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 Reviews/Korean

한국교회 안에 있는 비기독교적 세계관의 흔적들

Bavinck Byeon 2018. 4. 21. 03:04

한국교회 안에 있는 비기독교적 세계관의 흔적들


(목회와 신학, 2000년 10월호)



세계관의 변화가 없는 회심


서구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에 대해서 두 번 놀란다고 한다. 첫 번째는 물론, 한국교회의 괄목할만한 교회성장 때문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유래 없는 교회성장을 경험하였다. 두 번째는 인구의 25퍼센트, 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놀란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는커녕, 교회에서 지도적인 직분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교회성장에 치우쳐왔으며 그 결과 상대적으로 성도들에게 성숙과 성화를 강조하지 않았다. 즉 성경적 세계관이 성도들에게 체질화되도록 양육하는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가치체계(value system)와 행동양식(behavior pattern)을 갖도록 했지만 본질적인 부분인 세계관(worldview)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일성수, 십일조, 술 담배의 금지 등 외적으로 기독교적인 틀은 갖추게 하였지만 보다 깊은 곳에 있는 세계관을 터치하는데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화의 외적 카테고리인 가치체계와 행동양식만 변화시키고 세계관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결과로서 혼합주의와 명목신자를 양산해내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를 급성장시켰던 요인들은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기층종교는 샤마니즘이며 거기에 불교와 유교가 더해졌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기층종교들 위에 더해졌고 이들 종교들의 세계관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샤마니즘적 권위주의


한국교회와 한국의 그리스도인에게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비기독교적 세계관 중에 가장 뼈아픈 것은 권위주의이다. 권위주의는 한국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인데, 그 뿌리는 샤마니즘과 유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근래에 와서는 군사문화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샤마니즘에서 샤만의 권위는 주술적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샤만은 주술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의 현세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기복신앙의 중심에 서 있다. 샤만은 모든 신들의 위에 있는 어떤 메카니즘적인 법칙에 입각해서 신들의 능력을 조종하여, 인간의 현세적 유익들, 이를테면 치병, 부귀, 장수 등을 가져올 수 있는 메카니즘적인 기술을 터득한 자로 간주된다.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샤마니즘의 영향으로 "능력"에 대한 숭배와 능력에 입각한 권위주의를 만연하게 한다. "능력의 종"이라는 말이 한국교회에서만큼 애호되는 교회는 이 지구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능력에 입각해서 "큰 종"과 "작은 종"이 구별된다.


샤마니즘의 특징은 진리보다는 능력에 그 관심이 있다는 데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이 진리에 입각했나 보다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어떤 방식으로 했든지 능력을 입증해보일 수 있는 사람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종종 한국교회에서는 "사람을 얼마나 모았나"로 평가되기도 하며, 병자를 일으킬 수 있나 없나 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교회에서는 현세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곧 "능력의 종"이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파워 숭배는 책이름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파워," "능력"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매력을 주고 한번 들쳐보게 만든다. 능력은 곧 성공주의와 관련되어있다. 어찌되었든 교회의 사이즈가 작으면 능력이 없는 종으로 간주되어버린다. 샤마니즘의 "큰 무당" "작은 무당"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샤마니즘적 요소는 교역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심방을 와야 좋아하지 부목사나 전도사가 심방을 오면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큰 종"이 와야지, "작은 종"은 아무래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치병에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단교주도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고 타종교에서도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의 기원이 중요한 것이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지만 능력이 곧 복음 그 자체는 아니다. 능력은 복음의 부산물일 수는 있으나 복음의 핵심은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죄사함의 은총에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종종 능력이 곧 복음으로 대체된다.


한국교회에서는 목회자는 평신도보다도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목회자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신들과 사람들 사이의 매개자로서의 샤만의 역할을 그대로 목회자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샤마니즘적인 권위주의를 가지고 심지어 성도들을 협박하는 목회자도 없지 않아 있다. 예를 들면 극소수이긴 하겠지만, "네가 우리 교회를 나가면 저주받는다"는 식의 말도 되지 않는 협박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통한다는 것은 샤마니즘의 풍토 때문이다.


유교적 권위주의


권위주의의 또 한가지 뿌리는 유교에 깊이 박혀있다. 유교의 가부장적 질서가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샤마니즘적 기독교인일 뿐아니라 유교적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 기일분수(氣一分殊) 식의 논리는 한국사회 안에서 피라미드식 서열구조를 정당화시켜왔는데 이러한 가부장적인 서열의식은 교회 안에도 그대로 팽배해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서열(hierarchy)과 질서(order)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 목사 밑에 장로, 안수집사, 집사, 평신도의 순서로 서열이 매겨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장로가 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에게 실수로 집사라고 불렀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다. 목사가 된지도 모르고 실수로 전도사라고 불렀다가는 절교 당할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유교적인 신분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도 신분과 직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신분은 서열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직분은 서열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직분은 은사에 따른 수평적인 질서이지 수직적인 서열이 아니다. 목사는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교회의 질서 상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피라미드적인 구조의 최정점에 있는 자는 아니다. 교회를 수직적인 계급구조로 보았을 때 많은 문제가 나타난다. 우선 목회자는 서로 교제하고 공급할 수 있는 상대가 없기 때문에 탈진(burnout)되기가 쉽다. 특히 체면문화(shame culture)인 한국에서 서열상 최고 어른인 목사는 자신의 약점을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서열구조에서 목사는 특별한 존재, 구약적, 카톨릭적 사제가 되어지고 평신도와 구분되어진다. 이것은 만인제사장이라는 성경적 세계관에 배치되는 것이다. 이렇게 목사가 제사장이 되어지면 체면문화인 한국의 상황에서는 바리새인적인 위선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즉 목사이기 때문에, 장로이기 때문에 거룩한 "척"하는 태도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에 신령한 목소리(holy voice)를 내어야 하고 자신을 은폐해야 한다. 한국처럼 약점 은폐형 문화에서는 약점 노출형 문화보다는 훨씬 위선적이 되기 쉽다. 한국기독교인들이 이중적인 삶, 즉 교회에서의 삶과 직장에서의 삶이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바로 체면문화와 약점 은폐형 문화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적 서열구조는 목회자 자녀의 문제도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목회자 자녀는 부모의 체면을 깍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을 강박관념으로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말 대신에 "목사 자녀로서 그렇게 하면 부모의 체면이 뭐가 되겠냐" 라는 논리는 바로 권위주의와 체면의식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의 종"이라는 말도 계급구조와 제사장주의를 강화시킨다. "주의 종"이라는 말이 목사로서의 소명을 마음에 다지기 위해서라면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한국에서는 권위주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만일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집사도 주의 종이다. 집사를 교회가 세웠다면 목사도 교회가 세운 직분이다. 목사를 하나님이 세웠다면 집사도 하나님이 세운 것이다. 또 강단 대신에 제단이라는 말이 교회라는 말 대신에 성전이라는 구약적 표현을 선호하는 것도 한국 기독교인들이 제사장주의적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권위주의의 책임은 목회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가 샤마니즘과 유교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는 신분  자체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가부장적인 권위란 단지 "아버지"라는 신분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목사라는 직분만으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다윗이 심지어 하나님이 버린 지도자인 사울 왕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지도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존중했던 것을 본받아야 한다.(삼상26:9) 그러나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직분 그 자체만 가지고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적 권위는 신분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충성스럽게 직분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다.


권위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비의 마음도 없으면서 아비노릇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인 사람들 중에 아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아비처럼 권위적으로 노릇 하는 것은 비록 많은 폐해를 끼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봐 줄만하다. 가장 심각한 종류는 바로 아비의 마음 없이 아비 노릇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태도는 바로 아비의 마음을 품고 종처럼 행동하는 것이다.(살전2:6-12)


권위주의는 많은 폐해를 끼친다. 우선 목회자가 탈진된다. 그리고 목회자들 간의 동역 관계가 힘들어진다. 모든 것이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웃교회와도 동역 관계가 아니라 경쟁 관계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이웃 교회는 또 다른 정점을 가진 또 다른 피라미드식 계급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위주의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어렵게 만든다. 계급구조에서 직분은 신분, 즉 기득권이 되어버리며 아무도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신학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어도 기득권 때문에 교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권위주의는 무한 팽창적인 성장주의, 초대형교회주의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계급구조에서는 교회의 사이즈(size)가 클수록 큰 권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샤마니즘적 권위주의가 능력 지향적이라면 유교적 권위주의는 권력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의 공통점은 파워(power)라는 것이며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데 목적이 있다.


권력 지향적일 때에는 진정한 교회개척의 모델을 세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정상적인 모델이라면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즉 교회가 성숙해서 많은 사람들이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감당할만한 영적 성숙도를 갖게 되었을 때 일부를 분립해서 교회를 개척하여 더욱 전도와 양육을 감당할 수 있도록 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인 서열구조에서는 목회자 혼자서, 혹은 장로 한사람과 함께 람보식 개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교지에서 권위주의는 평신도 선교사들을 낙심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선교지를 떠나게 하고, 사역 상 필요하지도 않는데도 단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감으로써 시간적, 재정적 손실을 가져온다. 사실 한국교회만큼 목사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를 구분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선교지에서 많은 갈등을 만들어낼 뿐아니라 평신도 선교사들이 선교사역을 위한 모금하는데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게 한다. 그러나 지금 세계가 평신도 선교사를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하나님 왕국의 차원에서 권위주의에 지불하는 금전적 시간적 손실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권위주의는 원로목사의 문제와 세습의 문제를 야기한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교회를 개척하거나 성장시킨 원로목사는 서열구조의 정점에서 자신이 구축해놓은 왕국과 꿈을 계승해나갈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자신의 꿈과 방식을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담임목사 직분을 물려주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간섭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신임 담임목사와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 때문에 가장 안전하게 생각되는 자기 자식에게 세습할 생각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는 달리 세습제의 봉건왕조를 거친 나라이다. 그리고 가부장적 혈연적 유교사회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다. 한국인은 세습제에 대해서 아픔과 저항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들이 아무리 영적으로 훌륭하고 탁월한 사람이라고 해도 한국적 상황에서 세습은 덕이 되지 않는다.


성공주의


한국교회의 또 다른 병폐는 성공주의라고 할 수 있다. 성공주의도 샤마니즘과 유교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통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은 결국 자신의 신분(身分)과 재력(財力)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골자로 하는 현세기복적인 샤마니즘 신앙과 연장선상에 서 있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이라 할 수 있는 입신양명의 부담감도 모든 한국인들의 의식에 뿌리깊게 내려있다.


이러한 성공주의는 교회에서는 숫적 성장을 강조하는 것으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물론 건강한 교회는 숫적으로도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숫적으로 성장한다고 다 건강한 교회는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성공주의와 관련된 결과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성공하면 된다는 의식이 있다. 어떤 신학과 어떤 방법에 입각해서라도 교회를 성장시키기만 하면 능력있는 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제일주의는 60, 70년대의 한국 사회의 분위기, 즉 "하면 된다"는 식의 경제성장중심주의와 교회성장학파의 영향이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주의는 마땅히 거쳐야 할 절차들을 무시하고 조급하게 결과를 내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시적이고 조급한 성과를 요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병폐는 많다. 한국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등의 붕괴를 가져온 의식구조는 교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파송 교회는 선교사에게 가시적이고 조급한 결과를 요구한다. 그렇게 되면 압력을 받는  선교사는 착실하게 정도를 걸으면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빨리 외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서 물량공세를 통한 프로젝트 중심적인 선교를 하게 된다. 물론 프로젝트가 전혀 필요 없다거나 무익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궁극적으로 현지인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면 혼합주의와 명목신자를 양산할 수 있다. 나아가서 교회의 조급한 성공주의는 선교사로 하여금 정직성을 잃도록 유혹할 수도 있다.


성공주의는 결과주의를 가져오고, 결과주의는 정당한 과정을 무시하고 대충대충하는 적당주의를 낳는다. 교회에서 시도하는 많은 프로젝트들이 과시적인 일들이고 전략적 사고의 결핍을 드러낸다. 선교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전략적 사고를 하지 않고 결과만을 위해서 대충대충 외적인 것을 꾸민다. 이것이 조급성과 결합하면 외화내빈 내지는 대형사고를 불러온다. 좀 느려도 내실을 기하는 사고가 부족하다. 이러한 조급성은 쉽게 가시적인 결과를 내보려는 태도로 나타나는데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를 후원할 때에도 끝까지 꾸준하게 잘 후원하지 못한다. 적당주의의 조급성은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조된 목회자를 양성하는 무인가 신학교를 양산한다. 교육부의 인가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이다.


성공주의의 특징은 실속보다는 외적으로 드러내 보이는데 치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로 하여금 "학위 병"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교회의 외적인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서 건축과 부동산에 치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성공주의는 권위주의와 결합하여 신분주의로 나타난다. 교회 직분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자리"(position)로 생각하게 한다. 한국사람들은 "장" 자리에 앉아야 직성이 풀린다. 이러한 풍조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총회장, 노회장, 하다못해 당회장이라도 되어야 한다. "당회장" 당회 할 때에만 당회장인데 담임목사라는 친근한 용어를 놔두고 주보에 번듯이 당회장이라고 표기해야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장로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리" 자체를 중요시하는 것은 계급중심적인 유교의 산물이다. 자기 조상이 영의정을 하고 이조판서를 했다는 것이 자랑이 된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무엇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자리는 하나인데 모두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니 연합과 동역이 될 수 없고 자주 비열한 경쟁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교의 영향으로 한국인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도 "큰 일"이 아니면 하지 않으려고 한다. 큰일에 대한 욕심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환경이 안돼서 체념하고 있을 뿐이다. 서구의 그리스도인은 매우 하찮아 보이는 작은 일에도 충성스럽게 꾸준하게 평생을 감당하는 신실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들은 큰일만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자기에게 하찮은 일이 주어지면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서로 큰일을 하려 하고 헤게모니를 쥐고 큰 자리에 않기 위해서 싸운다. 그래서 한국선교사들의 선교지 탈락 이유 중 첫 번째가 동료 선교사와의 갈등이다. 다른 나라 선교사들도 서로 싸우지만 특히 한국 선교사는 더 심하게 싸운다.


주보나 인터넷의 웹사이트에 보면 담임목사의 이름과 사진은 크게 나온다. 그러나 부교역자의 이름이나 사진은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풍토에서 평생 부목사,  교육목사 할 사람이 나올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목사나 교육목사로 평생 남는다면 그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서 부교역자는 담임목사가 되기 위한 수련장이 되기 때문에 전문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성공주의는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한다. 팔방미인을 한국인은 존경한다. 작은 하나의 일에 전문성을 가지는 것을 좀스럽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성공주의는 쓸데없이 간만 부풀게 해서 늘 "큰 것"만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생각은 흔히 "비젼"이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야심과 비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교회는 모든 것을 혼자 독자적으로 다 하려고 한다. 전문적 지식과 노우하우(know-how)를 필요로 하는 일, 예를들면 해외선교 사역과 같은 것도 아무런 전문 선교기관의 도움이나 조언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독자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래서 선교지의 현지인 교회를 한국 모교회의 이름을 딴 지교회로 만들어버린다.  이러한 전략부재의 선교를 통해서 선교지에서 미치는 해악은 지대하다. 한국의 대재벌이 아이스크림에서 자동차까지 다 하려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성공주의는 소위 "뜨는 것"을 추구하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이 뜨기를 원한다. 선교대회나 무슨 대성회에 가보면 서로 단상에 서려고 온갖 로비가 난무한다. 그래서 합당한 실력을 갖추기보다는 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강구하게 된다. 그 결과 실력도 없이 뜨는 경우도 있는데 실력이 없이 뜨게 되면 금방 들통이 나기 때문에 탈진하게 된다.


성공주의와 신분주의는 후임자를 양성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에 인색하게 한다. 오히려 성장하는 것을 경계하고 싹을 잘라버리고 밟아버린다. 왜냐하면 성장하고 성공하면 경쟁자가 되어버리고 자기 밑에 있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도자는 카리스마적인 유능한 지도자는 많지만 사람을 키우는 지도자는 매우 드물다. 그러니 마땅한 후임자가 없고 자기 아들 밖에는 그 자리에 앉힐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성공주의 출세주의는 최고주의를 가져온다. 최고 실력은 없으면서도 최고의 포지션에 앉으려는 것이 최고주의이다. 그래서 동네의 한 귀퉁이에 있으면서도 중앙교회이고, 동네에서 가장 작은 교회라도 제일교회이다. 한국에서는 2인자는 바보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아무도 2인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모두 담임목회만 하려고 한다. 조그만 일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히 섬기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한국선교단체에서 행정간사들은 대체로 오래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선교의 "큰" 비젼을 받았을 때에는 "그 따위" 자질구레한 일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주의, 최고주의는 작은 자로서 섬기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 왕국의 차원에서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목회자들의 가정문제 또한 큰 일을 위해서는 가정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유교식의 선비 사고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큰 일을 하는 목회자가 가정을 돌아보는 것은 소심한 것이고 큰 일할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작은 일이라도 충실히 감당하는 무명용사의 신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명(無名)의 신학은 양명(揚名)을 가치로 삼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나오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든 성공해보겠다는 한국인의 성공주의는 교회에서 "무댓뽀" 믿음으로 나타난다.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무댓뽀"와 참된 믿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된 믿음이 하나님이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면(히11:8-11) 무댓뽀는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은 것을 자기 확신으로 믿는 것이다. 이러한 무댓뽀 믿음은 돈 한푼없이 교회건축을 시작하게 해서 그 결과 교회가 빚더미에 앉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나타난다. 물론 돈 한푼 없어도 하나님이 약속이 있다면 믿음으로 시작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도 없는데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종종 무댓뽀가 믿음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는 자는 믿음이 없는 합리주의자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선교지에서도 무댓뽀 믿음을 가진 선교사들이 저지르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국인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매우 정치 지향적이다. 다원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단원적인 가치만 인정된다.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지 결국은 국회위원에 출마하는 것이 입신양명의 궁극점이다. 왜냐하면 유교에서의 입신양명은 결국은 치인(治人)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으로 한국교회에는 정치성이 강한 목회자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고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흩뜨리고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어버린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노회에서, 총회에서 잘 싸우는 가장 큰 원인은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적 풍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은 단일 문화, 단일언어, 단일 민족인데 이것은 장점도 되지만 문화적 융통성에 있어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단원적인 흑백논리적 태도는 교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자신과 다른 것을 다르다고 보지 못하고 틀렸다고 보는 것이 한국인의 특성이다. 이러한 극단적 의식구조가 신분주의와 성공주의 그리고 정(情) 문화, 집단의식과 결합했을 때 심각한 집단적 대립을 가져오게 된다. 죄가 아닌 것은 다양성으로 인정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너무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싸운다는 것이 문제이다. 진리의 문제라면 피흘리기까지 싸워야겠지만, 한국 기독교인이 쉽게 싸우는 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닌데도 마치 그것이 진리의 문제로 느껴지는 편협함에 있다.


정(情)과 체면의 문화


한국의 정(情) 문화는 교회 안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물론 교회 안에서 더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 사람에게 애정이 더 많이 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모른다. 문제는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례하고 무관심하다는데 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과 관심을 가지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원래 정문화로 대변되는 한국인의 관계중심성은 농경사회와 유교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인(仁)은 가까운 관계로부터 점점 사회적으로 확대되어나가는 관계중심적 윤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가까운 사람에게는 예의를 차리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례하기 쉽다. 그리고 대중적인 공공질서 의식도 약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정문화 때문에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서도 끼리끼리 친한 사람끼리만 모이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에 얽힌 파당성은 한국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은 체면 문화권(shame culture) 이다. 한국인의 체면의식을 강화시킨 것은 유교의 예(禮)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는 체면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신분주의와 성공주의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친구들은 다 장로가 됐는데 자기만은 집사로 남아있으면 영 체면이 서지 않고 민망하다. 그래서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로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심지어 제도적으로 장로라는 직분이 없는 침례교에서도 장로라는 직분을 두는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체면의식은 목회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친구 목사는 "큰 목회"를 하는데 자기는 "작은 목회"를 하면 영 체면이 깎인다. 그래서 순수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에 덧붙여서 자기의 체면이라는 불순물이 끼게 된다. 그래서 늘 비교의식과 열등감,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예민한 체질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열등감을 이기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도 않은 학위를 따든지 꼭 필요하지도 않은 건축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뭔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상가건물에 있으면 영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체면의식은 한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바리새적으로 만드는 위험이 있다. 체면 때문에 헌금하고 체면 때문에 교회 행사에 얼굴을 내밀고 체면 때문에 찬양시간이나 기도시간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게 한다. 장로가 대표기도를 할 때는 더듬거리지 않고 줄줄, 좀 길게, 메모를 안보고 해야 체면이 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계관 운동은 체질 변화, 성숙, 갱신의 운동이다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권위주의, 성공주의는 바알적 신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모든 비성경적 세계관과 가치체계, 그리고 행동양식이 배태된다. 위에서 열거된 예들은 한국교회 안에 있는 비성경적 세계관의 일부에 불과하다.


세계관 운동은 기독교 학문 운동과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어왔기 때문에 지적 운동의 성향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세계관은 단순히 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지, 정, 의 모든 영역에 걸쳐있는 무의식적이고 무의도적으로 몸에 배어있는 존재방식이고 체질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변화는 단순한 인식이나 지식의 전환을 넘어서 삶의 존재방식이 변화는 것이고 체질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성숙,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성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28:18-20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복음을 전파하는 회심운동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이 구절을 지상명령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단순히 전도와 회심의 차원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문화명령이기도 하고 성화의 운동이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들 가르쳐 지키게 하라" 라는 말씀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며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대한 명령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숙과 문화변혁에 대한 명령이기도 하다. 그리고 회심과 성화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형상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있다.


세계관 운동은 한국교회의 갱신과 체질변화 운동이기도 하다. 이것은 비성경적 세계관에 의해서 깊이 오염된 한국교회를 갱신시키고 성숙시키는 운동이다. 세계관 운동은 비성경적 세계관을 교회와 그리스도인 안에 가라지로서 뿌려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영혼을 잃어버리게 하는 사단의 역사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세계관 운동은 단순히 지적인 운동이 아니라 영적전투이며 영적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접전이 세계관의 전쟁이라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료출처 / GM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