의 영혼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것보다 한층 더 다른 본질인 것과 같다.

 

      21. 예수께서는 지금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로서 대신 기도하시며, 그들은 노고와 슬픔이 지나가고 대면해 뵙는 경지를 얻고자 탄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을 그 경지까지 데려 가실 때, 즉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때에는, 나라를 바치셨으므로 더 이상 대신 기도도 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가리키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 16:25). 바꿔 말하면, 얼굴과 얼굴에 대하여 볼 때에는 비사(즉 비유)를 더 쓰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하신 것은 마치 "아버지를 너희에게 밝히 보이리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고로,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말씀을 계속하셔서: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는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 16:2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내가 아버지와 동등한 모양을 나타나지 않고, 다른 모양으로, 즉 내가 취한 피조물 때문에 아버지보다 작은 자로서 나타났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세상에 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내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죄인들의 눈에 그 형상을 보였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다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세상이 본 것을 세상의 눈 앞에서 없애 버린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로 가노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아버지와 동등하므로, 나를 믿는 자들에게 나를 이와 같은 자로 여기라고 가르친다는 뜻이 아닌가? 이 일을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부터 보는 경지로 데려갈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데려가는 것을,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를 믿는 자들, 그가 자기의 피로 구속한 자들을 그의 나라라고 하며, 그들을 위해서 그는 지금 대신 기도하신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와 동등하신 곳에서는 그들을 자기 안에 거하게 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구하시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보다 작으시므로 기도하시지만, 아버지와 동등하시므로 아버지와 함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성자 자신을 제외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위에서 인용하고 충분히 설명한 말씀들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기를 원하신다. 즉 일반적으로 삼위일체의 어느 한분을 지명할 때에는 다른 분들도 거기 함께 계신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지금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롬 8:3).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우리대로가 아니라, 장래에 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영원히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은 그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때"에 있을 것이며, 그 때에는 성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성자는 성부께 구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보기 전에 믿는 그 우리의 믿음이 공로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믿음으로써 보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며, 우리가 그의 기대하는 대로 되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다. 그 때에는 그가 현재 미워하는 우리의 상태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현재 상태를 계속하지 않으려는 뜻을 정하도록, 그는 권고하며 힘을 주신다.

 

      11. 성경의 어떤 원칙에 따라 성자를 혹은 동등하시다. 혹은 작으시다고 해석하는가?

 

      22.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성경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원칙을 우리는 이제 잘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로 계셔서 성부와 동등하신 데 대한 말씀과 종의 형체를 취해서 성부보다 작으신 데 대한 말씀을 우리는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말씀들 때문에 곤란을 느끼는 일이 없게 되었다.

      성자와 성령은 우리가 밝힌 바와 같이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 성부와 동등하시다. 그러나 성자는 종의 형체를 취하셨기 때문에 성부보다 작으시다. 성자 자신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라"고 하셨다(요 14:18). 성자는 자기를 비우셨다고 하므로 자신보다 작으며 성령보다도 작으시다. 그가 친히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또 그는 성령 안에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는니라"(마 12:28). 그가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시면서 추호의 주저나 의심이 없이 그 말씀이 자기에게서 실현되었다고 하신 그 말씀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눅 4:18-19; 사 61:1). 주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다고 하므로, 그는 이런 일들을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요 1:3). 종의 형체로서는, 그 자신이 율법 아래서 여자에게서 지어지졌다(갈 4:4). 하나님의 본체로서는 그와 성부는 하나이시다(요 10:30). 종의 형체로서 그가 오신 것은 그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시려 함이었다(요 6:38-39).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종의 형체를 따라 그의 마음이 슬퍼하여 죽게 되었으며,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신다(마 26:38,39). 하나님의 본체로서는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다(요일 5:20). 종의 형체로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빌 2:8).

 

      23.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서는, 성부에게 있는 것은 다 그의 것이요(요 16:15),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하신다(요 17:10). 종의 형체를 따라서는, 그의 교훈은 그의 것이 아니요 그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요 7:16).

 

      12. 성부가 아시는 날과 시간을 성자는 왜 모르시는가? 혹은 하나님의 본체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혹은 종의 형체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다. 어떻게 혹은 그리스도가 나라를 주시며, 혹은 그렇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심판을 하시리라, 또 하시지 않으리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그들을 모르게 하신다는 의미에서 그도 모르신다. 즉 그 때에 제자들에게 알리신다는 의미에서 아신 것이 아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하신 것과 같다. 즉 이제야 내가 너를 알게 하였노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당한 후에야 자기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예수께서는 적당한 때가 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려 하시며, 미래의 일을 과거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그는 이 일을 아직 하시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제부터 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이미 하신 것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일 가운데 "그 날과 그 때"도 포함되었다.

      사도의 말씀도 비슷하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더 숭고한 교리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했기 때문이다. 조금 뒤에서 그는 그들에 대해서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한다(고전 3:1).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 있을 때에는 그에게서 들어도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일들은 그도 알지 않고, 그들이 듣고 알아야만 할 이 일들만을 알았노라고 언명했다. 끝으로,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알지 않았던 일들을 그는 완전한 자들 사이에서는 알았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고전 2:6). 덮어서 숨겨 놓은 개천을 암거(暗渠)라고 하는 식으로, 무엇을 숨기는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고 한다. 성경은 특히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지 않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24.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서는 "모든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그가 나를 낳았다"고 하니(잠 8:25; LXX), 즉 모든 높은 피조물들보다 먼저며, "아침 별이 돋기 전에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니(시 110:3, 불가타), 모든 시대와 시간적인 것들이 있기 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종의 형체를 따라서는, "주께서 나를 그의 길들의 처음에 창조하셨다"고 한다(잠 8:22). 하나님의 본체로서는 "나는 진리라" 하시고, 종의 형체로서는 "나는 길이라' 하신다(요 14:6).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계 1:5) 자로서 그 자신이 그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갈 길을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의 머리로서 몸에 영생까지 주며,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려던 처음에 창조되셨다.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서는, 그는 우리에게 말하는 "처음"이시며(요 8:25, 불가타), 이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그러나 종의 형체를 따라서는, 그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시 19:5).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서는, 그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 또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하였다(골 1:15,17). 그리고 종의 형체를 따라서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 1:18).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서, 그는 영광의 주시며(고전 2:8), 따라서 그 자신이 그의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에 대해서, 그는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고 했으며(롬 4:5), 그에 대해서, 그는 스스로 의로우며 또 의롭다 하신다고 했다(롬 3:26). 그러므로 그가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면, 의롭다 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이며, 그는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영광의 주시다. 그러나 그는 자기들의 영화롭게 되는 문제를 열심히 묻는 제자들에게 종의 형체를 따라 대답하셨다: "내 우편에 앉거나 발 아래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 20:23).

 

      25. 그러나 그와 성부는 하나이시므로(요 10:30), 성부께서 예비하신 것은 성자 자신도 예비하셨다. 우리는 여러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삼위일체의 어느 한 분에 대한 말씀은 다른 모든 분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이미 밝혔다. 이것은 같은 한 본질이 불가분리적으로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해서 성자는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고 하신다(요 16:7). 우리가 보내리라고 하시지 않고, 성부는 관계없이 성자만이 보내시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리라"고 하신다(요 14:25-26). 여기서는 아버지만이 보내시고 아들은 보내시지 않을 것으로 말씀하신다. 이 구절들과 같이,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라는 구절에서도, 성자와 성부가 함께 그 원하시는 사람을 위해서 영광의 자리를 예비하셨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는 문제를 말씀하실 때에는 성부께서 그와 함께 성령을 보내시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고, 성부가 보내시리라고 하셨을 때에는 자기도 보내시리라는 것을 부정하시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명백한 말로 "나의 줄 것이 아니라"고 언명하시면서, 같은 식으로 이런 일들을 아버지께서 계속 말씀하신다고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미 결정한 문제, 즉 종의 형체를 따라 하신 말씀이며, "나의 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나에게는 그것을 줄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동등한 권한으로서 이것을 주시리라는 뜻이 될 것이다. "나의 줄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나의 인간적인 권한으로서 나는 이런 것들을 주지 않으며,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요 16:15)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것도 내 것이요, 나도 아버지와 함께 이런 일들을 예비한 것이다.

 

      26. 나는 또 "사람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요 12:47) 하신 뜻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여기서 "내가 심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과 같은 뜻일까? 그러나 그 다음에 어떤 말씀이 있는가?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그리고 더 계속해서,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라고 하신다. 우리는 곧 여기서 성부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첨가한 말씀은 다르다: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7-48). 그러면 어느 쪽이 바른가? "네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으니, 성자도 심판하시지 않고, 성자가 하신 그 말이 심판하리라고 하셨으니, 성부도 심판하시지 않을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에 있는 말씀을 들어보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요 12:49-50).

      그러므로 성자가 심판하시지 않고 그가 하신 말씀이 심판하며, 성자는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무엇을 말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말씀하신 그 말씀이 심판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성부께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성부의 말씀을 성자가 하셨고, 성부의 하신 말씀 그 자체는 성자 자신과 동일하다. 성부의 명령과 성부의 말씀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성자는 그 말씀과 그 명령을 다 성부의 말씀이라고 부르신다. 그러면 성자가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을 때에, 혹은 나는 내 자의로 난 것이 아니다 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일이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는 성부의 말씀을 하시며 자신을 말씀하신다. 그는 보통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다"고 하시며, 이 말씀으로 성부께서 그를 낳으셨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를 원하셨다. 성자가 이미 존재하고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주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그에게 주어 가지게 하셨다고 하는 말씀은, 그를 낳아서 존재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성육신 이전과 성자가 취하신 피조물적 본성 이전의 성자는 피조물의 경우와 같지 않다. 그 때의 하나님 아들은 독생자로서,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또 그가 어떠하심과 그가 무엇을 가지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서로 다르지 않았고, 도리어 그가 어떠하심은 동시에 그가 가지신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분명히 표현된 곳이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면서도 생명이 없는 이에게 주어 그 안에 생명이 있게 하신 것이 아니다. 존재하신다는 그 사실 자체로서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는 말씀은 그는 변함없는 생명, 즉 영원한 생명으로서 성자를 낳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요한이 그 서간에서(요일 5:20) 말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시다. 그와 같이 여기 있는 주님의 말씀,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하며(요 12:48) 또 그 말 자체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명령이며, 그 명령 자체는 영생이라고 하실 때에, 우리는 어떤 다른 것을 인정할 것인가?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요 12:49-50)고 그는 말씀하신다.

 

      27. 그러므로 "내가 심판하지 않고 내가 한 그 말이 심판하리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이냐고 나는 묻는다. 이 말씀은 문맥으로 보아서, "내가 심판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이 심판하리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다. 우리는 "나는 심판하지 않고, 내가 심판하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것인가? 그러나 만일 이 말씀의 뜻이 나는 인자(人子)이므로 사람으로서의 권한으로는 심판하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권한으로 심판하리라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참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나는 심판하지 않고, 내가 심판하리라"는 말이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말이라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요 7:16)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어떻게 "내 것"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는가? 주님은 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고,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하신 말씀은 그의 것인데, 그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의미로는 그의 것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그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면, 이 말씀이 어떻게 참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본체를 따르면 그의 것이요, 종의 형체를 따르면 그의 것이 아닌 것이다.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요 7:16) 말씀하실 때, 우리를 말씀 자체로 돌아가게 하신다. 아버지의 교훈은 아버지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독생자시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요 12:44)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를 믿지 않겠는가? 이렇게 일관성이 없고 모순된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해석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즉 피조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 보이는 피조물이 된 그를 믿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으로 그 마음을 청결케 해서 동등한 그를 볼 수 있게 되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 그러므로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해서 신자들의 주의를 성부에게로 돌리실 때에 자기를 성부에게서, 즉 자기를 보내신 이에게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믿되 그와 동등하신 성부를 믿는 것 같이 하라는 뜻이다. 다른 데서도 이 뜻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즉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이 또한 나를 믿으라, 나와 아버지는 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를테면 사람들의 믿음을 자기에게서 떼어 성부에게로 돌려보내시는 것과 같이, 다른 말씀, "그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 하실 때에도 이 두 가지 말씀을 어떤 뜻으로 생각할 것인가가 분명하다. 또한 다른 말씀도 이런 뜻이다. 그가 친히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인데(딤후 4:1), "나는 심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그는 인간적인 권능으로 심판하시지 않겠으며,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리신다. 그가 내려오신 목적도 사람들의 마음을 들어 올리시려는 것이었다.

 

      13. 한 위격(位格)으로서 그리스도의 본성이 여러 가지이므로 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을 한다. 무슨 까닭에 아버지가 심판하시지 않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는가?

 

      28. 본래대로 하나님의 형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 분이 그 취하신 종의 형체 때문에 인자이신 분이 아니라면, 사도 바울은 이 세상 관원들에 대해서, "만일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종의 형체로 못 박히셨지만 영광의 주가 못 박히신 것이다. 하나님이신 사람이 사람의 형체를 입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롭고 자상하고 경건한 독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무엇 때문에 무엇이라고 하며, 무엇을 따라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이해한다. 예컨대 그는 하나님으로서 그의 백성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말했지만, 그것은 물론 영광의 주로서 하시는 일이다. 그래도 하나님까지도 못 박히셨다고 하는 말이 옳으므로 영광의 주가 못 박히셨다. 그것은 신성의 권능 때문이 아니라, 육신의 연약 때문이었다(고후 13:4). 마치 그가 하나님으로서, 즉 인간의 권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심판하신다고 우리가 말하며, 또 영광의 주가 못 박히셨으므로 그 사람 자신이 심판하시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마 25:31-32) 라고 말씀하시면서, 거기 있는 끝의 문장에 이르기까지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일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 악한 심성을 고집하는 동안은 심판 때에 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리라"고(슥 12:10)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를 볼 것이지만, 악한 자들은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므로, 그가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 하나님의 본체는 보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마 5:8).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이며(고전 13:12), 의인들에게 약속된 최고의 상이다. 이 상을 받는 것은 그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신 때일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그 자신의 본체도 보이게 되리라는 뜻으로 이해되기를 원하신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신 그 형체와 함께 피조물 전체가 하나님께 복종케 된 때를 의미한다. 이 피조물의 형체를 따라서 "아들 자신도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기 때문이다(고전 15:28).

      그 뿐 아니라, 심판자이신 성자가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 때에도 성부와 동등하신 그 본체로서 그들에게 나타나신다면,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 그가 하신 위대한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요 14:21)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자가 심판하시겠지만, 인간으로서의 권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권능으로 심판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심판하시겠지만,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동등한 그 본체로 나타나실 것이 아니라 인자이신 형체로 나타나실 것이다.

 

      29. 그러므로 이것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인자()가 심판하시리라, 또 인자가 심판하시지 않으리라, 인자가 심판하시리라고 해야만, "인자가 올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리라"는 말씀과(요 12:47)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는 말씀이(요 8:50) 참일 것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즉 심판에는 하나님의 본체가 나타나시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시지 않고 심판은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는 말씀은(요 5:22) 이런 뜻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도 우리가 이미 말한 표현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느니라"(요 5:26), 즉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다는 뜻을 가리킨다.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다: "이러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한다(빌 2:9). 이것은 인자에 관해 언급한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로 있어 성부와 동등하셨으나, 그로부터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행동하시며 수난당하시며 종의 형체로서 사도가 덧붙여 기록한 일을 받으셨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그러므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말씀은 위의 두 가지 표현 방법 중의 앞의 것을 따른 것인가 또는 뒤의 것을 따른 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나타난다. 만일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라면, 확실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시지 않을 것이다. 성부가 자신과 동등한 성자를 낳으셨다는 의미에서는, 성부는 성자와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라 인자의 형체가 심판에 나타나시리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신 분이 심판하시지 않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성자의 말씀에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에서 아무도 성부를 보지 못할 것이며, 모든 자가 성자를 볼 것이다. 그는 또한 인자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그를 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30.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한 증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억측을 하고 있는 것 같을는지 모르므로 우리는 확실하고 반대할 여지가 없는 말씀을 제시하겠다. 이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느니라"(요 5:22) 하신 바로 그 이유가 이 때문이라는 것을 보일 수 있다. 그 때의 심판자는 인자의 모양으로 나타나실 것이며, 그것은 성부의 본체가 아니라 성자의 형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자가 성부와 동등하신 그 본체가 아니가, 성부보다 작은 상태의 형체이다. 그래서 그는 심판 때에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보이실 것이다. 조금 뒤에 예수께서 언명하시는 말씀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신다(요 5:24). 이 영생은 악인들이 얻을 자격이 없는 그 대면(對面)이다.

      다음에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또 이것이 경건한 자들의 특징이다. 즉 그들은 예수의 성육신에 대해서 들으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 바꿔 말하면 그를 영접한다. 그들을 위해서 종의 형체를 입고 성부보다 작게 되신 분을 영접하며 그가 하나님의 본체로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바로 이 점을 역설하기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느니라"(요 5:26)고 하신다. 다음에 자기가 심판하러 오실 때에 나타내 보일 그 영광을 말씀하시며, 그것은 불경건한 자들과 의인들이 다 보게 될 것이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그에게 주셨느니라"(요 5:27).

      이 이상 더 분명한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시므로, 심판하실 권세를 받지 않으시고, 비밀리에 아버지와 함께 지니고 계신다. 그러나 그는 인자이시므로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모두 심판자이신 그를 볼 수 있도록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신다. 인자는 악인들도 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그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본체인 그를 볼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자기를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21). 또 그러므로 그 다음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에 주의하라. 무슨 까닭에 기이히 여기는 것을 금하시는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기이히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심판하는 권세를 그에게 주신 데 대해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실 것으로 기대했을 터인데, 그는 "인자됨을 인하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기이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를 볼 수 없으며, 의인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모두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그를 보아야 하므로 그는 말씀하셨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그뿐 아니라, 그는 인자시기 때문에 이런 권세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부활하는 자들이 모두 그를 보이는 형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정죄를 얻을 자들과 영생을 받을 자들이다. 그러나 영생은 악인들의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대면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면, 유일한 참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그를 알지 않고서 어떻게 알겠는가? 그 예수는 벌을 받을 자들에게 나타나실 분, 즉 인자의 형체를 입은 분이 아니실 것이다.

 

      31.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보는 하나님과 같이 보이는 그는 선하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기 때문이다(시 73:1). 그러나 악인들이 심판자를 볼 때에는 그 마음이 기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그들에게 선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를 인하여 모두 악인과 불신자의 무리로 인정되므로 애곡할 것이다(계 1:7). 그렇기 때문에, 그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해야만 영생을 얻겠느냐고, 충고를 청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대답하셨다(마 19:17).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주 자신이 사람도 선하다고 하신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그런데 그 사람은 영생을 찾고 있었으나, 영생은 벌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그 사람은 영생에 대해서 물으면서, 자기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인자로 생각할 뿐이었기 때문에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고 대답하셨다. 바꿔 말하면, 어찌하여 네가 보는 이 형체에 대해서 선한 일을 물으며, 네가 보는 형체를 따라서 나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느냐? 이것이 인자의 형체다. 이 형체는 받은 것이다. 이 형체는 심판 때에 의인들뿐 아니라 불의한 자들에게도 나타날 것이며, 이 형체를 보는 것은 악하게 사는 자들에게 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졌던 형체도 보일 것이다. 나는 그 형체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를 비워 이 형체를 입었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기쁘게 하기 위해서 외에는 나타나시지 않을 것이다. 즉 의인들이 빼앗기지 않을 기쁨이며, 그 장래의 기쁨을 갈망하는 자가 한 말이 있다: "내가 주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를 생전에 주의 집에 거하여 주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게 하실 것이다"(시 27:4). 그러므로 유일한 하나님 자신만이 선하시니, 그 이유는 아무도 애곡하기 위해서 그를 뵙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참 기쁨만을 위해서 뵙기 때문이다. 이 형태를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를 네가 깨닫는다면, 그 때에는 나는 선하다. 그러나 다른 형태만을 따른다면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는가? 만일 네가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볼"(슥 12:10) 무리 가운데 있다면, 그들이 보는 것은 그들에게 벌이 되겠으므로 화가 될 것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하신 뜻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언급한 증명들로 보아서 개연성이 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본질,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본질을 정관(靜觀)하는 것, 즉 하나님을 뵙는 것만이 우리의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성도들에게만 약속되었으며, 이 일을 사도 바울은 "얼굴과 얼굴을 대한다"고 부르며(고전 13:12),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고 하며(요일 3:2), 이에 대해서 "내가 주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주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으며(시 27:4), 주께서 친히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언명하시며(요 14:21), 우리는 오직 이 일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청결하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보겠음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마 5:8). 이 뵙는 일에 대해서 이밖에도 여러 가지 말씀이 있으며, 사랑의 눈으로 찾는 사람이면 성경 전체에 풍성하게 흩어져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의 최고선인 이 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일을 바르게 행하라는 계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족속이 인자 앞에 모여서 그에게 "주여 우리가 언제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마 25:37)라고 예언된 그 인자를 뵙는 일은 영원한 불에 들어갈 악인들에게 선한 일이 아니며, 의인들에게도 최고선이 아닐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에 인자가 아직 그들을 부르시지 않았다. 악인들에게 "나를 떠나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하실 것과 같이, 의인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25:34). 사람들이 영영한 불에 들어갈 것과 같이 이 사람들은 영생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영생이란 것은 "유일하실 참 하나님이신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그가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라고 하신(요 17:5) 그 영화 안에 계시는 그를 지금 아는 것이다. 때에 그는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고전 15:24), 착한 종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며(마 25:21, 23),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있는 비밀한 곳에 숨겨 고민하는 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실 것이다. 선언을 듣는 자들은 고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은 이 "흉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시 112:7).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즉 정통 교회의 참된 신앙 안에 감추사 구설(口舌)의 다툼, 즉 이단자들의 궤변을 면하게 하신 자다(시 31:20).

      만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다른 설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부의 본질이 성자의 본질보다, 즉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의 본질보다 더 선하다고 믿지 않으며, 건전한 교리에 반대되는 점이 없다면 우리는 그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단자들의 함정을 피할 길이 많을수록 그만큼 더 강력하게 그들을 논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출발점을 달리해서 남아 있는 문제들을 고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