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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특강 II - 김영규 교수

Bavinck Byeon 2018. 3. 4. 16:43

기독교 강요 특강 II

- 기독교 강요의 전체적 성격 다룸 -


김영규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녹취: 김기현 강도사(은총교회)

강의 연도: 2003~2004, M.Div수업


*[본 강의안은 강의를 녹취하신 김기현 강도사님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제2강


1. 성경말씀은 호세야서 6장 5절 말씀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또 기꺼이 주님 앞에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며, 또 우리가 이런 고백한 내용을 우리의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오늘도 위로를 받을 자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런 자격으로 저희를 훈련받게 하여 주셔서, 이런 모든 준비과정에 있어서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숙해야 될 하나님의 거룩한 지식의 내용들을 우리 안에서 확대시키고, 또 영광이 되는 내용까지 모든 것으로 준비하기를 원하는 저희의 마음에 주님께서 은총과 은혜를 더하여 주시사 하나님의 영광의 모든 부합한 일들이 우리 안에서 있도록 도와 주시옵시고, 우리가 합력하여서, 이 조그마한 시간에도 주님 앞에 경배의 내용이 있게 하여 주시고, 또 주님 앞에 참 드리는 마음의 준비로서, 오늘 이 한 시간을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옵나이다.


우리가 지난번에 그 기독교 강요가 쓰여 질 때, 그때 그 쓰여 지는 근원적인 배경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이와 같이 복음의 진리 때문에, 순교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순교하게 된 그런 배경에 있어서 오해되고 있는 점들, 특별히 재세례파와 거의 동일하게 취급되어서, 그들과 같이 함께 이렇게 희생이 되는 배도자로 희생이 되는, 그런 예! 잔인한 그런 사태와 관련해서 그가 친히 이제 피신한 인물로서, 직접 관원이 되어있는 왕에게 이와 같이 그 헌신으로? 책을 쓰게 된 것인데, 이런 성격에 대한 근원적인 성격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런 내용을 지난번에 설교하다가, 어! 마쳤습니다. 마는 일단 우리가 인제 거기에서 그 이미 초반에 여러분들한테 강의할 때 소개된, 그런 예! 소위 그 당시에 칼빈이 특별히 믿는다 했을 때, 믿는다의 개념을 어디에서 찾아서, 그것이 결국 개혁의 어떤 독특한 내용으로서 구현하기 원했던가? 하는 것을 이미 설명했었어요! 그것은 이제 새로운 성격은 notita(지식) 즉 지식의 내용이 반드시 믿음의 내용으로 포함이 되어야 된다. 이런 성격을 말을 했는데 이런 내용들은 그의 갑자기 회심과 관련이 되어있고, 또 그가 저항할 때 어떤 방식으로 저항 하는가 이런 것도 함께 관련되어 있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제 과거에도 그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는 그 저항정신은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저항할 것인가? 그러니까 예 어떤 의미에 있어서 폭력으로 같이 대응해서, 내가 폭력을 입었을 때, 같이 폭력으로 대응할 것인가?


아니면 칼빈처럼 어쩔 수 없이 물론 피신할 수 있어서 자기 고향을 떠나서, 다른, 그가 경건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경배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거기에서 사는 그런 소위 피신하는 자로서 있어야 될 그런 성격이 있더라도, 그런 그 피신자로 나그네로 있는, 그런 전형적인 의미에서 나그네죠. 본토에 자기가 자기 고향에 있어도 자기 본인은 나그네와 같다 해도, 그때도 더 리얼한 의미에서 나그네로 있는 것일 때, 그러면 그가 실제적으로 핍박을 당했을 때, 고향에서 싸우는 그런 저항의 방식이나, 또 그가 나그네로 피신해서 생활하는, 그런 곳에서도 저항의 방식이든 실제적으로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독특한 저항의 방식이 있었는데, 여기 표현대로 말씀이 유일한 저항의 무기로 생각하는 그런 삶의 원리이죠. 그래서 이런 내용들은 여러 기회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성경적이다. 이렇게 했죠. 그것은 단순하게 역사 속에서 비로소 칼빈이 발견하거나, 칼빈의 주된 어떤 신학적인 내용으로서 발견 된 게 아니고, 원래 처음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렇게 하나님 백성, 그 중에서 인류를 그의 백성으로 두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크신 일을 시작하실 때, 그때에 이제 말씀이 어떤 무기로 동시에, 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또는 생명의 어떤 성격으로 이렇게 선포되었다. 그랬죠. 그런 것은 이제, 특별히 가장 실제적으로 확증이 된 내용들은 이스라엘이었고, 또 이스라엘의 계속된 역사의 실패의 역사에서,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그런 성격을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면, 그리스도가 처음 시험을 받았을 때, 그런 내용들이 거기에서 구별이 되어서, 분리시켜서 결국 그런 내용들이 최종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증거 된 대로, 예수님의 전 사역에 대한 특징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런 내용들이 결국 그가 죽으심으로, 결국 말씀의 모든 내용들을 이루었다. 이렇게 하심으로, 그가 그런 삶의 내용들 실제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성취한 것이죠.


그러니까 그때의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럴 때,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어떻게 그게 저항이 될 수 있느냐? 이렇게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우주를 다스리실 때, 우주의 근원과 관련해서 그런 방식을 취하고 계시고, 그런 그 특별한 양식 ,양식, 생명의 양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그런 자로서, 역사 속에서 그의 교회를 부르시고, 또한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구별된 그런 생으로 초대된 많은 교회의 또 멤버들이고 그리스도가 가장 큰 모범을 보인거죠. 그가 그래서, 그가 성취하신 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자로서, 그 형태로서 그의 삶의 방식으로서, 그가 세상에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 한거죠.


예 그래서 그때 그 일을 이뤘단 말이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서 내가 삶을 모두 정리했다. 끝마쳤다. 이거와 같은? 말이요. 그때에 저항의 방식이, 무슨 그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 고유한 능력이라고 하면 하나님으로서 능력이죠, 그 고유한 능력을 동원하거나 또는 그것을 사용하거나 그런 일이 없었다. 이 말이죠, 그가 이루신 일은 주께서 특별히 성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그 일을,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자로서 마친 거잖아요. 이런 의미에서 여전히 그가 유일하게 쓰는 방식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무기가 유일한 무기이냐? 그게 가장 큰 무기로서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것을 성취한 그런 형태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서 신명기 8장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어떤 중점이고 핵심이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그가 결국 친히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했던 것인데, 그런 것들을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었고, 그래서 그런 내용들은 결국 이런 인간으로 이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렇게 몰아가는 데 있어서 전부 동원된 내용들이 기타 구원의 이적의 역사든지, 또 이스라엘에 관계된 역사라고 그랬습니다.


그 만큼 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 그런 자로서 초대됐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말씀이 무기이기도 하고 그러지만은 무기로서의 정도의 것만 아니고, 삶의 형태였고, 또 그것이 이제 어떤 영생의 성격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가 생명줄이고, 또 예 그가 물의 근원이고 이렇게 했을 때 그로부터만 흘러나오는 양식을 먹는다 했을 때는, 이제 하나의 자연적 비유가 될 만큼, 그런 양식을 먹었을 때 그런 의미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먹고 사는 이런 성격이죠.


예! 자!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저항의 무기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또 우리가 거룩케 하는 방식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이런 성격 아니죠(?). 율법을 행한다. 이런 것은 그런 단순하게 내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내가 죄인으로서 이렇게 참 강제로, 그리고 예 그것을 이렇게 마치 힘겨운 짐처럼 이렇게 끌고 다니면서 지는, 그런 짐으로써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이죠. 결국 우리의 가치의 내용이었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목적으로서, 인생을 이 세상에 두신 그 목적으로서의 어떤 독특한 가치를 이렇게 드러내는 유일한 어떤 형태로서, 인간을 그렇게 고귀한 수준으로 높이는 어떤 방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사는 그런 독특한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것이 이제 이스라엘로부터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세계로부터 구별해야 될 독특한 생의 양식이다. 말이요. 생의 형태다 말이요. 역시 교회도 이제 그런 사명으로 부름을 받은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특별한 하나님이 주신, 어떤 의미에서 독특한 가치의 내용들을 점점 우리가 이제 퇴색시킨 것, 이런 것들이 율법주의도 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령주의자도 될 수 있고, 또 사회의 그런 어떤 신학자도 될 수 있고 이렇게 된 거죠, 그것은 이런 근원적인 성격에서 타락한 거죠.


이런 것을 몸부림쳐서 바로 내 동료가, 나의 제자가, 또 나의 교회에 있는 그 사랑하는 자들이, 그렇게 오해되어서, 그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서 고집하므로, 그렇게 순수한 자들이 결국 그 참 배도자로 그렇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때 그가 쉽게 저항할 수 있는 그런 무기가 있다면, 쓸 수 있고, 또 관원의 무기도 사용할 수 있고, 그런데 그걸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가 교회의 본질로 생각해서 싸웠던 거죠. 이게 이 칼빈의 독특성이라는 말이죠. 예! 그래서 벌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쓸 때, 그 제목자체가 그렇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기독교라고 했을 때는, 기독교 강요라고 할 때 뭐 우리말에서는 그 뉴앙스가 안 나타나는데, 그러나 법의 의미인데, 여기 표현은 쉽게 말해서 경건의 전 총체라 이렇게 표현했어요. tota pietatis summa(경건의 전 총체, 토타 피에타티스 숩마) 이렇게 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필연적으로 알아야 될 어떤 교리에 있어서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또 모든 경건의 열심 있는 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될 가치가 있는 가장 큰 작품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개정된 작품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개정이 됐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 초고를 이미 다 썼다는 이런 말이 되는데, 그 초고가 무언지 알 수 없어요. 출판 연대가 36년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마는 대충 그 책이 완성이 되었을 때는 1535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될 수 있는 건데, 그러니까 여기에 이제 어 여러분들이 증거 된 니콜라스 콥이 대신해 읽은 그런 파리에서의 강의한 내용들 이런 내용을 선포한 일에 사실상 어 2년도 안 된 그런 사이에, 11월에 그 선포를 하고 나서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어요, 그 소식을 듣는 자로서 그가 늘 유리하는 자로 이렇게 피신하고 있었던 칼빈이라면 최종적으로 바젤에 왔을 때는 그가 노트는 상당히 많이 해어졌을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 그런 노트들이 어떤 형태인지 우리는 알 수 없는데, 그러나 여기에 기독교 강요에 반영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래서 그 사이에 있던 작품들입니다. 그 사이에 작품들이 있지만은,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대표적인 작품은 이 기독교 강요다. 기독교 강요의 이같은 내용들은 서문은 원래 그 보다 더 훨씬 전에 먼저 쓴 걸로 되어있단 말이예요. 편지를 쓴 걸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이제 왕에게 보낸 헌사의 내용 중에, 헌사가 있고, 그래서 헌사가 먼저 썼을 가능성이 가장 높죠. 그 다음에 헌사가 있고 그 다음에 거기에 기초된 내용을 서문으로 돌리고, 원문에 모든 내용이 이렇게 형성이 됐다.


그래서 예 3page-41page까지는 이런 헌사의 내용이 있다면, 그 다음에 그 이후부터는 본문이 나오면서, 최종적으로는 514page로 그 장이 끝납니다. 그리고 515-519page까지는 인덱스로 되어있어요. 거기에는 성경구절이 표시되어 있고, 그런 의미에서 표현되어 있는데 , 그 다음에 약간의 그 틀린 것이 이렇게 에라타가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어요. 틀린 것을 고쳐 수정하는 이런 걸로 책이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목 자체가 결국 그런 형태로 되어 있는데, 결국 개정판처럼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리센스 에리티움 이라 이렇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면에서 약간의, 그 다음에, 다음부터 독특한 학설에 관련되어서 표현되어 있는 내용이 있게 되는데, 23page를 여러분들이 보시면, 기독교 강요는 1536년 3월로 되어있고, 서문은 예 1535년 8월 23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관계 때문에, 그 서문은 1535년이 1536년으로 오기 되어 표현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어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 1535년에 출판되었다. 이렇게 까지 생각하는 그런 학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여기 있는 대로, 그러면 그 외형적인 제목자체는 그런 형태로 되어 있어요. 경건의 총아라 경건의 summa(숩마), tota(토타) summa(쑴마)(총아) 이렇게 되어있죠. 경건의 tota summa로 되어 있고, 또 여기에 있는 대로 그 교리는 구원에 필연적으로 알아야 될, 그런 완성된 내용이 다 들어있다. 또 경건에 열심 있는 자들이 읽어야 될 가치 있는 작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 지금 이 글을 읽으면, 결국 구원에 관련된 모든 지식이 다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될 그런 지식이 거기에, 다 있는 거고 동시에 경건에 대한 모든 내용들이 다 있고, 또 이것은 누구나 열심이 있는 자는 읽어야 될 그런 자료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런 내용들이 후대에 가면 1539년판에서 가면 그것은 성경의 요약, 성경의 전체를 다 이렇게 포괄하게 되어 있는 그런 진리의 내용으로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기독교 강요는 어떤 의미에서 성경을 읽기 위한 가장 중요한 어떤 서론 역할을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죠. 따로 서론을 읽을 것이 아니고, 이 기독교 강요를 읽어야 될 것을 말하는 거죠. 특히 1539년판 이후부터는 그것이 강한 입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 자신이 여기 23page에 있는데 두 번째 있는 데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 했냐면은 기본교리라 rudimenta(루디멘타, 견본, 초보, 기본교리) 이렇게 표현했어요. 물론 여기 doctrina(독트리나, 교리)라 했고 institutio(인스투티오)란 말을 썼지만은 그러나 거기 rudimenta(루디멘타, 기본교리)라 기본 교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적인 어떤 내용을 다시 표현하자면, 여기 있는 대로 기독교 강요의 특별한 성격을 표현하기를, “근거없이 그리고 재판석에서 경청함 없이 순수한 교리 때문에 대적자들의 강포에 의해서 핍박받고 순교당하는 자들을 대변하고 대적자들의 불과 칼에 대항하는 저항의 수단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책 자체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저항의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런 것처럼,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런 자로서, 저항의 성격을 갖는데, 마치 이제 목사가 세상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가서 플랜카드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거든지, 또 관원의 힘을 빌려가지고 칼을 들고 나간다든지, 거기에 동참 한다든지, 이런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그리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경청하는 자로 있는 것 그것 말 이예요.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관원의 말을 듣는 것보다, 어떤 것을 듣는 것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고 교회에 찾아와서 그 말씀을 듣는 것, 그 자체가 저항이다 그랬죠. 저항의 방식이고 저항이다 그랬습니다. 그 외의 다른 방식은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의 말씀이라는 것은 은혜의 수단으로서 아주 독특한 의미가 종교개혁 시대에 완전히 그 생의 방식, 어떤 삶의 방식 또는 종교개혁 할 때의 방식이요. 그런 것이 산출된 그런 독특한 형태로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예배한다. 이 말은, 주일을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런 정신이 사실상 있는 그런 형태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듣는다. 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 이런 것은 그 중심이 설교의 메시지에 있고, 설교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있단 말예요. 세상에 살면서도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자로서, 이 세상에 사는 그런 저항의 내용으로서, 여기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또 선포하는 자는 그 말씀을 선포하는 거다. 당연히 내가 세상에 나갈 때는 이 예배를 보고, 주일을 섬기고 나서는 내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나가서, 지금 그런 형태를 가지고 세상에서 싸운다!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고 이런 것은 우리가 싸우는 대상이 단순히 사람에 있지 않고, 사람의 눈을 보거나, 사람의 어떤 관계에, 이런 그! 그런 것에 있지 않고, 그 사람 뒤에 있는 영적인 세계, 마귀와의 싸움, 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그런 형태, 이런 의미에서 좀 더 깊은 의미에서싸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칼을 들었지만, 그 칼을 든 자가 중요하지 않고, 칼을 들게 한 자가 누구이냐? 이런 의미에서 결국 칼과 칼을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고, 그 칼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 배후에 있는 그 칼을 무기로 삼아서, 또는 그 칼을 방식으로 유혹해서, 우리를 시험 들게 하는 그런 어떤 근원적인 힘이 가지고 있는 트릭들, 그런 그 트릭에 대한 독특한 싸우는 방식이라는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산다! 이 말은 결국 그 거룩케 사는 내용 자체가 마귀가 목적을 두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빼앗고자 하는 그런 내용이라는 말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싸우되 싸움으로 말미암아 빼앗긴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거룩을 빼앗기죠. 그거예요.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고 하는데, 실제 패전자로 있다. 싸움의 승리자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패전자로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패전자는 패전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결국 마귀가 노리고 있는 부분이다. 마귀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칼을 들으라는 거요. 세상이 폭력을, 내가 폭력을 가졌으면 폭력을 가지고 너에게 대들 때, 나로 하여금 폭력을, 칼을 들게 하기를 원하는 거죠. 이런데 빠져드는 거예요, 이런 점이 이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살 때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 이예요. 어떻게 싸워야 될 것인가? 어려운 부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제 여기에 그 표현 한 것입니다.


2. “그러나 그들이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곤비한 죄인들일지라도 그들의 교리만은 세상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설 것이고, 모든 권세 위에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만은 승리의 내용으로 남아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이 진리와 이 말씀은 결국 승리한 내용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남아 있죠. 그 당시에 왕들은 다 죽고, 관원들은 다 없고, 역사적인 그 계승된 내용도 없고, 그 집안이 유지된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지금 우리에게 있단 말이요. 마치 그와 같은 것이죠. 역사 속에 교회가 보존되는 것을 보면, 그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그 대상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용한 수단들은 늘 사라진다 말이요. 앗수르도 사라지고 바벨론도 사라지고, 다 역사 속에 로마도 사라지고, 뭐라도 사라지지만은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역사의 내용들은 여전히 역사 속에 보존되고 있는 것이죠. 생생하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 그의 사랑하는 자는 역사 속에 남아 있는 것이죠. 그것이 이제 우리가 신학을 배우는 맛입니다.


세상학문을 하게 되면, 그런 맛은 없어요, 참! 세상 학문을 보면, 내가 이렇게 이곳에 와서, 그냥 발로 찰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닐 거예요. 그러나 신학의 맛은 그런 점이 있고, 또 목회자의 맛은 그런 맛이 있어요, 장로님이 계시면 더욱 뚜렷해요. 세상에 가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참! 귀찮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 뜯어 먹을려고 하고, 뜯기고 찢기고, 그냥 눈, 코 뜰새 없이 그냥 베어가는 사람 이예요. 그 사회에서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돈을 쥐고 있어야 하는데, 쥐기가 쉬운 것이 아니죠. 그 안에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삶의 내용을 구현해 낸다. 구별한다. 분리시켜서 드린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우리가 사실상 성도로서, 여기에 경청자로 없어서 다행이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성격이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해도, 해도 그들에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헌금을 하더라도, 헌금으로 때우는 거지요. 일요일만 열심히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것으로 때우는 거예요. 왜 그러냐하면 월요일에는 변색해야 하니까? 할 수 없어요. 그것은 상대방이 변질되어 있으니까? 나도 같이 눈을 떠야 하거든요. 상대방이 부라리면, 나도 부라려야 하고, 할 수 없어요. 그것은. 그 만큼 싸움터로 가는 사람들인데, 그 싸움터에서 분리되어서 한 다는 것은 실업자가 아니면 거의 드물다. 실업자는 영리한 사람들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순진한 사람들이예요. 그리고 진짜 싸우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동원해서 싸워야 하는 거니까, 사회에서 존속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고 그런 사람들은 순수한 의미가 아니죠. 어쩌다가 우연하게 투자해서 복권을 한다든지, 그런 사람 이외에는 하루하루 벌어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참 어려운 거지요.


그러나 신학을 한다는 것은 참! 그것을 제쳐놓고 여기에 와서, 대단한 사람들이예요. 실제적으로 가난하고, 앞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평안한 사람들이예요. 자유로운 사람들이죠. 그런 것을 포기했으니까? 그런 사람들만 이 맛을 약간 아는데, 결국 그런 영적 위로라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했을 때는, 이런 진리의 내용에 대부분 있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사명자로서 모범이 되어서 이제 성도들을 초대해야 되거든요. 참 어려운 초대를 하는 겁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그런 가장 거룩한 가치가 거기서 구현하고 사는 자로 이렇게 만드는 그런 자로서 조력자가 되고, 이런 면에서 도움, 지도자가 되고,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 이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 그러나 칼빈은 어떤 의미에서, 그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참 모범적일 수도, 오히려 지금 평안한 시대 보다도 그때가 더 좋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그런 시대적인 환경에서 그런 말씀이 산출되었던 것처럼, 또 그것을 하나님께서 섭리로 만들어 내셨던 것처럼, 역시 역사 속에서 교회의 증거들도 이와 같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그런 성격을 보게 되죠. 칼빈의 작품이 그런 성격이 있습니다. 그 자체를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가 불행한 것이죠. 참 불행한 것이죠, 얼마나 불행한지 몰라요.


“그래서 그들의 교리만은 세상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설 것이고 모든 권세에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왜 그러냐 “살아계신 하나님과 성부가 왕으로서 세웠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우리들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사명이나 종교적 사명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홀!”, 하나님이 그 권세를 주고 있는 유일한 홀의, 권위의 가장 중요한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있다는 거예요. 그 때 그 홀로, 그 하나님의 홀인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섬겨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통치자가 아니라, 뭐라고요 도둑질하는 자가 된다고 감히 선포하고 있다.


이렇게 선포하는 거요. 왕이든, 그 당시 성직자이든, 이렇게 강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들은 그들의 대적자들의 폭력에 대해서 같은 무기로 싸우기를 원치 않고, 그들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경배하고 기도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내용이 있는데, 물론 여기 이 기독교 강요는 그렇게 배경이 있지만은 초판의 성격을 약간 좀 읽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다른 자료를 약간 이번에는, 더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기독교 강요 전체를 한꺼번에 이렇게, 예! 내용이 뭐인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보다도, 그 내용이 시대 속에서 어떤 의미로서, 그렇게 가치가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결국 그런 실천적 의미, 그 교리가 갖는, 그런 메시지가 갖는 주석이든지, 사도신경 주석이든지, 또는 십계명 주석이든지, 아니면 주기도문 주석이든 그것이 주석을 그렇게 했을 때, 그가 왜 그렇게 했는가? 하는 그런 예! 어떤 당시대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그리고 그것이 이제 그 대답이 결국 그 후에 개혁교회의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교리의 핵심적인 내용의 뉴앙스가 되었고, 또 그것이 가치화가 되어서, 큰 어떤 형태로 발전이 된 내용인데, 이런 것들이 종종 이제 어떤 책에서도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시중이나 외국의 어떤 책도 이런 게 안 되기 때문에, 다시 여러분들한테 강조하기 싶은 거죠. 물론 이제 1543년에, 그가, 물론 기독교 강요가 1539년판에서 1543년에 또 개정이 됐는데, 그런 그 개정절차에 있어서, 벌써 칼빈이 그 따르는 무리자가 이렇게 많아지는 시기는 결국 제네바에서 그의 사역지가 정해진 이후이고, 또 그가 그곳에서 가르쳤을 때, 많은 제자들이 결국 제네바를 중심으로 찾아오게 됐고, 그 피난자들, 진리 때문에 피난 온 많은 자들이 결국 칼빈 중심으로, 칼빈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그때 1540년대 비로소 칼빈이 많은 그의 문헌뿐만 아니라, 또 많은 그의 가르침이 이렇게 유럽사회에 거기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때, 이미 루터주의자들은 카톨릭 교회에서 이단으로 이렇게 표현이 됐었다고 그랬죠. 즉 쯔빙글리가 듣기에, 보아도 같은 동료로 쯔빙글리가 볼 때도, 1520년대만 해도 그와 같이 분리주의자들, 또 정죄 받은 자 이런 자로 되어 있는데, 역시 칼빈도 마찬가지 그런 자로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1543년에 이렇게 표현한 그런 내용을 보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그들이 교회로부터 떠났던 우리에 대해서” 이미 떠났습니다. “그들이 교회로부터 떠났던 우리에 대해서” 처음 분명하게 인정하기 시작하는 데, 그때 카톨릭교회가 칼빈과 함께 그 무리들을 어떤 말로 표현 했냐면은 “저주의 말로, 공포의 말로 추방해 왔다.” 이렇게 했습니다. “추방해서 저주의 말과 공포의 말로 추방해 왔다.” “그들은 분리주의자들이요, 이단들이라는 오명을 받으면서 고난을 감수하였다“. 그러면서 이제 ”그때에 비로서 카톨릭 교회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마음대로 외치라 내버려두기 시작했다는 거요.” 그러니까 분리가 되어서 이제 내 마음대로 하라 하고 내 버려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공격의 대상으로 늘 하면서, 버린 자식으로 두었다는 거예요. 즉 요한복음 16장 2절에 근거해서 카톨릭자들의 그런 행동자체가 오히려 분리에 대한 부담감을 그들로 하여금 충분히 그나마 덜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이제 내 버려 두었기 때문에 이제 분리에 대한 부담감이 이제 없어졌다고 칼빈이 말했어요. 이제 좀 덜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그렇게 오명을 주고 마치 멀리 있는 자들로서 추방해오고, 그 다음에 이제 네 마음대로 하라! 이런 행태로 지금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분리에 대한 부담감을 그들로 하여금 충분히 덜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쫓겨난 자들이”, 그가 그 자신이 자각하기를 자각된 내용을 표현하기를 “우리가 쫓겨난 자들이 된 것은 분명한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확신을 분명하게 표현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이런 논리로 분리의 근거를 삼았던 것이죠,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이제 우리가 그 그가 어떻게 해서 이미 분리의 성격을 확고히 되었는가를 기독교 강요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인데, 이런 내용에 대해서 이제 칼빈이 가지고 있는 그 본질적인 성격에, 약간 많은 예를 통해서 그가 뉴앙스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가 기독교 강요가 작성에 앞서서 이제 그런 프란시스 폐하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된 많은 구체적 내용들이 물론 제시되고 있어요. 물론 여기에 그 부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처럼, 종교에 열심을 가진 자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기 위한 어떤 기초적인 것을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의 교리라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런 그 종교개혁 정신이 그의 교리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는데 발전시키는데, 주된 이유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런 그 가장 순수한 내용들이 거기 고스란히 담겨있는 1536년 판하고, 그 후에 이제 점점 신학적 체계가 이렇게 증가되고 자료 보충이 있으면서, 그런 내용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게 되죠. 그래서 지금 현재 기독교 강요를 읽게 되면, 그런 내용을 거기서 따로 역사적으로 이렇게 분리시키는 작업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그런 것이 기독교 강요를 읽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 그럴 정도로, 이렇게 원래의 그 순수한 틀들이 대부분 사라진 형평이 되었죠.


예 그가 주로 그 구성하고 있는 부분은 전체적으로, 여기에 여러분들이 앞에 그 19page 이하에 보면 1536년판 혹은 1535년판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이제 제1장은 율법에 대해서 있죠. 예 율법에 대해서 있고, 그 다음에 2장이 믿음에 대해서 그 다음에 제3장이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순서적으로 율법에 대한 해석과 그 다음에 믿음에 대한 해석, 그 다음에 기도에 대한 해석으로 되어 있어요. 사도신경 해석이죠. 거기에 이제 1539년판 이하에서는, 이와 같이 약간의 점으로 되어 있는 것이 1539년판에 이렇게 첨가된 부분이거든요. 그 첨가된 부분에서 그 율법에 대한 부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표현해 있는 것이 Expositio(주석)이다. 그러니까 주석이다. 그 다음에 역시 또 믿음의 장의 경우에서도 여기에 사도신경 주석으로 분명히 다시 분명한 표기를 했던 것이지요. 그 만큼 그 내용이 이제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십계명 해석 그 다음에 사도신경 해석, 그 다음에 주기도문 해석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단 말이요.


그 다음에 하나의 4장으로 가 가지고 성례에 대해서 말했을 때, 성례는 결국 이 장이 이렇게 따로 넣게 된 것은 바른 성례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이렇게 표현해 주려고 했던 것이고, 그런 내용 아래 이와 같이 세례와 성만찬에서 다루었어요. 거기에 이제 제 그런 4장은 아니지만은, 4장은 아니지만은, 이와 같이 나중에 1539년판에서는 4장으로 되어 있지 않고, 각 단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또 인간과 자유의지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이런 내용들이 다 이제 한 장으로 되어 있어요. 1장 2장 다 되어 있어요. 즉 이것을 locus(로쿠스) 방식인데, 예 그 4장 뭐 이런 내용들이 다 사라지면서, 각각 한 장으로 되어 버렸단 말이죠. 그래서 이런 소위 전체적인 맥락! 어떤 의미에서 성례에 대한 내용이 있으면, 1장이든지 2장 3장하고 4장, 여기 관계된 내용들이 이렇게 뚜렷하게 해서, 여기까지는 십계명 해석, 여기는 사도신경해석, 여기는 뭐 주기도문 해석 여기는 성례에 대한 해석, 이렇게 구분되어서 이렇게 된 장들이, 1장 2장 되어 있는데(1536년 초판에서), 이런 것이 이제 사라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각각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한 입장이고, 그 다음에 인간에 대한 지식, 그 다음에 이것이 이제 이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3장, 이 부분에 대해서 4장, 이렇게, 이렇게 넘어간단 말이예요, 그러면서 각각 많은 장들이 이렇게 거기에 포함이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locus(로쿠스 방식)으로 변했다. 이렇게 표현해요. locus(로쿠스) 방식, 무엇에 대해서, 무엇에 대해서, 그러니까 주제의 다양한 주제가 첨가되면서, 그것에 대해서 다루는 식이 되어 버렸단 것이지요. 그래서 이 원래의 색채는 거의 없어진 1539년판에서 그렇게 됐다는 그런 뜻이죠.


그러나 기독교 강요의 본래의 그 정신은 이와 같이 1장, 2장, 3장, 4장은 성례에 대한 것이고, 5장에 바르지 않는 성례에 대해서 나오고, 그 다음에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교회의 권세와 그 다음에 정치 일반, 그! 정치행정에 대해서 다루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구성이 되요, 전체는 그리고 여기에 이제, 1543년 판에 첨가된 것은, 이제 특별히 1555년까지 첨가된 그런 내용이 되겠는데, 그것은 이렇게 표시를 특별히 했고, 1539년 판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점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첨가된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첨가된 내용은 특별한 것 아니요, 그러면 제일 중요한 것은 이렇게 1장의 경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이것이 첨가되고, 그 다음에 이상하게도 1543년에 1539년에 비해서 하나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 ‘선거에 대해서’, 이렇게 그 ‘십계명 주석’ 다음에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어요. 이런 것이 특별한 것이고, 그 다음에 이제 사도신경 안에, 이와 같이 그 1539년 판부터 회개에 대해서, 즉 구원의 서정과 관련해서 표현이 되어 있는 반면에, 역시 이제 신구약통일성과 관련해서 “유사성과 통일성”, 그 다음에 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나중에 이제 뒤에 있는 것들이, 1판(1536년판, 초판)에서의 6장에 해당되는 부분이, 어떻게 여기 신구약 유상성과 차이 바로 뒤에 오게 되요. 그러나 1536년 판에서는 원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유사성과 차이 다음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다룬 것이지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신구약 유사성 차이 다음에,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나오고 주기도문 주석이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이 순서가 이제 나중에 1559년판에는 이 순서가 유지돼요, 그러니까 1539년판에 신구약 유사성과 차이에 대해서 다룬 부분에, 부분을 알 때, 여기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가 바로 뒤따라 왔잖아요,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신구약 통일성을 다룰 때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서 다루었다는 거요.


그리고 그 섭리에 대해서, 다룬 1539년판의 의도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오히려 이제 별도의 성격으로 약간의 예외적인 성격(으로?) 기도에 대해서 다루어야 되기 위해서, 여기에 사실상 간격이 있는 셈이 되지요. 간격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제 1559년판에서는 이제 전체로 바꾸어질 때, 이런 관계가 어느 의미에서 신구약 통일성과 관련해서 예정론과의 관계가 이렇게 묶여 있으면 모르는데, 이것이 중간에 1543년에서, 이런 그리스도의 자유와 인간의 전통에 대해서 개입이 들어오므로, 그런 관계가 아주 갭이 1559년 판에서 굉장히 커져 버렸어요. 그래서 마치 1559년판에서는 이와 같이 모든 그, 회개에 대해서 이런 모든 것을 다룬 이후에, 마지막 부분에 마치 예정론을 다루어서, 구원의 서정의 한 후주로서, 또 마지막 부분으로서 마치 오는 것처럼 되어 있어요. 그러나 원래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원래 1559년판부터 이와 같이 ‘무엇, 무엇에 대해서, 무엇, 무엇에 대해서 다룰 때’, 오히려 신구약 통일성을 다룰 때, 바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다루었고, 그 다음에 예외적으로 그 관계 이후에, 또 논리적으로 다음 관계를 이어서 해 갈만한, 내용이 물론 거기에 단절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전부터 1536년판부터 다루었던 그런 기도에 대해서 다룬 것이거든요. 이렇게! 이제 그런데 실제 1559년판에는 이 부분이 분리되지 않고, 남아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마치 제3권에 이와 같이 기도에 대해서 다룬 이후에, 그 다음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해서 다루어 가지고, 예매하게 어떤, 그 거기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마치 1559년판에 구원의 서정의 한 내용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삽입되었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기독교 강요의 발전된 역사에 대해서 잘못 해석한 그런 성격이죠.


어떻든 간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1536년판에서 이제 결국 5장과 같은 그런 성격인데, 그 당시에 이제, 이것이 잘못된 성례에 대해서 비판했을 때, 그 내용이 이제, 종교개혁의 가장 그 당시에 비판한 그런 내용, 어떤 그런 실제적인 내용은 여기 제5장에 아주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고, 그 다음에 6장에도 그런 내용이 확대되어 있는 것인데, 이 중에서 우리가 몇 가지를 찾을 수가 있는데, 이런 것에 대해서 예를 몇 가지를 들어보면, 그의 개혁 성향이 어디에서 중점이 되어 있는 지를 우리가 충분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초판의 경우에 그런 예를 우리가 몇 가지 예를 들을 수가 있는데, 첫째 교회 열쇠권에 대한 비판도 있고, 예 그 다음에 성례 일반 은총과 최고선에 대한 내용, 그 다음에 성례 중에서, 기름 바름과 안수식에 대한 견신례, 또 치유에 대한 성격, 안수식에 대한 문제, 그 다음에 결혼식과 같은 이런 대표적인 예를 한 번 들어보면, 어떤 형태로 비판이 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면이 이제 개혁적인,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로부터 반영이 되면서도 칼빈이 독특하게 비판하고 있는 그 관점들이 아주 그 리얼하게 발견되고 있는 그런 성격이죠.


3. 물론 이 교회의 열쇠권에 대한 비판에 대한 것은 후대에 장로교회의 교회관에서 굉장히 중요한 특별한 점이 결국 거기에 젊은 칼빈에게서 발견이 되는데, 마태복음 16장 18절, 19절에 있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 하고, 이제 그것에 근거에 의해서 베드로에게 열쇠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 이런 표현이 있는데, 칼빈은 이 말씀에 대해서 기독교 강요 처음 출판된 초판에서, 이 약속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으로 해석을 했어요. 그러나 이 약속들은 실제로 요한복음 20장 22절, 23절에서 그에게만 아니라 나머지 사도들에게도 동등히 주어 진 것으로 해석함을 보게 되요. 그러니까 결국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열쇠권이라는 것은 베드로에게 주어졌다 했을 때, 그 말은 사도들을 대표하는 그런 성격으로 주어졌다. 이런 말이요.


그래서 이제 나중에 우리가 종교개혁 이후에, 물론 이런 배경은 벌써 그 어거스틴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바로 이전에, 종교개혁 선행자들 가운데서 그런 내용이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만 결국 우리에게 열쇠권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회중교회는 회 자체에게 주어졌다 이렇게 말하고, 어떤 그 로마 카톨릭은 베드로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그 베드로의 계승권을 가진 로마 교황이 지금까지 그 계승이 되었다. 이래서 열쇠권을 거기에 이제 모두 두고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 이렇게 계급제도가 있는 거죠? 교황으로부터 시작해서 거기서 열쇠권의 수하에 있는 많은 그런 계급에 의해서, 이렇게 같이 권리가 형성되는 이런 형태로서 개인이 집중되도록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 개인에게 주었을 경우에는 로마 카톨릭이 되어요. 그래서 로마 카톨릭이 베드로에게 주고, 로마 교황이 주고, 그래서 결국 베드로의 그 로마 방문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나중에 위조문서가 많이 발생한 거죠. 베드로가 야고보에게 보내는 편지 이렇게 위조문서가 그렇게 많이 이제 고대에 발생했었습니다. 마치 그것이 사도들이, 사도들의 서로 관계가 베드로가 마치 로마에 있어 가지고, 로마에서 베드로가 마치 여러 지 교회, 여러 그 흩어져 있는 사도들에게 편지한 것처럼 된, 그런 위조문서가 많이 있는데, 그것이 나중에 종교개혁 이전에 휴머니스트들에 의해서, 그것이 위조 문서임을 특별히 로렌스 발라나 이런 인물에 의해서 철저히 비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렇게 주장해요 그 위조문서! 그러나 되게 그 위조문서 원본을 보면 16세기 글씨체로 되어 있어요. 실제로 15세기 이전이나 17세기 글씨체로 되어 있어요.


지금도 복사판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전부터 파피루스가 있다든지 또는 그 후에 뭐 이와 같이 양피지로 되어있다든지 이런 것이 발굴되면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가장 오래된 것이 그것뿐이다. 그래가지고 그게 대개 위조문서임을 아는 거예요. 분명히 필체만 보고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그 당시는 이제 그 필체하고 상관없이 자기 당시대의 필체니까, 여전히 그것이 오래 되었을 것이라 하고 생각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때는 그 내용에 의해서 이제 비판을 했던 거지요. 내용을 봐도 이제 그 당시의 언어체가 아니고, 뭐 오로토 그라피가 있다. 이런 것이 있으면 모르는데, 정확하게 로렌스 발라는 그 당시에 자기가 문헌 비판을 하듯 비판해 보니까, 그것이 다 위조문임을 밝혀진 것이죠. 그래서 로마가 휴마니스트들에 의해서 상당히 많이 무너졌어요. 그러니까 그들의 문헌작업에 의해서, 위조문서 분석에 있어서, 베드로가 로마에 방문했다는 것, 또 로마에 있어 가지고 그 다음에 사도들에게 보냈다는 것, 이 자체가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이렇게 많이 비판이 되어서 종교개혁에 훨씬 더 많은 힘을 얻었지요. 그런 카톨릭 입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그렇다는 말예요. 즉 한 개인에게 베드로에게 임하였고, 베드로의 열쇠권이 이제 계승이 되었다 이런 말이요. 그런 의미에서 카톨릭은 이렇게 수직관계가 있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이제 회중교회는 다른 것 아니예요, 카톨릭에게 비판을 받는 내용이기도 하지만은, 또 우리 개혁교회도(개혁교회에게도?) 비판을 받는 내용인데, 그런 것은 뭐냐 하면, 그 회중 자체에게 모든 열쇠권이 주어졌다. 그 말이요. 그래서 이제 요즘도 평신도 운동이 많이 있는데, 그래서 대학원 대학교도 인가를 받고 있는데, 예 “평신도들의 회 자체”에 있다는 거예요.


성직자와 관련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만인 제사장권을 주장해서, 루터가 말하는 그런 것을 많이 신교적 입장인데, 이런 것들이 이제 소위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루터의 주변에 있는 그런 인물들이 의해서, 결국 재세례파의 그런 경향으로 발전되어서, 오늘날 남아있는 그런 재세례파의 계열이 있게 되었는데, 그런 것들이 회중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은 결국 회 자체에 열쇠권이 주어졌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제, 칼빈이 이후에 보면 회중, 공동의회에서 치리 할 수 있다. 이런 권리를 공동의회에 주는 권리에 대해서는 칼빈이 인정을 분명히 했어도, 여기에 이제 중심적인 열쇠권과 관련해서는, 여기에 베드로와 함께한 사도들, 이런 의미가 되는 데, 이때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결국 회 자체에게 열쇠권이 주어진 겁니다. 이렇게 되어있는 유명한 장로교 원리가 칼빈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 17절에서 어떤 형제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런 그 내용에 대해서, 칼빈이 이 구절사이의 관련을 유사성을 잘못 해석하여 카톨릭 교회 안에 큰 부패들을 야기하고 있음을 공격하여 이르기를 이렇게 표현했어요. 이 돼지들이 이 구절을 무미건조하고 무식하게 약간 다른 의미로 혼돈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예 개들이라 돼지들이라! 뭐 오늘날 뭐 약간 뉴앙스가 좀 다르기 때문에, 강아지들이라! ... 이렇게 표현했어요.


칼빈이 이렇게 초기에는 이렇게 아주 강했어요. 젊을 때의 그 필치는 아주 강했어요. 야(?)간에 이런 것은 후대에 가면, 이렇게 사실상 스며져 있는 것 같지만, 왜냐하면 결국 초기 작품이 다 아주 후대 작품에 첨가되니까, 결국 거기에는 하나의 전체 속에 삭 숨어 들어가죠. 그러니까 사실상 숨어 있는거죠. 그것을 따로 필체! 1536년판으로 따로 구별해서 읽는 사람은 그렇게 없어요. 한 ? 다 ? 똑 같은데, 그것을 역사적으로 보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니 못하는 거지요. 1536년판을 힘써 읽기만 한 사람들은 젊은 칼빈만 보게 되는 건데, 그 후에 1559년판을 보는 사람들은 젊은 칼빈을 전혀 읽지 못하는 거지요. 거의 읽지 못해요. 이런 비판은 카톨릭 교회의 열쇠권의 잘못해석과 오용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었어요. 그래서 이 돼지들이란 논증보다 약간 약으로 치료하는 것이 적합한 미치광이들이라! 이렇게 표현하는 것 보다, 약간 그래도 더 비판적인 표현인데, 그러나 여기는 약으로 치료하는 것이 적합한 미치광이들이라! 이런 표현을 아주 현저하게 했어요. 그 만큼 열쇠권에 대한 비판이 굉장히 큰 거죠. 그래서 “성도들은 일년에 한 번씩 담당 사제에게 자신들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하고, 죄를 고백하고자 하는 의도를 확고히 품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하고, 사제에게 죄인을 매거나 푸는 열쇠의 권한을 주고 있었어요. 심지어 파문되었거나 정직된 성직자들에게도 열쇠권이 실제 남아있지만 녹슬어 쓸 수 없게 되었을 뿐”이라고 까지 말할 정도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영화에서도 보게 되지만, 몰래가서 비밀히 가려진데 가서, 사제에게 은밀히 말하면 용서를 해 주잖아요. 카톨릭이! 그러나 요즘은 낭만적으로 표현이 되어있는데, 그것은 수법입니다. 카톨릭이 자기 선전을 하는, 요즘 뭐! 어떤 그리스도에 대해서, 영화에서, 항상 그리스도는 자기가 쥐고 있지요(?). 그러니까 울고, 세계가 다 울고, 그렇게 하는 그런 방식인데, 이미 말한 것처럼, 카톨릭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런 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모든 대중에게 알리는 방식이죠. 매스컴! 매스컴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카톨릭이 영화산업도 다 쥐고 있어요. 돈이 얼마나 많은지, 거기는 돈을 뿌려요. 그냥 뿌려! 보니까 선거철이 되면, 그 전에 보면, 동이나 통이나 반장! 거기는 돈을 뿌리더라고요.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쌀 가마니로 가난한 통장, 이장에게 막 주는 거예요. 그냥 관원의 어떤 통로를 통해서 다 선한 사업을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굉장한 거지요. 그게, 이제 그런 것은 일단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세례와 관련해서, 일단 세례를 받으면, 무조건 세례만 받으면 그것은 카톨릭 교인이 되요. 그가 어떤 생활을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거짓말하는 자든, 뭐! 왜냐하면 가서 또 금방 거짓말하고, 그 다음에 사제에게 가서 떡을 먹으면 되니까? 그러고는 떡을 먹고 그 다음날 또 죄를 짓고, 그게 이제 삶이예요. 무슨 죄만 지면, 떡만 먹으면 되는 거예요.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쌀 보급을 타기 위해서 가는 것이나 떡 먹는 것이나 아주 비슷해요.


그러니까 카톨릭 신자의 경우는 전혀 믿어서 안 되요. 도덕적으로 모든 면에서 전혀 믿어서 안 되요.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뒤 통수 맞아요. 집 거래하고, 사업 거래하잖아요. 그러면 금방 뒤통수를 맞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떡만 먹으면 끝이거든요. 이게 이제 카톨릭의 이런 부패의 근원을 아주 정확하게 칼빈이나 종교개혁자들이 직시한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면 문제가 뭐에 있느냐? 하니까 성례에 있다는 거예요. 성례에 근본적으로 있다. 성례에 있다. 그래서 여기 그런 열쇠권이 그런게 주어져 있다는 거예요. 평생 주어지고, 정직된 성직자의 열쇠권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한 번 주면 열쇠권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단지 녹쓸어 쓸수 없게 되었을 뿐이라고 하면서, 이런 열쇠권이 넓게 오용이 되어서 교황에게는 완전 사면권이고, 그 다음에 종종 수년간의 사면권, 추기경에는 100일간의 사면권, 그 다음에 주교들에게는 40일간의 사면권, 이렇게 카톨릭이 부패된 거예요. 이 사제권을 지금도 한 번도 포기해 본적이 없어요. 공적으로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고백으로든지, 그러니 우리가 하겠어요. 어떻게 카톨릭과 하나가 되겠어요. 자기가 포기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보고 포기만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쉽게 포기한 것이 뭐냐면? 우리가 주장한 독특한 내용들을 다 잃어버린 그런 자로서 점점 갔을 때, 그때 카톨릭이 빨리 우리와 화합하자! 이렇게 해요.


그런 부패들을 비판하는 그의 바른 성경해석은 바로 그의 종교개혁 방식이었고 저항의 방식이었어요. 즉 칼빈은 그런 본문들을 임의로 해석하여, 그들 자신들의 법으로서 신자들의 영혼을 맬 수 있는 권리가 그들에게 없다고 주장한 거요. 그건 당연하죠. 우리는 그런 주장은 안 한다. 제발 프란시스 왕이여! 우리는 원래 순수한 그 성경에 있는 것을 지금 주장한 겁니다. 지금 그 자들은 부패된 자들이요. 그러니까 당연히 돼지들이라 그랬지요. 이 돼지들의 뜻을 왜 따릅니까? 그들의 것을 위해서 관원이 칼을 들고, 핍박의 모든 무기를 사용합니까? 그건 죄다 이 말이예요, 프란시스 왕이여! 관원이여!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20장의 약속은 특히 말씀의 사역자가 행하는 전파와 관련되어 있고, 그 이제 열쇠권은! 마태복음 18장 명령의 약속은 교회에 허락한 출교의 권징에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거요. 사제권이 아니고 권징과 관련되었다. 출교의 권징과,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관련되어있고, 출교의 권징과 관련되어 있다. 굉장히 중요한 거요. 그래서 그것이 결국 그런 내용 열쇠권과 관련해서의 무엇이 어떤 형태가 중요한가? 이런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 그 열쇠권의 핵심이 있고 그 다음에 권징에 있다. 출교의 권징에 있다.


즉 전자의 약속은 오직 말씀의 사역에만 제한되어야 한다고 해석한 거예요. 전자의 약속은! 여기, 그의 사업은 주께서 자신의 사역을 사도들에게 위탁하였고, 위탁했다! 위탁권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 매거나 푸는 직임을 부여하셨을 때도, 베드로가 아니라 그들에게 부여하시는 거였어요. 그들에게 주었어요. 그러니까 위탁하셨을지라도 매고 푸는 직임을 부여했을지라도, 문누수?를 주었다. 그들에게 베드로가 아니라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니까 복수에게 주었다 이거요. 복수에게! 여기에서 베드로를 대표하는 사도들 전체에게 주어진 열쇠권이라는 해석은 무리일지 모르나, 그런 해석이 가능한 발전을 암시해 주고 있는데, 이런 내용이 좀 더, 특히 어거스틴의 그 역사적인 그런 것을 근거하고, 그 다음에 칼빈의 전통이랄까? 이런 근거에 의해서 또 성경의 바른 해석의 입장이 쓰여 져서, 열쇠권을 결국 성직자의 회 자체, 회 자체에 주어진 것, 이렇게 주어진 것이 결국 우리가 말하는 당회, 또 노회예요. 총회가 된 거죠. 열쇠권과 관련해서는 결국 그 치리회에게 그런 자에게 항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은, 그런 의미지요. 그래서 어떤 개인에게 열쇠권이 넘어가는 그런 것은 결국 뭐냐면, 카톨릭화 되는 것이고, 그것은 부패로 이렇게 장로교회 입장이 개혁교회 입장이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노력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요. 그 만큼 칼빈 시대의 종교개혁이라는 의미는 좀 더 오늘의 시대에도 정리를 많이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당회 의장으로 해야지, 그것을 만약에 당회장! 이라고 해 가지고, 모든 권세를 재산권, 뭐! 뭐! 까지 다 한 사람이 쥐고 있을 때, 그때 그것은 카톨릭과 같은 부패로 가는 것이고, 또 노회장에게 전부 일임한다든지, 총회는 총회장에게 일임해 가지고, 치리권, 모든 것을 개인이 마음대로 이렇게 했을 때는, 그것은 오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가 치리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열쇠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단지 거기에 있는 노회장이든지 총회장이든지, moderator(모더레이터, 의장)라는 말이예요. 어떤 의미에서 회를 진행하는 자라는 말이예요. 치리에 있어서 회(의)를 진행하는 자이예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장의 개념이예요. 치리회의 의장이라는 개념이예요. 이것이 그 당시의 종교개혁이라는 말이예요.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말이예요. 그런데 이것을 다시 카톨릭화 하는 방식으로 장로교가 만약에 타락하면, 그러면 큰 문제이지요. 그러니까 카톨릭이 볼 때, 너나 나나! 그렇게 되는 거지요. 우리처럼 너희도, 같이 총회장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라! 그런 거예요. 마치 개인이 총회도 열지도 않고, 총회장이 선포하면 그것이 권위가 있는 것처럼,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카톨릭이 요구하는 너나! 나나! 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그런 범죄는 너도 하지 않냐? 이런 말이예요. 뭐! 이런 기독교 강요를 해석하고 비판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교회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되도록, 칼빈 강의를 안했으면, 전부 속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겉으로는 안 해도! 그러니까 다 동의하지요.


오히려 칼빈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러나 칼빈은 사도들을 그의 도구로서 그들의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그 자신이었다. 이게 그거예요. 실제적으로 그 회의의 moderator(모더레이터, 의장) 누구인가? 하면 성령이라는 말이예요. 여기 뒤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열쇠의 조정자와 의장은 클라디움 아비테르 에크 모데라토는 성령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그 회의에 있어서 실제 열쇠의 조정자와 의장은 하나님 자신 이예요. 성령이다. 이 말이예요. 의장도 아니다. 그 만큼 칼빈은 신론 입장에서 전부 해석했어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니까 organa(도구)이다. 물론 사도들도 organa(도구)라고 생각하지요. 이 선언은 모든 시대에 타당하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그 열쇠의 권한은 복음전파이고, 사람들에게 관련시킬 때, 그것은 권한 이라기 보다는 사역이다. 이렇게 표현해요. ministerium(사역)이다. 수종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이예요. 그러니까 사죄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선포이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카톨릭에가서, 개인적으로 교회에 와서 사죄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사죄하는 것은 집에 가서도, 개인 방문을 해서도, 성도를 방문해서도, 사제가 사죄 행위를 할 수 있는 거지요. 이것이 또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죄를 했을 때, 우리가 사죄할 권리가 없다. 이런 것도 중요한 비판이 되지만, 그런 형태까지 개인에게 주어진 것처럼 되어 가지고, 어디든지 사제가 가는 곳에 사죄권이 있어요. 영화에도 그런 것이 많잖아요. 어디가 있는 데, 가서 결혼한다고 가서, 거기 있는데 가서, 거기서 맹세하고 결혼하고 끝나 버리지요. 과거의 죄 같은 것도 다 사죄를 받아 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낭만적으로 해석하고, 영화 속에 나오는 것을 낭만적으로 그것을 받아 버리는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마치 교회처럼, 모든 시민들, 일반 세속 사람들은 그렇게 교회를 알고 있게 되요. 무의식적으로 심어진 거예요. 교회가 그런 것인줄 알아요. 그러니까 장로교도 얼마나 피해를 당해 버렸어요. 진짜 순수한 교회는 굉장히 피해를 당해 버려요.


그러나 늘 열쇠권은 다른 게 아니고, 그 사죄에 있지 않고, 지금 무엇이냐? 강대상에서 목사가 선포하는 그것이 사죄권이다. 우리가 열쇠와 관련되어서! 다르잖아요! 엄청나게 다른 거예요. 떡을 뗀다든지, 은밀하게 말했던 것을 상담을 받아가지고서, 그 자리에서 죄를 고백한 것에 근거해서 사죄를 하는 사죄행위를 하는 일이 성직자가 하는 일이 주된 일이라는 거예요. 그런 것하고 성직자가 그것이 주된 일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모두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열쇠와 열쇠권과 관련된 이것하고 전혀 다른 것이죠. 그러니까 건물이 달라졌어요. 카톨릭은 의식이 강조되어요. 떡을 떼는 의식을 위해서 모든 일이 동원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음악도 동원되고, 모든 것이 그것과 관련되요. 그런데 신교에서는 열심히 음악이 좋다고, 그것이 어떤 의식에서, 어떤 음악으로 그것이 작곡된 것 인줄 모르고 그냥 사용해요. 자기 마음대로 별것을 다!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음악이 좋아서, 그냥 그것이 하나님의 찬송인줄 알고, 열심히 듣기는 하지만, 목회자는 굉장히 분별해야 합니다. 당회 의장뿐만 아니라, 당회원들도 그런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분별하는 그런 분명한 선에서 찬양대에 지휘자를 앉히더라도, 그것은 안 된다. 그 곡은 다음에 써서는 안 된다. 이렇게 분별해 주어야 해요. 목사가 그러겠어요. 그때는 장로들이 해야죠. 딱 분별해야죠. 안수 집사가 해도 그래야 하겠지요. 찬양대 참여해서 열심히 부를 것이 아니고, 그것은 교회 예배를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는 곡이다. 근원적인 이런 곡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런 곡보다도 이런 곡을 택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되죠.


그러니까 이제 그런 예배와 형식이 다르다니까요. 거기는 전부 의식이라는 말이예요. 떡을 떼는 일과 관련해서 회중이 앉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성만찬을 위해서 곡이 있고, 그래서 큰 교회당이 있는 것은 그런 거예요. 그것은 설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예요. 카톨릭에서 성당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거예요. 그래서 또 그런 사제가 사죄권을 행사하는 그런 독특한 내용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열쇠권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사죄를 중심으로 되어 가지고, 또는 그런 성례중심으로 되어서, 성례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실체가 임하는 그런 어떤 의식으로서 보는 그런 구조가 있는 그런 제단과 관련해서 그런 것이 단순히 옛날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제사와 관련한 그런 내용이 카톨릭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예요. 성례에 있는 거예요. 성례에 있어서, 그래서 결국 점진적으로 이것을 없애는 과정이 되다 보니까, 약간에 폭력이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해 버렸어요.


평신도가 존 낙스나 기타 개혁자들의 메시지를 듣고 이런 것을 접해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서 보니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그냥 사제를 밀어 내치고, 책상을 들고 엎으다 보니까? 그것이 폭력이 되어 버린 것이예요. 왜냐하면 사죄의 권위가 있는데, 평신도는 권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되어 버린거예요. 그것이 폭력이 되어 버렸는데. 원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칼빈은 따로 분리되어 나와 버렸어요. 분리되어서, 그 도시가 자기 개혁정신을 보존하기를 원하고, 개혁정신을 따르기를 원하고, 모든 것을 다 접어버리고, 그 도시에서 새롭게 시작한 것이죠. 그런 형태의 개혁내용들이 교육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개혁한 곳이 제네바라는 도시예요. 모범적인 도시죠. 당회가 있고, 치리회가 있고, 그래서 다시 표현하기를 “이 권한을 실제로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주셨던 것이고, 주께서 그 말씀으로 사람들을 목회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칼빈은 사도들과 목회자들의 그런 선포에 대한 다음과 같은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모든 근심과 일의 어려움, 모든 분리들 속에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다고 확신하였고, 온 세상이 대적하고 싸움을 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서 있음을 지각하였으며, 그들의 가르침의 원 저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가시적으로 지금 현존하시는 분이 아닐지라도, 그의 진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친히 하늘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젊은 칼빈에게서 이런 사역자들의 근원정신을 우리가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장로교의 중요한 원리인 unus(개인) 개념을 버리고, unitas(회 자체)개념을 강조한 틀을 여기에 분명하게 칼빈에게서 근원적으로 찾게 되는 거지요.


4. 그래서 “열쇠에 관한 다른 말씀, 곧 마태복음 18장을 교회에 허락된 출교의 권징에 관련된 말씀으로 칼빈이 해석하였을 때, 칼빈에게 있어서 시벌의 경우 신자들의 투표에 의한 시벌을 언급”을 했어요. 종종 이제 OO교회 같은 데서, 노회에서 치리하지 않고, 공동의회를 열어 가지고 목사를 치리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장로교 정신하고 참 멀지요. 그것은 거의 회중교회 경향이기 때문 이예요. 하여튼 그것은 거의 회중교회 경향이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거의 회중교회로 많이 발전이 되었어요. 대형교회가 회중교회로 많이 발전이 되어 버렸어요. 노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자기가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대형 교회가 회중교회로 많이 발전이 되어 버렸는데,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닌데, 이런 기반을 회중교회 정신도 역시 칼빈에게서 약간에 기원적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적 회중교회 입장에서는 칼빈에게서 자기 시조를 찾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같은 칼빈주의라도, 장로교회하고 회중교회자도 다 같이 칼빈을 시조로 모시는 거예요. 그래서 모두 칼빈주의자라고 해서 장로교회라고 하면 큰일나는 거예요. 그래서 건전한 회중교회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을 칼빈주의자라고 아주 굳건히 강조했고, 그런 의미에서 많은 회중교회자들이 고백에 참여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은 화합하지 못하고 따로 자신들의 고백서, 따로 회중교회 고백서(사보이 신앙고백서)를 따로 내었는데, 그로 인해서 장로교회하고 완전히 구분이 되었는데,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로교회가 피해를 받은 것은 회중교회자들의 그런 교회관 때문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많이 본 것이지요. 같이 피해를 당한 거예요.


마치 칼빈 시대에 또 그 주변에 있는 그런 재세례파에 의해서 소요하는 사람들, 같이 소요하는 사람들, 폭력과 함께 같이 소요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관원이 총, 칼을 드는데, 자기는 농기구를 든 그런 자들이지요. 오늘날과 같으면 뭐예요. 오늘날과 같으면 지금은 노동자들이 막 -- . 할 것 없으니까, 뭐예요? 택시 운전자는 택시 가지고 그러고, 다 자기 기구 가지고 하는 거지요. 그때 그 무리와 똑 같은, 노동자 무리들이 하는 방식으로 소요하는 자들, 그런데 그것이 혼동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무리가 또 있는데, 그들하고 똑 같이 혼동되어서 핍박을 당한 거예요. 관원의 칼에 희생을 당한 거예요. 그것으로부터 구분해야 하는 성격이 있는데, 그런 성격이 언제든지 재세례파와 같이, 아무리 칼빈을 조상으로 하는 그런 자들일지라도, 그런 장로교가 같이 피해를 본 중요한 내용들이 소위 웨스트신앙고백서를 낸 성직자들 중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열쇠권의 투표에 의한 시벌을 언급하고,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근거를 가지고, 그것에 의해서 시벌을 해벌할 수 있다는 열쇠권의 일반화 성격에 대해서 언급한 일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강조된 사실은 판단의 기준에 대한 것인데, 시벌과 해벌의 확실한 판단의 기준에 대한 것인데, 시벌과 해벌의 확실한 판단기준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신성한 말씀인 하나님의 법에 따라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렇게 풀거나 맬 자격이 있는 자만이 풀거나 맬 수 있는데, 그 자격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또 우위에 두고 있고, 또 “동시에 열쇠의 조장자와 의장은 성령이라고 했다” 그래서 훨씬 더 열쇠의 권위를 하나님 자신에게 두고 있다는 말이예요. “사도들 조차도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전에는 메고 푸는 권한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언급하면서, 칼빈의 강한 입장은 성령이 먼저 임하셔서 행할 것을 가르치고 말씀을 해 주시는 일이 없이 누구나 열쇠권을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 이었다” 그 만큼 말씀에 따라서 열쇠권을 행사할 것을 말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그런 자로서 수종하는 자요, 또 그에 대해서 열쇠권으로 집중되어 있는 자(?), 그런 면에서 행사하는 자들이라! 이렇게 말해야 되겠지요. “여기에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면, 성령이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시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격을 측정하는 기준이라고 한 것이라고 종합할 수 있다”


(2) 그 다음에 “성례의 필수적 과정으로서 마음의 통해, 입의 고백, 행위의 속죄를 요구하는 고해에 대한 비판”

이것이 오늘날 시대에 이단 가운데서 그런 것이 있죠.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진짜 고백이 아니라고, 또 고백한 사람도 다시 고백해야 한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말로 해야 된다고! 성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를 많이 유혹을 하는 것을 보게 되요. 그것도 목회자들만 딱 따라다녀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을 ? 이단이라고요. 칼빈의 경우에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어요 그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요.


“칼빈이 스콜라적 궤변론자들이라고 하는 카톨릭 신학자들이 회개를 마음의 통회 혹은 마음의 가책, 입의 고백, 행위의 속죄로 구분하고,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이런 것들이 필연적이라고 가르치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필연적이다. 성경에 필연적인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용서의 첫 단계라고 하는 마음의 통회에 대해서 칼빈이 비판하기를, 올바르고 완전한 통회를 결코 이행할 수 없고” 라는 말이예요. 그것이 불가능하다. 끝까지 뭐! 입으로 할 때까지, 죄는 끝까지 고백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잖아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올바르게 완전한 통회는 이행할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데도 슬픔을 만들어 억지로 눈물을 짜내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런 행위가 사죄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죄하려고 하는 그런 고백이 원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죄의 용서는 거기에 있지 않다. 그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죄의 용서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이 죄를 자각하고 괴로워하고 상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더구나 우리는 죄를 다 열거할 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쏟아 놓을 때에라도 더욱 더 많은 죄들이 남아 있을 만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죄를 (회개)해도 어떻겠어요. 하나님 앞에 다 순수하지 못한 거예요. 하나님의 거룩성에 비해서 너무 먼 것이예요. 하나님께서 거룩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자만이 거룩하지, 하나님 앞에서 그 자체로 거룩한 자는 없다는 말 이예요. 하나님께서 거룩히 여기시니까? 거룩하게 만드시니까? 거룩하게 만드는 것을 친히 그가 모든 일을 준비하시고, 일을 실제적으로 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거룩해 지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가 없다는 말 이예요. 즉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어도, 더욱 더 많은 죄들이 남아 있다는 말이예요.


“우리의 숨겨진 죄악의 늪과 죄의 수렁이 얼마나 깊은지, 죄의 양상들이 얼마나 다양하며 그 괴물 구도사가 얼마나 많은 머리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긴 꼬리를 끌고 다니는지를 알지 못해서 하는 말이라고 비판하였다. 오히려 부정적이 결과로서, 사제들에게 죄를 토해내고 자신들의 짐을 벗어진 것으로 여기며 남에게 자신들의 짐을 넘겨 버리고서 가장 담대하고 제멋대로 죄 짓도록 하여 죄인들에게 죄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며, 그들을 위선자로 만들며, 하나님과 자신들에 대해서 무지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자신은 죄를 다 고백했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자유롭다고 해서, 자유로운 자로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거예요. 위선자로 남아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이 그러죠. 그렇게 한 이유는 내가 한 이유는 무엇이든지 죄가 아니다. 그렇게 될 수가 있나요? 그런데 죄가 아니다. 그래요. 참!


“그리고 고백이 신적인 계명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라고 주장하든, 또는 오직 선포된 교회의 제도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라고 주장하든, 혹은 그 둘을 결합하여 고백은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유래되었고 후에 실정법에서 그 형태를 빌어 왔다고 주장하든, 그런 주장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용한 모든 성경구절들이 그들에 의해서 와전되었고 억지로 곡해되었다” 이런 점을 지적했어요. 그래서 “그런 결과는 성경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비판하였다. 그리고 야고보서 5장 16절의 ‘서로 죄를 고하여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사제의식의 근거가 되지 못하고 그 본문은 상호 고백과 상호기도를 동시에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고해에 대한 근거로서 하나님의 계율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근거나 교회의 제도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근거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적으로도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해서 정해진 법이 아니라, sozomen에 의해서 증명된 대로, 고백의식은 모든 교회에 보편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었고”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경건으로 유명하고 학식의 소유자인 넥타리우스 주교는 고해의식을 폐지해 버린 경우도 있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종종 성경에서는 고백을 받을 때 찬양을 위해서 받았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성경에서 고백을 받을 때 찬양을 위해서 받았다는 점이예요.


“그러나 칼빈이 지적한 가장 중요한 점은 죄를 사해주고 씻어주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지적이다”. 그의 비판에 의하면 우리가 누구에게 고백했느냐가 중요한데 그때는 주님께만 고백하고 주님만이 죄를 사해주고 씻어주는 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거예요(그의 비판에 의하면 우리가 누구에게 고백하느냐고 했을 때, 주님께만 고백하고 주님만이 죄를 사해 주시고 씻어주시는 분이라고 비판하였다) 그게 간과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의 권세 안에 속해 있는 것 인가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권세를 가진 자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받고 한다는 거예요. 그런 기도의 관계! 주님이 용서해 주는 거지요. 사죄권! 그러기 때문에 사죄권을 가진 자에게 우리가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은밀한! “따라서 우리가 누구에게 고백해야 하는 가는 간단하게 그리스도에게 고백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 중요한 거예요. “1년에 한번 고백해야 된다든지, 교황에게는 완전 사면권 혹은 수년간의 사면권이 있고 추기경에게는 백 일간의 사면권이 있으며 주교들에게는 40일간의 사면권이 있다는 신자들의 영혼을 매는 권리는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더구나 고해의식을 경시하면 낙원에 이를 가망이 없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백할 때, 죄악의 목록을 열거가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외적고백으로 더 깊게 숨겨진 죄악의 늪을 숨기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쏟아 놓을 때에라도, 더욱 더 많은 죄들이 남아 있으며 죄악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이 깊다는 것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숙고하라”고 책망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산입니다. 이 점이 이제 카톨릭과 다른 점입니다. 이것을 바르다고 생각한 사람은 누구나 카톨릭에서 나왔어요. 나그네로 살던, 지금도 쉽게 나와도 마찬가지예요. 이 길을 가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그런 신앙의 내용에 따라서 교회가 있는 거지요. 교회가 있는 거지요. 평신도가 있든, 목회자 있든, 어떤 무리가 있든, 이 기초위에서 이 기틀위에서, 이런 고백과 함께, 교회가 있을 때, 그때 개혁교회가 있는 거죠. 칼빈과 같은 개혁교회! 이런 것을 따라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 결국 전적타락과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인간에 대한 지식인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 인간에 대한 지식이 있잖아요.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신론이 있고 인간론이 있다면 지금 이런 문맥에서 있는 겁니다. 이 문맥을 빼고 무슨 뭐 anthropology(인간론) 그러면 그것은 그거와 따로 구분해서 locus(로쿠스, 주제)로 갑니다. 이게 그! 만약에 그걸로 조직신학을 그렇게 독립적이어서, 마치 locus(로쿠스, 주제) anthropology(인간론)를 연구한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뭐 인간에 대해서, 뭐! 뭐!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mistake입니다. 칼빈이 말했을 때는 그것은 지금 카톨릭에서 이런 부패가 있고, 죄에 대한 근본적인 그런 성격에 대한 오해가 있고, 인간 타락, 전적 타락, 인간무능에 대한 어떤 인간론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 그런 내용을 발견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한, 그런 종교 개혁적 문맥, 이런 문맥에서 인간론이 있는 건데, 이것이 만약 인간론이 그런 내용으로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있다면, 그것이 이제 문제가 된다 말이요.


그래서 뭐! 인간론에서 왜“ 인간의 죄론을 다루는가? 이런 것이 된 것은 이런 종교적인 유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마치 우리는 죄론을 만약 빼고 인간론을 다룬다든지, 뭐! 인간이 동물하고 어떤 차이가 있다든지! 독특성이 뭐냐! 이렇게만 강조되어서 인간론을 다루는 것은 그것은 철학입니다. 철학도 아니고 뭐! 일반 학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론은 죄론 이죠. 인간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가? 창조에만 있는 게 아니고,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5. (3) 전적타락과 전적 무능력에 대한 인간에 대한 칼빈의 이해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지식이 그의 전 신학적 체계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을까는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 신학적 체계에 크게 영향 끼치고 있음을 쉽게 관찰하게 된다. 특별히 그에게 처음 가장 뚜렷한 사상은 인간의 공로사상에 대한 비판인데 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털끝 마치라도 행위에 공로를 돌린다면 그는 성경 전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요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자라고 때리고 있다” 이렇게 했어요. 아주 그 초판에서 아주 순수해요. 이런 것이 이제 뒤에 가면 전부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시스템으로 많은 것이 첨가되므로 흐려져 있는데, 왜냐하면 너무 많으니까? 그 중에서 어떤 말이 중요한 말인지 모른다. 순수한 말인지! 흩어져 있어요. 대부분 기독교 강요를 읽다보면, 이런 말이 그냥 지나가버려요. 왜냐하면 다른 말이 더 중요한 게 보이거든요. 이런 말처럼(?보다) 그런데 원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인간론으로부터 발견된 독특한 고백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모욕한다 말할 정도로,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거절해요 이런 것이 이제, 이런 기본적인 생각이 이제,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와 관계에서도 이렇게 아주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이제 종종 뚜렷한 내용으로 발견이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왜 그러냐하면, 오늘날 벌코프 사상에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대로 1번, 2번으로 생각하거든요. 성화에 있어서는 1. 하나님이 전적으로 행한다. 2. 인간이 협동한다. 이렇게 해 가지고, 두 가지로, 1번과 2번으로 제목이 되어 있어요. 중생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인데, 성화에 대해서는 2가지로 나누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벌써 기독교 강요를 읽은 사람의 경우에는, 마치 칼빈으로부터 2가지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이 문제예요. 1번과 2번으로 나누는 것이 문제예요.


여기 말한대로 “털끝 마치라도 행위에 공로를 돌린다면 그는 성경 전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요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자이다”. 이런 말은 언제든지 인간론, 칼빈이 인간에 대해서 다룰 때 거기에서 한 말이예요. 그러니까 구원의 서정을 다룰 때 뭐! 지금, 구원의 서정 부분을 다루면 이 부분은 놓치기 쉬워요. 그러니까 기독교 강요에 대해서 뭐!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 논하라! 인간의 공로에 대해서 비판하라! 이런 벌코프 사상에 있어서, 칼빈이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벌코프의 사상을 비판하라! 이렇게 논문이 주어지잖아요. 그러면 열심히 구원의 서정만 연구해요. 그러나 구원의 서정이 어디가 있어요 그게! 물론 그런 것들이 이렇게 반영이 되어서 다 있지만, 없다는 말이예요. 논문을 실패하는 것 이예요. 실패하는 거예요. 물론 이런 내용들은 어느 한 주제를 다루는 사람의 주제는 아니지요. 결국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인데, 어떤 논문을 쓰던 마찬가지예요. 어떤 논문을, 신약성경을 주석하던, 어떤 논문을 쓰던 이 가장 중요한 원리, 개혁주의의 원리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기반을 전부 반영하는 그런 고백이어야 되고, 또 해석이어야 되는 것인데, 이 주제를 다른 사람만 그 주제에 관련해서 그 소유가 되는 것이 되겠어요. 안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기독교 강요랄까! 이런 내용들은 다 공유하는 성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가장 기본적으로 칼빈의 입장에서, 해석된, 성경이 해석된 부분은 가장 기초되는 부분 이예요. 거기로부터 발전되어서, 오늘날 개혁교회의 신학의 모든 뿌리가 그로부터 성장 한 것인데, 이것을 만약에 기틀을 안 잡고, 그러면 그것은 어떤 성경을(?) 하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다 이제 결국, 칼빈이 같은 본문을 어떻게, 카톨릭이나 기타 다른 모든 사람하고 다르게 해석해야 될 그런 원리적, 해석의 원리로서 장로교회가 있는 것이고, 그 다음에 개혁교회가 있는 것 이예요. 성경 해석의 원리예요. Biblica 신학(성경신학), 성경 신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이 자체가 성경 신학이 예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이 부분 이예요. 아까 마태복음 18장도 다 해석이잖아요.


그런데 지금의 성경신학은 따로 시작하는 거예요. 옛날 것을 다 제쳐놓고, 지금 내가 현대 문맥에서 따로 시작해서 지금 내가 발견하자는 거예요, 그러면 뭐입니까? 다 버리자는 겁니다. 그 때 그 뿌리가 어떻게 해석했는가에 기반을 두고서 그것이 정당한가? 아닌가? 이런 차원에서 좀 더 연구하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제쳐 놓고 언제든지 따로 시작하자! 그러면 언제든지 문제가 되는 것이죠. 물론 자유는 있습니다. 자유는 있는데, 자유는 있는데, 개혁주의가 되면 좋은 것이 좋아야 되는데, 칼빈의 해석은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다. 마음이 벌써 그렇게 되어 있는 사람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칼빈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는데, 칼빈 보다 더 낳은 해석을 하려면, 결국 칼빈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리고 칼빈을 넘어서서 해석을 그때 비로서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야 될 것이 아닙니까? 칼빈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칼빈은 한번도 보지 못하고, 언제! 하여간 말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칼빈은 최소한대로 기본적으로 그냥 외우다시피 다루어야지, 그 다음에 비로소 칼빈을 넘어서서 해석이 그때 가능한 것이죠. 그래야 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대로! 우리가 이제 역사적으로 칼빈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개혁교회의 지금 역사까지 있다는 말이예요. 그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석의 모든 역사적인! 역사의 모든 것을 섭렵한 그런 내용을 가지고, 그때 비로소 현대의 어떤 해석에 대해서 정확한 자리를 매김 해야 될 것이죠.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의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로 이미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의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라고 칼빈은 해석한다” 그런 뜻이라는 거예요. 전혀 다르잖아요. 이미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의에 이르게 하신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예요. “성경에는 자주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 표현이 우리 행위가 그런 보상의 원인이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우리의 선행이 그런 상급을 가져다 주는 공로가 되는 것처럼 이런 종류의 약속을 통해서 우리의 행위의 가치를 성령이 인정하려 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상의 소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올바르게 사는 데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어!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우리가 늘 묻고 있는 물음이예요. 그것이 잘못이라는 거예요.


“특별히 이런 강한 입장은 중생된 이후의 그리스도의 삶을 걸어가는 자에게 경고하는 칼빈의 말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결이란 그 자체가 인도하는 길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되는 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예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결이란 그 자체가 인도하는 길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되는 길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ordo(오르도, 서정, 질서)예요. ordo(서정, 질서)! ordo salutis(살루티스, 구원의)에서 ordo라는 말은 그런 의미예요.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서 인도되는 길이라는 말이예요. ’그래서 구원의 서정이란 그 강조가 구원에 있지 않고 서정에 있다‘는 말이예요(즉 구원의 서정이란 그 강조가 구원에 있지 않고 서정(ordo, modus[방편])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생각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물론 “우리의 선한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선한 행실이 어디서 나왔느냐를 생각할 때, 인간의 공로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선행의 찬양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나누는 그런 식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했냐면, “그것 전부를 온전히 통채로 주님께 돌리는 그런 공로이다.” 이런 말이예요. 이것이 이제 totam(전체를) integram(온전히){전체를 온전히}이예요. 선행의 찬양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나누는 그런 식이 아니고, 나누는 그런 식이 아니고! 그것 전부를(totam) 온전히 통째로(illibatam) 주님께 돌리는 그런 공로이다. 그러니까 totam integram et illibatam, 아주 상징적인 말입니다. 가서 성도들에게 칼빈 말이라고 하십시오. 성도들이 달달 외우도록, 그러면 신학생들은 더 그래야 해요. 달달 외워야죠!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칼빈 유산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짬뽕이예요. 무의식적으로 짬뽕이예요.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칼빈이 젊은 칼빈일지라도, 아직 30세도 안 되었는데, 이런 것이 성경에서 추론되고 분리되어서, 그의 신학적 체계로 자리 매김 되어 있었다는 그 자체가 그의 천재성이예요. 천재성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참! 하나님의 은총을 너무 많이 받은 사람이예요. 지금도 손상이 없는 그런 내용이니까요. 오늘날에 칼빈만 은총만 받는 자인가!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예요. 역사 속에서 사도들이 그런 은총을 받아서 성경이 산출이 되는 그런 특별한 은혜를 받는 예외적인 인물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순수성을 잘 보존하고 이렇게 역사 속에 심은 칼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종이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특별히 인식이 맞물려 있다 볼 수 있다. 즉 인간이 아무리 완전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어떤 것이 나오는 법이 없고, 인간이 가진 것이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저주 받을 것이라 선언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이 이룬 것은 거의 죄뿐이고 그런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가증한 것이어서, 인간들의 모든 의를 전부 합한다 하더라도, 단 한 가지의 죄에 대한 보상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모든 선을 다 모아도, 의를 모아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모아도 한 가지 죄에 대해서 그것을 대신할 아무것도 없다. 이런 말 이예요. 아무 것도 없어요. 모든 선을!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 물론 자신의 선이 되지만은, 탕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 이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예요. 인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과 화해되지 않고, 그 분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 분이 돌리지 않는 이상, 그것은 될 수가 없어요. 용서될 수가 없어요. 그런 의미로 보아도 충분하지요.


“비록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김을 받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 자체에게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에게 이런 가치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이제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 연결되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뭐예요! 이 성경을 해석할 때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영어로 해도 번역을 잘못 했어요. 여기에 29-30페이지를 보시면, 제1항의 경우에 § 1.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아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약된 경우에 제2항을 보시면 § 2. 먼저 하나님에게 눈을 돌릴 때 자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다. 이렇게 요약되어 있는데, 영어의 번역에서는 이것의 관계가 “먼저”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어요. 이것이 분명하지 않아요,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로 되어 있다고 오해할 만하게 번역되어 있어요. 마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서로 아주! 대화적인 관계로, 하나님의 지식이 싹트고, 인간의 지식이 싹트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고요. 그러나 원래 칼빈의 뜻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인간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이런 말이예요. 그것이 원래 칼빈의 정신이예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없다. 그 다음에 이제, 인간에 대한 지식이 성장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이 약간 더 성장해 가는” 이런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요. 이런 관계가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정확한 문맥은 이미 뭐예요. 실제적인 의미에서 기독교강요 1539년판에서는


1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2장 인간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1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2장 인간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왜 그렇게 되어 있는 지에 대한 locus(로쿠스, 주제, --에 대하여)로 알지, 왜 1장과 2장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실제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런 것이 거기에서 사라져 있다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니까 기독교 강요 1536년판의 근본적인 배경을 알지 못하고는 문맥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대 부분 오해해요. 기독교 강요를 잘못 해석해요. 물론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모든 신학적인 체계, 조직신학 체계도 종종 이런 밀접한 관계를 잘못해석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강요 1536년판은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별 볼일 없구나! 뭐! 나도 다 할 수 있는 십계명 해석, 사도행전 해석을 보니까? 별 볼일 없거든요. 처음에 한번 쭉 읽어보고, 뭐! 별 볼일 없다고 해서, 바빙크 책, 또 무슨 벌코프 책, 또 뭐예요? 희한한 책, 거기에 없는 말! 희한한 책을 찾아서 막 하는데, 칼빈은 잘못 이해한 겁니다. 거기에(기독교강요 1536년판) 그! 참! 실제적인 종교개혁에서 가장 리얼하게 발견된 핵심적인 인과관계, 교리와 교리 사이의 인과관계 그런 것들이 아주 잘 리얼하게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논문을 쓰라고 하니까? 하도 논문이 안 나와서 따로 쓴 것이거든요. 97년부터니까 7년 정도 되었지요. 물론 지금은 기독교 강요를 강의를 안 하려고 하니까! 그 동안 과제를 똑 같이 주었어요. 헌사에 나타난 실천적 의미가 본문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어떤 주제이든지 한 번 써보라!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나오지를 않아요. 강의를 그렇게 했어도 나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기독교 강요를 몇 날 주제를 쓰고, 논문 주제도 쓰고 썼지만, 대개 헛바퀴를 많이 돌아요. 그러나 내가 쓸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할 수 없는데, 그러나 저는 그래요. 일단 한 바퀴 몇 바퀴를 계속 돌다보면, 약간 올라갔다! 또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전체적으로 조금씩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부 한 번 과거에 연구된 논문을 최소한도로 읽어라! 읽어서 그 다음에 다음 내가 더 이상 발견할 것이 무엇인가? 있으면, 조금 더 발견할 것이 아니예요. 그것이라도 그렇게 해서 쌓아가지고, 조금! 마지막에 어떻게 하면 칼빈이 조금 정확하게 발견된 것 가지고, 독자들이 읽혀질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제는 그런 기회도 없어져 버렸어요.


이제 조금 예를 드니까? 이해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이 어떤 정신인지를 헌사와 비교해 보면, 참! 얼마나 은혜로울 수 도 있고, 역사 속에서도 그런 진리가 이렇게 흐려져 있다는 것, 역사 속에 그렇게 무시되고 있었다는 것, 이런 것이 특히 칼빈을 연구하는 자 뿐만 아니라, 칼빈을 내놓으라 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내놓은 모든 작품을 보면 참 한탄할 내용이 상당히 많아요, 패커! 뭐! 뭐! 칼빈주의자들 다 있는데, 참 통째로 아무런 의미 없는 작품을 쓰고 있어요. 칼빈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참! 칼빈을 망친 거예요. 칼빈주의자들, 칼빈연구회! 세계 칼빈 협회! 칼빈 발표회! 그저 그런 사람들이예요. 정신 없는 사람들이예요. 몇 날 모여 봤자! 똑 같은 일만 하는 거예요. 자기 자랑만 하고, 칼빈이 어떻다! 또 한국에서 칼빈 협회에 참여해서, 칼빈 연구에 참여해서 발표하고, 경청하고 해서 의미를 많이 부여하긴 하는데, 참 웃기는 이야기예요. 대개 그 학자들에 대해서 뻔히 알고 있는데, 그 만큼 칼빈이 제대로 해석이 되고, 발견이 된다는 것은 시대의 타락성, 수준에 의해서 결국 해석이 되기 때문에, 그때에도 발견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내가 칼빈을 읽을 줄 모릅니다. 읽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칼빈을 늘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혹시 질문 있어요. 여러분들 너무 갭이 심하잖아요. 강의 내용하고 너무 갭이 심하면, 또 삶의 현장과 ? 너무 거리가 멀면 대개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되도록이면 가까이 오도록 노력을 해야 그때 이것이 좀 살아납니다. 너무 갭이 심하면 공중에 뜰 것이 아닙니까?


라틴어판 원본 기독교 강요 제1권 1장 95페이지를 보시면 “그런 생각에는 여러 배경이 있다. 우리의 선행 자체는 부인하지 않으나, 선행의 찬양을 하나님과 사람이 나누는 그런 식이 아니라, 그것 전부를 온전히 통째로 주님께 돌리는 그런 공로이다” 이렇게 라틴어 표현으로 되어 있어요. 이때 이 말이 전부(tota), 순수하게도 될 수 있고 완전하게(온전히, integram), 그 다음에 여기 illibatam(통채로), 통째로! 신학은 제대로 가르치면 재미있습니다. 참 재미있어요! 단지 울고 불고 하는 분위기만 있으면 참 좋지요. 매일 경건이 참 천상과 같고, 그 다음에 강의가 예배가 같고, 신학 3년 기간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요. 온종일 집에 가기 싫은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총신의 경우에는 토굴을 만들어 놓았어요. 집에 가기 싫으니까, 다 토굴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저녁이 되고, 결국 옛날에는 가마니 깔고 있었다가, 기숙사 지니까 기숙사에 들락 날락 하게 된 거지요. 나중에 보니까 기숙사가 진짜 기숙사가 된 거예요. 왜냐하면 공부하고 분리 된 것이예요. 참 어려울 때가 좋은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때, 이런 강의, 칼빈이 소개되고, 칼빈의 순수함이 소개되고, 늘 기도하도록 하고, 메시지가 좋고, 그렇게 훈련을 받을 때, 좋은 교역자가 나오게 되요. 그런데 뭐! 교수들끼리 티격! 태격! 티격! 태격! 그러면 무엇이 되겠어요. 아무것도 없지요. 학생들은 이리 저리 방항 하다가 보니까 3년이 지나 버리지요. 여러분들의 교단 책임도 큽니다.


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메마른 땅 위에 은혜를 주셔서, 또한 거기에 은총의 내용을 말씀으로 심으심으로 얼마나 큰 은혜가 우리에게 집중적으로 집약되어서 임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이런 모든 말씀이 심어졌으나. 그 모든 말씀이 순수하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귀한 종들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도 이런 은혜 아래 저희들이 이어지게 하여 주시고, 또 이런 은혜를 받는 자로서, 또 그와 같은, 같은 말씀을 순수하게 발견하는 자로 주님 앞에 서서 삶을 주님 앞에 드리는 그런 자로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공유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위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그런 역사의 현장들이 늘 생생하게 남아 있을수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출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FB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