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The Trinity

삼위일체론 제5권 2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5. 4. 24. 18:03

      8. 하나님에 대해서 실체에 관한 말은 각 위격에 대해서 따로따로 하는 말이며, 삼위일체데 대해서는 함께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한 본질과, 헬라어로 세 휘포스타시스(hy-postaseis), 라틴어로 세 위격(personae)이 있다.

 

      9.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굳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 가장 우월하시고 거룩하시고 숭고하신 분 그 자신에 관해서 하는 말은 모두 본체(또는 본질)에 대해서 하는 말이며, 그러나 어떤 것에 관해서 하는 말은 그 본체가 아니라 관계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일한 본질의 효력 때문에, 한 분 한 분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분들을 복수의 합계가 아니라 단수로서 말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성부는 하나님이시오, 성자도 하나님이시오,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본질에 대한 말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최고의 삼위일체를 세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성부가 위대하시며, 성자가 위대하시며, 성령이 위대하시다고 하지만, 세 위대하신 분이 아니라 한 위대하신 분이다. "주는 광대하사 주만 하나님이시이다"(86:10) 라는 말씀을 그들은 성부에 대해서만 하는 것이라고 곡해하지만,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하는 말씀이다. 성부는 선하시고, 성자도 선하시고, 성령도 선하시다. 그러나 선하신 분은 셋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그분에 대해서 주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향해서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한 사람이 주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아버지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였다(18:18-19). 성부 자신만을 말할 때에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쓴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모두 의미한다. 삼위일체 신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치와 상태와 장소가 시간 등은 하나님 자신에 고유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그룹 사이에 좌정하셨다"(80:1) 하는 것은 위치에 관한 말이며;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102:27) 시간에 관한 말이며;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주는 거기 계시며"(139:8)는 장소에 관한 말이다. 능동 또는 지음에 관해서는, 아마 하나님에 대해서만 참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만이 지으시고, 지음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본질에 따라 수동적이신 때가 없다.

      그러므로 성부가 전능하시며, 성자가 전능하시며, 성령이 전능하시지만, 세 전능자가 아니라, 한 전능자이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있으리로다"(11:36). 요약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그 자신을 말하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 한분 한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삼위일체 자체에 대해서 한꺼번에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분 한분에 대해서 단수로 말하고 복수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위대하시다는 것은 다르지 않고, 계시다는 것은 곧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본질(essences)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이, 세 위대성을 말하지 않는다. 내가 본질 즉 에센티아(essentia)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우시아(ousia)라고 하며, 라틴어로 보통 숩스탄티아(substantia)라고 하는 것이다.

 

      10. 그들은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라는 말도 쓰는데, ousiahypostasis의 뜻이 어떻게 다르다고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헬라어로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mia() ousia, treis() hypostaseis라는 말을 쓰지만, 이것은 라틴어로는 한 essentia와 세 substantiae라고 한다.

 

      9. 위격(personae)이라는 명칭은, 인간적인 뜻으로 해석한다면 적당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라틴어에서는) 에센티아와 숩스탄티아는 같은 뜻으로 통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한 에세티아와 세 숩스탄티아라고 말하지 못하고, 한 에센티아 또는 숩스탄니아와 세 페로소나(persona)라고 한다. 이 문제를 라틴어로 논한 권위 있는 분들이, 말없이 이해한 것을 말로 표현하려고 해도, 다른 적당한 용어를 발견한 수 없노라고 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은사라고 해서 성부가 성자가 아니시므로, 확실히 그들은 세 분이시다. 그래서 주께서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실 때에 주어를(나와 아버지) 복수로 쓰셨다(10:30). 주께서는 사벨리우스파와 달라서 이 때에 주어를 단수로 쓰시지 않고 복수로 쓰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셋이냐?"고 묻는다면, 사람의 언어는 심히 빈곤을 느낀다. 그러나 세 "위격"("")이라고 대답한다. 이 용어가 뜻을 충분히 표현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0. 본질로서의 하나님에게만 속한 일들을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단수로 쓰고, 복수로 쓰지 않는다.

 

      11. 그러므로 우리는 세 본질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이, 세 위대성을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큰 집, 큰 산, 위대한 마음 등과 같이, 위대성에 참여함으로써 위대한 것들의 경우에는 있는 것과 위대한 것은 문제가 다르다. 위대성과 위대성 때문에 위대한 것과는 서로 다르다. 큰 집은 확실히 절대적인 위대성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큰 집을 크게 만들며 큰 산을 크게 만들며, 그밖에 크다고 하는 모든 것을 크게 만드는 그것은 절대적인 위대성이다. 그래서 이 위대성과 그것 때문에 위대하다(크다)고 하는 것들은 다르다. 그리고 이 위대성이 근본적으로 위대하며, 이것에 참여함으로써 위대한 것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의미에서 위대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것에 의해서 위대하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를테면 위대성에 참여하시기 때문에 위대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위대성은 하나님보다 더 위대할 것인데,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 위대성으로 위대하시다. 또 그러므로 우리는 세 실재(essentiae)를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이, 세 위대성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것과 위대하신 것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세 위대한 실재를 말하지 않고, 한 위대한 실재를 말한다. 하나님은 위대성에 참여하기 때문에 위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위대하시며,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위대성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영원성에 대해서나 전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은유나 비유로 말하지 않고 그 고유한 어떤 점을 말할 때에(만일 사람의 입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고유한 점을 말할 수 있다면) 그 모든 술어에 대해서, 위대성에 대해서 한 말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11. 삼위일체 내부의 관계에 대한 말.

 

      12. 그러나 같은 삼위일체 안에서 어느 한 분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분 자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과의 상호 관련 하에서, 또는 피조물에 관련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실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 - 위대하시고 선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 하나님은 그 자신의 신성과 그 자신의 위대성과 그 자신의 양선(良善)과 그 자신의 영원성과 그 자신의 전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같은 식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만일 피조물에 관련해서 양자로 삼는다는 것 때문에 은유적으로 아버지라고 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다르다. 그래서 성경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주시니"라고(6:4, LXX) 한 말씀은 물론 성자나 성령을 배제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는 그 은혜 때문에 이 한 주이신 우리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성자라고 부르는 것도 전연 하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라"(4:4) 말씀에 따라서 삼위일체를 전체적으로 거룩한 영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성부가 영이시요, 성자가 영이시요, 성부가 거룩하시고 성자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며, 물론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삼위일체를 거룩한 영, 즉 성령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삼위일체가 아니고 삼위일체 안에 계신 것으로 이해되는 성령에 대해서는 관계적, 상대적으로 그 고유명사로 성령이라고 부른다. 이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성부와 성자에 관련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성령이라는 그 명칭만으로는 명백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를 때에(8:20) 명백하다. 주님의 말씀에 성령은 "아버지께로서 나오신다"고 하며(15:26), 사도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할 때에(8:9), 확실히 성령 자신을 말하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선물이시다.

      그런데 증여자(贈與者)의 선물이라고 하며 선물의 증여자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선물과 증여자의 상호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친교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령이라는 같은 이름이 성부와 성자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에 공통된 이름을 특히 성령에 붙였기 때문이다. 즉 성부도 영이시요 성자도 영이시며, 성부도 거룩하시고 성자도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분에게 적합한 이름으로 두 분의 친교를 의미하기 위해서 성령을 두 분의 선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이시며, 홀로 선하시며, 위대하시며, 영원하시며, 전능하시다. 그 자체가 그의 통일성이며, 신성이며, 위대성이며, 양선이며, 영원성이며, 전능성이시다.

 

      12. 상호 관계를 표시하는 이름이 없을 때가 있다.

 

      13. 성령이라는 이름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삼위일체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말하는데, 성령의 상대자에게는 대응하는 이름이 없는 것을 보더라도, 독자는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주인의 종과 종의 주인, 아버지의 아들과 아들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이름들은 서로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부의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의 성부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성령이 성부의 아들이라고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성자의 성령이라고 하지만, 성령의 성자라고 하지 않는다. 성령이 성자의 아버지라고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로 관계된 것들일지라도, 그 상호 관계를 표시하는 대응하는 이름이 그것들에는 없는 경우가 많다.

      보증이라는 말보다 관계를 분명히 알리는 말이 있는가? 무엇이 하는 보증이라고 해서 그 관련된 것을 알리는 것이므로, 보증은 언제든지 어떤 것이 하는 보증이다. 성부의 보증과 성자의 보증을 말하는 것과 같이(고후 5:5; 1:14), 이것을 뒤집어서 보증의 성부라든지, 보증의 성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와 반대로, 성부의 선물과 성자의 선물을 말할 때에, 우리는 선물의 성부나 선물의 성자를 말할 수 없지만, 이들의 상호 관계를 대응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증여자의 선물과 선물의 증여자를 말한다. 여기서는 통용되는 말을 찾아낼 수 있고, 앞에서는 그것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13. 삼위일체에서는 시초(principium)라는 말을 상대적으로 어떻게 쓰는가?

 

      14. 그러므로 성부라는 이름은 상대적으로 쓰며, 성부는 또 상대적으로 시초라고도 부른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이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성자와의 관계에서 성부라고 부르며, 그에게서 온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시초라고 부른다. 그와 같이 성자도 성대적인 이름이며, 그는 또 상대적으로 말씀과 형상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호칭에서 그는 성부와 관련되며, 성부에게서 이런 이름을 전혀 쓰지 않는다. 성자는 또 시초라고 부르는데,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시초니, 너희에게 말하노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이다(8:25, 라틴어 성경).

      그러나 그는 성부의 시초이신가? 성자가 자기를 시초라고 하셨을 때에, 그는 자기를 창조자라고 밝히려고 하신 것이다. 모든 것이 성부에게서 왔으므로 성부가 피조 세계의 시초이신 것과 같다. 그런데 창조주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와 같다. 그래서 우리가 성부도 시초라고 하며 성자도 시초라고 할 때에, 피조 세계의 두 시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는 함께 피조 세계의 한 시초이시기 때문이다. 한 창조주이시며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그 자체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어떤 다른 것을 만들어 낼 때에는, 그 만들어낸 것에 대해서 그것은 시초이다. 우리는 성령을 시초라고 부르는 것도 바르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과 창조주라는 호칭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하며, 물론 그는 역사하실 때에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그가 역사하시는 어느 것으로도 변하시지 않는다. 또 그가 역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라: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7-11).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으로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 누가 이런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전 12:6). 만일 성령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 여러 가지 점을 한 가지씩 묻는다면,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시라고 진심으로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부 성자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14. 성령의 유일한 시초는 성부와 성자이시다.

 

      15. 그러나 삼위일체의 내부에서의 상호 관계에서는 낳는 이를 나는 이와의 관계에서 시초라고 한다면, 성부는 성자에 대해서 시초이시다.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는 성령과의 관계에서도 시초이신가? "그는 아버지께로서 나오신다"(15:26) 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부는 그 낳으시는 것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 주시는 것에 대해서도 시초이시겠기 때문이다. 또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질문이 여기서 나타날 수 있다: 무슨 까닭에 성령도 아들이 아니신가? 성령도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복음서에 있기 때문이다(15:26). 대답은, 성령이 나오신 것은 났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령은 독생자와 같이 나신 것이 아니며, 우리가 창조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가 되는 것 같이 창조되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부에게서 난 이를 성자라고 부를 때에는 성부에게만 관련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아들이 아니시다. 그러나 주어진 것은 주신 분과 받은 자들 양쪽에 관련된다. 그래서 성령은 그를 주신 성부와 성자의 영이실 뿐 아니라, 그를 받은 우리의 영이라고도 한다. 구원을 주신 "주의 구원"(3:8)을 그 구원을 받은 우리의 구원이라고도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를 주신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그를 받은 우리의 영이시다. 물론 인간으로서 우리의 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이다. 그러나 이 성령은 다른 모양으로 우리의 영이시다. "오늘날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하는(6:11) 의미의 영이시다.

      인간의 영도 물론 우리가 받은 것이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사도는 말한다(고전 4:7).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 받은 그것과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받은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에 대한 성경 말씀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령으로" 왔다고 하며(1:17), 엘리야의 심령은 그가 받은 성령을 의미한다. 모세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이 있다. 주께서 그에게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라"(11:17) 하셨을 때에, 내가 이미 네게 준 성령을 그들에게 주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 주는 이는 그 시초이다. 그 시초되는 이에게서 나온 것을 받았으므로, 그 시초 이외에 다른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시초이심을, 그러나 두 시초가 아니심을 인정해야 한다.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이시며, 피조계에 대해서 한 창조주와 한 주이신 것과 같이, 성령과의 관계에서 한 시초이시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피조계에 대해서 한 창조주와 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한 시초이시다.

 

      15. 성령은 선물로 주시기 전에도 주신 후와 같이 선물이셨는가?

 

      16. 그러나 질문이 계속된다. 성자는 나심으로써 성자이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재하시는 것과 같이, 성령도 주어지심으로써 주어지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재하시는가? 그러므로 그는 주어지시기 전, 아직 선물이 아니셨을 때에 존재하셨는가? 또는, 하나님이 그를 주려고 하셨기 때문에, 그는 주어지시기 전에 이미 선물이셨는가? 그러나 만일 주어지실 때가 아니면 나오시지 않으며, 물론 그가 주어지실 상대가 없으면 나오실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럴 경우에 주어지기 때문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자기의 본질로 있었는가? 성자는 나심으로써 상대적 의미로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절대적 의미로 자기의 본질로 존재하신다. 성령은 항상 나오시며,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영원부터 나오시며, 그러나 주어질 수 있도록 나오시기 때문에, 주어질 상대가 있기 전에도 이미 선물이셨는가? 선물과 주어진 것과는 뜻이 다르다. 주어지기 전에도 선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지지 않았으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16. 시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상대적인 것이며,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17. 또 성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신 성령을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우리는 마음에 거슬릴 필요가 없다. 예컨대, 성령을 우리는 주어지셨다고 했다. 성령은 영원히 선물이시지만 시간 안에서 주어지셨다. 주인도 노예를 가지기 시작하는 때가 아니면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이 주인이라는 호칭은 하나님에 대해서 상대적이며 시간 내에서 쓰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주이신데, 그 피조물은 영원부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토론을 시작했을 때에 하나님은 변하실 수 없으므로, 하나님에게 어떤 우연적인 것이 시간 내에서 발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말들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참으로 하나님은 영원히 주이신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득불 피조물도 영원부터 있다고 말해야 될 것이다. 피조물도 영원부터 종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주가 아니었을 것이다. 주인이 없는 사람은 노예일 수 없으므로 노예가 없는 사람도 주인일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물론 홀로 영원하시며, 시간들은 그 변천과 변화 때문에 영원하지 않지만, 시간들은 시간 안에서 있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시간들이 시작하기 전에는 시간이 없었으며, 따라서 물론 시간 안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 이 시간들의 주이셨던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주가 되신 것이 아니므로),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사람은 시간 안에서 창조되었고, 사람의 주가 되실 하나님은 사람이 있기 전에는 물론 사람의 주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하나님이 사람의 주가 되신 것은 시간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또 모든 논쟁을 제거하기 위해서, 최근에 시작한 내게 대해서 하나님이 주이신 것은 시간 안에서 생긴 일이다. 혹은 영혼에 관한 모호한 문제 때문에 이것도 확실치 않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주이신 데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 백성이 가진 영혼의 본성은(이것은 우리가 지금 탐구하려 하지 않는 문제이지만) 이미 있었지만 그 백성은 아직 없었고, 그 백성이 있기 시작한 때는 분명하다.

끝으로, 최근에 있기 시작한 이 나무나 저 나무, 이 곡식밭이나 저 곡식밭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이신 것도 시간 안에서 된 일이다. 물질은 이미 있었으나, 물질의 주이신 것과 이미 창조된 본성의6) 주이신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사람도 목재의 주인인 때가 있으며, 그 목재로 만든 궤짝의 주인인 때가 있다. 그가 목재의 주인이었을 때에는 궤짝의 주인은 아니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연한 일을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본성에 어떤 일이 생겨서 그가 변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하며, 화제가 되는 것은 상대적인 우연성이어서 그 우연성이 그것들을 변하게 만든 것이라고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예컨대 친구라는 말은 상대적인 것이다. 사랑하기 시작하지 않았으면 친구가 아니다. 그러므로 친구라고 부르려면, 그 사람 안에 의지의 변화가 있었어야 한다. 돈을 가격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상대적인 말이다. 돈이 가격이 되기 시작하거나, 또는 담보물이나 그 밖에 비슷한 것이 되기 시작할 때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돈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으면서 이렇게 여러 가지 관계를 표시하는 말로 부를 수 있다면, 돈은 그 본성이나 형태를 잃음 없이 이런 관계적인 뜻으로 말하기 시작하거나 말하지 않게 된다면, 하나님의 변함없는 본질에 대해서는 이런 일은 얼마나 더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말할 때에, 이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시간 안에서이지만, 하나님의 본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의 본질과 관계를 맺게 된 피조물에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주여, 주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나이다"라고 한다(90:1, LXX). 주님을 우리의 피난처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말이다. 우리가 그에게 도망할 때에 그가 우리의 피난처가 되며, 우리와 관련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에게 피난하기 전에 그에게 없던 일이 그의 본성에 발생했는가? 그러므로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가기 전에는 형편이 나빴고 그에게 간 후에 좋아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등의 변화도 없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의 중생할 때에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1:12).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질이 변해서 나아진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본질에 아무 변화도 없으시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시간 내의 어떤 일을 말하기 시작할 때에는, 그리고 그것이 전에는 말하지 않던 것일 때에는, 그것은 분명히 상대적 - 관계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긴 듯이 하나님의 우연성에 따라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 피조물에 있는 우연성에 따라서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 시작할 때에 그는 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에 없던 새로운 사랑으로 어떤 사람을 시간 안에서 사랑하신다고 우리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 과거의 일은 없어지지 않으며, 미래의 일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의 모든 성도를 예정하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발견할 그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악인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선인에 대해서 인자하시다고 할 때에도, 변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아니시다. 마치 빛은 약한 눈에는 고통스럽고, 강한 눈에는 상쾌한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하면, 눈이 변하는 것이고 빛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