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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런트 캄파위스(Prof. Dr. Barend Kamphuis) 목사의 4편의 강설

Bavinck Byeon 2018. 9. 1. 20:07

부활하신 주님의 첫 번째 식사


바런트 캄파위스(Prof. Dr. Barend Kamphuis)

(네덜란드 캄펀신학대학 교의학 교수)



[강설 1] 성경 낭독: 누가복음 24:13-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이 말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 말씀은 슬픔과 절망에서 시작하였지만 넘치는 기쁨으로 마무리됩니다. 낙담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고, 거기서 열한 제자가 증언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24:34). 그리고 그들도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정말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에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하셨고 그분이 떡을 떼실 때에 우리가 눈이 밝아져서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것이 부활절의 핵심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형제와 자매 여러분, 만일 ‘우리가’ 그때 그 길에서 예수님과 함께 걸었다면 어떠했을까요? 혹시라도 그러한 상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께서 친히 고난과 죽음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영광으로 가는 길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메시아에 대하여 구약에서 이야기한 것을 우리가 얼마나 잘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그 두 제자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그 길을 평생 결코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주님께서 그때에 엠마오 도상에서 가르치셨던 내용을 대부분 우리도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배운 내용을 전해 주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신생 교회들 안에 퍼져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흔적들을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서나, 또한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와 같은 서신서들에서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제자는 누구였을까요? 누가는 그중의 한 사람이 ‘글로바’라고 기록할 뿐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 유럽에서 이 사건을 묘사하는 그림들을 보면 항상 두 ‘남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사실은 더 높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집에서 먹고 잠을 자는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히 한집에 살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두 남자가 함께 사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체로 한 집에 사는 것은 혼인한 부부이거나 기타 가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제자가 남편과 아내였다고 생각해도 아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9:25에는 십자가 곁에 있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여인들 중의 하나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리스 발음에 따른 ‘글레오파스’라는 이름이 나오고, 요한복음에는 같은 이름의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 형태인 ‘글로바’가 나오는데, 아마도 누가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의 독자들을 위하여서 동일 인물을 그리스어 발음으로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두 경우를 모두 글로바로 번역하였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글로바와 마리아 부부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한 가정집에 들어오고 계신데, 그것은 저의 집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집일 수도 있습니다. 즉, 이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가족과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거행하는 성찬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여기서는 포도주에 대한 언급을 읽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식사는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날 곧 목요일 저녁에 마지막으로 드셨던 식사와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때의 식사는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처음으로 나눈 부활절 만찬입니다. 하지만 여하튼 주님과 함께 나눈 식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만찬(성찬)에 대한 것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소제목에 따라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첫 번째 식사


1. 손님이었다가 주인이 되시다

2. 알아보지 못하다가 알아보게 되다

3. 함께하시다가 떠나가시다


1. 손님이었다가 주인이 되시다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 우리가 살핀 대로 보자면 그의 아내 마리아인데, 이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만난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성경을 열어서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그분을 그냥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하고 그분을 강권하였습니다. 선량한 그들은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면서 길에서 만난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이 손님을 자신의 집에 받아들이는 환대를 베푼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그들의 손님이 되시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30절을 봅시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형제자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집에 들어가서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여러분에게 “이 음식을 드십시오. 먹고 마시고 즐기십시오” 하고 말한다면 아마 여러분께서는 ‘손님이 왜 주인 행세를 하지? 참 이상한 손님이네’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행하신 일이 바로 그러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식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떡을 떼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글로바와 마리아는 자기 집에서 손님이 된 것입니다.


형제와 자매 여러분, 이러한 장면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구절에서도 손님이 주인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손님이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만찬이 거행될 때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식탁에서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식탁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식탁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영생을 위한 떡과 포도주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님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식탁의 주인으로 묘사하는 구절들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어떤 경우에는 수천 명의 손님에게, 또 어떤 경우에는 소수의 손님에게 그분은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거듭거듭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 손님 모두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 이 본문의 사건이 부활하신 후 첫 식사로 기록되어 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제자들과 음식을 나누셨습니다(참조. 눅 24:42-43; 요 21:13). 베드로가 사도행전 10:41에서 자신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을 가리켜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일들을 마음에 두고 한 것이었습니다.


형제와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우리의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신다면 그분은 여러분에게도 식탁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초청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오셔서 여러분에게 영생을 위한 음식과 음료인 그분 자신을 주실 것입니다.


2. 알아보지 못하다가 알아보게 되다


“(그러자)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눅 24:31). 예수님께서 그 식탁의 주인이 되시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보게 되었고,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신을 알리신 그 일은 몇 시간 후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셨다”(눅 24:35) 하고 그 일을 요약하여 전하였습니다. 떡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되자 이제 그들의 깊은 실망감은 넘치는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한때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눅 24:21). 하지만 그 끔찍했던 금요일 이후로 그들의 소망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알아보게 되자 그들은 ‘이스라엘은 구속될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다’ 하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성찬에서 반복하여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찬의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습니다. 그런데 그 식탁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우리는 그분을 알아봅니다. 나의 눈이 열리고 주님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신의 기적입니다. 성신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또한 성신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뵙습니다. 육체의 눈이 아니라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그분을 뵙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명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하고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하며 주님의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신께서는 어떻게 일하십니까? 성찬의 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신의 능력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살아계신 주님으로 계시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식탁으로 초청하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를 베푸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는 말씀과 성찬이 베풀어지는 주일 예배로 매주일 초청 받고 있습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을 뵙고 그분을 기쁨 가운데서 영원히 영접하게 되기를 위하여서 기도드리십시오. 또한 매일의 삶에서도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의 식탁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함께하시다가 떠나가시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아마 이 구절이 오늘 성경 본문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부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과 함께 거기 그대로 머무르지 않으셨을까요? 이제 주님을 알아보게 된 제자들이 주님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혹은 주님께서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하여서 그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기회를 하나도 주지 않으시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그들의 기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일을 함께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까지 먼 길(약 11km)을 되짚어 올라갔고 거기에서 주님을 다시 뵙는 기쁨에 참여하였습니다(눅 24:36).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난 후 주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부활과 승천 사이의 40일 동안에 이러한 일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셨다가 다시 떠나셨고, 자기 제자들과 지속적으로 함께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그분은 하늘 구름 가운데서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모습을 제자들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도 이제는 눈으로 보는 대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하여 살아야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분이 주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는 주님을 뵙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믿어야’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세상의 세력만이 보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힘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서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신께서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우리의 믿음은 약합니다.


우리가 성찬에서 배우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를 할 때에 항상 의자 하나를 비워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전령으로서 오게 될 엘리야를 위한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성찬에서 의자 하나를 비워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식탁의 주인이시면서 육신으로는 계시지 않는 예수님을 위한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을 열망하며 기다립니다. 그분이 장차 하늘 구름을 타시고 오시면 우리는 다시금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주님과 떨어져서 지내어야 합니다.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5-7). 하나님께서 성신을 보증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육신으로는 주님과 떨어져 있으나 우리가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그 믿음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후에도 그 믿음이 주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우리 주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그의 성신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큰 기쁨 가운데 그분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기대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에 우리의 기쁨도 완전해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성대하게 시작될 것이고 그 잔치는 끝이 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아멘.


(2018-8-8)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바런트 캄파위스(Prof. Dr. Barend Kamphuis)

(네덜란드 캄펀신학대학 교의학 교수)



[강설 2] 히브리서 1:1-3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잘 들어 보세요. 중요한 일입니다’ 하고 말하면, 여러분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하고 몹시 궁금해질 것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무언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위험한 것이라도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혹시는 무슨 중요한 임무가 주어지려는가? 여러분은 귀를 쫑긋 세우실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중요한 일입니다’ 하는 말은 우리가 교회에서도 흔히 듣는 말입니다. 우리는 듣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물론 다른 것들도 많이 합니다.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며 사도신경이나 요리문답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모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다른 모든 행위들은 이 듣는 것에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화답하여 우리는 그분께 찬송을 드리고, 또한 기도와 신앙고백도 그 말씀에 대한 화답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교회에서는 말씀을 듣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아우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 인생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복음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1.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마지막 말씀이고

2.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담긴 말씀이며

3.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마지막 말씀


여러분은 구약성경이 신약보다 거의 네 배나 더 두껍다는 것을 아십니까? 구약성경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기 형을 피해서 도망간 야곱이라든지, 종에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이야기, 갈대 상자에 놓여 물에 떠다니던 아기 모세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다윗 이야기 등, 그 외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사실상 단 하나의 이야기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두 부분이 이렇게나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2에서는 그 이유가 이제 마지막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날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분의 마지막 말씀, 즉 최종 마무리를 위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얇은 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 하나의 말씀, 마지막으로 하시는 그 말씀만을 들려주십니다. 이제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 책에서 오직 한 가지 방식, 곧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서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의 길이신 그분의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오직 하나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실 모든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계시는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2,000년 이상 지났습니다. 구약 2,000년 동안에는 여러 선지자들과 시편들과 지혜의 글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2,000년의 신약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하나의 말씀, 하나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씀을 끝으로, 더 이상의 다른 말씀은 없습니다. 이제 시간은 종말을 향하고 있으며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망하는 마지막 단 한 가지 사건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바로 그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구약의 풍부한 분량은 사실상 거기에 다 채울 수 없는 어떤 빈곤함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하시고자 하는 모든 내용을 구약에서 하실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적은 분량은 사실상 거기에 다 채워진 풍부함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고 독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만물을 소유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 곧 장차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갑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몇 백 페이지 되지 않는 이 책의 내용 말고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주님이시라는 이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메시지 외에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이 교회 안에서 이러한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마지막 말씀, 최종 마무리를 위해 나아가시는 그분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들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말씀을 간절히 고대하며 듣고 있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모든 것이 성취될 것입니다. 잠시 후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 우리 가운데서 광채를 발할 것입니다. 이제 잠시 후면 영원한 그 나라, 곧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영원으로 들어가는 이 문턱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 말씀보다 더 값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간절히 듣기를 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뿐입니다. 우리는 장차 주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그날, 모든 입술이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게 될 그날만을 대망하며 기다립니다.


2.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담긴 말씀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읍시다.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것이 둘째 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에는 하나니의 최고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전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이제 마지막 때가 되어 그분은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드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5절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는 말씀이나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는 말씀은 모두 구약의 시편 2편과 사무엘하 7장에서 인용한 구절들입니다. 이 구절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의 뗄 수 없이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드님은 자신의 모든 존재와 소유를 아버님에게서 받으셨습니다. 아버님은 그분의 모든 소유와 돌보심, 모든 영광과 모든 사랑을 아드님에게 주십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드님 안에 있는 이것이 바로 ‘아드님’이라는 이름이 지니는 영광스러움을 잘 말해 줍니다.


이제 마지막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리시려던 그분의 모든 것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이전 시대에는 그분의 종들인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그들은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 주고 또한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명들도 전파하였고, 그분의 아름다운 약속들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깊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닫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아드님이 오셨습니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아드님은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분으로서, 아무도 아드님이 아버지를 아시듯 그렇게 친밀하게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그것은 실로 최고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하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통해 살게 하려 하셨다’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잘 들어 보세요.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경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남녀 간의 사랑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한 청년이 여자친구에게 ‘잘 들어.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고 말하면, 그 여자친구의 가슴은 콩닥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청년은 사랑을 고백하려 합니다. 이 순간에 그의 마음은 여자친구에게로 열리고, 그 여인의 마음도 자연스레 그 청년을 향하여 열립니다. 마음이 자연스레 쏠리는데 굳이 그의 말에 집중하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사랑이 담긴 음성이 이미 그 친구의 마음에 파고들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와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엽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말씀은 오로지 사랑으로만 전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3.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말씀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말씀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들”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곧바로 이 아들의 영광스러움에 대하여 열정적인 찬송의 말들을 쏟아냅니다. 여기서 그는 아드님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 하나님은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2.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4.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5.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6.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7.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다.


아드님의 영광스러움을 묘사하는 표현이 이렇게 일곱 번 나오는데,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말씀입니다. 그 어떤 말로도 이 말씀에 대하여 다 표현할 수 없으며, 아무리 많은 말로도 이 말씀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이야기하는 이 일곱 가지 표현들을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다이아몬드가 일곱 면에서 뿜어내는 광채와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아드님을 만유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물론 독생자이시므로 그분은 유일하신 상속자이십니다. 그분이 만유를 상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전체가 아드님의 것이고, 그 안의 단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유언장에 친필로 서명이 된 것처럼 확실한 사실입니다. 아드님만이 유일하신 상속자이신데, 그 이유는 아드님께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듣는 복음입니다.


2. 이 아드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만유의 후사”라는 이 종말의 일에서 태초의 창조 기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장차 예수께서 만유의 후사가 되실 것인데, 그 이유는 태초부터 그분이 창조의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곧 말씀이신 아드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 세계가 그분을 통해서 존재합니다(참조. 골 1:16-17). 그 동일한 말씀이, 그 동일한 말씀이신 분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불러내시고, 천사들과 사람들, 식물과 동물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러내신 바로 그 능력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다가오십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또한 깊은 찬송 가운데서 우리는 그 말씀 앞에 귀 기울입니다.


3. 이 아드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참으로 커서 천사들도 그 앞에서 자기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은 그 영광에 눈이 멀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날 때에, 우리는 그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해처럼 밝게 빛나서 우리 모두를 따뜻하게 감싸 줍니다.


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여 주는 그분의 형상이시라는 이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서 말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실입니다. 물론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이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같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됩니다.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 음성을 귀 기울여 듣는 것 외에 다른 여지가 없습니다.


5. 그리스도께서는 권능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붙드십니다. 그분은 한마디 말씀으로 온 피조세계를 붙들고 계십니다. 바로 그 동일한 말씀, 곧 생명의 말씀으로 그분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예배의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원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6.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사를 드리신 일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의 뒷부분에 가면 이에 대하여서 자세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영단번에 드리신 그 제사를 통하여 우리는 죄에서부터 영원히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죄를 부끄러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우리 앞에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다함이 없는 복된 소식입니다.


7. 끝으로, 그분은 “높은 곳에 계신 위엄(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 그 자리가 주어진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온 우주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가 그분께 주어졌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며, 이 권세를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행사하십니다. 이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의 왕 되신 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가장 위대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일곱 가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더 확장할 수도 있는 풍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그만큼 무한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생토록 오직 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도 다함이 없으며,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마지막 말씀이고,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담긴 말씀이며,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원토록 우리에게는 이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아멘.


기도

사랑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저희들이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거룩한 영광을 인하여 저희가 찬송을 드리고, 또한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드님이시고 저희의 구주가 되시고 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저희들이 주님께 나아와 찬송을 드리며, 또한 특히 저희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을 인하여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그러한 말씀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이 말씀을 듣게 되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부 하나님, 주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저희에게 보내어 주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깊은 사랑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말씀과 함께 오셔서 주님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사랑을 저희의 마음에 깨우쳐 주시고 저희의 말과 행동하는 데에서 주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있게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성신 하나님, 그리스도의 성신으로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저희들에게 깨우쳐 주십니다. 저희 가운데 계셔서 그 생명의 말씀을 저희가 듣게 하여 주시고 그 생명의 말씀으로 저희들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거룩하신 성부, 성자, 성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삼위 하나님의 복을 저희에게 내려 주시고 여기에 모인 이 회중에게 삼위의 복을 내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 교회의 목사님과 집사님들과 회중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복이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또한 주님의 복을 오늘 안식일에 모여 예배드리는 온 세상의 교회들에게 내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나 또한 네덜란드에 있는 교회들이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들에 주님께서 같이 하여 주시고 말씀을 내려 주시고 영광을 거두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또한 주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 받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주님께서 주님의 능력을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프거나 병들거나 고아이거나 혹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을 내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나라를 약속해 주셨사오니 주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공의와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그 나라가 주님의 약속대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8.8.15)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


바런트 캄파위스(Prof. Dr. Barend Kamphuis)

(네덜란드 캄펀신학대학 교의학 교수)



[강설 3] 성경 본문: 히 4:14-5:10, 강설 본문: 히 5:7-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진정한 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처지를 긍휼로써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슬프거나 외로울 때에, 혹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여러분이 겪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은 잘 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씨름하는 일들에 대하여서도 잘 아십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거나 죄의 유혹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은 잘 아십니다. 비록 그분 자신은 죄를 지은 적이 결코 없으시지만, 우리가 죄와 씨름하는 것이 그분에게는 낯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여러분을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예수님은 여러분을 이해하십니다. 그처럼 위대하신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5:7-8에서는 예수님께서 순종함을 배우셨다고 기록하는데, 이것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순종함을 배우실 때에


1. 기도하시고

2.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으시며

3. 고난 받으심을 통하여서 배우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순종함을 배우실 때에 기도하셨습니다.


순종은 사실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도 ‘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배워 알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좋은 일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들이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대로 행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자란 후에도 순종하기를 거듭거듭 배워야 합니다. 물론 자라나면서는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언제나 따라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고,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서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여러분은 순종과 관련하여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나이가 들든지 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부모와 선생님, 그리고 직장 상사의 말을 존중하여 경청하여야 합니다. 순종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부를 대상으로든, 교회의 직분자들을 대상으로든, 혹은 여러분보다 더 지혜가 많은 어떤 이들에게든 우리는 바르게 순종하는 일들을 늘 배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향한 순종을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향하여서는 우리가 훨씬 더 순종해야 마땅합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단 한 가지 부르심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을 위해 가장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처음 불순종하였던 그 순간, 낙원에서 우리가 타락하였던 그때에 모든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순종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죄와 사망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많은 실수와 잘못들을 거친 다음에라야 겨우 순종을 배울뿐더러, 그러면서도 사실 그 배움이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와 사망의 세력 아래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전한 순종에 이를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바른 순종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이 순종함을 배우신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사실 그분께는 순종을 배우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드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대신에 행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의 자리에, 불순종하는 백성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함을 배우신 것입니다.


주님의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습니다. 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곧 우리의 순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던 것을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이제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순종하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의 성신님을 통하여 순종하는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사망 대신에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순종함을 배우신 것은 이토록 위대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러한 일을 행하셨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알면 그분을 따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히브리서 5장은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제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당연히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둘째로 제사장은 약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그들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헤아려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셋째, 제사장은 자기 직분을 스스로 취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만 그 직분에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예수님에게도 역시 해당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불러 세우셨으며, 그분은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제사로 드리셨습니까? 물론 여러분이 잘 아시듯, 그분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 제사로 드리셨습니다. 이 서신의 뒷부분에서 그 사실에 대하여 더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 5:7에서는 또 다른 제사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간구와 소원을’ 올려드리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자주, 매우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 앞에서 우셨는데, 그것은 곧 그분의 제사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시며 거기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분은 ‘이 고난의 잔이 저에게서 지나가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자기 아버님께 구하였습니다. 그분은 이 기도를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반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심히 두려워하였고 땀방울은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 또한 골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외치셨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중에서 그분은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님께 외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던 모든 날 동안 보여 주신 모습이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시던 모든 날 동안 그분은 기도와 간구를 올리셨습니다. 단지 마지막 밤과 마지막 날의 일만이 아닙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던 모든 날 동안에 그리하셨고, 다만 그 모습이 마지막 날의 장면에서 잘 나타났던 것일 뿐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를 지니셨으며, 의존적인 존재로서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모든 필요를 아버님께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그러한 기도는 곧 자신의 삶을 제사로 드리는 행위였습니다. 겟세마네와 골고다는 예수님께서 항상 그렇게 살아가신 삶의 종착지였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불쌍한 죄인들인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셨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 자신이 골고다로 가실 것에 대해서 그분이 처음부터 명확히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닙니다. 신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감당하기 쉬운 일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평생 동안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힘써 싸워야 했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그 싸움을 계속하여 나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순종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살고 그분께 항상 기도를 드리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순종이고 우리는 이 순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며 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일어나는 질문들과 근심, 의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저하지 말고 힘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죄와 씨름하는 모습을 부끄러워 말고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씨름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 아뢰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과 같은 순종을 배우는 길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순종함을 배우실 때에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5:7). 예수님께서 경외하면서 드리셨던 기도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구들을 드리심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심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에서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기도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달린 문제 앞에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셨고, 각 생물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하나님께 가까이할 때에만 여러분의 죽음 또한 안전한 자리에 놓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예수님만큼 잘 알고 계셨던 분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삶의 모든 여정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그 죽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그분에게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가난하고 참으로 비천한 자리에 놓이셨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베들레헴에서 아기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또한 그분이 공적으로 활동하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많은 이들이 그분을 죽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 끝이 바로 골고다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 외에,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가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경외하심” 가운데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들은 우리의 기도가 때때로 그러하듯이 그저 습관적으로 드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의 기도처럼 사람들더러 들으라고 하는 그런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자기 생명의 하나님으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을 압박하거나 그분을 조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압박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겟세마네에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을 높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 기도의 모범이 되십니다.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물론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습니다. 고난의 잔은 그분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적절한 때에 필요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길을 잘 가시도록 도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천사가 와서 예수님의 힘을 돋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부활절 아침이 되어, 예수님의 생명은 확실한 구원을 맛보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순종은 항상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구합니다’ 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이며, 그래서 그분은 죽음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순종을 배울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까? 순종을 배운다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유일하게 안전한 길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십시오. 그분은 생명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따라서 여러분의 생명은 그분께 가까이할 때에만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 더 멋지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경건한 두려움, 그 경외함을 여러분도 갖게 된다면, 여러분의 기도 또한 예수님의 기도처럼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순종함을 배우실 때에 고난 받으심을 통하여서 배우셨습니다.


“그는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히브리서는 1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드님이심을 이야기하며 시작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십니다. 그분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본성이 지닌 영광스러움 가운데에 예수님도 참여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그분이 전에는 불순종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즐거이 완벽하게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친히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골고다까지, 요람에서 십자가까지 그분은 순종의 의미를 친히 맛보셨습니다. 순종이 그분께는 자기 부인과 희생, 고난을 의미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드리면 여러분은 이 땅에서 마치 포로로 잡혀간 듯하고 광야에 거하는 듯하며 하나님을 멀리 떠난 낯선 나라에서 지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망 가운데 놓인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마음은 생명의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다른 누구보다 예수님께서 친히 경험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순종을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그처럼 큰 고난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순종이 무엇을 수반하는지를 예수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순종하셨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슬픔의 사람이고 질고를 아는 분이며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완전한 종이셨고 하나님의 뜻을 항상 행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되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통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고난을 회피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부르신 우리의 소명도 회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돌아보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왜 그리도 자주 불순종하는지 그분은 잘 이해하십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서도 긍휼히 여기시며 돌아보십니다. 그분은 참으로 순종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고난은 더욱 컸습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순종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앞의 고난에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의 뒤를 좇으면 순종은 우리에게 가벼운 짐이 됩니다. 그분에게는 고난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즐거움이 됩니다.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의 대제사장은 이러한 분이십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이 믿음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위로를 줍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즉,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성별하여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순종함을 배우셨으므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아멘.


기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가 여기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경배와 찬송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성도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또한 주님 앞에서 저희의 불순종을 회개합니다. 저희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고 순종하기를 회피한 채 다른 데에 방황하며 자기의 길을 따랐던 그런 죄인들입니다. 저희들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지도 않은 저희의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사오니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은 또한 우리의 죄도 짊어지신 분이시오니, 아버님께서 저희를 보실 때 저희로서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를 보아 주시기를 구합니다. 다른 것으로 저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를 보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성부 하나님,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더 가르쳐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저희에게 더 가르쳐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셔서 저희의 삶을, 저희가 저희의 필요를 모두 주님께 기도로 아뢰면서 살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희의 삶을 주님의 성신님으로 채워 주셔서 저희가 성신님의 힘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나아가게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성자 예수님, 주님께서는 저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희의 연약함과 고난을 이해해 주십니다. 아무도 저희 안에 있는 어려움과 고난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하여도 주님께서는 저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시고 또한 저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저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저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저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이름을, 거룩한 이름을 찬송합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구원을 이루신 것은 저희의 삶에 참여하고 저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저희를 대신하여 순종함을 저희에게 이루시고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인 줄 아오니 저희에게 주님께서 걸어간 길을 더 보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희는 스스로 설 수 없고 주님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오니 저희에게 주님의 도움을 계속 내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오니 저희를 붙들어 주시고 주님께 더 가까이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8-8-22)



디도서 3:4-7 강설


바런트 캄파위스(Prof. Dr. Barend Kamphuis)

(네덜란드 캄펀신학대학 교의학 교수)



[강설 4]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저는 오랜 기독교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왔습니다. 천 년 하고도 수백 년 동안 네덜란드는 기독교 세계로서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네덜란드에서는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점차 불신자의 숫자가 많아지고 교회에 참석하는 자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비록 기독교가 전파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교회에 많은 신자들이 있다는 것이 제게는 참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행하시는 일을 멀리 네덜란드에서 들을 때에 참으로 제 마음이 기쁩니다.


바울은 크레타 섬에서 일하던 디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작은 이방 섬에 복음이 전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크레타 섬의 형편을 한국 교회의 형편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디도서 3장은 이러한 이방 세계 가운데 있는 성도가 살아가야 할 모습에 관하여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3장 첫 부분에서는 신자들이 자기들의 삶의 터전인 이방 세계 가운데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정권에 대하여는 순종해야 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그와 같은 선행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결코 자신의 배경이 되는 세상을 파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주께서 한국 땅에서 요구하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세상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백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우리의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 또한 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큰 사명입니다.


이제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들어 봅시다. 바울은 왜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서 이런 과업과 사명을 지니고 있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오늘 강설의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세상에서 행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은,


1.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2. 성신님을 통하여 우리 삶이 변화되기 때문이며

3.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소망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


대낮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해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춥고 어두우며 어쩐지 기분도 좀 으스스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가 구름을 뚫고서 비취기 시작합니다. 점차 그 빛은 땅 전체를 비춥니다. 그러면서 땅은 다시 따뜻해지고 우리의 기분도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 하는 말씀이 풍기는 이미지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셨습니다. 왜 이 세상이 어둡습니까? 그것은 불신과 시기, 싸움이 있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3:3을 보면 우리의 이전 모습이 그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으로 어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자기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으니, 그가 바로 사랑의 빛이십니다.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듣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믿음을 갖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신님을 보내어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은 이제 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경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바울 역시 불신앙이라는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사울/바울에게 나타나시자, 어둠에 처하였던 그의 삶이 빛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디도 역시 유사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디도는 원래 불신 이방 소년이었습니다. 그 역시 죄의 어두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바울이 말씀과 복음을 전파할 때에 디도의 마음에도 빛이 임하였고 그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시는 이 빛은 여러분에게도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기에서도 선포하심으로써, 성신님께서 주시는 그 빛을 여러분들 가운데 풍성히 채워 주셨고 또한 앞으로도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어두움, 이 불신앙과 이 죄의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과 생활을 구속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저 죄만 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빛보다는 어둠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하고 말합니다. 원래 우리는 지금 교회 바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본성상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을 풍성하게 주셨으니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그러진 길로 가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죄의 종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는 시기에 젖어 있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요,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가슴은, 그분의 마음은 이처럼 넓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고, 또한 악에 빠져 있는 자들임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 이대로의 인간을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 독생자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청할 수 있는,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착한 일이나 우리의 의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속을 받을 만한 우리의 행위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구원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 자비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바로 그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그분의 가슴을 열어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과 같이 길에서 벗어난 자들이었고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하게 큽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나침판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 주변에 깔려 있습니다. 이들이 악하다고 해서 그냥 무시해도 됩니까? 그들보다는 내가 좀 더 낫다고 잘난 척해도 됩니까? 실은 우리 자신의 몰골로 볼 때에 절대 그들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한없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자만하고 남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친절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 거기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이 교회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기 때문에 예의를 좀 갖추고 살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이름도 물론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름도, 교회의 이름도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십시오. 세상을 구속하신 사랑의 복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바로 이 복음을,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이 죄악의 세상 가운데서 증거하여야 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우리의 삶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펼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변화를 두 번째 대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 성신님을 통하여 우리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습니까? 5절에 보면 “중생의 씻음과 성신의 새롭게 하심으로(참고. NIV-through the washing of rebirth and renewal by the Holy Spirit)”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신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 안에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안에서 뿌리째 새로워진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을 성신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중생을 체험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온 그 모습대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죄 중에서 태어나 죄 중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아무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에스겔 37:26의 표현대로 말하면, 우리는 돌 같은 마음을 버리고 살 같은 마음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살 같은 마음을 주셔서 그분을 섬기게 하시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 변화는 뿌리로부터 새로워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다시 태어나는 것’ 곧 중생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3:3에서도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뿌리째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렇게 받은 변화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새롭게 함’, ‘갱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새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삽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온 중생인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향하여서나 사람을 향하여서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고 말합니다.


바로 이 새 것, 새 사람은 성신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갱신, 이러한 중생이 오직 성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켜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죄의 권세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새로운 가슴과 새로운 마음을 자신에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소제할 수 없는 것은 소제하는 걸레 자체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신님을 통하여서만 우리에게 새로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꺼이 오셔서 우리의 더러운 속을, 더러운 마음을 소제해 주십니다. 도무지 남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꾸어 주시려고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신을 풍성히 보내어 주실 것입니다. 조금이 아니라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것은 마치 엄청난 비가 와서 홍수가 내리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신 하나님의 풍성한 것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심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은 자기의 삶 자체가 이렇게 변화하는 기적을 당연히 체험하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가운데서 큰일을 행하려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새로운 가슴, 새롭게 만드시는 새 사람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변화된 삶을 주시니 그러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바로 이 변화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변화된 사람으로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구원 받은 우리를 주께서는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죄 많은 세상 가운데 남겨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를 통하여서 자기의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변화된 새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나아가, 성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으면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중생의 씻음 자체를 짓밟으면서 세상과 더불어 다시금 더러워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을 떠나라’ 하고 요구하지 않으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살되, 변화되어 새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세상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의 삶 사이에 아무런 구별과 차이가 없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 한 가지를 분명히 믿으십시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성신님을 지금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바로 이 성신의 능력으로, 우리가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소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소망할 수 있습니다.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는 영생을 대망하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으니, 우리는 이 약속을 확고히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죄와 여러 위험들에 둘러싸여 어려움을 당하곤 합니다. 이 땅에는 질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눈물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삶을 누구도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런 슬픔이 없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때가 장차 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애곡이 없고 죽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대망이 바로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사귀는 바로 이 소망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도무지 우리에게 이것은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장래에 대한 대망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모든 것은 퇴락하고 죽음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형통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소망하는 것이 있고 장래의 계획을 가진 채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습니까. 진정한 대망도 없고 영생도 없으며 천국도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신 하나님이 없는 자에게는 절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그들의 인생은 ‘소망 없음’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한 소망, 완전한 구원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2장 13절을 보면,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하고 말합니다. 참 멋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 이것 이상의 대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영광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모든 것은 다 평안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디도서에서 말하는 이것이 이 세상 다 잊어버리고 저 먼 천국만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분명한 장래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의 원대로 장래의 계획을 정하여 거기 몰두해서 살아나가는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소망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고 사랑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소망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고 자비를 베푸셨으며 사람 사랑하는 이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충분한 소망이 넘칩니다.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지 말고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명을 감당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자로서 우리의 이 사랑이 넘쳐서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사랑이 충만하게 채워지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성신 하나님을 보내어 주셔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게 하셨으니, 그러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없는 자들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영생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 소망이 없는 자들과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삼위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바쳐야 합니다. 아멘.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여 주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 선하심을 보여 주신 것 감사합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그 사랑의 가슴을 온 세상을 향하여 여시고 우리가 그 사랑을 볼 수 있도록 성신 하나님의 빛을 보내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에게 그 은혜와 사랑과 기쁨을 주시고는 우리를 바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세상 가운데서 살게 하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구별되면서도 그들을 향하여 이 사랑을 보일 수 있는 소망과 책임을 맡겨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도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우리의 속은 더럽고 우리 가운데는 아무런 소망과 깨끗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도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 주시고 성신 하나님을 보내어 주시사 우리의 더러움을 내어 쫓으시고 대신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 속에 있는 더러움과 어두움 이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성신 하나님의 그 넘치는 권세와 능력을 덧입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사랑을 만천하에 쏟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시고 죄 가운데 살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 이방 세상에 살아가면서 소망 없는 자들 앞에서 기가 죽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참 소망을 가진 자들로서 소망 없는 자들을 무시하거나 천대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도리어 소망을 가진 자로서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위로하며 우리 안에 있는 동일한 소망이 그들에게도 심겨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는 약합니다. 약하였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여 주셨사오니, 우리가 이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큰 소망을 가진 자로서 소망 가운데서 소망 없는 자들을 이기며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빛과 향기를 나타낼 수 있도록 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8-8-29)



출처: 독립개신교회(IRC) 성은교회 카페( http://cafe.daum.net/ircseonge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