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6권 2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4. 24. 18:33

      6. 하나님은 어떻게 단순하고도 다양한 본질적 존재이신가?

 

      8. 그러나 그 본질적 존재가 어떻게 단순하고 또 다양하냐고 묻는다면, 우선 피조물이 무슨 까닭에 다양하고 결코 참으로 단순하지는 않은가를 생각해 보라. 우선, 물체는 확실히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어떤 부분은 크고 어떤 부분은 작으며, 전체는 아무리 큰 부분보다도 크다. 하늘과 땅은 우주 전체의 부분들이며,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무수한 부분이 있다. 우주의 3분의 1은 나머지보다 작고, 2분의 1은 전체보다 작으며, 우주 전체는 보통 그 두 부분인 하늘과 땅이라고 부르는데, 그 우주 전체는 하늘보다도 크고 땅보다도 크다.

      그리고 물체를 하나씩 볼 때에 그 부피와 빛깔과 형태는 서로 다른 속성이다. 부피가 줄어도 빛깔과 형태는 그대로 있을 수 있다. 형태와 부피는 같은 대로 있어도 빛이 변할 수 있다. 또 형태가 달라져도 부피와 빛깔은 그대로 있을 수 있다. 물체에 대해서 그밖에 어떤 점을 생각하더라도, 모든 점이 한꺼번에 변할 수도 있고, 부분만 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물체의 본성이 다양하고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증명된다.

      몸과 비교할 때에 영혼, 즉 영적 피조물은 더 단순한 편이지만, 몸과 비교하지 않고 본다면 그것도 다양하고 단순하지 않다. 영혼이 신체보다 더 단순한 것은, 공간의 연장으로 그 부피 안에 확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각 신체 내에서 전체에서 전체로 있으며, 각 부분에서도 전체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체의 아주 조그마한 부분에서 어떤 일이 있어서 영혼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때에는, 몸 전체에서 있는 일이 아니지만, 영혼은 그 전체가 그 일을 느낀다. 영혼 전체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지라도 영혼에서도 기술이 능한 것과 나태한 것과 총명한 것과 기억력이 강한 것은 서로 문제가 다르다. 탐욕과 공포심과 기쁨과 슬픔도 서로 다르다. 영혼의 본성에서는 무수한 모양으로 발견되며, 어떤 것은 단독으로, 어떤 것은 많이 또 어떤 것은 적게 발견되므로, 영혼의 본성이 단순하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단순한 것은 변하지 않지만, 피조물은 모두 변한다.

 

      7. 하나님은 삼위일체시지만, 삼중(三重)이 아니시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참으로 다양하게 위대하시다, 선하시다, 지혜로 우시다, 행복하시다, 진실하시다, 그밖에 하나님에게 부적당하지 않은 점들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성은 그의 지혜와 동일하다. 그는 부피가 크신 것이 아니라, 권능이 크신 것이다. 또 그의 양선은 그의 지혜와 위대성과 동일하며, 그의 진실성은 모든 점들과 동일하다. 그에게서는 행복하신 것과 위대하시거나 지혜로우시거나 진실하시거나 선하시거나 한마디로, 그 자신이신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

 

      9. 또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므로, 삼중(三重)이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는, 성부만으로는, 또는 성자만으로는 성부 성자를 함께 한 때보다 작으실 것이다. 물론 성부만이라든지 또는 성자만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는지 알기 어렵다. 성부가 성자와 또 성자가 성부와 항상 불가분적으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두 분이 다 성부이시라든지, 두 분이 다 성자이신 것이 아니라, 두 분은 상호 관계에서 항상 하나이시며, 어느 분도 단독이신 때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위일체까지도 홀로 하나이시라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거룩한 영들 및 영혼들과 함께 계시지만, 그것들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만을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성부를 홀로 성부라고 부른다. 그가 성자와 분리되어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두 분이 함께 성부이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본성에는 아무 것도 덧붙일 수 없다.

 

      그러므로 성부만으로, 또는 성자만으로, 또는 성령만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합친 것과 동등하게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결코 삼중이라고 부를 수 없다. 물체들을 합치면 커진다. 남편이 아내와 밀착하면 한 몸이 되지만, 그 몸은 남편만의 또는 아내만의 몸보다 크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의 경우에는,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밀착할 때와 같이, 작은 것이 큰 것에 붙을 때에 전보다 커지는 것은 작은 것이고 큰 것이 아니다. 부피에 대해서 크다고 하지 않는 것들이 더 크다는 것은 더 훌륭하다는 뜻이다. 피조물의 영이 창조주에게 밀착할 때에는 그러지 않을 때보다 나아진다. 즉 더 크게 된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지만(고전 6:17), 주와 합한 자가 커지고(즉 나아지고) 주께서 나이지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경우에 동등하신 성자나, 성부 성자와 동등하신 성령이 동등하신 성부와 합할 때에, 이 분들을 각각 따로 생각한 때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게 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더 완전하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부나 성자나 성령이나 모두 완전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고 세 겹이 아니시다.

 

      9. 한 위격을 유일신이라고 부르는가 또는 삼위를 합해서 그렇게 부르는가?

 

      10. 하나님 안에는 하나님 이외에 성부가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성부만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의견이 있다. 즉 유일 진정한 하나님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생각이다.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하려는 뜻은 성부는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그만이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증언을 이해할 것인가? 주께서 "영생은 곧 유일한 참 하나님이신 당신을 아는 것이니이다"라고(17:3) 하셨을 때에, 그는 성부를 향해서 말씀하셨고, 말씀의 상대를 이미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또 이 점을 아리우스파가 지적하면서, 성자는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을 문제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즉 성부를 향해서 "유일한 참 하나님이신 당신을 아는 것"이라고 할 때에,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뜻을 말씀하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생각하지 않고, 어떤 다른 하나님을 생각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증언을 근거로 성부를 유일 진정하신 하나님, 성자를 유일 진정하신 하나님, 성령을 유일 진정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을 합해서, 즉 삼위일체 전체를 세 참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인가? 혹은 주께서 "당신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첨가하셨다고 해서, 우리는 "유일한 참 하나님"을 보충해서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유일한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할 것인가?

      그러면 무슨 까닭에 성령을 빠뜨리셨는가? 한 분과 한 분이 밀착해서 위대한 조회를 이루어, 이 조화로 말미암아 두 존재가 하나가 되었을 때에는, 이 조화를 말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짐작해야 되기 때문인가? 사도가 성령을 빠뜨리는 것 같은 곳에서도 성령은 무언중에 언급되신 것이다. 사도는 "만물이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하며(고전 3:21,22),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한다(고전 11:3).

      그러나 또 만일 세 분이 합한 때에만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이실 수 있는가? , 삼위일체가 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그 삼위일체를 그리스도의 머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 성자와 함께 계신 성부가 홀로 계시는 성자의 머리시라는 뜻인가? 성자와 함께 계신 성부는 하나님이시며, 홀로 계시는 성자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특히 말하는 것은 이미 성육신한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성자가 또 이렇게 미천하게 되셨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보다 크신 것이다. 성자 자신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라"고 하셨다(14:28). 그래서 성자는 성부와 함께 계실 때에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의 존재는 사람이신, 즉 유일한 중보로서(딤전 2:5) 사람이신 그의 머리이시다.

      사람은 그 마음과 합해서 사람이지만, 마음을 사람의 주요 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옳으며, 이것은 마음을 인간 존재의 머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말씀과 아버지와 합해서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더 적합한가?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말씀과 함께 언급될 때가 아니면,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무언중에 언급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점은 앞으로 더 자세히 고려하겠다. 지금은 삼위일체의 동등성과 그 본질이 서로 하나임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설명했다. 그래서 다른 문제와 우리가 뒤로 돌린 더 엄격한 토의가 어떻게 결정되는 간에, 성부 성자 성령의 절대적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전연 없을 것이다.

 

      10. 힐라리우스는 각 위격에 속성을 배정했다. 삼위일체는 피조물에 나타나신다.

 

      11. 삼위일체 내의 각 위격의 특수한 속성을 간단히 알리기 위해서 어떤 저자가 "성부 안에 영원성, 형상 안에 형태, 은사 안에 효용(效用)"이라고 했다. 그는 성경을 다루며 믿음을 주장하는 데에 적지 않은 권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저서인 "삼위일체론" 2권에 그렇게 쓴 것은 힐라리우스였다. 나는 이 용어들, 즉 성부, 형상, 은사, 영원성, 형태, 효용의 숨은 뜻을 힘자라는 데까지 탐구했다. 영원성이라는 말로 의미하려고 한 것은, 성부에게는 근원이 되는 아버지가 없으나 성자는 성부가 근원이 되어 존재하며, 성부와 같이 영원하시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형상이 그 나타내는 본체의 분량을 완전히 채운다면, 그 형상은 그 본체와 동등하게 되며, 본체가 그것의 형상과 동등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형상에 관해서 그는 형태를 말했는데, 이것은 아름다움이라는 속성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아름다움에는 위대한 적합성과 근본적 동등성과 근본적 유사성이 있으며, 전연 다르지 않으며, 동등하지 않은 점이 전혀 없으며, 유사하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으며, 형사의 본체인 분과 정확하게 대응한다. 거기에는 근본적 절대적 생명이 있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다르지 않고, 존재하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동일하다. 또 근본적이며 절대적인 지성이 있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것과 아는 것이 다르지 않고, 아는 것이 곧 사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것이 합쳐서 하나이다. 그 형상은 아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말씀이며(1:1), 전능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이를테면 기술(skill, 또는 솜씨)이어서, 모든 살아 있고 변함없는 지식들이 가득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어서, 그 자체가 하나에서 온 하나이며 그 한 분과 하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지으신 모든 것을 말씀 안에서 아시며, 그러므로 시간들은 지나가고 뒤를 잇지만, 하나님의 지식에는 지나가는 것이나 뒤를 잇는 것이 없다. 피조물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그것들이 지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그것들을 변함없이 아시기 때문에, 그것들은 비록 변하지만 하나님이 지으셨다. 그러므로 성부와 그의 형상이 형언할 수 없이 결합된 분은 성취와 사랑과 기쁨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그 사랑과 기쁨과 행복과 축복을, 참으로 인간이 형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는 간단히 효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내의 성령은 나신 분이 아니라, 낳으신 분과 나신 분의 아름다운 향기이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그들의 능력대로 풍성하고 충만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그 고유한 자리에서 고유한 질서를 지키며 안식을 누리게 한다.

 

      12.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술로 지어진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들 사이에 어떤 통일과 형태와 질서를 타나낸다. 물체들의 여러 가지 본성과 영혼들의 여러 가지 성향이 통일체를 이루는 것 같이, 피조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한 통일체를 이루는 동시에, 물체들의 여러 가지 모양과 속성, 그리고 영혼들의 여러 가지 지식이나 기술이 어떤 형태를 가진 것과 같이 피조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물체의 무게나 배치와 영혼의 사랑이나 기쁨과 같이 일정한 질서를 추구하며 유지한다.

      그러므로 그 만드신 만물에 의해서 이해되는 창조주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피조물들에 그 모양이 알맞게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를 인정해야 한다. 그 삼위일체에 만물의 최고의 근원이 있으며,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가장 복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분이 상호간에는 결정되어 있는 동시에 그 자체로서는 무한하시다. 그러나 이 물체들의 경우에는 하나는 셋을 합한 것만큼 되지 못하며, 둘을 합하면 하나보다 많다. 그러나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한 분이 세분을 합한 것 만하며, 두 분을 합해도 한 분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 분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한 분 한 분이 다른 한 분 한 분 안에 계시며, 모든 분 안에 계시며, 모든 분이 모든 분 안에 계시며, 모든 분이 한 분 안에 계시다. 이 점을 깨닫는 사람은 부분적으로 보든지,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보든 간에(고전 13:1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뻐하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경하며 감사하라.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경건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힘쓰며,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말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동시에 삼위일체이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라"고 한 말씀을 쓸 때에 구별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여러 신을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