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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특강 IV - 김영규 교수

Bavinck Byeon 2018. 4. 20. 22:23

기독교 강요 특강 IV

- 칼빈의 신학적 배경과 칼빈 신학의 독특성 -


김영규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녹취: 김기현 강도사(은총교회)

강의 연도: 2004.9.2, M.Div수업


*[본 강의안은 강의를 녹취하신 김기현 강도사님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제1강


1. 본문: 갈1:10-12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창조 이래 인류가 번성하며, 그 역사가 긴 것 만큼, 인간의 손의 흔적인 문화의 많은 터전을 세우고, 번성하며, 그로 인하여 땅 위에 참 희락이 넘치며, 그러나 거기에 고통도 있는 가운데도, 인류의 역사의 모든 문화의 내용들은 이제 번창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을 때, 과연 그런 문화의 본질 속에 인간이 위치해야 할 내용이 무엇이고, 인간이 그 가치의 내용으로서 무엇을 드러내야 할 것인지 참으로 인류가 모든 의문을 가지고 대답을 해보고 또 대화를 해 보면 그리고 많은 형태로 각자의 모습대로 그들이 그 진리를 편 많은 내용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정하신 그런 거룩한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주께서 우리를 험악한 가운데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경청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사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저희들이 그 진리의 내용이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부터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것을 유지할 능력도 없는 자로서 우리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시옵고, 오늘도 이런 진리 앞에서 저희들이 순종할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사오니 이런 모든 기적들이 참으로 주님 앞에 받는 위로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도와 주시고 또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 가운데 특별히 역사해 주셔서, 역사는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이 되어도, 진리는 오직 주님의 손에 있사옵고, 주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거기에 두시고, 거기에 사람들을, 주의 종들을 또한 부르심과 함께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대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거룩한 은혜가 계속되는 줄 믿사오니 이런 저희들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의 주님이 증거의 내용을 저희들이 목격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증거들이 참으로 크게 드러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셔서 우리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우리 가운데 역사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귀한 말씀을 맡은 자로서 훈련받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자로서 모든 사람 앞에 모범이 되어야 할 삶으로서 초대되었사오니 우리가 이런 삶의 모범을 많은 사람들 앞에 보일만한 충분한 능력과 은혜를 주님 앞에 받아야 될 저희들의 귀한 사명을 주 앞에서 가지고 있사오니 주께서 함께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가 시작하고 또 우리가 고통하는 모든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늘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특별히 같이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기독교 강요를 읽는다 했을 때는 소위 장로교가 기초하고 있는 신학적 틀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접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독교 강요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우리의 신학적인 내용들이 성장함에 따라서 좀 더 크게 발견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최소한대로 어떻게 하면 보편적인 지각을 갖는 자가 사고와 언어의 모든 내용을 동원해서 그 입구로 초대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생의 현장에서 내 것이 되는 그런 신학적 내용으로서의 소유성 그 자체는 단순하게 이런 강의 하나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긴 생을 통해서, 또는 어떤 생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발견이 안 되고 아무리 같은 내용을 경험하길 원해도 경험이 되지 않고 어느 일부의 내용만을 가진 진리성을 그가 체험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강요를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그 시대에 그 칼빈이 읽는 그대로를 우리가 발견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러나 역사의 긴 시대를 통해서 그 진리의 내용들이 어떻게 보존이 되었고, 강조가 되었으며, 또한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어떤 진리가 부각이 된, 이런 성격을 따라서 시대성이 있는데, 역시 이런 강의를 할 때도 그런 시대성이 반영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기독교 강요를 읽기 전에, 또는 칼빈을 우리가 소개하기 전에, 종교개혁 기반이 되는 중요한 어떤 신학적 내용들이 먼저 소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개된 내용을 보고 먼저 접근하게 되는데, 물론 이 기독교 강요는 조직신학의 체계를 배운다든지, 역사의 어떤 신학적 체계를 배운다든지 이런 성격이 아니고, 칼빈이 원하는 가장 중요한 체계의 목적은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여기에 중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를 읽는다 했을 때는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이런 개념을 쓰거든요. “성경으로 돌아간다” 이런 개념을 쓰는데, 그때 물론 종교개혁 유산에서 중요한 것은 여기에(scriptura에, 성경) sola(오직)가 붙지요. 그래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이 되겠습니다. 그랬을 때 sola의 성격은 분명히 신학적인 내용으로서 종교개혁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지요. 어떤 critic(비평)의 경우에 기초, 기준, 어떤 그 표준, 기준 이런 개념에 있어서의 “오직 성경” 이때 여러분들이 흔히 듣고 있는 대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다. 여기서 그 “규범”이 어떤 성격이라고 하면 “오직 성경”이다. “성경”에 의해서만 기준이 되어서 우리의 믿음의 생활을 산다. 이런 뜻에 가까운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성경이 발견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시대적인 특별한 역사적인 전환기의 성격이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갈라디아서 1장 10-11절에 표현된 내용 가운데 거기에서 출처와 관련되어서 이 복음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지만 결국 이것이 sola scriptura(오직 성경)와 관련이 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러면 누구로부터 왔는가?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인가?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인가?” 그런 상대적인 성격 가운데서,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계시의 개념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갈라디아 3:2절을 보시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때 “듣고 믿음으로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듣는다”. 물론 “읽는다”하고 좀 다르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제 초대받아서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서 전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듣는 일이 있다고 전제했을 때, 과연 한 개인이 구원을 받는 일과 관계해서, 성경이 오직 규범이라고 자신이 신앙으로 고백을 하기까지, 그가 결국 최소한대로 듣는 일이 있는데, 그 듣는 일이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가장 기초적인 사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으로 난다고 했을 때,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듣지도 못한다. 그래서 전하는 자와 관련해서 사역자가 있는데, 이런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런 듣는 일 조차도 그 듣는 일이 과연 성령의 역사 없이, 또 듣는 행위를 해서, 내가 듣는 이후에, 어떤 전환이 있다면, 어떤 conversion(회심)이 있다면, 그 conversion(회심)이 과연 그 자체, 어떤 듣는 행위와 또는 내가 들을 만한 능력에 의해서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제 그러니까 sola scriptura(오직 성경)를 통해서 내가 듣는다. 이렇게 했을 때, 우리가 이제 경청하는 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회심을 하게 되었을 때, 그런 일과 관계해서, 그러면 듣는, 들을 만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열매를 맺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행위 자체가 바로 구원의 성격을 갖는가? 이런 성격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어떤 교회라는 성격이 있지 않겠어요? 회중(congregation)이지만, 그러면 회중이 설교를 듣는다고 했을 때, 모두가 지금 듣는 행위를 하고 있고, 들을 만한 능력이 있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최소한도로 들을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되어 있는 그런 형태인가? 아니면 들을 만한 능력과 힘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어요. 그랬을 때 이런 것에 의해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 믿음이 들음으로 났다고 하면, 들음으로부터 믿음이 생겼어요. 그러면 믿음이 이와 같이 듣는 능력도 아니고, 듣는 행위에도 있지 않고, 그러면 무엇인가?


여기에 표현대로 “성령”, “성령으로”(갈3:2) 가 아니면 그런 일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성령하고 믿음하고 관계가 분리될 수 없이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말씀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이런 것(믿음)을 산출하는데, 결국 성령의 결합이 없이는 믿음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객관적으로 어떤 원리로 있고, 그 다음에 여기에 혹시 내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혹시 있는 것인지, 그 다음에 성령과 fides(믿음)의 관계에 있어서, fides(믿음)의 결과를 냈을 때, 그러면 성령의 독자성에 의해서 fides가 산출이 되는 것인지?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역사는 어떤, 어떤 다른 구조가 있다는 말입니다. ordo(질서)가 있어가지고, 그 ordo(질서)에 의해서 결국 한 열매로서 맺는 것이고, 그럼 이 ordo(질서)는 다른 하나님의 역사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없이 ordo(질서)가 있을 수 있고, 아니면 그 창조의 역사, 섭리의 역사, 아니면 더 높은, 깊은 원인과 관련해서의 그런 예정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뜻 안과 관계없이 그런 ordo(질서)가 있는가? 이런 성격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루터는, 성령만 강조하다 보면, 루터의 그룹들 가운데서 소위 재세례파의 그룹들 가운데서 형성이 되는 그런 구조가 있다면, 그러나 말씀과 분리될 수 없는, 말씀과 성령을 결국 나누지 않고, =(이코르 관계), 거의 동일시한 상태에서 믿음의 성격을 강조했을 때는 적어도 루터주의이다.


루터주의는 들음으로부터 믿음이 나온다. 이것이 약간의 변질된 모양이 어떤 형태로 있느냐에 따라서, 이런 형태에 강조를 두는 것, 듣는 능력이든지, 듣는 행위에 있지 않고, 들음으로부터 믿음이 난다고 했을 때, 그런데 있지 않다 했을 때, 초기 순수한 루터가 되겠어요. 그래서 이런 관계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넘어서서 이 ordo(질서)의 성격까지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이런 것이 이제 실제적으로 루터하고 다른 선에서 이렇게 전파되는 내용이 되는데, 이 영역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여기까지 신학적으로 체계를 이루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성격이 칼빈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도, 단순하게 창조된 사람 어느 누구나 자기의 읽을 능력이든지, 읽을 행위이든지 이런 것에 있어서 다 개방이 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sola scriptura(오직 성경)는 오늘 날 같으면, 뭐! 6세기, 7세기에 걸쳐서 형성이 되고 있는 마호멧트도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어 왔습니다. 그런 극단의 종교 주의도 그러고, 그 외에도 sola scriptura(오직 성경)를 가지고 많은 주장을 합니다. 재세례파도 그렇고, 알미니안 주의자도 그렇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 안에, 물론 카톨릭도 일부 sola scriptura(오직 성경)를 주장하지만은, 그 외에 많은 신교 쪽의 이단들도 대 부분 sola scriptura(오직 성경)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런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성경으로 돌아갈 때, 놈(?)(norma, 규범, 기준)의 성격이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니고, 결국 성경의 모든 내용이 가장 종합적으로, 전 성경이(tota sacriptura; 전체 성경), 잘 균형 잡힌 내용으로 모순이 없고, 그리고 잘 정리된 그런 형태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자기가 읽는 방식으로 그런 형태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대부분 학문을 하는 경우에는 이런 소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든지, 또는 들을 수 있는 능력, 또는 듣는 행위, 이런 것에 의해서 신학이 구성이 되었을 때, 신학과는 상관이 없는 행위로서 역사 속에 늘 남아 있는 그런 것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르네상스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을 때, 그 reading을 가지고도 이렇게 카톨릭을 비판할 수 있었는데, 그 카톨릭을 비판하는 소위 르네상스 정신, 또는 약간의 크리스챤적인 입장을 가진 reading 중에서 에라스무스 같은 그런 인물이 갖는 해석, 이런 것하고 대조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긴 시대를 통해서 신학이 이루어졌고, 신화화 작업이 이루어진 그런 시대를 통해서는 훨씬 이 영역, 이런 영역에서 소위 모두가 활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상 현 시대의 신학적 역사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만큼, 이 영역으로(개혁신학) 넘어가지도 못하고, 더구나 이 영역까지(루터?) 넘어가지 못하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2. 그래서 벌써 여러분이 기독교 강요를 읽는다. 그래서 내 강의를 듣는다 했을 때는 이런 일들이 성령의 역사 없이는 초대가 되지 않는 것처럼, 경청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내용으로만 선포되고 이렇게 되었을 때는 약간의, 본질적으로 거부감이 생긴다. 대부분 이 영역에서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가면 소위 대 부분 중심적인 것은 합리성입니다. 이것을 표현하면, 넓게 자연의 빛이다. 자연의 빛이면 도덕적 성격들, 그 다음에 합리적 성격들을 다 포함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그래서 물론 ratio(이성)도 그런 개념이 약간은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을 후대에 르네상스 이후에 와서는 “이성”으로 바꾸어집니다. 이것은(ratio) 영어에서 reason으로 그대로 번역하면 되지만, 이렇게 구별해서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원래 이런 개념이 오랫동안 자연의 빛, 영광의 빛, 이런 빛의 개념에 있어서 약간 구별되는 신학적인 용어가 르네상스에서는 여기에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결국 사회를 비판하고 시대를 비판하고, 더구나 종교를 비판하고, 이런 성격에서 성공을 많이 해서 그런 르네상스 비판 정신이 결국 종교개혁의 씨가 되고 뿌리가 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르네상스 정신으로부터 그런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이런 자연의 빛에 의해서 비판하는 예리한 비판들이 르네상스 정신이라면, 르네상스 정신을 통하지 않는 종교개혁자는 없을 정도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어떤 자극을 받고, 그로부터 약간의 기독교적 요소로서 전환하는 그런 성격에서 한 시대를 비판하는 성격이 에라스무스 형태라면, 그런 형태가 일단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 르네상스 정신으로 결국 교회를 비판하는 어떤 운동이 있었다면, 그 운동을 통해서 대부분 종교개혁자들의 싹이 성장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성장으로부터 독립이 되어서, 결국 종교개혁자라고 했을 때, 그 르네상스와 같은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얼마큼 종교개혁 정신에 가까운 그런 내용으로, 루터와 같은 정신으로 이렇게 바꾸어지느냐 보고, 그것이 언제부터 그 사람이 종교개혁자 이냐? 이렇게 판단합니다. 그래서 생애에 있어서 그런 전환에 있어서 평가할 때, 블링거 같은 경우는 언제 그런 일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아무리 인문주의 학자이지만, 쯔빙글리도 인문주의 학자이지만, 그 외에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인문주의 학자이지만, 인문주의 학자들이 언제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 정신으로 전환이 되는가?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오직 성경만 기초하고, 그 다음에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고, 믿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다. 이런 원리로부터 언제 전환하느냐? 이것을 보고 그를 인문주의자로부터 종교개혁자로 되는 것을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1525년에 이루어졌느냐? 또는 그 전에 이루어졌느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살펴 볼 내용 가운데서도 칼빈의 경우에도 세대를 볼 때는 약간 후대입니다. 후대 일지라도 그 독자적의 생을 볼 때도, 그 회심의 성격을 어떤 형태로 이해되느냐?에 따라서 그를 종교개혁자로서의 전환을 성격을 보게 됩니다. 이런 성격을 우리가 이제 종교개혁과 연관되어서 칼빈의 신학의 성격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를 원하는 내용이 됩니다. 물론 1536년판에 기독교 강요(초판)가 형성이 되었을 때는 그가 벌써 이런 긴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의 정신들이 형성이 된 이후에 상당히 긴 시대를 거친 이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루터의 경우에는 칼빈에 비해서 한 세대입니다. 칼빈은 1509년-1564년입니다. 제네바의 같은 동료인 베자는 로잔에서 활동하다가 제네바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가 칼빈의 굉장히 중요한 동료가 되고, 최종적으로 제네바를 유럽의 종교개혁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의 뿌리로서의 제네바를 중심으로 긴 역사를 가지고 그가 지고 있는 가장 중심자리를 갖게 하는 그런 성격이 베자가 결국 오랫동안 1605년까지 한 세대를 사는 그런 긴 생애를 그가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정점이 됩니다. 항상 제네바를 거쳐서 다른 데로 가는 이런 형태가 긴 시대를 통해서 이루어져서 정착성이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인데, 그 만큼 베자의 역할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역할을 하기 전에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있었습니다. 루터도 그렇고 쯔빙글리(쭈리히의 종교개혁자)도 그렇습니다. 연배로 보면 쯔빙글리가 한 살 어립니다. 루터보다도 쯔빙글리하고 약간의 관련된 것이 오클람 파디우스입니다. 바젤의 종교개혁자입니다. 같은 종교핵자일지라도 capito(카피토, 스트라스부르그의 종교개혁자)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capito의 부름을 받은 것이 부쪄(Bucer)입니다. 그래서 카피토와 쯔빙글리는 상당히 같은, 실제적으로 바젤에서 같은 성장했습니다. 물론 이런분들은 다 르네상스의 정신을 약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약간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 부쪄의 계열 가운데서 부쪄에 속해 있는 그런 내용 가운데서. 일부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런 인물이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때 이 분들이 다 루터 보다도 이런 개혁주의 선에서 거의 일치된 주장을 하게 되는 배경은 루터가 이런 분들과 다른 독자성을 가지고 주장함에 따라서 결국은 이런 그룹들이(쯔빙글리, 블링거, 오클람 파디우스, 카피토, 부쪄 등) 개혁주의 영역으로 뿌리를 내리는 선각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만 독립적으로 되었고 이 영역에(쯔빙글리, 블링거, 오클람 파디우스, 카피토, 부쪄 등) 속해 있는 분들이 다 넓은 의미에서 개혁주의에 속해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개혁주의 선에서 이런 유산을 가지고 소개되어서 회심하게 되는 것이 칼빈입니다.


칼빈의 경우에는 이미 1531년에 쯔빙글리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칼빈이 1534년이든 그 전이든 후든 회심을 했다면, 그리고 1536년에 기독교 강요를 썼을 때는 벌써 한 세대가 지난 이후의 인물이 칼빈입니다. 그 전에는 루터나 쯔빙글리나 이런 분들이 글을 쓰더라도 조직적인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종합적으로 종교개혁의 유산의 모든 내용들이 르네상스 정신으로부터 벗어나서 고유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글을 쓰는 내용으로 전부 각각 발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주석도 쓰고, 모든 것을 써서, 모든 종교개혁의 글들이 산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산출은 어떤 주제에 제한되어서, 종교개혁의 큰 운동에 중요한 뿌리가 되어서 활동을 하고, 보탬이 되는 내용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주제는 제한적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부의 특별한 주제에 제한되었습니다. 종합적으로 이렇게 정리된 책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이런 분들도 어떤 의미에서 capito(카피토)의 유산과 함께 루터의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reading하고 자신 안에 다 흡수 되었던 부쪄의 경우에도 종합적인 글을 쓰지 못하고, 예를 들면 로마서 주석을 썼을 때, 거기에 자신의 신학적이고 종교개혁의 정신을 모두 포함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루터가 했던 모든 개혁의 내용들, 그 다음에 라틴어로 썼던 모든 개혁자들이 썼던 글들 중심으로 되어 있지만, 직접적으로 부쪄의 로마서 주석과의 관계가 칼빈에게 굉장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1536년판(기독교 강요 초판)에 나오는 글들이, 그렇게 종교개혁 정신을 종합한 신학적 내용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그의 독자성이 있는데, 그 독자성은 이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해석이 되지 않고, 그 자체의 생을 통해서만 해석이 될 수 있는 많은 내용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독특한 내용들은 굉장히 중요한 칼빈의 독특한 신학과 관련해서 중요한 관찰점이고 연구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부쪄와 관계에 있어서 칼빈에게 중요한 역할이 부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부쪄의 로마서 주석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됩니다.


로마서 주석은 칼빈의 1536년판(기독교강요 초판)의 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굉장히 큰 책입니다. a4보다도 훨씬 큰 책입니다. 1539년판의 기독교강요는 크기가 로마서 주석과 비슷한 판에 해당됩니다. 1536년판(기독교강요)은 조그마한 책입니다. 종교개혁 유산으로서 가장 종합적인 성격이 기독교 강요입니다. 물론 루터의 해석, 즉 율법에 대한 해석, 사도신경에 대한 해석, 주기도문에 대한 해석 등, 이런 기본틀을 가지고 시작된 내용이라도, 전체를 종합적으로 나누는 것은 처음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형식 때문에 칼빈의 위치가 종교개혁을 정리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칼빈이 글을 썼을 , 그 내용을 확인하게 되면, 얼마나 깊은 내용으로서 종교개혁을 정리했고, 이런 모든 내용을 초월해서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산출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에 그 정신이 넘어가지 못하고, 거기서부터 점점 퇴보하는 형태로 있었을 뿐이지, 거기에 조금 더 가까이 가거나 하지 못할 만큼, 그런 역사의 큰 산출내용이 이때 형성이 됩니다. 그래서 이 산출내용들은 1536년판에 낸 중심적인 신학사상은 변하지 않지만, 최종적으로 1559년판에서 아주 큰 확대판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런 내용들은 생애 전체에 걸작으로서 중보가 되는 내용으로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기독교에 있어서 단순히 한 개혁주의자로서의 성격보다도 모든 시대에 있어서 어떤 책을 추천할 수 있는가?하는 선정과정이 있을 때, 칼빈을 추천하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추천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sola scriptura(오직 성경)로 가는 과정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바로 어거스틴으로 넘어갑니다. 어거스틴 이후에 있는 중세의 모든 저작들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칼빈을 지난 이후에는 칼빈에 소속된 수 많은 개혁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17세기 까지 전반의 도르트회의 까지 이루어지는, 유럽 전체를 거쳐서 퍼지는 모든 개혁자들, 특별히 개혁주의자들의 종교개혁 정신, 시대적인 정신들은 칼빈 아래 좁혀집니다.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외가 되려고 하는 자들이 이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 그러면 어거스틴이 정점을 이룬다면, 결국 칼빈을 통해서 돌아가는 어거스틴이 정점이 되고, 또 칼빈이 정점이 되어서 후대의 모든 신학자들은 칼빈을 통한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을 말하는 성격이 될 정도로 굉장히 의미가 있는 그런 인물이고,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칼빈의 신학적 배경과 신학의 독특성을 이해할 때는 물론 루터의 개혁과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이 있습니다.


칼빈을 연구하는 정통한 신학자들은 칼빈을 추종하는 자들이 아니다. 세계 칼빈학회 그러면 칼빈을 따르는 자들, 개혁자들이 주로 포함해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칼빈을 가장 많이 비판하고, 칼빈을 따르지 않고, 칼빈의 근본정신을 오염시키는 자들이 칼빈의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많은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대부분 개혁자로서 칼빈을 연구하는 자들이 드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칼빈에 정통해야 될 자들이 개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칼빈에 정통한 개혁주의자들은 드물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특히 독일에서 칼빈을 연구한다는 것은 제일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칼빈을 연구합니다. 그래서 루터주의자들이 중요한 지도자를 양성할 때는 개혁주의의 정수에 해당되는 신학을 연구하게 합니다. 그래서 적을 정확히 알아야지 루터주의 신학을 안다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카톨릭자들이 칼빈을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연구합니다. 소위 범 교회에서 존중하는 선생으로서의 칼빈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칼빈을 내세웁니다. 그때는 칼빈의 독특성을 다 삭제해 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칼빈의 모든 주장은 카톨릭 안에 여러 신학자들 구석구석에 다 있다고 해서 칼빈의 독특성이 없다. 또 칼빈은 종교개혁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종교연합) 의미에서의 칼빈입니다. 그러니까 루터도 지금도 카톨릭에서 이단으로 되어 있지만, 카톨릭 학자들이 루터를 연구할 때 범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루터의 접근을 하듯이 칼빈도 접근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에서 칼빈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글을 보면 그 부분에서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루터주의에 있어서 고위 성직자의 글들을 학문적으로 아주 잘 인용할 수도 있고, 또 칼빈을 연구하는 카톨릭 주의자들의 칼빈 연구글을 인용하는 글이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주의를 해야 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인용하는 모든 책들은 칼빈에 대한 연구보다도 자료에 대한 성격으로 봐야지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면에서 칼빈에 대한 연구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칼빈을 연구한다고 했을 때 유럽에서 바르트의 입장에서 칼빈을 발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유럽에서 연구된 것을 소개된 내용들은 상당히 많이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칼빈이 정확히 발견이 되고 발굴이 되는 일은 역사 속에서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책에 소개된 내용이 약간 있어도 그 내용은 역사적 칼빈과 관련해서 발견하게 하도록 하는 개론적 성격입니다. 약간 접근하는 방식으로 소개된 것이고 대부분 추천하는 책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칼빈의 신학적 배경과 신학의 독특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혹시 질문 있어요...제임스 패커 책은 칼빈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리얼성, 실재성, 이런 것을 많이 확인할 수 있는 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글들은 어느 정도 약간 칼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누구 있어요. 암스토롱은 읽어 보니까 어때요? “칼빈에 대한 인문주의 적인 면을...?” 그렇게 소개되는 것은 경향성이 있는 것이지요. 중요하게 일단 말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대부분 인문주의자들이었어요. 인문주의자로부터 종교개혁자로 전향한 시기를 종교개혁자로서의 누구? 이렇게 하는 겁니다. 종교개혁자로서 연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특성과 전환시기가 굉장히 중요한 성격이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문주의 입장에서 칼빈을 분석하는 자체는 결국 종교개혁자로서의 성격을 많이 제거하는 성격이 거기에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우리가 이제 루터를 잘 알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가 에어푸르트(Erfurt)에 있었다가 그가 스타우피츠(Staupitz)를 소개를 받아 가지고, 그때 스타우피츠(Staupitz)의 강의를 들으면서 젊은 루터가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성경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상기하는 것은 1507년 사제로 임직을 받기까지 2년 수도원 생활이 조그마한 교육장이라고 표현할 만큼 중요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스타우피츠(Staupitz)의 추천을 받아 가지고 비텐베르그(Wittenberg)에 가서 첫 강의를 합니다. 그런데 루터가 스타우피츠의 소개로 비텐베르그로 가기 전에 가장 중요한 루터의 훈련장은 에어푸르트(Erfurt)에 있었던 것이고, 그 때 강의를 들었던 내용들은 굉장히 의미를 가집니다. 또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루터가 강의를 한 내용 중에서 후대에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의 시편 주석 같은 것, 갈라디아 주석 같은 경우인데, 그때 강의했던 강의록과 후대에 출판된 출판물하고 큰 차이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루터 전집 안에서도 소위 바이마르 루터 전집 안에서도, 초기 루터가 공적으로 출판했던 출판물만 전집에 포함시켰고, 소위 에어푸르트(Erfurt)에서 루터가 남겼던 것들이든지,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루터가 강의한 강의록 가운데서도, 실제적으로 전집에 포함시킨 것은 개혁주의와 같은 그런 신학을 가진 루터의 시편 강의는 처음에 출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편 강의 같은 것은 후대에 루터주의가 방해를 해서 출판을 못했다가, 개혁주의 선에서 루터의 그런 내용을 알고 있는 자들이 계속 압력을 가해서 전집 안에 들어온 것이 겨우 50권째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만큼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 개혁주의가 발견하고 있는 루터와, 루터신학자들이 발견한 루터하고 많은 차이가 있을 정도가 됩니다. 그런 비판 중에서 특별히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시편강해 같은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일단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소위 95개 조항이 “성인축제날 성인유물들을 보여주는 날”에 교회의 문에 붙여질 때, 그 때 개혁정신,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저항정신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95개 조항이 갖는 성격은 오늘날 같은 그런 신교가 같은 종교적 특성이라는 것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많이 있고, 대부분 카톨릭 내에 가지고 있는 비리들, 신학적 비판성,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95개 조항을 가지고 루터신학의 정수를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루터 신학의 정수는 95개조항 대자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한 시편 주석이나 갈라디아 주석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갈라디아 주석이 이루어졌을 때, 그런 내용들이 특히 시편 주석 같은 경우에, 이런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난다. 이 개념이 출판물에서 굉장히 약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믿음은 들음으로부터 난다)을 좀더 세세하게 좀 더 깊게 분석해서 강의했던 내용들은 초기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강의한 초기 시편주석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대자보로서 발표한 그런 내용들은 아주 외형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고, 루터의 신학적인 아주 독특한 내용들은 훨씬 전에 다 형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루터가 종교개혁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어서 모든 사람이 그를 존중하게 되었을 때 루터는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강의했던 그런 순수한 면이 상당히 많이 퇴색되어 있는 그런 루터로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루터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의 발전사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러나 그의 종교개혁의 저항의 정신이 대자보를 붙이므로 시작된 저항의 원리들이 특별히 1521년 보름스(Worms)회의에서 현저히 나타납니다. 보름스(Worms)회의에서 루터가 홀로 서 있는 그런 내용이 저항의 정신에 아주 중요한 중심적인 내용입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아주 중요한 정신으로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저항하는 원리가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두 가지는 1517년에 있는 대자보의 경우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원리는 “왜 이 같이 교황이나 공의회”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는가? 무슨 원리에서 교회와 세속의 권세들을 가진 모든 자들 앞에서 지금 교황이나 공의회에 대해서 복종하기를 거절하는가? 그 원리를 거기에 이렇게 저항의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때 그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과 판명한 이성 혹은 양심에 근거한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이것이 이제 “판명한 이성과 양심”이 이제 과거에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성경, 이것하고 약간 변형된 형태입니다. 변형된 형태로 여기 “판명한 이성과 양심”에 근거하는 데 이 “양심의 개념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여기는 소위 루터의 양심의 개념 혹은 이성의 개념은 독일의 관념주의 발전에 있어서 “이성주의”가 발전하는 뿌리가 되는, 루터로부터 뿌리를 내리는 그런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르네상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그런 원리입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에는, ‘약간의 그런 양심의 개념(루터의 개념)에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을 때’, 칼빈의 양심의 개념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또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의미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이 되는 성격입니다. 거기에 이원론적으로 양분이 되는 그런 원리가 압니다. 그런데 루터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그런 원리가 처음부터 아주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가 처음 루터가 홀로 서 있는 성격과 관련이 됩니다. 거기 내용을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이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으로서 있는 나로서 홀로 서 있습니다. 오직 이 회의에서 도울 자는 오직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홀로 서 있다는 말입니다. “오직 내가 홀로 서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하나님 자신만이 증거자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 증거된 내용을 보면 그런 내용이 아주 현저하게 있습니다. “누가 증인인가? 했을 때는 나(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증인이 없다. 다른 모든 자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증거한 내용에서 내가(예수 그리스도)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께서 생각했습니다. 역시 루터의 경우에도 결정적으로 대적과 싸울 때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수에 근거하거나 또는 나를 지지하는 자가 거기에 속해 있어서 저항한다”이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도움을 주는 자이시고 또한 증인으로서 남아 있는 자로서 홀로 서 있다” 이런 저항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저항의 정신이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공통적으로 가진 뿌리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라고 했을 때,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른다고 했을 때는 이 원리가 루터로부터 시작해서 지금 뿌리가 내려 있는 그런 형태입니다. 그래서 이 원리는 신교에 공통적인 원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증인이고 나는 홀로 서 있다” 그럴 만큼 “오직 성경만 경청하고 하나님만 경청하는 그런 자로서 서로 대화하고, 또 회의를 주장하고, 또 회의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521년부터 많은 사제들이 용기를 가지고 지지하기 시작하였어도 종교개혁은 아직 교리에 불과하였던 것은 결국 루터가 홀로 있는 자로서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빛이 1529년까지 사라질 뻔 했던 그런 성격이었는데, 하나님의 이상한 섭리로 1529년 4월 19일에 비로서 제후들과 도시들 그리고 국가들에 의해서 공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동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적 교회가 성립하게 됩니다. 이때 선언서 내용 안에 루터의 저항의 방식이 표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때 오직 성경의 개념이 공적으로 선언되었는데, 그 때 오직 성경의 저항개념의 내용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냐고 하면, ‘이것이 여러분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이지 개혁교회의 독특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이것을 종교개혁의 정신의 공통성을 인정하더라도, 또한 개혁교회의 독특성으로 이해해야 할 그런 성격으로 종종 한국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런 내용으로 고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종교개혁에서 루터의 정신아래에서 일반적으로 신교의 전체적인 기본 독특성이라고 말해야 될 내용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저항의 내용 가운데서 “오직 성경만 순수하고 배제적으로 설교해야 한다” 그러니까 설교할 때 본문 설교를 할 것인가? 제목 설교를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날 만담이 많이 생겼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을 그냥 선포하고, 또 좀 더 깊게 가면, 지금은 예배는, 설교는 없어지고 전부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연극, 쇼, 노래, 이렇게 바뀌어졌습니다. 그것이 목회하는 데 있어서 가장 현대감각에 맞고, 전략적인, 또 성장의 어떤 방식으로서 설교를 되도록 폐지하는 그런 방식으로 소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 순서 안에서 설교가 신교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은, 특히 루터주의자도 약간의 변질이 되어서 의식이 병행하게 되지만, 그것은 성만찬 원리와 기타 의식에 대한 원리가 개혁주의와 달랐기 때문에, 그런 양분화 된 내용이 있어서, 설교와 함께 의식이 반드시 있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카톨릭 주의는 설교보다 의식에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신교화 되어서 설교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그러는데 그것은 카톨릭이 타락한 것입니다. 무슨 또 공동의회를 열리고, 집회를 하고 그런 것은 카톨릭이 타락해서 신교쪽으로 바꾸어진 것이기 때문인데, 원래는 카톨릭은 의식만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입니다. 의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도 의식이 좋아서 카톨릭에 가는 이상한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로부터 시작한 신교는 설교가 왜 그렇게 부각이 되었는가? 그것은 이와 같이 오직 성경만 순수하게 배제적으로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잖아요? “들어야 된다면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을 수 없다”는 이런 원리가 있을 때, 이 전하는 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전하는 형식이 예배 속에 반드시 갖는 겁니다. 그게 설교입니다. 그래서 그때 설교가 어떻게,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때 설교가 유일하게 성경만 설교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설교라는 것은 당연히 신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 입장입니다. 성경을 읽는 그대로 잘 설명해서 그것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소개하고 이런 겁니다. 그래서 약간의 이야기가 소개될 수 있는 것은 본문을 어떻게 하면 잘 소개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약간 예화가 들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서는 순수하게 배제적으로 설교는 성경만 설교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틀입니다. 이것을 1529년에 모든 제후들과 도시들과 국가들이 공적으로 선포된 선언 내용입니다. “오직 성경만 순수하게 배제적으로 설교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특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카톨릭의 영역에 있는 지역에서는 의식들만 하게 되고, 신교 쪽의 제후에 속해 있는 영역에서는, 제후의 치하에서 예배가 이루어졌다고 했을 때는 이와 같이 의식이 배제되지만 의식이 전부 배제된 것이 아닙니다. 뒤에 이제 칼스타트와 루터의 논쟁에서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내용이지만, 의식은 제외된 것은 아질지라도, 그 중심적인 사상은 설교가 배제적으로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선포될 것만 강조되게 됩니다. 이것이 신교의 유산입니다. 여기에서 전환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예배의 형식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구조에 있어서, 신학적 활동과 교회의 활동에서, 구조에 있어서, 이런 설교가 중요한 예배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성경이 어떻게 원리로서 있게 되었느냐? 여기를 보니까? “모든 교리와 모든 삶의 유일하고 확실한 규범으로서의 성경”입니다. 그 다음에 “그 성경이 배제적으로 설교하기 위해서, 선포되기 위해서는 성경 자체에 대한 무오성이 중요했다는 겁니다” 그때 루터주의 안에서 이와 같이 신교의, 1529년에 그런 제후들의 선언에서 무오한 성경이 고백하게 되어서 성경의 속성에 대해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당연히 성경만을 순수하게 배제적으로 설교해야 하니까, 성경해석원리는 어떻게 되느냐 했을 때는, 성경은 반드시 자체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지금 관주가 있잖아요? 그것은 하나의 종교개혁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적으로 관주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있어서, 루터주의하고 개혁주의하고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독특성입니다. 지금 루터주의 독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루터의 독특성은 신교의 독특성으로서 우리가 발견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기반 내용으로서 보게 됩니다. 그 다음에 루터주의하고 개혁주의하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 독특성은 루터주의하고 미묘한 성격의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에 있어서 우리의 입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입장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성경은 자체 해석의 원리이다” “성경은 오직 성경이다” 성경은 그 자체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까지 다 신교의 원리(개혁주의도 가지고 있는)라는 겁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의 (독특성의) 원리이다 이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 그런 성경해석학도 많이 반영이 되는데, 오늘날 여러분들이 많이 경험하는 내용이지만, 상당히 이런 중요한 원리 면에서 성경을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소개받는 내용에 있어서 굉장히 타락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뭐! 별다른 사람들이 다 생겼습니다. 한국에도 그렇고, 세계는 더욱 더 그렇고, 한국만 어쩌다가 순수하게 남아 있을까 했는데, 벌써 80년대 후반을 지나다 보니까? 전부 오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도 갈 때가 없습니다. 학자들이 그렇습니다. 장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총신도 그렇고 전부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총신이 그러니까 오염되지 않는 곳이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순수한 의미에서 과거에 한국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입장에서의 아주 독자적인 성격, 선교사들이 심어놓은 독자적인 성격은 세계에 있어서 아주 독보적인 성격이었는데, 그것은 교통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그 동안에 한국 사람이 일본이나 카나다 같은 외국에 유학 가서, 유학을 갖다 와서 거기에 진보적인 신학사상을 소개하려고 밀어 붙였는데 전부 치리 되었습니다. 그것이 해방 이후까지 계속 되었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교회 분열사의 큰 진통을 겪으면서, 결국 분리로 대개 좁혀져서, 좁혀진 영역에서는 순수성이 계속 보존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그런 것이 이제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위기는 아니지만, 어디 교회가 순수성이랄까? 종교개혁의 이런 최소한도의 신교가 가지고 있는 그런 기본적인 위치까지도 거의 맛을 볼 수 없는 시대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 강의를 듣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루터의 순수성, 루터를 지지하는 자들이, 소위 관원들과 함께 모든 루터주의의 영역에 속하는 자들이 한 영역을 차지해서 지역을 나누게 되는데, 그 지역을 나눌 때, 루터를 지지하는 데 있어서 그 독특성을 최대로 선언하는 그 선언내용에 있어서, 가장 순수한 기반 내용조차도 다 무너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면에서 우리가 최소한대로 루터주의 입장의 순수성을 돌아간다는 그런 성격이 아니고, 이제 이 산을 넘고, 또 개혁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산을 넘고, 또 칼빈을 넘어야지 칼빈을 조금 이해하는 그런 거든요. 그런데 언제 이 산을 넘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칼빈을 소개받는 자체가 기적이라는 겁니다. 괜히 들어왔다 할 정도로, 괜히 뗄 수도 없고, 괜히 꼬리를 물듯이 물고 다녀가지고 평생을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기적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종교개혁을 배웠다고 하면, 이런 원리가 신교의 원리, 종교개혁의 원리라고 이렇게 이야기는 했을지라도, 그러면 개혁신학이라고 하면, 개혁신학의 원리는 무엇이 다른가? 이것에 대한 명료한 의식이 없었는데, 이것 내가 좀 어디 빠지고 있지 않은가? 할 정도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역사적인 자료이기 때문에 루터 전집이나, 여러 가지 다른 자료에서 보면 객관적인 자료에 보면 다 있기 때문에 다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천지 창조 이래 하나님의 거룩한 가치는 쉬지 않고, 그 창조를 넘어서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조금씩 주의 진리는 전달되어서 이제 그 역사의 주께서 기뻐하고 원하시는 모든 뜻을 이제 밝히시고 모든 인류가 그 가치의 내용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역사의 내용으로서 늘 주장하시고 있는 줄 믿사온데, 저희들이 그 열매의 내용을 우리의 마음에 맺게 하여 주시고, 또 우리의 생을 통해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내용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연약하여서 우리가 옛 사람으로서는 진리의 내용을 한 가지라도 저희들이 이해할 수 없고 실천할 수 없는 자들이오나 이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로 초대해 주셨사오니 주께서 이런 초대가 주의 섭리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 줄 믿사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옵고, 우리가 이런 은총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하게 주시옵고, 환경도 주장해 주시어서, 참으로 진리를 진리대로 잘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의 터전이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모든 여건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는 그런 거룩한 과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출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FB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