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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특강 V - 김영규 교수

Bavinck Byeon 2018. 4. 20. 22:32

기독교 강요 특강 V

- 칼빈의 신학적 배경과 칼빈 신학의 독특성 -


김영규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녹취: 김기현 강도사(은총교회)

강의 연도: 2004.9.9, M.Div수업


*[본 강의안은 강의를 녹취하신 김기현 강도사님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제2강


1. 본문: 행4:16-21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은 우리자신의 능력이 있거나 우리 안에 근거할 만한 그런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만세전에 정하신 거룩한 뜻과 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런 내용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주님의 거룩한 부름을 받게 하여 주시고, 저희들이 이 세상의 모든 삶을 통해서, 주께 그 은혜에 대해서 찬양드릴 수 있도록 은혜주시니, 우리의 온 인생을 통하여 주께 영광이 되는 내용을 우리로 하여금 인식케 하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시는 대로 감사할 수 있도록 하시고, 또 우리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여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리의 생을 축복하여 주시고 이런 은혜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지식으로 늘 부요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이제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가장 기초되는 그런 창조의 모든 내용에 따라서, 안식하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하시고,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발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모든 삶으로 초대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걸음을 멈추는 그런 순간에 있을 때까지도, 늘 주님께 찬양 드리는 그런 영광된 삶으로 초대 해 주셨사오니, 우리가 이런 영광으로서 주님에게 돌릴 때, 늘 진리와 우리와 함께 하게 하여 주시옵시며, 세상의 어떤 유혹이 우리 안에 있더라도, 그 진리를 뒤로 하거나 또 그것을 침묵하거나 그런 일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특별히 우리가 생을 통해서 우리가 부패하므로 말미암아. 그 진리가 가려워지며, 또 그 진리가 드러나지 못할 까 두려운 마음뿐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셔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늘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서, 우리가 부끄러움 없는 삶으로 우리 앞에 늘 서 있고, 또 하나님 앞에 서 있으므로, 저희들이 그 진리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뜻에 합한 모든 빛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이런 한 시간을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주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는 시간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우리의 마음과 뜻과 우리의 생각의 모든 것을 통해서, 주께 영광이 되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루터의 홀로 있는 성격


지난 번에 루터의 홀로 있는 성격, 홀로 있는 성격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유산이라고 생각 할 수 있는 그런 ‘오직 성경’에 대한 발견으로 발전이 된 내용이 어떤 형태였고, 그런 저항의 내용이, 삶의 저항의 내용으로서 시대를 통해서 구별되는 그런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서 오늘도 그 유산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오직 성경’의 개념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가 특별히 1529년 루터가 홀로 남아서 그 진리를 그 마음에 품었고, 또 따르는 자들이 공적으로 같이 동의하거나, 그것에 어떤 힘을 모으는 그런 어떤 과정이 없었음으로, 그런 것으로 인하여, 어떻든 간에 지금 그런 그 ‘오직 성경’이라는 개념은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겠지요. 원래 십계명으로부터 늘 주어진 그런 내용이고, 또 모세오경으로부터 주어진 내용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계시 자체의 성격에서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그런 내용은 쉬운 문제는 아니고, 긴 시간을 통해서 논의해야 하는 내용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고 했을 때는, 거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단절, 영원한 간격이 어떤 의미에서 창조자체가 그 역사 전체, 또 섭리 자체가 간격을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이제 쉽게 말하면 과거에는 그렇게 충분하게 창조의 그런 신비의 내용이 얼마나 클지, 또 섭리가 그렇게 클지 이렇게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가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을 좀 더 깊게 깨닫게 되는 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지금은 시대적으로 짧은 기간에도, 그런 획기적인 자연에 대한 이해와 깊은 내용을 이렇게 발견하고 또 깨닫는, 그런 어떤 집약적인, 또 그냥 단시간에 전 세계의 인구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어떤 정신적인 연구의 활동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동시적으로 많은 것을 깨닫는 그런 단계에 와 있을 때에, 비로소 창조와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갭을 표현하고 있는 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이 결국 만드는 산출된 내용, 자연자체는 아니지만, 자연자체를 이해하는 그런 인간의 활동의 조금만 발자취라고 할까, 뒤로 남긴 흔적으로 우리가 문화가 있고, 문명과 과학의 모든 이기의 어떤 내용이 있는 것인데, 그런 내용도 얼마나 갭이 컸으면,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전문가여서, 보통 일상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보통 지각을 가지고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난해한 이론과, 또 어떤 문화적인 결과, 어떤 과학기술의 내용을 가지고 갭을 이루어서 층을 이루고 있는 그런 현상이 있는 것인데, 그런 현상도 인간사회에서 이제 구별을 할 정도로, 어떤 사람은 전문가이고 어떤 사람은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항상 그 사람의 상담을 요구하고, 그 사람의 어떤 과학적 기술의 내용을 설명을 들어야 되고, 또 공부를 해야 되고, 이런 상황이 되었지요. 이런 면에서 굉장히 큰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서 자연을 좀 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제 오늘날도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대로, 오늘날 핵 개발 한다고 해서, 미국과 같은 또는 중국과 같은 그런 수준에 있지 못한 것이어서, 서로 경쟁적이지만 그런 같은 일시적으로, 벌써 프로젝트가 있는 이후에, 반세기가 넘어서 긴 시대가 있는 그런 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라의 경우는 그런 과학적 기술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무슨 그 IT, 그런 나라라고 해서 그런 공업국가가 핵심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 로열티를 다른 나라에 제공해야 하지요. 실제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은 거의 다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형평입니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특별히 일본은 서로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레벨이 같은 레벨로 올라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손을 잡아야 하는 형편이 될 정도로, 굉장히 위협적인, 한국에게 일본이라는 국가는, 그렇게 특별하게 자기 자신을 올려놓은 그런 특별한 관계가 있는데, 어떻든 간에, 우리가 오늘날 유비쿼터스라는 사회에 대해서 말을 하더라도, 그런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80%이상이 자국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데에 의존하고 있는 형평입니다.


마. 그런 의미에서 모든 원천기술, 원천 재료는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실질적으로 고도의 코팅기술 조차도 전여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런 것으로부터 이렇게, 일단 기술을 가져오거나 또는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 놓은 것을 부속품으로 사용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는, 그렇게 해서 그런 사회를 만들어 놓는다는 것은 하나의 소비국가로서의 그런 나라의 형상으로서, 여기에 실험대상이 되어 있는 이런 국가로 보아야 할 사회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정보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은 그러한 어떤 선진국이 가지고 있는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거지요. 그런 과학적인 기술조차도 실제적으로 자연의 신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그런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자연을 연구하다가 보니까, 소위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중 고등학교 때, 고등학교때에 배웠던지 대학교 때 배웠든지 간에, 주기율표 상에 있는 많은 원소들, 원소들이 이제 새롭게 지금도 만들어 내는 그런 것도 있지만, 수 많이 많이 있는데, 모든 그런 원소들에 대한, 어떤! 첨단과학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어떤 상태로 만들어 놔야, 그때 원 자료 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지하자원을 캤다. 우리 나라 같으면 해양 자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캤다. 니켈이면 다른 모든 것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원자료 인데, 그 원자료는 원자료로서의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것을 결국 산업 상 오늘날 나노기술로 이용할 수 있는 직접적인 상태라는 것은, 아주 고도로 정밀한 그런 분말로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아무리 캤어도, 캔 내용을 다시 정제, 99% 99.9999%까지 아주 순수한 정제된 물질을 만들어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정제된 물질을 현대과학이 이용할 수 있도록 완전 분말로 이렇게 만들어 주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 분말이 있을 때만, 이제 정밀자료로서 이용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실제 원자재가 아무리 우리가 있더라도 그것은 원자재가 아닙니다. 현대과학으로 원자재는 그런 정밀 분말이 있을 때만 원자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원소에 대한 분말이든지 어떤 상태, 즉 입자가 가장 잘 보관될 수 있는 상태, 어떤 경우에는 꼭 고체 상태가 아니지만, 어떤 경우는 액체상태, 이렇게 보관상태가 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겠지요. 그러나 헬륨이나 수소까지도 고체까지 만들어 내는 그런 기술까지 발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공기 중에 있는 산소나 이런 것이 있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에는 그것을 어떻게 고체로 만들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고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들어서 가장 적은 양으로 보관되어서 어떤 입자성으로 가지고 있는 그런 형태를 실제 이용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런 실재적인 원자재라는 것은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실재적으로 이 세상을 구성하는 원자재가, 실재적으로 어떤 정밀 과학, 또는 고도의 첨단 과학에서 적용되는 어떤 기계에 사용 되기 위해서는 그런 상태를 요구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주의 최초의 개념이라는 것하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휠 에너지로 이용하는 그런 상태, 여러분들이 아침에 밥을 먹었지 기름을 넣은 것은 아니잖아요. 또 지금 여러분들이 입는 것도,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도, 지금 전부 산소를 먹고 있다고요. 완전히 푸엘 에너지입니다.


물론 이 환경을 만들어 놓고, 이 환경의, 입자의 에너지 상태, 입자의 운동 에너지의 환경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창조된 인간을 만들어 놓고, 동물도 만들고 식물도 만들어 놨기 때문에, 환경이 되도록 하는 그런 과정 있는데, 실제 이 그 모든 입자가 각각 자기의 모양을 이루고, 어떤 어느 하나는 식물이 되게 하고, 어느 하나는 호흡이 되게 하고, 우리는 식물도 먹고, 호흡도 하고 해서 이런 에너지 전체를 받고 있잖아요. 또 귀로 듣는다고요. 그렇게 된 것일지라도 귀로 들어야 됩니다. 그러면 귀로 들으려면 자연에 소리가 있어야 되지요. 소리가 되려면, 짐승이 바삭바삭 움직이도록 해야 하고, 그러면 움직이는 소리가 나도록 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수준의 소리가 내도록 하고, 그러나 그 자체가 존재하도록 하고, 또 그 자체로 보는 자로 있고, 듣는 자로 있는, 그런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아주 공통된 어떤 원소로 처음에 있었다가, 어떤 질서를 주어 가지고, 함꺼 번에 이렇게 하나는 대상이고, 하나는 땅이고 하나는 서있는 유기물로 이렇게 있는, 그런 최초의 어떤 상태, 이런 상태는 인간이 아무리 모방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고요?


겨우 만드는 것은 자동차입니다. 특별한 입자의 운동, 가솔린 같은 화석 연료의 운동 에너지를 약간 응용해서 에너지를 쓰는 기구를 우리가 쓰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기계라는 것 하고 자연자체 하고는, 그 갭이 엄청나게 크다는 겁니다. 인간이 그렇게 고도로 이제 기계를 많이, 자연과 같이 그런 첨단기술적인 기계를 만들면 만들수록, 만약에 그것이 자연과 기계와의 갭이 더 커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만드는 자와 지금 이용하는 자의 차이는 그만큼 커지는 것예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창조자체가 굉장히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 있어요. 하물며 그것을 창조한 자는 더 신비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지요. 그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존재케 하시고, 호흡이 있게 하신 그 같은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이 창조의 본질, 자신의 뜻에 관련해서 스스로 계시한다는 것은 그 자체는 엄청난 기적입니다.


루터의 ‘솔라 스크립투라“의 독특성


2. 그러니까 루터가 지금 ‘sola scriptura(솔라 스크립투라)’, 오직(sola) 성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은, 솔라라는 말은, 내가 자연의 소리를 듣지 않고 그것만을 듣겠다는 것인데, 그것만을 듣겠다. 그 “만(sola, 오직)”이라는 솔라(sola) 라는 말은, 그 당시에 솔라(sola)로서, 시대상에 있어서 느끼는 솔라(sola)의 개념입니다. 오히려 사회적 틀 안에서 솔라(sola)로서 발견되는 그런 솔라(sola)입니다. 오늘의 시대의 솔라(sola)와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성경만을 경청해야 된다는 것은, 그런 시대하고는 다릅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그런 과학의 시대에 와 가지고 그런 솔라(sola)를 발견하는, 그런 그 어떤 인간의 활동, 인간의 발견내용은 아닐지라도, 그러나 사회적 측면에서 그에게 무슨 원인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 시대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하나님에 대해서 그런 차원적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인간의 보편 그런 사회상이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닐지라도, 그에게만 유일하게 오직, 그 솔라(sola)를 깨닫게 해주셨다는 것은, 비록 오늘의 시대의 그 솔라(sola)하고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은 sola(솔라)로서 발견된 것은 사실입니다. 사회적 측면에서 발견된 내용일지라도, 그러나 그때 그 루터는 거기에 이상하게도 그렇게 발견하는 자로서 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 솔라의 개념이 지금 우리가 관계하는, 지금 왜 예배에서 오직 성경을 읽어야 되고 성경만을 선포하고 성경을 주석해야 하고, 성경을 또한 선포해야 하는가? 그런 틀을 거기에서 마련해 놓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개념이 결국 교리와 삶에 있어서 유일하고 확실한 규범, 이런 개념으로 그때 솔라가 발견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결국 그런 갭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결국 성경자체, 성경자체가 자신을 증거 하는 그런 내용에 의해서, 결국 무오성이 발견이 된 것이죠. 그 분은 틀리지 않다. 인간은 거기에서, 모세가 말한 대로 가감하지 말라. 내 말은 가감하이지 말라! 어떤 형태로 가감하지 말라. 이렇게 설명, 해석한 것이 창조에 대한 설명, 그분이 자신이 계시하신 내용이다. 창조를 통해서 나 자신을 대신해서 나와 같은 형상으로 만든 어떤 형태로 인간이 구성한 것을 가지고 나를 섬기지 말라! 어떤 형태를 만들던지 그것을 가지고 만들지 말라! 이런 말이거든요! 원리를 알아야 된다고요.


무슨 뭐 짐승, 또 사람, 궤이한 어떤 귀신, 또는 천사 그런 것에 의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섬기는 그 정도의 것이 아니고, 원리적으로는, 즉 창조에서 보여준 그 자체는 나와 하나님과의 갭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창조의 비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모든 비밀로, 인간이 산출할 수 있는 뭐 표상이든지, 그것으로 인하여 만든 것이든지, 어떤 형태를 통해서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그것으로 인식하지 말라. 또 그것을 대신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뭐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 그것이 창조의 원리이다. 창조가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는가? 그것이다. 거기에 십계명에 가감하지 말라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깊게 설명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당연히 “모든 교리와 삶의 유일하고 확실한 규범으로서의 성경”이란 말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오직 그 자체로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뒤에 보게 되지만 칼빈이 가르친 “적정과 절도의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호기심을 배제하고 침묵하지말라! 쉽게 말해서 이런 것입니다. 그것이 “적정과 절도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말과 생각할 때, 말과 생각이라는 것은 표현되던, 안에서 내가 어떤 것을 표상하던, 모든 것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규범의 내용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제 우리에게 자연과학적인 인식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에 의하면 학문의, 그런 모든 기원은 어디이냐? 호기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신비한 것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것, 그것 자체를 배제하라! 이런 뜻에 해당되는 칼빈의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명히 진리가 있는데 내가 방해가 된다고 해서, 예를 들어 전도할 때 보니까, 옷 맵시가 너무 지나치게 화장하고 너무 지나치게 화려하게 옷을 입으면, 상대방이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받을 때 너나 잘해라! 그럴 까봐 내가 화장도 않고, 순수한 중간 단계의 옷을 입고, 모든 사람을 만난단 말이예요! 다른 사람이 볼 때 너나 잘해라! 그러겠지요! 누가 듣겠어요! 본인이 화려한 옷을 입고, 낮은 자리에 있지 않는 사람이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희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와 같이 절제하고 내가 모든 것을 이렇게 감추면서 무엇인가! 진리를 드러내는 그런 내용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 것처럼, 내 생애에서 방해가 되는 요소로 인하여 침묵하는 경우가 많단 말이예요. 특별히 가장 큰 것은 죄예요. 내가 죄를 마음에 두고 있고, 또 죄가 있는 경우에는 진리가 상당히 많이 침묵이 되요. 그런 것도 덧 붙여서 그냥 내가 가리 울 것이 많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으로 인하여 진리가 침묵이 되요. 


그러니까 고의적이던 고의적이 아니던 어떤 형태로 진리가 침묵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되요. “예정론도 보니까 자유의지에 방해가 된다. 그러니까 침묵해야 한다. 설교해선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침묵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예정론이 있단 말이예요. 그러면 그 성경이 말한 대로만큼, 말하고 침묵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그때 당연히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것처럼,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양심입니다. 양심을 거역하여서 양심을 넘어서서 어떤 예배 원칙, 또 어떤 교리적 이유든지 이렇게 될 수 없어요. 양심을 방해하기까지 그렇게 어느 법도 그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이런 것이, 그때 그 양심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그런 양심, 그것은 바로 뭐예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될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있을 때, 인간 자신의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고, 말씀 앞에 서 있을 때의 양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뭐 합리적 이성, 실천적 이성, 이런 의미에서 두개가 이성 가운데 개념이 있다. 이런 개념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 진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이 발견되고, 하나님의 지식이 부유함에 되어서 발견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발견,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발견,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서의 자기 자신의 모습, 또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하나님 앞에서의 나, 이때 그것이 다 양심입니다. 하나님의 지식 앞에서 내가 발견된 그런 나이지요. 그런 의미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굉장히 양심의 개념에도 적용이 되고, 하나님 자신의 지식도 관련이 되고, 성경이 무엇인가 대해서도, 이렇게 관련이 되어서 그때, 오직 “오직 성경”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비록 어떤 시대에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솔라(sola, 오직)” “오직”의 개념이 발견이 되었지만 그것은 모든 시대의 첫 유산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인류로 하여금 그것을 거역할 수 없는 그런 큰 사회적인 이슈를 거기에서 냈다는 그런 의미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루터는 그런 의미에서 존경이 됩니다. 루터를 무시해서는 안 되고, 그때 그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신 그런 내용이 그런 형태로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루터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 루터가 모든 것이 존중될 만한 것이 아니 되어서 이제 약간의 비난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같은 비난이 된 내용이 “칼스타트”, 즉 나이는 약간 루터보다 많을지라도, 같은 동료입니다. 칼스타트와 젊은 루터이지만은 1525년 이후에 루터의 경우에 대해서 약간의 비판적인 자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 9페이지를 보시면 “1520년대 루터를 존중했으나” 대부분 종교개혁자들을 그 루터를 참 존중해서 전부 따랐어요. 그를 따르는 모든 그런 유럽 사회의 선각자들이 있었다면, 루터가 가장 큰 선봉자로서 존중이 되었던 것인데, 1524년부터 루터가 존중이 안 되었어요. 그 이유와 관련해서 우리가 이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이제 표현이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의 원리로서 교회의 규례들이 유효한 수단들이 되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떤 힘이나 그들의 집례 하는 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축복과 그들을 믿음으로 받는 그들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있다는 일치된 종교개혁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앞에 이제 말을 했어요. 믿음은 들음으로 난다. 그러나 그 믿음은 우리 자신의 행위나, 믿는 행위나, 또는 믿을 만한 능력이나, 또 들을 만한 능력, 이런 것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오직 성령에 의해서 난다. 이런 원리가 동의했다는 말이예요. 칼스타트도 동의를 했어요. 그런데 칼스타트하고 루터하고 다른 점은 성령을 너무 지나치게 말씀과 분리해서, 말씀과 독립해서, 성령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칼스타트가 잘못된 점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면서 동시에 영적인 안목에서 너무 의식을 허용하고 의식제도가 그대로 남아있는 그 루터에 대해서, 또 싫증을 느끼고 비판한 사람이 칼스타트예요.


그러니까 문제는 거기에 있어요. 칼스타트가 루터를 비판하는 종교개혁 입장에서 과거의 나쁜 유산들을 철저히 제거하지 않는 그 루터에 대해서 칼스타트가 비판할 때, 오직 성령에 의해서 강조해서, 물론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좋겠는데, 성령을 말씀과 독립되어서, 성령을 강조하는 그런 형태로 발전하여서, 이것이 이제 루터의 측근들 가운데서 아주 선봉이 된 사람인 칼스타트가 재세례파의 원인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재세례파는 내적영감(내적계시)에 대해서 강조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말씀과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영감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꼭 말씀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말씀 외에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길을 열려 놓은 것이지요. 이것이 재세례파인데. 이것이 오늘날 의미에서, 많은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그런 퀘이커교도나 패밀리리스트, 이제 17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그런 브라운이스트들, 또 그 후에도 계속 있었던 많은 운동들 가운데서 이런 이단들이 그와 연결되어서 되어있어요. 역사적으로 같은 맥락을 이렇게 잇지 않을지라도 그런 늘 똑 같은 성격이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 때문에 오늘날 오순절운동도 그런 계열의 하나로 볼 수 있겠지요. 여기에 있는 대로 “오직 하나님의 축복과 그들을 믿음으로 받는 그들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있다는 일치된 종교개혁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오직 의식의 수행에 의해서 온다는 사실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루터와 칼스타트의 차이 ,갈등


3. 그래서 그런 면에서 루터하고 ‘칼스타트’하고의 차이를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물론 루터는 지금 “13세기의 John of Paris의 주장을 따라서 실재설을 주장했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요소들 안에 실재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계신다” 이렇게 주장해서 그것을 학술적으로 표현하기를 “공재설(consubstantia)” 이렇게 되요. 그러니까 con(함께)이 붙었다고요. 하나는 trans, 그러니까 어떤 실체(substantia)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substantia)가 더불어 있는데,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육체적으로, 실재적으로, 그러나 거기에 임재 한다. 그런 뜻입니다. 같은 실재설을 우리도 따르고 있는데, 이미 우리가 뒤에 표현할 것이지만은 예! 13페이지를 보십시오. 결국 쯔빙글리하고 오클람파디우스와 루터와의 유명한 논쟁, 물론 개혁교회와 루터교회가 그때부터 이제 갈라져서 시작해서 분리되기 시작된 그 가장 쟁점이 되는 포인트는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실재가 어떤 형태의 실재인가? 그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 13페이지 위에서 보면 그런 말을 쓰지요. ‘전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셨으나 ,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편재한 것이 아니다.(Quanvis totus Christus(전[whole] 그리스도) ubique(어디에나) sit, non tamen quod in eo est, ubique esse)’ 이 때 그 라틴어로 totus Christus(토투스 크리스투스), 그것은 어디에나 계시나. 그러니까 그 그리스도는(totus Christus)는 실재하신다는 거예요. 어디에나 계신다는 말이예요.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 다음에 표현되기를, 여기에 뒤에 보면 non totum(논 토툼), totum Christum(토툼 크리스토툼), 이렇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러나 Christus(크리스투스)가 언제든지 물질로 어떤 격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totum Christum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그런 말을 여기에 결합을 (하지 않고), 표현하기를 “totum”의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totus 개념은 Christus와 결합이 되어서 썼는데, 그러나 totum Christum(토툼 크리스토툼)이라는 말을 쓸 수는 없기 때문에, 그냥 Christum(크리스툼)을 생략하고 totum만 썼어요. totum의 개념을 설명하기를 13페이지 위에서 둘째 줄에 “quod in eo est”(쿠보드 인 에어 에스트) 이렇게 표현했어요. “그 안에 있는 것” 그러니까 totum이라는 말입니다. [totus(남성 대명사적 형용사), tota(여성 대명사적 형용사). totum(중성 대명사적 형용사) Christus(남성 명사 주격), i, (남성 명사 속격), christus가 남성명사이기 때문에, tota(여성)와 totum(남성)은 쓸 수 없습니다. 라틴어에서 형용사는 명사와 성, 수, 격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totus Christus(전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가능해도, totum Cristum이라는 표현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totus Christus ubique sit(전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신다), non tamen totum Christi ubique esse(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것이 어디에나 계신 것이 아니다). 즉 ‘전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시지만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것이 어디에나 계신 것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이 됩니다. 여기서 totum(전부, 전체, 모든 것) Christi는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것” 소위 루터가 이야기하는 bodily적인 것,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몸과 영에 있어서, 그 몸 자체, 영과 혼이 분리될 수 없는 그런 몸 자체(totum)는 성만찬에 계시지 않는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루터주의는 bodily적으로 있다고 주장하거든요. 이게 의식은 거기에 강조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성만찬에서 bodily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에, 그 떡을 함부로 취급할 수 없었다고요. 그래서 떡을 거룩히 구별한 거예요. 그러니까 식전에도 거룩하게 구별하고, 식후에도 거룩하게 구별하고, 그래서 함부로 식후에도 떡을 떼고 남은 조각도 함부로 취급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그 행사 자체를 떡에 관련해서 결국 장식을 해야 된다고요. 또 그것을 실제로 집례 하는 자가 또 거룩해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옷을 뭐, 특별한 옷을 입는다던지, 하여튼 특별한 의식을 요구했단 말 이예요. 결국 그 떡과 포도주를 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의식이 강조되요. 그래서 의식과 말씀의 선포가 동시에 공유되는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이 의식의 요소가 그에게는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 지금 칼스타트가 문제된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우리 개혁교회는 그것과 공유하고 있어요. 공유하고 있는데, 재세례파하고 다른 점은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가 거의 동일시하는 이런 개념으로부터 분리되는 그런 면에서 칼스타트나 재세례파와 다른 점이예요. 그래서 루터를 (?) 차원에서 비판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에서 루터와 다른 점입니다. 이것이 이제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루터의 성만찬 논쟁이라는 것은 단순히 성만찬 논쟁의 한 주제에 제한 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갖는 성경 해석 방법, 성경 상호관계, 그 다음에 성경 전체의 신론과의 관계, 그 다음에 기독론 관계, 그 다음에 다른 의식관계, 예배 형식, 모든 것에서 결국 분리를 또 구별되는 그런 형상으로 발전될 수 밖에 없었어요. 이래서 개혁교회하고 루터교회하고 구별되었던 것인데, 이런 가까운 루터를 존중하지 못하는 칼스타트는 결국, 칼스타트 홀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주변에 루터를 사랑하는 많은 자들에 의해서, 결국 루터를 비판하는, 이상하게 1525년도 이후 루터에 대해서 거리감을 갖는 그런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생겨난다는 거예요. 그들이 바로 대표적으로 재세레파도 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말하는 개혁교회, Reformed 계열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루터와 칼스타트와의 차이를 약간 표현해 주고 있는데, 특별히 의식과 관련해서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데, 루터는 연약한 자를 위해서, 로마서에 있는 표현이든지 또는 고린도 전후서에 있는 표현이든지, 결국 연약한 자를 위해서 “교회 안에 상들의 현존에 대해서 관대했어요” 그래서 예배자가 그 상들을 제거하기를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그대로 남아 있게 되요. 그래서 성전에 있는 모든 성상들, 기타 그와 관련된 것은 전부 남아있어요.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개혁교회는 약간은 더, 십계명을, 루터도 십계명을 해석했지만, 같은 십계명 해석에 있어서 개혁교회는 더 강조를 두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후대까지 이제 굉장히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소위 “lex et evangelium(율법과 복음)문제, 그래서 이제 현대에 와서는 칼 바르트의 바르멘 선언, Barmen Declaration, 이것이 그의 사상에 있어서 일찍이 발굴된 순서가 원래가 evangelum(복음)이 먼저이다. 그 동안에는 lex(율법)이 evangelium(복음)에 앞서는 이런 틀로 되어 있는데(lex et evangelium) 이렇게 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것은(evangelum(복음)이 먼저라는 것) 새로운 것이 아니고, 원래 루터가 이런 정신을 가졌었고, 쯔빙글리, 그 다음에 모든 개혁자들이 이런 정신을 가지고 소위 ‘lex’(율법)을 이해했다고요. 그래서 칼빈의 경우에도 lex(율법)의 해석자리가 기독론이었어요. 또 여기를 보면 율법의 제3사용, 그 다음에 도덕법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특징이 그렇게 된 것은 결국 lex(율법)가 evangelium(복음) 위에 세워져 있다고요.(복음의 기초위에 율법이 있다) 어느 의미에서 evangelium(복음) 안에 inclusa(포함된다)된다. lex(율법)가 복음 안에 포함 됩니다. 그런데 루터주의의 경우는 이것이 항상 이원론적으로 되어있었고, 그 이후에 루터의 경우에도 특별히 evangelium(복음)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복음과 율법이 분리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 급격히 오늘날과 같이 소위 현대, 20세기 초반에 와서, 소위 사회주의 운동이 심각해지면서, ?운동이 있었다고요. 소위 나치주의이지요. 나치주의에서 이것을(복음과 율법을) 완전히 구별을 해 버렸어요. 그래서 복음과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이것이(율법) 이스라엘이고, 이것(복음)은 교회이다. 그래서 이것(복음)이 교회라고 하면 이스라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이 소위, 어떤 의미에서 루터가 처음(시작이라는 의미), 후기에 발전된 것입니다.


루터는 원래 inclusa(포함된다)의 개념인데, 복음 안에 lex(율법)이 inclusa(포함된다)인데, 그것이 1520년대 이후에 이렇게 분리되었어요. 두 원리라고 보아 버렸어요. principium(프린치피이움, 원리)이 두 원리(율법과 복음의 두 원리)라고 보아 버렸어요. 성경에 두 원리가 있고,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두 원리(복음과 율법의 두 원리)사이의 관계이다. 이것은(율법은) 이 복음을 소개하기 위한 어떤 징검다리 역할만 할 뿐이지 evangelium(복음)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생각해 버렸어요. 그래서 이것은 lex(율법)를 통해서 죄를 깨닫는 역할만 할 뿐이지 실제적으로 복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아니다. 그것은(율법) 복음위에 기초한 lex(렉스, 율법)로서, 그 lex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다라는 말이예요. 그래서 그것의(율법) 기능이 3가지인데, 2가지의 기능을 강조한 것은 루터인데, 그러나 제3사용과 관련해서, 즉 율법은 영원히 하나님의 뜻으로서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중생된 이후에도 여전히 율법은, 그러면서 이 성경은 다 바울 사도도 여전히 율법이 십계명이라는 것은 하나의 도덕법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법으로서, 중생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지, 그냥 복음을 소개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몽학선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그 벌써 차이가 생기는 내용이 율법에 대한 강조가 틀려진 것이죠. 율법에 대한 강조에서 우상숭배 같은 강조를, 결국 이런 것은 그 여기는 이성입니다. 이성을 강조합니다. 바이마르 헌법은 이성을 가지고(?), 복음의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이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 바이마르 헌법에서 이것(율법)은 옛날 이스라엘의 법이다. 그래서 그 율법에 강조를 둘 수 없다. 이런 것들이 자기 정당화를 한 겁니다. 과거에 루터가 개혁하지 못했던, 그런 지금 형상이, 성상이 남아 있고, 또 의식이 뭐든 남아 있는 그런 내용들, 하나님을 표상할 수 있는 그런 방식에 있어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 또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고, 그리스도도 형상으로 만들 수 있고, 그래서 교회 건물 안에 그리스도도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십자가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이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이 지금 루터이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남아 있어요.


그것을 정당화, 그 역사적으로 루터가 만든 루터의 영웅주의, 독일 국민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 언어와 그 언어를 발달시키고, 그 바이블에 의해서, 그 ?에 의해서, 독일국가가 형성이 되고, 독일국민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루터의 정신이라는 것은 그가 발견한 이성에 의해서, 그것은 독특하게 evalgelium(복음)과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인데, 그 루터주의가 긴 시대를 통해서 독일을 만들어 냈다는 거예요. 그 독일이 루터의 잘못을 수정할 수 없었던 거예요. 독일 국가주의는 그렇게 결국 이스라엘과 분리될 수 없는, 이스라엘은 다른 그런 장애자들, 정신 박야자들, 이런 것과 같은 위치에서, 또는 유랑아들, 방랑자들, 이런 사람들과 같은 취급으로 취급해서, 결국 독일이 갖는 그런 국민 우월주의, 이런 것에 의해서 희생된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하고 유태인들하고 결국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뿌리 깊은 역사적으로 계속 물고 넘어져서,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해요. 독일이라는 곳에서 지금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해요. 독일신학자들은 루터주의 신학을 계속 쥐고 있는 이상, 거기에 뭐 30% 이상을 가지고 있고, 카톨릭은 그와 비등한 수이고, 개혁교회는 몇%되지 않는, 한 십 몇%정도, 17%, 이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가장 지배적인 루터주의에 있어서는 지금도 늘 진통이, 그래서 이런 주제들, 복음과 율법이라는 주제가 신학적 논쟁으로 계속 되기 때문에, 그런 주제가 영어권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는데, 그래서 그런 주제가 생긴 것이지, 복음과 율법이 취해진 것이지, 원래 미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영국에서도 아닙니다.


그 만큼 2차 대전이 있었을 때 가장 쟁점이 되는 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신학적인 문제를 소위 마치 UN의 가장 어려운 문제로 계속 새로운 문제가 있는 것처럼 계속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입장에 따른 최소한의 입장을 미국이 대변하고, 독일은 또 계속 이것을 버리지 않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처럼, 독일과 미국의 관계는 늘 이렇게 긴장상태입니다. 내적으로 경쟁적으로 첨단과학이 전부 긴장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개발비?를 독일이 집어 삼키냐? 이스라엘이 집어 삼키냐? 이것을 따라서 경쟁이 됩니다. 영국이 집어 삼키냐? 퓨리탄이 집어 삼키냐? 지금은 개발비?는 상당히 독일국가가 쥐고 있어요? 미국사회도 참 어려운 관계예요. 굉장히 복잡해요. 이런 뿌리가 종교개혁시대부터 이렇게 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이라는 것은 현대에서 무슨 이슬람의 전공자, 이슬람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슬람, 코란자체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단입니다. 유대교의 이단입니다. 그런 문제를 풀지 않고 코란 자체가 무슨 특별하게 유태교와 독립적으로 해가지고, 유태인을 죽어야만 마치 이슬람이 성립되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후대에 발전이 되고, 코란 자체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유태인이 하는 해석법을 자기 식으로 전부 바꾸는 그런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같은 계열이지요. 어떤 성경을 해석 하냐에 따라서 유태주의가 되었고, 또 이슬람이 되었고 ,또 그 전부터 이제 기독교가 있는 것인데, 그런 내용으로 늘 역사에 진통이 오늘날 이런 현상까지, 테러주의의 근본 내용까지 이렇게 스며든 것처럼, 이런 소위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문제도, 굉장히 과거에 이런 유형이 있기 전까지는 굉장히 긴박한 그런 문제였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조그만 차이, 그러니까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예요. 여기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해석이 되어 있잖아요. 루터에게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 “루터는 연약한 자를 위해서 교회 안에서 상들의 현존에 대해서 관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배자가 그 상들을 제거하기를 두려워 하였어요” 그래서 그 만큼 신앙의 요소 중에 감정이 남아 있었다는 것죠. 카톨릭 주의도 감정이 많이 남아 있는데, 루터주의도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죠.(“이것은 아직도 카톨릭주의처럼 아직도 신앙의 요소들 중에서 assensus(어센수스, 감정)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대로 “십계명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오직 우상들에게만 관련된 것이요 ‘나의 방에 내가 숭배하지 않는 십자가를 잘 걸었다고 해서 나에게 무슨 혜가 될 수 있는가?”


개혁파와 루터와 재세례파와의 다른 점


이렇게 루터주의의 대표적인 표현이예요. 이 신학적인 요소를 잘 모르고, 개혁교회하고 루터주의하고 근본적인 이런, 뭐랄까 재세례파하고 루터주의하고 개혁교회 이런 차이점이, 개혁교회하고 재세례파하고 이런 점이 동의점이 약간 있어요. 루터와 다른 점은 상 자체를 다 제거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좀 더 급진적으로 나간 것은, radical적으로 나간 것은 재세례파입니다. 다 뒤집어 엎은 거예요. 그래서 결국 뭐예요. 폭력이 생긴 겁니다. 가만히 두지 않은 겁니다. 책상을 그냥 부순 거예요. 너 나가라하고, 그 다음에 앞에 나가서 무너뜨린 거예요. 이것이 급진주의입니다. 교회마다, 즉 독일교회마다, 지방교회마다 radical이 생긴 거지요. 이것이 급진주의입니다. 주로 빈민층, 또는 환경이 어려운 사람들, 농민, 이런 사람들이 주로 봉기형태로 일어난 것이지요. 교회하고 정치하고 분리될 수 없는 그런 억울한 자들에 의해서 교회를 부수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정치는 대상이 없고, 힘이 없고 하니까 먼저 radical을, 실제 표현은 종교적인 표현이니까 그렇게 나온 거지요. 그러니까 거기에 폭력을 진압하는 방식으로 개입하고 이제 루터가 그것을 지원하는 식으로 되니까, radical을 근본적으로 근절하는 그런 의미로 생긴 전쟁이 신교 이후에 생긴 거지요. 이런 신교 운동과 관련해서 그런 다른 차원에서 이렇게 변질된 성격, 이런 급진주의, 이런 것과 칼빈이 분리시킵니다.


칼빈은 절대 이와 같이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원리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무기이고, 그리고 오직 구원의 서정, 거룩이 무기이고, 거룩이 열매요 말씀에 의해서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고 열매이고 이렇게 강조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폭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일을 해서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 칼을 써 서는 안 된다. 오직 무기이다. 신자의 무기이다 했을 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무기라는 것은, 가장 큰 무기로 준 것은 말씀이다. 그가 말씀을 가지고 이겨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재세례파와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십계명 해석에서는 약간의 이런 동의성이 있다는 겁니다. 루터에 대해서 같이 동의하짐 못하는 그런 점이 있는데, 그 점에서 여기에 있는데, ‘십자가가 달렸다고 해서 무슨 신앙에 방해가 되냐’ 이렇게 생각하는 루터에 대해서 거절하는 것이 종교개혁 라인에서 재세례파와 같은 라인에 속하는 점이 그런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우는 칼빈의 시대, 칼빈의 종교개혁 시대, 개혁교회에서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에 건너가서는 약간의 폭력성이 발생해요. 다른 대륙으로 갈 때, 원 정신이 사라질 위험성이 있을 때, 그런 내용이 있는데, 장로교가 형성이 되었을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개혁이 이루어졌을 때, 그때 약간의 폭력이 발생한 것이고, 그것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죤 녹스의 사상 자체는 폭력을 의도한 것도 아니고, 폭력을 권장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종교개혁 때 예정론을 강조했던 그런 인물에 해당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 것들이 약간 장로교에 내용으로 남아 있어서 마치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장로교 요소에 있어서, 역사적으로는 그런 폐혜가 종종 있어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장로교가 결국 칼빈을 가장 기초적으로 다시 회복하는 성격에서 강조를 두고 있는 이상, 이런 칼빈의 선을 아주 잘 지키는 것이 우리가 큰 우리의 유산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칼스트타는 분명히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방이나 길에서 어떤 사에 모자를 벗는 일은 우상숭배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지금 그런 케이스가 많지요. 율법을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군대도 안가지요. 이런 그 재세례파나 급진주의가 종종 해석상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방이나 길에서 어떤 상에 모자를 벗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 있는대로, ‘나의 방에 그 십자가 상을 걸어놓은 것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뭐 그럴 수 있다. 예술이다. 그런 것은 약간의 우리 개혁교회하고 맞지 않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건물 자체에 아무것도 없어요. 항상 아무것도 없어요. 상이 없이요.


그런데 언제 들어온지 모르는데, 한국에서 문화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다 보니까, 물론 에큐메니칼 운동에 찬성하는, 그런 소위 범종교적으로 이미 1950년대 범종교적으로 발달되어 있을 때, 그 때 한국에서 에큐메니칼 생겼을 때는, 거기에 에큐메니칼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신학적 사고를 하지 않는, 통합측 같은 그런 쪽에 빠진 경우에는 결국 루터주의나 다른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 들어왔어요. 예술적인 요소 다 들어왔어요. 상당히 진보적이죠. 한신 쪽은 진보가 아니라 완전히 자유주의이죠. 성경을 부정하고, 그 계열은 모세오경은 모세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이런데서 거기는 일찍부터 다 받아들여서 치리도 받지 않는 그런 그룹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급진주의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장로교 내에서 약간 신사참배 운동에 참여하고 거기에 동의한 사람들이 분리 자체는 우리에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그 신학적인 깊은 생각,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에큐메니칼 의미에서, 다 통합되는 것이 좋다. 범종교적으로 대화하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성인들, 지성인들의 그룹들이 따로 분리되어 형성이 된 통합측의 경우에는, 물론 오늘날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되지요.


오늘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일제시대의 모든 잘못된 것을 청산하자 했을 때는 많이 걸리는 지성인들이 실제적으로 많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 그룹들이 이제 사실상 엘리트그룹 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런 그룹들이 상당히 그런 데에 많이 참여한 것이지요. 그럴 때에 그런 문화, 개방주의이고, 학문에 대해서 보편성을 많이 강조하고, 이런 그룹들이 많이 거기에 실제 참여하고, 또 윤리를 강조하고, 그래서 많이 윤리설교를 하고, 이런데 강조를 두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거기에 속해 있는데, 실제적으로 신학의 근본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도 거기에 참여한 한국의 성격도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인데, 그런 정신에 있어서는 쉽게, 이와 같이 문화와 더불어 많은 외국 유물을 받아들여서, 교회 건물도 이제 최초부터 유리에서도 장식을 두고, 예수님의 상, 십자가의 상, 다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물론 우리 초대교회(한국교회 선교초기)도 십자가상, 강대상 문제가 아래로 내려가냐? 위로 가냐? 이런 것이 상당히 문제가 되었는데, 상당히 미국의 스타일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지금 강대상도 그런 형태가 많이 있는 것인데, 그러나 그런 것은 약간의 복음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고, 또는 근본적인 요소들이 보편적으로 따르는 그런 스타일의 어떤 교회의 모범들, 교회의 건축 모범들, 이런 것들이 쉽게 들어오는 형태였어요.


그러나 이런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칼스타트 신학이었고, 재세례파와의 관계, 또는 루터주의와 우리와의 관계, 또는 개혁교회하고 칼스타트와의 관계, 이런 것이 이렇게 이런 선에서 미묘한 선에 있어서, 어떤 점에서 동의하고 어떤 점에서 동의하지 않는가 하는 것들이 신학적으로 성찰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되었어요. 지금은 전부 보편화되어 있는데, 그러지 못할 까봐, 더 오히려 그 위축감을 가질 정도로 굉장해 졌는데, 실제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인데,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어린이들 주일학교 교재에 있어서 예수님의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고, 십자가를 마음대로 그리고, 웃기는 그림도 많이 그리고, 성경도 조금 웃기게 그리고, 그러면 문화에, 약간 진보주의라고 마음속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예요.


또 그림성경, 그림성경은 실제적으로 유럽에서 루터주의에서 발생하고 발달한 것이지요. 그게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서 들어와서 주일 학교 교재 안에 늘 들어와 있는데, 굉장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대로 소요리문답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갖는 성격이 거기에 약건 반영이 되어 있어요. 물론 그 당시에 계몽주의 사고가 가지는 존 로크의 사상과 같이, 교육에 있어서 원래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와 같은 것이다. 백지와 같은 것이다. 그 백지에서 사회적인 어떤 인과 관계,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계속 그 정보가 쌓여가지고, 교육은 인위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던, 그런 사고에 대해서 이제 경각심을 가지고, 교회가 교육 방법에 있어서도 교회가 독자적인 특별한 어떤 방법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소요리문답이 생기는 그런 것도 있지만, 그러나 칼빈이 소요리를 만들었을 때는 이런 루터주의와 관련에 있어서 이런 미묘한 위치에서 생성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래서 이런 교육의 모든 의식의 문제, 교회 건물문제, 또 우리의 일상생활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의 자세들, 또 교육의, 이런 데까지, 다 이런 종교적으로 어떤 신학적인 사고를 하느냐? 어떤 신학적인 요소를 가지고 분별하느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미묘한 차이를 루터와 칼스타트와의 차이를 통해서 개혁교회 입장을 한 번 표현해 본 겁니다.


4. 물론 여기에 관계없는 말북에서 종교개혁자라고 할 수 있는 “Francis Lambert”의 경우에는 루터주의하고 거의 분리될 수 없지만, 거기에 중용적인, 어떤 지역별로 보면, 루터주의도 아니고 개혁주의도 아닌, 그런 라인도 대부분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말북의 종교개혁자인 램버트의 신학적 입장이 여기에 표현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여기에 보면 종교개혁 입장에서 개혁교회의 독특한 내용도 있고, 그 다음에 루터주의도 있고, 그러나 루터주의를 기반으로 두고, 약간의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약간은 더 가미하는 이런 형태로 있는 것이 이 모양입니다. 그래서 “변형된 모든 것들은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참된 종교개혁의 규범이다. 신앙의 문제를 판단하는 일은 교회에 속해 있다.” 이것은 에라스투주의자(교회는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를 비판하는 것이지요. 루터주의는 아직도 관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관원과 분리될 수 없는 그런 교회의 행정입니다. 그런데 여기를 보면 렘버트 사상에 의하면 “신앙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교회에 속해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램버트는 이제 최초의 공의회라는 것, 시의회와 독립적인 교회의 치리기관, 이것을 제청한 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렘버트는 말로만 그랬을 뿐이고, 그런 사상을 실제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오클람파디우스 경우에 특히 치리기관으로서 장로회를 이런 내용들이 존재했는데, 그 때 장로회라는 것은 관원들이 범죄자를 벌하는 그런 법하고, 독립적으로 교회 치리를 인정한 것이지요. 독립적인 성격입니다.


물론 칼빈도 그렇지만 모든 관원들은 교회법에 종속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것에 어느 정도 카톨릭 안에 늘 있어 왔고,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냐면 살해까지 가능해요. 그러니까 관원의 살인까지 가능하는, 그런 것까지 열려 줄 정도로, 종교에 실제 실정에 관여하는 그런 성격이 카톨릭에 있어요. 역사적으로 상당히 굳어져 있기 때문에, 카톨릭은 어느 국가에 있어서 국가 종교로 발전이 되었을 때는, 항상 국가와 관원과 분리될 수 없는, 한국도 체질적으로 카톨릭은 관원과 붙어 있어요. 한국의 정치세력의 대부분 역사를 보면 이승만이나 이런 예외적인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카톨릭 측이 상당히 많지요. 카톨릭에 들어가야 마치 정치에 있어서 활동 할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이 카톨릭이 교황청 자체가 국가와 같이 나라와 독립적인 성격이 세계에서 있다. 이렇게 때문에 외교적인 성격에서 그런 것만 아니고 원래 체질적으로 그런 카톨릭과 관원과의 관계, 세속정치와의 관계는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이 늘 남아 있어요. 그래서 카톨릭은 정권을 잡게 되면 항상 깊숙이 관여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군주의 살인까지 그것이 신학적으로 가능하도록 하는 이런 운동이지요. 그래서 그 만큼 카톨릭이 국가교회로 발전해서는 그때는 항상 많은 다른 종교가 많은 피해를 당하는 것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제 신교적인 경향이라는 것은 특별히 루터주의도 아닌, 신교적인 경향 중에서 개혁교회의 약간의 요소가 있다면 렘버트의 경우에는 “신앙의 문제를 판단하는 일은 교회에 속해 있다”는 의식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는 같은 영, 같은 신앙, 같은 하나님, 같은 중보자,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그들이 지배되는 같은 말씀에 의해서 결합된 자들의 회중이다” 이런 면에서 통일성, 교회의 통일성을 상당히 많이 신학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런 개혁사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 당시에 대표적인 성격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당시에 루터주의 쪽도 아니고, 지나치게 개혁교회, 칼빈이든지 쯔빙글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 이런 자들이 독립적으로 되어 있을 경우는, 이런 루터도 아닌, 개혁교회도 전적으로 아닌,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 약간의 건전한 요소들만 모아서 신학적 입장으로 개혁을 이루어갔던 그런 인물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5번을 보면 “그 말씀이 참된 열쇠이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불멸의 영원한 제사장이시고 인간과 같이 계승자가 없다” 이것은 카톨릭을 비판하면서 루터주의 입장입니다. 만인제사장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직의 참여자들이다” 우리 나라 경우에도 이런 제도는 상당히 많이 정착이 된 그런 국가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 장로교도 그런 성격이 강하지요. 그러니까 교회 시스템, 교회의 정치 체제에도 이 삼직론이 반영이 되어 있고, 또 한 그리스도인이 사회생활을 할 때도, 삼직론을 가지고 있는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상당히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틀과 비슷한 그런 요소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유산은 물론 새로운 것이 아니고, 루터의 유산이고, 또 그 전에 종교개혁의 선행자들, 유클리프나 그 전에 그런 사상들에 의해서 종교적인 유산, 과거에 루터 이전에 종교개혁자들 이런 자들의 유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내용이 되겠지요. 이런 그 약간의 종교개혁 시대일지라도 신학적인 강조점이 약간 차이가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분별이 좀 있어야 그 다음에 우리가 기독교 강요를 읽더라도, 기독교 강요에 있어서 무엇이 칼빈에게 독특한가? 그렇지 않고 다른 요소는 다 범기독교적으로 동일하거나 아니면 루터에게 동일한 것이고, 그런 것이고, 무엇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가? 그 점을 초점을 잘 맞추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십계명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루터에게 다른 점이 이런 점이 있는 것이, 이제 바로 그 초점이 이런 접근을 해야 그때 이제 칼빈이, 아 그것이 칼빈의 주된 개혁교회의 유산이 어떤 형태구나 이런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미묘한 구분이 어디에서 차이가 있는가를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쯔빙글리하고 루터주의하고의 관계를 통해서 이제 어떤 성경을 접근하는 방식, 신학적인 접근의 내용에 있어서, 또 체제에 있어서,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물론 쯔빙글리의 경우에도 자기 자신의 독자성을 강조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도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1517년에 소위 95개조항을 가지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대외적으로 확고히 드러냈던, 그런 루터 이전에 자기 자신도 이와 같이 오직 루터와 독립적으로, 말씀만 복음만 설교하기를 시작했다고 특별히 강조합니다. 또 공적으로도 루터와 독립적으로 또 루터를 알기 전에도, 쯔빙글리와 카피토, 같은 바젤에서 공부한, 쯔빙글리는 비엔나에서 거쳐서 나오지만, 공부를 했지만 활동하는 영역은 상당히 쯔빙글리와 카피토가 같은 영역에서 활동했는데, 그 때도 여전히. 두 사람이 루터가 알려지기 전에 교황을 거절하고 서로 교제하는 일에 있어서 같이 하였던 그런 내용을 선포하는 일을 보게 되지요. 그런 자로서 쯔빙글리가 루터에 대해서 듣는 내용들은 이단 루터, 이단루터, 또 쾰른대학과 루방 대학으로부터 멸시된 루터, 또 교황청으로부터 멸시된 루터, 이런 소식만 계속 들었어요. 루터의 소식을 들었어도, 그런 쯔빙글리, 루터의 그런 것이 자기에게는 약간은 그 거리낌이 되는 그런 내용이지요. 또 많은 학자들처럼 쯔빙글리는 루터의 새로운 책에 대한 소식도 많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또 많은 학자들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원인인 대해서 글을 쓴 내용도 들었어요.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루터에 대해서 들은 이후에, 그가 스스로 그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그리고 쯔빙글리 자신은 루터의 출판된, 적은 출판된 책을 읽었고, 또 다른 동료와의 여러 편지교환에 의해서 최근의 사실들도 소문으로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그 자신은 이미 정신적인 의미에서 독립적인 자이었고, 그래서 쯔빙글리는 자신을 표현하기를 자신은 전혀 그에게 의존하거나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그가 처음 그의 목회의 과정에서부터 그는 아무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래서 쯔빙글리가 속해 있는 그 그룹들중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루터에 관해 들었지만 전여 의식하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이 루터주의라고 오해하는 경우인데, 루터가 쓰는 방식으로 동일하게 너가 설교하고 있다. 이렇게 함께 소문과 함께 평가를 받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있었어요. 오히려 그때 표현하기를 자기 자신은 바울이 썼던, 바울이 기록했던 대로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설교한다. 오직 참으로 바울만이 아니고, 바울의 것보다도 오히려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한다. 그래서 나는 ‘루터의 이름을 받기’를 거절한다. 이렇게 했어요. 그러면서 그 이유는 나는 그의 가르침을 전여 읽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톨릭주의자들이 쯔빙글리가 루터주의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루터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다. 그 없이도 하나님은 그 자신의 독립적인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루터에 대해서 쯔빙글리가 이런 독립성을 자신이 늘 강조했어요. 그래서 루터는 1545년까지 루터는 살았지만, 쯔빙글리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1531년에 떠났어요. 그래서 그 제자인, 물론 사위관계인 블링거가 그의 유고집을 내기도 하였는데, 그런 개혁교회의 중요한 인물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지금 루터와의 대화 내용이 여기에 표현이 되어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대화 내용에 참여한 인물 중에서 쯔빙글리 편에서는 바젤의 오클람파디우스(Oecolampadiud)가 있었고, 스트라스 부르그(Strasburg)에는 부쪄(Bucer), 하디오(Hedio), 누렌베르그(Nuremberg)에서는 오시안더(Osiander), 이런 사람들이 참여 했는데, 주로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오클람파디우스(Oecolampadiud)와 쯔빙글리가 같은 선에 있었고, 루터는 거의 홀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나머지 사람은 그의 측근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오클람파디우스(Oecolampadiud)의 견해와 쯔빙글리의 견해와 (반대편에서는) 루터의 견해를 따라서 논쟁이 정리되는 이런 의미입니다. 물론 이 논쟁은 여기 있는 표현대로 카톨릭은 계속 일치가 되고 있는데, 소위 신교 쪽에서는 일치가 되지 않고, 분리되기 시작한다고요. 그러니까 이미 ‘칼스타트’도 그렇고, 재세례파의 급진주의도 발생하고, 또 쯔빙글리도 계속 자기의 독립성만 강조하고, 루터와 하나 되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결국 관원인 젊은 Philip이, 즉 Hessen(헤센)의 제후인 젊은 Philip이 결국 카톨릭주의가 번성해 가는 것에 위기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루터주의자들과 쯔빙글리를 대표하는 개혁주들 사이에 서로 화합할 수 있도록, 그래서 최종적으로 성만찬만 해결되면 다른 것은 다 일치되어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치운동, 이런 운동을 소위 관원이 나서서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초대했던 사건이 말북(Marburg)에 있는 ‘회의’라고 할 수 있지요. 이때 이제 그 회의가 단순히 신학적으로 그 당시에 근본적으로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를 이것만 드러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사건 이후에 개혁교회하고 루터주의하고 확고히 어떤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실제적으로 갈라졌는가?를 확고히 하는 그런 자리가 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말북(Marburg)의 논쟁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실제적으로 종교개혁이 루터주의하고 개혁교회하고 갈라지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이 어떤 점에서 신학적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게 되었는지,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보면서 그 다음에 칼빈이 그 논쟁에 있어서 어느 편에 속해 있고, 어느 편에 속해 있는 신학적인 라인이 칼빈의 신학의 어떤 독특성을 나타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계속해서 확인을 해 보면서 우리가 기독교 강요의 모든 자료를 읽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되지요.


혹시 질문 있어요?


질문 : 루터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 안의 형상들에 대해서, 그 현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사상 전반에 있어서는, 성상숭배가 뿌리가 있었을 터인데요? 그 뿌리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쭉 카톨릭에 이어져 왔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마리아 숭배나 이런 부분들이, 예전에 로마 시대부터 쭉 내려오던 서방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아닐까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묻고자 하는 요지는요? 루터가 가지고 있었던 사상들, 그런 부분들이 과거로부터 내려 왔었던 어떤 역사적 뿌리가 있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답: 그러니까 그 뿌리는 있는 것이 아니고, 루터주의도 종교개혁 선에서 1520년대 많은 저서가 있지 않겠어요! 그 저서들의 경우에는 대 부분 신교가 동의하는 모든 원리들이 다 그에(루터) 의해서 완성이 되었는데, 최종적으로 역사의 진행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그가(루터)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요소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와 같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상당히 유화적으로 발전이 되었다. 이런 의미이지요. 그가 종교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를 다 원리적으로 분명히 표현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리적인 면에서 같이 카톨릭을 비판하는 종교개혁자들이 다 그에 편에서 동의하고 일어섰던 것인데, 점점 루터가 가면 갈수록 관원과 타협성을 점점 이루면서, 그가 초기에 순수했던 내용들이 약간이 이렇게 퇴색해 되어갔다는 거예요. 퇴색의 과정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점진적으로 이렇게 급진적으로 가지 않는 방향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이런 형태로 되다 보니까? 결국 그것이 근절되지 (않았어요).


마치 쉽게 말하면, 우리가 출애굽때, 가나안 정복 때, 가나안의 남은 백성을, 우상숭배자들을 다 정리하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정리를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그것으로 인하여 뿌리가 되어서 큰 고통을 당했잖아요. 그런 것처럼 마치 루터가 이제 그런 어떤 역사적인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해석을 해야 겠지요. 그러니까 원리적으로 이미 루터에 의해서 발견된 내용이고, 루터가 비판한 그런 내용이, 신교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고, 개혁교회도 순수성을, 즉 초기의 루터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이어가는 이런 성격이고, 루터의 타락을 이어가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라는 점에서 개혁교회의 구별된 점이 좀 있지요. 이렇게 해석해야 될 것이지요. 그래서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뿌리는 근원적으로, 마리아 숭배든지, 성상숭배, 이런 것들은 근원적으로 이제 소위 우상숭배에 가까운, 성경으로부터 벗어난, 오직 성경과 다른 전통에 의해서 형성이 되어서 역사적으로 굳어진 그런 내용인데, 지금도 보존하는 것을 이렇게 근절해야 한다. 오직 성경에 의해서 근절해야 한다. 이런 원리적인 면에서 다 루터가 세워 놓은 것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카톨릭 안에 있는 뿌리를 루터가 제거했는데, 그 제거의 순수성이 퇴색이 되었다는 이런 말이지요. 그렇게 이해를 하면 좋겠습니다.


질문 :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쓰면서, 왕에게 쓰지 않았습니까? 왕에게 쓸 때, 왕이 개혁주의를 재세례파로 인식하고 탄압을 했기 때문에 변호한 것으로. 답: 그러지요. 그것은 뒤에 헌사를 하기 전에 직접적인 배경을 할 때, 그것을 좀 이야기 하겠습니다.


질문 : 재세례파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답: 칼스타트의 계열이지요. 급진주의이고요. 질문 : 뒤에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답 : 운명은 결국 루터주의에 의해서든지, 카톨릭에 의해서든지 모두에 의해서 이제 전쟁이 일어나서 늘 갈등이 이루어졌지요. 그러니까 봉기를 이제 주로 루터 편이던 관원이 주 세력 이잖아요. 카톨릭은 더욱 더 그렇고, 그러니까 재세례파는 실제적으로 세속정치에 의해서 많은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 무리들이 여러 가지 그룹들이 있어요. 그 중에서 크게 오랫 동안 남아 있는 그룹들이 스위스 쪽이나 남부 쪽으로 피신한 무리들이 뒤에 크게 영향을 끼칩니다.


질문 : ..?. 공과대학에서 ?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답 : 그러니까 우리가 십계명을 해석하는 주 원리가 있잖아요. 그 주 원리에 의해서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교재도 그런 방식이 되었는데, 되도록 이면 우리가 이제 루터주의가 가지고 있는 성상 숭배 같은 것,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을때도, 그것이 신론을 파괴하는 역효과를 내는 그런 교육은 되도록 피해야 겠지요. 그런 것은 있을 수 있어요. 영화를 예를 든다면 그리스도를 표현할 때, 대부분 좋은 영화인 경우, 경건한 경우는 사람을 감추잖아요. 그러나 오늘날 카톨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을 가장 리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인물과 어떤 상을 만들어내어서 그냥 울리는 거예요. 어! 그래서 지금 영화가 상당히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은 그런 점이 아니예요. 그러나 카톨릭이 그것을 제작한 거예요. 그것은 신교는 당연히 그런 색채와 신학적 요소를 배제하고 정확히 읽어야 내는데,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 목회자들이 감동과 감화를 주므로 전부 추천해 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전부 카톨릭에 오염이 되어 버렸어요. 카톨릭은 이제 그것이 신학적 요소에서 굉장히 핵심적인 거예요. 이것은 나중에 믿음의 정의가 어디에 있는가? notitia인가? assensus에 있는가? fiducia에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칼빈을 강의할 때 아주 지루할 정도로 이야기 할 거예요. 믿음의 요소와 칼빈의 종교개혁은 어떤 데에 있는가? 그런 소위 아주 중요한 요소를 계속 공부하게 될 거예요.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역사 선상에 진리가 순수하게 주의 역사로 일어났지만, 그러나 인간이 많은 진리의 내용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것을 혼합함으로 말미암아 시대가 길게 가면 갈수록 인간의 퇴색된 모습대로 진리가 또한 퇴색되는 그런 역사를 오늘 또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도 순수한 그 자체를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만, 그러나 그 역사를 발견을 해야 그 순수성이 겨우 발견이 되는 그런 역사적인 우리의 진리에 대한 소원이 나타나는 줄 믿사오니,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칼빈 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운 그런 이해가 있는 가운데 칼빈이 갖는, 그런 역사적으로 깨닫는, 루터가 개혁했던 내용했던 순수성으로부터 타락했던 모습들, 그리고 우리가 쉽게 누구나 빠질 수 있는 그런 인간의 오류들을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제거하는 우리 자신의 비판능력을 키우는 그런 자리가 되도록 축복해 주시고, 또한 같은 실수를 우리가 역사 선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서 행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는 그런 계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출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FB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