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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특강 VIII - 김영규 교수

Bavinck Byeon 2018. 5. 8. 12:42

기독교 강요 특강 VIII

- 칼빈의 신학적 배경과 칼빈 신학의 독특성 -


김영규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녹취: 김기현 강도사(은총교회)

강의 연도: 2004.9.30, M.Div수업


*[본 강의안은 강의를 녹취하신 김기현 강도사님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제5강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과 그 배후 신학적 특성


1. 본문: 마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13:18-23.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말씀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 심어놓으신 차원에 대한 것인데,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가장 평범한 그런 상식으로 알 수 있는 언어로 계시되었고, 또 그런 내용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그 말씀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 말씀이 땅에 심어지는 그런 정착의 내용들은 그렇게 쉽지 않고, 상당히 전 우주적인 성격에 가까운 그런 성격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들은 그 말씀이 땅에 심어지는 경계선을 의미하는데, 그 경계선이 우리의 진실이나 또는 우리의 역사성이나 이런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지요. 어떤 보편 인간에게 이것이 진실이다. 진리이다. 또는 역사적이다. 역사적이 아니다. 그런 어떤 기준에 의해서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것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시작하여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특별히 사도들을 통해서 계시될 때, 그 깊은 성격이 좀 더 아주 자세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이렇게 봐야 되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 참 아주 쉬운 것이지만, 그러나 실제 한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신비롭고, 또한 하나님의 가장 큰 권세의 능력이 거기에 발휘되는 그런 영역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리석고 나태하며 또 우리가 머무르는 곳은 늘 평안을 찾고 우리가 기뻐하는 곳에, 우리의 안식처를 삼으며, 늘 거기에 맴도는 그런 삶에 형태를 좋아하는 우리의 연약한 자들에게, 주께서 창조에서 심어주기를 원하는, 그 놀라운 가치의 내용을 우리 안에서 찾으시고, 구현하시기를 원하시고, 또 끝까지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고 역사하시고, 우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며, 또 우리에게 대해서 열심을 품으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 늘 감사하옵고 영광스러운 주의 거룩한 역사에 대해서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는 늘 연약한 모습으로 있더라도, 주께서 붙드시는 한에 있어서, 우리가 말을 바라고 생각을 주의 말씀으로 돌리며, 또 우리의 삶의 내용을 그 말씀에 맞춘 그런 내용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초대된 주의 귀한 종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 말씀 때문에 우리가 생명으로 살 수 있다는, 그 큰 권세를 얻게 된 그런 내용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특별히 어려운 그런 삶의 내용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하시고, 우리 마음속의 깊은 혼돈 속에 있는 그런 모든 것들이, 제거될 수 있도록 역사 해주시며, 또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많은, 푯대를 바라보고 있는 그런 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그런 삶의 기초를 제공하고, 또 그들에게 희망을 제공하고 빛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칼빈에서만 그런 내용을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니고, 여러분이 바로 마10:28-29을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 그래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니하리라“, 이런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의 저항의 내용이지요. 이 말씀 자체가 저항의 내용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 증거 된 대부분의 많은 내용들은 시대의 큰 고난 속에 있는 자들, 외로운 자들, 나그네 된 자들, 그 시대 어떤 자들에게 동의를 받지 못하는 자들이, 결국 진리를 쥐고서 살아가는데, 큰 고난을 겪고 있다는 이런 말이지요. 그때 그 진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것으로 인하여 계속 놓지도 못하고, 계속 마음에 깊숙이 더 이렇게 풍만해지고 더 커지는, 그런 가운데 당연히 이런 그, 몸과 영혼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자, 결국 하나님의 섭리의 성격들,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이런 지식으로 말미암아, 결국 두려워하여서, 결국 이 세상을 이겨가고 있는 그런 저항정신의 중요한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는 건데, 이런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칼빈에게만 새로운 것이 아니고, 루터에게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루터의 경우에도 역시 세상 모든 지배세력 앞에서, 마치 진리를 쥐고 서, 홀로 서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늘 대적하는 자이고, 그에게 가치를 떨어뜨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침묵하고 취소하고, 그리고 멀리 바라보는 자로 있는, 그런 인간의 모습 속에서, 여전히 홀로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주의 선지자들에게도 늘 교훈하시는, 또한 그런 선지자들에게도 계시하여 주셨을 때에도, 그들이 홀로가 아니고,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이 거기에는 있다는 것을, 늘 위로로 삼게 하는 그런 내용조차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함께 교회가 존재한다. 즉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모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관련된 내용이 거기에 동원이 되어서, 어떤 저항의 내용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신학적인 내용으로 고백하는 내용들이 가장 뚜렷하게는 이와 같이 저항의 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또 저항의 무기로서, 또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결국 실제적으로 그것이 무기가 된다는 그 말은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라는 거지요.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그런 것이 무기로 되어있다. 또 저항의 방식으로 되어 있고, 원리로 되어 있다. 그런 것만큼 그것을 지켜나간다. 또 이것을 내가 유지한다. 이것 자체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보면, 아주 미묘한 성격으로 되어있다는 거지요. 경계선이 모호하다는 말 이예요. 그런 면에서, 제일 먼저 폭력을 가지고 진리를 위압하고, 빼앗아 가려는 것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진리를 포기하도록, 삶에서 우리의 진리를 빼앗는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이제 경계선이 아주 모호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적용되는 선에서는 굉장히 모호한데, 그 모호한 선에 있을 때, 그때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은 무기도 되지 못하고, 또 저항의 원리도 되지 못하고,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자리를 매겨야 되고, 전체 하나님의 말씀이 전체 신학적인 지식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런 것이 결국 깊은 사색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었다. 그렇게 볼 수 있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외적인 것 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 까지도, 하나의 원리로 되어 있을 때,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갖는지를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내용을 칼빈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한 개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렇게 영접이 되었을 때, 그것은 칼빈이 생을 통해서, 실제 체험한 내용을 통해서도, 굉장히 어렵게 믿음이 거기에 표징으로 있게 되고, 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사실상 어려운 부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신경에서 내가 믿는다. 세 위격에 대해서 나오잖아요. 성부하나님에 대해서 믿는 것, 그 다음에 성자 하나님을 믿는 것, 또 성령 하나님을 믿는 것, 이렇게 되어 있는, 마치 구조적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신경을 주로 교리의 기초로 두고자 하는 루터의 경우에도 삼위일체론 조차도 축소시켜서, 마치 사도신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본문을 그대로 드러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생각하는 그런 이해도에 있어서, 상당히 종교개혁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 루터의 요리문답의 해석에서 보면, 마치 사도신경을 이렇게 해석했어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 다음에 성령하나님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이, 물론 루터자신도 충분하게 과거역사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고, 또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에서 보시면, 시편이나 또는 구약의 성경에서 나타난, 그런 많은 주체, 하나님을 표현할 때는, 거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아주 구분됨이 없이, 동시에 거기에 주체로 표현되어 있는 그런 주석의 성격을 루터의 경우에도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루터 자신이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신경을 해석할 때, 그런 틀을 거기에서 주로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루터를 절대화 시키면 시킬수록, 또 그의 신학적 사상도 절대화 시켜져가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선생으로 삼고 있는 많은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의 도그마적인 성격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그런 큰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칼빈의 경우에게도, 초기 기독교강요 1536년판에는 그런 오해가 될 만한 내용이 상당히 있었어요. 그래서 그의 강조를 보면 그런 내용이 볼 수 있는데, 여러분들이 지난번에 제가 소개를 하다가 말았지만, 수련회 때 제공된 자료 16페이지에 보면 그런 내용이 좀 나와요. 우리가 1559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 1536년판의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데, 문제는 여기에 이제, 우리가 사도신경을 해석하는 그런 것들이 1536년부터 시작이 되어서, 1536년 판에는 율법, 사도신경, 주기도문 해석 순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들 각각이 해석이 되는데, 1536년판에서 1550년판에 사도신경 해석이 있고, 1559년판에 완전히 개정이 되는데, 이때 1559년판에서 이런 구조가 사라지게 된다는 거예요. (율법에 대해서, 사도신경 해석에 대해서, 주기도문 해석에 대해서 라는 구조가 사라진다는 것) 물론 여기에 1539년판 부터는 locus(로쿠스, 주제)가, 다른 주제들이 많이 등장을 하지요, 그래서 율법에 대한 주석 이외에도, 다른 많은 주제들이 하나의 장으로 이렇게 등장하는데, 그것을 유지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이 틀은 변치 않는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사도신경에 대한 주석) 1559년판에는 사라지면서, 없어지면서, 율법에 대한 주석과 주기도문에 대한 주석이 예외적인 부분으로 돌려지고, 결국 사도신경이 사라지면서, 율법을 해석하는 부분이 기독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사도신경이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하나님, 이렇게 되어 가지고,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을 것 같은, 이런 인식이 되어 있는데, 실제적으로 이런 부분에 들어간다는 말이 되지요. 그래서 사도신경이 사라지는 대신에, 사도신경이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도신경으로 전체 구조가 형성이 되는 이런 형태로 기독교 강요가 형성이 되는 것이지요.


<판서하시면서>

율법->사도신경->주기도문 

1539 locus(주제) 등, 다른 주제가 등장

1550년

1559년 율법은 사도신경 안에 기독론에 들어감.


그래서 기독론 안에 율법도 들어가는 이런 성격이 되어서, 결국 삼위 일체 전체 구조를 가지고 있는 틀이 되어 있게 되는데, 그러면 이때, 과연 1536년판에서는 루터로부터 얼마나 자유스러울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여기에 약간의 다른 어떤 내용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16페이지에 있는 대로 ‘성부를 역사의 원리와 만물의 샘과 근원’으로서 이해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성부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또 ‘성자를 역사의 지혜와 의논’이다. (성부는) 행위자의 원리인 반면에, (성자는) 행위자의 지혜와 의논이다. 그래서 영원한 의논자라고 성자가 표현이 되어 있어요. 또 성령을 ‘행위의 능력과 유효성’이라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여기에 마치 성부가 근원이라, 또는 원리라, 그리고 성자는 마치 원리가 아닌 것처럼, 이렇게 생각된 부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내용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본질 안에 세 독특성(proprietate, 프로프리에타테)이라 표현했어요. 후대에 가서 이제 삼위일체 간에 정의가 분명히 되어가지고, 공유할 수 없는 독특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이런 공유할 수 없는 독특성 안에서 구별된다. 또 공유할 수 없는 그런 독특성에서 distinguit(디스팅구이트, 구별된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 개념을 쓰는 거지요.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될 수 없는”, 이런 성격이 거기에 이제, 분명히 이런 개념만(구별) 쓰고 있습니다. 구별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런 정의가 결국 나중에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는 오히려, 초기에는 세 독특성이라 이렇게 말해요. 세 독특성,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그만큼 서로 구별되는데, 그 독특성은 영원히 유지되는 그런 위격들 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위격은, 그렇게 각 위격은 독립적인 성격을 강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이제 그, 좀 더 성부, 성자, 성령의 내용으로 사도신경을 분석하는 루터로부터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구조가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각각의 독립성을 어떻게 하면 보존을 하면서, 일체, 삼위일체, 일체, 삼위일체의 역사에서는 늘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이 있죠. 이런 성격을 보존 시킬 수 있는가? 하는 그런 개념을 이렇게 많이 노력을 했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런 개념으로 구별되되, 구별되되, 공유할 수 없는 그런 독특성에서 구별된다. 이런 개념이 결국 1559년에 있어서 확고하게 정착이 되어 있는데, 초기에는 이와 같이 개념자체가, 본질 안에 세 독특성이라, 그러니까 세 위격을 표현하더라도, 세 독특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동일한 본성과 본질 안에 위격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을, 그 자신의 고유한 것을 가진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로부터, 성부는 고유하고(propria), 구별된다(distincta), 그 특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구별은 유일하게 위격에 의해서 구별이 되고, 그러나 일체성은 실체, substantia(서브스탄티아, 실체)든지 essentia(에센티아, 실체 혹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지만, 구별된다는 이 말은 persona(페르소나, 위격) 개념에 있어서 구별되고, 그때 persona(페르소나)의 개념은, 거기에 아버지로부터 고유하고, 또 구별된, 그런 특성을 갖는 그런 위격이라! 이런 표현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말하는 역사의 원리, 또는 만물과 샘과 근원의 원리로서의 성부와 또 역사의 지혜와 의논으로서의 성자, 또 역사의 능력과 유효성으로서의 그런 성령, 이렇게 고유성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표현이 됩니다. 그런 증거가 있는 반면에, 그러면서도 특별히 성부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라고 불리는 것은 참으로 성부 자신이 고유하게 행하신다고 말하지만은, 그의 말씀 혹은 그의 지혜에 의해서 행하시고, 그의 능력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에, 원인에 있어서, 전에 우리가 역사의 원리로서 성부에 돌린 그 독특성이라 하였던, 그것에 의해서 구별된다. 원인에 있어서는 구별된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말하기를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것을 세 위격의 공통된 사역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벌써, 이때 강조된 이런 개념이, 루터로부터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창조, 기타 섭리가 있다면, 그런 내용이 다 결국, communis trium personarum actio(세 위격들의 공통된 사역), 그러니까 벌써 1536년 판에서부터, 일반적으로 루터주의가 가지고 있는, 또는 루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로부터, 그로부터 벗어나면 이단이 되니까, 카톨릭의 오랜 전통, 그런 전통이 정확하게 균형이 잡힌 내용으로 전달이 된 형태로 기독교 강요 1536년판에 정착이 되었다는 말 이예요. 그래서 창조 같은 이런 내용들은, 이와 같이 세 위격의 공통적인 사역이라! 단지 여기에 표현된 대로, 성부가 주체로 되어있지만, 여기는 성자가 ‘말미암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또 ‘그의 능력 안에서’ 이 말은, 실제적으로 ‘성령 안에서 행 하신다’. 이런 개념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개념에 있어서, 무엇 무엇으로부터 한다면 엑스(ex, --로부터)로 된다면, 그 다음에 per verbum(페어 베르붐,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in vertute(능력 안에서), 이렇게 된 개념으로, 전치사 관계로, 그러면 삼위의 공통적 사역이라고 했을 때, 하나는 ex(--로부터)이고, 하나는 per(말미암아), 하나는 in으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말 이예요. 그러니까 어느 예를 들어서 ex patre(엑스 파트레, 성부로부터), 그 다음에 per filium(페어 필리움, 성자로 말미암아), in sanctum spiritum(인 상크툼 스피리툼, 성령 안에서)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원인의 개념이었다는 것이에요. 모든 것의, 역사의 원리로서의 성부에게 독특성을 돌리는 그런 방식이었다. 그런 형태였다. 이렇게 말을 하고, 그의 공통된 사역이라! 그래서 이런 면에서 좀 더, 창세기의 ‘우리 안에서’는 천사들과 더불어 숙고하는 것이거나,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혜(성자)와 능력(성령)에게 변론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창1:26을 해석했어요. 그러니까 창1:26절에서 “우리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했을 때, 거기에 천사들이나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기에서 의논한 것이 아니고, 성자에게 또 성령에게 변론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아드보카트(advocat, 변론한다)라는 말을 썼어요. 그러니까 천사들과 함께 의논하는 것, 서로 같이 숙고하는. 천사들과 숙고하는 것이나, 자신과 자신에게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그러니까 일체이지만, 삼위일체이지만, 우리가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다면, 그것은 일체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하지만, 일단 우리가 서로 이야기 한다. 대화한다. 또는 말한다. 어떤 그 ‘의논한다’ 이런 개념에 있어서는, ‘실체(substantia 혹은 essentia, 실체라는 말은 자체라는 의미도 된다)라는 개념에서는 쓸 수 없고, 위격만 쓴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에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서로 변론한다’. 이렇게 되어있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칼빈이 1536년판에 표현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런 최소한의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루터적인 입장에서, 그 어떤 사도신경을 해석하는 그런 이해하고는, 이런 차이에서 벌써 상당히 훨씬 체계적이고,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이 정확하게 이렇게 반영이 되데, 그러나 성경이 가지고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고유성들을 가장 잘 반영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기독교강요 1559년판에 일권, 이권, 삼권, 사권을 이해 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라는 개념,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했을 때, 그 개념이 거기에서 이런 구조를 가진, 그런 독특한 구조를 가진 개념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을 늘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루터의 자신의 요리문답 해석, 또 사도신경의 해석과는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믿는다” 했을 때, credimus(우리가 믿는다), 혹은 credo(내가 믿는다)라고 했을 때는, 그 개념이 아주 그 신론과 분리될 수 없는 성격으로, 이렇게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개념인 것이지요.


2. 문제는 이런 개념에 있어서, 신론이 이렇게 확보되었을 때, 과연 ‘믿는다’는 개념이 어떤 개념이었는가? 하는 것이 이제 중요하지요. 과거에 이제 어거스틴으로부터 우리에게 알려진 그런 내용인데, 특별히 그의 ‘참된 종교에 대하여’라는 그런 책에서 보면, 세 가지 개념이 나옵니다.


<판서하시면서> 거짓 신앙 가운데서 세 가지 개념이 있다. 즉 역사적 신앙, 일시적 신앙, 지적 신앙 이런 뜻입니다.


Augustinus(어거스틴) De vera religione(참된 종교에 대하여)

fides historiae (역사적 신앙) 

fides temporalis 일시적 신앙

fides intelligentiae 지적 신앙


이 개념을 실제적으로 여기에 하나 더 붙이면 기적적이다. 기적신앙이 하나 더 해져서, 여러분들이 마태복음에 있는 성경말씀에, 여러분들이 오늘 첫 번에 읽는 내용이, 여러 분들에게 소개된 내용 가운데 마7:21과 그 다음에 마13:18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뿌려지는데’, 거기에 여러 대상에 대해서 뿌려지는 가운데, 그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어요. 이때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되’ 이런 표현이 있어요. 결국 이런 내용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진리이든지 또는 그 사실에 대한 정확한 어떤 믿음의 흔적, 믿음의 어떤 초기적인 단계들, 어떤 지적 현상들, 이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일시적인 신앙으로서 남아있는, 그런 형태들이 실제 거짓신앙 가운데 있다는 것예요.


물론 이런 내용들은 이제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훨씬 더, 영적인 피조물인 마귀나 사단의 경우에 훨씬 더 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뜻도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제 기적신앙, 마태복음에 있는 그런 내용에 있는 7장의 경우에는 기적신앙도 참된 신앙이 아니다. 이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말씀이 아니고,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에서 늘 표현이 되어 있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정착이 되는 그런 과정에서도 확증이 된 내용입니다. 비록 모든 이가 언약백성으로 초대되어서 부르심을 받지만, 실제 그의 백성에 해당된, 그런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의 백성이라고 해당된 사람들은, 극히 적은 수에 불과했던 것이라는 것이, 역시 출애굽사건에서도 충분히 증명이 되었어요. 그때 증명이 될 때, 결국 기적신앙에 의존해서 신앙을 갖고 있는, 그런 형태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와 같이 일시적인 신앙에 가까운 그런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그분이 행한 것,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그분이 행한 것 중에서 이제, 결국 최종적인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근본적인,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그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이적을 행하여서, 그 이적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유익을 주는 그런 형태,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이렇게 표현이 되어서, 실제적으로 많은 자가 따르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그런 모든 기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결국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심어질 때, 얼마나 어려운 성격이고, 또 그것이 시대에 있어서, 한 개인에 있어서도 반응에 근거하지 않고, 근원적으로 전혀 다른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은, 그렇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헤아리기 어려운 그런 부분이라는 것을 확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최소한도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런 개념(assensus, fiducia, notitia)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어요.


<판서하시면서>

asensus(에센수스, 감정) 

fiducia(피두키아, 의지)

notitia(노티티아, 지식)


과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지요. 초반에 여러분들에게 소개된 내용 가운데서, 결국 그런 루터의 독특한 개혁의 내용을 충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그 당시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개념, 독특한 내용들을 이렇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했는데, 최종적으로 칼빈이 개혁했던 내용은 이 notitia(노티티아, 지식)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 결국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런 말입니다. 결국 그 동안의 모든 부패의 원인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런 어떤, 인간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늘 있는 전통의 개념, 또는 의식의 개념, 그런 것에 의해서 신앙이 규정이 되고, 신앙이 평가되는 이런 형태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심리적인 상태들’, 또는 ‘의지적 성격들’, 얼마나 그가 굳게, 자기 스스로 의지를 굳게 해서 표현되는가? 이런 것이 여기에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것(assensus[감정], fiducia[의지]을 결국 비판하고, 이것[notitia, 지식]을 강의했을 때, 이것[notitia, 지식]을 포함시켰어요. 훨씬 이것[notitia, 지식]에 강조를 두었어요. 지금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가장 중요하게 기독교강요 1536년판에서는 그런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었던 그런 내용을, 여기에 지금 1559년 판에는 사도신경이 전부 없어지면서, 근본 배경으로 두면서, 그 개념을 가장 크게 부각을 시켜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믿음에 대해서, 결국 사도신경의 해석으로서, 거기에 중요한 것은, 이 notitia(노티티아)개념을, cognitio(코그니티오, 지식)의 개념을 발견하고 있어요. 그때 cognitio(코그니티오, 지식)는 누구에 대한 지식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에 기초된 사도신경 해석에 의해서, 1559년판의 구조를 형성시켰다. 그런 뜻에 가까운 것이지요. 그때 이제, 어떻게 notitia(노티티아, 지식)가 그렇게 cognitio(코그니티오, 지식)가 강조되었냐? 했을 때는, 결국 credimus(크레디무스, 우리가 믿는다), ‘내가 믿는다’ 했을 때, 그 ‘믿는다’의 개념에 있어서 assensus(어센수스, 감정)나 fiducia(피두키아, 의지) 개념 보다 훨씬 더 nonitia(노티티아, 지식) 개념에 강조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목이 형성이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은 원래 없었는가? 그러니까 원래부터 있었는데, 늘 마음속에 루터가 가지고 있는 그런 선들, 예를 들어서 율법에 대한 해석, 사도신경에 대한 해석, 주기도문에 대한 해석, 이런 라인을 외형적으로 유지하다 보니까, 결국 1550년판에까지 계속 유지했는데, 결국 그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그가 의도하였던 그런 내용들이, 그런 방식으로 표현이 안 될 것 같기 때문에, 완전히 뒤집어엎었어요. 마지막 개정판(1559년판)에서 다 허물어뜨리고, 자기가 처음에 의도했던 그런 방식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그런 형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내용이 얼마큼 1536년판에도 반영되어 있는가? 하는 중요한 내용들을 우리가 확인하기 위해서, 일단 1536년판의 경우에 율법에 대한 해석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에 대한 두 구분을 언급할 때,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536년판에 몇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를 보면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의와 선과 긍휼과 진리와 생명”이라는 그런 사상입니다. 이 개념이 어떤 개념이었을까?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데, 뒤에 본문 자체의 구조를 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교재 29페이지에 보면, “인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문제를 그가 먼저 표현하면서, 결국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아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이것을 논하게 되지요. 그때 칼빈이 발견한 주된 개념은 ‘하나님을 앎으로 자아가 인식이 된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가지고, 칼빈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런 지식이 결국, 자연을 보는 시각, 또 자신을 보는 시각, 이런 시각에 모두 반영이 되는 그런 구조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주 예리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인식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칼빈이 들추어 내는 그런 방식이지요.


일찍이 이런 그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의와 선과 긍휼과 진리와 생명이다” 이런 말은 summum bonum(쑤뭄 보눔) 사상이라고 해서, ‘최고 선’의 개념으로 이해되었었다고 말할 수 있었지요. 특별히 쯔빙글리부터 특별히 그런 것이 강조가 되었는데, 즉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의와 선과 긍휼과 진리와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외에는 어떤 근원이 없다’ 그렇게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 의미는 하나님의 자유성에 관계된다고 볼 수 있고, 이런 자유성의 개념은 일찍부터 어거스틴 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이고, 또 현대의 많은 사상에도 영향을 끼친 그런 내용이면서도, 루터의 경우 결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루터의 경우, 자유의지에 대한 에라스므수에 대한 반박문으로(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노예의지를 강조했을 때, 그때 가장 강조한 내용은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왜 그러냐? 했을 때는, 자유의지가 발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그런 자유의지가 어떤 형태이든지, 선에 대한 추구이든지, 선에 대한 어떤 기울임이든지,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선에 대한 기울임이 불가능하다. 그런 것이 결국 원죄가 가지고 있는, 그런 근원적인 죄, 성향, 이런 것을 분명히 염두에 두기 때문 만에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때문에 그렇다는 거지요. 즉 자유의지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현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순수하게 중용적이든지, 또는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든 선을 추구하고, 선을 이렇게 판단하고, 이런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결국은 불가능하다.


그런 원리에 의해서, 이제 자유의지는 순수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사용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된다. 그러면 인간에게 사용되는 경우는 특별하게 어떤 경우에만 타당하냐? 그런 경우는 자기의 책임과 관련해서, 즉 ‘낮은 원인’에 관련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칼빈의 개념에 의하면, ‘가까운 원인’에 대해서만 자기가 그 자유의지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라는 것은 책임과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어도, 그러나 원인, 근원적인 원인에 관련해서는 그 자유의지의 개념을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 표현이 되어 있고, 그러면 자유의지는 일반적으로 그런 ‘먼 원인’과 관련해서 전적으로 자유의지는 노예와 같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그래서 사탄의 노예이든지, 하나님의 아래에 있는 모든 그런 종속적인 성격, 이런 것에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이제 루터에게서 그렇게 발견된 자유의지 개념에서, 벌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자유성이 어떤 개념인가? 종교개혁 시대에, 벌써 1520년대에 이렇게 확고히 심어졌다는 겁니다. 1519년에 ‘노예 의지론’이 발표되었기 때문이지요. 비록 동료의 이름으로 보낸 헌신의 책이고, 편지처럼 되어 있는 그런 글이지만, 거기에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뭐!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현대 과학에 의해서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아주 분명하게 증명이 되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민주주의의 이념이든지, 또 인간의 가장 큰 가치 중에서, 생명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든지, 이런 개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많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에 의식과 더불어서 자유의지가 있다. 이렇게 했을 때, 의식의 자유성, 자유성이라는 것은 자유의지로 표현이 되는데, 그러나 그런 자유의지는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 아주 제한된 성격이고, 훨씬 더 인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의 자아 이외에도, 다른 많은 자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특별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생물학적인 자아의 개념, 생물학적 자아의 개념은 쉽게 면역체계에서 알 수 있어요.


현대과학에서는 자아의 개념은 의식의 자아를 자아라고 하지 않고, 수많은 자아의 개념 중에서, 이제 예를 들어서, 면역체계 안에서 자아의 개념에 훨씬 더 무게를 두고 있어요. 그러니까 의사에게 여러분들에게 갔을 때, 나 아프다! 아프다! 나 여기 아프고, 저기 아프다! 그러면 그것을 듣지 않는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이렇게 아파서, 그 아픔을 보고 그 다음에 의사가 이렇게 진단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의사가 실제적으로 진단을 했을 때는, 그 말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고, 그 말에 담겨있는 다른 어떤 예상되는 어떤 원인을 그 말에서 찾는 것 뿐 이예요. 실제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혈압을 재고, 온도를 재고, 그 다음에 뇌신경을 측정하고, MRI를 해 보고, 이런 데 훨씬 더 많은 인과론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이런 면에서 병의 진단이 전혀 다른 것인데, 과거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1882년에 면역체계 중에서, pathocytes 쉽게 말해서 이런 개념은 힌핏톨의 개념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건데, 힌핏톨을 발견해서 노벨상을 받았어요. 노벨상을 어떻게 받았냐 하면, 즉 림프체계가 없는, 그런 포유동물이 아닌, 예를 들어서, 아메바는 아니지만 하등동물의 경우에, 불가사리 같은 경우에는 저항체계가 어떻게 되었을까? 신경체계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불가사리는 뇌가 있을 것 같아요? 없을 것 같아요? 뇌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똑 같이 생겼어도, 지렁이처럼 생겼어도, 머리가 있다는 말 이예요. 지렁이는 머리가 있어요? 없어요? 지렁이도 머리가 있습니다. 지렁이는 적어도 신경조직이 어느 정도 하나로 중심체가 있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 이렇게 불가시리를 이렇게 그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는 여기가 중심이 있으니까? 분명히 중심이 있을 것 같지요. 그런데 이 경우는 신경이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이런 경우는 머리가 없어요. 신경세포 하나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다른 것은 ...?


그런 세포의 경우에 그러면 과연 다른 외부에 있어서 병균이 침입했다. 그랬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그렇게 했을 때, 그와 같이 이렇게 림프체계 같이, 그렇게 고등동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잡한 시스템을 같지 않고, 이런 경우는 유일하게 이런 세포 자체 내에, 오직 힌핏톨만 있어요. 그래서 어떤 현상이 있냐면, 여기에, 이것의 유충을 모아가지고, 유충은 내부가 보일 정도로, 아주 연약한 생명체이죠. 그런 생명체의 면역체계를 보기 위해서, 가시를 한 번 찔러 보았더니, 그 다음날에 보니까, 여기에 가시가 있다면, 여기에, 이 근방에 힌핏톨이 굉장히 모아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외부에서 균이 들어오면, 이 힌핏톨에 의해서 잡아먹는 것이죠. 외부에서 균이 들어오면 잡아먹기 위에서, 그러니까 힌핏톨이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외부에 균이 들어오면, 이렇게 쌓아가지고, 죽여 버립니다. 이런 힌핏톨 역할을 하는 이런 체계가 있는데, 즉 신경 세포 하나일지라도, 결국 이런 힌핏톨이라는 존재가, 그가 의식하든 상관없이, 이런 외부의, 자기 피부, 겉면의 피부에 외부세력이 왔을 때, 이것에 대해서, critical 공간, 비판적 공간이, 그러니까 비판적 공간이 내부에도 있어가지고, 적이 침입을 했을 때, 적이 어느 곳에 왔더라도, 적이 침입한 곳에 달려들어서 죽인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제 아주 극히, 동물로부터 약간, 식물이 아니고 동물정도, 물론 미시 세계에 가면 식물과 동물이 구분이 안 되는데, 동물의 경우에는 좀 더 하등동물의 경우에는 이런 현상으로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발견으로 처음 소위, 병의 인과적인 관계에 대해서, 처음 객관적으로 증명하게 되는 첫 발견이기 때문에, 결국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즉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non 자아하고, 자아하고 구별을 하는, 그런 생물학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지요. 고등동물에는 현저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런 예도 예이지만, 오히려 쉽게 말해서, 훨씬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자아가 non 자아를 구별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자아가 자기 행위를 했을 때, 이때 훨씬 병이 많다는 겁니다. 실제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의 세포가 다른 우리의 건강세포를 죽여서 죽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겁니다. 훨씬 많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래요.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의 세포가 건강한 세포를 죽인다는 겁니다. 실제 여러분들이 알레르기가 있잖아요. 알렉르기는 non자아하고, 자아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아의 과도한 성격 때문에 생깁니다. systemic이라는 것은 자아가 구별을 못해 가지고, 적과 구별을 못해가지고, 너무 지나치게 과도하게 systemic을 발휘함으로 그것의 역반응으로 알레르기가 되는 겁니다. 대부분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를 이롭게 하는 그런 저항 체계의 systemict에 있어서, 이와 같이 균이 오면, 균을 죽이는 그런, 예를 들어서, T세포 같은 이런 경우는, 실제 오늘날 같이 에이즈는 T세포만 죽이는 경우입니다. T세포가 죽으면 T세포가 없어져 버리니까, 벌써 저항할 수 있는 길이 없어졌어요. 우리가 말하면 병원체가 들어오면, 거기에 안티겐(antigen, 항원)이 있으면 안티케포가 있고, 이래야 되거든요. 그런데 안티케포, 그러니까 어떤 안티겐, 적(균)이 들어오면 덮어 씌워가지고, 실제적으로 바이러스를 죽이는 실제, 병정놀이를 하는 안티케포, 안티바디가 형성이 되어야 하는데, 형성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면역체계도 그때 생긴다는 말입니다. T세포에서 다른 plasma cell이 되고, 그 다음에 비 cell이 되요. 여러분들이 생물학 책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이 비 cell이 이제, memory cell이 되요. 이것에 대해, 병균이 도달했다. 그러면 적이 왔다! 그러면 빨리 죽여라! 하는 세포가 형성이 되고, 또 죽이는 세포가 형성이 되요. 그런데 이것이(면역 체계의 세포) 이 과정에서 형성이 안 되요. 벌써 T 세포가 형성이 될 때, 이것만 잡아먹는 거예요. 이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균이 오더라도, 저항, 면역이 없어져 버려요. 면역 결핍증이예요. 이것이 결정적 인 것이지요. 그래서 속수무책 이예요. 이것도 하나의 건전한 의미에서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런 기능이 없어져요. 면역 체계의 자아에 대한 기능을, 마지막 끝에서, 기능을 마비시켜서, 자아기능을 못하게 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과도하게 내가, 자아가 non자아를 구별을 못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생긴 많은 어떤 현상들, 이것이 훨씬 더 우리의 병의 근원 중에서 많다는 겁니다. 그 만큼 자아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의식이라는 자아는, 의식이라고 했을 때는, 그것은 지향적 초점이 있어야 된다고 해요. 지향적 초점이 있을 때, 그것이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세계라는 것은 아주 빈약한 세계 예요. 우리의 생명체에 있어서, 전혀 빈약한 세계라는 말 이예요. 의식이 있는 세계라는 것은 인간 세계에 있어서 독특한 그런 상징적인 것이지, 인간의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눈이라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보는데 불과한 것이고, 실제 눈과 같은, 외부에 대해서 정보를 받는 방식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폐에도 있고, 또 코에도 있고, 이 피부에도 있고, 수 없이 많다는 말입니다. 내장에도 많이 있어요. 단지 이제 이 눈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멀리 있는 것을 미리 알아서, 미리 예방효과가 큰 의미에서의 독특한 정보를 받는 창이지만, 전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에 있어서 의지라는 것은 그런 의미이고, 또 의지라는 것은 독특한 현상, 시간적으로 아주 독특한 영역이라고 그랬지요. 어떤 시간 동안에는 다른 세포 전체 활동이 있고, 그 다음에 의식이 이렇게 처음 등장해서 행동까지 갈 때에는, 아주 그 짧은 미크로 세계, 미크로 속도를 가진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여기, 그 이전에는 수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그 다음에 여기 발현될 때의 그 기간은, 실제 이 행동에 비해서는(의지가 생기는 것은 뇌에서 전체 0.5초가 걸리는데, 0.3초 이전에 뇌에서 실제 전체 활동이 이루어지고, 0.3초에서 의지가 발현되는 시점이 생겨서, 0.3초에서 0.5초까지 하려고 하는 의지가 나타난다는 것, 즉 0.3초에서 0.5초 사이에 발현되는 의지는 실제로 0.1초에서 0.3초 사이에 뇌의 활동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 훨씬 짧고, 아주 짧고 좁은 세계이다. 그런 의식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것, 윤리적인 감정은 의식과 함께 늘 있는 것인데, 이런 의식이라는 것은 인간 전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아 전체를 대표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루터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제가 루터의 말을 한 번 들려주지요. 루터는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굉장히 하찮은 존재이다”. 이런 개념을 쓰는데, 그래요. 찾다 보니, 쉬운 것이 아니네요. 어거스틴의 예에도, 어거스틴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련해서, 지향적 초점에 대해서, 우리의 지각이 안식하는 장소로서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루터의 경우에도 약간의 그런 개념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좀, 그래요! 다음에 한 번 확인해 봅시다.


여하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은, 이미 종교개혁시대에 자유의지도 가장 인간의 부패의, 죄의 부패의 가장 원천의 개념에 해당된, 그런 개념으로 비판이 되기 시작한 이래에, 결국 그런 선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발견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죄인의 성격, 이것이 이제 자아에 대한 지식의 원래적인, 그런 어거스틴 이래에, 특별히 종교개혁시대 새롭게 부각이 된 그런 개념에 해당된 반면에, 결국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개념에 있어서, 유일하게 그 자유성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데에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발견이 되었을 때, 그것이 이제,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발견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이, 자아에 대한 지식과 우리에 대한 지식이 비교는 되지 않았을지라도, 실제적으로 루터에게는 이미 있는 개념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단지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선이다”라고 했을 때, 그런 개념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굳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소크라테스하고 그의 제자인 ‘아이시네스’와의 대화하는 내용 가운데서 그런 표현을 써요. ‘나는 가난한 자이고, 나는 다른 어떤 것도 소유한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은 나 자신뿐이다(πεγής ειμι καί αλλο μεν ουδεν εχω, δίδωμί δε σοί έμαυτον, 소크라테스)’. 이런 말을 썼어요. 그때 소크라테스(469-400bc)가 ‘나에게 준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이렇게 표현한 내용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오늘날 소크라테스 그러면,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너 자신을 알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플라토의 저서를 통해서 특별히 추론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고, 실제적으로 자아가 발견된 것은 데카르트적인 ‘근대의 자아’의 개념입니다. 그때부터 자아 중심으로 생각을 했지요. 이때 발견된 자아가 ‘내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런 개념에서 자아의 존재, ego(에고, 나의 강조형)에 대한 발견인데, 소위 ego(에고)에 대한 발견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관념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과학적 공리와 같은, 유클리트 기하학에서 공리로 시작하는 그런 모든 수학적인 기초가 있다면, 이제 철학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그런 수학의 공리처럼, 과연 있을 수 있는가? 그런 공리론에 의해서, 자연과학적 공리론이 과연 철학에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가? 해서 시작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존재한다는 개념은 생각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그것은 피할 수 없이, 직관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이것이 자아로부터 시작해서, 그러니까 내가 발견되는 것이죠.


이것이 이제,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는 사색의 모든 것들이 회의론적인 방법론이 성립되었을 때, 과학적인 방법론으로서 결국 인문과학적인 방법으로, 독특하게 철학적 방법으로 발견이 되었을 때, 그 방법이 그 만큼 과학적 방법이 철학에서도 사용이 되고, 이제 역사학에도 사용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신학에도 나중에 사용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공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그런 것이죠. 공리론자들이 17세기에 많이 나옵니다. 또 과학에서 굉장히 충격을 받은 자들이 극단적으로 발전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개념이, 이런 자아에 대한 발견은 그 만큼 방법론으로서, 독특한 의미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서, 소위 자아론이, ‘자아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한다. 자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이런 개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이제 결국 나중에 지금 현대까지도 영향을 끼쳐서, 현상학파의 경우에, 에드문트 훗설의 경우에는 그가 이 자아를 어떻게 하면, 이 자아가 산출적 자아가 아니고, 가장 마지막 최종적으로 기초될 수 있는 그런 자아로서,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서 이런, 선험적, 환원주의 방법론이 발견이 되었고, 그 다음에 그때 발견된 개념이 ‘선험적 자아’이며, 그 ‘선험적 자아’는 그 자체에 sui generis이라. 즉 산출적 이면서, 또는 datum(다툼, 받다?)으로 되어 있는, 그런 개념으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 데카르트 주의입니다. 이 만큼 굉장히, 현대까지 영향을 끼치는 그런 내용입니다. 단지 이것을 반박하는 사람은 자아하고 대상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아예 포기한 자들이 실존주의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아보다는 다른 선행적 개념이 무엇일까? 하고 찾는 독특한 실존의 개념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실존의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대 철학에 있어서, 이 굵은 줄기는 아주 굉장히 중요한 발전의 내용으로서 이렇게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적인 근대철학이든지, 이렇게 발전에 있어서, 자연과학적인 방법이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문과학적인 어떤 영향의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이제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일찍부터 발전이 되었고, 그 다음에 플라토가 꽃을 피게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때 이제 소크라테스의 개념이라는 것은 ‘지식이 가장 중요한데, 지식이라는 것은 나를 모른다. 그러니까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늘 발견하는 것, 그러면서 지식을 발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제 자아도 적용이 되는 그런 개념이었다고 보니까,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이런 개념이 거기서 추론적 개념으로 이렇게 보게 되는 그런 관점이 생겼는데, 이런 개념들은 결국 거기에 강조에 있어서, 결국 ‘무지에 대해서 대응하는 그런 지식’, 이런 의미에서 확대된 내용이 이제 ‘지혜의 개념’으로 발전이 된 그러 내용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가 469년부터 400년, BC이니까 상당히 바벨론 포로에 가까운 그런 시대에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것입니다. 그 만큼 성경으로 본다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시대적으로 큰 범위를 가지고 있는 영향적인 사색 방식입니다. 결국 그 방법론이 소크라테스적이든, 데카르트 적이든,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방법론적인 시도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질적인 내용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자아로부터 시작해서 자아의 발견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서 무슨 일을 ? 것, 이런 것들이 오늘까지도, 아까 말한 그런, 자아이든지 non자아의 개념으로 시작해서 무엇이 흘러가는 것, 이런 인식론적인 출발입니다.


그러나 실제 어린애들한테 물어보면, 절대 자아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항상 대답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자아가 발견이 되고, 자아에 초점을 맞추어서, 자아가 초점이 된 사람의 경우는 상당히 많은 교육을 받은 후입니다. 한참 어떤 인식의 내용이 계속 발전이 되어 가지고, 그 다음에 자아가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자아에 대해서, 내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그런 형태가 있는 것인 만큼, 굉장히 한 개인의 정신적인 발전, 발육의 방식에 있어서도, 굉장히 후대에 나타나는 것이죠.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 만큼 역사에 있어서도 그런 형태입니다. 이런 것이 독특하게 과거에 고대의 과거의 문명에 있어서 없었던, 독특한 개념으로 발견된 개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는 개념이 소크라테스의 대화의 과정에서 ‘최고의 선의 개념’으로 ‘나에게 주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너는 생각지 않냐? 이렇게 말 속에서, 자기의 제자인 ’아이스네스‘가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마치 성경과 같아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내게 있는 것을 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있는 것을 주되, 네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런 것이 기본적인 정신이라면, 그때 ‘너 있는 것을 주라’ 했을 때는, 결국 있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것에 의해서 그에게 주는 것이다. 자신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이제 이때부터 발생했다는 겁니다. “나는 가난하다. 네게 다른 아무것도 소용한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 자신(마음)을 준다” 이것이 실제 하나님 자신으로 말하면, 창15:1을 보면 “나 자신이 너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다”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 하실 때는 ’나 자신을 준다‘라는 말입니다. 그때 소크라테스가 대답하기를 “나에게 준 것들인데, 가장 큰 것을 준 것이 아니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하나의 헬라 사상에 있어서, 가장 선망이 되고, 가장 위치가 있고, 그러면서도 뿌리가 되는 그런 시각의 초점인데, 결국 나 자신을 알라! 이런 특별한 개념이 발견이 되는 그룹 안에서, 물론 소크라테스가 처음 헬라에서 수사학의 첫 사람이고, 아카데미를 창설한 첫 사람이고, 헬라의 기원적인 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아는 방식을 알 때, 이렇게 소위 지식이 무엇인가? 인식론의 그런 차원의 지식이라고 할 때, 지혜에 거의 가까운 표현인데, 그때 그 개념에 있어서는 ‘무지로부터의 싸움’입니다.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을 대화를 통해서 계속 지적함으로써, 나 자신을 아는 것, 그 다음에 지식을 알아차리는 것, 지식이 좀더 깊어져 가는 것, 그런 시대에 소크라테스와 제자의 관계인데, 이런 대화의 내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가난해서 줄 것이 없는데,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은 나 자신 뿐이다.’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준 것은 가장 최고의 것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가 대답을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내용에서 결국 자아를 아주 높이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인간론적인 자아가 정신 사상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시대적인 환경을 대표적으로 표현해주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알아야 하는 내용은 이런 철학적인 방식, 그것은 만물의 시작은 물이 최고의 근원(아르케)이다. 이런 세상의 모든 원리를 설명하는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아르케(근원)를 하나님도 아니고, 물에서 시작합니다. 물론 탈레스 자체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만물(우주)을 설명할 때, 만물의 근원을 찾는 인과론에서, 관계가 이렇게 지속이 되어 가지고, 과거의 문명사의 모든 대답하고 전혀 다른 대답을 그때 출발해서, 소위 오늘날 과학의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인데, 정신적인 분야에서 이렇게 확대된 내용이 되었던 흐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적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데카르트적인 길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후대에 발생하기 전까지, 모든 길을 이렇게 칼빈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 파괴시키고 있는 그런 틀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때 기독교강요 1536년판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자아)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의와 선과 긍휼 진리와 생명’이라는 사상으로서 발견이 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무엇인가? 이렇게 되어서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즉 자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대비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것이 선행되느냐? 이런 차원에 있어서 벌써 1536년판에 정의된 개념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기초 위에서 그 다음에 “하늘과 땅의 존재하는 만물이 그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이런 사상이 나옵니다. 이제는 그러면 뭐냐 했을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였다는 겁니다. 창조와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그의 영광을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좀 더 풀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기독교 강요 1539년판부터 1559년판까지 발전된 내용이거든요. 그것을 좀 더 풀어가는 겁니다. 그때 가장 중요하게 푼 내용들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그 소유자에게 본래 소유의 성격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이것이 경건이고, 예배의 성격입니다. 그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것을 나의 것으로 돌리면, 그것은 탈취물이고 도둑이라는 겁니다. 그런 도둑질을 하지 않고,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지는 방식, 이것이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구조가 계속 설명이 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는 “그 자신이 의의 심판자로서, 그의 규례에서 벗어나서, 그의 뜻을 어기며, 그의 영광을 위하는 것 보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자에게는” 그런 비판에 대한 강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후대에 적정과 절도의 규범으로서 계속 강조가 되지만, 이미 1536년판에서도 그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이라, 그래서 적정과 절도의 원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sobrietatis(적정) et(과) modestiae(절도의) regula(규범)” 라 했어요.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성경이 어떤 원리 아래에서 사용이 되고 있는가? 어떤 원리로서 사용되고 있는가 할 때, 이 개념을 이해했을 때,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데,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해서는 안 되고, 침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한 것은 반드시 말하야 한다. 그러니까 성경에 대해서, 내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성경이 말하도록 하면 안 되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말하고, 성경이 말하지 말라는 것은 말하지 말라! 이 선을 긋는 작업이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에, 여기에 sobrietatis(쏘브레타스, 적정) 하고 modestiae(모데스티아이, 절도) 개념이라고 쓴 것이지요. 거기에 설명을 좀더 확대해서 붙여가는 과정이 1559년판까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방식에서, 호기심이 모든 학문의 동기라고 표현하는데, 학문이라는 것은 동기가 호기심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자연과학은 대부분 호기심입니다. 그러니까 순수과학이라는 것은 호기심입니다. 그것이 얼마큼 응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관계없이, 그것이 적용이라든지 기술로 발전하기 전에, 순수하게 학문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에 의해서 동기가 되어서 지식을 추구하고, 알고자 하는 것, 이것이 학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늘 정의되고 있고, 항상 강조를 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근원적으로 학문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호기심으로 묻는 물음을 성경으로부터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침묵의 조건입니다. 또 우리가 호기심이 아니더라도, 나 자신이 방해가 되어서, 묻고자 않(?)는 물음을 우리가 간직하고 있다는 겁니다. 침묵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가 안 되든, 또는 내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장애가 되던, 또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내가 침묵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 침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의해서 침묵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지금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말해요. 이게 이제 성경에 대한 해석 원리로서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조직신학 서론을 배웠으면, 그런 내용에 대해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데,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아서, 잘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있으리라 생각이 되요. 이런 외적인 해석학적인 원리로서, 이런 방식은 좀 더 깊어간다고 했죠. 하여간 이런 방식은 오래전부터 루터에게 있었고, 루터 이전에 게르손도 있었고, 그 다음에 칼빈에게서 가장 리얼하게, 잘 예리하게 비판이 되고 정리된 그런 개념입니다.


넷째로는 “그러나 그 분이 그의 긍휼의 피난처로 삼고 있는 곤비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자비롭고 온유한 자라는 사실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에게는 가장 자비롭고 온유한 자로, 그때 곤비하고 가난한 자를 위한 안식처로서의 하나님, 이것이 산상보훈에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런 개념으로 시작이 된 그런 내용입니다. 이때 “가난하고 곤비한 말이라는 것”은 죄인으로서 곤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의해서 결국 나 자신이 발견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존재자가 없고, 다른 데로부터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지식을 구할 수 없고, 지혜도 얻을 수 없고, 그런 자로서 그 죄인이, 그때 하나님이 발견되었을 때, 그때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이 된 가난한 자, 또 곤비한 자, 이것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의 첫 조문에 그 개념이 나와요.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라고 그러는 거지요. 그것이 개혁주의 사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고백서로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연관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의 내용자체는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의 사이에서 중용적이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한 저자(우르시누스)가 하이델베르그 해설서를 썼을 때, 그 해설서에서 개혁주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여러분들이 이런 맛을 보면 칼빈을 너무 높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할 수 있겠는데, 칼빈은 원래 그렇게 생각을 한 사람으로 발견이 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칼빈을 그냥 16세기 사람으로 돌리는 것은 큰 착오입니다. 여러분들이 칼빈이 쓴 ‘세네카의 주석’을 한 번 구해보세요. 그러면 그가 신학의 맛을 들이기전에 인문학자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확인할 수 있어요. 질문 없어요. 질문 없으면 다 잊어버린 거예요. 여기에 있던 이야기는 일순간이고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최소한도로 칼빈 보다 더 깊은 사고를 하거나, 이 강의보다 더 깊은 사색을 해야만, 그때 이 내용이 발견이 됩니다. 그 전까지는 이 의미를 몰라요. 다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방법은 다른 것이 없고, 세뇌 공작을 하는 거예요. 계속 같은 말을 해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제가 같은 말을 해 본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미안해요. 이런 강의가 여러분들에게 반복된 것 같아도, 이것은 또 이번으로 처음 인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들에게 설명한 것은, 그래도 그 안에 대부분 반복되는 것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꼭 놓치지 않을, 계속되어서 귀로 따갑도록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있어요. 그것은 좀 남을 거예요. 약간 감정으로 인상으로 남는 거예요. 그래도 그런 내용은 생각이 안 되더라도 겨우 남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한, 또 주께서 늘 이끌어주시는 한, 거기에 우리의 지식의 확대가 있고, 또 건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지식이 있는 줄 믿사오니, 주님께서 필요 없는 것은 다 제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진정하게 생명이 되고, 하나님을 높이 영광을 돌리는 그런 지식만이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남도록 하시옵고, 아버지 영광된 내용들이 좀 더 우리에게 크게 발견이 되어서, 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된 내용이 우리의 삶의 원칙이 되며, 기준이 되는 그런 생으로까지 주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또 부요롭게 하시며, 성장시켜 주시기를 바라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FB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