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 Reviews/Korean

믿음과 구원 & 믿음과 행위 - 존 그레섬 메이천(John Gresham Machen)

Bavinck Byeon 2018. 11. 12. 17:28

믿음과 구원 & 믿음과 행위

(Faith and Salvation & Faith and Works)

 

존 그레섬 메이천(John Gresham Machen)

 

 

John Gresham Machen(1881-1937)

 

구원을 얻음과 관련하여, 믿음이 믿음의 단순한 측면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을 제외한 인간 속에 있는 사랑과 그 어떤 것에도 반(反)하여,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독점적인 위치를 갖는 참된 이유는, 믿음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것을 하거나 심지어 어떤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심지어 가장 사소한 면에 있어서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사랑으로 말미암는다고 한다면, 사정은 매우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구원이 우리 자신의 고상한 성품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이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중심이고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금이라도 사람 속에 있는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과분하고 저항할 수 없으며 주권적인 것이다. 교회의 신학자들은 다른 나머지 모든 것에 모순되지 않는 그 위대한 중심적인 교리를 얼마나 분명히 파악했느냐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그 깊이와 그 능력을 위해 그 복된 교리가 심령의 깊은 곳에 간직된 그 방식을 의존하다. 성경의 중심이며 기독교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적 결과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사실 외의 그 밖의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사실은 이것이다. 즉 믿음이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 영혼의 한 성품으로서가 아니라, 그 믿음의 참된 대상과의 접촉이 이루어짐으로서 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없는 이 세상은 어두운 곳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와 다른 이들 속에서도 다른 구원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를 영접하고 그의 계명대로 깊은 곳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이러한 믿음의 모험은 엄청난 모험이다. 그 길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우리는 모든 신비를 풀지 못했고 모든 의심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지성이 아직 침침하고, 비록 우리가 엄밀하게 수학적인 증명에 도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확실성에 도달하였다.

 

우리가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버리시겠는가? 그가 버리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우리에게 의심의 말을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가장 찬란한 빛을 따라서 행동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심들을 신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무릅쓰고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두기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효력은 심리적인 현상으로 간주된 믿음 자체를 의존하지 않고, 믿음의 대상, 즉 그리스도를 의존한다. 신약 성경에서 믿음은 영혼의 공로적인 행위나 공로적인 조건 자체로 간주되지 않는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용되고 있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신약 성경은 사람이 그의 믿음 때문에 (on accout of, 믿음을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결코 말하지 않고, 항상 그가 그의 믿음을 통하여 (through) 혹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by means of)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믿음은 단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들을 각 사람의 영혼에 적용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믿음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분석을 하는 일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해온 것은 복잡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단순성을 파괴하는 잘못된 개념들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우리가 믿음 안에서 발견한 모든 논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믿는 사람의 마음에 항상 의식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일순간도 의도하지 않았다. 영혼의 작용은 참으로 신비스럽다. 그리고 생명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세계 전체는 나뭇가지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단순하고, 거센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믿음의 경험 속에서 때때로 사람에게 전달된다. 분명히 본질적으로 믿음은 어떤 의미로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 존전에 이르려는 헛된 수고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께서 풍성하고 값없이 주신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교리"이다 - 교리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자 - 곧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인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역사에 있어 자유케하는 교리였다. 그것 때문에 종교개혁 시에 중세의 속박을 깨뜨린 것이다. 마침내 그것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시민의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교리가 포기됨으로 과거의 폭정들보다 어떤 점들에서는 더 악한 영혼을 죽이는 집단주의(col-lectivism)를 위하여, 시민의 자유는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파괴되고 있다. 그 진행이 머지않아 저지되기를 바라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칭의에 대한 열망은, 우리를 사람들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그리고 만일 칭의에 대한 바로 그 열망이 자유케하는 것이라면, 칭의를 얻음은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의 상태를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받는 사람은, 만일 그가 실패하지 않는다면 합당한 노력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달려있었다면, 우리가 그 높은 신분을 얻었다고 결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있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보수(报酬)가 아니고 우리가 받은 선물인 것이다.

 

......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능력(gift)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전적으로 과분하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기독교의 핵심이다. 정죄는 공로로 말미암아 온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온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사실은 빛나는 금실(golden thread)과 같이 진귀한 핵심으로 신약성경 전체에 나타난다.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 신약성경이 존재한다. 그것은 밭에서 돌아온 종의 비유나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의 비유에서처럼, 예수님께서 그의 육신의 생애에서 말씀하셨던 말씀들에 나타난다. 그것은 구속 사역이 이루어진 후에,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공표하신 후에 더 충분하게 드러났다. 어느 곳에서나 신약 성경의 기초는 동일하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롭고,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报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선불을 받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을 얻는다면, 그가 스스로 그것을 얻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가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는 그것을 스스로 얻지 못하고, 타인이 그를 위해 그것을 얻도록 인정한다는 것을 단지 다르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아직 신약성경의 가르침의 풍성한 깊이를 밝히지 못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은혜에 돌리는 구원에 있어서의 그 위치를 아직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우리가 이제까지 말한 것에서 일종의 도피구가 인간의 교만을 위해 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구원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인다. 그리고 믿음이 비록 소극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일종의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졌다. 그것을 주시는 것은 전혀 인간에게 달려있지 않다. 하지만 일단 그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어지면, 그 선물을 거절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은 일종의 공로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지어 인간적 교만의 이 마지막 도피구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밝혀지고 깨어진다. 왜냐하면 성경은 심지어 믿음 자체도 - 때때로 그것이 포함하는 작은 공로도 -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을 제대로 요약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효적 부르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킨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권적이고 불가항력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단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유익들을 우리에게 적용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 수단은 하나님께서 고르신 것이지 우리가 고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하고 말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비록 우리가 약하고 무지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기 위해, 왜 이처럼 특별한 수단이 택해졌는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구원이 우리 삶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로서, 왜 사랑 대신에 믿음이 선택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랑은 능동적이다. 하지만 믿음은 수동적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아닌 믿음이 선택된 것이다. 만일 성경이 우리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다면, 비록 우리의 사랑이 온전히 성령의 선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랑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우리의 권리로 당당히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단지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그 특별한 수단 때문에,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대로 사랑할 수 있기 전에, 우리가 바르게 무엇을 행하거나 무엇을 느낄 수 있기 전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모든 확신이나 감정이나 행위를 포기하고 단순히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도록 내어 놓음으로서 구원을 받았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보다 훨씬 심오한 사실이다. 확실히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차갑고 죄로 가득한 마음속에 있는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를 죽도록 내어주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오직 그 사랑만이 구원하는 사랑이다. 그것이 구원하는 수단은 바로 믿음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은 성취가 아니라, 경험이다. 구원 받는 사람의 영혼은 구원의 순간에 능동적이 아니고 수동적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하나님만의 사역인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들어올 때, 그리스도인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인사불성(人事不省) 상태에 놓이거나, 그의 일상적인 기능들이 중단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위대한 변화는 때때로 매우 단순한 일처럼 보인다. 강렬한 정서적 압박이 결코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믿음은 항상 영혼의 의식적인 상태이다. 그뿐 아니라 믿음에는 의지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그가 그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는 시도를 중단하기로 결심하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그의 의지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을 믿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우리는 복음 전파자가 모든 방면에서 그 스스로 이기려고 시도하는 인간의 의식적 삶에 힘껏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를 반대하는 지적인 반론들을 제거해야 하며, 적극적인 논증들을 해야 한다. 그는 감정들에 호소해야 한다. 그는 권면에 의해 의지를 움직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수단들은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수없이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어떤 것으로 그것들을 깔볼 마음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비록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의 신비롭고, 중생케 하시는 능력이 그것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결코 사람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심리학을 취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그러한 믿음의 심리학이 믿는 사람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그가 자기 자신의 의식의 상태에 대해 덜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때때로 그의 영혼을 위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의식적인 상태들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생겨날 수 있고, 인간이 먼저 그리스도를 죄로부터의 그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의 의식적 상태가 바로 믿음이다.

 

......

 

우리가 상당한 분량을 다뤄온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바울의 교리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토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분을 우리가 행한 것에 결코 의존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에 전적으로 의존시킨다. 바울에 의하면, 만일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행한 것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멍에에 매인 노예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여전히 그의 율법을 지키려고 열광적으로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죽어 마땅한 죄에 대한 죄책 때문에 소망 없는 노력이 될 것이다. 우리는 빚진 자처럼 갚기를 위해 애쓰고 있지만, 그 수고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빚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복음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값없는 선물로 우리에게 그의 호의를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에 근거하여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우리를 자신과의 바른 관계로 이끄셨다. 우리의 죄에 대한 죄책은 엄청나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때에 그 모든 죄책을 스스로 담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선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모든 죄를 진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죄책이 제거될 것이라는 것과 우리가 용납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우리를 용납하시거나 버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피실 때에, 그가 주목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변호사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복음의 영광스러운 확실성은 이와 같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기에 그 구원은 확실하다. 만일 그것이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그것의 확실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그 위대한 종교개혁의 교리의 절대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 교리가 바로 기독교의 핵심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납하심이 우리의 수고로 얻는 어떤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의 초라한 불확실성에 속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 그 자녀로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우리의 책무(responsibility)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책무에 의해 된 것이다. 그는 그가 자기 면전으로 영접하시기를 원하시는 자를 영접하실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은혜의 신비 속에서 우리를 영접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그 중심적인 교리가 참으로 신약성경 전체에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특히 바울의 서신들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다. 복음의 바로 그 핵심을 가장 명백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구절은 로마서 8장, 갈라디아서 2장과 3장 그리고 고리도후서 5장이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는 야고보서가 이러한 위대한 신약성경의 합창곡에서 불협화음인 것처럼 보인다. 야고보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사람은 부분적으로 자기자신의 행위의 공로로 인해 그리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야고보는 갈라디아서에서 논박되고 있는 바울의 신랄한 논적들의 바로 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그 논적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지만(이 점에 있어서는 그들이 바울과 의견이 일치한다),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인한 공로 역시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소위 "유대주의자들"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나 오직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협력함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 이것이 바로 바울의 그 유대주의적 논적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사도는 그러한 신앙고백이 종 됨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오직 부분적으로만 구원하시고 우리 자신의 선행에 의해 메워질 간격을 남겨 두신다면,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자각된 의식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우리의 스스로의 순종이 실제로 요구된 그런 류의 순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해 요구된 심령의 청결함이 아니다. 율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은 심지어는 가장 작은 간격을 메우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무익한 종들이며,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심판자와 셈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망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무 일도 안하셨거나, 모든 일을 하셨다(둘 중 하나이다). 심지어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바로 불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든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한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교훈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보면 언뜻 보기에 우리가 다른 사상체계 속에 있는 것 같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경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난제였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다른 표면적인 모순들처럼, 그것은 단지 형식상의 모순을 보여줄 뿐이지 내용상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경건한 독자가 그 진리에 대해 더 깊고 더 풍성한 이해를 갖도록 해줄 뿐이다.

 

그 난제의 해결은 "믿음"이라는 말의 정의 속에 나타난다. 그 표면적인 모순은, 단지 이 장에서 야고보가 오직 "믿음"만으로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울이 믿음이면 온전히 충분하다고 말할 때의 "믿음"이라는 말과는 다르므로 인한 것이다. 야고보가 불충분하다고 선언하는 종류의 믿음은 그 장의 19절에서 분명하게 설명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가 불충분하다고 선언하는 종류의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그것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지적 이해에 불과하며, 그것은 그 사실들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영혼에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때의 그런 믿음은 아니다.

 

비록 믿음이 지적(intellectual)일지라도, 단지 지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러분은 지식을 갖지 않고는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단지 지식을 갖고 있다고해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손에 있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선물과 그 선물의 수여자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 선물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알고도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식이 믿음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필요한 전부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하나님과의 그 바른 관계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 선물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경멸할 것인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전체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것은 죄에 대한 새로운 증오와 의에 대한 새로움 배고픔과 목마름을 수반한다. 그러나 놀라운 변화는 인간의 사역이 아니다. 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지 못한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로부터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받고, 그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러한 선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기꺼이 죄를 계속 저지르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그것은 단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는 바로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값없이 그에게 주여졌기에, 그는 그것을 더 이상 그의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서 지키지 않고, 바로 구원의 핵심부분으로서 기쁘게 지킨다. 바울 자신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사랑은 율법 전체의 완성이다. 우리가 인용한 구절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구원을 위해 매우 불충분하다고 한 것에 대해 바울과 야고보는 완전히 일치한다.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할 때의 믿음은 역사(役事)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야고보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믿음이 바울이 권장한 믿음과 다르다면, 야고보가 권장한 행위도 바울이 무효하다고 생각한 행위와 다르다. 바울은 율법(the Law)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공로를 얻으려고 의도된 행위를 말하고 있다. 반면, 야고보는 믿음의 결과이며,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보여주는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희생제사와 같은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의 차이는 용어의 차이이지, 의미의 차이는 아니다. 그러한 용어의 차이는 야고보서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이 일어나기 전과 그 용어가 확립되기 전인 매우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야고보가 그 용어가 확립된 후에 기록 중이었다면, 그는 비록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는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고 귀신들이 믿고 떠는 믿음과 같이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님을 확신해야만 한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실제로 단지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는 바울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바울의 잘못된 해석을 수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는 바울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위대한 서신들의 보다 더 분명하고 보다 더 영광스러운 가르침을 위해 잘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

 

바울에 의하면 새로운 삶의 시작에는 싸움 곧 죄와의 싸움이 따른다. 그 싸움에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의 경우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협력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단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이 그 싸움에서 능동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할 때에는 하나님의 행위, 오직 하나님의 행위만 존재한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새로 태어남 혹은 (바울의 표현으로는) 새로운 창조라고 불린다. 그 행위에서는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 하는 역할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죽은 사람은 - 육체적 죽음이든지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이든 간에 - 적어도 그가 죽은 그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행할 수가 없다. 만일 그가 그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다면, 그는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그러한 사람은 새로 태어남 혹은 새로운 창조 속에서 새 생명으로 되살아난다. 그가 그의 육체의 출생에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거처럼, 그러한 새로운 태어남을 위해서도 그 자신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출생에 뒤따르는 것은 삶이다. 그리고 비록 인간이 그의 출생에서는 능동적이지 못하지만, 뒤따르는 삶에서는 능동적이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새로 태어남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못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의 행위였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 태어남에 뒤따르는 것은 새로운 삶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삶에서 우리는 우리를 새로 낳으셨던 그 분에 의해 행함의 능력을 받고 있다. 그것은 출생에 수반되었던 행위 능력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하나님만의 행위로 시작되었지만, 그 삶은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에 의해 계속된다. 그러한 협력의 가능성은 물론 오직 하나님께만 기인한다. 우리에 의해 아주 조금이라도 성취되지 못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최상의 경이이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은 철회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다. 그것은 죄와의 강력한 싸움 속에 존재한다. 그 싸움은 승리하는 싸움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연관된 사람이 먼저 하나님에 의해 살게 되었기 때문이며, 그는 싸울 때마다 그를 돕는 한 위대한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승리하는 싸움이긴 하지만, 그것은 그래도 역시 전투는 전투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투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했왔던 그 믿음은 어떤 것을 하는데 있지 않고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그러나 큰일들이 이루어진 곳에는 언제나 삶이 뒤따른다.

 

 

출처: 믿음이란 무엇인가(What is fa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