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5권 1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4. 24. 17:46

삼위일체론 제 5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김 종 흡 옮김

 

 

      5

 

      개요: 성경을 근거로 삼지 않고 자기들의 이성을 근거로 삼아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을 반박한다.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말은 모두 그의 본질에 대한 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낳는다와 난다, 또는 난다와 나지 않는다는 서로 다르며 서로 다른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말은 모두가 본질에 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선하시고 위대하시다고 할 때나, 그 밖에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즉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있다. 예컨대 하나님을 성자에 관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피조물에 관해서 주()라고 부른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즉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존재와 관련해서 말하는 것은 심지어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일인 때가 있다. 예컨대 "주여, 당신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나이다"라고 한다. 이런 때에 하나님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며, 그 본성 또는 본질은 여전해서 절대로 변함이 없다.

 

      1. 하나님께와 독자에게 저자가 바라는 것, 하나님께는 물질적이거나 변하는 것이 전혀 없다.

 

      1. 이제부터 내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는 사람이 그에 대해서 생각하는 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적어도 나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노력 자체도 삼위일체 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매우 먼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하나님이 계신 그대로 깨달을 수 없다. 사도 바울 같이 위대한 분도 하나님을 보되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고 했다(고전 13:12). 그러므로 주 우리 하나님께 나는 원하고자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항상 찬양해야 하되,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선포하는 것이 충분할 수 없다. 그 하나님께 나는 나의 주제를 이해하며 설명하는 것을 도와주시며, 내가 곁길로 갈 때마다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의도 뿐 아니라, 나의 무력함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또 독자들에게 용서를 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이 나보다 문제를 더 잘 파악할 때든지, 내가 하는 말이 모호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에, 나를 용서하시라. 내 편에서도 그들이 민첩하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에 그들을 용서할 것이다.

 

      2. 우리가 우리의 주제의 성격을 안다면, 적어도 믿고 굳은 신념으로 주장한다면, 이와 같이 서로 관용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즉 보이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자족한 생명을 가진 존재를, 보이며 변하며 죽으며 의존적인 것들을 표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거나 믿어야 한다. 우리의 신체 감각의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들이나 우리의 내면적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도 알려 노력하면, 우리는 힘이 부족한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우리 위에 있는 거룩하고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을 진지한 경건으로 동경하는 것은 몰염치한 짓이 아니다. 이런 경건에는 자신의 힘을 믿고 의지하는 교만심이 없으며, 창조주와 구주이신 분 자신의 은총이 일으킨 열성이 있다.

 

      자신의 지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떤 지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며 또 이해할 수 있는가? 만일 이 점을 깨달았다면, 그는 자기의 본성에 그 자신의 지성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생각하며, 그 안에서 어떤 형태의 윤곽이나 아름다운 빛깔이나 공간적인 부피나 부분들 사이의 거리나 넓이나 공간에서의 움직임이나 그밖에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 우리의 본성에는 우리의 지성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우리의 마음에는 물론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지성으로 우리의 능력에 따라 지혜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에 없는 것을, 우리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보다 훨씬 나은 존재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속성이 없는 선(), 분량이 없는 위대성, 부족한 것이 없는 창조주, 위치가 없는 지배자, 만물을 "가짐" 없이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 공간의 제한 없이 도처에 전적으로 계신 분, 시간 없이 영원하신 분, 자신은 변함 없이 변하는 것들을 만드시는 분, 그리고 수동적인 것이 없는 존재이시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일들을 아직 전부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그는 그 경건한 심적 태도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성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한다.

 

      2. 하나님은 변함 없는 유일한 존재.

 

      3. 그러나 하나님은 물론 한 존재이시다. 라틴어로 숩스탄티아(substan-tia), 더 나은 명칭은 에센티아(essentia)이며, 헬라어로는 우시아(ousia)이다. 슬기롭다에서 지혜, 안다에서 지식이라는 이름이 온 것 같이, 있다에서 존재라는 이름이 온다. 자기의 종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시며,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고 하신 분보다(3:14) 더 확실히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러나 존재나 실재라고 하는 다른 것들은 우연한 점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런 우연한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유일한 실재이시며, 존재라는 이름이 가장 특별히 또 가장 참으로 돌아가야 할 분이시다. 변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실지로 변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이전에 있던 상태가 없어질 수 있다. 따라서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변할 수 없는 것만이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무조건 존재라고 부를 수 있다.

 

      3. 아리우스파가 "났다""나지 않았다"는 말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단설을 반박한다.

 

      4.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의 믿음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겠다. 어떤 사물은 우리가 생각으로 이해하는 대로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그 실상대로 이해할 수도 없다. 이런 사물에 관해서 우리는 믿음의 원수들에게 대답하겠다. 아리우스파가 정통 신앙에 반대하는 점이 많지만, 그들이 특히 중요시하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매우 간교한 것이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우연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본질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나지 않는다"는 성부의 본질에 대한 말이며, "난다"는 성자의 본질에 대한 말이다. 그런데 나지 않는다와 난다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본질의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말이 그의 본질에 대한 것이라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도(10:30) 하나님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시다. 만일 이 말씀이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본질이 아닌 말을 하신 것이며, 따라서 나지 않는다와 난다를 본질에 관한 말이라고 반드시 해석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성자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고"고 한다(2:6). 묻노니, 어떤 점에서 동등이라는 것인가? 만일 본질에 관해서 동등하시다는 것이 아니라면, 아리우스파도 하나님에 대한 말이 모두 그의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지 않는다와 난다도 본질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인정해야 한다. 만일 이점을 양보하지 않겠다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모두 그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는 입장을 지키겠다면, 본질 문제에서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신 것이다.

 

      4. 우연한 것은 항상 어떤 변화를 의미한다.

 

      5. 우연한 것은 그것이 속해 있는 존재가 변할 때에 흔히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우연성은 분리될 수 없다고 하며 헬라어로 아코리스타(acho-rista)라고 한다. 예컨대 갈가마귀의 깃의 검은 빛깔이 그렇다고 하는데, 깃이 깃으로 있는 동안은 분리되지 않지만, 깃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깃이 그 검은 빛깔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그 물건은 변한다. 그 동물이나 깃이 없어지거나 그 몸 전체가 흙으로 변할 때에는 그 빛깔도 잃어버린다.

 

      검은 색은 사람의 머리의 분리할 수 없는 우연적 속성이라고 하지만, 분리에 의하지 않고 변화에 의해서 없어질 수 있다. 머리는 머리로서 계속되면서 희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머리가 희어지는 것은 검은 색이 떨어져서 어디론가 가고 흰 색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아님이 아주 분명하다. 빛깔의 속성이 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하거나 없어지는 것이 없으며, 따라서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없어지지 않더라도 증감(增減)이 있을 수 있는 것을 우연성이라고 한다면, 예컨대 영혼의 생명의 경우에 영혼은 항상 있는 것이므로 그것이 살아 있는 동안은 항상 살아 있지만, 지혜로운 때에는 더 많이 살아있고, 어리석은 때에는 더 적게 살아있는 것이므로, 여기서도 어떤 변화가 생긴다. 생명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에게서 지혜가 없어짐으로써 생명이 적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 적어지는 일도 하나님에게는 없다.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5. 하나님에 대한 말은 우연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본질과 관계에 대한 것이다.

 

      6.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연성에 관한 말이 전연 없다. 하나님께는 우연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말은 그 모두가 그의 본질에 관한 것은 아니다. 변하는 피조물에 대한 말은 그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닐 때에는 반드시 그 우연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에게는 예컨대 크기나 속성들과 같이 모든 것이 우연적이다. 즉 없어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한다. 또한 다른 것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우정, 친척 관계, 봉사, 유사성, 동등성 또는 이와 비슷한 것, 예컨대 위치, 형태, 장소, 시간, 행동, 수동적인 것 등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에는 그 우연성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에 대한 말이 그 모두가 그의 본질에 관한 것도 아니다. 관계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자에 대한 성부의 관계나 성부에 대한 성자의 관계 같은 것이다. 이 관계에는 우연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편은 항상 성부이시며, 또 한 편은 항상 성자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자가 나신 때로부터 성자가 아니게 되는 때가 없기 때문에, 성자를 낳으시는 성부도 성부가 아니게 되는 때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성자가 항상 났으며, 나시기 시작한 때가 없었다는 뜻이다. 만일 성자가 어느 때에 성자가 되기 시작했다거나, 어느 때에 성자가 아니게 된다면, 그 아들로서의 지위는 참으로 우연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만일 성부는 그 자신에 관해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자에 관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며, 성자는 그 자신에 관해서 아들이라고 부르고 성부에 관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면, 성부와 성자는 그 본질에 관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오직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성부라고 부르며, 따라서 아들도 오직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성자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이 명칭들은 본질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어느 이름도 그 자신에 관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상호 관계에 대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들은 우연성에 관한 것도 아니다. 성부라고 부르는 분이나 성자라고 부르는 분은 그 자신들이 영원하며 변하심이 없다. 따라서 성부이신 것과 성자이신 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성부와 성자라는 이름은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고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변하지 않으므로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6. "났다""나지 않았다"는 말들에 관한 이단들의 트집에 대답한다.

 

      7. 그러나 그들은 이 설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노라고 생각한다. 성부를 성자와의 관계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자를 성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지 않은 분과 난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 자신에 관한 것이고, 서로의 관계에서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나지 않은 분이라고 부르는 것과 성부라고 부르는 것은 같지 않다. 성자를 낳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나지 않은 분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나지 않은 사람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난 사람들은 자신이 또 다른 사람을 낳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말 한다: 성부는 성자와의 관계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자는 성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라고 부르지만, 나지 않음은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남도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하는 말은 본질(또는 본체)에 대해서 하는 말이므로, 나지 않음과 남이 서로 다르다면, 그렇다면 본질이 다른 것이다 라고 말한다.

 

      만일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라면, 그들은 "나지 않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자기들의 말에 대해 더 자세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지 않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닌 것이 아니며, 아버지라고 해서 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지 않았다"는 말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났다"라는 개념은 다른 것과의 관계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참으로 놀라운 소경이라고 할 수 있다. 났기 때문에 아들이며, 아들이기 때문에 확실히 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의미하듯이, "났다"는 말은 "낳는 이"에 대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낳는 이"라는 말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개념은 "나지 않은 이"라는 개념과 전연 다그다. 이 두 개념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전자 즉 "낳는 이"라는 개념만이 "난 이" 즉 성자와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들은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나지 않은 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 자신이 어떠하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부에 대해서 그 자신에 관한 말을 하고, 그러나 그것이 성자 자신에 관해서는 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에 대해서 그 자신에 관해서 하는 말은 모두 그의 본질에 관해서 하는 말이며, 하나님은 그 자신에 관해서 "나지 않았다"고 하며, 성자는 그 자신에 관해서 "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본질에 관해서 "나지 않은 이"라고 부르며, 성자는 그렇게 부를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본질이 같지 않으시다 라고 한다.

 

      이 궤변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대답은, 어떤 점에서 성자가 성부와 동등한가를 말하라고 그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성자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인가, 또는 성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하는 말인가? 성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성부와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친구들이나 이웃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과 다르다. 어떤 친구와 관련해서 친구라고 부르며, 그들이 서로 동등하게 사랑하면 그들의 친구 관계는 동등하다. 이웃도 어떤 이웃에 관련해서 이웃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서로(, 갑이 을에 대한 것과 을이 갑에 대한 것) 동등하게 이웃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동등하게 이웃인 것이다. 그러나 성자를 성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신만으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성부와의 관계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면 성자는 확실히 성부와의 관계에서 동등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자기에 관해서 하는 말에 따라서 동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 관해서 하는 말은 본질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본질에 대해서 동등하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 같다. 그러나 성부를 "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관계를 표시하는 말을 부정하더라도, 그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 표시어는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7. 부정사를 붙인다고 해서 범주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8. 예를 들어 이 점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우선 유의할 것은, "났다"는 말은 아들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났기 때문에 아들이며, 아들이기 때문에 확실히 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나지 않은 이"라고 할 때에는, 그는 아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리틴어에서 "났다""나지 않았다"라는 말들은 현재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들(filius)은 통용되지만, "infilius"(아들이 아님)는 언어 습관상 통용될 수 없다. 그러나 "non filius"라고 하면 뜻에 차이가 없다. "Ingenitus" 대신에 "non filius"라고 해서 뜻이 똑같은 것과 같다. 이웃과 친구라는 말은 관계를 알리는 말인데, "inimicus"(원수)라고 할 수 있어도 "invicinus"(이웃이 아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 우리 언어의 용례가 허락하는 여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 사태 자체의 분명한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라틴어로 "ingenitus"(나지 않았음)라고 할 수 있어도 그 말을 쓰지 말고, 이제부터는 같은 뜻인 "non genitus"(나지 않았음)를 쓰기로 하자. 우리가 "나지 않았다"고 할 때에,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과 뜻이 다른가? 그뿐 아니라, 관계를 표시하는 어떤 말 앞에 부정사를 붙인다고 해서, 그 말이 관계를 표시하지 않고 본질을 표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에 긍정하던 서술을 이제는 부정할 뿐이다.

 

      예컨대, "그는 사람이다"라고 할 때에, 우리는 실체를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다른 종류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같은 종류의 존재에 대해서 어떤 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다"라고 할 때에 내가 어떤 실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과 같이 "그는 사람이 아니라"라고 할 때에도 어떤 실체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얼마나 크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4척이다"라고 하면, 나는 분량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는 4척이 아니다"라고 하면 분량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희다"라고 말한다면, 그의 속성(屬性)에 대해서 주장하지만, "그는 희지 않다"라고 하면, 속성에 대한 부정이다.

 

      "그는 가깝다"고 하면, 관계에 대해서 하는 말이고, "그는 가깝지 않다"고 하면, 관계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누워 있다"고 하면, 그는 자세를 말하며, "그는 누워 있지 않다"는 것은 자세에 관한 부정이다. "그는 무장(武裝)하고 있다"고 하면, 그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그는 무장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의 상태에 관해서 부정하는 것이다. 무장하지 않았다거나 비무장이라고 하거나 뜻은 같다. "그는 어제 난 사람이다"는 시간에 관한 말이고, "그는 어제 난 사람이 아니다"는 시간에 관해서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로마에 있다"고 하면, 장소(또는 공간)에 대한 말이고, "그는 로마에 있지 않다"고 하면 공간에 관해서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때린다"라고 하면, 능동(能動)이라는 범주를 언급하는 것이며, "그는 때리지 않는다"고 하면, 능동이라는 범주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맞는다"고 하면, 그가 수동(受動)적 상태임을 의미하며, "그는 맞지 않는다"라고 하면 수동이라는 범주 내에서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범주에서든지, 긍정적인 발언을 할 수 있으면, 반드시 부정사를 넣음으로써 부정적인 발언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라는 말을 써서 실체에 관한 긍정적 주장을 한다면,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실체에 관한 부정적 발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다"고 한다면, 이것은 아버지에 관련된 말이므로 나는 관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는 아들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므로, 같은 부정이 아버지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난 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히 서로 같은 뜻이므로 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아들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도 정확히 서로 같은 뜻이므로 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아들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도 정확히 서로 같은 뜻이다. 그는 아들이 아니다 라고 할 때에 우리는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그는 나지 않았다고 할 때에도 관계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나지 않았다고 할 때에 우리는 관계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났다 라는 말은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이에게서 났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이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두 가지 발언이 다 관계라는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관계에 대해서 주장한 것은 실체를 의미하지 않으며, 따라서 났다와 나지 않았다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실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관련되며, 아들이 아님은 아버지가 아님과 관련되므로, 여기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론은, "났다""낳는 이"와 관련되며 "나지 않았다""낳는 이가 아님"과 관련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