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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특강 III - 김영규 교수

Bavinck Byeon 2018. 3. 4. 16:57

기독교 강요 특강 III

- 기독교 강요의 전체적 성격 다룸 -

 

김영규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녹취: 김기현 강도사(은총교회)

강의 연도: 2003~2004, M.Div수업


*[본 강의안은 강의를 녹취하신 김기현 강도사님의 허락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마지막 특강


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참으로 곤비한 인생들 가운데서 주의 긍휼이 크셔서, 각자에게 여러 모양으로 그 터전의 내용의 역사가 있고, 또 그 죄악의 내용이 깊어가는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역사해 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을 저희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도록 하시옵고, 또 교회를 섬기며, 섬기는 그런 내용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으로 우리의 생을 통해서 수종을 드릴 수 있도록 저희들로 하여금 이런 모든 준비를 하게 하여 주시옵고, 또 아버지의 영광된 일을 목표로 두고 하루 하루, 주님 앞에 전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오며, 저희들이 이와 같이 주의 말씀 앞에서 인생으로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다고, 발견되는 그런 조그마한 목적을 가지고 저희들이 늘 훈련받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저희들이 위로를 받으므로, 이 세상에서 사는 그런 나그네 생활 가운데서도 조그마한 희망을 가지고, 이렇게 주님 앞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시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 많은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은혜의 내용이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하시고 또 그 조그마한 내용으로 우리가 느끼는 지식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고, 조그마한 그런 길을 통해서도 주님은 친히 사용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으로 역사하시며, 그 내용이 참으로 증거가 되고, 또 보증이 되어서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늘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우리가 허락을 받고 이렇게 걸어가는 줄을 믿으오며, 오늘도 저희들이 한 모양을 주님 앞에 드리는 이런 내용에서도 하나님의 지식의 내용들이 더 드러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수업.

우리가 지난 번에 기독교 강요와 관련해서 전체적인 성격을 한 번 생각했는데, 물론 여기 이제 제목자체가 보여주듯이, 여러분들이 기독교 강요 강독 25page를 보시면 1권과 2권에 해당되는 그런 내용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첫 번째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되어 있고, 또 그 제2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자이신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때 여기 제목자체가 표현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구약 전체에 계시된 그런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지요. 제목 자체가! 그래서 처음 율법 아래서 족장들에게, 그 다음에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결국 신 구약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거기에 나타나 있다. 이런 것인데, 이런 내용들은 물론 창조주 하나님이라! 그러면 성경 외에 더 다른 특별한 영역이 우리에게 사려될 수 있겠죠.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가 1장 18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특별히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는데, 그 내용에 의해서도 결국 사람이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는 증거로서 남아있는 그런 창조에 대한 내용이다. 그 창조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여기 언급되었을 때는 성경만 제한되지 않고, 이와 같이 자연자체 그런 영역에 해당되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에 이제 신구약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2권은 당연히 구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초대, 자연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심어진 내용,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그런 내용에서, 하나님의 지식이 전달 된 그런 내용을 넘어서, 이제 다른 하나님의 특별한 초대가 있다. 더 첨가된 초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초대들! 자연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들, 또 그 후의 역사들 그런 것과, 그 다음에 구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거룩한 지식으로,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계시의 내용으로 초대 된 내용들! 이런 내용들이 이제 하나로 어울려서, 하나의 중요한 시대를 형성하게 되는 거죠. 지금 시대가 오늘날까지 지속이 되고 있는데, 그런 시대는 하나의 서곡, 어떤 의미에서 다음 세대 하나님의 더 좋은 세계를 위한 서곡으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어! 그런 내용들은 여러분들이 이제 뒤에 확인하는 내용으로서, 기독교 강요 강독 51page를 보시면, 9항 하나님 지식으로의 초대로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거기 보면 첫째 paragraph에, 마지막 두 번째 줄에 보시면, “우리로부터 정당하게 지각되고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면 건전하게 되고 열매를 맺을 하나님의 지식으로 우리가 초대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지식으로 그랬냐면 “건전하게 되고 열매를 맺을 하나님의 지식” 그러니까 목적은 하나님의 지식이 주어진 것은 지금 열매에 있다. 이 말이예요. 열매에!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지식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했을 때는 자연이다. 이 말이예요. 자연! 먼저 여기 표현이 어떻게 됐냐면, 바로 전에 이렇게 했잖아요. “쉽게 눈으로 분별하고 손으로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말하는 자연이지요. 그렇게 표현했어요? 자연을 표현하더라도, 앞에 수 없이 언급을 하면서 아주 특징적인 “눈으로 분별하고 또 손으로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이때 가장 중요한 내용들은 나타났다고 그랬으니까? 계시가 어떻게 됐냐고 “분명하고 명백하게” 여기 표현되어 있습니다. 판명하다, 판명함에도 불구하고 전달이 안 된 내용, 이런 형태로 가게 되는데, 이때 그 판명하고 명백하다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단지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러니까 우리 뇌는 항상 움직인다고 그랬지요. 이것은 칼빈이 알지 못했어도 이와 같이 항상 움직인다. 그랬어요. 그런 우리 피조물 자체의 성격에 있어서, 독특하게 그런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인 아주 독특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 그런 내용이 결국 생각하고 사색하고 다음에 높은 이상을 품고 이런 내용이 되어 있는 그런 자리가 우리에게는 특별히 하나의 공간으로 어떤 형태로 있다. 이 말이죠.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이제 뇌로! 뇌의 뭐! 어떤 뇌의 네트워크든지, 그 넘어서 이제 영혼과의 관계 속에 기원을 두고 있는 그런 관계든지! 이런 것이든 어떻든 간에 그런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런 사색하는 자리, 그런 사색하는 자리가 그 자체로서, 이렇게 만약에 참된 지식으로 포함되어 가지고 굴리는, 굴리고만 있다고 하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대상이 없다. 만지고 앞으로 우리가 안식하는 그 눈이 향하는 그 눈이 없다면 그것도 얼마나 공허하겠는가? 그런 말이다. “공허한 사색에 만족하여 단순히 뇌리에 맴도는” 그런 형태의 그 하나님이 초대된 그런 지식의 내용이 아니고, 여기는 “우리로 정당하게 지각되고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그러면서 건전하게 열매맺을 하나님 지식으로 초대되었다.”


어디에서? 아까 말한 대로 그런 눈으로 분별하고 손으로 가리키는 이런 형태! 여기 중요한 것은 초대받았다. 하나님 지식으로 초대 받은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문맥이 그렇게 이해되고 있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그렇게 초대하고 있는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초대하고 있다. 우리를 자연을 통해서, 거기에 우리에게 심어졌다 하는 것은 분명히 알도록 하고 있다는 그 내용이 거기에 있는 것은 그것은 우리를 무엇으로 초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지식으로 초대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좀 더 세심히 탐색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 경배해야 될 그런 본질을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지나친 호기심과 탐구하려고 우리가 시도하기 위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요. 쉽게 말해서 그런 자연이 주어진 것은 또 자연과 더불어 그 역사가 이루어진 것은 여기에 있는 대로, 탐색하여 또 지나친 호기심 만으로 탐구하고 그렇게 ( ? ) 라고 주어진 그런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 있는 대로 그 본질은 경배를 받으셔야 할, 그 본질에 대한 어떤 다른 초대를 말하는 것이지요. 단지 여기 표현이 뭐라고 하냐면, 아까도 눈으로 분별하고 손으로 가르치는 그런 내용이만 여기에 가까이 하시고 우리에게 친밀하게 자신을 제시하셔서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숙고하라! 생각하라! 그런 식으로 전달하시는 사역들 가운데서 그를 숙고하라 이런 말 이예요. 그러니까 자연은 자연대로 주어지고 그 역사도 계속 하시는 것이예요.


물론 우리가 극거시세계와 극미시세계는 그 최초와 지금 현장하고는 통한다고 그랬지요. 오늘날의 시대에도 통해요. 그러니까 엔트로피가 제로인 그런 영역들, 또 예를 들어서 입자의 마지막 한계를 의미하는 그런 빛의 속도로 제한된 그런 한계든, 그 다음에 절대온도 제로에 가까운 영역들, 그러니까 영역들이 있다고요. 엔트로피가 제로인 영역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주 밖이지요. 입자가 아무리 에너지를 자기 스스로 결국은 품어내면서, 결국 입자가 달리면서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어가서 세상에 남기고 있는 그런 에너지들, 자기가 다른 에너지 형태로 환원이 되고 있는 그런 형태들, 우리가 약간에 돌아가는 형태가 에너지를 먹고, 에너지를 약간 다 쓰고, 그러면 우리는 주변에 있는 에너지를 먹고 있지요. 그 다음에 우리가 그 순간에 활동을 하면서 실제적으로 에너지를 다 바꾸고 있어요. 우리가 쓰고 있는 그 에너지는, 화석연료는 실제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쓰고, 또 우리가 음식을 통해서 그런 에너지로 바꾸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활에서도 그런 것처럼, 모든 입자는, 이 세상에, 우주 끝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 입자들은 반드시 에너지로 바꾸어지고 있다. 마치 빛이 한번 쏘고 나서, 어두운 곳에 빛이 비추고 나서, 아주 적은 에너지는 어두움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리지요. 그것은 벌써 광자가 에너지로 흡수되고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스핀이 사라진 것과 같아요. 그 말은 에너지로 전환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 형태로 에너지화 되었을 때, 결국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런 세계가 될 것이 아니예요. 이것이 우주의 끝이라는 말이예요. 이것이 이제 극 거시세계의 마지막 끝이죠. 이런 세계도 있지만, 이 작은 입자 자체를 생각할 때는 어떤 C의 개념같은, 이 C의 개념에서는 결국 이런 물질의 궁극점을 말해요.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는 그런 궁극점이라고요. 이런 궁극점에 가까이 있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말이예요. 절대적인 그런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는, 그러면 이 영역에서 무한대로 가는 0.000으로 죽 해서 도달해서 0. 이렇게 도달해야 하는데, 도달하지 못할 그런 세계이지요... 물론 우리가 10-18만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세계에, 지금 관찰한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한 면은 절대온도 제로가 있습니다. 이것이 16그러면 이것에 해당된 절대온도는 마이너스, 이 절대영역에 가면 물질이 괴상한? 상태가 되지요. 마치 이런 상태처럼 물질이 이상한 상태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에 가까운 온도가 되면 마이너스 절대온도가 4도 2.5도 이렇게 되면, 물질이 전혀 다른 형태가 거기에 가시화 되지요. 결국 절대온도에 가까이 가면 갈수룩 결국 모든 스핀이 정지되어 갑니다. 물질이 그대로 있기 있더라도, 모든 운동이 정지되어버립니다. 정지되어 버렸을 때 오는 독특한 현상이 있는 거지요. 이것이 한계입니다. 이런 한계들이 있는 것인데, 이런 한계에서 우주의 끝과 처음이 같다라는 말입니다. 거기 세계에서는! 우주의 끝이나 시작에서나 이 세계에서는 같은 겁니다. 그러나 이런 질서! 최소한도로 그런 극거시세계와 극미시세계에서 극미시로 가지 않고, 또 극거시로 가지 않는 중간의 모든 세계가 우주라는 말입니다. 그런 우주 안에 있는 겁니다. 처음의 시작의 모양은 다른 maps로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maps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간과 간격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역사해서 우리가 그 안에 머물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초대하고 있는 내용이 늘 있도록 하셨다는 말이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지각을 갖도록, 귀로 듣고, 눈으로 보도록,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그의 지식을 갖다 주는 데, 그 분이 이런 세계 밖에 있는 존재인데, 이 안에 있는 존재에게 어떻게 갖다 주겠어요. 아무리 갖다 주려고 해도 첫째 손이 없어요. 볼 눈도 없고, 귀도 없어요.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런 비슷한 상징적인 것을 우리에게 놓아두고, 그런 형태의 가장 최선의 어떤 형태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주어질 때, 이와 같이 판명하게 분명하게, 그러면서 인간에게 너무 가깝게 하는 방식으로, 쉽게 말해서 인간적이다! 우리가 보는 것, 굉장히 인간적이다! 그런데 그 인간적인 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적인 것이거든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시므로 인간적이게 가까이 오신 형태로 우리가 존재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까이 오시고, 친밀하게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과학은, 신학과 다른 일반과학이라는 것은 소위! 학문의 일반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호기심! 호기심이라는 말이예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호기심이 동기가 되어서 연구를 한다. 리서치를 한다. 그것이 결과가 어떻든 간에 호기심이 동기가 되다 보니까 자기가 손놀림을 하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어떤 결과를 얻었다. 오늘날 과학의 행위에 의하면 행위가 먼저이고 결과가 나중 이예요. 행위가 먼저 실험을 하고, 그 다음에 나중에 fact를 보고하는 거예요. 리포트하는 거예요. 어떻게 행위가 이루어질 때, 그 다음에 어떤 결과가 나을 지는 자기 자신도 예측을 못해요. 어떤 경우에는 실수가 가장 큰 발견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결과를 내라고 교수가 주문을 했는데, 학생은 아무리 그와 같은 방식을 했는데, 결과가 안 나와요. 그런데 그 잘못된 결과가 오히려 혁신적인 어떤 개발내용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실험이라는 것은 그 결과를 예측을 못하는 그런 거지요. 그와 같이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호기심이라는 것, 그의 학문에 굉장히 중요한 정의입니다.


그런데 지금 칼빈이 말하는 것은 즉 인간이 이런 뇌를 가지고 있어가지고, 당연히 세상을 보는 방식이, 삐뚤어진 방식이 물론 아담 이래 늘 있었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판명한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되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라고 마치 주어진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실제적으로 취급하고 이용하고 다루고 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경작한다는 것도 다 그렇고, 우리가 소모한다. 또 우리의 자연을 ?에 넣다. 이런 것은 다 뭐냐 하면, 어떤 의미에서 안식의 성격으로 있는 것도 있지만, 조금 더 과학적 행위 속에서 다른 성격이다. 지금도 몸부림 치고 있어요.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 이유는 스위스에서 대학에서 인적 자원이 산출되지 않고 있다. 이랬을 때, 그 인적자원이 그렇게 산출되지 않는 기준이라는 것은 그런 실험과 내용에 있어서 얼마나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내느냐? 이것에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측정해 버린다고요. 세계는 난리예요. 껍데기가 그렇게 덮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본질이라고 그랬을 때 뭐라고 그랬어요? “경배 받으셔야 할 그의 본질이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려고 되어 있다”는 말이예요. 그러나 뭐예요. 칼빈이 말하기를 “그러도록 그 자연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이예요. 단지 뭐냐? 오히려 그의 지식, 그것을 통해서 숙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거예요. 참 실제! 과학의 가장 순수한 성격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의미에서 해야 되요. 이런 의미에서 순수하게 해야 되요. 그리스도인만 자연을 순수하게 다룰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의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하기 위해서, 거기에서 가까이 숙고하고 생각하는 내용이 있다고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이라면, 칼빈 자신이 500년전에 그렇게 이런 사고의 깊은 내용을 해석할 수 있었을 까 하는 데, 이것이 칼빈의 현저함이예요. 그 다음에 여기를 보면 “게다가 이런 종류의 지식은 필히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각성시키며 용기를 복돋아 주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그의 자비하심과 엄격하심의 표본이” 표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엄격하심의 표본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논의 된, 앞에 있는 내용인데, 그런 내용이라는 것은 뭐냐면, 자연 자체!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내용, 영원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러니까 이것을 종교적 씨라고 그러지요. 신적지각 또는 종교적 씨, 이런 것들, 그 다음에 그의 통치, 섭리와 경륜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 이런 내용들은 결국 거기에 모두가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는 데, 그 속성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비와 엄격함 그런 내용인데, 그런 것들은 표본이다. 표본이다. 표본.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하죠. 우리가 생각할 때 폭풍이다. 폭풍이 일어나 사람이 죽었다. 또 어떤 재난으로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조용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어느 곳에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갈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이 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단으로 되어있다는 거예요. 수단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표본으로 되어있다. 무엇을 알려주는 표본이다. 이런 말 이예요. 그때 그 표본이 지금 뭐라고 하냐면 “시작에 불과하고 아직 미완성된거다.”(51page). 아직 미완성 교황곡처럼, 아직 미완성 된 것이고, 시작에 불과하고 미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여기 뒤에 보면(51page) "의심할 것도 없이 그것의 완전한 현현과 공개가 다른 생으로 연장되는 더 나은 것들에 대한 서곡을 그렇게 친히 연주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친히! 이것은 서곡이요, 그다음에 서곡을 연주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오히려 이제 “좀 더 완전하고 참된 행복으로 초대되고, 유인되는 그런 자리이다.” 얼마나 이게! 그 칼빈이 가지고 있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안다는 게, 자연과 하나님의 섭리와 그런 것들을 포함하면서, 그 지식으로 초대되는 내용을 깊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이때 발견된 내용이 그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게 제목으로 되어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 안에서 구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 지식에 대해서 초대되고 있는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지식에 대한 내용, 그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하고,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삼아야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이다. 하나님 말씀을 발견하면서 그 지식을 알도록 하는, 그런데 초점을 맞추어서 신앙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있다. 신앙이 무엇인가? 제목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조직신학은 그것이라는 말이예요. 조직신학은, 누구든 성경을 볼 때 이렇게 봐야 되는 건데, 이런 내용과 틀을 가지고 이런 접근방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라고 그래요. 자연을 멀리하거나 자연을 제쳐놓고 성경만 보라는 거 아니예요.


2. 그래서 이제 앞에 가면, 여기 보면 무엇이 첫 번째 지식입니까? 여기 그렇게 나와요 29page 보면,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들에 대한 그 지식과 그 관계에 있어서 연관되어 있다면 그러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했을 때 먼저 이렇게 말해요. 맨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아에 대한 지식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면서 무엇이 먼저인가? 무엇이 먼저인가?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자아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방식은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라고 그래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고로(ergo, 그러므로) 직관적이다. 바로 직관! 에드문트 훗설에 의하면, 이것은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서 여기에 도달하는 마치 ”즉자“처럼 보이는, 이것이 선험적 자아이다. 선험적 자아는 어떤 데이터가 아니다. 행하면서 자료를 읽는 사람, 그것이 발견되기까지 선험적 환원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가로 안에 넣어야 한다. 이것을 이제 소위 현대철학에서 현상학파에 속하는 실존주의 이전에 이런 중요한 에포케 현상! 오늘날 쉽게 말하면 해체 신학이라면, 해체의 성격을 모방한 것이 하이데커입니다. 하이데커의 가장 스승은 그런 해체작업은 이런 소위 에드문트 훗설의 데카르트 길, 선험적 환원과 같은 그런 해체 작업입니다. 그때 자아가 발견되었을 때. 선험적 자아 자체가 자아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실패했다고 보면 그것은 실존주의입니다. 그러나 고집했을 때, 그것은 그의 스승입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현대철학이 현성이 됩니다. 이때 내가 생각하므로 고로 존재한다. 이것은 마지막 공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데카르는 수 없는 방법론의 의심을 통해서 전부 부정했다는 말이예요. 그러면 무엇이냐? 생각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 말이예요. 그러면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순간 바로 그 자체가 직관이 된다고 나는 존재한다고 직관이 된다고 바로 훌쩍 뛰어넘는 것이라는 말이예요. 물론 이것은 실제적으로 오늘날 현대과학에서 거짓말이 되었어요. 그런 형태가 아니예요. 여기서 cogito(나는 생각한다) 그런 것은 사실상 MRI에서 아주 넓은 maps 의 다른 흐름에 불과한 것이다. maps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런 철학은 오늘날 자연과학에 거의 다 흡수 되어 버렸거든요. 그 이상 의미가 없어요. 철학이 자연과학으로 바꾸어지든, 그러니까 의학의 분과로 들어가든, 아니면 철학 자체가 자연과학 계통으로 자기 전환을 하든 이렇게 전환해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신학도 위기에 있는 것이지요, 종교적인 그런 마음, 그런 것은 과연 유전자로 발견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의지가 발견되는가? 발견되지 않는가? 이런 거예요. 그러면 기능인가? 현상체인가? 아니면 유전계통에 연결되어 있는가? 이런 형태로 점점 벗겨져서 정리되었거든요. 그렇게 된 만큼 이런 것은 일찍 사라지게 되었어요. 철학은 거의 의미가 없어졌어요. 인문과학은 언어든 뭐든, 다! 이제 실용 과학 쪽으로 흡수되어 버려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관념[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방식일지라도 데카르트 하기전에 지금 칼빈이 하는말을 지적해야 되요.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후는 자아가 발견되어야지 비로서 다른 대상이 처음 발견되기 시작한다. 자아중심의 사고다. 그러나 칼빈은 정 반대죠. 자아가 발견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없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지식이 없으면 자아가 발견되지 않는다. 거꾸로예요. 즉 이 말이요. 그러니까 지금 이런 어떤 아주 큰 테제! 어떤 방법론적 면에서 전혀 다른 세계관에 대한 어떤 접근법, 어떤 근원에 대한 접근법, 이런 접근법으로 시작해서, 로마서 주석이 해석이 되고, 하나님의 지식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 상관관계가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조직신학에서는 아주 그 신론과 인간론의 관계가 이런 관계로 되어 있어요. 칼빈이 없으면 조직신학은 거의 종교적 의미가 없어요. 종교개혁적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그러니까 신론과 인간론이라는 것은 즉 자아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런 관계 속에서 reality로 있든? 또는 어떤 형태로 있든, 이런 형태로 있으면서 자기가 발견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발견되고, 하나님이 발견되면서, 자아가 발견되고 이런 형태의 독특한 형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 뭐라고 그랬어요. 29page 보면 제일먼저 여기 밑에 줄에 보면 “이는 맨 먼저 그 안에 살고 기동하는 바 그 하나님에게 그의 지각의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자신을 결코 정확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연관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그의 지각의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자신을 결코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구비하고 있는 은사들은 결코 우리로부터 온 것이 아님이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한 하나님의 현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무엇이냐면 그렇게 한 후에 하나님의 지식에 의해서 내가 발견된 이후에, 그 다음에 이제 그 다음 관계가 어떻게 되냐면은 “그 다음 우리는 물방울처럼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떨어지는 선한 것들로부터”, 물방울로부터 시작해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슬이지요. 이슬방울! 이슬방울로부터 이제 뭐요 우리가 소급할 때 개천으로 통해서 그 다음에 물의 근원지로 되돌아가듯이 원천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원천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게 그 신학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발견이 되면서, 내가 발견이 됐잖아요. 그러면 발견되면서 다시 무엇을 해요.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물방울 같은 어떤 내용들, 선한 것들 “우리에게 떨어지는 그 선한 것들” 그것이 물방울처럼!. 그래서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하냐면 “마치 개천으로부터 물의 근원지로 되돌아가듯이 원천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지금 무엇이라고 하냐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자아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에 의해서 발견되면, 그 자아에 대한 지식이 깊어질수록, 이제 점점 더 원천지로, 하나님 그 분을 향하여. ... 하나님에 대한 이 사고를 어느 정도 깊게 하는 것이 바르트가 약간 번쩍 빛나서 다른 길로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지식이 찰나적으로 발견이 되지 않는다 해서 성경을 거의 의미없이 해 버렸어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냐면, 그런 의미에서 원초적인 미스가 나에게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원초적인 미스! 그러니까 나에게 결국 죄인으로 발견되면, 자아가 죄인으로 계속 발견 되잖아요. 그러면 그 죄인으로 발견되었을 때, 하나님의 지식은 거의 접촉할 수 없는 그런 형태, 그런 형태는 상당히 창세기 같은 그런, 도저히 우리가 검증할 수 없는 것 , 이런 형태와 같이 미스로 해석해 버렸다고요.


그런데 여기 칼빈은 정반대잖아요. 판명하다 언제든지 그건 판명하다 그렇게 모호한 일이 없다. 판명하다 로마서에 있는 정확한 대로 뭐요? 변명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하다. 이것을 분명히 가르키고 있었던 거지요. 이런 점에서 칼빈으로부터 같은 문맥을 해석하는데 다른 길로 가 버린 것이 칼 바르트임을 볼 수 있는 거지요. 이런 어떤 자아와 그 관계 또 그런 관계를 통해서 31page를 보면 ”먼저 하나님께 눈을 돌릴 때 자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다.“ 그래서 ”다른 한 편 한편 앞서서 말했고 다른 한편 1항이 있었고 제2항에 와 가지고 “먼저 하나님 얼굴을 응시하고 그 직관으로부터 내려와 자신을 관찰하지 않으면, 그의 순수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때 점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더 커지면, 자아에 대한 지식이 커져서 그때 결국 발견되는 어떤 인간론, 이것이 신학에 있어서 인간론이다. 인간론은 죄인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지식이 개혁의 내용으로 이렇게 되어있었잖아요. 그래서 최종적인 것은 이 문맥에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하나님 말씀으로 초대되는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제 분명히 표현을 해야 되요.


그래서 53page 같은 것을 보면 “온 세상이 무한한 오류의 진창, 무지와 방종, 혼동으로 어두워져 있다.” 이런 내용이 이제 여기까지 와야 로마서 1장 18절이 약간 해석이 되는 내용으로 연장이 되고 있어요. 가장 치명적인 오류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한다면, 인간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오류라는 것은 앞서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 55page를 보면, 14항 제일 마지막 부분을 보면, 여기 뭐라고 되어 있어요. 마지막 줄을 보면 “자신의 길” 그것이 뭐라고요 “치명적인 오류”이다. 그러니까 이 자아를 보고, 자아를 발견하고자 추구하고자 하는 이런 일, 소위 데카르트적인 방법, 데카르트적인 그런 길, 자아를 알 때, 세상을 안다든지, 이런 그리스적인 가장 근원적인 사색의 어떤 틀. 물론 불교나 이런 해탈이나 이런 것들도 결국 어떤 그런 절차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라고 표현하는 그런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제 결국 그런 진리가 교회 안에,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의 독특한 자리가 이상하게 변질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72pag를 보면, 결국 교회 안에,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해서 아주 다른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의해서, 이와 같이 이스라엘 안에서 정착이 되어서, 특별한 초대, 아주 그 판명한 분명한 초대가 이루어졌는데, 그 이루어져 있는 곳에, 성경의 역사 하는 곳에, 늘 가장 성경이, 하나님이 주신 가장 값진 선물로 주어진 것인 것만큼, 세상에서 가장 지배하고 있는 사탄은 그 말씀이 역사 되는 곳에, 가장 큰 역사로 역사 한다는 거요. 가장 큰 역사로,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여기 71page 제12항의 제목 자체도 제가 그렇게 주어졌는데, “사탄과 인간의 모든 훼방에도 하나님이 성경 자체의 힘으로 그것을 보존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이 공포된 때로부터 장구한 시대의 의지들이 한결같이 그것에 순종하였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온 세상과 더불어 그것을 억압하기도 하고 파괴하거나 혹은 전적으로 말살시키거나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소멸시키고자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종려나무와 같이 점점 더 높이 자라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 다음에 여기 뒤에 보면 “인간의 모든 노력에 의한 저항들에도 불구하고 역시 자체의 힘으로 보급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내용, 사탄의 훼방 이런 방법이 어떻게 교묘한지를 지금 종교개혁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가 변증하고 있는 내용이거든요.


그럼 이 변증이 무엇이냐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그런 세력은 어떻게 표현되었냐하면, 기존 카톨릭 세력이고, 권세를 잡은 자들이고, 정치권과 종교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세력 그러면서도 또 소요하는 무리가 있다. 소요, 진리가 발견되는 곳에 사탄의 역사가 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방종과 소요하는 무리가 거기에 동시에 발생한다. 근데 그것이 또 하나님 말씀을 뺏는 결정적인 사탄의 무기가 되어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둘 중에 하나는 어떤 의미에서 건전한, 지금 싸우고 있는 직접적 대상 같은데, 우리 안에 머물면서 실제 방종하고 소요하고 다른 방식으로, 성경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훼방하는 그런 어떤 틀이 발생하고 있다는 거요. 그게 지금 우리 가까이 있는데, 근데 실제적으로 그것에 의해서 피해가 훨씬 크다. 이게 재세례파이다. 쉽게 말하면 오순절파이다. 우리는 이제 오순절파는 양립되어 있어요. 하도 복수사회가 되어 있어가지고, 이웃집처럼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웃집 정도가 아니고, 어떨 때에는 같이 한다는 말 이예요. 등산도 같이하고, 정치적인 것도 같이하고, 그런데 칼빈이 지금 그것을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가 그 당시에 늘 말했지만은 그 당시에 결국 새로운 이런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초대운동들,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죠.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이단자이고, 이렇게 멸시된 자고, 이제 버린 자식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자들에 대한 것에 대해서, 이제 모든 힘을 동원해서 핍박하려고 하는, 이럴 때 몇 가지 한 6가지 비난 내용이 있죠.


첫째는 아! 그 교리들은 새롭게 최근에 생긴 것이다.(첫째로 그들은 그 교리들이 새롭게 최근에 생긴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옛날 것이 아니고, 새롭게 생긴 거다. 쉽게 말해서 이단이다. 새롭게 최근에 생긴 것이다. 지금 이제, 전체 문맥에 어떤 실천적인 의미, 어떤 시대적인 상황, 그 메시지가 갖는, 그런 구체적으로 메시지가 어떤 시대적인 문맥에서 그 자리를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 하는 거예요. 여기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적으로 이렇게 정착이 되어서 그 말씀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기가 되었을 때, 어떤 점이 그 무기로써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이런 것을 이제 칼빈이 실제적으로 조금씩 풀어나가는 거예요. 4권까지 가기 전에 이런 논제, 원리를 먼저 시작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그것도 이제 그런 시대적인 상황은 이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무기가 되었을 때, 그때 독특한 비난의 내용을 지금 감지하고서, 지금 특별한 메시지를 칼빈이 전하고 있다. 그때 여기 첫째로는 야! 그 교리들은 새롭고 최근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경청하지 말고, 그것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것! 그 다음에 2번째는 그 교리들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하다.(둘째로 그들은 그 교리들이 의심스럽고 불확실하다고 비난하였다) 의심스럽고 불확실하다. 확증이 안 된다. 교부들에 대한 무엇이든지 확증이 없다.


그 다음에 3번째로는 그런 교리들에 대해서 어떤 기적이 있는지, 기적이 거기에 확증이 되지 않고 있다.(셋째로 그들은 어떤 기적으로 확증되고 있는지를 물었다) 마치 옛날에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보고 기적을 바라는 것처럼, 그 당시 사람들이 기적을 기대했다. 기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한 적이 있어요. 어! 내가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갇혔는데, 너무 평범한!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간다.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네가 그런 기적을 보고 나를 예비한 자로서 앞서 왔다면 문제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역은 기적을 이루도록 유혹받는 그런 첫 시험에서 이미 증명이 되었어요. 자신의 사역은 그 사역이 아님을 증명했다고요. 자신의 일은 그 사역이 아닌 거죠. 자기 자신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먹고사는 그런 내용 이예요. 죽는 일 이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유혹하는 것은 그 말에 기적이 없다는 말 이예요. 예수님은 그래도 약간 맛만 보여주고 너는 말하지 말라. 그것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시는 것 이예요. 나를 증거하시는 이는 누구라고 그랬어요. 나와 아버지이다. 나 자신과 아버지는 증거 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나를 증거할 수 있는 그런 자가 아니다. 너희들이 나를 증거할 수 있는 그런 자가 아니다. 너희들이 증거하는 그 내용이 나를 증거한다. 내가 너희를 만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동기를 불어넣어주고, 너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이러는 것이지, 너희들이 나를 증거 한다. 이것이 근본적인 복음서 해석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재미 없어요. 여러분들 어디 가서 이런 내용은 못 들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내용은 아주 본질적이고 고유한 것 이예요. 그것을 못 듣는 다는 것이 이상하지요. 너무 고유한 것인데, 성경 자체가 원래 그것인데, 그것을 메시지로 이렇게 전달하고자 있는데, 왜 이렇게 모든 시대마다 이런 내용이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있죠. 거기에 사람이 방해가 되고 있는 거예요. 진리가 거기에 이미 있는 것인데, 사람이 방해가 되요. 내가 선생이 되어서 전부 그것을 막고 있다는 말이예요, 내가 무능하든지, 내가 이해를 못하던지, 어떤 원인에 의해서든지 그냥! 여러분들 게으른 것도 원인 이예요. 한 발자국 뒤에 내가 이것 못 보겠어! 이러잖아요. 그것이 방해거리예요. 그러니까 이런 아주 고유한 내용들이 역사에 또 반복을 한 거죠. 칼빈이 참! 이 자체를 이렇게 정곡에 해당되는 내용을 정리해서 그 다음에 그에 대해서 적당하게 딱! 대답해 준다는 것이 명료하지 않아요.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거예요. 여러분 나이의 젊은 나이인데, 그렇게! 쉽게 말하면 굉장히 천재성이지요. 그러니까 새롭게 생긴 것이다. 또는 의심스럽고 불확실하다. 그런 것은 기적이 뒤따르지 않는다.


또 4번째로 무엇이냐? 면은 거룩한 교부들의 합의와 가장 오래된 관례를 부정한 것이다.(넷째로 그들은 그렇게 거룩한 교부들의 합의와 가장 오래된 관례를 부정하는 것이 합당한가를 물었다) 그렇게 그런 관례를 부정한 것이 합당한가?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때까지 그 교부들의 합의, consensus(합의)나 consuetudo(관례), 그러니까 오래된 관례가 실제적으로 너희들에 의해서 무너뜨려지고 있다. 그것이 과연 합당한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제 어른말을 들으라! 그러죠. 쉽게 말하면 어른 말을 들으라!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잘못할 수 있겠느냐? 나도 같은 성경을 읽었고, 그 뿌리 위에서 이 만큼 목회를 했는데, 내가 왜 틀릴 수 있겠느냐? 네가 틀린 거로 보아서, 네가 지금 나하고 다른 것으로 보아서 네가 틀렸다. consensus(합의) 그런데에 칼빈이 어떻게 비난하지요? 이 부분은? 쉽게 말해 이렇게 표현해요.


넷째 물론 다른 것도 다 각각 조문을 매기지만 이렇게 해요. “우리는 결코 고대 교부를 멸시한 일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 부분의 교부들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그들이 지금! 스콜라 지금! 스콜라주의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소피스트라고 해요. ”그들이 교부들의 훌륭한 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설명하거나, 혹은 왜곡시켜”, 아주 아주 치명타를 날려요. “황금에서 쓰레기를 모으고 있다”. 같은 책인데, 같은 책인데, 저기 구석에서, 쓰레기에서 쓰레기를 계속 그렇게 모아가지고 그것을 관례이다. consensus(합의)이다. 그런다는 거예요. 황금은 다 제체 놓고! 쓰레기를 모아놓고 이것이 consuetudo(관례)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관례이다 이것이 consensus(합의)이다. 교부들의 consensus(합의)이다. 동시에 지혜와 판단과 정신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함과 오류들만 모아가지고 숭배한다는 거예요. 오히려 교부들이 나는 이것이 오류라고, 뒤에서 누가 이것은 틀렸다. 이런 내용들을 그냥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내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그가 “교부들의 훌륭한 가르침과 정반대로 지키고 있는 내용들을” 아주 싹 열거해요. 무엇이 지금 교부들하고 다른가!


그 다음에 관습에 호소하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칼빈은 똑! 딱! 이예요, 내용이! 그래서 “아무리 다수가 인정하더라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영원한 진리만이 청종되고 준수되어야 한다.” 여기서 칼빈이 말은 그 말씀의 자리예요. 아무리 다수가 인정하더라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무엇만 청종되고 준수되어야 한다고요. 영원한 진리만이 청종되고 준수되어야 한다. “그 진리는 세월이 많이 지났다고 해서, 혹은 관습이 오래 되었다고 해서, 혹은 인간의 음모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벌하신다. 그래서 그런 악한 관습은 일종의 전염병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핵심을 아주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어요. 이게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까 같은 거룩한 교부들의 합의와 가장 오래된 관례를 부정하는 것이 합당한가? 해서 비난하는 것의 하나의 중요한 예라는 말이예요.


그 다음에 다섯째로 무엇이냐면 그들은 우리가 교회에 대항해서 싸움을 거는 분파주의자들이거나 그동안 그렇게 들어보지 못했던 수세기 동안 교회가 죽어있었다고 우리가 고백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분파주의자들이다. 싸움을 거는 분파주의자들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수 세기 동안에 교회가 죽어있다고 우리가 고백하도록 강요하면 되겠냐! 왜냐하면 네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전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니까? 수세기 동안 교회가 죽었다고 하는 말이 아니예요. 그래서 우리가 죽었다. 우리가 죽었다고 지금 고백하도록 한다는 것예요. 그것을 기대한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여섯째로는 “그것이 어떠한지는 그렇게 많은 분파들과 그렇게 많은 분쟁과 소란들이 있는 것 자체로서 더 이상 논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많은 범죄들, 무 질서를 낳는 그 열매들로부터 판단되기 때문이다”(여섯째로 그것이 어떠한지는 그렇게 많은 분파들과 그렇게 많은 분쟁의 소란들, 즉 그렇게 많은 범죄들의 무질서를 낳은 그 열매들로부터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많은 논증들을 할 필요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벌써 너는 소란을 피우고, 혼돈을 가져오고, 무질서하고, 범죄 무리와 같이 섞여서, 지금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열매다. 너 자신의 열매다. 이렇게 비난하는 것이예요. 이게 참 어려운 그런 내용이죠. 특별히 이제 이 여섯째 비판과 관련해서 아까 우리가 지적했지요. “사탄과 인간의 모든 훼방도 하나님의 섭리 자체의 힘으로 보존한다.” 이때 사탄과 인간의 모든 훼방이라 했을 때, 거기에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과 온 세상으로 더불어 그것을 억압하기도 하고 파괴하고 전적으로 말살시키고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소멸시키려고 노력해왔다. 이런 소위, 그 자신의 그 기독교 강요 본문의 내용에, 어떤 내용들, 영적인 안목! 그러니까 많은 글들이 있지만, 지금까지 여기까지 논증이 있지만, 그들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묘사,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그 전체적인,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지금 어떤 분위기 속에서 그것이 발견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여기에 지금 사탄과 관련된 인간의 모든 훼방의 어떤 직관, 어떤 실제적인 내용,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저항의 내용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는 그것만 듣겠다. 나는 그것만 경청하겠다. 나는 그것만 준수하겠다. 그랬는데, 여기에 그러면, 그렇게 하면 왜 그렇게 해도 되는가? 했을 때 그 말씀은 하나님만 주인이고 하나님이 저자고, 하나님이 그 말씀을 지킨다.


그래서 그 자체의 힘으로 자기의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한다. 이렇게 지금 논증이 되고 있거든요. 그때 여기 지금, 여섯째와 관련해서 표현하기를 여섯째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하면 사탄도 반드시 활동한다는 것이다. 사탄이 오랫동안 빈둥거리면서 깊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고 어느 정도 그의 흑암을 쫓아냈었을 때” 그런 어느 정도 그의 흑암을 쫓아 낸 순간에, 이제 겨우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기를 들기 시작했는데” 그 무기가 무엇이냐? 했을 때는 2가지이다. “첫째는, 동터오는 진리를 폭력으로 눌러버리는 일” 그렇게 한 번 해본다는 거예요. 대 부분 사람들이 하는 방식이 이 방식이죠. 올라오는 뿌리를 그냥 비벼 버려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거예요. 올라오는 뿌리를 미리 그냥 비벼버린다고요. 그러면 아예 근절되기 때문에, 이것이 사단이 하는 방식 이예요. 그때 갓 올라오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 폭력으로!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까 말한대로, 서문에 표현되어 있잖아요. 여기 직접적으로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Jean Morin의 지휘 아래 한 배도자에 의해서 가리켜지는 집마다 공포의 살육이 일어나게 되었다. 명목은 배도자이다. 이때 그 실제적인 내용이 그런 것이었다는 거예요. 그 자체만 그가 지각을 했으면 모르는데, 그것이 갖는 성격은 그 자체에 하나의 그 위협이고 가시에 불과하다는 그걸로 초점을 맞추어요.


실제 더 큰 성격자체, 우리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것은 다른 형태이다. 이것이 칼빈이 영적 안목으로 딱 감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을 해요. 두 가지 무기 중에서 하나는 아주 그! 예리한! 객관적이지요. 아주 내용이 큰 형태이지요. 동터오는 진리를 폭력으로 눌러버리는 일하고, 그 다음에는 “재세례파라 불리는 괴상한 악한들을 동원하여 불일치와 교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진리를 희석시키고 마침내 말살하는 것이다”. 이게 두 번째 무기이다. 불일치, 그 다음에 교리적 논쟁, 문제가 문제로만 남게 하는 일만 한다. 이 말 이예요, 그러면 장기간 보면 큰 무기라는 말이예요. 문제가 문제로만 남는다. 문제를 계속 논쟁을 하다 보면 해결이 없잖아요. 그것이 방법이다. 문제만 문제로만 남는 것이다. 계속 문제만 묻고 해결이 안 되고, 계속 문제만 답은 없다. 답은 네가 알아서 해라. 불일치와 교리적 논쟁을 일으키고 진리를 희석시키고 마침내 말살하는 것, 그래서 여기 말은 “그런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진리를 줄기차게 포위하는 그 두가지 방법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되는 것이다. 폭동이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분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능력에 대항하는 일이요. 성령의 자유를 육신의 방종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로서, 사탄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진리가 폭력으로 눌러버리는 일은 본색이 드러내는 형태는 아니고, 본색은 실제적으로 성령의 자유를 육신의 방종으로 전락시키는 행위, 이런 행위의 표면적 행태 이런 것이, 이제 사탄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그런 형상이라는 말이다. “복음을 핑계로 소요를 일으킨다면 자기들의 죄에 상응하는 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이 모욕당하지 않게 되어야 할 것이 제안이 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하나님 말씀이 갖는 성격이죠. 그래서 교회의 지표는 무엇인가? 교회의 지표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잘 전달되고, 정확하게 해석되고 잘 전달되고, 그 다음에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은 교회의 지표가 아니다. 그게 교회의 지표와 관련하여 굉장히 중요해요. nota(표지) 여기에서 nota(표지)가 나온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그래서 강한 마음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전달하는 목회자들의 말은 하나님 자신에게 듣는 것처럼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회는 교회에게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리이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추방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을 목자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도둑 하는, 도둑의 이리처럼, 도둑 하는 이리처럼, 사냥되고 추방이 되어야 한다.” 이게 칼빈의 말이예요. 굉장히 강하죠. 이래서 권징의, 어떤 치리회, 당회, 이런 것이 강조되요. 이런 면에서 이제 장로교회의 정치의 어떤 배경, 이런 배경이 하나님 말씀과 이렇게 밀접히 연결되어서, 우리가 이제 당회가 있고, 그 다음에 노회가 있고, 총회가 있는 것이다. 이런 발전 내용, 그래서 근원적으로 이와 같은 형태에 있어서, 이제 칼빈이 그런 개혁의 구체적인 성격을 이렇게 언급을 하게 되는데, 물론 거기에 1536년판에 구체적으로 그들의 표현을 비판할 때, 여기에 교회의 열쇠권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근본적인 비판이 있고, 그 다음에 성례의 필수적 과정으로서 마음의 통회, 입의 고백, 행위의 속죄를 요구하는 고해에 대한 비판, 그 다음에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에 대한, 인간에 대한 칼빈의 이해와 그와 상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인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런 상관관계가 처음부터 굉장히 중요한 이슈로 등장해서 논리적으로 이렇게 발전된다. 물론 초기 기독교 강요 초판에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지식과 그의 전 신학적 체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인데 그러나 우리가 이제 이렇게 판단될 수 있어요. 이렇게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데.


그래서 여기 이제 칼빈의 첫, 그런 실제적인 비판 작업 내에서 이렇게 발견되고 있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의 지식에 대한 내용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되면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그런 초기 모습이다. 초기 모습을 이렇게 표현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1559년 판에 가면 그런 내용들이 약간의 다른 내용들이 뭐 교부들의 증거들 이런 많은 증거들이 이렇게 같이 부가적으로 첨가되므로 그런 본 줄기의 맥락들이 이렇게 흐려져 버린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본줄기를 찾아내는 작업이라는 것은 1559년 판에서 늘 reading하면 핵심을 다 잃어버린다. 이 본 어떤, 그 풀이되고 있는 이 맥락들, 이 맥락들을 정확하게 규명해 보면 이런 형태라는 말이예요. ‘그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전 신학적 체계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쉽게 판단할 수 있는데 그에게 처음 가장 뚜렷한 사상은 “인간의 공로사상에 대한 강한 비판이다.” 즉 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털클 마치라도 행위에 공로를 돌린다면 그는 성경 전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요,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자다.”


여러분들 논문 가운데서 이제 공로사상에 대한 비판 이렇게 했을 때, 어떤 것이 핵심인가? 이런 것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이런 맥락이 가장 근원적인 것을 보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많은 증거들을 모아가야 되요. 그래서 성화와 공로사상의 관계, 이런 관계를 논제로 쓸 때, 이렇게 논제로 주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다 하는데, 여러분들이 논제를 주어서 제목을 주면, 참! 오늘도 여기를 보면, 학생들에게 논제를 주면, 다른 교수들이 다 가져가가지고, 참 문제가 심각한데, 아! 예의도 없고, ‘칼빈의 입장에서 루이스 벌코프의 신구약 통일성에 대한 연구’, ‘크리소스토무스의 신구약의 통일성에 관한 이해’, ‘신구약의 통일성에 근거한 율법의 바른 이해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고찰’, ‘토마스카트라이트의 교회정치’, ‘정통삼위일체 구조에서 본 힝스텐베르그의 기독론비판’, 이런 내용들이 어떻게 그렇게, 다른 교수들에게 전부 들어가는지! 여러분들이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잖아요. 원래 어느 대학이든지, Th.M이나 이런 석사학위든지, 적어도 교수가 논문 제목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에 의해서 교수의 공헌으로 돌려서 같은 이름으로 나가든지, 또는 그 결과들을 지도교수가 발표하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는지, 상식 밖의 일이거든요. 어떠든 간에 여러분들이 그것은 제가 머물고 있는 이상 감수할 수 밖에 없는데, 지금 여기에, 그동안도 논문제목 가운데서 ‘성화와 공로사상의 관계’, 칼빈에게 있어서 공로 사상에 대한 비판 이렇게 했을 때, 그 핵심 사상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주 정확하게 전체 구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을 먼저 받아야 된다.


그 다음에 그 내용이 전체적으로 이제 칼빈에게 있어서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되고, 이렇게 규명이 되고 있는지를 이제 이렇게 여러분들이 단원, ( ? ) 약간의 논증했을 때, 소제들을 늘 이렇게 논증적으로 해 가지고 그것을 탁 펴내야 된다. 논문이 딱 나와야 한다. 나는 이런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을 어떻게 딱 알고 논문지도를 해요. 그것이 이런 것이 정확하게 규명이 되고, 논증이 되고, 어떻게 들어나는 것을 볼 때까지 쉬지 않고 논문지도 하는 것예요. 계속 재촉하는 거예요. 이것을 더 읽어라. 더 읽어라. 지금 너 이것을 잘못 읽었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잘 안 나와요. 그래도, 답은 알고 있는데, 잘 안 나와요, 대게 이런 어떤 연구 리서치에서 기본적인 어떤 방식으로 해야 될 것인가? 에 대한 그런 어떤 기본적인 틀이랄까, 어떤 소스, 아이디어, 기본적으로 전체 틀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잘 안 나오니까? 그러지요. 그런데 첫째 여러분들에게 그것이 어렵잖아요. 그것을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교수가 그때는 할 수 없이 주는 거거든요. 그러면 주어서 이런 의미에서 논문을 써라! 그래서 거기에 밝혀질 때까지 계속 연구하라! 이렇게 한다고요. 인문과학적 방법이지요. 자연과학적인 방법은 이런 데이터가 나왔는데, 이 데이터의 실험관계가 나오도록 어떤 기간을 줄떼이니, 그때까지 계속하라. 이런 것과 똑 같아요. 분명히 결과로 나오면 되요.


3. 그때 여기 중요한 표현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털클 만치라도 행위에 공로로 돌린다면 그는 성경전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요.” 아주 전체적인 것이예요. 털끌마치 행위로 공로를 돌린다면 성경전체를 왜곡시키고, 그러면 성경 전체가 어떻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털끌 만치라도 행위로 공로를 돌리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또 성경 전체를 변질시키는가? 그렇게 돌리면 변질시키는가? 또 공로라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논증이 실제적 내용으로 이제 각 항들에게 있는 거죠. 이게 이런 중요한 내용이 있어요. 칼빈의 이해에 있어서,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의라고 불리 우는 것으로써, 그런데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은혜로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의에 이르게 하신다는 그런 의미로 해석했다.” 이미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의에 이르게 하신다. 이런 거요. 이게 제3사용의 중요한 포인트예요. 그러니까 의롭다 하시는 자기 백성은 이미 어디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에 의해서, 전가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미 그 전가에 의해서 의로움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요. 그러면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무엇인가? 제3사용이다. 그러니까 중생된 이후에 진정한 의미에서 의의 도, 거룩하고, 흠 없이 또는 거룩하고, 경건하게 사는 규범으로서, 이제 율법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때 율법을 그렇게 정의가 됐을 때는 루터하고 다른 점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중생 된 이후에게도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의 법, 신령한 하나님의 법으로써 기능 한다. 이 말이요.


중생 이 후에도! 쉽게 말해서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때문에 죽으셨다면, 율법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더! 그 백성에게는 의미가 크다. 이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율법의 완성이 되고, 그 분이 율법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버릴 것이 아니고 더 의미가 커졌다. 어떤 의미에서 의미가 커졌냐 하면, 중생 된 이후에 여전히 그 법은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법으로써 규정이 된다. 그때 그 법의 기능을 하는데, 법의 기능은 그러면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해서 여기 있는 데로, 이미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 이미 의롭다 하신 그건 은 칭의 이다. 이 말 이예요.? 의롭게 된 자를, 그러면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러면 연단이다. 연단!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제3기능. 율법의 3기능. 율법을 지키는 것은 연단이다. 연단! 아직 죄인으로 남아있다. 중생 이후에도 그래서 율법을 지킴으로, 늘! 그래서 도덕법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율법을 거의 대부분은 도덕법이라 한다. 폐기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법!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된 내용으로 된 것은 의식법이라 해요. 의식법만 폐기되었을 뿐이지, 나머지 모든 것은 도덕법이다. 제3사용으로 여전히 있다, 제2사용! 믿지 않는 자에게든, 믿는 자에게든 다 타당한!, 중생되기 전의 그런 법으로서의 독특한 기능들, 뭐 죄를 깨닫게 한다든지, 또는 공공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의 외적인 어떤 위협수단으로서의 그 율법이 탁! 거기에 있으므로, 아무리 유기자들, 하나님을 외면하고 고의적으로 이렇게 반항하려고 하는 자들, 그런 자들을 강제로 끌어가게 하는 그런 기능이 있다는 말 이예요. 율법 자체가! 그런 기능 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율법은 중생 된 이후에 있어서 가장 기발한 역할을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그런 양식으로써의 율법! 도덕법! 그래서 여기 의롭다하신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의에 이르게 한다는 그런 의미로 해석해야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계명들을 지키라는 것은 왜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는 가? 중생 된 이후에도 지키라고 하는가? 그것을 해석할 때 잘 해석해야 한다. 원초적인 이런 해석을 칼빈에게서 찾지 못하고. 맨 날 딴 데서 찾거든요.


또 “성경에서 자주 각 사람에게 행하신 대로 갚으시겠다는 표현이 있다면”, 상급을 준다든지? 갚으시겠다는, 그 행한 대로 갚으시겠다는 표현이 수 없이 있잖아요. 그것에 놀라요. 사람들이! 아 중생 이후에도 여전히 마치 행위를 요구하는 것처럼, 이렇게 부딪힌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율법을 보니까 또 뭐요. 그 행한대로 갚으시겠다는 표현이 되어 있으면? 그걸 어떻게? 그러면 어떤 은혜의 법과 행위의 법으로 나누어 가지고 버릴 것인가? 그렇게 해석하기 쉽다는 말 이예요.


그때 이제 칼빈은 말하기를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으신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 표현은 우리 행위가 그런 보상의 원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분명히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행위가 보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표현한 것처럼, 그 은사에 대한 ,이미 받은 은사에 대한 상이다. 행위에 대한 상, 은사에 대한 상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행이 그런 상급을 가져다주는 공로가 되는 것처럼, 이런 종류의 약속을 통해 우리 행위의 가치를 성령이 인정하려 하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펠라기우스 있죠? 인정하려 한다. 보충하려 한다. 지원하려 한다. 이런 펠라기우스를 칼빈은 분명히 거절하죠. 그래서 보상의 소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올바르게 사는 데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도 뭐라고 잘못되었다. 여러분들 그렇게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 이예요. 율법의 기능을 이렇게 할 때, 보상의 소망이 거기에 제시가 안 된다면, 그 보상이라는 것, 약간의 먹이처럼, 먹이처럼 달아놔야, 그것 있으면 올바르게, 최소한도로 살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율법의 기능이다 이렇게 해서도 안 된다 이거예요.


또 아까 말한 대로 보상의 논리! 이렇게 행함으로 하나님은 상을 준다. 그렇게 했을 때, 그런 내용이 마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칼빈의 original입니다. 보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칼빈에 대해서 모르고, 우리가 개혁교회의 가장 뿌리가 되는 이런 신학적인 내용들을 모르고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겁니다. “이런 강한 입장은 중생 된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을 걸어가는 자에게 경고하는 칼빈의 말이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그래서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결 이란 그 자체가 인도하는 길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되는 길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자체가 인도하는 길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화라는 것은 구원의 서정이란 그 자체가 인도하는 길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택하신 된 자들을 하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길에 불과하다. 이미 택하신 자들을 그것을 통하여서 인도하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택함, 은총, 열매, 그런 하나님의 역사의 열매, 이미 정하신 그것에 대한 열매, 하나님의 구속의 성취된 내용의 열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서정이란 그 강조가 구원에 있지 않고 어디에 있다고요. 서정에 있다.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물론 그의 생각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는데, 그렇게 우리의 선행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선한 행실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생각할 때 인간의 공로를 생각할 수 없다는 거예요. 칼빈에게 있어서 선행의 찬양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나누는 그런 식이 아니라 그것 전부를 온전히 통째로 주님께 돌리는 그런 공로이다. 이렇게 했죠. 그래서 온전히 통째로 주님께 돌리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런 내용이 좀 더 쭉 있고, 그 다음에 성례와 일반 은총의 최고선의 내용이 있는데, 최고 선! 그 다음에 성례! 그런 일반은총이란! 지금 성례와 관련해서 일반은총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하는데, 일반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필요한 빵과 다른 음식을 주어 먹이시고, 태양으로 세상을 비추시며, 열로 따뜻하게 하신다는 것이요. 일반은총으로!, 그런 빵과 음식, 태양과 열이란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사실이다. 그 자체가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 칼빈에게서 특별하다. 은혜라는 말은 어떤 인격체의 속성에만 제한되고 있는 것과 같아요, 따라서 빵이나 음식 은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는 식이다. 그래야죠. 그 자체가 은혜 자체가 아니고! 빵과 음식과 태양과 열! 성례가 그런 하나의 중요한 표식인데, 그 은혜 자체가,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어떤 방식이다.


그래서 이런 원리로부터 피조물을 우리의 선의 원천이라고 선포해서는 안 된다. 최고선의 개념이든지, 여기가 연결된다. 아까 일반은총과 성례와 그 다음에 최고선의 관계라고 그랬잖아요. 이런 의미에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원리로부터 피조물을 우리 선의 원천이라고 선포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는 어떤 방식으로서의 그런 거다. 그것이 성례의 개념에도 들어있다는 거예요. 원리적으로는 결국 피조물이 우리 선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그러면 무엇이 원천인가, 선의 원천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은 선 자체가 아니므로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더 아니다. 그래서 성례전에서 성례물에 대해서 그 빵이 은혜 자체로 여길 수 없고, 성례 자체를 신뢰를 두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다 전이시켜서는 아니 된다. 이게 성례론을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성례물들은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것이 아닌, 은택을 내는 도구에 불과하고, 은혜를 내리시는 자는 하나님으로써 그 도구를 통해서 은택을 주시는 그 하나님만이 경배하고 신뢰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례에 참여하는 자에게 이 메시지를 전해야 돼요. 실제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늘 성례를 베풀면 그 빵 자체에 거룩이 있는 것처럼, 빵 자체가 은혜처럼, 이렇게 또 우리가 베풀 때 그 빵을 가지고 사용하는 자! 은혜를 베푸는 자! 나누어 주는 자가 마치 은혜를 가지고 있는 원천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워요. 그러나 그렇게 오해를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오직 그 표식은 하나의 식이고 그 자체가 은혜가 아니고, 오직 은혜를 주시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 그가 최고원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선의 개념이 나오는 것예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표현돼요. 두 지식이 이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그래서 자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은 물음에서 대답을 해요. 그 때 실천적으로 그 당시의 아주 정확한 의미인데 예 이런 의미예요. 자아와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 “참으로 우리가 모든 덕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옷을 입어야 하는 벌거숭이들이고 벌거숭이! 모든 선에 있어서 그로부터 채움을 받아야 될 뭐야 공허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자유함을 받아야 할 뭐야! 죄의 종들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조명을 받아야 될 눈 먼 자들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인도되어야 할 절름발이들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지탱을 받아야 할 연약한 자들임을 알아 오직 그 만이 뭐예요. 영화롭게 되고, 오직 그 안에서 영화롭게 되도록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 만큼 믿음에 더 좋은 적합한 일은 무엇이 있겠는가?(“참으로 우리가 모든 덕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옷을 입어야 하는 벌거숭이들이고, 모든 선에 있어서 그로부터 채움을 받아야 하는 공허한 자들이며, 우리는 그로부터 자유함을 받아야 하는 죄의 종들이며, 우리는 그로부터 조명을 받아야 될 눈 먼 자들이며, 우리는 그에게서 인도되어야 할 절름발이들이며, 우리는 그로부터 지탱함을 받아야 할 연약한 자들임을 알아, 오직 그 만이 영화롭게 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영화롭게 되도록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 만큼 믿음에 더 좋고 적합한 일은 무엇이겠는냐?) 이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런 물음에서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 우리가 죄인으로 깨닫는 신학적 인간론의 근저가 제시되고 그 지식으로부터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칼빈의 경건과 예배의 본질이 간단하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그는 인간에 대한 지식과 분리될 수 없는 최고선으로써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 것이었는데, 우리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대로,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취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취하는 것 외에 공허한 영광으로 다른 근거로 강탈당하지 아니한 것, 모든 선과 법과, 의와 지혜와 순수한 찬송과 영광은 하나님에게 있어야 한다. 이게 경배요. 그 분께 돌리는 것이다. 원래 그 분 것을 그 분께 돌라는 것, 이게 경배와 경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했을 때는 이 원리로 돌아가는 것예요. 일반은총이란 그런 의미예요. 이 원리로 돌아가는 것, 그의 것으로 돌리는 것, 자연을 탐구할 때 경배한다. 우리는 경배하기 위해서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것으로 돌리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이 결코 무시되지 않아요. 자연이!


어, 이 책에는 없어요. 아무리 뒤져봐도 없으니까, 아무튼 뭐! 여러분들이 기독교 강요, 1권, 초판 한 번 죽 읽어보십시오. 이런 문맥에서 조금 이해를 하면 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형제의 유화자로 인식되는 곳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유화된 아버지로 약속받는 것,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시되, 자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을 만큼 우리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그의 사랑에서 나오는 기쁘고 행복한 모든 것들을 그로부터 걱정 없이 기대하는 것” 그것이 보화이고 감추인 것이고, 경배의 내용이다. “그 안에 그렇게 많은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생각하는 곳에서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실한 기대 가운데 안식하는 것 보다 믿음에 더 합당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인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틀은 바로 칼빈의 대적들이 인도할 수 없는 자연의 빛과 허구적 예비들, 자유의지와 공로를 부정하지 못한 것에 대립되어 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자신 안에 그의 의와 덕 생명과 구원을 찾을 이유가 남아있지 않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그로부터 단절되고 분리된, 그 유일한 하나님 안에 그 모든 것들이 있다. 여기 죄로 인하여 단절되고 분리된, 그러나 모든 것은 그 유일한 하나님 안에 있다. 자신에 따라서는 불행과 우둔함과 죄와 죽음 마지막에는 지옥 자체만이 발견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율법에 대한 해석에 들어가기 이전에 거룩한 교리들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에 대한 지식으로 나누어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그 다음 우리에 대한 지식을 다룬다.


첫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다룰 때,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의와 선과 긍휼과 진리와 덕과 생명이시므로, 어떤 다른 지혜와 의와 선과 긍휼과 진리와 덕과 생명이 없다. 이렇게 표현해요. 그것들 중에 어느 것이 어디에 기대하든지 그로부터 온다. 단 우리의 죄책은 우리를 묶는 우리의 죄의 결과이며, 우리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행할 수도 없다. 전적 무능력이다. 참으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직책에 속한 것들을 행하려고 하거나 행할 수 없는 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서 나오는 의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하였던 것이 죄의 용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죄의 용서가 강조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죄를 인하여 긴 간격으로 그로부터 떨어졌던 우리를 하나님에게 가깝게 연결하신다. 자신의 죽음의 공로와 하나님의 공의의 우리의 빛을 탕감하였고, 죄의 형벌을 그의 몸에 담당 하시사,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그의 진노를 무마하셨다. 이렇게 땅으로 내려오실 때 하늘의 은택들의 모든 보화 즉 성령의 선물들을 가져 오셨다. 그 성령을 통해 우리는 중생되고 마귀의 권세의 사슬로부터 해방이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의 자녀들로 채택이 되고 모든 선한 행위들에 이르도록 성화된다. 역시 그를 통하여 우리가 죽을 몸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 안에 부패된 정욕들, 육체의 욕망들과 우리의 본성의 뒤섞이고 부패된 왜곡들을 낳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게 된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되고,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거닐며, 의의 새로움 가운데 살아간다. 이 모든 것들 즉 죄의 은혜로운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평과 화해 성령의 은혜의 선물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제공되고 선물되었다는 논리이다.


그 “그리스도 자신이 항상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자로서, 성부의 영원하고, 유일한 모사였기 때문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동시에 그 안에 감추셨던 대로, 그는 그렇게 성부로부터 받는다고 하였다. 즉 그런 그의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미련한 자일지라도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지혜이요,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그 자신이 우리의 의이다. 우리는 정결치 못한 자들일지라도 그 자신이 우리의 순결이다.” 성화라는 것은 그런 의미예요. “무기 없이 사탄에 맞설 정도로 우리는 약할 지라도 우리를 위하여 사탄을 부셔뜨리고, 지옥문을 파괴시키려고 하늘과 땅에서 친히 받으신 권세가 우리의 것이다. 지금까지 죽을 육체가 우리와 함께 둘려있을지라도, 그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다. 짧게 말하자면, 그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이며 우리는 그 안에 모든 것을 갖고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다”. “즉 그에 의하면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의인으로 회복되는 그 하나님의 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에 의해서 그와 더불어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게 성취와 적용이다.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 때 쓴 말이 communicatio(전가, 전달)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의가 있고 그의 모든 부요한 것들을 그와 더불어서 소유한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것에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요. 그렇게 전가 법칙에 따라 주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를 우리와 나누신다[communicatio(전가, 전달)]. 여기도 comunicatio(전가, 전달) 참여자고 의를 나누신다. 열매! “그와 같이 후에도 커다란 발전없이 초판에서부터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의 서정이란 남아있는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의 전적인 전가에 불과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효과적인 적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그렇게 그리스도의 피는 신자의 죄에 대한 유일한 만족이며, 속죄이며, 순결이라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넓게 최고선으로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선한 뜻과 생명 구원 짧게 하나님 나라 자체를 찾는 고로”, 하나님 나라 자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요. “우리는 더욱 더 오직 그 자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하였고, “저분이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과 선에 유익할 수 있는 전혀 거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 확실한 믿음으로 그 안에 머물기만 하다면, 그 안에 우리가 안식한다면, 그 안에 구원과 생명, 참으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우리가 쌓아두면, 그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을 확실히 우리가 기대한다면,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그! “우리 때문에” 당하신 그런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역사도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 때문에 라고 표현을 할 때도 첫째로 마귀의 복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둘째로 죄의 멍에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셋째로 육체와 영혼의 죽음의 노예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넷째로 영원한 형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이런 형태로 정리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구속자, 우리의 구속이다. 우리의 생명, 의 자체” 이렇게 그 표현이 되어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구속사역은 우리의 불안정한 종점인 그 죽음이 그러나 축복의 시작이 되었다는 이해를 거기에 돋보이고 했고, “승천과 함께 그의 성부와 더불어 계신 것은 우리의 큰 선을 위한 것으로 첫째로 그는 우리로 하여금 성부에게 접근케 하고, 둘째는 길을 닦으며, 셋째로 우리를 성부에게 드리고, 넷째로 우리를 위해서 그로부터 은혜를 구하며, 다섯째,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변자와 중보자로서 그에게 간구하고, 여섯째로 우리의 범죄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리시며 일곱째로 끊임없이 성부와 화해시킨다. 이게 승천 이후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바빙크의 “하나님의 큰 일”에 있어서 지상에서의 사역, 또 하늘나라에서의 사역, 그 두 구분을 통해서 표현된 이런 원초적인 근거의 내용들은, 이와 같이 칼빈의 아주 세밀한 이런 용어와 또 구조, 이런 내용들이 이렇게 점진적으로 발전이 된 것에 불과한 것이죠. 이런 것이 실제적으로 종교개혁의 유산이겠고, 지금 우리에게 복잡하게 엮어진 내용이다. 그러니까 엮어진 내용의 원초적인 뿌리와 배경, 분위기, 어떤 내용으로 그것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지를 이렇게 발견하는 이런 의미에서의 칼빈의 의미가 크죠. 그러니까 지금 기독교 강요를 읽기 전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모든 글들이 모아져야 하고, 그 다음에 제 자리를 찾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독교 강요를 다 읽지 않았아도, 기독교 강요를 어떻게 전체 구조의 어떤 시대적 상황에 덜렁 던져졌는지를, 그 어떤! 기독교 강요를 읽기 전에 이런 마음으로 읽을 것에 대한 그 핵심적인 내용을 충분히 여러분에게 전달된 것이나 마찬가지이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진리의 내용으로 초점을 맞추어서 가까이 오시고, 이런 메시지로 늘 자연과 역사의 그 모든 내용과 또 우리 안에서 늘 찾아오시므로, 늘 감사와 영광을 주님게 돌리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이 언제든지 출발이며, 또 그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내용이 드러나는 장소가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꽃을 피는 하나의 시작의 내용으로 늘 우리의 생을 통해서 매 순간! 순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우리의 생의 어떤 여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에게 이런 길을 허락해 주셔서, 어떤 형태로도, 이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그 생을 소멸시키거나 훼파하거나 또는 방해하지 못하는 그런 건전하고 곧은 한 생이 거기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옵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옵나이다.



출처: 개혁주의성경연구소 FB 페이지