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4권 1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3. 22. 20:26

삼위일체론 제 4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김 종 흡 옮김

 

      4

 

      개요: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이 파견되셨는가를 설명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며, 그가 사랑하신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를 확신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목적은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께 밀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가 단 한번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2중의 죽음이 제거되었다. 여기서 구원을 위해서 구주의 한 번이 우리의 두 번과 조화됨을 논하며, 6이라는 수가 완전함을 깊게 논한다. 하나와 둘의 비례는 6이라는 수에 귀착한다. 생명의 중보 한 분에 의해서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모두 하나로 집결되며, 그로 말미암아야만 영혼이 참으로 정결하게 된다. 또 하나님의 아들은 종의 형상을 입고 파견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는 성부보다 작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 의해서 파견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파견되신데 대해서도 같은 이유를 인정해야 한다.

 

      서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1. 사람들은 하늘과 땅에 속한 일들에 대한 지식을 보통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보다 자기에 대한 지식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확실히 더 옳다. 자체의 무력(無力)함을 모르고, 천체들의 운행을 연구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자체의 진정한 건강과 힘을 얻는 방법을 모르는 마음보다 자체의 무력함을 아는 마음이 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성령의 따스함으로 감동되어 하나님을 향해서 눈을 뜨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해서 자기의 무가치함을 느끼게 되었으며, 하나님께로 가려고 하면서도 아직 그렇게 할 힘이 부족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빛으로 자기를 반성하며, 자기의 추악과 하나님의 순결이 섞일 수 없음을 깨달으며,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해서 다시 자비를 간구하며, 드디어 모든 슬픔을 버리고 인간의 빛이신 유일한 구주를 통해서 값없이 구원을 받아, 확신이 있는 기도를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 이렇게 행하며 애통하는 사람은 지식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고전 8:1). 그가 중시하는 지식이 달라졌다. 그는 우주의 한계와 지구의 기초와 하늘의 높이를 아는 것보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 지식을 얻음으로써 슬픔도 얻었으며(1:18), 그 슬픔은 자기의 진정한 고국을 떠나며, 그 고국을 세우신 거룩한 하나님을 떠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저도 이런 사람들에 속하며 당신의 그리스도의 가족에 속하여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신음한다면, 저에게 당신의 떡을 주시옵소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고(5:6) 스스로 만족한 자들에게 주고자 하나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공상한 모든 것으로 만족하고 당신의 진리를 피하며 배척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공허(空虛)에 빠졌나이다. 저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공상하는지를 아나이다. 저의 마음도 인간의 마음이 아니오니까?

      그러나 내가 나의 마음의 하나님께 비옵는 것은, 내가 글을 쓸 때에 그런 공상을 진리라고 하면서 뱉어내지 않도록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던 자며(31:2), 하나님의 독생자의 신성(神性)이 그 인성(人性)으로 준비한 길을 따라 돌아가려고 애쓰는 앞길이 아직 멀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불어 넣으신 진리가 있으므로 나는 그것만을 글로 쓰도록 기도한다. 나는 변하는 자이지만, 그 진리에서 나의 분량대로 변하지 않는 것을 마신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과 같이 시간과 공간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마음으로 하는 생각과 같이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마음으로 하는 어떤 종류의 추론과 같이 공간과는 관계없이 시간적으로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독특한 본질에는 영원성과 진리와 의지의 면에서 변함이 없다. 거기서는 진리가 영원하며,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이며, 사랑이 참되며 영원성이 참되기 때문이며, 또 영원성이 사랑을 받으며 진리가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함으로써 완전하게 된다. 성육신하신 말씀이 우리의 암혹을 흩어버린다.

 

      2. 그러나 우리는 이 변함없는 기쁨에서 떠나 멀리 나그네 된 자이지만, 역시 아주 끊어지며 찢어진 것이 아니며, 이 변화무쌍한 것들 가운데서도 영원과 진리와 행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죽거나 속임을 당하거나 불행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를 경고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순례생활을 적합한 식견을 하늘로부터 보내 주셨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여기에 없으며, 우리는 이 순례를 버리고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경고하신다.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일들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믿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실망하고 감히 하나님께로 들려 올라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에게 공로가 있는 듯이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며 더욱 무력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의 힘에서 덕을 입으며, 겸손의 약함으로 사랑의 힘을 완전케 하도록 처리해 주셨다. 이 점은 시편에서 계시해 주시며, "하나님이여 자원하신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쇠약할 때에 힘을 회복하셨나이다"라고 했다(68:9, LXX). 자원하신 비는 곧 은혜며, 우리의 공로에 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의로 거저 주시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우리에게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약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완전케 하시며, 사도 바울에게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과 그가 사랑하시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를 알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실망하지 않도록 그 큰 사랑을, 우리가 교만하게 되지 않도록 우리의 무가치함을 확실히 알게 되어야 한다.

      이 심히 중대한 문제를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8-10). 다른 곳에서도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8:31-32). 그런데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우리에게 선언하는 일을 옛날 성도들에게 장차 있을 일이라고 알리는 것은, 그들도 같은 믿음으로 겸손하게 되며, 따라서 약하게 되며, 완전하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3. 만물을 지으시고 변할 수 없는 진리이신 말씀 -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한 분이시므로, 만물은 그의 안에 잠재적으로 또 변할 수 없이 동시에 있다. 지금 이 피조 세계 전체에 있는 것뿐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과 앞으로 있을 것들을 포함한다. 만물은 생명이며, 만물은 하나다. 아니, 한 존재이며 한 생명이다. 만물은 그로 인하여 지어졌으되, 그들 안에 지어진 것은 그의 안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생명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느니라"(1:1,2).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지 않았고, 그 자신 지은 바 되었다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지어진 것들을 보면, 그에게 지어지기 전에 그의 안에서 생명이 아니었다면, 생명이 아닌 물체도 그에게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어진 것은 이미 그의 안에서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특수한 생명이 아니었다. 영혼은 몸이 생명이지만, 이것도 변하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이 아니면 무엇에 의해서 지어졌는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그러므로 지어진 것이 이미 그의 안에서 생명이었느니라." 그리고 어떤 특수한 생명이 아니라,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느니라"(1:4). 즉 이성적인 마음의 빛이며, 사람과 동물을 구별해서 사람되게 하는 빛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체적인 빛, 육신의 빛이 아니라, 이것은 하늘로부터 번쩍이거나 지상의 불에서 일어나는 빛이며, 인간만의 빛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들의 빛도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이런 빛을 보지만,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것은 우리 각 사람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17:27-28).

 

      2. 우리는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깨닫기에 적합하게 된다.

 

      4.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여기서 "어두움"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의미한다. 악한 욕망과 불신앙으로 눈이 어두운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지은 말씀이 이 인간들을 돌보며 치유하기 위해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1:14). 우리가 빛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을 나눠받는다는 뜻이며, 사람들의 빛이신 생명을 나눠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불결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눠 받기에 전연 부적당했으므로 정화되어야 했다. 그리고 불의하고 교만한 자들을 정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의로운 한 분의 피와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낮추시는 것이었다. 우리의 본성과 같이 되셔도 우리와 같은 죄는 없으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화되어, 우리와 본성이 다른 하나님을 우리가 뵈올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이 하나님이 아니라 본성으로는 사람이며, 죄 때문에 의롭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이 되셔서 죄인인 사람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셨다. 죄인은 의로운 자와 상합(相合)하지 않으나, 사람과 사람은 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인성의 같음으로 우리와 결합되어 우리를 그의 신성에 동참하게 만드셨다. 죄인은 반드시 정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지만, 의인이 자비의 자유 선택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그 값으로 죄인의 죽음이 폐지되었다. 동시에 그의 한번 행동이(죽음과 부활) 우리의 두 번 당할 일에(죽음과 부활) 대응한 것이다. 하나와 둘을 연결하는 것을 상합, 적합, 일치, 협화, 그밖에 어떤 적당한 말로 표현하든 간에, 그것은 피조물들의 모든 상호 적응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내가 지금 생각한 것이지만, 이 상호 적응은 정확히 헬라어의 "하모니아"(harmonia)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와 둘의 협화의 힘을 논하지 않겠다. 이 협화는 특히 우리가 타고난 것이며, 우리에게 주신 분은 창조주 외에 누구겠는가? 무식한 사람도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에 반드시 이 협화음을 느낀다. 이 때문에 고음부와 저음부가 조화되며, 그 화음에서 떠나면 전문가들뿐 아니라 보통 사람의 귀에도 매우 거슬린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물론 긴 설명이 필요할 것이지만, 아는 사람은 잘 조율된 일현금(一絃琴)만 있으면 분명히 귀로 들을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몸이 한번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이중으로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과 조화되며, 그 결과는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한번 죽으심을 어떻게 우리의 두 번 죽는 데 주셨는가?

 

      5. 그런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번 하신 일이 어떻게 우리가 두 번 하는 일에 대응하며 이를테면 조화해서 구원을 이루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대로 지금 논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우리의 영혼과 몸이 죽었다는 것은 어느 그리스도인도 의심하지 않는다. 죄 때문에 영혼이 죽고 죄에 대한 벌 때문에 몸이 죽었다. 그리고 우리의 이 두 부분, 즉 영혼과 몸에 대해서 그 악화된 것을 개선하며 갱신하기 위해서 약과 부활이 필요했다.

      그런데 영혼이 죽음은 불경건이며 몸의 죽음은 부패이므로 이로 말미암아 영혼도 몸을 떠난다. 하나님이 떠나실 때에 영혼이 죽는 것과 같이, 영혼이 떠날 때에 몸이 죽는다. 죽은 영혼이 어리석으며 죽은 몸은 생명이 없다. 그러나 영혼은 회개로 다시 살아나며, 죽을 몸은 믿음으로 다시 새롭게 되기 시작한다. 즉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4:5) 믿음이다. 속사람이 더욱 더 새롭게 됨에 따라(고후 4:16), 이 갱신된 생명은 좋은 습관으로 매일 자란다.

      그러나 겉 사람이라고 할 몸은 이 세상에서 오래 살수록 나이나 병이나 여러 가지 고생 때문에 더욱 더 썩어서, 종내에는 죽음이라고 하는 마지막 고생에 도달한다. 그리고 몸이 부활하는 것은 종말까지 지연되며, 그 때에 우리의 의도 말할 수 없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그의 계신 그대로 그를 보겠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될 것이다(요일 3:2). 그러나 썩을 몸이 영혼을 내리누르며(지혜서 9:15), 지상의 인간생활이 온통 시험이므로(7:1, LXX),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143:2). 이것은 우리가 장차 천사들과 같이 의롭게 되며, 우리에게 영광이 나타날 그 때와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혼의 죽음과 몸의 죽음이 다르다는 것을 더 많은 말로 증명할 필요는 무엇인가? 주께서 복음서에서 죽은 자들로 저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8:22), 한 마디 말씀으로 쉽게 구별하셨다. 죽은 몸은 물론 장사 자낼 것이지만,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죽었으며, 이런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고 하는 것이다(5:14).

      사도는 과부에 대해서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하면서(딤전 5:6) 그런 죽음을 타기한다. 전에 불경건했다가 지금은 경건한 영혼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믿음으로 인한 의 때문에 지금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몸은 영혼이 떠나서 죽을 것이며, 그뿐 아니라 지금도 혈육이 심히 연약하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죽었다고 한다. 사도의 말씀에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했다(8:10). 그러나 이 산 것은 믿음에서 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너의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한다(8:11).

 

      6.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두 죽음을 고치기 위해서 자기의 한 죽음을 쓰시고, 우리의 두 부활을 위해서 자기의 한 부활을 신비와 예표로서 제출하셨다. 그는 죄인이나 불경건한 자가 아니었으므로 마치 그 영이 죽은 듯이 그에게 속사람이 새로워지거나, 회개하고 의로운 생활로 돌아오라고 호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죽을 육신을 쓰셨기 때문에, 그 육신으로만 죽고 또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겉 사람을 위해서 예표가 되셨기 때문이다.

      시편뿐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것은(22:1; 27:46) 우리의 속사람에 관해서 우리의 영혼이 죽음을 의미했다. 사도의 말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6:6) 하는 말씀도 이 십자가 상의 말씀과 일치한다. 속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회개할 때의 고통과 자기를 억제할 때의 건전한 고민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그 불경건의 죽음이 이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서 멸하게 된다. 그래서 죄의 몸은 이런 십자가로 멸하고,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서 죄에 바쳐서는 안된다(6:13).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더라도(고후 4:16), 새로워지기 전에는 물론 옛사람이다. 새로워지는 것은 내면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사도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며(4:22,24), “거짓을 버리고 각각 참된 것을 말하라고 설명한다(4:25). 그러나 내심으로 거짓말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디서 버리는 것인가? 주의 성산에 거하려 하는 자는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라고 한다(15:1,3). 그러나 주의 몸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적 부활이라는 신비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부활하신 후에 주께서는 여인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20:17). 이 말씀과 일치하는 사도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3:1-2).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지지 않는 것은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그리스도의 육신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겉 사람이 죽은 것을 예표 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0:28)고 가르치신 주의 말씀은 대부분이 이런 고난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노라고 한다(1:24). 또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겉 사람이 부활하는 데 대한 예표가 된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의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4:39). 제자 중 한 사람도 주의 상처를 만지고 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다(20:28). 그리고 주님의 몸이 전적으로 완전한 것이 분명했으며, 이 점은 그가 제자들에게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21:18) 가르치신 말씀을 뒷받침한다.

      주께서 처음에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는데, 그 후에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만지게 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기서는 속사람의 신비가 알려졌고, 여기서는 겉 사람의 예표가 시사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혹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남자들은 그를 만졌지만 여자들은 만질 수 없었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습고 진리에서 어긋난 사람일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어 부활하셨으며, 그의 부활은 우리의 몸이 장차 부활하리라는 예표가 되었기 때문에, 사도는 먼저는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에 붙은 자라고 한다(고전 15:23). 사도는 거기서 몸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데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다(3:21). 따라서 우리 구주의 한 죽음은 우리의 두 죽음에 대해서 구원의 원인이 되었고, 주의 한 부활은 우리에게 두 부활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몸은 죽음과 부활의 양쪽에서 우리에게 일종의 치료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사람의 신비와 겉 사람의 예표가 되기에 적합한 치료제였다.

 

      4. 하나와 둘의 비율은 여섯이라는 수가 완전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섯의 완전함을 자주 말한다. 일년에도 여섯이 많이 나온다.

 

      7. 하나와 둘의 비율은 셋이라는 수에서 자연히 나온 것이다. 하나와 둘을 합하면 셋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말한 이 수들을 합하면, 즉 하나와 둘과 셋을 합하면 여섯이 된다. 여섯은 그 분수들로 된 것이므로 완전하다고 한다. 6분의 1, 3분의 1, 2분의 1이라는 세 분수이며, 이밖에 다른 분수는 없다. 그런데 66분의 1은 하나이며, 3분의 1은 둘이며, 2분의 1은 셋이다. 그리고 하나와 둘과 셋을 합하면 여섯이 된다. 성경에서는 이 수를 자주 말하며, 특히 하나님께서 우주를 엿새 동안에 완성하셨고,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도 여섯째 날이었다(1:27). 하나님의 아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창조하시기 위해서 인류 역사의 여섯째 시대에 인자가 되어 오셨다.

      우리는 현재 이 여섯째 시대에 있다. 천년을 한 시대라고 계산하든지, 또는 기억할 만한 유명한 시대들이나 시대의 전환점을 생각하든지, 지금은 여섯째 시대가 된다. 처음 시대는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이며, 둘째 시대는 아브라함까지이며, 그 이후는 복음서 기자 마태가 구분하듯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와 다윗으로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한 때까지와 그때로부터 처녀 탄생까지이다(1:17). 이 세 시대를 두 시대와 합하면 다섯이 되므로, 주님은 여섯째 시대를 시작하셨고, 지금 이 여섯째 시대가 숨겨진 세상 종말을 향해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여섯이라는 수가 시간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율법 이전의 처음 시대와 율법 아래서의 둘째 시대와 은혜 아래서의 셋째 시대이다. 시간의 종말에 육신이 부활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부분이 갱신되며,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몸까지 합해서 우리의 모든 부분의 모든 연약함이 치유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갱신의 은혜를 받았다. 사탄에게 잡혀 병으로 꼬부라졌던 여인이 주님에게서 치유를 받아 몸을 펴게 된 것은(13:11-13) 교회에 대한 한 예표였다. 시인도 이런 숨은 원수들이 있음을 불만스럽게 말하며, “저의 내 걸음에 장애가 되게 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구부러졌나이다라고 한다(57:6, LXX). 그런데 이 여인의 병은 18년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여섯의 세 배다. 18년 동안은 달수로 여섯의 3제곱인 216이다. 누가복음의 같은 장에 심은 지 3년이 되어도 과실을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있다. 일년만 더 두어서 과실을 맺으면 좋고, 그렇지 못하면 찍어버린다는 조건으로 그대로 두었다(13:6-9). 여기에 있는 3년도 삼분법에 속하며, 3년간의 달수는 여섯의 평방과 같다.

 

      8. 일년을 완전한 열두달로 계산하고, 한 달은 고대인들이 달의 운행을 관찰해 30일로 정한 대로 계산하면, 여섯이라는 수가 많이 나온다. 하나부터 열까지를 처음 단계의 수들이라고 하면, 여섯은 이 처음 단계에 있으며 백가지의 열을 둘째 단계라고 하면 60은 거기 있다. 60일은 1년의 6분의 1이다. 둘째 단계의 여섯째 수를 처음 단계의 여섯째 수로 곱하면 360일을 얻으며, 이것은 완전한 12달이다. 그러나 달의 공전이 한 달을 알리듯이, 태양의 공전은 일년을 알리는데, 태양의 일년을 위해서는 5일과 4분의 1이 더 있어야 한다. 그래서 4년마다 윤달이라고 해서 하루를 더해서 시간의 질서가 혼란되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5일과 4분의 1 자체를 보면, 거기서는 여섯이라는 수가 현저하다. 부분을 전체로 보는 관습에 따르면, 4분의 1인 하루를 하루로 보기 때문에 닷새가 아니라 엿새가 된다. 다음에 닷새는 한 달의 6분의 1이며, 4분의 1인 하루는 여섯 시간이다. 하루는 주야로 24시간이므로 그 4분의 1은 여섯 시간이다. 이와 같이, 일년을 보면 여섯이라는 수가 매우 자주 나타난다.

 

      5. 여섯이라는 수는 그리스도의 몸과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서도 나타났다.

 

      9. 주님의 몸을 이룩하기 위해서 이 여섯이라는 수가 1년에 해당한다고 생각한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주께서는 자주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며, 유대인들이 헐어버리는 성전을 사흘 동안에 재건하겠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2:20). 그런데 466으로 곱하면 276이 된다. 이 수는 9개월과 6일에 해당한다. 임신부들의 경우에는 이 기간을 10개월로 보는데, 9개월과 엿새를 채우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몸은 완전하셔서 출생까지 그만한 날수가 걸렸다는 옛 전승에 따라 교회의 권위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잉태되신 날은 325일이었고, 수난 당하신 것도 같은 날이었다고 믿어진다. 그래서 그가 잉태되었던 처녀의 뱃속에는 아무도 잉태된 일이 없었던 것이었고, 주님보다 먼저나 뒤에 시체를 둔 일이 없었던(19:41-42) 그의 새 무덤에 해당한다. 그러나 전승에 따르면 그는 125일에나 태어나셨으므로, 그의 잉태로부터 출생까지는 276일이었으며, 이것은 46의 여섯 곱이다.

      성전 건축에 이만한 연수가 걸린 것은 주님의 몸이 완성되기 위해서 그 수 즉 466배라는 날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죽음으로 파괴된 그 몸은 사흘 만에 부활되었다. 성경에서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21) 분명하고 힘 있는 증언을 하시기 때문이다. 또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는 말씀이 있다(12:40).

 

      6. 부활까지의 사흘에서도 하나와 둘의 비율이 나타나 있다.

 

      10. 이 사흘이 완전한 3주야가 아니었다는 것은 성경이 증언한다. 첫 날은 그 날의 끝의 부분을 하루 전체로 보았고, 셋째 날은 그 날의 처음 부분을 하루로 본 것이며, 가운데 날 즉 이튿날은 주야로 12시간씩 완전한 24시간이었다. 주께서 군중의 외침으로 십자가형의 선고를 받으신 것이 한 주의 여섯째 날의 제3시였다. 실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제6시였고, 운명하신 시간은 제9시였다(27:23-50). 그러나 장사 지낸 것은 그 날이 저물었을 때였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으며(15:42), 이는 그 날의 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디서 시작하든 간에, 요한복음에(19:14) 반대하지 않고 제3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가정하더라도 첫날은 완전한 하루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첫날은 그 날의 끝 부분을, 셋째 날은 처음 부분을 온전한 하루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밤으로부터 새벽까지는, 즉 주님의 부활이 알려진 때까지는 셋째 날에 속한다. 하나님께서 어두운 데서 비치 비취리라”(고후 4:6) 하신 것은 우리가 신약의 은혜에 의해서, 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5:8)는 말씀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다. 또 이 말씀은 낮이 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린다. 맨 처음 날들은 인간이 장차 타락할 것을 예상해서 빛으로부터 어두움에 이르는(1:4-5) 계산법이었던 것과 같이, 지금은 인간의 회복을 위해서 어두움으로부터 빛에 이르는 계산을 한다. 따라서 주께서 운명하신 시간으로부터 부활까지를 제9시까지 포함시킨다면 40시간이 된다. 그리고 부활 후 주께서 지상에서 가진 40일 동안의 생활도 이 숫자와 조화된다.

      또 이 404중 세계에서의 완전성의 신비를 알리기 위해서 성경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수이다. 10에는 어떤 완전성이 있으며, 그것의 네 곱이 40이다. 그러나 장사 지낸 저녁부터 부활하신 새벽까지는 36시간이었고, 이 수는 6의 제곱이다. 여기에는 12의 비율이 있으며, 이 비율에서는 상호 적응의 가장 완전한 조화가 발견된다. 1224를 더해서 36이 되는 것은 12의 비율과 들어맞는다. 즉 완전한 한 밤과 한 낮과 한 밤이며, 이것은 내가 위에서 말한 신비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영을 낮에, 그리고 몸을 밤에 비유하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주의 몸은 죽음에서나 부활에서나 우리의 영의 상징이며, 우리 몸의 예표였다. 그래서 12의 비율은 1224를 더한 36시간에도 나타났다.

      이제는 이런 수들이 성경에 넣은 이유에 대해서 한마디 첨가하겠다. 다른 사람은 다른 이유를 발견할는지 모르며, 내가 말한 것이 더 나은 이유가 되거나 혹은 같은 정도의 개연성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이유가 더 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수들을 성경에 넣은 데에는 어떤 목적이나 어떤 신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어리석거나 우스운 사람은 되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말한 이유들은 혹은 교회의 승인을 얻어 교부들이 전해 주었으며, 혹은 내가 성경의 증언에서 수집했으며, 혹은 수와 비례의 특징에서 얻은 것이다. 이성(理性)에 반대하는 지각 있는 사람이나, 성경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에 반대하는 온화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7. 우리는 어떻게 한 중보로 말미암아 많은 자가 하나로 집결되는가?

 

      11. 천사들의 기적으로 조상들에게 신비스럽게 나타난 일과 조상들 자신이 한 모든 일들은 파견되어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모든 피조물이 각 그 분량대로 이 오실 분을 선포하게 하셨다. 즉 죽음에서 구출될 모든 사람이 그의 안에서 구원되리라는 것을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는 죄와 불경견으로 하나님을, 곧 유일 진정하신 최고의 하나님을 싫다 하여 이미 도망하여 타락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많은 일로 허망한 자가 되었으며, 많은 일에 정신이 팔렸으며, 많은 일에 밀착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많은 것들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장차 오실 분을 구하여, 이렇게 구한 그 한 분이 오시며, 많은 사람이 그가 오신 것을 증언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목적은 우리가 많은 압박에서 해방될 때에, 비록 영혼이 많은 죄로 인하여 죽었으며 죄 때문에 육신도 죽을 운명인 우리였지만, 우리는 죄 없는 한 분에게 가서 우리를 위해서 죄 없이 육신이 죽으신 그를 사랑하며, 그가 부활하신 것을 믿으며, 그와 함께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의로우신 한 분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도 부활할 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많은 지체인 우리는 한 머리이신 그가 우리보다 앞서 가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의 안에서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정화되었고, 그 때에는 얼굴을 대하여 새롭게 되며, 우리의 중보이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분에게 밀착하여, 그를 즐기며 모두 하나가 되어 지내기 위해서이다.

 

       8.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어떻게 그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12.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의 말씀이시오, 신인간의 중보이시요(딤전 2:5), 인자이신 그는 신성의 단일성(unity)으로 인하여 성부와 동등하시며, 인성을 쓰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동참자이시며, 사람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시며(8:34), 그러나 성부와 더불어 하나이신 하나님이심을 숨기지 않으셨는데, 그 하신 말씀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17:20-22).

 

      9. 같은 논지의 계속.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저희는 하나이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머리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므로(1:22-23), 나와 저희는 하나라고 하실 뿐 아니라, 한 인격이라고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머리와 몸이 한 그리스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신성이 성부와 동일한 본질임을 밝히시며, 그래서 다른 곳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고 하셨으므로(10:30), 그가 원하시는 것은 그의 백성들이 서로 같은 본성을 가진 대로 그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상충하는 성향과 욕망, 그리고 불결한 죄악 때문에 서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중보인 그를 통해서 깨끗하게 된다. 그 때에 죽을 인간들도 천사와 동등하게 되는 그 본성을 유지할 뿐 아니라, 같은 의지로 협력하는 것이다. 즉 불같은 사랑으로 융화되어 같은 행복을 위하여 조화 있는 협력을 하여 한 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뜻이다. 바꿔 말하면, 성부와 성자께서 본질 뿐 아니라 의지에서도 하나이신 것과 같이, 그들도 자기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가 계시므로, 서로 본성이 같을 뿐 아니라 동일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그가 중보이시며, 그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이 진리를 계시하신다.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다(17:23).

 

      10. 그리스도가 생명의 중보이신 것 같이, 마귀는 죽음의 중보이다.

 

      13. 죽음의 마귀 때문에 우리가 더러워지며 멀어져서 하나님을 떠난 것과 같이, 생명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화되며 화해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참 평화와 굳은 결합이 된다. 교만한 마귀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죽게 하였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복종을 가르쳐 살게 하셨다. 스스로 높임으로써 전락한 마귀는 그에게 찬동한 인간도 넘어지게 했고,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어 높아지며, 그를 믿는 사람도 들어 올리신다. 마귀는 불경건하여 그 영이 죽었으나, 육신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을 겪지 않았다. 이렇게 죽음의 선도자이면서 죽음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마귀 군대의 위대한 수령으로 보이고, 그 군대로서 기만적인 권세를 행사한다. 그래서 정의보다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은 자만심이나 거짓된 철학으로 더욱 더 부풀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신성 모독적인 의식을 이용해서 호기심과 자만심이 특히 강한 종류의 인간들의 마음을 거짓말과 망상으로 속여 넘기며 마술 같은 간계로 사로잡아 둔다. 마귀는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4), 헬라어로 텔레타이(teletai)라는 입문(入門) 의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정화하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한다. 그밖에 여러 가지 흉계로 거짓 기적과 기사를 행한다.

 

      11. 귀신들이 행하는 기적은 멸시하라.

 

      14. 귀신들은 가장 비루한 영들이면서도 그 공중의 몸으로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쉽게 하기 때문에, 지상의 무거운 몸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이 착하면서도 경이감을 가지게 된다. 지상의 몸도 잘 훈련해서 재주를 익히면 극장에서 놀라운 구경거리가 되며, 보지 않고 말만 들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마귀와 그 악한 천사들이 그들의 공중의 몸을 이용해서 육신을 쓴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무슨 까닭에 이상하겠는가? 그들은 심지어 비밀한 암시로 황당한 형상들이 보이게 해서, 깨어 있거나 자는 사람들을 속이며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생활과 행실이 고상한 사람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동작으로 줄타기나 그 밖의 곡예를 하는 것을 볼 때에, 자기도 그런 짓을 하고 싶다거나 그 사람들이 자기보다 우수하다고 믿지 않는 것과 같이, 경건한 신자가 귀신들의 기적을 볼 뿐 아니라 육신이 연약해서 전율을 느끼기까지 하더라도, 자기에게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없는 것을 한탄하거나 귀신들이 그 때문에 자기보다 우수하다고 판다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이런 경건한 신자는 거룩한 백성 사이에 끼인 사람이다. 그들은 사람이나 선한 천사를 물론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 귀신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이적들을 행하여 거기에는 속임수가 전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