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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특강 VII - 김영규 교수

Bavinck Byeon 2018. 4. 25. 23:48

기독교 강요 특강 VII

- 칼빈의 신학적 배경과 칼빈 신학의 독특성 -


김영규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녹취: 김기현 강도사(은총교회)

강의 연도: 2004.9.23, M.Div수업


*[본 강의안은 강의를 녹취하신 김기현 강도사님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제4강


1. 본문: 딤전 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개역한글판 딤전 4장)


구원의 서정 하면, 대표적으로는 성화인데, 성화가 어떤 방도로, 또 어떤 방식으로 거룩히 되는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 이것은 하나의 지표가, 교회 안에 어떤 지표로, 있는가? 그것을 가르키면서도, 실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그 방식에 대해서도, 이렇게 표현이 되어있는 그런 형태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은택의 어떤 성취내용이, 또 그분의 소유로 되어 있는, 그런 내용을 전가의 방식으로, 또는 하나님이 교통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어떤 방식으로 주시는가? 했을 때,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와 기도로 이렇게 주시는 그런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종교개혁 시대의 회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어서, 결국 우리가 칼빈을 이해할 때도, 칼빈의 회심을 어떻게 이해했었는가? 이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회심했다. 점진적인 회심을 했다. 이런 표현 인데, 거기에도 잘 반영되어 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4절에 있는 경우 같은 것은 “하나님이 지은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는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의 한 원리로서, 그 당시에 이제, 성경에 없는 제도를 늘 첨가했을 때, 루터가 오직 성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은혜의 방도로서 말씀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그런 유일한 형태로서 오직 성만찬과 세례만 있다.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 원리적인 성격은 인간이 자의로 생각해서,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가? 선하게 되는가?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 원칙을 지금 딤전4:4 같은 원칙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게 보지요. 이런 말씀을 생각하면서 잠깐 기도하고 생각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에서 볼 때에는, 참 누추하고 또 갇힌 자 같고, 경우에는 종과 같은 그런 형태로 의존하고 복종하며, 그래서 우리가 늘 우리의 의식이 머무르는 곳에, 또 우리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가 원치 않는 내용들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우리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런 부패된 그런 마음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돌이키게 하지 않고, 오직 친히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며, 또 그 말씀아래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시가, 우리를 우리가 원치 않았을 때에도 주님은 친히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추구할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돌이키게 하여 주셔서, 우리가 이제 처음과는 달리, 조금 하나님의 거룩한 지식을 추구하며, 또 하나님의 그 지식에 합당한 거룩한 감사와 또한 예배와 경배의 내용을 더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여러 우리의 삶의 현장의 내용에 있어서는 부패된 많은 모습이 석여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도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받으실만한, 그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표지의 내용으로 표현해 준 그 내용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내용으로 받으시고, 늘 우리를 주관하여 주시 오며, 우리의 삶의 모든 내용을 놓치지 아니 하시고, 늘 간섭해 주시며 열심 으로 또한 우리의 모든 주의 영광된 가치의 내용으로, 발전되기까지 쉬지 않고 역사하시고, 또 우리에게 방향을 정하여서 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늘 주장하여 주셔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자로 저희들이 서 있사 옵나이다. 오늘도 각자가 이런 은총의 길 가운데 이와 같이 부름을 받고, 또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또한 준비하는 과정을 주셨사오니, 모든 한 날의 생활의 모든 내용들이, 이런 역사의 큰 은총아래 있음을 늘 감사하며, 오늘도 우리에게 감당할 모든 내용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에게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우리가 주님 앞에 일할, 그런 충분한 내용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이 받은 은혜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그런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자로 훈련시키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강의 내용

우리가 지난번에,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된, 그런 배경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 그의 동료들이고, 또 함께 했던 그런 친구들이, 이런 하나님의 종들이 결국 순교를 당하는 그런 처참한 일을 당하고, 또한 늘 유리하는 자로 있을 때, 그때 칼빈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펜을 들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내용 가운데서, 이제 그 당시의 벽보사건의 그런 내용이 여기에 ‘기독교강요 생명의 말씀사’에서 번역된 상권의 서론에 신복윤 교수님이 쓴 것(27페이지)같은데 거기에 약간 인용이 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 책을 가지고 계신 분 있어요. 그러면 거기 27페이지를 보시면, 여기 그 벽보사건에서, 그 벽보 내용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거기 보면, 밑에서 그 “이 벽보의 어구는 매우 강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이 되어 있다” 했어요. 혹시 가지고 계시면 읽을 수 있어요.


“나의 온 천지에 호소하여 이 무섭고 거만한 교황주의 미사를 대항하여 진리로 증거 해 주기를 원한다. 이 미사로 인해서 세계는, 만일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지 않는다면, 현재도 그러하려니와 전적으로 황폐해지고, 파산되며, 파멸되어, 마침내는 우리 주님께서 이 미사로 인하여 잔인한 모독을 받으며, 사람들은 이 미사에 속아 그 눈이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누가 이 이상 더 그 미사를 지지할 수 있으며, 누가 그와 같은 조롱과, 그와 같이 유해하고 불법한 적그리스도들을 그대로 둘 수가 있겠는가? 건방지고 거만한 저들이야말로 평소의 습관에 따라, 성경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려고 대담하게 행동한 자들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거룩하신 말씀의 원수로서 저들이 극도로 중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뻔뻔스러운 이단자와 같아서, 예수님의 몸을 저들의 제병(祭餠)에 밀폐시키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미사서에 붉은 글자로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쥐와 거미와 해충의 밥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수치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오, 땅이여! 그대는 어째서 입을 열어 이 끔찍하고 참람한 무리들을 삼키지 않는가? 오, 더럽고 야비한 자들아!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의 몸인가? 천사들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생명의 떡이신 주님께서 자신을 생쥐들과 거미들의 밥이 되도록 허락하셨단 말인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영원히 썩지 않으실 주님께서 동물들의 먹이가 되도록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건가? 주님의 부활을 말한 다윗의 예언과는 달리 그대들은 주님을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고, 부패할 분으로 만들 작정인가? 오, 가련한 자들아! 그대들의 그 흉악한 신학에서, 예수님의 그 귀하신 몸을 불경하게 말하는 것밖에 다른 악이 없다고 하면, 참람한 이단자들아, 아니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악독한 이단자들아, 그대들은 마땅히 장작으로 화형을 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장작에 불을 질러, 우리를 태울 것이 아니라 그대들 스스로를 태우라, 왜냐하면 우리는 그대들의 우상과 그대들이 새로 만든 신들, 그리고 동물과 그대들이 독같이 먹을 수 있는 그대들의 새로운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짐승보다 더 악한 자들아! 그대들은 하나님을 가루 반죽으로 만들어서 그와 더불어 유희하기를, 마치 고양이가 생쥐와 노는 것처럼 동정하는 체하며, 그대들의 가슴을 치며, 그를 셋으로 절단한 후에는 대단히 미안한 것처럼, 그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부르며, 그에게 평안을 구하는구나.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현존하시며 살아계시며 완전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이분이 바로 구약에서 희생의 어린양으로 예표된 진리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제병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그것을 먹은 다음에 또 무엇을 마셨다. 요한도 이와 같은 양식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먹었던가? 이전에는 그와 같은 원숭이의 속임수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말이 적절한 말이 아닐까? ‘이 가련한 어린양은 양이 되기에는 까마득하다. 왜냐하면 이리가 그 어린양을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죤 칼빈, 기독교강요, 상권 .김종흡 역(생명의 말씀사,2003.7.25) ,27p .벽보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유일하신 중보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 (죤 칼빈, 기독교강요, 상권 .김종흡 역(생명의 말씀사,2003.7.25) ,27p .벽보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유일하신 중보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 그러지요. 굉장히 격렬하고, 굉장히 분노가 있는, 그런 미사 제도와 함께, 성만찬에 어떤 부패내용을 지적하는 내용이지요.


여기에 볼 수 있는 것처럼, 나중에 생각하는 내용이지만, 토투스 크리스투스(Totus Christus)는 분명하게 이렇게 하늘에 계시고 또 거룩한 자로 계신데, 마치 떡 안에 갇혀 계신 것처럼 거기에 ‘트란스’ 되어서, 실체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해서, 그것을 나누어 먹는 이런 일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부패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미사를 들이는 그런 과정에서 미사자체가 제사의식으로 이렇게 되어서, 떡을 떼어주는 자의 권위라 할까? 이것에 의해서 미사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처럼, 이런 성격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믿음 없이도 이렇게 유아의 경우도, 이와 같이 믿음 없이 유아의 경우에도 그 떡을 먹는 경우에, 이와 같이 큰 효력을 발생하는 이런 현상으로 여러 가지 부패가 있어 왔다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이제 집례 하는 자가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일지라도, 그 미사는 독립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집례하는 자와 그 효력자체 하고는 구분해서, 이렇게 특별히 교회 부패가 크게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제 루터의 경우는 그런 미사의 직접적으로, 물론 다른 많은 성례의 경우에도 있는 경우인데, 예! 뭐! 결혼이 성례가 될 수 있는가? 성례가 될 수 없다. 이런 내용이라든지, 견신례, 기타 또 기름부음을 받는 것을 성례화 취급되는, 그런 임직과 관련해서도 성례화 하는 것도 거절하고, 그 대신 성례를 받을 수 있는 자, 받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든지 받을 수 있다. 또 어떤 의미에서 잔과 떡인데, 둘 중의 하나를 평신도에게 주고, 그중에 하나는 성직자에게만 해당시키는 것, 이런 것들이 다 루터가 저항했던 내용입니다. 결국 1520년대 저항의 내용이었던 것이었고, 그런 내용들은 라틴어로 출판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내용 이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경우에는 저항하기를 결국 누구든지 성례를 받을 수 있고, 또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다. 또 그것에 대한 신자의 권리에 대해서 강조 했어요. 그 다음에 열쇠권의 경우에도 열쇠권도 누구에게 있는가? 그런 경우에는 성직자에게 있는 것보다도, 또는 교황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모든 성도에게 있다. 그래서 공적인 그런 공동의회와 같은, 그런 콘센수스(consensus)에 대해서 강조를 합니다. 그때에 이제 회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미사의 성례의 효력과 관련해서도, 그러면 어떻게 효력이 있는가? 했을 때는 오직 믿음으로 있다. 거기에 성만찬 자체의 어떤 이론이나, 또는 거기에 다른 어떤, 부가된 어떤 것의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 효력이 있다.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믿음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사가 있은 후에, 이제 소위 다음단계 카리타스(caritas), 소위 사랑의 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이런 어떤 특별한 일이 거기에 지적이 되고 있는데,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선한 것들이라고 했을 때,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했을 때는, 그런 인간의 부패도 역시 지적되어서,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없는 특별한 것들은 인간자체의 그런 부패된 성격이 있는데, 그래서 특별히 이제 모든 부패 중에서, 자유의지 같은 것은 크게 부패되어서, 마치 그것은 노예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표현했지요. 그래서 자유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어떤 도덕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어떤 메리툼(meritum, 공로), 어떤 공로 이런 것에 대해서 거절할 때, 거기에 자유의지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적용이 되지,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 자체는 은혜 없이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는 그런 성격이다.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너무 르네상스나 이런 것에 의해서 과장이 되었다. 자유의지는 노예와 같은 것인데, 하여튼 그런 관계를 통해서, 이제 자유의지의 근원적인 성격도 비판하고,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의 이런 큰 뿌리가 결국 칼빈 시대 있어서, 초기 루터주의에 그런 강한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 정신이, 실제적으로 전 유럽을,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경건한 마음들을 이렇게 사로잡고, 그들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하였지요.


그래서 벽보사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벽보사건을 당한 지도자, 우리가 말하면 카톨릭측에서는, 특별히 이제 늘 언제 핍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런 모렝(Jean Morin)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살육을 하게 되는 사건이 있게 되었지요. 이런 현상으로 말미암아 지하의 세계처럼 흩어져 있지만, 칼빈도 여전히 그 장소에 머물 수 없고, 이와 같이 바젤로 피신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때 이제, 결국, 그 전부터 늘 준비해 놓은 자료와 책에 대한 구도와 내용을 바젤에서 이렇게 발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제 기독교강요가 나오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여기에도 강조된 몇 가지 내용이 있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강조되었어요. 예! 물론 적 그리스도, 어떤 적 그리스도보다도 강하게 교황의 적 그리스도적 성격을 강조했습니다만, 거기에 가장 잘못된 가르침과 관련해서는,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긋난, 그런 모든 미사제도에 관련해서 이렇게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이제 이미, 우리가 인용한 딤전4:4-5에 그런 내용도 있지만, 그 말씀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모렝(Jean Morin)이 그렇게 개신교 운동을 핍박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핑계로 삼는 벽보사건과 관련해서는, 이 벽보 사건에 있어서, 그런 개신교운동에 있어서 혼합적인 성격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약간의 급진주의로 발전이 되어 있었던, 그런 재세례파의 운동입니다. 그래서 가장 경계되어야 할 부분으로서, 두 종교적인 운동과 관련해서, 굉장히 경계를 할 수 밖에 없는 칼빈의 뜻이었는데, 기존의 카톨릭의 부패도 칼빈의 가장 큰 경계의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이제 하나님의 진리가 발견된 순간에, 다른 방식으로 폭력으로 표현된다든지, 다른 방식으로 이렇게 표현해 가는, 이런 재세례파의 운동에 대해서 경계하는, 그런 저항의 방식을 특별히 칼빈이 기독교강요에 반영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그런 재세례파와 특별히 싸우는 원리로서 여기에 표현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외에는 어떤 하나가 되는 연합은 없고 사랑의 띠 이외에는 다른 띠는 없다” 그래서 결국 폭력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는, 그런 칼빈의 기초는 여기서부터 생긴 거지요. 결국 우리에게 그런 명령을 준 것은 없다는 이런 의에서, ‘사랑의 띠 이외에는 다른 띠가 없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제 그런 의미에서, 그러면 우리가 저항하는 무기로서는 어떤 무기가 유일한 것인가 했을 때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더 다른 저항의 도구가 없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항의 무기로서 성경 말씀의 기능을 강조하되, 그 생명의 소리는 주님으로부터 들어야 한다.’ 여기에 주님에 대해서, 살아계신 주님을 강조하였듯이, “그러나 그 소리는 새로운 말씀이 아니고 태초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 있을 말씀이다.” 동시에 거기에는 재세례파가 성령과 말씀을 분리시켜서, 원래 말씀보다도 성령의 원리를 더 강조해서, 내적조명, 또는 내적 이런 계시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 그런 삶의 원리를 거기에서 표현하고 있어서, 그것이 결국 폭력까지 발전하는, 이런 급진주의의 배경이 되는 내용에 대해서, “성령과 그 말씀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특별히 강조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저항의 방식 이외에도, 이와 같이 폭군의 성격이 있는데, 폭군에 대해서, 결국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저항했던 그런 방식대로, 너희들이 유일하게 죽이는 것은 육체뿐이다. 영혼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오직 영혼에 대해서 진정한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이것을 밝히는 그런 작업을 칼빈이 여러 글을 쓰는 그런 과정에서 나타나게 되지요. “그러나 저항의 성격에 대해서 폭군들이 죽이는 것은 육체 뿐이고 영혼에 대한 의의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 뿐임을 밝히는 작업을 하였다”. 


2. 그래서 이런 기독교 기독교강요의 실재적인 실천적 의미는 교재 23페이지 이하에서 약간에 더 생각을 하게 되겠는데, 기독교강요 자체는 바젤에서 출판이 되었을 때는 한 542페이지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어요. 3-42페이지까지는 그 ‘프란시스카’ 왕에게 보내는 그런 서론을 가지고 있고, 42 페이지에 다시 제목이 붙어있어요. 물론 뒤에 약간의 제목의 차이가 있는 그런 방식인데, 처음에는 기독교강요는 기독교강요를 쓸때는 “크리스티아나이(Christianae) 릴리기오니스(Religionis) 인스티투티오(institutio)”이렇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칠판에 쓰시며>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제목은 “기독교 강요”입니다. “강요” 라는 말은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이 ‘가르침’은 루터의 요리문답에서 설명을 할 때 이 개념을 쓰고 있어요. 그래서 칼빈도 이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고, 루터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로 우리말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totam feri pietatis summa(경건의 총화) & quicquid est in doctrina salutis cognitu necessarium, complectans(구원의 교리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알아야 될 모든 것들). ‘구원에 있어서 꼭 알아야 될, 필연적으로 알아야 될 모든 것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구원의 도리에 있어서 인식하기 위해서 필연적인 모든 것들’ 그 다음에 경건의 totam(모든 것들)이 거기에 포함되어서 완성된 그런 기독교 강요이다. 그런 기독교강요, 기독교에 대한 가르침이다. [기독교 강요 : 경건의 총화와 경건의 모든(totam) 총화와 구원의 교리에 대하여 알아야 될 것들은 무엇이든지 포함되는 ‘기독교의 가르침(강요)’]. Ioanne Calvino autore MDXI 총542페이지. Finis.


그러니까 이 제목 자체는, 저항의 내용이랄까? 그런 내용은 표현이 안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쓸 때는, 결국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이 거기에 총화로 함축될 수 있도록, 이런 의도를 가지고 썼다는 것을 보게 되고, 특별히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에 필연적인 것이 무엇인가? 이런 의미에서 제목이 붙여졌어요. 책이 써졌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가 이름은 그대로 칼빈의 이름으로(Ioanne Calvino, 요한네 칼빈노) 출판되었다습니다. 그 다음에 지역은 ‘바젤’입니다. 1536년(초판), 그래서 총 542페이지 정도 되는데, 마지막 그 Finis(피니스)가 있고, 끝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515-519페이지까지 index가 있습니다. 인덱스는 색인이지요. 실제 내용은 514페이지로 끝나는 거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Errata(에라타)가 있어요. 글씨가 틀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게 520페이지가 되겠지요. 여기에 이제 Anno(아노), 여기에 마지막에 Errata(에라타) 다음에 마지막에 ‘바실레아이 멘제 마르티오’. Mense Martio, ... 그러니까 1536년 3월에 출판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제 작업이 완성이 된 것은 1535년에 완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그 1536년에 실제적으로 출판이 되었어도, 1535년에 이렇게 완성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말이지요.


그래서 교재 23페이지를 보시면, 기독교강요 출판은 1536년 3월로 되어 있습니다. 대개 싸이즈는 24줄로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한 줄에 38자, 그래서 서문은 실제적으로 1536년 8월23일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조금 이상한 것이에요. 학자들이 그 동안에 이상하게 여겼어요. 그러니까 출판은 1536년 3월로 되어있는데. 서문은 1536년8월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출판보다도 서문을 늦게 쓴 형식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학자들이 이 서문은 1536년에 쓴 것이 아니고, 1535년 8월 23일에 서문을 쓴 것이 아닌가?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서문은 1535년이 1536년으로 오기되어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 수 없어요. 그렇게 되어 있을 뿐이지, 진짜 우리가 말한 대로, 제목을 붙일 때는 출판 연도를 그렇게 해놓고, 실제 서문은 최종적인 날짜는 1536년 8월에 되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누가 증인이 없어요. 아무도 증거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제 학자들이 출판은 분명히 1536년 3월에 했고, 그러면 그 후에 출판된 가능성이 없으니까, 대개 날짜가 잘못 되어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 대개 1535년 8월에 거의 다 완성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문제가 되는 1534년10월 25일부터 문제가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전에 10월 24일부터 그 다음에 8월까지의 기간에 기독교 강요를 다 썼다는 뜻도 되지요.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한 반년 동안에 거의 완성을 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런 자료 자체가 제목이 볼 수 있는 것처럼, ‘경건의 총화’라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어서, 그전부터 글이 준비되어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준비해 오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여기 “듀 띨레트(Du Tillet)”의 도서들을 많이 이용하지 않았나, 이런 내용도 함께 포함을 시켰어요.


그러나 이 저서(기독교 강요)와 관련해서, 최초의 의도는 “어떤 종교적 열심을 가진 자가 그것으로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어떤 견본을 제공하는데 있다”고 하였어요. ‘견본을 만든다’ 여기에 표현 자체는, ‘구원에 필연적이고 알아야 되는 지식에 관련해서 포함되어 있고, 그 다음에 경건의 총화’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그가 실제 서문을 쓸 때는, 이와 같이 ‘종교적 열심을 가진 자가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견본을 썼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기독교 강요’의 출판의 특별한 성격을 표현했어요. 그때에 순교자와 관련해서 표현한 내용이 있는데, 그때 표현하기를 ‘지금 근거 없이, 이유도 없이 또는 어떤 증오의 원인이 있던지,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피해를 당하고 있는, 그런 재판석에서 다시 한번 어느 누구도 공적으로 자기의 진술을 해야 될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재판석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거치지 않고, 이 순수한 교리(sana doctrina) 때문에, 대적자들의 강포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순교당하는 자들을 대변하고, 대적자들의 불과 칼에 대응하는 저항수단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기독교 강요 출판의 특별한 성격은 근거없이 그리고 재판석에서의 경청함 없이 순수한 교리 때문에 대적자들의 강포에 의해서 핍박받고 순교당하는 자들을 대변하고 대적자들의 불과 칼에 대응하는 저항수단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강조를 했어요.


물론 그런 내용은 기독교강요의 초판에서 상당히 의의 있는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말씀과 관련해서 그런 표현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면 사탄도 반드시 활동한다는 것이예요. 동시에 사탄이 오랫동안 빈둥거리면서 깊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가, 어느 정도 그의 흑암이 이렇게 없어졌을 때, 그러니까 흑암을 쫓아냈었을 때,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그 무기로서 두 가지를 무기로 삼았는데’, 칼빈이 하는 말이에요. 칼빈이 왕에게 드리는 헌사 내용에 그렇게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 무기로 두 가지입니다. 즉 동터 오는 진리를, 폭력으로 눌러버리는 무기를 사용했어요. 이것은 결국 핍박을 하는 카톨릭과 함께 관원들이 하나가 되어서, 이와 같이 참된 말씀에 기초해서 경건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결국 치명적인 무기를 써서, 그들을 소멸시키려고 하는 그런 내용인데, ‘동터오는 진리를 폭력으로 눌러 버리는 일이 큰 무기였고, 재세례파들과 괴상한 악한들을 통해서, 이제 불일치와 교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킴으로서 진리를 희석시키고, 마침내 말살하는 일이라. 이게 마귀가 오랜 잠에서 깨어서 두 가지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시기는 사탄이 오랫동안 빈둥거리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가, 이제 어두움을 결국 쫓아내서, 빛이 드러났을 때, 여러분들이 요한복음에 있는 것처럼, 어두움이 빛을 알지 못하였다는 그런 표현이 있는 것처럼, 세상이 전부 어두움이라고 표현되어 있잖아요. 그 어두움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교회가, 이렇게, 어떤 의미에서, 표지와 관련해서 약간의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내용은 거의 다 흑암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 흑암을 쫓아내었을 때, 이제 2 가지 무기를 든 것이, 결국 폭력으로 눌러버리든지, 아니면 결국 논쟁하고 일치하지 않음으로, 거기에 진리를 희석시켜서, 최종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진리가 말살되는 이런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이런 일은 칼빈에 의하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래서 진리를 줄기차게 포위하는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폭동이나 흥분을 일으키는 분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능력에 대항하는 일이며, 성령의 자유를 육신의 방종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로서, 사탄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모렝에 의해서 핍박을 당하는 것도, 약간의 카톨릭에 대한 저항의 내용이 같은 입장도 있기 때문이지만, 그런 것만 아니고(재세례파가 카톨릭을 저항하는 내용에서), 결국 소요를 일으키는 재세례파 자들과 같이 오해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같이 오해되어서, 같은 자들로 희생을 당하는, 순교를 당하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 결국 이와 같이 사탄의 행위는 실제적으로 적이 누군가 했을 때는, 진리에 대한 적을 말하는 것이지요. 진리에 대한 적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 적은 기존의 카톨릭과 같이, 그 자체에 교리에 있어서 큰 부패가 있는 것만이 아니고, 오히려 그 부패를 등지고 나서, 저항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다른 방식을 쓸 때도, 그 때도 사단은 진리를 없애버리는 방식으로서, (폭력으로 진리를 없애는 자들과 같이), 그런 같은 자로서, 거기에 그런 방식을 또 한번에 취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이면을 취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런 그 칼빈의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런 의식이 반영된 것이 기독교 강요에 크게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을 핑계로 소요를 일으킨다면, 자기들의 죄에 상응하는 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모욕당하지 않게 되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어요. 이런 칼빈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마귀가 사용하는 무기와 관련해서, 결국 특별히 의식을 하고 글을 썻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3. 그래서 여기에 23페이지에 표현된 대로 “결국 대적자들의 강포에 의해서 핍박받고 순교당하는 자들을 대변하고 대적자들의 불과 칼에 대응하는 저항의 수단으로서”, 오직 말씀 만을 유일하게, 주장하고, 그 안에 포함된 것만 하나님의 진리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런 저항의 수단으로서 책을 쓰고 있고, 또 여기에 있는 대로, 고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 고백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문제는 대적자들이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진리로서 알아야 할 것을 잘못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이와 같이 순수한 교리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그들은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곤비한 죄인들일지라도, 그러나 그들이 믿고 있고 고백하고 있는 그 교리만은 세상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설 것이고, 모든 권세에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이예요. 그러면 왜 그러냐? 그랬을 때에는, 그런 모든 내용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살아게신 하나님과 성부가 왕으로 세웠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사회적 사명이나 종교적 사명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Dei ministrum, 하나님에 대한 섬김), 여기에 미니스트룸(ministrum, 사역, 섬김)이라 썼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홀인, 오직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권세의 표현, 유일한 방도, 또 구원을 이루게 하는 유일한 길, 이런 하나님의 홀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될 것을 표현하고 있고, 만약에 그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든 결국 통치자가 아니라 도둑질하는 자이다. 이렇게 강하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 자신들은 그들의 대적자들의 폭력에 대해서, 같은 무기로 싸우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경배하고 기도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로 서 있는 자, 그래서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라고 그가 제의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수용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개혁교회의 입장이 되었던 것이지요. 개혁교회의 입장이라는 것은 칼빈이 그렇게 주장한 모든 내용은 원래 그것이 기독교의 본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다. 기독교는 그래야 한다. 이런 뜻으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청해야 한다. 이것이 저항이다. 그러니까 듣는 자도 그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청자로 남아있는 것, 이것이 또 저항의 방식이고 저항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다른 표지가 없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교회가 궁극적으로, 가시적으로, 외적으로 나타낸 표지라고 했을 때는, 좀 더 깊이 말해서 교회와 관련해서, 그가 택자냐? 아니냐? 교회가 지상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표지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있는 외적인 표지인 성례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의 정당한 집례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에 이제, 실제적으로 보면, 내용으로 본다면,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곤비한 죄인들’ 이렇게 했을 때, 그 개념이, 복합적으로 결국, 율법의 기능에 의해서 결국,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곤비한 죄인들로 서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청하고, 그것을 먹고 사는 자로 존재하는 그런 자로서, 역시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곤비한 죄인들, 또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그로부터만 생명과 진리와 모든 것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소위 그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그런 자로 있는, 가난하고 곤비한 죄인들, 동시에 어떤 방식에 의해서, 오직 거룩의 어떤 성격,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또 어떤 대적에 대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무기를 갖지 않고 싸우는 그런 자로서의 결국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곤비한 죄인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시대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여전히 저항의 방식으로, 또 고백하는 자로서, 유리하는 자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이죠. 이것이 칼빈입니다.


이 칼빈을 우리가 이제 개혁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서의, 기초자로서 우리가 이해하기보다도, 그것은 성경에서 가장 정수,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있는 가장 정수, 그 내용을, 그대로 본을 따고, 또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그런 시대의 독특한 그런 인물로서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해야죠. 그것이 무슨 뭐 루터 교회와 다른 개혁교회, 카톨릭과 다른 개혁교회, 재세례파와 다른 개혁교회, 이런 자로서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이 내용으로도 충분히 확인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이런 시각에서 대충 맛을 본 내용이지만, 기독교강요는 훨씬 더 그 내용이 깊습니다. 물론 제가 자료를 여러분들에게 전부 소개할 수 없지만, 그가 기독교강요 이외에도, 칼빈이 이런 저항의 원리를 가지고 일찍부터 표현한 내용이 있었어요. 특별히 그 가난한자를 표현할 때도, 칼빈의 위대한 점은, “그 신자의 중생에 의해서 완전해 진 것이 아니라는 중대한 선포인데, 아무리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의에 있어서 증가하고, 자란다 할지라도,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는 이상, 부요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의 결정과 실족으로부터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이런 말을 썼어요. “중생된 후에도 항상 우리의 의를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하며, 그 안에서 확인되고 보증되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된 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죄인들로 남아있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칠판에 판서하시면서> 

Nous somme tousious 우리는 항상 이다

panvres et miserable 가난하고 곤비한 

pecheurs devart la face de Dieu 죄인 하나님의 면전 앞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가난하고 곤비한 자로 남아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영원한 혼돈 이외에는 다른 분깃이 없다.” 이런 표현까지 했어요.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분별하는 표징이 나타나야 되고 ㅡ 그 표징은 거룩한 복음이 순수하고 신실하게 설교되고 선포되고 들려져야 된다.” “듣고 지켜지는 것”, 이렇게 표현했어요. “거룩한 복음이 순수하고 신실하게 설교되고 선포되고 듣고 지켜지는 것” 그 다음에 “성례가 합당하게 집행 되는 것, 그렇지 않으면 교회형태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그 서원에 있어서 오직 그의 영으로부터 진행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간전통의 강조는 기독교 자율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순례 행위, 수도원제도, 음식의 분배, 결혼의 금지, 고백성사 등등은 인간의 전통의 강조는 기독교의 자유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권징은 신자들 사이의 거룩하고 구원적인 일이다.” 우리가 권징이 있잖아요. 치리행위는, “권징도 신자들 사이의 거룩하고 구원적인 일이다”. 그래서 “권징대상은 우상 숭배자들, 훼방자들, 살인자들, 도둑들, 거짓증거자들, 싸우는 자들, 취하는 자들”, 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그런 것들이예요. 이것이 이제 칼빈주의의 경건성이죠. 그리고 방탕한 자들도 포함이 되었어요. “이들은 적당히 권고하여 수정되지 않으면, 그들의 회개가 알려질 때까지, 성도의 교제로부터 끊어져야 한다” 이것이 결국 출교이지요.


“목사의 역할은 첫째로는 가르치고 권고하고 위로하는 일이고, 두 번째로 모든 거짓 가르침과 악한 소금에 대해서 저항한다.” 이때 저항한다는 말은 레시스땅스라는 말을 썼어요. 그때 “저항한다는 표현은 성경의 순수한 교리를, 그들의 이상이나 상상으로부터 혼돈됨이 없이 벗어나는 것”이예요. 이것이 이제 적정과 절도의 원리로 바꾸어 졌지요. 그래서 “목사가 그러면 명령하고 옹호하고 약속하고 경고하는 권위를 어디에서 얻는냐? 했을 때는, 오직 그의 말씀에서 얻는다. 말씀 없이는 그들은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선포하는 목회자의 말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듣는 것처럼 들어야 한다. 그들의 목회는 교회에게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주어진 권세로 생각해야 한다. 한편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목자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도둑 하는 이리처럼 사냥되고 추방되어야 한다.” 그래요. 그런 내용으로 초반에 이런 그, 기독교강요와 더불어, 이렇게 그의 정신이, 교회론과 관련해서, 이런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런 저항의 방식입니다. 지금 방금 읽은 것은, 제가 최근에 방을 책을 정리하다가, 독일에서 노트를 한 것 중에서 일부를 여러분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다른 때에는 여러분들이 듣지 못하던 내용이예요. 덤으로 얻은 것입니다.


4.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판과 그 신학적 배경인데, 1536년판 이외에도 1539년판이 나오고, 1543년판에 이제 확대가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 1545년판도 나오게 됩니다. 물론 그 판이 나온 것은 그 장정(절?)의 방식이 좀 다른 방식으로 나옵니다. 그 다음에 1550년판(큰 장절?)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주 큰 판으로 대형판으로 나오는데, ... 기독교 강요 1536년판을 보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출판된 출판물 중에서 칼빈 이름으로 되지 않은 기독교 강요도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4권밖에 없다. 이름이 Autore Alcuinus,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칼빈을 알 사람은 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맞추어보라는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카톨릭이나 기타 칼빈을 비난하는 자들이 칼빈을 윤리적으로 비판을 했어요.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칼빈 전집에서는, 이렇게 제가 한국에서 복사가 되어서 다행한데.... 그래서 제가 이제, 독일에서 칼빈을 공부할 때도, 결국 모든 판들을 다 원본을 다 보아야 하니까, 원본을 다 비교하면서 보았어요.... 아마 한국에서 기독교 강요를 편집한다면 원본에 있는 그대로를 되도록이면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cd 작업을 하고, 인터넷에서도 공개하고,...또 과거에 17세기 이전의 개혁교회의 중요한 인물들의 라틴원본들을 디지털 작업을 한국에서 해야 할 실정입니다. 외국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자기가 개혁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만 유일하게 지금 현재, 개혁교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나라거든요. 여기서 안 하면 뒤에 사람이 없어요. 중국도 없고, 아무데도 없어요. 아마 한국에서도 없을런지 몰라요. 이미 총신이나 이런 데도 다 기울어지고, 그래서 관심이 없는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교재 25페이지에 나온 것은 기독교 강요 1559년 판이예요. 1-4권으로 되어 있지요. primus(첫째), secundus(둘째),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종종 이해하기를 상중하로 해 가지고 종종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어요. 굉장히 그것은 한국에서 이해할 때 특별히 잘못된 것이고, 외국에서도 그런 경향이 상당히 많이 있어요. 한국에서 여러분들의 선배들의 경우에 이것을 의식을 바꾸는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 만큼 오해가 많은 그런 기독교강요 해석입니다. 여기에 제 1권에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 말은 “삼위일체가 창조자로서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1장 제 11절에 제목, 이름이 삼위일체로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 자체가 그 자신으로부터 창조로부터 성경에 전달된, 창조에 대한 것” 이렇게 되어 있는 내용이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세 위격이 포함이 되어 있는, “유일한 신적 실체 자체가 창조의 작가” 이렇게 되어 있는 1장13절의 제목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당연히, 제 1권은 “창조자 하나님(제1권 제목 :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이라고 했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창조자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 당연히 여기에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제2권 제목 :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경우에 있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속자로서 있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단지 여기에 전치사(in)로 붙을 때, in Christo(인 크리스토)는 그런 구속자, 구속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지만, 그러나 조건이 되어 있을 때, in Christo(인 크리스토), 즉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자로 되어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지금 ‘처음에는 율법 아래서 족장들에게(quae Patribus[족장들에게] sub Lege[율법 아래에서] primum[처음에는])’, 그 다음에 ’그 후에 복음 안에서 우리들에게 계시되었다(deinde[그 후에] et nobis[우리에게] in Evangelio[복음안에서] patefacta est[계시되었다]). 그러니까 2권 자체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계시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런 뜻입니다. 1권도 이렇다는 것이에요(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창조자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자에 대한 계시가 이루어졌고, 지금 기독교 강요 제 2권에서는, 지금 그 그리스도, 그러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아담 이래 모든 교회에 안에서,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역사하셨을 때, 그것을 전부 in Christo(인 크리스토)로 표현하는, 그러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속자로 되어 있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논하고 있고요. 제 3권은 이제 이미, 그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자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그런, 여기 이제 modus(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percipiendae) 방식에 대한 것이에요. 그래서 그 열매가 우리들에게 이제 제공되어서 임하는 그런 내용이고, 또 그 결과가 이제 맺어 있는, 결과가 있는, 그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 방도(modo)에 대해서, 다루는 거예요. 이때 이제 구원의 서정을 다룬다는 거예요. (3권 제목 :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식에 대하여 : 거기로부터(그리스도로부터) 어떤 열매가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뒤따르는가?)


그리고 제4권은 외적수단 이예요. 어떤 의미에서 modus(방식)는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가? (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런 하나님이 성취하고, 또 만세전에 정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런 은혜의 내용들이 열매를 우리 안에 맺게 되고, 또 결과를 얻게 되는가? 하는 그 결과를 얻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방식에 대해서 이제 이렇게 표현에 주고 있어요. modo(모두, 방편, 방도)했으니까? 방도 이지요. 어떤 형태로 그것이 이루어지는가? 그런 내용이 구원의 서정에 해당됩니다.(3권을 설명하는 내용) 그 다음에 수단 이예요(4권). 완전히 외적수단입니다. 이것이 교회론입니다. 결국 우리를 초대해서, 그 안에서 우리를 보존시키고, 이끄시는 그런 그리스도의 사회입니다. 소사이어티(society)가 어떻게 해서, 어떤 수단을 통해서 우리를 초대하시고 이끄시는지, 또 다스리고 계시는지, 이런 내용이 여기에 외적수단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1권의 “창조자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2권을 성자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3권을 성령론으로, 4권을 교회론이라던지 이렇게 다룬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 1권을 성부 하나님, 2권을 성자 하나님, 3권을 성령 하나님, 4권을 교회론, 이렇게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어요. 그것은 아주 잘못된 이해입니다. 기독교 강요는 항상 전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 밑에서 이런 제목이 붙어 있다고 생각하시고, 그 다음에 3권의 경우에도, 단순히 성령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내용이지만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또 4권이 외적 수단에 대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지표(교회의 표지)와 관련해서, 가시적인 교회가 나타날 때, 어떻게 유일하게 표현이 될 수 있는 가시적인 것이 어떻게 나타날 때, 수단을 사용합니다. 그 수단에 불과한 것이 어떤 의미에서 교회에서 활동이다. 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책들이고, 그 외에 모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실제 본질은, 실제 하나님이 주체이고, 그에 대한 지식과 관련되어 있고, 그 다음에 그 지식이 열매를 맺고, 또 결과를 얻는 그런 내용들은, 이런 modus(모두스, 방편, 방식)를 가지고 있다. 그런 뜻이 되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강요를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그 만큼 이 제목 자체가 풍성한, 무엇인가 굉장히 그 아주 그 근거의(?) summa(총화)가 될 만한, 그리고 꼭 구원에 필요한 방식이 어떤 방식으로서 지식이 거기에 구비되어야 될 것인가? 그래서 처음부터 루디멘트(rudiment) 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개념처럼, 나중에 이제 결국, 어떻게 하면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읽을 수 있냐? 그러니까 서론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그런 개념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식이 없이, 이런 기독교 강요와 같은 그런 종합적이고, 잘 체계를 이룬 그런 지식이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없다. 이런 말입니다. 성경은 이런 지식을 가지고 접근할 때, 성경이 분명하게 이해가 되고, 또 성경을 결국 그런 내용을 거기서 찾아내는, 이런 의미에서의 reading작업을 어떤 서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각 권 제목

제1권 제목 :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제2권 제목 :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3권 제목 :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식에 대하여 : 거기로부터(그리스도로부터) 어떤 열매가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뒤따르는가?

제 4권 제목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회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그 안에(그리스도의 사회) 머물게 하시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나 부양(adminiculus, 혹은 도움)에 대하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이런 진리의 내용을 하나님의 거룩한 종과 도구들을 통해서, 보존시켜 주시고, 또 가치의 내용을, 이와 같이 주님의 은총을 받는 자로서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시옵고, 또 그것을 듣는 자로 있어서, 이제 진리의 맛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것이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앞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시고, 또 이런 모양으로 표현해주시고, 우리가 그 안에 은혜를 받게 하여 주셨사오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서 늘 시작으로 그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부요한 재산이 되게 하여 주시고, 삶의 원리가 되게 하며, 또 이것 때문에 마지막 생을, 이 목적 때문에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그런 인생의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은혜를 감당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참 복을 누리는 자로 이 세상에서 사는 줄로 믿사오니, 이런 축복이 우리의 삶의 모든 곳에서, 모든 삶의 방식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FB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