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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 - 리처드 개핀 교수(Dr. Richard B. Gaffin, Jr.)

Bavinck Byeon 2018. 9. 7. 14:31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


리처드 개핀(Dr. Richard B. Gaffin, Jr.)

(필라 웨민신학교 은퇴교수, 정통장로교회 목사)



성경 낭독: 엡 2:1-12; 강설 본문: 빌 1:6

찬송: 환상 194 / 경배송 XXXIII 117 / 송영 III 168


미국의 자동차 문화에는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범퍼 스티커’라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작은 문구를 자동차 범퍼에 붙이고 다닙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범퍼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그 내용들 중에는 이러한 것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 않다. 단지 죄 사함을 받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 이 문구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대체 그 문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직하게 말한다면,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나는 스스로 완전하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이 문구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단지 죄 사함을 받았을 뿐이다’라는 말에서 ‘단지’라는 단어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단지 죄 사함 받았을 뿐인’ 사람입니까?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서 오늘 강설 본문인 빌립보서 1:6을 읽겠습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오늘날 그리스 동북부에 있는 빌립보라는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편지의 첫 부분에서 사도는 그들에 대하여 사도로서 확신하는 바를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 1세기에 빌립보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확신이었을 뿐 아니라, 곧 살펴보게 되겠지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로서 그가 지닌 사도적 확신이었습니다. 시간과 장소, 문화, 환경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에 대하여 사도가 갖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1: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교회의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good work), 즉 선행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착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 안에서 시작하신 일일 뿐 아니라, 신자 각 사람 안에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오늘 강설의 제목입니다. 이 제목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주제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행이 무엇인가? 그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선행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선행의 본질 -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칭의와 성화


첫째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행의 본질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행을 말할 때에 “너희 속에 - 너희 안에서 -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너희를 위하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라고 말한 그 표현의 차이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너희 안에서’ 곧 ‘신자들 안에서’ 일하신다는 이 표현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어두운 부분, 곧 우리의 죄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란 그러한 것이므로 온갖 비참하고 파멸적인 결과들을 낳습니다. 그것을 다 헤아릴 수도 없고 다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죄가 사람의 삶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나, 혹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이러한 현실적인 결과들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 이면에 죄가 초래한 두 가지 근본적인 결과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 우리의 ‘지위’에 영향을 줍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죄의 책임이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정죄를 받는 자리에 놓이게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죄는 더 나아가 인격체인 우리의 ‘상태’에도 변화를 일으킵니다. 죄는 우리의 성향과 태도와 행동을 바꿔 놓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죄는 우리에게 죄책을 짊어지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철저히 부패시킵니다. 죄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은 채 우리를 사탄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이처럼 죄인인 우리는 또한 철저히 부패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초래된 두 가지의 근본적인 결과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의 책임을 물을 뿐 아니라, 우리를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표현하듯이, 죄인은 자신의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린 이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우리의 죄와 관련한 어두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다른 곳에서 말한 것처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고 풍성하게 되었습니다(롬 5:20). 이러한 복음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먼저 우리 죄에 대해서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죄가 얼마나 두렵고 흉한 것인지 제대로 깨닫기 시작해야 비로소 우리는 복음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붙잡아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은혜가 우리 죄를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은혜는 죄의 그러한 결과들을 모두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할 것이 있습니다. 죄가 초래하는 많은 결과들이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 즉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짊어진 우리의 지위’와 ‘사탄의 종이 된 우리의 상태’로 요약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다양하고 풍성한 은혜도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를 바꿔 놓습니다. 어떻게 바꿔 놓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시기까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지위가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서야 할 자리에 대신 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가 죄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하는 영원한 형벌을 값없이 면제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우리의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우리의 의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죄책을 짊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 최종적인 법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죄하다고 선언하시고, 우리는 죄 없는 사람으로 풀려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입니다. 이 일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우리의 ‘칭의’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의롭다고 판결하심으로써 우리가 얻는 칭의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이것을 얻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진술하듯이,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의지함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제11장 2항).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범퍼 스티커의 ‘우리가 용서 받은 죄인들이다’ 하는 대목은 진실입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죄인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는 이어서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의 상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유죄냐 무죄냐를 떠나서 우리의 부패한 상태에 대한 질문입니다. 죄의 노예로서 늘 죄로 향하는 이 상태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만 하시고 우리의 이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에 대해서는 ‘답 없다’고 방치하신 채 단지 용서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금방 아실 것입니다. 첫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죄로 인한 우리의 부패한 상태에 대해서도 아무 조치 없이 방치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좀 더 강한 어조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패한 상태를 그냥 덮어 두신다면 죄를 제대로 다루신 것이 되지 않으며, 그런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와 그 결과들을 조금이라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습니다. 특히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 선택하신 그분의 백성 안에 있는 죄를, 그분은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라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그 자녀가 죄의 노예로서 여전히 비참함 가운데 살도록 방치해 두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매정하신 분이 아니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죄악 되고 비참한 상태와 관련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분의 선한 일을 시작하실 때에 그 일을 ‘우리 안에서’ 친히 행하십니다. 그렇게 하셔야만 그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말과 사고방식을 고치시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친히 일하셔야 합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행하실 때에라야 우리 같은 완고한 죄인들이 변화되어 우리의 행동과 말과 사고방식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6에서 말하고 있는 ‘착한 일’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 안에서 시작하신 그 선한 일을 친히 온전케 하실 것이라고, 즉 친히 완수하실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 선한 일은 어느 한 순간이나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고 말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애 전체에 걸쳐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그 선한 일이 완전함에 이른 것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의 어떤 분들은 이것이 성화에 대한 설명인 줄을 이미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성화,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행하시는 일입니다. 성화와 칭의 이 두 가지는 서로 혼동해서도 안 되고, 또한 서로 분리해서도 안 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이 선한 일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는지 주의하여 살펴보십시오. 1-3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인간이 죄 아래 있는 현실에 대해서 성경이 가장 비관적으로 묘사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죄인들은 자기의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죽음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자기의 죄로 죽은 사람은 그 죄악 된 상태에 대해 조금도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먼저 가르치는 내용은 죄와 죽음에 대한 이러한 사실입니다.


사도의 이러한 말씀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상황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분위기는 갈수록 신앙을 현세에서 잘 살기 위한 방편으로, 일종의 치유나 격려의 도구로 여깁니다. 이러한 세상의 문화에서는 자기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종교가 무엇인지를 살펴서 선택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삶을 잘 꾸려가기 위해 필요한 도움을 거기서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베소서 2장의 교훈과 맞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가 듣는 내용은, 기독교와 그 복음이 개인의 삶을 스스로 영위해 나가면서 취할 만한 도움들을 담아 놓은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의 사람은 말 그대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죄와 비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4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하나님에 관해서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친히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의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 즉 살리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처소에 앉혀졌다고 밝히 선언합니다(엡 2:6). 달리 말씀드리면, 사도 바울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성신의 권능으로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께 여러분은 연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여러분의 죽음이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곧 여러분의 부활과 승천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힘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은 다름 아닌 부활의 일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새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부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죄로 죽어 있던 죄인들을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경이롭고 놀라운 일이지만 의외의 일은 아닙니다. 죽은 자는 부활이 아니고서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로 죽은 우리를 부활시키는 그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 안에서 행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내용을 조금이라도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주 그러한 태도로 이 본문을 대하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정말로 이미 부활했다고 말하려 한 거야? 그렇지는 않을 걸? 그저 무언가를 강조하려 했겠지.’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식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전하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2:20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2:20에서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말한 것이 모든 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임을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저 감정이 고양(高揚)되었을 때에 나온 과도한 발언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려 한 것은 그가 한 말 그대로입니다. 그는 신자에게 현실로서 존재하는 부활의 삶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현실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의 몸이 부활하게 될 것만큼이나 실제적입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쯤 말씀드리고 나니 궁금해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지금 드린 이 말씀을 듣고 어떠한 생각이 드셨습니까? 어떤 분들은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부활하였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데?’ 하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혹은 다른 신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에, 과연 이것이 부활의 삶인가 의구심을 갖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시험들이 있고, 그 시험들에 우리는 자주 넘어집니다. 이런저런 죄가 끝없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부활하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도 핵심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핵심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내용을 참되다고 믿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이 전하는 말씀, 즉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는 말씀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이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는 우리의 부활이 장래의 소망일 뿐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대대적인 부활의 추수를 이미 시작하셨습니다(고전 15:20). 그 추수에 우리가 완전히 참여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도 우리의 육신이 죽었던 데서 일으킴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경이로운 진리는 우리가 이미 지금 그 부활의 추수에 참여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16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바울은 신자들 각 사람을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신자들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인격들을 내면에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한 인격의 두 가지 측면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겉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가 자주 ‘육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이 저의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겉사람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정신과 육신을 조합한 것’ 곧 ‘정신 육체적’인 우리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에 기능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신자인 우리가 서로를 보고 들을 때에 이러한 보고 듣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서로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속사람’, 즉 사도가 자주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인 우리의 존재 핵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어떠한 것의 배후에, 더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가장 깊고 가장 참된 자아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겉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모습 자체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낙심케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간결하게 말하듯이, 겉사람은 후패(朽敗)해 갑니다. 무덤을 향해서 쇠잔해 갑니다. 이 겉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온갖 종류의 시험에 노출됩니다. 그것은 겉사람이 육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육체가 아직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사람이어서 시험을 받을 때에 우리는 번번이 죄를 짓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점을 말한 뒤에 바울 사도는 우리가 자기 자신에 관하여 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우리의 내면에서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유지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존재 중심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로운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우리 속사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새롭게 하는 일’은 겉사람을 통하여 표현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표현될지라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흠이 있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새로워진다면 비록 그것이 불완전할지라도 분명하게 겉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에 근거한 행위들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이 곧 부활이고, 부활의 생명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일한 교훈을 다른 곳에서도 가르칩니다. 로마서 6:2에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였고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갈수록 더 후패해 가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우리 존재의 핵심에서는 우리가 이미 죄의 통제에서 구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죄의 지배는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여전히 죄 짓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죄는 우리의 절대 지배자로서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있지만, 그 죄가 우리를 압도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에는 ‘죄 가운데서’ 죽었던 사람들이었으나 이제는 삶을 주관하는 세력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대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났습니다. 의에 대하여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12-13에서 말하듯이, 신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직은 ‘죽을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에 상관없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자는 그 존재의 근본에서, 그 인격의 중심에서는 이미 부활한 사람이며, 따라서 그 중심에서는 더 부활할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더 부활할 것이 없는 이유는 성신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며, 성신님께서 부활의 권능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전하는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죽을 몸을 일으키실 것인데, 그때에는 이미 그들 안에 계시는 성신님을 통하여 그들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롬 8:11). 따라서 성신님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 행하시는 일이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발휘되게 하는 것인 줄을 바르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참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갈림길에 세우는 도전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선한 일의 결과 - 우리의 선행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의 몇 가지 결과’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이미 그 일부를 살펴보았지만, 사도 바울이 그 점에 대해서 에베소서 2장에서 어떻게 교훈하는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1-10은 하나로 연결된 한 문장입니다. 여기에서 주제어는 ‘걷다’ 혹은 개역 성경에 번역된 대로 ‘행하다’입니다. 걷는다 혹은 행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 행동의 패턴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행함’,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대조합니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생활 방식을 말합니다. 그것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걸었던 삶입니다. 문단이 끝나는 10절에서는 신자의 현재 상태,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말하면서 매듭을 짓는데, 그것을 ‘선한 일’이라 부르며, 이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철저한 반전이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생활 방식이 이렇게 180도로 완전히 바뀔 수 있게 되었습니까? 대답은 문단의 중간에 있습니다. 5-6절의 내용이 그것인데, 이것이 전체 문단의 축 역할을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서 바울 사도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경험한 부활의 큰일을 말하며, 이것을 다시 10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행하신 큰일은 ‘새로운 창조’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즉 재창조의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결과인 재창조가 곧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선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의 한 가지 근본적인 결과가 하나님의 백성이 내놓는 선행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그의 백성의 선행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선행은 우리가 새로 지음을 받았고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길게 설명할 수 없으므로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기 원하시는 모든 것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라는 표현에 관하여 간단히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은 우리의 ‘선행’에 관해 너무 적극적으로 말하면 불편하게 여깁니다. 신자라면 반드시 선행을 내놓으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특히 더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선행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여기는 오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신교 신자들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을 주저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선행 개념이 잘못 쓰이는 일들이 있고, 특히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은 더욱 그러합니다. 종교개혁의 후손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오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본문에서 우리가 듣는 선행은 성경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그릇된 선행 개념을 경계하느라고 이러한 교훈을 확고하게 배우고 그 교훈대로 살아가는 일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은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과 성화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선행을 하며 사는 것 사이에 조금도 불편한 관계가 없습니다. 이 점을 에베소서 2:8-10이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마도 이 짧은 구절이 성경에서 선행에 관하여 가장 잘 가르쳐 주는 구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간결한 문장들 안에서 중요한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주의해서 보십시오. ‘행위’(works, 일)라는 단어가 두 번 쓰이는데, 그 두 번이 서로 정 반대되는 의미로 쓰입니다. 한편으로 ‘행위’는 은혜의 원수입니다. 그런가하면 반면에 ‘행위’[일]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행위’와 확고히 대립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스스로 구원하려는 어떠한 노력에 대해서도 부정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성취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는 어떠한 시도와도 대립됩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런 다음에 곧장 10절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제는 구원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으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 안에서 선한 일, 곧 선행을 낳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어디선가 이 성경의 근본적인 교훈을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되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선행의 길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아오시는 길이다” 하는 문장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선행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선행’입니다. 선행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셨고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 선행은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일입니다(빌 2:13). 그렇다면 선행과 구원에 관하여 우리는 아무런 긴장이나 모순이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구주 하나님 안에 ‘안식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느라 ‘쉬지 않는 믿음’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믿음은 “분주한 작은 일”(a busy little thing)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 안식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役事)하는 믿음”입니다(갈 5:6). 그것은 사랑으로 발휘되는 믿음이며, 성신의 다른 열매들처럼 이것도 성신의 능력으로 발휘되는 믿음입니다.


맺음말


이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4:7에서 전하는 말씀으로 강설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질문은 칭의뿐 아니라 성화에 대해서도, 우리의 믿음뿐 아니라 우리의 선행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며, 그 대답도 모두 동일합니다. 믿음과 선행은 모두 다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과 선행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믿음도 선행도 우리가 스스로를 자랑할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화, 즉 거룩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가장 깊은 동기는 우리의 심리 작용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느끼는 정서도 아닙니다. 우리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의 믿음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하는 데 포함되겠지만, 가장 깊은 동기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셨고 계속해서 온전케 해 가시는 선한 일, 즉 ‘부활의 선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미국의 신자들이 자동차에 붙이고 다니는 범퍼 스티커의 문구에 대해 제가 처음에 의문을 제기한 것에 여러분은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단지 죄 사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진리를 잘 아시고 확신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범퍼 스티커의 문구를 이렇게 바꾸기를 제안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며,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온전히 이루실 것이다.” 아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 주님께서 어떠한 분이시고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가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저희의 구주가 되십니다. 오늘 저희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전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것이 있었을지라도 주님께서 이 말씀에 복을 내려주시고, 이 말씀으로 저희 마음을 비춰 주셔서 저희가 이 말씀으로 인하여 큰 확신 가운데 들어가고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더욱 더 잘 깨닫도록 저희를 인도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기를 구하면서, 거룩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독립개신교회(IRC) 성은교회 카페( http://cafe.daum.net/ircseonge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