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 Reviews/Korean

기독교 강요 특강 VI - 김영규 교수

Bavinck Byeon 2018. 4. 21. 02:42

기독교 강요 특강 VI

- 칼빈의 신학적 배경과 칼빈 신학의 독특성 -


김영규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녹취: 김기현 강도사(은총교회)

강의 연도: 2004.9.16, M.Div수업


*[본 강의안은 강의를 녹취하신 김기현 강도사님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제3강


1. 본문: 고전11:20-26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개역한글판 고전 11장)


기도합시다. 오늘 주제가 이런 주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창조의 그런 모든 하나님의 은총의 내용을 통해서 주님이 살아계시고 또 역사하시는 표징을 나타내시며,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의 내용들이 역사 속에 지탱이 되고, 주님에 의해서 통치되며 보존이 될 때마다, 그런 모든 은총의 내용을 통해서 앞으로 미래에 주께서 주실 크신 계시의 내용을 거기에 또한 비유로 표현하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거룩한 뜻이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을 만한 그런 능력이 있거나, 또는 우리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서 주님이 은총을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깨닫기도 하기 전에,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주님은 미리 우리에게 은총의 내용을 준비하시고, 또 부어주시며, 또 우리 자신이 그 은총의 내용으로서 주님이 주시므로, 그 시작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은 이제 시대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 하나님이 또한 우리의 상급이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모든 생명의 모든 존재의 가치가 들어날 가장 좋은 것들은 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그런 내용으로서, 또 주님 자신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도록 주님이 늘 인간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또 그 사랑을 늘 계시해 주셔서, 또 그런 모든 시작이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내용이 그렇게 시작한 것처럼, 또 마지막에 주의 귀한 은혜로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도 그런 충만한 내용들이 들어나시도록 역사하셔서, 교회로 하여금 그의 백성으로서 가치를 드러낼 의무를 가진 자로서, 늘 초대해 주실 때마다 이 계시의 내용을 우리 마음속에 깊숙이 깨닫도록 하시고, 또 수용하도록 하시오며, 또 우리의 생을 통해서 그 진리의 내용을 충분하게 우리의 생을 통해서 영광된 내용으로 들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늘 쉬지 않고 그 사랑의 내용을 증거 하시는 주님께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말에 있어서나 또한 우리의 생각에 있어서, 그런 주님에게 경외의 표를 하며, 오늘도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오니,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 옵시며, 우리의 생각을 주장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가감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깊은 주님의 은총으로 함께 하여주시옵고, 주의 영으로 같이 하여 주셔서, 우리가 늘 새로운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깨닫을 수 있도록 하시고, 또 우리가 이런 깨닫는 바의, 그 질서의 내용을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반영을 시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기쁨을 누리며, 또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늘 부족하고 연약하여서 우리가 눈을 뜨자마자 우리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기는 죄악의 투성이어서, 모든 사람에게 또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는 우리의 생이온데, 주님이 이런 거룩한 길로 초대해 주셨사오니, 순간 순간 이라도 주님의 은총을 받아서 이런 모든 일들이 되도록이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된 일만 늘 개입이 되고, 또 들어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루터와 개혁주의자들이 구별되는 시점과 구별되는 내용, 성만찬 교리논쟁


오늘은 루터하고, 개혁주의 전반적인, 넓은 의미에서 개혁주의자들과의 근본적으로 이렇게 구별되는 시점에 대해서, 그 다음에 그 내용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겠습니다. 12페이지가 되겠지요, 12페이지 거기 보면 소위 “공적토의로 초대되어서 ,종교개혁자들이 이제 제후와 같이 관원의 중재로 인하여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 그런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이렇게 토론의 주선을 받아가지고 시작되었는데, 예! 이 논쟁은 너무 유명한 논쟁이기 때문에, 역시 루터주의와 개혁주의가 갈라지는.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화합하기 위해서 이렇게 초대된 공적토의이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이제 자신의 입장들이 어떤 것인지 확연하게 구분되기 시작했고, 거기에 이제 태도는 급기야 아주 크게 갈라지는 그런 현상으로까지 발전되었다는 것을 여기에 이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의 핵심내용은 고린도전서 11:24에 있는 대로, 거기에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향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렇게 표현했어요.


물론 이런 텍스트 상의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가장 오래된 사본이라 할 수 있는 P46의 경우에는 우리가 확증된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면, ‘이것은 몸이니,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니’, 이렇게 해서 ‘나의 기념물로 해서’, ‘아남네시스 에이스 멤 아난메신’, 그래서 ‘너희를 위한’ ‘슈페르’가 되겠지요,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다’ 물론 “토(to.)”가 들어가는 text도 있지만, 이것이 이제 P46의 경우에는 없는 그런 내용에 있어서’ 바로 이런 논쟁이 될 만한 특별한 이런 개념이 없고, 바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니’ 했을 때 이 개념, 이 개념이 과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표현이 되어 있지요, 그래서 여기 ‘Hoc(호크, 이것은) est(에스트, 이다) meum(메움, 나의) corpus(코르프스, 몸) ; 이것은 나의 몸이다’ 해석의 문제인데, 여기에 이제 오클람파디스와 루터 사이에 먼저 논쟁이 이루어 졌고, 다음에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그러나 이 논쟁이 계속되는 일이어서, 뭐! 오클람파디스 와 루터사이에 논쟁이 이뤄졌다가 그 다음에 쯔빙글리와 루터하고 논쟁이 이루어지는 이런 상황이 아니고. 오클람파디우스가 발언하고 루터가 발언하고, 또 이제 쯔빙글리가 발언하고 루터가 발언하고, 이런 엇갈리는 계속 되는 대화의 내용이, 이 논쟁의 중심에 있어서 남아 있는 text들입니다.


문제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개혁주의자들, 특별히 오클람파디우스를 중심으로 쯔빙글리 역시 고린도전서11:24은 ‘그 자체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 자체로 해석한다면 고집을 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늘 고집해야 되겠지요. 이 본문을 그대로 유지해야 되겠다. 이런 말이지요. 여기에 표현된 내용이지만, ‘기념하라 했으면’, 기념에 관련된 내용이거든요. 그것은, 기념이라는 것은 ‘기억을 위해서, 기억하라, 나를 기억하라’ 이런 의미에 가까운 그런 ‘아남네시스(avna,mnhsij)’ 이지요. 물론 이제 플라토의 개념에 있어서. 기억은 아니지만, 그런 개념을 플라토도 사용하고, 헬라도 늘 사용한 내용이지만, 거기에 이제 ‘나를 기억하다,’ 이런 뜻에 가까우니까, 상당히 거기에 문맥상을 보면, 고린도전서11장을 보면, 그만큼 주의 만찬에 대해서, 이와 같이 다른 음식과 같이, 취급이 되고, 어떤 축제분위기가 아니고, 거의 식사도, 정식적인 어떤 식사도 아닌, 그런 방식으로 이런 성만찬 개념이 이해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제 바울사도께서 이런 의식이 성립할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상황을 다시 돌이키는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회복하는 의미에서, 지금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렇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개념에 의하면 결국 ‘기념의 성격’도 있다. 약간 암시가, 문맥상 암시에 대해서는, 우리가 뭐! 신학적인 깊은 어떤 의미에서, 신론에 해당하는 문제이던지, 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이던지, 이런 데까지 이제 소급해 갈 수 있는지 할 정도로 굉장히 단순한 그런 개념이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이제 그런 문맥을 어떻든 간에,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계시의 성격,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받아들이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는 이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고, 그러나 이제 루터의 경우는 이 본문을 본문으로만 해석하고, 오클람파디스는 이 말씀은 다른 말씀과 함께 비교에 의해서, 결국 해석해야 한다는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물론 오클람파디스는 조직신학 책을 많이 쓴 것이 아니고, 주로 주석을 많이 썼어요. 물론 오클람파디스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대로, 장로교의 정치와 관련해서, 치리 제도, 이런 것도 그가 이렇게 세울 만큼, 굉장히 개혁주의 신학전통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기도 한 인물인데, 그가 이와 같은 해석법에 의해서 이렇게 루터에 대해서 결국 반박한 것인데, 물론 여기에 쯔빙글리도 거기에 함께 동참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루터도 오직 성격을 강조하고, 오클람파디스도 성경을 강조하고, 쯔빙글리도 마찬가지, 오직 성경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종교개혁의 정신이고, 그런 면에서는 누구든지 모순이 없는 그런 진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이제 루터의 기본적인 성격을 라틴어로 표현을 한다면 여기에 있는 ‘본문 자체는 그 자체로서 충분하고 판명하다’ 이런 개념으로서 루터가 계속 고집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 개념 자체는 루터 자신이 쓴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이런 개념이 칼빈의 경우에는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서, 그의 초기 기독교강요를 쓰기 전부터 이 개념을 쓰기 시작 했어요. 그래서 칼빈이 1533년 그 근방에 회심이 된 이후에도, 가장 중요한 글을 쓸 때마다 이 개념을 썼어요. 그래서 물론 그때 초기에만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니고, 계속 기독교 강요에 판을 거듭함에 따라서도 역시 이런 논리가 계속이 되었음을 보게 되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계시론을 다룰 때는, 로쿠스(locus, 본문) 개념을 쓸 때는 이런 개념이 늘 가장 중요한 기초적인 개념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아마 설명을 들은 줄로 믿습니다만, 예! 루터가 정확하게 그런 정신이, 칼빈이 이렇게 이어받았다고 하더라도, 루터에게 기원을 돌리는 그런 내용이 되겠어요.


그런데 한편적으로 여기 개혁주의자들은 오클람파디우스 뿐만 아니라, 쯔빙글리, 그 외 대표적인 표현 자체는 블링거에서 온 개념이지만, 여기에서 locus(로쿠스, 본문)는 다른 Locus(로쿠스, 본문)를 비교(collatianem, 콜라티오넴)함으로, 비교를 통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어떤 방식, 이게 이제 해석방법이거든요. 그래서 이 방법을, 지금 본문과 관련해서 주장하는 성격이 되겠어요. 그래서 이런 논리는 개혁주의에 있어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려운 형편인데, 칼빈의 경우는, 지금 블링거가 주장하고 또 블링거 이전에 이와 같이, 쯔빙글리와 오클람파디스가 논쟁과정에서 표현하는 해석의 원리들이 좀 더 깊게 ‘적정과 절도’의 원리로 이렇게 발전이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런 개념이 블링거에게 없었던 개념은 아니지만, 또한 루터에게도 확인되고 있고, 그 전에 게르손이나 기타 다른 분의 경우에도 이런 ‘적정과 절도의 원리’에 대해서 원리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그러나 정확한 해석학적 입장에 의해서 정의라 할까! 이런 내용들은 칼빈에 의해서 아주 예리하게 발전이 된 개념인데, 물론 이 개념 자체는 두 가지 개념이 들어있어요. 적정과 절도원리라고 했을 때는, ‘호기심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내적인 원인에 의해서도,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성경을 해석할 때 호기심을 갖지 말라. 이런 것은 이제 일반 학문, 아리스토텔레스 학문론과 관련해서, 근원적으로 학문의 어떤 동기랄까? 시작이랄까? 이런 것들은 호기심인데,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한다인데, 이런 개념이 여기에 들어있고,


또 하나는 너무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는 것도 있지만, 또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침묵하지 않는 경우예요. 이 개념 속에는 앞에 이제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구절들 자체가 이렇게 충분하고 분명하다. 판명하다. 이런 개념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원리적으로 결국 모세가 받았던 것처럼, 가감하지 말라! 성경은 더하거나 삭제하거나, 우리의 개념에 의해서 삭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표현했지요. 그럴 때마다 그런 가감의 내용에 있어서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감하지 말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성경의 모든 본문이 자체에 모든 예증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 되고 있고, 또 이미 여러분들에게 자주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이지만, 결국 십계명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 기타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대해서는, 결국 우상숭배와 분리될 수 없는 그런 창조의 사상이 있었다고 그랬어요! 창조보고 자체가, 그러면 그것을 어떤 개념으로 이해될 것인가! 하는 그런 선례적인, 구체적인 예가, 창조기록 자체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소위 ‘적정과 절도의 원리’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원리가 적용이 되는 차원은 역시 종합적으로, 이와 같이 루터의 사상 가운데 이와 같이 모든 구절들은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또 판명하다. 이런 개념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되겠어요.


물론 이런 것은 논리적으로 우리에게 잘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마 여러 기회를 통해서 표현해 주었는데, 그것은 성경본문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성경본문이 있다는 그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되어있다는 것 이예요. 그러니까 예!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이렇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주어가 없으면, 주어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되어 있고 ‘도미누스(Dominus, 주님)도 되어 있고, 예흐바(hw"ùhy", 여호와) Dominum(도미눔, 주님), 또는 데우스(Deus, 하나님)’ 이렇게 되어있고, 이 모든 내용들이 결국 이것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거예요. 또 이 하나님이 모세에서의 성격과 전여 다르다. 모세가 말하였다. 이런 개념과는 달리 하나님의 경우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 개념이 오픈 된다. 이 말이예요. 개방 된다 ,그러니까 모세를 통해서 이 ‘딕시트(dicit, 그가 말한다)’ 라는 말은 많은 개방된 내용이 아니지요. 모세가 자란 환경도 있고, 그가 어떤 생애를 보냈고, 그래서 모세만 보더라도 ‘딕시트(dicit, 그가 말한다)’는 많아도, 그 모세가 얼마나 지혜로운가? 모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사상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내용들이 모세 오경 전체와 관련해서 우리가 사려해야, 우리가 딕시트(dicit, 그가 말한다)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역시 이런 오픈성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 자신 만큼 오픈 된다. 이런 말이에요. 이런 성격이 우리가 이제 본문과 관련해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오픈성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고 있는 이상, 그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이 신이라는 그 개념자체와 더불어 계시의 독특한 내용이 결정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더불어 신론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지식과 분리될 수 없는 이런 딕시트(dicit, 그가 말한다)의 개념이어서, 당연히 해석을 할 때도, 결국 이것이 반영이 되는 방식이 되어야 겠지요. 그래서 가감하지 말라는 이런 뜻이 가지고 있는 강조라는 것은,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것에 대해서 ‘오픈성’을 오픈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을 표현하고 있고, 거기에 오픈성은 결국 그 자신이 말한 것에 의해서만 오픈이 이루어지는 이런 성격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 내용은, 하나님이 다른 말씀을 통해서 스스로 계시하신 것에 의해서 오픈이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역시 여전히 오픈되어 남아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함부로 이렇게 이것을 해석할 수 없는 거고, 또 우리가 그런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것을 가지고 오픈시켜 놓았는데, 다른 말씀을 오픈시켜 놓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그런 오픈된 내용을 따라서 해석해야 될 것을 가리키고 있는 이상, 그것은 최소한도로 침묵을 해서는 안 되지요. 이것이 이제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적정과 절도의 원리라면, 최소한도로 가장 기본적으로는 이 로쿠스(locus) 자체는, ... 모든 이루어진 표현들은, 결국 그 자체로 하나님이 주어지고, 스스로 계시하셨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계시하셨다는 말은 스스로 분명하게 나타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판명성이 있는 것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이든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이런 말이예요. 더 이상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더하거나 삭감해서 안 되는, 그런 충분한 성격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자연스러운 개념입니다. 그래서 로쿠스(locus)는 그 자체에 있어서, 그 자체 홀로만 두어도 그것은 충분하고 판명하다. 이런 뜻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은 해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있어야 될 것이요.


그리고 문제는 그 다음에, 이 본문을 이 본문으로만 그대로 해석해야 될 것인가? 이와 같이 이 본문을 그대로 해석해야 될 것인가? 문제는 오클람파디우스는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그 말씀이 갖는 포괄성 안에서의 다른 본문에 의해서 이것이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해석에 있어서 다른 collatianem( 콜라티오넴, 비교) 있어야 이것이 분명하게 증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만큼, 그 계시가 판명하게 밝혀지면, 그 collatianem( 콜라티오넴, 비교?)에 의해서 서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이런 성격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강조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면에서 뭐! 사소한 논쟁이고 사소한 문제점이 되지만 결정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성격이 거기에는 이미 앞서 발전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의미에서 쯔빙글리는 대표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임하셨다’ 했을 때, ‘몸이다’ 이렇게 했을 때, 이것은 영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해서 영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기념하도록 하는 그런 상징적인 성격이 있다. 그런 개념에 의해서 상크라멘툼(sancramentum, 성례)의 개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루터의 경우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그 이상의 것이다. 이런 강조가 처음부터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루터의 경우에는 약간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들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어요. 그런 변화는 초반에는, 그가 개혁이 이루어졌던 1519-20년대에 가장 강한 그런 대표적 저서들 에서는, 이런 쯔빙글리하고 칼빈의 일반적인 견해들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1524년부터 상당히 변화가 시작이 되요. 그래서 그 이상의 것이다. 몸은 그 이상의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요.


예를 들면, 물론 이런 해석의 내용은 결국 성만찬 논쟁에서 가장 핵심으로, 기독론과 관련되어 있는데, 결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기 전에 존재는 어떠했고, 성육신 하신 이후에 존재는 어떻게 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 그가 승천하신 이후에는 어떤 존재성을 갖는가? 그리고 그의 몸은 성만찬의 관계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있는가? 이런 이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적으로 다른 해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이 그렇게 해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원리도 선택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것에 대한 해석인데, 이 해석이 결정적인 것은 기독론에 대한 어떤 이해를 갖느냐에 따라서 결국 기독론에 대한 이해가 성경에 영향을 끼치고, 해석론에 있어서 어떤 원리를 선택하는 데도 관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2. 그래서 이제 예를 들어서 가장 대표적으로 말해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소위 “교회의 바벨론 포로”와 관련된 루터의 기록이 있는데, 1520년 작품이지요. 여기에 그 물론 원문의 텍스트는, 연구소의 논문, 원 1520년의 그것은 제가 가져오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런 내용이 있어요. ‘우리와 관련되어 가지고’ 결국 그 세례와 관련해서 ,성만찬과 관련해서 화체설을 비판할 때 ‘이것이 나의 몸이다’ 할 때 그 개념을 ‘de captivikbe bady lonica ecclesiae piaeludium’ (신성이 육체적인 거함을 위해서, 인성의 실체적 이동이 필연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성은 인성의 우연성에서도 늘 잠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이 개념을, 이것이 이제 중요해요, 육체적인 거하심. 이것이 이제 아주 나중에까지도 결정적으로 공재설(consubstantia, 콘서브스탄티아)의 개념으로까지 정의할 만한 그런 내용이 되지요. ‘신성의 육체적 거하심은 필연적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필연적이 아닌가? 했을 때는 transsubstantia(실체변화?) humanam naturam(인성) divinitas(신성) subacidentibus(?) humanam..(?)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원문 자체가, 많은 이 글 중에서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라인에서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루터의 후대에 루터주의가 고백으로 이루어질 때, 그 개념에 있어서 bodily적이다. 임재한다. bodily으로 실재한다. 몸으로 실재한다. 성만찬에 몸의 방식으로 실재한다.


이렇게 개념이 몸이 실재한다.고 이런 말을 쓰지 않고 영어표현으로 bodily으로 실재한다. 이 개념을 쓸 때 이때 형용사적이다. 그런 실재. 거하신다. 신성이. 그런데 여기는 뭐예요? 분명히 여기에 신성이 거하시는데 bodily으로 거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좀 다르지요. 지금 문제는 어거스틴에 의하면 ‘그가 하늘에 계실 때는 여기 땅에 없었고, 그가 인성을 입어서 이 땅에 계실 때는 하늘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신성의 육체적 거함이라 이렇게 표현함으로서, 지금 위에서 표현하는 것이, 지금 육체적 거함에서 그것만 부정했어요. 육체적 거함을 말을 하더라도, 여기에 인성이 transubstantiali(트란스서브스탄티알리, 실체이동), 그러니까 인성이 이렇게 실체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꼭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신성은 신성대로 남아있고, 인성은 인성대로 남아있다. 이런 성격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성격이 그대로 보존이 되는 이런 라인에서 미묘한 선에서 루터주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름을 붙이기를 공재설(consubstantia, 콘서브스탄티아)이다. 그러니까 무엇이랄까? 인성은 인성대로 신성은 신성대로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신성이 육체적으로 거하신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그래서 이것은 실재설이거든요.


우리도 실재설인데, 약간의 우리하고 차이가 나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어거스틴과 플겐티스 주장을, 이때에 특별히 오클람파디스와 쯔빙글리가 강조를 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은 참된 인성의 속성을 취하였으나 참된 신성의 속성들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또 ‘그의 인성에 따르면 그가 땅에 있을 동안 하늘에 없었고 그가 하늘에 올라갔을 때는 땅을 떠났으며, 신성에 따르면 하늘로부터 내려왔을 때도 하늘에 남아있었고, 거기에 돌아갔을 때도 땅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신성과 관련해서는 결국 ‘이땅에 오셨을지라도 우편에 계셨다’ 이런 말이예요. 그 다음에 그가 이 땅을 떠났을 때도 신성은 땅에 계셨다. 이런 뜻이예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육체적 거하심이라 이렇게 했을 때, 신의 육체적 거하심이라 했을 때, 루터주의는 신은 죽었다. 이런 개념이 되요. 육체와 분리될 수 없을 만큼, 칼케돈 신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는 것만큼, 거기는 장소적인 모든 면에서 분리될 수 없는 형태로 해석을 해서, 결국 이 땅에 있을 때, 죽었다고 그랬을 때는 결국 분리될 수 없는 상태에서 죽은 그런 성격이 되어서, ‘신이 죽었다’ 이런 개념이 나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신의 죽음에 대해서 개념이 대부분 유럽에서 보게 되면 대부분 기원이 결국 루터주의 신학의 영향권 안에서 생긴 개념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을 오래전부터 극복할 때, 어거스틴의 직접적인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폴겐티우스의 주장은 이와 같이 신성과 인성의 경우를 분리시키는 성격을 이해할 때도 성격에 있어서 ‘신성의 편재하는 성격’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했고, 인성은 편재하지 않는 성격을 거기에 반영 시켰습니다. 이것만 중요합니다. 우리 개혁주의 입장에서도 어거스틴 입장과 동일하면서 또 해석론도, 그 해석을 위해서 이 본문은 다른 본문에 의해서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이런 기독론적인 이해가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을 우리가 고백과 함께 그런 해석을 당연히 취하게 되었다고 이렇게 말하면 되겠어요.


그래서 이런 오클람파디우스의 입장과 쯔빙글리 라인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하는, 그대로 취하는, 그 편에 있게 된 의미에서, 칼빈은 개혁주의자의 선에 있는 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당연히 그의 표현에 의하면, 여기에 있는 대로 “전 그리스도(totus christus)는 어디에서 계셨으나,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편재한 것이 아니다.”라고 부정하였습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그것에 대해서 편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그 개념은 여기에 표현에 ‘토투스 크리스투스(totus Christus),’ 개념을 썼어요. 이 경우만 편재한다. 그런데 이제 그렇다고 해서 토툼 크리스툼(totum Christum). 이런 말은 없어요. 이런 말은 될 수가 없어요. totum(중성 형용사)에 따라서 이것이 물질명사가 되는 이런 형태는 항상 Christus(남성 명사, 라틴어는 형용사, 명사가 성, 수, 격이 일치되기에 중성형용사에 남성 명사가 올 수 없음)가 되어 있습니다. 이 개념이(totum christum) 결합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표현을 되도록 피할 수밖에 없었던 개념이었어요. 여기를 보면 quod in eo est(그 안에 있는 것), 그 뒤에도 같은 표현인데 그때도 결합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독립되었어요. 독립되게 했어요. 우리 중보자는 전인으로서 편재하기 때문에, 토투스 유비쿠베(totus ubique, 전인이 어디에나 계시다), 여러분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여기에서[유비쿠베(ubique)] 나온 말이예요. 유비쿠베(ubique)잖아요. 어디에나 편재한다. 이제 알겠지요. totus ubique sit(전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신다). 전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신다. ubique sit(우비쿠베 시트, 어디에나 계신다)이고, 그리고 항상 그들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성만찬에 스스로 특별한 방식으로 현재한다. ‘현재한다’ 이렇게 썼다고요. 프레젠템(praesentem, 현재한)이라고 썼어요. 그래서 분명히 실재설이요. 칼빈은 실재설이에요. 그러니까 speciali(스펙치알리, 특별한) modo(모도, 방식으로) 그대로 써야 해요. 이 말은 그대로 써야 됩니다. 표현할 때 결정적으로 거기에 그 말만 했다면 그 말 그대로 써야 할 것이지요.


그러니까 speciali modo, 특별한 방식으로 현재한다(praesentem). 스스로, exhibet(엑스히베트, 나타내다)라고 되어 있어요, 현재할지라도, 그러니까 스스로 현재하는 그런 것을 나타낸다. 이런 뜻이니까, 결국 현재할지라도 그가 전인으로서 거기에 있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은 토툼(totum)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이예요. 그러니까 성만찬의 경우는 토툼(totum)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토투스(totus)로서 실재한다. 이런 말이예요.(totus christus, 할 때는 편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성자의 신성이 편재하시지만, 전인으로서 편재한다고 할 때, 언제나 그리스도의 인성과 분리되지 않는 성격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어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언제나 분리되지 않는 성격을 말하기 위해서 전(totus)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성만찬에 전(totus) 그리스도가 임재하실 때,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성만찬에 임재하지 않아도,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분리되지 않는 성격을 말할 때, totum 개념을 씁니다. 즉 chrisiti(그리스도의) totum은 임재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만찬에 실재하지 않지만, 성만찬에 실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여전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쯔빙글리는 영적으로 실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념적인 것이고 비유적인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그래서 말씀이 하는 역할이나 성례가 하는 역할이 거의 차이가 없다. 쯔빙글리가 이렇게 강하게 주장해요. 루터는 그렇지 않다가 강하다가 보니까, 육체적으로 임한다. 이렇게 생각해서, 의식이 강조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의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이 있는데, 그런 강조가 칼스타트하고, 쯔빙글리를 반박할 때, 벌써 1524년, 그 다음에 1525년 이런 사이에, 1524년은 쯔빙글리를 많이 의식하고, 1525년은 칼스타트를 많이 의식하고, 계속적으로 이제 많이 의식해서 생클라멘타리스트(sancramatalist?)해 가지고, 늘 루터가 사용하는 비판은 쯔빙글리나 기타 칼스타트 같은 그런 인물들, 재세례파의 계열이 주장하는 그런 내용에 대해서 늘 비판할 때,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bodily적으로 임재한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물론 성육신 할때 bodily으로 임한다. 이것은 말은 되는데, 그러나 성만찬에서도 bodily으로 임한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쏘마(몸)가 쏘마틱 아니예요. 그러니까 bodily으로 임재한다. 이렇게 되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쯔빙글리는 영적으로 임재한다. 영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러나 칼빈은 영적으로 임재 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은 당연하고, 쯔빙글리보다 약간 더, 루터보다 약간 그렇게 의식에 대한 강조, bodily인 임재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 것만 분명하고, 쯔빙글리보다는 더 실재설을 강조하는 그런 성격이예요. 기념적인 그런 성격이 아니고, 하나의 실재성을 강조를 해요. 그런데 실재설의 개념이 무엇이냐 했을 때는, 루터는 이와 같이 bodily으로 실재한다는 개념에 가까운 그런 의미에서의 consubstantia(공재설, 콘서브스탄티아) 반면에 칼빈의 경우는 토투스(totus) 크리스투스(Christus)가 실재한다. 이런 개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와 같이 토툼(totum) 크리스툼(christum) 같은 그런 개념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이 칼빈주의 독특성입니다. 이것이 칼빈의 독특성일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의 독특성이고, 그 다음에 어거스틴 선에서 이어지는 결정적인 가장 중요한 라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이것이 칼빈주의의 독특성이고, 다른 모든 내용들은 거의 비슷비슷하더라도, 이것이 결정적으로 틀리다. 이런 말이예요. 칼빈주의 그러니까 성만찬, 또는 세례의 필연성, 세례를 꼭 주어야 되는가? 주어야 되지 않는가? 이런 면에서 세례의 필연성을 강조하면 루터주의이고 ,우리는 세례의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어떤 면에서, 또 이런 성만찬의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개혁주의가 근본적으로 나누어진 이런 내용이 독특성입니다.(개혁주의가 세례나 성만찬의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세례나 성만찬이 구원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역사선상에서 개혁주의가, 개혁주의 사상으로서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으로서 고정되어 있는 때는 성만찬에서 이 주제이에요. 그래서 이 주제는 표현 자체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 여기에서 해석에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해석의 원리도 차이가 있고, 그 다음에 기독론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어떤 의미에서, 성만찬 논쟁이라고 했을 때, 그 개념이 다른 신학적인 요소는 관계가 없고, 성만찬만 다 해결되면 이런 방식이 아니고, 기독론에서도 관련이 되고, 결국 칼케톤 신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여기에 있어서 같은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이되, 루터가 받아들이는 것은 bodily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그런 성격을 강조하는 반면에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강조하더라도, totus Christus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분리될 수 없고, 또는 나누어 질 수 없고, mix도 안 되는 이런 성격을, 칼케톤 신조의 해석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칼케돈 신조에 대한 해석이 어떤 해석이냐 했을 때는 바로 이런 개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콘서브스탄트(consubstantia, 공재설)라는 개념은, 물론 라테란 회의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전에 이와 같이 1515년에 처음 교리화 되었습니다. 그런 교리 이전에 실제적으로 루터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 데가 없었어요. 예를 들어서 종종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는 그런 개념을 쓰기도 했어요. 소위 ‘레알 콘 코미탄티아’를 썼어요. 이런 개념을 썼어요. 그러니까 콘서브스탄티아(consubstantia, 공재설) 있는 것처럼, 여기에 ‘콘 코미타티아’를 썼어요. 이 개념은 “콘 코미타티아”가 갖는 개념처럼, 실제설로 루터와 비슷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이와 같이 라테란회의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고, 일찍부터 소위 동방교회, 소위 예루살렘 시릴과 같은 그런 경우도 바로 루터가 표현한 것처럼 “계시된 떡은, 나타난 떡은 떡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마(sw/ma, 몸)이다. 이런 개념을 강조했어요. 동시에 어떻게 되냐 하면, 그 소마(sw/ma, 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거룩하게 된 떡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소마(sw/ma, 몸)로 바꾸어졌다. 그렇게 나는 믿는다”. 이렇게 썼어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콘서브스탄티아(consubstantia, 공재설), 또는 트란스서브스탄티아(transsubstantia, 화체설), 개념에서 화채설을 말한다 해도, 교부들의 글을 읽게 되면 우리 개혁주의하고 다른 입장에서 대부분 다 트란스서브스탄티아(transsubstantia, 화체설)를 주장한단 말이예요. 그러면 괜히 놀랄 수 있다는 말이예요. 교부들은 다 그런데, 그러면 외톨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점을 고려를 하는 의미에서 제가 한 번 표현한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레고리 미사’의 경우에 ‘갑바도기아 교부로서 삼위일체를 종결시킨 그런 교부인데도 불구하고, 실제 성만찬에서는 이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삼위일체를 완성되게 했던 교부들일지라도 상당히 문제가 있어요. 모든 교리가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나는 믿는다. 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의 로고스에서 소마(sw/ma, 몸)로 바꾸어졌다. 변이되었다. 이 말이예요. 떡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거룩하게 된 떡이 변화가 되었다.” 이렇게 믿는다.는 말이예요. 그러니까 소마(sw/ma, 몸)로 변화되었다. 이런 뜻이니까 상당히 bodily적으로 임한다. 이런 말이 루터에게 가깝도록 이렇게 표현이 되었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상당히 이제 루터가 이런 교부적인 배경을 많이 강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그 동방교부적인, 이런 동방교회의 특별히 교부적인 성격은 요한네스 다마스케누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옛날 교부들의 경우에 특별히 이그나티우스와 같이, 초기에 있는 바로 직후, 도미티안 황제이후에, 속사도라 할 수 있는 분들의 대부분의 강조는 ’그 떡은 일반적인 떡이 아니다‘ 이것은 강조했어요. ’일반적인 떡은 아니다‘ ‘코이노 나루톤’로서 특별히 강조를 하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육체가 된 그런 어떤 종류의 방식이다’. 이렇게 아주 단순하게 이했어요. 그러니까 ‘로고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육체가 된 어떤 방식, 그러니까 육체가 된, 그런 거예요. 여기는 변화라는 말 이예요. trans(변화)를 강조했어요. 소마(sw/ma, 몸)로 trans(변화)가 된, 육체가 된, 이런 개념이 오랫동안 이렇게 보존되었다. 이런 말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부들의 오래된 주장들, 특별히 라테란 회의에서, 특별히 트란스서브스탄티아(transsubstantia, 화체설)의 개념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던 그런 내용에 비해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어거스틴의 주장과 같이, 그런 신성과 인성에 대한 해석, 또 칼케돈에 대한 정확한 해석, 동시에 이제 totus(토투스) Christus(크리스투스)에 대한 개념, 이런 개념이 개혁주의에 있어서, 신학적 입장과 관련해서 중요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루터의 주장, bodily적으로 이렇게 실재한다. 그래서 이런 개념은 상당히 어떤 의미에서, 동방교부적이고, 또 교부들에게 가장 친근한 개념을 보존하고 있는 루터주의 입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주의 입장에서 성만찬 원리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지금 현재 에큐메니칼 운동을 할 때도, 서방종교보다도 상당히 동방정교회를 더 지지하고 대화를 하는 그런 형태가 루터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러시아정교회나 그리스정교회, 여기에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을 상대적으로 루터주의는 거기에 손잡고 있고, 또 교황과 이렇게 비등하게 자기가 에큐메니칼 의미에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그런 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만큼 성만찬에 있어서 이렇게 비슷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성만찬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논쟁이 되는 가까운 주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루터주의가 거기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향으로 이렇게 발전이 되는 그런 내용들은 루터주의의 특징인 것 만큼, 에큐메니칼 의미에서도 굉장히 많이 반영되어 있는 상황이고, 유럽에서 이제 만약에 공부를 할 경우에, 이런 라인에서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마치 알미니주의가 루터주의에 가깝기 때문에, 알미니우스 주의가 지지를 받는 것처럼, 이런 성만찬의 논쟁과 관련해서도, 동방교회, 루터주의, 이런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되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런 뜻이지요. 개혁주의자는 싫어해요. 아무리 좋아도, 사람도 좋고 모든 것이 좋아도 신학이 틀리면 거리를 갖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표현되어 있지만 루터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기라는 부사가 없다면 버리겠다거나, 그 몸이 한 장소에 제한되든, 그것은 모든 장소들에 가득하든,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알 필요가 없다. 이는 하나님은 그것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셨고 세상에 있는 사람이 그 점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 이렇게 ‘오직 로쿠스(locus, 본문)는 그 자체로서 충분하고 판명하다’ ‘다른 것을 거기에 부사의 성격을 넣거나 그 개념을 넣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강하게 강조를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것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셨고, 세상에 있는 사람이 그 점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 말은 그의 중심적인 말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제안에 따라 공동고백을 작성하기까지 그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고 쯔빙글리와 입장과 같이 하는 자들을 친구로서 인정을 했어요. 그러나 형제들로서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분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에 대한 신앙은 구원에 근본적이라 이렇게 생각했어요.’ 사소한 문제가 아니고 구원에 근본적이다. 그래서 지금도 성만찬 의식 가운데서, 예배의식 가운데서, 이와 같이 성만찬의식이 배제되느냐? 배제되지 않느냐? 이것이 아주 루터주의에서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구원을 위해서 근본적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교와 더불어 성만찬, 그래서 모든 예배에는 성만찬이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카톨릭은 의식이 전체라고 한다면, 구원에 가장 실제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성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서, 의식을 강조하고 설교는 그렇게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쯔빙글리 라인에서는 설교나 성만찬이나 거의 비슷하다.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면이 있는데,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 이런 라인에 속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실재설을 믿되, 쯔빙글리 보다도 훨씬 성만찬을 강조하고, 그러나 totus(토투스) Christus(크리스투스), 그런 의미에서 실재한다. 이렇게 보는 성격에서 성만찬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방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독립적으로 특별히 강조를 했던 것이고(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된다는 의미는 아님),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이 의식 속에서 매일 드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이 말이죠.


꼭 구원에 필연적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의식에도 반영되었고, 예배 형식에도 반영이 되어 있는, 이런 개혁주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종합해 보면 1524년 전후로 해서는, 그 상당히 1520년대나 이때는 칼빈주의하고 루터주의하고 그렇게 구분이 안 되었어요. 성만찬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해석, 신구약 통일성 문제, 모든 면에서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 이런 아까 그 바벨론 포로에 관련된 루터의 어떤 동기가, 칼빈에 의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되고, 칼빈의 경우에 있어서도 실제적으로, Institutio(인스티투티오, 강요)이라는 개념 자체도, 어떤 의미에서 칼빈이 루터로부터 빌려온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가르침이라고 했을 때, 교육적 성격을 갖는다는, 그러니까 교육적 성격을 갖는 개념에 있어서, 율법을 해석하고, 사도신경을 해석하고, 주기도문을 해석했을 때, 그것이 교육적 성격의 개념을 쓸 때Institutio(인스티투티오)라는 말을 쓰는데, 그런 개념조차도 사실상 칼빈이 루터로부터 가져온 내용이고, 아까 표현한 것 가운데서, 루터의 직접적인 주장 가운데서 “본문은 그 자체로서 충분하고 판명하다” 는 루터의 개념이 있었다고 그랬고, 여기에 “적정과 절도의 원리”에 대해서도 루터의 경우에도 있었다고 그랬지요. 그러면 그런 개념,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루터가 가지고 있는 그런 내용들을 칼빈도 그대로 흡수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결정적으로 루터하고 개혁주의하고 다른 어떤 1529년에 있었던 그런 차이를 제외하고 있는 루터의 모든 장점들, 좋은 것은, 이런 것은 칼빈에 의해서 다 흡수되어 있는 그런 의미가 중요하게 생각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면에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칼빈이 서있는지 이런 것을 1529년과 관계해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을 우리가 여기에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문제는 칼빈이 이런 개혁주의 입장을 자기의 입장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선에 있어서,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종합되고, 가장 좋은 것만 종합이 되는 그런 과정이 있었을 때, 실제적으로 그는 상당히 많은, 생 자체로 볼 때는 변화가 있어가지고, 그 변화에 의해서, 회심에 의해서 그런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이런 배경이 있는데, 그런 배경이 13페이지에서 우리에게 확인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루터자신이 유클리파라고 하였고, 또 후스의 계열에 속하였다. 유클리파나 후스를 왜 이단으로 하나? 이것에 대해서 불만이었죠. 카톨릭에서는 후스파나 유클리파와 같은 루터를 이단으로 돌리는 성격이 있는데, 역시 유클리프처럼 블란서에서, 성경 보급을 위해서, 불란서 언어로 성경을 출판하고, 오직 은혜에 의해서 믿음의 의를 강조하는, 이런 쯔빙글리와 독립적으로 종교개혁을 불란서에서 한 인물로, Jacques Lefevre de Etaple(1455-1536)이예요. 지금 이 인물이 종교개혁자로서 불란서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인데, 여기 그의 제자인 윌리엄 파렐(willam farel)이 역시 나중에 칼빈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래서 집요하게 칼빈을 설득을 시키고, 그의 설득에 의해서 칼빈이 제네바로 움직이고, 개혁에 있어서 파렐이 상당히 종교개혁에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유지했을 때 파렐이 역할을 하는데, 이 파렐이 그의 제자라는 것이지요. 이때 그런 종교개혁의 운동이 한창 일어났을 때, 거기에 이제 많은 순교자가 있었고, 특별히 이제 마지막에 불란서에서 데니스(Denis)라는 순교의 중요한 인물이 들어나게 되었을 때, 그때 이제 시기적으로 칼빈이 공부하는 때 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라 마르(La Marche) 학교를 거쳐서 몽떼뉴(Montaigu) 대학에 들어가는 무렵에, 그 때 벌써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에 있었는데. 이때 그가 어떤 시가에 이와 같이 갑작기 회심이 되었다고 그의 시편주석에서 서문에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회심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이런 문제가 학자들의 관심이 되고 있는데, 이미 그의 어떤 회심된 이후의 신학적인 고백들과 그런 성향은 이미 1533년 10월의 소위 니콜라스 코프(Nicholas Cop)의 연설문을 칼빈이 썼는데, 그 연설문에 반영이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분명히 이제 그와 같이 종교개혁자, 새로운 신교운동, 새로운 종교운동과 관련해서, 거기에 그의 핵심적인 내용들이 반영이 되어 있는 그런 연설문이었음을 확인하였는데, 그러면 언제 그런 것 까지 소급할 수 있는냐? 특별히 그가 이제 인문주의 학자로서 실제적으로 글을 쓴 책은 세네카의 주석입니다. 윤리와 관련되어서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인데 이 책이 아주 엑셀렌트한 책이지요. 그가 자랐을 때, 어릴 때의 학문성을 아주 리얼 하게 볼 수 있는 것인데, 그 후에도 이런 아주 학문적인 높은 수준의 인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면서, 학문의 굉장히 깊은 코멘트를 하는, 이런 칼빈의 학문성에 대해서는 그 후에는 아주 많이 안 나타날 정도로 아주 선명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주 해박한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 책입니다. 이것이 이제 1532년에 출판되었는데, 이때 이제 학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회심 이후에 썼는가? 또는 회심 전에 썼는가? 이런 관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제 시편주석에서 표현된 대로, ‘처음 교황의 미신들의 그 깊은 수렁에서 쉽게 나를 구하지 못할 만큼 완고하게 빠져 있을 때, 갑자기 회심으로’, ‘갑자기 회심으로’는 갑자기 변환되었다. 이런 뜻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오순절파가 회심되듯이, 갑자기 변화되어서, 확 변한 것이 아니고, 집을 버리고, 무엇을 다 버리고 이런 형태가 아니고, 여기는 ‘갑자가 회심으로’가 무엇으로 표현되었냐 하면, ‘나의 영혼이 순종하도록 부드럽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래서 참된 경건에 대한 맛을 본 후 전 열심으로 추구하는데 불타올랐고,’ 그러나 그 나머지 그 세속공부에 대해서, 법학이나 기타 많은 공부를 했는데, 그러면 그 공부를 안 했느냐? 이것은 계속 했다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비록 버리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머지 공부들이 더 식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심된 이후에는 약간의 새로운 신교운동에 대해서 배타감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약간 부드러워졌고, 다른 학문도 계속하되, 그 학문에 대해 맛을 잃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회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회심의 성격이 무엇이냐 했을 때, 약간의 베자의 설명이 언급이 되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 세네카의 주석에 있어서 그것이 이제 시기적으로 1532년에 썼어도, 회심이후 라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가 그 책에서 아주 드물게 어거스틴의 책이 인용이 되고 있어요. 아주 끝 부분에 가가지고, 특별히 신의 도성이 언급되는데, 이때 신의 도성이 언급이 되었을 때, 오히려 세네카의 책에 대한 주석에서 중요한 판단기준으로서 이미 설정이 되어서 숨어 있는 책의 주제가 되어 있어요. 이것이 거기에 중요한 면이 반영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또한 로마서 13장이 인용이 되었는데, 거기를 보면 ‘우리들의 종교의 고백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고는 권세가 없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confessio religionis nostrae(우리의 종교의 고백)라는 말을 써서, 우리의 종교의 고백도, 이렇게 되어 가지고 결국 로마서에 근거해서, 그가 이렇게 상당히 로마서를 접촉하고, 이미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의 어떤 판단기준에 의해서, 역사에 대한 도덕, ‘관용론에 대한 세네카의 주석’에 원리적 어떤 가장 근원적 밑바닥에 있는 내용이었고, 다른 이제 모든 무슨 그 어떤, 로마시대의 모든 자료를 이용하고 있고, 헬라의 자료들을 다 인용하는 그런 윤리와 관련된 내용들은 실제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이런 결정적인 중요한 판단기준에서 그의 책이 결정 되어 있음을, 이런 마지막 인용에서 볼 수 있는데, 그때 이렇게 로마서 13장을 인용하고,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이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인용하는 무게와 어떤 의식이 지금 아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되어 있고, 또 여기에 보면 ‘우리의 종교의 고백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고는 권세가 없다’ 이런 개념으로서 로마서 13장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역시 이 세네카의 주석을 했을 때는, 이미 이와 같이 약간의 세속학문에 대해서 떠나지 않는 상태에서, 그에 대해서 식어진 상태이고, 점점 맛을 잃어버린 상태이고, 오히려 다른 원리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런 갑자기 회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면서, 이제 대적에 대한, 영혼의 방향이 이렇게 약간 부드러워져서 수용하는 쪽으로, 점진적으로 이렇게 바꾸어지는, 경건의 맛을 아는 이런 분위기 위에서, 지금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을 썼다. 이런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최소한도로 갑자기 회심이라는 것은 그 전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1533년은 최소한이고, 1532년 전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순교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느 정도 그가 상당히 이제 새로운 각오가 형성되어 가는 그러한 때에 이와 같이 준비된 상태로서 임재(?)하게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제 베자가 칼빈의 회심과 관련해서 중요한 언급을 하는데, 그때 그 회심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조카인 올리베타누스(Oilvetanus)가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베자에 의하면 올리베타누스(Oilvetanus)를 만난 시기에 참된 경건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맛을 보았다고 진술했고, 교황적 미신들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고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결국 베자의 말의 신뢰성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닌가? 그리고 칼빈 자신이 베자를 통해서 이런 언급을 했다고 말할 근거를 논리적으로 잘 이해하게 됩니다. 특별히 거기에서 회심할 때, 베자의 라틴어 역본에서 그 회심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언급이 있는데, 그때 표현하기를 “올리베타누스(Oilvetanus)가 참된 경건에 대해서 권고할 때, 성경을 읽으면서 권하였다” 이런 기록이 있어요. 그러니까 칼빈이 그의 조카와 있을 때, 결정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와 같이 권하였다고 이런 말이 되어서, 그가 새로운 맛을 얻는 것은, 올리베타누스(Oilvetanus)가 어떤 감동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어떤 개인적으로 읽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이 소개 되었고, 성경에 대한 경건의 맛을 아는 자로서 이렇게 회심이 이루어졌다.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9페이지에 보시면, 1517년에 95개 조항의 첫 명제에서 루터가 회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런 개념하고 조금 다르다는 말입니다. 인간론, 즉 인간이 회심의 중심이 되어 있기는 있는데, 그때 그가 말하는 회심은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서 수행된 고해와 보속의 회개가 아닌데,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혐오를 진정한 내적인 회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율법에 대한 혐오, 율법으로부터 이렇게 늘 공포, 어떤 두려움을 야기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인한 그런 내적인 회심이 루터에게 있어서, 회심의 특징 적인 것으로 이렇게 볼 수 있었는데, 이런 성격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모든 원리를 설명할 때도 이 회심의 강조(?, 혹은 단계)를 두고 있고, 역시 물론 성만찬도 회심의 표징이라? signum(시그눔, 표지)이라고 그러지요. signum에 대한 강조를 초반에 늘 강조하게 되요. 이런 결국 회심의 성격이 신학의 전반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그런 독특한 내용이 있는데, 그런 반면에 칼빈의 경우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얻은, 그런 어떤 로마서 같은 그런 어떤 성경구절, 믿음의 의 일지라도, 로마서 같은 이해가 칼빈에게 충격을 많이 주었고, 특별히 로마서 3장 이후에 있는 그런 개념보다도, 그 이후에 있는 개념들이, 그에게 굉장히 큰 신학의 내용을 결정하도록 조금씩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신학적 특성을 그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이런 회심을 하고 난 이후에, 결국 법학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Bourges(부르지)나 리용(Noyon) 파리로 옮기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칼빈의 회심의 성격은 16페이에 있는 대로 “말씀에 의한 중생의 회심이었다”. 이렇게 칼빈과 루터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미 언급한 내용이 있지만 루터의 경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표현을 볼 수 있지요. “주여, 내가 이들을 주의 하도록 주께서 나를 주의 영으로 밝히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불경건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도록, 주께서 나에게 주의 말씀으로 불을 밝히었습니다. 내가 공로를 저주하도록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어떤 자기의 혐오, 혐오에 강조를 둔, 그런 루터의 입장인데, 그러나 지금 칼빈의 경우는 ‘말씀에 의한 중생의 회심’을 훨씬 강조하는 그런 성격이 비교된다는 언급을 했어요.


물론 이런 칼빈의 생애 가운데서, 그가 이제 ‘기독교강요’를 쓰기까지의 그의 발전과정 이랄까? 이런 것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데, 직접적인 배경은 1534년 10월 24일 또는 17일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 때 소위 유명한 ‘벽보사건’, 이런 사건으로 인하여 John Morin(존 모렝)에 의해서, 그 칼빈의 제자들일 수 있고, 칼빈이 개척한 교회의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핍박을 받고 순교하게 됩니다. 이런 계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칼빈이 이런 영향을 끼치는 제자가 양성되기 전에, 또는 교회가 여러 곳에 생기기 전에, 그가 특별히 회심으로 바꾸어져서, 이런 신교운동으로 새롭게 칼빈이 여러 곳으로 움직이면서, 그런 교회를 세워가는, 또 복음을 전파하는 그런 과정이 있게 됩니다. 특별히 그의 여러 가지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특별히 두 뜰레트(Du Tillet)의 경우에, 그의 집에 머물렀던 그런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두 뜰레트(Du Tillet)의 경우에, 그의 집에 도서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알려지고 있는데, 아마 이 도서들을 칼빈이 많이 이용해서, 그가 초기에 신교, 또 교부들의 자료들을 많이 접촉을 했을 가능성이 높고, 벌써 이제 1533년이니까, 니콜라스(Nicholas Cop) 코프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한 그런 내용에 의해서, 그때 핍박이 이루어진 그런 사건이, 바울이 창문으로 빠져 나간 것처럼, 칼빈이 이제 피신생활을 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 이후부터 이제 상당히 기독교강요의 구상이 이루어졌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두 뜰레트(Du Tillet)와 함께 Poictiers(포와띠에르)로 옮겨, 그 사역의 열매로서 조그만 교회를 1534년 4월에 개척하게 됩니다. 지금 1534년 4월 이고, (벽보사건이 1534년) 10월이니까, 봄에서부터 가을까지 거치는 내용입니다. 그 사이에 이제 모든 칼빈의 생애에서 중요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이 있게 되고, 그 다음에 그것이 기독교강요를 쓰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여기에 칼빈이 여러 곳에 조그마한 개척 교회를 하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때 제자들이 형성이 되는데, 여기를 보면 Toulouse(뚤루제)나 Bordeaus(보르도)에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그러나 몇 사람이 흩어지고, 또 남아 있는데, 그 남아 있는 자들 가운데 순교를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칼빈이 자신의 주변에 직접적인 제자들, 또 함께 신교운동을 하고 있는 자들이, 이렇게 번번히 순교를 당하는 이런 비참한 현상 속에서, 칼빈이 결국 늘 피신하는 생활을 하면서, 결국 결정적으로 그들을 위해서, 결국 칼빈이 왕에게 헌신하는 그런 헌사의 편지와 함께 글을 써야 될, 그럴 어떤 의식을 늘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배경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자기가 회심을 해 가지고 말씀의 경건의 맛을 맛보고, 그 다음에 여러 도시에 피신생활을 하면서, 이런 제자들을 길러내는 작업을 하면서, 칼빈이 그 제자들이 순교를 당하고, 자신이 직접 순교를 당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늘 보호를 하셔서, 그가 늘 피신해가서, 마지막 바젤까지 피신해 오기까지, 그 피난 과정에 있어서, 자기는 피신했지만, 남아 있는 자기의 친구들, 또 함께한 자들이 순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위기가 되었음을 보게 되지요. 이것이 칼빈이, 이런 내용들은 기독교강요 자체가 이런 배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전부 모든 말이, 루터하고 다르게 굉장히 고백적이고, 그 자체의 제목이 고백적인 것이, 저항의 방식 이예요. 그래서 그 원리적으로 무엇을 강조하면 하는 것 만큼 그 원리가 저항의 원리가 되어 있어요. 기독교강요는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성립이 되어서, 나중에는 결국 제네바에 정착을 할 수 있는, 개혁의 중심지로서, ‘파렐’의 인도로 개혁도시로 안전하게 영접함에 따라서, 안정 되게 개혁을 하기전까지, 그런 기독교 강요가 출판되는 그런 배경은 이와 같은 굉장히 시대를 통해서 진통을 겪는 그런 산출물로서 나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 있어요.


질문: 오늘 말씀하신 것 중에서 성만찬이 중요한데, 그러면 루터, 쯔빙글리, 칼빈을 간단히 정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 그러니까 카톨릭의 입장은 transsubstantia(트란스서브스탄티아),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변한다. 실체가 변한다. 루터의 경우에는 이와 같이 육체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육체적으로 거한다. 그때 그 개념이 신성에는 하늘에는 없다는 이런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에서 오클람파디우스와 함께 (그 이후에 쯔빙글리는 약간 다르지만) 어거스틴과 플겐티우스를 강조를 했기 때문에, 특별히 오클람파디우스, 부쪄, 칼빈, 이런 라인에서는 Totus Christus(토투스 크리스투스)를 강조합니다. 실재하되 성만찬에 Totus Christus(토투스 크리스투스)가 실재한다. 다 똑 같이 실재합니다. 실재설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육체적으로 신성이 실재한다는 것이고, 여기는 Totus Christus(토투스 크리스투스)가 실재한다는 거예요. 그 Totus Christus(토투스 크리스투스)는 편재하시는 Totus Christus(토투스 크리스투스)이지요. 그러나 육체는 어디에 계시냐고 하면 하늘에 계시다. 여기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있다고 주장하면, bodily적으로 있다고 그러면 루터주의이고, 그 다음에 개혁주의는 육체는 여기에 없고 하늘에 계시다. 그렇다고 해서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칼케돈 신조에 의하면 분리되지 않고, 혼합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의미에서 칼케돈 신조와 동일하게 믿되, 하나는 Totus Christus(토투스 크리스투스)가 편재하는 의미에서 여기에 실재하고, 그러나 인성은 하늘에 계시다.


질문 : 교수님 그러면, 그리스도가 편재하시기 때문에, 성찬식에 임재하신다고 한다면, 바꾸어서 말하면, 성찬이 아닐찌라도, 그리스도는 늘 편재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 성찬이 가지는 기능적인 의미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 그런 점에서는 편재한다는 개념이 여기에 있는 표현이 “특별한 방식”이라는 표현을 썼잖아요. “특별한 방식”, 그런 방식을 우리가 좀 인정을 해 주어야 하겠지요.


질문 : 특별하다는 것이 어떻게 특별하다는 것인지?


답 : 그러니까 우리가 뒤에 보면 표지거든요. 교회의 표지와 관련되어서, 말씀이 표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성례가 가시적으로 특별한 표지 역할을 한다는 말이거든요. 가시적으로 표지 역할을 했을 때, 그 표지가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닌(아닐 수 있는) 그런 강조가 있는 그런 성격이니까, 그 표지와 함께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그런 성격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표지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거지요. 그래서 계속 이 의식을 행하도록, 우리가 기념하도록 하셨잖아요. 그러면 그때 그 특별하게 그리스도께서 부여해 주신거지요. 그러니까 로마서에 있는 것처럼, 분명히 다른 편지와 똑 같이 생각할 수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울 사도가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주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가르친, 또 기념하라고 주신 내용이다”


질문 : 성찬식에 그리스도가 편재하시기 때문에 실재로 임하실지라도, 결국 그 성찬의 떡이 가지는 의미가 그렇게 기념하는.... 떡에 육체로서 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쯔빙글리가 말하는 기념론적인 것과 기능적인 것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답 : 그러나 기독론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해야죠. 기독론에는 차이가 있으면 결정적인 것이죠.


질문 : 성찬 자체에 ceremony(의식)만을 부여하는 것에 있어서는 결국 쯔빙글리하고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답 : 그러니까 모두가 다 미사의 성격으로, ceremony(의식)의 성격은 루터주의가 가깝게 되겠지요. 그러나 루터주의는 더 강하게 표징 정도가 넘어서서, 은혜를 받는 도구를 넘어서서, 거기에 그것(성찬)에 대해서, 구원의 필연성을 강조해요. 그것(성찬)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조금 다르지만, 쯔빙글리하고 우리하고 차이는 기독론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쯔빙글리는 성령론에 의해서, 영적으로 임한다는 이런 개념정도가 아니고, 기독론에 의해서 Totus Christus가 편재한다는 면에서 무게를 주어야 하지요.


질문 : 떡 자체를 이해하는 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요?


답 : 떡 자체를 이해할 때보다도, 그 은혜를 받는 특별한 수단으로서의 독특한 자리는 경건하게 유지되어야 하고, 바울 사도의 지적처럼 그것을 보존해야 할 것을 강조한 셈이 되지요. 그러니까 Totus Christus가 임재한다는 이 말 자체가 갖는 성격은 크지요.


질문 : 그러나 성찬이 없어도...


답 : 그런데 그런 개념이 있어요. 카톨릭 부패는 무엇이 있냐고 하면, 카톨릭에 opus operans 또 opus operantum, 이런 개념이 있어요. 성례의 집행의 경우인데, 그러니까 집례자가 부패해도 그 성례 자체는 거룩하다. 그것을 구분하는 원리가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교회에 있는 성직자가 부패해도 성례만은 거룩하다. 효용성이 있었어요. 그런 개념이 여기에 적용이 될 경우에는 상당히 문제가 생길 수 있지요. 그런 면에서, 그 만큼 어느 시대에나 transsubstantia(트란스서브스탄티아, 화체설)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도 부패가 있고, 아까 말한 대로 Totus Christus가 이렇게 실재한다고 하는 경우에도 부패가 있을 수 있는 거지요. 그 만큼 성경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성격이 무엇이고, 또 신학적으로 칼빈이 Totus Christus가 임재한다고 강조하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이것을 좀 우리가 바르게 교회 안에서 표지로서 드러내어야 할 것을 강조해야 할 부분이지요.


기도하고 마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역사 속에서 주의 진리가 심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이 늘 개입되었고, 또 인간의 부패가 늘 거기에서 함께 하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많이 손상되는 역사의 내용 가운데, 우리가 거기에 늘 참여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자들이오나, 늘 주께서 교회 안에 늘 진리를 보전시켜 주시고, 또 여러 가지 오류로부터 벗겨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유산 속에서 바른 진리를 이렇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서 세우신 거룩한 진리가 교회 안에 정착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가 보전이 되고, 진리가 보전이 되며, 주의 역사가 늘 교회 안에 있으며, 우리가 그 안에서 늘 위로를 받고 또 새롭게 되고, 영의 양식을 통해서 우리가 성장하는 그런 교회의 기능과 함께, 우리가 이런 진리를 보전하는 그런 장본인으로서 늘 주님의 은총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연약하오니 우리에게 지혜도 주시고, 우리는 벗어나서 멀리 갈지라도, 주님은 친히 찾아 오셔서, 다시 우리의 길을 다시 돌이키게 하여 주시오셔서, 비록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로부터 이렇게 보존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 보존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런 삶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출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FB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